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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모도어 베이직 v2.0 시작 화면 베이직(1979년) 초심자용 다목적 기호명령부호 (), 약자 베이직 (BASIC은 프로그래밍 언어의 하나이다. 절차형 언어로 1964년 다트머스 대학교의 존 케메니(John Kemeny)와 토머스 커츠(Thomas Kurtz)가 개발했다. 교육용으로 개발되어 언어의 문법이 쉬우며, 다트머스의 최초 제품 이래로 인터프리터 방식이 많았으나 최근에는 컴파일러 방식도 많다. 현재는 다양한 종류의 베이직이 존재하며 서로 문법도 많이 차이가 난다. 서로 다른 종류 사이의 소스 코드는 호환되지 않는다. 제작사 제품명 해석 방식 플랫폼 설명 마이크로소프트 마이크로소프트 베이직 인터프리터 마이크로소프트 코모도어 베이직(Commodore BASIC) 인터프리터 마이크로소프트 애플소프트 베이직 인터프리터 마이크로소프트 MSX 베이직(MSX BASIC) 인터프리터 마이크로소프트 GW-BASIC 인터프리터 dos MS-DOS의 번들 마이크로소프트 퀵베이직(Quick BASIC) 인터프리터, 컴파일러 dos 컴파일러 방식 제공 마이크로소프트 큐베이직(QBasic) 인터프리터 dos MS-DOS에 번들 마이크로소프트 비주얼 베이직(Visual BASIC) 인터프리터,컴파일러 Win3.1 Win98, WinXP 자체버전 6.0까지 지원하고 중단됨 닷넷으로 출시됨 마이크로소프트 비주얼 베이직 닷넷(Visual Basic .NET) 인터프리터,컴파일러 WinXP, Win Vista, Win7 비주얼스튜디오닷넷에 포함되어 출시됨 볼랜드 터보 베이직(Turbo-BASIC) 인터프리터,컴파일러 DOS 리얼 소프트웨어 리얼 베이직(REALBasic) 인터프리터,컴파일러 WinXP, MacOS 트루베이직 트루 베이직 최초 베이직 개발자인 존 케머니와 토마스 커츠 교수 개발 다크 베이직(DarkBASIC) 퓨처 베이직(FutureBASIC) 프리 베이직(FreeBASIC) 삼성소프트 한글 베이직 qb64 Windows7, Linux, Mac OSX QB4.5와 100%호환 데이터 조작 LET DATA 프로그램 제어 흐름 IF ... THEN ... {ELSE} FOR ... TO ... {STEP} ... NEXT WHILE ... WEND 및 REPEAT ... UNTIL DO ... LOOP {WHILE} 또는 {UNTIL} GOTO GOSUB ON ... GOTO/GOSUB DEF FN 입출력 LIST PRINT INPUT TAB 또는 AT 함수 목록 ABS ATN COS EXP INT LOG RND SIN SQR TAN 기타 REM USR TRON TROFF ASM 아래 예는 모든 ANSI/ISO 호환 베이직과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 마이크로 컴퓨터에 설치된 대부분의 베이직에서 동작한다. 10 PRINT "Hello, world!" 20 END 이러한 기종에 설치된 베이직은 줄번호가 생략된 즉각 모드로 실행할 수도 있다. 다음 예를 실행할 때에는 RUN 명령어가 필요없다. PRINT "Hello, world!" ? "Hello, world!" 이후의 베이직은 구조화 프로그래밍을 지원하며 코드에서 줄번호가 사라졌다. 다음 예는 현대적인 베이직의 거의 대부분에서 RUN 명령으로 실행할 수 있다. PRINT "Hello, world!" END 많은 베이직에서 End 선언문은 빼도 된다. 10 INPUT "이름을 입력하세요"; A$ 20 PRINT "안녕하세요 "; A$ 30 INPUT "별이 몇 개 필요하세요?"; S 40 FOR I = 1 TO S 50 S$ = S$ + "*" 55 NEXT I 60 PRINT S$ 70 INPUT "별이 더 필요하세요?"; Q$ 80 IF LEN(Q$) = 0 GOTO 70 90 L$ = LEFT$(Q$, 1) 100 IF (L$ "y") THEN GOTO 30 110 PRINT "안녕히 가세요"; 120 FOR I = 1 TO 200 130 PRINT A$; " "; 140 NEXT I 150 PRINT INPUT "이름을 입력하세요."; UserName$ PRINT "안녕하세요."; UserName$ DO INPUT "별이 몇 개 필요하세요? "; NumStars Stars$ = "" Stars$ = REPEAT$("*", NumStars) "" LOOP WHILE UCASE$(LEFT$(Answer$, 1)) = "Y" PRINT "안녕히 가세요."; FOR A = 1 TO 200 PRINT UserName$; " "; NEXT A PRINT Class stars Sub Main() Dim UserName, Answer, stars As String UserName$, Answer$, stars$ may be used as well. Dim NumStars, I As Integer Console.Write("What is your name ") UserName = Console.ReadLine() Console.WriteLine("Hello {0}", UserName) Do Console.Write("How many stars do you want ") NumStars = CInt(Console.ReadLine()) stars = New String("*", NumStars) Console.WriteLine(stars) Do Console.Write("Do you want more stars? ") Answer = Console.ReadLine() Loop Until Answer "" Answer = Answer.Substring(0, 1) Loop While Answer.ToUpper() = "Y" Console.WriteLine("Goodbye {0}", UserName) End Sub End Class 분류:베이직 프로그래밍 언어 계열 분류:다트머스 대학교 분류:미국의 발명품 분류:1964년 개발된 프로그래밍 언어
인터프리터 (는 프로그래밍 언어의 소스 코드를 바로 실행하는 컴퓨터 프로그램 또는 환경을 말한다. 원시 코드를 기계어로 번역하는 컴파일러와 대비된다. 인터프리터는 다음의 과정 가운데 적어도 한 가지 기능을 가진 프로그램이다. # 소스 코드를 직접 실행한다. # 소스 코드를 효율적인 다른 중간 코드로 변환하고, 변환한 것을 바로 실행한다 # 인터프리터 시스템의 일부인 컴파일러가 만든, 미리 컴파일된 저장 코드의 실행을 호출한다. 인터프리터는 고급 언어로 작성된 원시코드 명령어들을 한번에 한 줄씩 읽어들여서 실행하는 프로그램이다. 고급언어로 작성된 프로그램들을 실행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프로그램을 컴파일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프로그램을 인터프리터에 통과시키는 방법이다. 인터프리터는 고급 명령어들을 중간 형태로 번역한 다음, 그것을 실행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컴파일러는 고급 명령어들을 직접 기계어로 번역한다. 컴파일된 프로그램들은 일반적으로 인터프리터를 이용해 실행시키는 것보다 더 빠르게 실행된다. 그러나 인터프리터의 장점은 기계어 명령어들이 만들어지는 컴파일 단계를 거칠 필요가 없다는데 있다. 컴파일 과정은 만약 원시 프로그램의 크기가 크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 있다. 이와는 달리 인터프리터는 고급 프로그램을 즉시 실행시킬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인터프리터는 종종 프로그램의 개발단계에서 사용되는데, 그것은 프로그래머가 한번에 적은 양의 내용을 추가하고 그것을 빠르게 테스트 해보길 원하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인터프리터를 이용하면 프로그래밍을 대화식으로 할 수 있기 때문에, 학생들의 교육용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많다. 인터프리터와 컴파일러는 둘 다 대부분의 고급언어에 적용이 가능하지만 BASIC 이나 LISP과 같은 일부 언어들은 개발 당시에는 특별히 인터프리터에 의해서만 실행되도록 설계되었다. 그 외에도 포스트스크립트과 같은 페이지 기술 언어 들도 인터프리터를 사용한다. 모든 포스트스크립트 프린터는 포스트스크립트 명령문을 실행할 수 있도록 인터프리터가 내장되어 있다. 최초의 인터프리트 방식의 고급 언어는 리스프였다. 리스프는 1958년 스티브 러셀이 IBM 704 컴퓨터에 최초로 구현하였다. 러셀은 존 매카시의 논문을 읽고 리스프의 eval 함수가 기계어로 구현될 수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이는 맥캐시를 놀라게 했다. 작업 중인 리스프 인터프리터가 그 결과 만들어졌으며 리스프 프로그램의 실행, 더 정확히 말해, "리스프 식의 평가"에 사용될 수 있었다. IBM Card Interpreters page at Columbia University Theoretical Foundations For Practical Totally Functional Programming (Chapter 7 especially) Doctoral dissertation tackling the problem of formalising what is an interpreter Short animation explaining the key conceptual difference between interpreters and compilers 분류:프로그래밍 언어 구현
‘글라이더’ 패턴의 진행. 라이프 게임 () 또는 생명 게임 은 영국의 수학자 존 호턴 콘웨이가 고안해낸 세포 자동자의 일종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세포 자동자 가운데 하나이다. 미국의 과학 잡지 사이언티픽 어메리칸 1970년 10월호 중 마틴 가드너의 칼럼 〈Mathematical Games(수학 게임)〉란을 통해 처음으로 대중들에게 소개되어 단순한 규칙 몇가지로 복잡한 패턴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많은 관심과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라이프 게임은 컴퓨터 과학에서도 의미가 있는데, 왜냐하면 라이프 게임이 범용 튜링 기계와 동등한 계산능력을 가진 세포 자동자이기 때문이다. 즉, 어떤 알고리즘에 의해 계산될 수 있는 것이라면 모두 이를 이용하여 계산할 수 있다. 이 ‘게임’은 사실 게임을 하는 사람이 자신의 의지로 게임의 진행을 결정하는 일반적인 게임과는 약간 많이 다르다. 라이프 게임의 진행은 처음 입력된 초기값만으로 완전히 결정된다. 라이프 게임은 무한히 많은 사각형(혹은 ‘세포’)으로 이루어진 격자 위에서 돌아간다. 각각의 세포 주위에는 인접해 있는 여덟 개의 ‘이웃 세포’가 있으며, 또 각 세포는 ‘죽어’ 있거나 ‘살아’ 있는 두가지 상태 중 한가지 상태를 갖는다(‘켜져’ 있거나 ‘꺼져’ 있다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격자를 이루는 세포의 상태는 연속적이 아니라 이산적으로 변화한다. 즉, 현재 세대의 세포들 전체의 상태가 다음 세대의 세포 전체의 상태를 결정한다. 각각의 세포가 다음 세대에서 갖는 상태는 현재 자신의 상태와 이웃하는 여덟 개의 세포들 중 몇 개가 살아있는 상태인지만을 따져서 결정된다. 존 호턴 콘웨이의 규칙들이다. 죽은 세포의 이웃 중 정확히 세 개가 살아 있으면 그 세포는 살아난다(‘태어난다’). 살아 있는 세포의 이웃 중에 두 개나 세 개가 살아 있으면, 그 세포는 계속 살아 있는 상태를 유지하고, 이외에는 ‘외로워서’, 또는 ‘숨이 막혀서’ 죽어버린다. 존 호턴 콘웨이는 규칙을 다음의 기준에 따라 설정하였다. 폭발적인 성장이 있어서는 안된다. (아래의 라이프 게임의 변종 중 대부분은 이를 만족하지 않는다.) 예측할 수 없고 혼돈스러운 패턴. 규칙은 최대한 간단해야 한다. 존 폰 노이만의 세포 자동자을 기반으로 하여야 한다. 라이프 게임에는 전혀 변화가 없는 고정된 패턴(정물 靜物, still life), 일정한 행동을 주기적으로 반복하는 패턴(진동자, oscillator — 정물은 주기가 한 세대인 진동자라고 한다.), 한쪽 방향으로 계속 전진하는 패턴(우주선, spaceship) 등 여러 패턴이 존재한다. 아래에 간단한 예가 있다. 살아 있는 셀은 검은 색으로, 죽어 있는 셀은 흰색으로 표현했다. of life block.png of life boat.png of life blinker.png of life toad.png of life glider.png of life lwss.png block 배(boat) 깜빡이(blinker) 두꺼비(toad) 글라이더(glider) LWSS ‘block’과 ‘boat’는 정물이고, ‘blinker’와 ‘toad’는 진동자, 그리고 ‘글라이더(glider)’와 ‘경량급 우주선(lightweight spaceship — LWSS)’은 우주선에 속한다. 그리고 무한히 이을 수 있는 패턴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배(boat)는 무한정 이을 수 있다. 진동자 또는 정물로 수렴하기까지 많은 세대가 필요한 패턴도 있는데, ‘methuselah(므두셀라)’라고 불린다. 고대 로마에서 유래된 펜토미노 퍼즐의 모양 중 R-펜토미노(R-Pentomino)는 세포는 5개이지만 1130세대가 지나서야 안정화된다. (이는 6개 미만 세포 패턴 중 가장 활동적인 패턴이다.) ‘다이하드(diehard)’는 130세대가 지나서야 사라진다. ‘도토리(acorn)’는 5206세대가 지나서야 13개의 글라이더(glider)와 수많은 진동자 또는 정물을 남기고 안정화된다. 지금까지 발견된 패턴 중 진동자 또는 정물로 수렴하기까지 가장 많은 세대를 거친 패턴은 리드카(Lidka)로, 무려 29,055 세대가 지나야 안정화된다. of life diehard.png of life methuselah.png diehard acorn 라이프 게임이 처음 소개된 〈Mathematical Games〉에서, 콘웨이는 세포 수가 무한히 많아지는 패턴을 찾은 사람에게 상금을 걸었다. 해커 빌 가스퍼(Bill Gosper)가 1970년 11월에 처음 그러한 패턴들을 찾아 상금을 탔다. 패턴들 가운데에는 ‘글라이더’나 ‘우주선’을 발사하는 ‘총’과 안정화한 패턴들을 꼬리에 남기며 전진하는 ‘기관차’, 그리고 양쪽을 다 행하는 ‘갈퀴’ 패턴이 있었다. 그는 또한 제곱 비례로 성장하는 패턴인 ‘사육사’ 패턴도 찾아냈는데, 이것은 ‘총’ 패턴을 꼬리에 남기며 앞으로 전진한다. 이 후로 글라이더를 이용한 논리 게이트, 가산기, 소수 발생기와 라이프 게임을 더 큰 스케일과 느린 속도로 모방하는 단위 세포 등 다양한 패턴들이 만들어졌다. 맨 처음 발견된 ‘총’이 여전히 알려진 가장 작은 총이다 center 가스퍼의 글라이더 건 무한히 성장하는 더 단순한 패턴들이 그 후에도 발견되었다. 아래의 세 패턴은 모두 무한히 성장한다. 처음 것은 10개의 살아있는 세포만을 가지며 이보다 적은 세포를 가진 무한 성장 패턴은 존재하지 않음이 증명되었다. 두 번째 것은 5x5의 정사각형 안에 포함되는 패턴이고, 세 번째는 두께가 1인 패턴이다. of life infinite1.png of life infinite2.png of life infinite3.png 여러 개의 글라이더가 합성되어 재미있는 결과를 형성하는 경우도 있다. 만약 두 개의 글라이더를 적당한 방법으로 블록에 충돌시키면, 블록은 글라이더가 발사된 곳을 향해 한 칸 다가간다. 세 개의 글라이더를 다른 방법으로 충돌시키면 블록은 발사된 곳의 반대 방향으로 한 칸 다가간다. 이것은 ‘움직이는 블록 메모리’라고 불리며 카운터를 모방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 글라이더를 이용해 AND, OR, NOT 게이트를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두 개의 카운터와 연결된 유한 상태 오토마타를 만들 수도 있는데, 이것은 만능 튜링 기계와 똑같은 계산능력을 가지며, 이는 라이프 게임이 무한한 메모리를 가진 어떤 컴퓨터와도 동등한 계산능력을 가짐을 의미한다. 글라이더 건의 패턴을 이용하여 새로운 개체를 조합하는 것도 가능하며, 원본의 복제물을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또한 ‘만능 건축사’ 패턴은 튜링 머신과 동등한 컴퓨터를 만들 수 있으며, 이것은 더 복잡한 여러 가지 개체를 만들어내는 데 사용될 수 있다. 라이프 게임을 시작으로, 몇 가지 새로운 규칙을 가진 변종들이 존재한다. 원래의 라이프 게임은 3개의 이웃 세포가 살아있을 때 태어나며, 2개 또는 3개의 이웃 세포가 살아있을 때 생존하고 나머지 경우에는 사망한다. 이 규칙은 ‘23/3’으로 표시할 수 있다. 앞쪽 숫자들은 세포가 생존하기 위한 숫자를 의미하며, 뒤쪽 숫자들은 세포가 새로 태어나기 위한 숫자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16/6’은 6개의 이웃이 존재할 때 세포가 새로 태어나고, 1개나 6개의 이웃이 존재할 때 생존하며 나머지 경우 사망하는 규칙을 가짐을 의미한다. 하이라이프 (HighLife) 규칙은 원래 규칙에 6개의 이웃이 존재할 때 새로 태어난다는 규칙이 추가되며, 이는 ‘23/36’으로 표시된다. HighLife는 ‘복제자’ 패턴들로 유명하지만, 이 규칙의 대부분의 패턴들이 너무 복잡하거나 황폐한 패턴들을 생성한다. Diamoeba 5678/35678 (혼돈스럽다) 다이아몬드 모양 패턴들. 종종 파국적으로 멸망함 Seeds /2 (폭발적) 불사조(몇 개의 남은 세포들로부터 폭발적으로 부활함), 간결한 패턴들 Serviettes/234 (폭발적) 불사조, 레이스 무늬 패턴들 Maze 12345/3 (폭발적) 미로같은 패턴 Mazectric 1234/3 (폭발적) Maze와 아주 비슷함. Maze보다 덜 막혀있음 2x2 125/36 (혼돈스럽다) 2x2 블록 패턴이 출몰함 Replicator 1357/1357 (폭발적) 모든 패턴이 복제자 패턴이다. Replicator은 복제자 패턴이란 뜻이다 Amoeba 1358/357 (혼돈스럽다) 아메바형 패턴 Conway s game of life 23/3 (혼돈스럽다) ‘라이프 게임’ Highlife 23/36 (혼돈스럽다) ‘하이라이프’ (복제자 패턴이 등장한다) Stains 235678/3678 (안정적) 잉크 방울이 마르는 것 같은 패턴을 보여준다 Coagulations 235678/378 (폭발적) 혼돈스러운 패턴과 응고하는듯한 정착 패턴들 Pseudo life 238/357 (혼돈스럽다) Move 245/368 (안정적) 기관차와 우주선 패턴들 34/34 (폭발적) ‘34 Life’ 34678/3678 (폭발적) ‘낮과 밤(Day & Night)’ Coral 45678/3 (폭발적) 산호초 모양으로 성장한다 5/346 (안정적) ‘Long life’ Assimilation 4567/345 (혼돈스럽다) Life without death 012345678/3 (폭발적) Gnarl 1/1 (폭발적) Walled cities 2345/45678 (안정적) Pylamid /12345678 피라미드 형태 Sponge cells 01234567/456 (안정적) 스폰지 모양 wired life 23/3678 (혼돈스러움) 약간 오래 가는 life 1 life 13/3 작은 막대 패턴과 진동자들 drill 245678/3 막대가 나오는 듯한 패턴 h tree 012345678/1 결정 또는 나무 모양으로 성장함 rats in maze 1234/37 미로 안쪽에서 움직이는 세포들 repilcater2 02468/1357 (폭발적) 복제자 패턴과 비슷함 Life32/game of life 프로그램에 따름. Life Lexicon Conway s Game of Life applet software home page Eric Weisstein s Treasure Trove of the Life C.A. - Dr. Eric Weisstein의 홈페이지. 여러 가지 라이프게임의 패턴들과 설명이 실려 있다. Conway s Game of Life simulator for Microsoft Windows Winlife32 Conway s Game of Life simulator Game of Life on JavaScript 분류:세포 자동자 분류:인공 생명 분류:자기조직화
도조 히데키 (, 1884년 12월 30일 ~ 1948년 12월 23일)는 일본 제국의 군인, 정치인이다. 1941년 10월 18일부터 1944년 7월 18일까지 내각총리대신을 지냈으며 육군대신, 내무대신, 외무대신, 문부대신, 상공대신, 군수대신 등을 지냈다.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A급 전범으로 손꼽힌다. 청년기의 도조 1884년 도쿄 부 고지 정에서 일본 제국 육군 중장 도조 히데노리 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지토세(千歳)이며 본적지는 이와테현으로, 그의 두 형은 도조가 태어나기 전에 사망하였다. 그는 1909년에 이토 가쓰코(伊藤勝子)와 결혼하여 3님 4녀를 낳았다. 1905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17기를 졸업하고 육군 보병 소위로 임관되었고, 1907년 육군 보병 중위로 진급하였다. 1915년 일본 육군대학교를 졸업한 후에 육군 보병 대위가 되어 근위 보병 제3연대 중대장이 되었다. 1919년 스위스에 주재 무관으로 급파되었고, 1920년 일본에 돌아온 후에는 소좌로 승진되었다. 1921년에는 다시 해외로 파견돼 독일에서 주재하였다. 도조는 1922년 일본 육군대학교의 교관을 맡기 위해 일본으로 돌아갔고, 1929년 중좌으로 승진되었다. 1920년대, 그는 군 파벌에 연루되어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스기야마 하지메(杉山元),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 우메즈 요시지로(梅津美治郎), 그리고 나가타 데쓰잔(永田鉄山)과 함께 군 중심의 국가를 표방했던 파벌 통제파의 주요 구성원이 되었다. 이들은 일본 천황 중심의 국가를 표방한 극단적인 파벌 황도파를 이끄는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와 대립 관계를 형성하였다. 도조는 후에 나가타 데쓰잔 사망 이후 통제파의 1인자로서 일본 육군을 주도하게 되었다. 그는 군사 행정가이자 야전 사령관으로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고, 빠르게 승진해 1935년에는 관동군 헌병대 사령관, 1937년에는 관동군 참모장이 되었다. 이때 도조에게 붙은 별명이 "면도날"()이었는데, 이는 그의 빠른 일 수행 능력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1937년 루거우차오 사건이 발생하자 국민당 정부와의 타협에 반대하고, 중앙의 통제파와 연계하여 중일 전쟁의 확대를 유도하였다. 1938년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郎) 일본 육군 대신 아래 육군 차관이 되었으며, 1940년에는 제2차 고노에 내각에서 육군 대신에 임명돼 제3차 고노에 내각에서도 연임하였다. 도조는 마쓰오카 요스케(松岡洋右) 외무 대신과 협력해 일본이 삼국 동맹 조약(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일본 제국)에 참가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본군 주둔을 허용해 영국과 미국을 상대로 한 전쟁 준비를 추진하였다. 총리 시절의 도조 하지만 당시 미국 정부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의 일본군 전면 철수를 요구하였던 와중에는 도조가 이에 강경하게 반대하면서 오히려 고노에 내각을 붕괴시켰다. 1941년 10월 18일 내대신 기도 고이치(木戸幸一) 등의 추천으로 내각을 조직해 제40대 일본 내각총리대신에 임명되었고, 권력 강화를 지향해 관례를 깨고 내무대신, 육군대신, 참모총장 등을 겸임하면서 육군 대장으로 승진하였다. 이 해에 "살아서 포로가 되는 치욕을 당하지 말라"라는 가르침을 담은 전진훈(戦陣訓)을 만들기도 하였다. 도조는 이로써 내각을 장악해 군사 국가 체제로 대일본 제국 전역을 군사강국화하였다.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습격을 명령해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으며, 1942년 외무대신, 1943년 문부대신, 상공대신, 군수대신을 겸임하고, 그 해 대동아회의를 개최하여 일본 주도하의 아시아 국가들의 단결을 도모하였다. 전쟁을 계속해서 수행해 전쟁 초반에는 동남아시아와 태평양 전선에서 많은 성과를 올렸으며, 1944년 국무와 통수의 일치 및 강화를 주장해 육해군 통수부 총장의 경질을 단행하고 스스로 참모총장이 되었다. 그러나, 전쟁 후반에 이르러 점점 전황이 악화되자 일본군은 수세에 몰렸고, 1944년 마리아나 제도를 연합군에게 빼앗기자 그 책임을 지고 내각총리대신 직에서 물러났다. at IMTFE.png|200px|섬네일|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증언하는 도조 히데키 도조 히데키 자살 실패 후 사진 도조는 1945년 8월 일본의 패전 후, 권총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병원에 잠시 입원하였다가, A급 전범으로 체포되었다. 그는 1948년 11월 12일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도이하라 겐지(土肥原賢二), 이타가키 세이시로, 무토 아키라(武藤章), 기무라 헤이타로(木村兵太郎),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 히로타 고키(広田弘毅) 등과 함께 A급 전범으로 사형을 선고받아 그 해 12월 23일 0시 1분에 스가모 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도조는 처형되기 전까지도 전혀 참회하지 않으면서 불교에 귀의해 "욕망의 이승을 오늘 하직하고, 미타(彌咤)의 곁으로 가는 기쁨이여..." 라는 유언시를 남기기도 했다. 교수형 후, 도조 히데키 등 전범들의 사체는 유족에게 반환되는 일 없이, 요코하마 시의 한 화장터로 이송되어 화장되었고, 유골은 분쇄되어 유회와 함께 항공기에 의해 태평양에 투기되었다. 그러나, 고이소 구니아키의 변호사와 그 화장터 근처에 있는 한 절의 주지가 화장터 직원의 안내로 잠입해, 잔회두는 곳에 버려진 7명의 유회와 유골의 작은 조각을 회수하였고, 회수된 유골은 아타미의 고아 관음(興亜観音)에 옮겨져 숨겨졌다. 1958년 무덤을 새로 만들자는 계획이 부상해 1960년 아이치현의 산가네 산(三ヶ根山) 꼭대기에 이장되었으며, 현재 이곳에는 순국 칠사묘가 축조되어 유골이 안치되어 있다. 극동 국제 군사 재판의 A급 전범 14명의 합사는, 1966년 구 후생성(지금의 후생노동성)이 제신명표(祭神名票)를 야스쿠니 신사 측에 보내 1970년 야스쿠니 신사 숭경자 대표회(靖国神社崇敬者総代会)에서 결정되었고, 1978년 합사되었다. 우지 도시히코는 자신의 책에서 도조는 어려서부터 권위주의자였으며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후에는 군수대신과 참모총장을 겸임해 정치와 전략의 일원화를 추구한 독재자이자 철저한 전쟁 수행자라는 입장을 보였다. 또한 일본의 침략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중국, 한국 등 주변 국가의 입장에서 도조 히데키는 영원히 ‘전쟁 범죄자’로 기억될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장남 도조 히데타카(東條英隆) * 손녀 도조 유코(東條由布子) 차남 도조 데루오(東條輝雄) 삼남 도조 도시오(東條敏夫) 장녀 도조 고즈에(東條光枝) 차녀 도조 마키에(東條満喜枝) 삼녀 도조 유키에(東條幸枝) 사녀 도조 기미에(東條君枝) 아래 작품들은 모두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왼손잡이 독재자 - 도조 히데키의 비극》(左利きの独裁者―東条英機の悲劇) 《도조 히데키 - 대일본제국에 순직한 남자》 (東条英機―大日本帝国に殉じた男) 대동아전쟁과 국제 재판 (大東亜戦争と国際裁判, 1959년) 격동의 쇼와사 군벌 (激動の昭和史 軍閥, 1970년) 전쟁과 인간 (戦争と人間, 1973년) 대일본제국 (大日本帝国, 1982년) 프라이드·운명의 순간 (プライド・運命の瞬間, 1998년) 스파이·조르게 (スパイ・ゾルゲ, 2003년) 난징의 진실 제1부 칠인의 사형수 (南京の真実 第一部「七人の死刑囚」, 2008년) 그 전쟁은 무엇이었는가 일·미 개전과 도조 히데키 (あの戦争は何だったのか 日米開戦と東条英機, 2008년) 인물 * 가토 하쿠지로 * 도조 유코 * 사나다 조이치로 * 시카타 료지 * 쓰지 마사노부 * 아카마쓰 사다오 * 도미나가 교지 * 일본 A급 전범 ** 기무라 헤이타로 ** 도쿠토미 소호 ** 무타구치 렌야 ** 사토 겐료 ** 스기야마 하지메 ** 스즈키 데이이치 * 독일 나치 ** 아돌프 히틀러 ** 요제프 괴벨스 일본의 전쟁 범죄 일본의 항복 일본제국 육군 정한론 731부대 통제파 도조 내각 만주국 2키 3스케 전진훈 대동아공영권 태평양 전쟁 극동 국제 군사 재판 하바롭스크 전범 재판 스가모 형무소 야스쿠니 신사 도조 히데키의 생애 제2차 세계 대전 데이터베이스 도조 히데키 역대 총리의 사진과 경력 - 도조 히데키(수상관저 홈페이지) 분류:1884년 태어남 분류:1948년 죽음 분류:극동국제군사재판 사형수 분류:일본 제국의 내각총리대신 분류:일본 육군 대장 분류:일본의 각료역임자 분류:일본의 반공주의자 분류:이와테현 출신 분류:교수형된 사람 분류:일본의 파시스트 분류:도쿄도 출신 분류:관동군 관련자 분류:대량 살인자 분류:A급 전범 분류:통제파 분류:파시스트 지배자 분류:일본의 외무대신 분류:일본의 상공대신 분류:일본의 섭정 분류:일본의 내무대신 분류:일본의 문부대신 분류:일본의 육군대신 분류:순국칠사 분류:공2급 금치훈장 수훈자 분류:인도에 반한 죄 사형수 분류:일본의 인도에 반한 죄 기결수 분류:훈1등 욱일대수장 수훈자 분류:훈1등 서보장 수훈자 분류:도쿄도 구부 출신
한국철도공사 (韓國鐵道公社 또는 코레일 (KORAIL)은 대한민국의 국유 철도 영업과 관련 사무를 담당하는 국토교통부 산하의 공기업이다. 한국철도공사법에 의거하여 설립되었다. 본사는 대전광역시 동구 중앙로 240 (소제동 철도기관 공동사옥)에 있다. 2003년 7월 29일 철도산업발전기본법 제정 2003년 12월 31일 한국철도공사법 제정 2005년 1월 1일 한국철도공사 출범 2006년 5월 1일 철도 소화물사업 폐지 2006년 7월 1일 조직 개편 (17개 지사, 3개 철도차량관리단) 2009년 9월 17일 공항철도 에이렉스 지분 인수, 계열사로 편입 2014년 1월 10일 자회사 SR㈜ 출범 2015년 6월 22일 공항철도 에이렉스 지분을 KB금융그룹에 매각, 계열사 제외 본사 7본부 6실 5단 62처 * 프랑스주재 14, rue Mademoiselle 75015 PARIS, FRANCE 소속기관(현업) 12지역본부, 20부속기관 정원 27,866명 (2014) 전략기획실 감사실 * 감사기획처 * 행정감사처 * 경영감사처 * 청렴조사처 IT경영실 홍보문화실 * 언론홍보처 * 문화홍보처 안전혁신본부 * 안전혁신처 * 시스템안전처 * 안전조사처 * 비상계획처 * 관제실 경영기획본부 ** 기획조정실 ** 경영기획처 ** 조직혁신처 ** 기획예산처 ** 경영평가처 ** 환경시스템처 * 인재경영실 ** 기업문화혁신처 ** 인재육성처 ** 보수복지처 ** 노사협력처 * 재무경영실 ** 재무처 ** 물자관리처 ** 계약협력처 * 법무실 여객사업본부 * 여객마케팅단 ** 여객운송전략처 ** 여객마케팅처 ** CS기획처 ** 관광유통처 ** 역무시스템처 * 열차운영단 ** 열차운영기획처 ** 수송시스템처 ** 운전기술처 ** 열차서비스처 물류사업본부 * 물류혁신처 * 물류마케팅처 * 물류신사업처 광역철도본부 * 광역혁신처 * 광역마케팅처 * 교통신사업처 * 광역서비스처 사업개발본부 * 개발전략처 * 신사업개발처 * 역세권개발처 * 국제협력처 * 해외사업단 기술융합본부 * 차량기술혁신단 ** 차량시스템처 ** 고속차량처 ** 일반차량처 ** 전동차량처 * 시설기술혁신단 ** 시설시스템처 ** 궤도기술처 ** 토목구조물처 ** 건축기술처 * 전기기술혁신단 ** 전기시스템처 ** 전철전력처 ** 통신시스템처 ** 차세대신호처 서울본부 서울특별시 중구 청파로 432 구로본부(9월 1일 착공 확정.) 서울특별시 구로구 구로중앙로 152 (구로동) 수도권동부본부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한천로 472 수도권서부본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도영로 115 전남본부 전라남도 순천시 팔마로 119 대구본부 대구광역시 동구 동대구로 550 경북본부 경상북도 영주시 시청로2번길 30 부산경남본부 부산광역시 동구 중앙대로 206 연구원 대전광역시 동구 중앙로 240 인재개발원 경기도 의왕시 철도박물관로 157 정보기술단 서울특별시 중구 청파로 432 철도빌딩 회계통합센터 대전광역시 동구 중앙로 240 한국철도공사 9층 철도교통관제센터 서울특별시 구로구 구일로8길 150 시설장비사무소 대전광역시 대덕구 평촌2길 59 서울정보통신사무소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대로21나길 7 철도회관 8층 경주고속철도시설사무소 및 경주고속철도전기사무소 경상북도 경주시 건천읍 신경주역로 80 오송고속철도시설사무소 및 오송고속철도전기사무소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정중연제로 384 수도권철도차량정비단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로 108-1 대전철도차량정비단 대전광역시 대덕구 벚꽃길 150 부산철도차량정비단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신천대로 215 호남철도차량정비단 광주광역시 광산구 고봉로258번길 SR 수도권고속철도 운영 코레일로지스 철도물류수송 담당 코레일유통 철도기반 전문유통기업 코레일관광개발 철도관광, 승무사업 등 담당 코레일네트웍스 철도역무, 회원관리, 주차장 등 담당 코레일테크 철도차량, 시설 유지보수 담당 코레일축구단 코레일유도단 코레일사이클단 여객 고속열차 (KTX, KTX-산천)와 일반열차 (ITX-새마을, 새마을호, 무궁화호, 누리로, ITX-청춘, 통근열차)를 운행한다. * 관광 열차 2012년 7월부터 전국을 5대 철도 관광벨트 로 나누었다. 강원청정벨트에서 정선아리랑열차, 중부내륙벨트에서 중부내륙순환열차와 백두대간협곡열차, 남도해양벨트에서 남도해양관광열차, 서해골드벨트에서 서해금빛열차, 평화생명벨트에서 평화열차가 운행된다. 그 외 바다열차, 레일크루즈 해랑 등이 있다. 광역철도 * 수도권 전철 서울본부에서 경의선을, 수도권서부본부에서 경부선 ㆍ 경인선 ㆍ 장항선 ㆍ 과천선 ㆍ 안산선 ㆍ 수인선을, 수도권동부본부에서 분당선 · 경강선 · 중앙선 · 경춘선 · 경원선을 운영한다. 운행 계통으로는 1호선, 3호선, 4호선, 분당선, 수인선, 경의·중앙선, 경춘선, 경강선이다. ITX-청춘을 도입하여 경춘선에서 운행하고 있다. * 부산 도시철도(부산/경남권 전철) 부산경남본부에서 동해선을 운영한다. 물류 자산 개발 시설 유지·보수 버스 광명역 - 인천국제공항 셔틀버스 6770번을 직영으로 운행. 블랙박스 신설 현황 코레일 측에서는 2016년 말까지 여객열차와 화물열차 등 보유하고 있는 모든 열차 운전실에 영상기록장치 (블랙박스)를 설치한다고 2016년 3월 24일에 미디어를 통해 발표했다. 이 블랙박스는 지난 2013년 도입이 추진되었지만 인권침해 및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등의 논란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2015년 11월 코레일 노사가 전격 합의했다. 역 현황 679개 (2018년 2월 3일 기준) * 보통역 343개 * 배치간이역 3개 * 무배치간이역 292개 * 조차장 2개 * 신호장 33개 * 신호소 6개 열차 운행 현황 3,227회 (2014년 11월 1일 기준) * 간선여객열차 586회 (KTX 250회, 일반열차 342회, 토요일 기준) * 광역철도 2,315회 (ITX-청춘 60회 포함, 주중 기준) * 화물열차 245회 (주중, 화 ~ 목 기준) 철도수송분담율 * 여객 19% (인 Km 기준, 2008년) * 화물 7.5% (톤 Km 기준, 2007년) 영업거리 3,918.5km (96개 노선) (2016년 9월 24일 기준) * 고속선 596.3km * 일반선 3,322.2km * 복선거리 2,330.9km (59.4%) * 전철거리 2,727.1km (69.5%) 여객객차 및 발전차는 2017년 기준 나머지는 2018년 기준이다. 고속열차 117개 편성 * KTX 46편성 920량 * KTX-산천 24편성 240량 * KTX_산천 15편성 150량 * SRT 22편성 220량 ITX-새마을 23편성 138량 ITX-청춘 8편성 64량 누리로 7편성 28량 (사고로 1개 편성 폐차) RDC 동력차 35량, 객차 24량 CDC 동력차 16량, 객차 14량 통근형 전동차 304편성 2486량 기관차 447량 * 디젤 기관차 272량 (4400호대 59량, 7100호대~7500호대 188량, 7600호대 25량) * 전기 기관차 175량 (8000호대 4량, 8100호대~8200호대 84량, 8500호대 87량) 여객객차 920량 발전차 116량 한국철도공사에서는 2011년 2월 7일 "철도문화재 관리 지침"을 제정하여 사(社) 소유의 철도 유물을 철도기념물과 준철도기념물로 지정하고 있다. 철도사적으로 보존가치가 있는 철도유물 중에서 한국철도공사의 사장이 지정한 것이다. 다만, 문화재청장이 이미 등록한 문화재는 제외한다. 번호 사진 명칭 소재지 제작자(단체) 지정일 제작시기 1호 증기기관차 터우 5형 철도인재개발원 서울공작창 2012년 1월 31일 지정 1935년 2호 디젤전기기관차 4102호 대전철도차량정비단 GMC 2012년 1월 31일 지정 1966년 3호 디젤전기기관차 4201호 대전철도차량정비단 GMC 2012년 1월 31일 지정 1967년 4호 디젤전기기관차 5025호 대전철도차량정비단 GMC 2012년 1월 31일 지정 1957년 5호 디젤전기기관차 6230호 대전철도차량정비단 GMC 2012년 1월 31일 지정 1967년 6호 디젤전기기관차 7001호 부산철도차량정비단 현대정공 철차사업부 2012년 1월 31일 지정 1986년 7호 150px 전기기관차 8001호 대전철도차량정비단 알스톰 외 2012년 1월 31일 지정 1972년 8호 새마을동차(PMC)126호(객차335호포함),새마을디젤동차(PMC)130호 청도역, 대전철도차량정비단 현대정공 철차사업부 2012년 1월 31일 지정 1989년 9호 침대객차(무궁화) 2012년 1월 31일 지정 10호 전호등 철도청 2012년 1월 31일 지정 1960년대 11호 일면 후부 표지등 철도청 2012년 1월 31일 지정 1960년대 12호 입실역사 기록물 조선총독부 철도국 2012년 1월 31일 지정 1937년 13호 심천역사 기록물 조선총독부 철도국 2012년 1월 31일 지정 1935년~1957년 14호 기관사 제복 철도청 2012년 1월 31일 지정 1974년 15호 故 김재현 기관사 순직비 대전광역시 동구 판암동 교통부 2012년 1월 31일 지정 1962년 16호 150px 영암선 개통기념비 승부역 교통부 2012년 1월 31일 지정 1955년 17호 산업선전철준공기념비 동해역 철도청 2012년 1월 31일 지정 1975년 18호 150px 경경선 전통기념비 단성역 조선총독부 철도국 2012년 1월 31일 지정 1942년 19호 150px 경전선 전통기념비 구. 하동역 철도청 2012년 1월 31일 지정 1968년 20호 모터카 MB8901 대동상공 2012년 1월 31일 지정 1986년 21호 궤도안정기(DTS9201 Dynamic Track Stabilizer) PLASSER & THEURER 2012년 1월 31일 지정 1992년 22호 수동핸드카 승부역 교통부 2012년 1월 31일 지정 1960년 23호 완목식신호기등 교통부 2012년 1월 31일 지정 1950년 24호 통표폐색기(통표, 휴대기, 수수기 포함) 교통부 2012년 1월 31일 지정 1956년 25호 자석식 전화교환기 통감부 철도관리국 2012년 1월 31일 지정 1907년 26호 공전식 전화교환기 철도박물관 조선총독부 철도국 2012년 1월 31일 지정 1925년 27호 완목식신호기(신호레바 포함) 주평역 교통부 2012년 1월 31일 지정 1956년 28호 철도역사용지도 교통부 2012년 1월 31일 지정 1953년 29호 안성천안간 선로준공 종단면도 조선총독부 철도국 2012년 1월 31일 지정 1922년 30호 선로조사도 조선총독부 철도국 2012년 1월 31일 지정 1944년 31호 주주증권(조선철도주식회사) 조선철도 2012년 1월 31일 지정 1924년 32호 주주증권(조선경남철도주식회사) 조선경남철도 2012년 1월 31일 지정 1920년 33호 주주증권(경춘철도주식회사) 경춘철도 2012년 1월 31일 지정 1936년 34호 150px DEC형 특별동차 1호(대통령 전용) 철도박물관 니혼샤료 2013년 9월 5일 지정 1969년 35호 150px DEC형 특별동차 2호(경호용) 철도박물관 대우중공업 철차사업부 2013년 9월 5일 지정 1985년 36호 150px 경복호(PMC형 특별동차 1호, 대통령 전용) 한국철도차량 2013년 9월 5일 지정 37호 경복호(PMC형 특별동차 2호, 경호용) 한국철도차량 2013년 9월 5일 지정 38호 업무용 동차 철도박물관 대우중공업 철차사업부 2013년 9월 5일 지정 1990년 39호 150px 디젤전기기관차 7301호 부산철도차량정비단 현대정공 철차사업부 2013년 9월 5일 지정 1989년 40호 전기기관차 8091호 대우중공업 철차사업부 2013년 9월 5일 지정 1986년 41호 150px 경주역사 경주역 조선총독부 철도국 2013년 9월 5일 지정 1936년 42호 150px 불국사역사 불국사역 조선총독부 철도국 2013년 9월 5일 지정 1936년 43호 철도안전수송비 철도청 2013년 9월 5일 지정 1974~1975년 44호 통표폐색기 철도청 2013년 9월 5일 지정 1960년대 45호 통표 철도청 2013년 9월 5일 지정 46호 표지부 선로전환기(신호등 포함) 철도청 2013년 9월 5일 지정 47호 완목식신호기 일체 삼화역 철도청 2013년 9월 5일 지정 1968년 48호 완목식신호기 일체 장생포역 철도청 2013년 9월 5일 지정 1950년대 49호 표지부 선로전환기 신호등 철도청 2013년 9월 5일 지정 50호 정규도 및 표준도 조선총독부 철도국 2013년 9월 5일 지정 향후 역사적, 기술적, 교육적으로 보존할 가치가 있을 것으로 판단되는 것 중에서 한국철도공사의 사장이 지정한 것이다. 번호 사진 명칭 소재지 제작자(단체) 지정일 제작시기 1호 객차(비둘기호) 대전철도차량정비단 인천공작창 2012년 1월 31일 지정 1963년 2호 객차(통일호) 국립대전현충원 현대정공 철차사업부 2012년 1월 31일 지정 1981년 3호 수화물용저울 철도청 2012년 1월 31일 지정 1960년대 4호 승차권 날짜기계(일부인) 신성기전 2012년 1월 31일 지정 5호 승차권 개표가위 철도청 2012년 1월 31일 지정 6호 집표도장 철도청 2012년 1월 31일 지정 7호 승차권 체송함 철도청 2012년 1월 31일 지정 8호 150px 김유정역사(구 신남역) 김유정역 조선총독부 철도국 2012년 1월 31일 지정 1939년 9호 150px 영월역사 영월역 교통부 2012년 1월 31일 지정 1956년 10호 풍기역 급수탑 풍기역 조선총독부 철도국 2012년 1월 31일 지정 1942년 11호 150px 화본역 급수탑 화본역 조선총독부 철도국 2012년 1월 31일 지정 1937년 12호 150px 수원역 급수탑 수원역 조선총독부 철도국 2012년 1월 31일 지정 1931년 13호 150px 수원역 급수탑 수원역 조선총독부 철도국 2012년 1월 31일 지정 1931년 14호 보성역 급수탑 보성역 만철 경성관리국 2012년 1월 31일 지정 1922년 15호 순천역 급수탑 순천역 만철 경성관리국 2012년 1월 31일 지정 1922년 16호 경주역 급수탑 경주역 조선총독부 철도국 2012년 1월 31일 지정 1944년 17호 철도시발기념지비 노량진역 철도청 2012년 1월 31일 지정 1975년 18호 영등포역 위령비 철도인재개발원 교통부 2012년 1월 31일 지정 1948년 19호 테르밋트 용접기 철도청 2012년 1월 31일 지정 20호 톱(침목절단용) 철도청 2012년 1월 31일 지정 21호 단고마와 켄트게이지 제천역 철도청 2012년 1월 31일 지정 22호 선로게이지 철도청 2012년 1월 31일 지정 23호 수동 레일천공기 철도청 2012년 1월 31일 지정 24호 트렉젝크 철도청 2012년 1월 31일 지정 1999년 25호 모터카 TMM9401 게이즈마 2012년 1월 31일 지정 1994년 26호 휴대용 전화기(PT-93) 범아공영 2012년 1월 31일 지정 27호 휴대용 전화기(PT-65) 범아실업 2012년 1월 31일 지정 1980년 28호 자석식 전화기 제천역 철도청 2012년 1월 31일 지정 29호 표지부 선로전환기(신호등 포함) 철도청 2012년 1월 31일 지정 30호 금고(현금보관용) 다케우치 2012년 1월 31일 지정 1970년 31호 규정집(교통부소관국유재산취급규정) 교통부 2012년 1월 31일 지정 1954년 32호 관내지도(황해도 곡산군) 교통부 2012년 1월 31일 지정 33호 150px 전기동차 1047-1247-1347-1147호 구로차량사업소 현대정공 철차사업부 2013년 9월 5일 지정 1987년 34호 통지낭 철도청 2013년 9월 5일 지정 35호 전령자 완장 철도청 2013년 9월 5일 지정 1960년대 36호 금낭 철도청 2013년 9월 5일 지정 37호 개집표 가위 철도청 2013년 9월 5일 지정 38호 2004년형 승차권 발매단말기(WTIM) 일체 철도청 2013년 9월 5일 지정 2004년 39호 2004년형 승차권 자동발매기 (ATIM) 철도청 2013년 9월 5일 지정 2004년 40호 150px 장항선 원죽역 역명판(향나무 포함) 원죽역 철도청 2013년 9월 5일 지정 1960년대 41호 북전주역 명판 북전주역 철도청 2013년 9월 5일 지정 1968년 42호 가야역 역사 기록서 가야역 2013년 9월 5일 지정 1951~2001년 43호 거제역 역사 기록서 거제역 2013년 9월 5일 지정 1946~2006년 44호 군산역 역사 기록서 군산역 2013년 9월 5일 지정 1912년 45호 간치역 역사 기록서 간치역 2013년 9월 5일 지정 1945년 46호 남포역 역사 기록서 남포역 2013년 9월 5일 지정 1945년 47호 웅천역 역사 기록서 웅천역 2013년 9월 5일 지정 1945년 48호 웅천역 역세권 보고 웅천역 2013년 9월 5일 지정 1957년 49호 경주역 직원 사진첩 경주역 2013년 9월 5일 지정 50호 구열차운전시행절차 교통성 등 2013년 9월 5일 지정 1958년~ 51호 열차운전시각표 교통부 2013년 9월 5일 지정 1952년~ 52호 규정류찬(제3편 운수) 조선총독부 철도국 2013년 9월 5일 지정 1941~1977년 53호 뱃지 철도국 2013년 9월 5일 지정 1950년대 54호 제모 철도청 2013년 9월 5일 지정 1960년대 55호 하양역 화물상옥 하양역 조선총독부 철도국 2013년 9월 5일 지정 1940년 56호 150px 덕산역사 덕산역 조선총독부 철도국 2013년 9월 5일 지정 1931년 57호 150px 동래역사 구.동래역 조선총독부 철도국 2013년 9월 5일 지정 1934년 58호 150px 포항역사 구.포항역 조선총독부 철도국 2013년 9월 5일 지정 1945년 59호 150px 극락강역사 극락강역 교통부 2013년 9월 5일 지정 1959년 60호 150px 명봉역사 명봉역 교통부 2013년 9월 5일 지정 1950년 61호 기장역 철도관사 기장역 조선총독부 철도국 2013년 9월 5일 지정 1935년 62호 함평역 추모비 함평역 교통부 2013년 9월 5일 지정 1951년 63호 모산건널목 사고 위령탑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공수리 철도청 2013년 9월 5일 지정 1971년 64호 일산역장 순직비 일산역 철도청 2013년 9월 5일 지정 1979년 65호 보선분소 직원 순직비 철도청 2013년 9월 5일 지정 1967년 66호 선임시설장 직원 순직비 동해시설관리사무소 2013년 9월 5일 지정 2002년 67호 기관사 직원 순직비 철도청 2013년 9월 5일 지정 1999년 68호 통신 직원 순직비 2013년 9월 5일 지정 1950년대 69호 기관사 직원 순직비 교통부 2013년 9월 5일 지정 1946년 70호 이리역 위령탑 익산역 철도청 2013년 9월 5일 지정 1977년 71호 명암터널 위령비 충청북도 충주시 산척면 명서리 교통부 2013년 9월 5일 지정 1958년 72호 모터장착 핸드카 철도청 2013년 9월 5일 지정 73호 토사적재트레일러(SLT9807-9809) 태현 2013년 9월 5일 지정 1999년 74호 초음파 레일탐상기(ASP7072) 도쿄계기 2013년 9월 5일 지정 1981년 75호 토오크렌치 철도청 2013년 9월 5일 지정 76호 곡선정정계산기 철도청 2013년 9월 5일 지정 1970년 77호 대곡자 철도청 2013년 9월 5일 지정 78호 휴대용전화기 상자 제작도 교통성 등 2013년 9월 5일 지정 1958년~ 79호 한국교통동란기(속편) 교통사편찬위원회 2013년 9월 5일 지정 1953, 1956년 80호 철도창설 제59주년 기념 종합체육대회 교통부부우회 2013년 9월 5일 지정 1958년 현재 운행 중인 차량만을 기술하였다. 기관차 * 4400호대 디젤 기관차 (중형) * 7100호대 디젤 기관차 (특대형) * 7200호대 디젤 기관차 (특대형) * 7300호대 디젤 기관차 (특대형) * 7400호대 디젤 기관차 (특대형) * 7500호대 디젤 기관차 (특대형) * 7600호대 디젤 기관차 (특대형) * 8000호대 전기 기관차 * 8100호대 전기 기관차 * 8200호대 전기 기관차 * 8500호대 전기 기관차 일반 여객 영업 동차 * KTX-I 대한민국에 최초로 도입된 여객 영업용 고속철도 차량이다. * KTX-산천 기술 시험 차량인 HSR-350x를 토대로 국산화한 차량이다. * KTX-산천 경강선(원주~강릉 구간) 개통에 대비하여 도입된 고속철도 차량이다. * 200000호대 전동차 누리로 등급이다. * 210000호대 전동차 기존 새마을호를 대체하는 ITX-새마을 등급으로 2014년 5월 12일부터 운행되고 있다. * 368000호대 전동차 ITX-청춘 등급으로 경원선·경춘선에서만 운행하는 고상홈 대응 차량이다. 2012년 2월 28일 운행을 개시하였다. * 도시통근형 디젤 액압 동차 · 무궁화호 개조형 디젤 동차 통근열차 등급으로 운행하며, 일부 차량이 무궁화호 등급으로 개조되었다. 통근형 전동차 * 수도권 전철 ** 1000호대 전동차 수도권 전철 1호선(용산 - 동인천 급행)구간에만 고정 운행하며, 저항제어 방식이다.(2019년 부터는 순차적으로 퇴역 예정) ** 3000호대 전동차 수도권 전철 3호선에서 운행하며, 가변 전압 가변 주파수 제어 방식이다. ** 311000호대·312000호대 전동차 수도권 전철 1호선(금천구청 - 광명)구간을 제외한 나머지 구간에 운행하며, 가변 전압 가변 주파수 제어 방식이다. ** 319000호대 전동차 수도권 전철 1호선(영등포 - 광명셔틀)구간에만 운행하며, 가변 전압 가변 주파수 제어 방식이다. ** 321000호대 전동차 수도권 전철 경의·중앙선(서울역 - 가좌)구간을 제외한 나머지 구간에 운행하며, 가변 전압 가변 주파수 제어 방식이다. ** 331000호대 전동차 수도권 전철 경의·중앙선에서 운행하며, 가변 전압 가변 주파수 제어 방식이다. ** 341000호대 전동차 수도권 전철 4호선에서 운행하며, 가변 전압 가변 주파수 제어 방식이다. ** 351000호대 전동차 분당선/수인선에서 운행하며, 가변 전압 가변 주파수 제어 방식이다. ** 361000호대 전동차 경춘선에서 운행하며, 가변 전압 가변 주파수 제어 방식이다. ** 371000호대 전동차 경강선에서 운행하며, 가변 전압 가변 주파수 제어 방식이다. ** 391000호대 전동차 서해선에서 운행하며, 가변 전압 가변 주파수 제어 방식이다. * 부산 도시철도(부산/경남권) ** 381000호대 전동차 동해선 광역전철에서 운행하며, 가변 전압 가변 주파수 제어 방식이다. 객차 새마을호 2013년 1월 6일부터 새마을형 디젤액압동차가 운행이 중지됨에 따라, 기관차가 객차를 견인하는 형태로 운행한다. 무궁화호 발전차 화차 출발역, 환승역, 종착역, 정차역 시그널 음악 출발역 광역철도 ID송 무궁화호, 누리로, 새마을호, ITX-새마을, ITX 청춘 봄소나기 KTX Jesus Bleibet Meine Freude 환승역 광역철도 얼씨구야 무궁화호, 누리로, 새마을호, ITX-새마을, ITX 청춘 미적용 KTX 미적용 종착역 광역철도 로고송 ITX 청춘 날자꾸나 무궁화호, 새마을호, ITX-새마을 날자꾸나 KTX 방송 전 Same road same reason 방송 후 Happiness 누리로 날자꾸나 정차역 광역철도 미적용 ITX 청춘 어린달 무궁화호, 새마을호, ITX-새마을 어린달 KTX California Vibes 누리로 어린달(2016년 12월부터) 한국어 광역철도 강희선 일부노선 TTS ITX 청춘 조예신, 강희선 (승차권 공지사항) 무궁화호, ITX-새마을 조예신 KTX 고구인 누리로 조예신(2016년 12월부터) 영어 광역철도 제니퍼 클라이드, 리사 켈리 무궁화호, 새마을호, ITX-새마을, ITX 청춘, KTX 리사 켈리, 제니퍼 클라이드(ITX 청춘 승차권 공지사항) 누리로 리사 켈리(2016년 12월부터) 상행선 광역/도시철도 실로폰 ITX 청춘 실로폰 무궁화호, 새마을호, 누리로, ITX-새마을 벨/수도권 전철 실로폰 멜로디 KTX 미상 하행선 광역/도시철도 트럼펫 ITX 청춘 트럼펫 무궁화호, 새마을호, 누리로, ITX-새마을 벨/수도권 전철 트럼펫 멜로디 KTX 미상 자료출처 2013년 한국철도공사/철도시설공단 연보 순위 역명 노선 총량 1 서울 경부선, 경의선 35,066,927 2 동대구 경부선 18,976,677 3 부산 경부선 18,407,596 4 대전 경부선, 대전선 17,055,732 5 수원 경부선 13,247,527 6 영등포 경부선 10,656,721 7 용산 경부선(호남선, 장항선 직결노선 출발역) 8,819,852 8 천안 경부선, 장항선 7,745,175 9 광명 경부고속선 7,244,032 10 대구 경부선 6,408,234 11 구미 경부선 5,820,706 12 천안아산 경부고속선 5,724,038 13 울산 경부고속선 4,986,555 14 서대전 호남선, 대전선 4,894,428 15 평택 경부선 4,833,122 16 조치원 경부선,충북선 4,204,482 17 구포 경부선 4,044,512 18 익산 호남선, 전라선, 장항선 3,871,394 19 청량리 중앙선, 경원선 3,472,327 20 밀양 경부선 3,051,704 21 김천 경부선, 경북선 2,473,247 22 오송 경부고속선, 충북선 2,285,354 23 경산 경부선 2,273,562 24 신경주 경부고속선 2,229,546 25 전주 전라선 1,991,949 26 순천 전라선, 경전선 1,937,380 27 제천 중앙선, 태백선 1,890,353 28 광주송정 호남선, 경전선 1,848,097 29 광주 호남선 1,822,319 30 왜관 경부선 1,799,084 31 창원중앙 경전선 1,662,942 32 목포 호남선 1,660,825 33 원주 중앙선 1,650,395 34 신탄진 경부선 1,591,929 35 논산 호남선 1,480,418 36 영동 경부선 1,402,380 37 청도 경부선 1,370,795 38 태화강 동해남부선 1,359,180 39 홍성 장항선 1,340,977 40 대천 장항선 1,226,321 41 해운대 동해남부선 1,192,170 42 부전 동해남부선 1,190,194 43 아산 장항선 1,177,239 44 마산 경전선 1,143,366 45 경주 중앙선 1,141,127 46 온양온천 장항선 1,136,891 47 정읍 호남선 1,132,388 48 여수엑스포 전라선 944,614 49 김천구미 경부고속선 938,677 50 동두천 경원선 851,892 51 예산 장항선 840,353 자료는 2010년 한국철도공사/철도시설공단 연보이다. 승하차 승객수 순위 50위 이상인 곳을 정리하였다. 통근열차 역시 여객사업본부 소속 열차지만 그 기본적 역할이 광역도시권의 승객 수송이므로 제외하였다. 순위 역명 노선 총량 1 서울 경부선, 경의선 28,557,002 2 동대구 경부선, 대구선 17,680,607 3 대전 경부선, 대전선 15,181,034 4 부산 경부선 14,959,234 5 수원 경부선 10,674,876 6 영등포 경부선 9,334,047 7 용산 경부선(호남선, 장항선 직결노선 출발역) 8,177,080 8 천안 경부선, 장항선 6,979,344 9 광명 경부고속선 5,831,710 10 대구 경부선 5,626,234 11 구미 경부선 5,186,390 12 구포 경부선 4,917,586 13 서대전 호남선, 대전선 4,609,737 14 청량리 중앙선, 경원선 4,559,249 15 천안아산 경부고속선 4,305,157 16 평택 경부선 3,849,256 17 밀양 경부선 3,699,714 18 익산 호남선, 전라선, 장항선 3,697,791 19 조치원 경부선, 충북선 3,540,763 20 김천 경부선, 경북선 2,381,920 21 광주 광주선 1,935,192 22 남춘천 경춘선 1,869,073 23 경산 경부선 1,862,792 24 목포 호남선 1,740,955 25 송정리 호남선, 경전선 1,639,090 26 왜관 경부선 1,530,132 27 제천 중앙선, 태백선 1,375,724 28 순천 전라선, 경전선 1,357,397 29 전주 전라선 1,287,849 30 논산 호남선 1,278,452 31 신탄진 경부선 1,244,103 32 영동 경부선 1,234,206 33 대천 장항선 1,080,598 34 정읍 호남선 1,142,805 35 청도 경부선 1,167,141 36 홍성 장항선 1,119,455 37 원주 중앙선 1,016,989 38 울산 동해남부선 1,002,086 39 창원 경전선 1,000,356 40 해운대 동해남부선 1,192,170 41 부전 동해남부선 1,190,194 42 아산 장항선 1,177,239 43 마산 경전선 1,143,366 44 경주 중앙선 1,141,127 45 온양온천 장항선 1,136,891 46 정읍 전라선 1,132,388 47 여수엑스포 전라선 944,614 48 동두천 경원선 851,892 49 예산 장항선 840,353 50 양평 중앙선 789,623 참고자료는 코레일/철도시설공단 철도통계연보기준이다. 일반열차(새마을호·무궁화호)는 감소추세가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지만 KTX는 이용객이 소폭 증가하는 추세이다. 순위 역명 노선 KTX 새마을 무궁화 총량 1 서울 경부선, 경의선 20,020,190 1,406,621 4,544,311 25,971,122 2 동대구 경부선, 대구선 11,839,917 1,111,033 4,149,731 17,100,681 3 부산 경부선 11,122,725 1,218,308 3,530,162 15,871,195 4 대전 경부선, 대전선 8,008,708 1,438,934 5,194,439 14,642,081 5 영등포 경부선 무정차 1,876,092 6,727,281 8,603,373 6 수원 경부선 해당없음 2,231,009 5,973,194 8,204,203 7 용산 경부선(호남선, 장항선 직결노선 출발역) 4,295,395 1,003,375 2,826,124 8,124,894 8 천안 경부선, 장항선 해당없음 1,197,548 5,714,621 6,912,169 9 청량리 중앙선, 경원선 해당없음 1,874 5,702,562 5,704,436 10 대구 경부선 무정차 614,051 4,572,716 5,186,767 11 광명 경부고속선 5,014,727 해당없음 해당없음 5,014,727 12 구미 경부선 77,721 1,035,610 3,751,283 4,864,614 13 구포 경부선 2,535,436 292,266 1,910,682 4,738,384 14 서대전 호남선, 대전선 1,292,128 347,290 2,039,767 3,679,185 15 밀양 경부선 1,196,933 257,026 2,167,910 3,621,869 16 조치원 경부선, 충북선 해당없음 162,846 3,261,265 3,424,111 17 익산 호남선 1,362,698 299,455 1,708,694 3,370,847 18 천안아산 경부고속선 3,149,790 해당없음 해당없음 3,149,790 19 평택 경부선 해당없음 214,265 2,803,804 3,018,069 20 남춘천 경춘선 해당없음 해당없음 2,419,180 2,419,180 21 광주 광주선 1,681,270 181,421 470,735 2,333,426 22 김천 경부선, 경북선 26,869 407,339 1,866,220 2,300,428 23 목포 호남선 1,049,319 94,876 750,580 1,894,775 24 경산 경부선 무정차 100,764 1,635,692 1,736,456 25 왜관 경부선 해당없음 26,507 1,268,947 1,295,454 26 순천 전라선, 경전선 해당없음 195,746 1,058,649 1,254,395 27 송정리 호남선, 경전선 624,131 69,187 528,185 1,221,503 28 제천 중앙선 해당없음 703 1,209,974 1,210,677 29 논산 호남선 128,601 138,822 878,790 1,146,213 30 전주 전라선 해당없음 178,061 953,089 1,131,150 31 정읍 호남선 395,911 112,622 593,572 1,102,105 32 영동 경부선 해당없음 102,217 993,470 1,095,687 33 온양온천 장항선 해당없음 347,006 732,581 1,079,587 34 성북 경춘선 해당없음 해당없음 1,040,439 1,040,439 35 대천 장항선 해당없음 370,253 654,191 1,024,444 36 청도 경부선 무정차 21,731 990,385 1,012,116 37 신탄진 경부선 해당없음 27,077 962,102 989,179 38 울산 동해남부선 해당없음 351,863 621,711 973,574 39 원주 중앙선 해당없음 2,493 957,332 959,825 40 가평 경춘선 해당없음 해당없음 925,467 925,467 41 홍성 장항선 해당없음 331,494 580,502 911,996 42 창원 경전선 해당없음 268,385 627,320 895,705 43 양평 중앙선 해당없음 1,923 754,593 756,516 44 경주 동해남부선, 중앙선 해당없음 278,431 464,075 742,506 45 마산 경전선 해당없음 145,979 568,649 714,628 46 강촌 경춘선 해당없음 해당없음 643,282 643,282 47 여수 전라선 해당없음 87,285 524,894 612,179 48 예산 장항선 해당없음 194,368 364,579 558,947 49 김제 호남선 115,141 76,774 342,727 534,642 50 남원 전라선 해당없음 65,145 442,443 507,578 자료는 2006년 한국철도공사/철도시설공단 연보이다. 승하차 승객수 순위 50위 이상인 곳을 정리하였다. 통근열차 역시 여객사업본부 소속 열차지만 그 기본적 역할이 광역도시권의 승객 수송이므로 제외하였다. 05년에 비해 KTX 승객량은 소폭 증가했으나 기존선 열차의 승객량은 대부분 역에서 감소세가 지속되고 있다. 순위 역명 노선 KTX 새마을 무궁화 총량 1 서울 경부선, 경의선 20111964 1520091 3122084 24754139 2 동대구 경부선, 대구선 11846382 1089574 4356287 17292243 3 부산 경부선 11071691 1218308 3918265 16208264 4 대전 경부선, 대전선 7649663 1493224 4981501 14124388 5 영등포 경부선 3590 1753755 6945545 8702890 6 용산 경부선(호남선, 장항선 직결노선 출발역) 4428471 782440 3122088 8332999 7 수원 경부선 해당없음. 2205058 5921228 8126286 8 천안 경부선, 장항선 해당없음 965707 5915945 6881652 9 청량리 중앙선, 경원선 해당없음 289478 5774008 6063486 10 대구 경부선 무정차 659781 4767845 5427626 11 구미 경부선 해당없음 1195321 3706224 4901545 12 구포 경부선 2218729 410558 1934158 4563445 13 광명 경부고속선 4448010 해당없음 해당없음 4448010 14 서대전 호남선, 대전선 1320084 326848 2026721 3673653 15 익산 호남선, 전라선, 장항선 1397389 296156 1847250 3540795 16 조치원 경부선, 충북선 해당없음 139407 3294642 3434049 17 밀양 경부선 814125 132095 2463818 3410038 18 평택 경부선 해당없음 170909 2737711 2908620 19 천안아산 경부고속선 2849137 해당없음 해당없음 2849137 20 남춘천 경춘선 해당없음 6 2452771 2452777 21 광주 광주선 1745012 159364 454018 2358394 22 김천 경부선, 경북선 해당없음 397737 1949536 2347273 23 목포 호남선 1000966 100034 646542 1747542 24 경산 경부선 무정차 86102 1639156 1725258 25 왜관 경부선 해당없음 43455 1292017 1335472 26 순천 전라선, 경전선 해당없음 185352 1042219 1227571 27 제천 중앙선, 태백선 해당없음 68689 1151642 1220331 28 온양온천 장항선 해당없음 226136 990143 1216279 29 전주 전라선 해당없음 169008 1020606 1189614 30 논산 호남선 141696 128178 901835 1171709 31 대천 장항선 해당없음 259825 880357 1140182 32 송정리 호남선, 경전선 566119 80301 486822 1133242 33 정읍 호남선 384755 103693 630785 1119233 34 영동 경부선 해당없음 86603 957826 1044429 35 성북 경춘선 해당없음 해당없음 1008588 1008588 36 청도 경부선 무정차 17027 980551 997578 37 가평 경춘선 해당없음 해당없음 956410 956410 38 원주 중앙선 해당없음 114975 839074 954049 39 홍성 장항선 해당없음 197594 751082 948676 40 신탄진 경부선 해당없음 9355 934538 943893 41 울산 동해남부선 해당없음 214335 616753 831088 42 창원 경전선 해당없음 182291 633807 816098 43 양평 중앙선 해당없음 41608 700273 741881 44 마산 경전선 해당없음 155836 557204 713040 45 강촌 경춘선 해당없음 2098 700115 702213 46 여수 전라선 해당없음 83693 513916 597609 47 예산 장항선 해당없음 124506 470336 594842 48 경주 중앙선 해당없음 165979 419125 585104 49 김제 호남선 118934 75431 363045 557410 50 영주 중앙선, 경북선, 영동선 해당없음 31870 523200 555070 2006년 12월 착공한 한국철도공사 대전 본사는 2009년 8월 완공되었으며, 쌍둥이 빌딩 형식으로 서관에 한국철도공사 , 동관에 한국철도시설공단이 입주하였다. 본사는 연면적 23,507m2이며, 지하 4층, 지상 28층 규모이다. 대수 이름 임기 비고 초대 신광순 2005년 1월 1일 ~ 2005년 5월 7일 24대 철도청장 제2대 이철 2005년 6월 29일 ~ 2008년 1월 25일 前 제12~14대 국회의원 (서울 성북 갑) 사장직무대행 박광석 2008년 2월 ~ 2008년 6월 제3대 강경호 2008년 6월 11일 ~ 2008년 11월 27일 前 서울메트로 사장 사장직무대행 심혁윤 2008년 11월 ~ 2009년 3월 제4대 허준영 2009년 3월 19일 ~ 2011년 12월 22일 12대 경찰청장 사장직무대행 팽정광 2011년 12월 ~ 2012년 2월 前 의정부경전철 대표이사 제5대 정창영 2012년 2월 6일 ~ 2013년 6월 17일 前 감사원 사무총장 사장직무대행 팽정광 2013년 6월 18일 ~ 2013년 10월 1일 前 의정부경전철 대표이사 제6대 최연혜 2013년 10월 2일 ~ 2016년 3월 14일 제20대 새누리당 국회의원(비례대표)첫 번째 여성 사장前 철도청 차장前 한국철도공사 부사장 사장직무대행 김영래 2016년 3월 15일 ~ 2016년 5월 9일 前 한국철도공사 부사장前 한국철도차량엔지니어링 이사장 제7대 홍순만 2016년 5월 10일 ~ 2017년 8월 4일 前 인천광역시 경제부시장 사장직무대행 유재영 2017년 8월 5일 ~ 2018년 2월 5일 한국철도공사 부사장 제8대 오영식 2018년 2월 6일 ~ 2018년 12월 11일 前 제16대 국회의원 (전국구) , 前 제17, 19대 국회의원 (서울 강북 갑) 사장직무대행 정인수 2018년 12월 12일 ~ 2019년 3월 27일 한국철도공사 부사장 제9대 손병석 2019년 3월 27일 ~ 前 국토교통부 철도국장前 국토교통부 제1차관 대한민국 철도청 한국철도시설공단 한국철도대학 한국교통대학교 한국철도기술연구원 대전 코레일 축구단 국유 철도 서울교통공사 인천교통공사 부산교통공사 김행균 KTX 여승무원 고용 분쟁 내일로 코레일 멤버십 카드 코레일체 레츠코레일 웹사이트 분류:한국철도공사 분류:대한민국의 준시장형 공기업 분류:대전광역시의 기업 분류:2005년 설립 분류:공공기관 (국토교통부 소관) 분류:대한민국의 철도 기업 분류:1963년 설립된 기업
이 문서는 대한민국의 교통 에 대해 서술한다. 대한민국에는 대한민국의 고속국도 제1호선인 경부고속도로를 비롯하여 4,000km에 달하는 31개의 고속도로 등의 도로가 있다. 도로에 관해서는 도로법에서 규율한다. 3,000km의 철도 및 광역전철, 도시철도가 있으나 도로에 비해서는 인프라가 부족한 편이다. 서울특별시 등 수도권의 광역전철망이 가장 광대하며, 그 외에도 광역시에는 도시철도가 건설, 운행되고 있다. 또한 13개의 국내외 공항이 국내 및 국제 항공 교통을 담당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항공사는 대한항공이다. 대한민국의 교통 행정은 국토교통부가 관장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1970년대부터 고속도로 건설, 자동차·조선공업의 육성·개발이 본격화되기 시작, 교통·운수업 부문이 새로운 양상을 갖고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전체적으로 수송력 부족과 그 구조적 불균형으로 인하여 수급의 일반원칙에 입각한 교통시장의 형성에는 당분간의 시일이 요청되는 실정이라고 하겠다. 더욱이 현재까지의 여건으로서는 기타 부문, 특히 실물생산경제(實物生産經濟)를 제약하는 이른바 수송애로 현상이나 지역적인 생산력 분포의 불균형 현상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한국에 있어서의 수송력의 체계적 발전, 즉 각 수송수단간의 경쟁적·보완적 관계의 확립에 의한 교통시장 형성의 합리화가 시급한 과제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교통·운수부문도 이제는 산업기반의 기초조성을 위한 물리적·투자로부터 벗어나 지역사회의 균형발전, 공공복지의 확충, 사회개발의 기초적 능력정비 등 사회 간접자본으로서의 고차적 기능을 담당하여야 할 단계에 이르렀다. 현재 한국에서 운수부문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점은 직접 생산활동 부문에 대한 절대수송능력 부족으로 나타나는 수송애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는 바, 이는 근본적으로는 유통수단으로서의 수송구조면에서 질적 파행성, 생산력 분포의 불균형, 유효수요의 지역격차 증대 등의 원인이 되고 있다. 여기서 수송구조의 질적 파행성이라고 함은 수송시장의 조건, 즉 운임·신속성·안정성 및 수송 적합성 등 각 수송수단간의 경쟁조건이 서로 보완 관계를 형성치 못한 채 수송체계가 대도시·산업기지·공단에 집중되어 있으며 여객·화물의 증가와 운송장비(특히 자동차)의 급격한 확대에 비해 도로율·궤도율의 신장세는 점차 둔화되고 있음을 가리킨다. 경제성장에 따른 자동차·여객·물동량의 급격하고 지속적인 증가, 지역적 편재가 심한 산업·생산시설, 인구증가와 대도시 집중, 육운사업의 전근대적 경영체제, 공중교통 시설의 노후화·서비스부재, 도서·벽지노선의 채산성 악화와 노선폐쇄, 도로화·궤도화사업의 비용상승 등 각양각색의 요인으로 인한 적체와 정체현상에 시달리고 있는 한국의 교통·운수현황은 이제 전쟁 , 지옥 등의 표현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정책적인 도로화·궤도화 사업만으로는 이 모든 난제를 풀기 어려우며 산업·생산시설의 분산, 대도시 인구집중의 억제, 운수업체의 체질개선, 노후설비의 대체, 대중교통수단의 확대, 화물수송로의 확보, 범국민적인 계도와 협조 등 행정전반에 걸친 조정 및 민관의 유대와 협력이 있어야만 그 성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도로 교통은 삼국시대의 역원제로 시작했다. 조선시대에는 서울을 중심으로 의주, 경흥, 평해(지금의 울진), 동래, 제주, 강화 등 6개 방면으로 발달되었다. 1900년대 초에 옛길이 신작로(새길, 포장로)로 바뀌고 1911년에 관용 자동차가 도입되며 1912년 택시와 버스가, 1928년부터는 화물자동차가 등장했다. 1970년대 경부고속도로의 건설과 함께 고속 버스가 등장하고, 이후로 전국 각지에 고속 도로가 건설됨에 따라 대한민국의 도로 교통은 질적·양적으로 크게 성장하였다. 현재 거의 모든 도시 내부 및 도시간의 주요한 대중 교통 수단으로 각종 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경제성장으로 국민소득이 증가하고 생활·소비패턴이 변화함에 따라 자동차의 보유대수는 급격히 증가한 반면에 도로화율은 점차 둔화되고 있어 심각한 적체·정체현상을 보이고 있으며 교통사고 등 안전사고율 또한 해마다 질·양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2003년 9월말 현재 전국의 자동차 대수는 총 1,449만 6,844대로 1998년 1,046만 9,599대에 비해 약 1.4배, 2000년 대비 1.2배 증가를 나타냈다. 업종별로는 영업용이 74만 5,912대로 전체 차량의 5.1%를, 비영업용이 1,375만 932대로 94.9%를 차지하고 있다. 차종별로는 승용차 1,020만 2,813대, 버스 125만 6,728대, 화물자동차 299만 3,280대, 특수차량 4만 4,023대로 나타났다. 동년기준으로 운수업체 수는 총 29만 8,148사이며, 종별로는 시내버스 390사, 시외버스 159사, 고속버스 21사, 전세버스 462사, 택시 1,832사, 노선화물 23사, 구역화물 등화물 1,305사, 용달 605사, 장의자동차 404사 등이다. 운수업체 종사자수는 총 54만 6,214명이며, 이 중 운전자는 버스업종 7만8,823명, 택시업종 25만3,370명, 화물업종 16만명이고 정비원은 1만2,477명, 기타 3만8,898명이다. 대한민국에서는 고속국도, 일반국도, 특별시도·광역시도, 지방도, 시도, 군도, 구도 등의 7종의 종류로 도로를 구분하며, 나열한 순서대로 등급을 설정하고 있다. 도로의 정의에 관해서는 《도로법》을, 도로에서의 안전 수칙 등과 관련해서는 《도로교통법》의 적용을 받고 있다. 대한민국의 버스는 대한민국에서 운행하는 모든 버스를 일컫는다. 잘 발달된 도로망을 이용해, 대부분의 지역이 버스 운송망으로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다. 최초의 시내 버스는 일제 강점기에 대구에서 시작되었다. 2006년 현재 각급 버스의 인킬로는 48003105384.3725명킬로미터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버스 기업체는 경기고속으로, 577개의 일반 시내버스, 15개의 광역버스, 340개의 시외버스, 56개의 고속버스 노선을 운영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경우 자동차운수사업법에 의하면, 택시는 정식적으로는 택시여객 자동차운송사업이라 말하며, 1개의 계약으로 승차 정원 6명 이하의 자동차를 이용, 승객을 운송하는 사업이라고 하며 특정한 면허를 취득하지 못하면 택시를 운행할 수 없다. 운수회사에 속한 회사택시와 개인이 영업하는 개인택시가 있는데, 개인택시의 경우 법에서 정한 자격요건에 맞아야 한다. 지역별로 택시 색이 지정되는 경우도 있다. 특히 2009년 12월4일 하이브리드택시가 서울에 도입되었다. 서울시는 2020년까지 모든 택시를 하이브리드카로 바꿀 예정이다. 전통적인 장거리 대량운송 수단인 철도는 자동차·항공운송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여객·화물수송에서의 지위는 확고하다. 그러나 시설의 노후화, 서비스의 부재, 경영의 진부화 등으로 한때 심각한 재정악화와 퇴조현상을 보이기도 하였으나 1980년대에 지속적인 노후시설대체, 서비스개선, 경영합리화 작업으로 모습을 일신하고 있고 도로수송의 적체, 항공수송의 고운임에 비해 저운임·신속·대량수송의 장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2002년 말 현재 궤도 총연장 6,819km로 영업노선이 45개 노선에 3,101.2km고, 이 중 복선화율은 28.4%, 전철화율은 18%이다. 한편 간선 철도망과 간선 고속도로망의 길이는 약 3000km로 거의 같은데, 이는 다른 세계 주요국에서 찾아보기 힘든 철도 인프라 과소 현상이라는 지적이 철도학계에서 제기되고 있다. 철도수송장비는 동력차가 총 2,851량으로 디젤기관차 482량, 전기기관차 96량, 디젤동차 610량, 전기동차 1,662량, 증기기관차 1량이며, 객차는 총 1,678량, 화차는 1만 4,113량으로 역(驛)은 총 631개이다. 대한민국의 대도시들은 자체적인 철도 교통망을 갖추고 있거나 갖출 계획을 세우고 있다. 서울특별시에는 현재 9개의 광역전철과 지하철 노선이 있으며, 1개 노선이 건설 중, 여러 개의 경전철을 추가로 계획 중이다. 이 노선은 현재 한국철도공사와 서울메트로, 서울도시철도공사의 세 회사가 운영하고 있다. 이를 수도권 지역의 것까지 합치면 현재 운영되고만 있는 것만 해도 11개, 지선과 건설되고 있는 것을 합치면 26개나 된다. 또한 수도권을 비롯한 주요 지방도시에서도 지하철들이 건설되어 인천광역시 (2개 노선), 대구광역시 (2개 노선), 대전광역시 (1개 노선), 부산광역시 (5개 노선), 광주광역시 (1개 노선) 등이 운행 중인데, 도시의 수송력을 분담하는 중요한 교통수단이 되고 있다. 이 경우에는 각각의 도시에서 세운 공기업이 운영하고 있다. 지하철 및 광역전철을 제외한 대부분의 철도는 코레일이 운행한다. 이 철도는 전국 각지를 연결하고 있다. 한편 증기기관차는 1980년대 이후 몇몇 지방도시에서 관광열차로 운행되고 있으며, 1995년에는 협궤 철도가 사라졌고, 경부선의 과다한 여객 수요를 분산시키기 위해 2004년 경부고속철도가 개통되었고, 정부에서는 호남고속철도의 건설을 추진 중이다. 또한 2007년에는 대한민국 유일의 사설 철도인 인천공항철도가 개통되었다. 다만 협궤 철도는 수인선이 공식적으로는 영업 정지 상태여서 철도 통계에는 존재한다. (현재 선로가 철거되었으며, 표준궤로 복선 전철화 공사가 진행 중이다. ) 과거에는 서울전차, 부산전차가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폐선되었다. 수출입화물운송에서 절대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는 해운업은 선박의 노후화, 선원부족, 비용가중이라는 내부적 문제에 비국적선 취항증가로 경영압박을 받고 있다. 2002년 말 전국의 항만수는 총 49개항이며, 이 중 무역항이 27개, 연안항이 22개항이다. 이들 항만의 연간 하역능역은 2억7,259만5,000톤으로 1988년의 1억7,077만톤보다 약 1.6배 증가했다. 선박등록현황은 총 763만 7,549톤(6,792척)이며, 이 중 여객선 12만 4,513톤(190척), 화물선 521만 4,636톤(725척)이고, 외항선박들의 주요정기항로 취항현황을 보면 북미 25척, 동남아 48척, 한일항로 55척 등이다. 대한민국에는 8개의 국제공항과 7개의 국내공항이 국내외 항공 교통을 담당하고 있다. 항공교통은 광복 후 1946년 대한국민항공사(KNA)가 설립되어 국내선을, 1954년 이후 국제선을 운항하였다. KNA는 1962년에 대한항공공사로 개칭하고 국영으로 운영되다가, 1969년 3월에 민영화 정책으로 한진상사가 인수하여 대한항공으로 개명하고 1970년대 여객·수출입화물의 증가로 본궤도에 올라 고속성장을 지속해온 업종이었다. 1988년 대한항공의 독점을 마무리하고, 제2민간항공사업이 허가됨으로써 금호그룹의 아시아나항공과 함께 경쟁체제로 바뀌었다. 1988년 12월 아시아나 항공이 국내선에 취역함으로써(국제선취역은 1990년 1월) 본격적인 경쟁에 돌입하였다. 2002년 말 현재 항공기보유대수는 총 295대로 수송기 183대, 경비행기 28대, 헬리콥터 60대이었다. 국제항공노선은 26개국 63개 도시에 79개(16개 중복노선)노선이 개설되어 있었으며, 이 중 여객노선은 69개 노선이었다. 대한항공은 2007년 기준으로 약 100억 톤의 화물을 처리하였다. 현재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외에도 진에어, 제주항공, 이스타항공, 티웨이항공, 에어부산 등 많은 저가항공사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일본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일본과의 항공 교통이 발달하였다. 대한민국의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과 일본의 일본항공, 전일본공수, 스카이마크 항공 등의 항공사가 한국의 인천국제공항 등 4개 공항, 일본의 나리타 국제공항 등 25개 공항을 통해 많은 정기 및 전세기 노선을 운항하고 있다. 또한 미국의 노스웨스트항공, 델타항공, 유나이티드항공은 인천국제공항에서 나리타 국제공항을 거쳐 미국으로 가는 정기 노선을 운항하고 있다.
존 맥스웰 쿳시 존 맥스웰 쿳시 (, 1940년 2월 9일 ~ )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의 작가로, 200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케이프타운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존 마이클 쿠체(John Michael Coetzee)이다. 그는 네덜란드계 백인의 후손인 아프리카너이며, 아프리칸스어도 사용했으나, 영어권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작품도 영어로 썼기 때문에, 그의 이름도 영어식인 존 맥스웰 쿳시로 발음하는 경우가 많다. 그는 케이프타운 대학교에서 수학과 영문학을 전공하였다. 1960년대 초 영국으로 이주하여 IBM을 거쳐 영국의 컴퓨터 하드웨어 업체인 ICL에서 프로그래머로 일했다. 이 때의 경험은 《Youth》(2002)에 기록되어 있다.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 텍사스 대학교에서 언어학을 전공,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68년 ~ 1971년 뉴욕주 버펄로의 뉴욕 주립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강의했다. 버펄로에서 첫 작품 《어둠의 땅(Dusklands)》을 착수하였다. 그 사이 그는 미국 영주권을 신청했으나,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영주권 발급이 허락되지 않자 곧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돌아와 케이프타운 대학교의 영문학 교수로 2001년까지 재직했다. 1974년 《어둠의 땅》을 출간하여 등단한 이후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면서도, 이를 적극적으로 대항하기보다는 야만스러운 서구 문명에 그 근본 원인을 찾아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1980년 《야만인을 기다리며(Waiting for the Barbarians)》로 큰 주목을 받았으며, 1983년 《마이클 K(The Life and Times of Michael K)》로 영어권 작가에게 수여하는 영국의 유명 문학상인 맨 부커 상을 받았다. 1999년 《추락(Disgrace)》으로 다시 부커상을 받아, 사상 처음으로 두 차례 부커 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문학 활동을 한 이래 거의 은둔하며 지냈기 때문에 두 차례 모두 수상식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 외에도 커먼웰스상과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상, 프랑스의 페미나상 등 주요 문학상을 수상했다. 두 차례 부커상 수상과 남아프리카 공화국 사회의 모순과 갈등, 인종차별의 허구, 서구문명의 위선 등을 우의적으로 그려내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고, 200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국외자의 놀라운 관여를 수없이 다양한 모습으로 묘사 한 것이 노벨 문학상 수상 사유였으며, 아프리카 대륙 출신으로는 네 번째,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으로는 두 번째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다. 그는 케이프타운 대학교 정년퇴임 후 2002년, 오스트레일리아의 애들레이드로 옮겨, 애들레이드 대학교의 영문학부 명예 연구원이 되었고, 2003년 미국 시카고 대학교의 교환교수를 겸임했다. 2006년, 오스트레일리아 국적도 취득했다. 1974 《어둠의 땅(Dusklands)》 1977 《나라의 심장부에서(In the Heart of the Country)》 1980 《야만인을 기다리며(Waiting for the Barbarians)》 1983 《마이클 K(The Life and Times of Michael K)》 1986 《포(Foe)》 1990 《철의 시대(Age of Iron)》 1994 《페테르부르크의 대가(The Master of Petersburg)》 1999 《추락(Disgrace)》 1999 《동물로 산다는 것(The Lives of Animals)》 1997 《소년시절(Boyhood Scenes from Provincial Life)》 2002 《Youth Scenes from Provincial Life II》 2003 《엘리자베스 코스텔로(Elizabeth Costello)》 2007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Diary of a Bad Year)》 2009 《슬로우 맨(Slow Man)》 분류:1940년 태어남 분류:살아있는 사람 분류: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소설가 분류:오스트레일리아의 소설가 분류:노벨 문학상 수상자 분류: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노벨상 수상자 분류:오스트레일리아의 노벨상 수상자 분류:한국어 전집이 출간된 저자 분류:텍사스 대학교 오스틴 동문 분류:케이프타운 대학교 동문 분류:하버드 대학교 교수 분류:맨부커상 수상자 분류:뉴욕 주립 대학교 교수 분류:시카고 대학교 교수 분류:네덜란드계 오스트레일리아인 분류:독일계 오스트레일리아인 분류:폴란드계 오스트레일리아인 분류:남아프리카 공화국계 오스트레일리아인 분류:네덜란드계 남아프리카 공화국인 분류:독일계 남아프리카 공화국인 분류:폴란드계 남아프리카 공화국인 분류:미국에 거주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인 분류: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무신론자 분류:오스트레일리아의 무신론자 분류: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번역가
수도권 (首都圈 또는 수도 지역 (首都 地域), 수도 지구 (首都 地區)란 수도와 더불어 밀접한 관계를 맺는 주변 도시권 지역을 하나로 구분하여 부르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각국의 주요 기능(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의 중심지인 경우가 많다. 또한 수도권은 어느 한 나라의 수도와 함께 가까운 지역이 수도권에 포함된다. 그리고 수도권이나 수도에는 법정구역이 대부분 있다. 수도권 도쿄도 등 간토 지방 및 야마나시현 일원(요코하마시, 가나가와현, 지바현 포함) 수도권 베이징, 톈진 및 허베이 성 일원 수도권 타이베이 시 및 신베이 시 일원 수도권 메트로 마닐라 및 라구나 주, 카비테 주, 리살 주, 불라칸 주 일원 수도권 자와 섬 일원 수도권 쿠알라룸푸르 및 푸트라자야, 슬랑오르주 일원 수도권 델리 경제권 (뉴델리와 델리 일원) 수도권 이슬라마바드 수도권 수도권 모스크바와 모스크바주 일원(모스콥스카야 지역 포함) 수도권 그란 부에노스아이레스 수도권 브라질리아 시 일원 수도권 멕시코 시티 및 멕시코주, 모렐로스주 일원 수도권 국가 지구 수도권 오스트레일리아 수도 준주 수도권 워싱턴 D.C, 버지니아주 북부, 메릴랜드주 중부 일원 수도권 오타와 및 가티노 일원 수도권 그레이터 런던 수도권 일드프랑스 수도권 베를린 및 브란덴부르크주 일원 수도권 베른주 북서부 일원 수도권 브뤼셀 수도 지역 수도권 덴마크 수도 지역 의 경우 서울특별시, 인천광역시 및 경기도지방의 전역을 수도권으로 분류한다.(개성시, 개풍군, 장단군이 경기도에 걸쳐 있다.) 의 경우 평양직할시, 평안남도 남포시, 순천시, 평성시, 황해북도 중화군, 상원군 일대를 수도권으로 분류한다. 수도권대기환경청 분류:수도 분류:대도시권
특별시 (特別市)는 대한민국의 행정 구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정 구역이다. 대한민국의 특별시는 서울특별시가 유일하다. 1947년 미군정 시대에 경기도 경성부를 서울특별자유시로 승격시켜 경기도에서 분리하였으며, 대한민국 출범 후 1949년에 특별자유시를 특별시로 개칭하였다. 광역시 및 도와 동급인 광역자치단체이지만, 특별시장은 차관급인 광역시장 및 도지사보다 더 높은 장관급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라선시와 남포시가 특별시로 설치되어 있다. 라선시는 2010년 1월 4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특급시 에서 특별시로 승격시킴으로써 생겨났다. 1927년, 중화민국 정부는 인구 백만명이 넘는 난징, 상하이, 베이징, 톈진, 칭다오, 충칭, 시안, 광저우, 한커우(현재 우한 시의 일부), 선양, 하얼빈 시의 11개 도시를 특별시로 지정했다. 이후 "원할시"로 개칭하면서 특별시라는 이름은 사실상 사라지게 되었다. 2017년 4월 27일 오전 이경희 한국국민당 대선후보가 세종특별자치시청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세종시를 특별시로 승격시키겠다”고 말했다. 이어 “청와대와 국회,대법원, 헌법재판소, 감사원을 정부세종청사로 이전하고 지방분권을 강화하겠다”라고 밝혔다. 2017년 4월 17일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대전광역시 중구 은행동 으능정이 거리에서 대전을 특별시로 승격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어 충청의 중심 대전이 충청의 중심으로 끝나지 않고 대한민국의 중심이 될 것이라며 반드시 대통령이 돼서 충청의 꿈을 현실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2017년 3월 22일 안희정 더불어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가 전라북도의회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전주를 문화특별시로 지정해 세계적인 역사문화도시로 적극적으로 육성하겠다고 말했다. 안희정 후보는 전주를 문화특별시로 지정하고 전주가 실질적으로 대한민국의 역사문화전통의 도시로서 아시아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역사문화도시로 발전할 수 있도록 집중 육성하겠다며, 국가의 역사문화·민족문화 창달이라는 의무와 사명을 갖고 전주시의 문화관광산업 발전을 위해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국가의 역사문화·민족문화 창달이라는 의무와 사명을 갖고 전주시의 문화관광산업 발전을 위해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2017년 5월 1일 오후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선 후보는 전주시 전동성당 인근에서 거점유세를 열고 "전국의 모든 첨단산업을 새만금으로 모아보자"며 "새만금특별법을 통과시켜서 새만금을 기업특별시 로 만들어보겠다"고 말했다. 홍준표 후보는 새만금 개발 추진에 조건이 있다며 "전북에서 20% 이상은 나와야 한다. 그래야 내가 해주겠다고 이야기한다"고 지지를 호소했다. 이어 "새만금을 홍콩 식으로 개발을 해보겠다"며 "중국이 홍콩을 영국으로부터 돌려받고 난 뒤에 1국2체제 형식으로 운영했다. 홍콩의 자본주의를 손대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또한, "새만금을 기업특별시로 만들어서 모든 규제를 싹 없애버리고 환경, 경찰만 들어가고 나머지는 1국2체제로 개발하자는 것"이라며 "재벌의 사내유보금을 끌어내서 쓰도록 할 것"이라고 밝혔다. 부산의 특별시 승격 주장이 나온 계기는 서울의 특별시 승격이었다. 경기도에 예속됐던 서울이 1946년 8월 16일 수도임을 명분으로 내세워 특별시가 되자 부산에서도 특별시 여론이 조성되었다. 여론 조성의 중심에는 1946년 7월 10일 출범한 부산상공회의소가 있었고 부산상공회의소 초대와 2, 3대 회장을 지낸 김지태(1908∼1982)가 있었다. 승격 여론 조성의 다른 축은 부산특별시승격기성회 다. 1949년 6월 14일 부산상공회의소와 동회연합회가 주축이 되어 설립한 부산특별시승격기성회는 관과 유지가 총망라된 범시민적 조직이었다. 회장 김지태, 부회장 김용준, 이사 김낙제, 김달범, 신덕균, 권인수 등이 선임돼 거시적 승격운동 조직을 갖추었다. 부산특별시승격기성회는 1949년 6월 25일 대통령과 국회의장에게 부산을 정부 직할의 특별시로 승격시켜 줄 것을 청원하였다. 부산시는 한국 전쟁 중에 임시수도가 되면서 인구가 급격히 불어났다. 이를 바탕으로 부산시의 시세(市勢)가 강해졌고 부산 출신의 국회의원들이 부산시를 특별시로 지정해야하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전후에 서울특별시와 서울 출신의 국회의원들이 반발하여 무산되었다. 4.19 이후 다시 부산특별시 승격안 이 주장되었으나 장면 내각은 이를 묵살하였다. 하지만 경부축을 발판으로 경제를 발전시키고자하는 박정희의 의지로 부산시는 특별시보다 한 단계 낮은 직할시로 지정되었다. 2003년 2월 17일 부산의 66개 시민.사회단체가 모여 결성한 ´부산경제살리기시민연대(옛 부산경제가꾸기 시민연대)´가 올해 ´부산의 특별시 승격´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부산경제살리기시민연대는 2003년 전개할 시민경제운동 10대 사업을 발표하면서 ´특별시 승격운동을 신규사업으로 중점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부산경제살리기시민연대는 새 정부가 주요 국정지표로 내세운 분권적 차원에서 수도권 집중을 완화하고 세계경쟁력을 강화하는 국가전략 투자도시로서 부산을 특별시로 승격하는 한편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가칭)부산발전특별법 제정을 정부에 강력하게 요구하기로 했다. 또 ´부산특별시´승격을 전제로 한 경상남도 양산시 및 진해시 웅동지역의 발전적 통합도 적극 검토하기로 했다. 2003년 6월 23일 홍성철 진해문화원 이사는 창원대학교 국제홀에서 지방분권운동경남본부(상임대표 안홍준) 주최로 열린 ‘부산광역시의 대도시 패권주의 대응 토론회’에서 ‘진해신항 건설에 따른 경제적 효과 분석’을 주제 발표하고 부산의 시민단체들이 진해는 물론 김해·양산까지 부산에 편입시켜 서울에 버금가는 ‘부산광역특별시’를 만들어야 한다는 논리의 배경은 진해 용원동 일대에 건설되는 진해신항의 엄청난 경제적 이익을 독식하기 위한 전술이라고 주장했다. 또 경남과 부산이 함께 발전하려면 경남 땅의 부산 편입 논리에 벗어나 양산·김해를 지켜내야 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진해시민과 전체 경상남도민이 힘을 모아 부산의 진해 신항 편입 시도를 저지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홍 이사는 “현재 부산항은 컨테이너 선석 21개만으로도 항만관련 매출액이 연간 20조원을 웃돈다”며 “신항만은 부산항의 1.5배인 30선석으로 어느 자치단체에 소속되느냐에 따라 이익의 향배가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이어 “부산항의 20조원 매출은 부산 부가가치의 40%며 항만의 고용효과도 전체의 27%”라며 “신항의 30선석 가운데 18선석만 소속돼도 개당 1만5000원인 컨테이너세가 도세 수입으로 연간 724억원”이라고 분석했다. 또 “부산은 이처럼 항만의 가치를 잘 알고 신항만을 한 손에 틀어쥐려고 끈질기게 공격적으로 나오고 있다”면서 “양산·김해·진해를 부산에 집어넣어 부산광역특별시를 만들어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도 핵심은 진해 땅에 있다”고 못박았다. 이에 대해 앞서 토론한 박동철 경남신문 편집국장도 “부산의 목적은 신항만 독자 운영을 위한 진해권역 편입”이라며 “부산은 진해 웅동·용원동 일대만 손에 넣어도 크게 만족할 것”이라며 적극 대응을 주문하기도 했다. 2004년 11월 26일 YTN은 부산광역시청이 부산항의 국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해양 관련 산업에 대한 계획수립과 시행에 있어서 중앙정부로부터 독자성을 갖는 해양특별시 승격 을 추진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해양특별시가 되면 항만시설을 비롯해 해양자원개발사업 시행자와 관련기업에 대한 조세감면은 물론 정부의 예산지원이 가능해질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이에 대해 허남식 부산광역시장은 "독자적으로 해양개발에 나설 수 있고 해양부처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할 수 있어 부산이 국제적으로도 경쟁력 확보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으며 최우용 동아대학교 교수는 "해양특별시 법률안의 제정방안은 국가균형발전과 해양도시의 국가경쟁력 확보차원에서 추진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행정수도 이전 논의가 정리되지 않은데다 타 시도와의 형평성 문제 때문에 추진에 난항이 예상된다. 2004년 12월 3일 한나라당 유기준 의원은 "해양수도로서 부산특별시를 설치하며 국가가 부산시를 국제해양수도로 개발하기 위한 종합적인 시책을 수립.추진하고 지원하도록 하는 법안을 마련, 조만간 국회에 제출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법안은 특히 부산을 명실상부한 해양수도로 육성하기 위해 국가나 특별시로 승격되는 부산시가 항만시설과 해양자원, 해양산업의 개발사업자 등에 대해 조세와 각종 부담금을 감면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도 담고 있다. 또 부산 여행객이 지정면세점에서 물품을 구입할 경우 면세와 환급특례를 부여하고 카지노업을 허가할 수 있도록 관광진흥법에 특례를 두도록 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유 의원은 "지역적 특성을 반영한 차등적 분권과 지역균형발전을 위해 부산을 해양특별시로 만들어야 한다"며 "동북아의 유수한 경쟁 항만들의 독주를 막고 국가경쟁력을 강화하는 것이 부산이 살고 나라가 잘 살게 되는 길"이라고 말했다. 2009년 7월 16일 민주당 조경태 의원이 부산 국제신문사 대강당에서 ‘부산해양특별시추진위원회 발대식’을 가졌다. 김인세 부산대학교 총장, 김정길 전 대한체육회장, 박경문 전 경성대학교 총장, 신정택 부산상공회의소 회장, 오거돈 한국해양대학교 총장, 범어사 주지 정여스님, 정홍섭 신라대학교 총장, 조규향 동아대학교 총장 등 지역 내 유력인사들이 추진위 상임고문을 맡고, 조 의원이 위원장을 맡아 부산을 해양특별시로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에 돌입한다. 조 의원은 국회에서 와 만나 “정치권의 이념적, 정략적 접근을 떠나 해양특별시를 바라는 부산시민들의 염원을 이뤄내기 위한 정책적 차원의 실천적 행동”이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이어 “해양특별시로 부산의 차세대 성장 동력인 해양물류와 해양관광을 적극 육성하고, 장기적으론 우리나라의 경제수도로 발돋움하기 위한 전략”이라며 “미국, 호주, 독일 등 선진국의 경우 정치수도와 경제수도로 이원화돼 있는데, 국가균형발전 차원에서도 이를 적극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각 전문가 150여명으로 구성된 추진위에서 부산시민들의 여론을 수렴하는 동시에 구체적 실무 작업에 들어갈 것”이라며 “약 1년6개월 후엔 특별법 발의가 가능할 것 같다”고 전망했다. 2012년 7월 27일 김문수 새누리당 대통령 경선후보는 "대통령이 되면 부산을 해양거점도시로 만들고, 부산특별시로 승격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김 후보는 이날 부산 사직실내체육관에서 열린 부산·울산 새누리당 대선후보 경선 합동연설회에서 이 같이 밝히며 "세종시도 특별시, 제주도도 특별자치도다. 가능하냐고 물어보겠지만 확실히 해내겠다"고 말했다. 이어 "부산의 그린벨트도 지금 중앙정부가 관리하는 것을 시가 직접 관리하도록 바꾸고, 도시계획과 여러 규제도 시로 위임하겠다"며 "부산을 좀 더 자유로운 도시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2007년 2월 13일 한나라당 대선후보인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가 가칭 동북아 부산포럼(대표 조관홍 동아대학교 교수) 초청특강에서 "국토 동남지역 광역경제권을 수도권에 상응하는 규모로 활성화하고 해양물류도시로서 상해, 천진 등 인근 항만 도시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부산·울산·거제지역을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통합해 특별시로 만드는 방안을 검토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손학규 측 관계자도 "100만과 400만의 도시 규모로는 국제적인 경제에 대응할 수 없다. 따라서 해양특별시를 염원하는 부산과 산업특별시를 추구하는 울산을 통합하여 광역경제권을 형성하고 수도권 중심의 1극체제가 아닌 양극체제로 우리나라 경제권을 편성해야 국제적인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부산과 울산이 상생 발전할 수 있는 보완적 성격으로 통합을 이야기한 것"이라고 덧붙이며, 수도권·중부권·호남권·동남권의 4대 경제권과 강원도와 제주도의 2개 경제권을 부르짖는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의 4+2체제개념과도 연관이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와 관련하여 울산광역시청은 정치인의 주장으로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고 일축했다. 울산 상공계에서도 "부산과 울산을 통합하겠다는 발상은 다분히 부산을 염두에 둔 인기영합적인 발언"이라고 비판하고 "정치적인 면은 제쳐두고라도 인구만 봐도 부산의 3분의 1에도 못미치는 울산이 부산과 대등한 통합이 가능하겠느냐"면서 "만에 하나 양도시가 통합된다면 울산은 부산을 먹여 살리는 생산기지창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2011년 6월 28일 해운대 그랜드호텔에서 열린 글로벌 창조도시 전략세미나에서 배덕광 해운대구청장은 해운대관광특별시 조성을 민선 5기 주요 과제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배 청장은 "지난 7년 동안 3선 구청장으로서 구정을 운영해오면서 지방재정에서부터 인사 등 모든 권한이 중앙정부에 예속되어 있어 지방분권의 현실을 뼈저리게 느꼈다"며 "해운대의 무궁무진한 인프라와 역량을 이용해 관광 특별시를 조성한다면 국가 균형발전과 지방분권 차원에서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고 말했다. 해운대구청은 내부적으로 T/F팀을 구성하고 각계 전문가의 의견을 청취한 결과, 지난 2006년 제주도청이 제주특별자치도청으로 지정된 것처럼 해운대를 영상과 컨벤션, 관광산업으로 자급자족할 수 있는 도시로 변모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덧붙였다. 이를 위해 해운대구청은 해운대특별자치구 설치를 위한 특별법을 제정, 2012년도에 계획된 지방행정체제 개편 방안에 해운대관광특별시 조성과 관련된 내용이 포함되도록 한다는 방침이다. 한편, 해운대구청은 한발 나아가 관광특별시의 시너지 효과 극대화를 위해 인근 구군과의 통합을 제안할 계획이지만 해당 지역의 반응은 냉소적이다. 정부의 지방행정체제 개편 추진이 불투명한 상황 속에서 관련 지방자치단체와의 아무런 협의 없이 해운대구청 독단적으로 내린 결정이라는 것이다. 해운대구와 맞닿아 있는 기장군의 오규석 군수는 "해운대관광특별시 조성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부터 묻고 싶다"며 "통합을 이야기하면서 주변 지자체와 아무런 논의도 없었다는 점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박현욱 수영구청장 또한 "주변 지방자치단체와의 통합을 논하기 하기 전에 해운대구 안에서 벌어지는 지역간 불균형부터 해결해야 한다"고 해운대구청의 독단적인 관광특별시 발표에 불쾌함을 나타냈다. 더욱이 최근 수년 동안 논란이 되어온 부산지역의 동서 간 불균형을 더욱 심화시킬 것이라는 비난의 목소리도 일고 있다. 서부산시민협의회 김영주 공동대표는 "부산지역 내 동서 간 불균형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해운대구가 관광특별시 조성을 추진한다는 것은 지역 이기주의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다"며 "이같은 계획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서부산에 그에 걸맞은 혜택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2년 8월 15일 경주신문은 문화재보호에 따른 경주시민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경주발전 전략의 한 방안으로 거론되던 경주를 문화특별시로 승격시키자 는 운동이 지역의 한 민간단체에 의해 본격 추진된다고 보도하였다. 경주발전협의회(회장 황윤기 전 국회의원)는 최근 경주 특별시 승격추진 계획 건의서를 한나라당을 비롯한 각 정당과 경주시청 등에 제출했다고 밝혔다. 문화특별시 승격 추진 논의는 1990년대 후반 지역내 일부 교수들에 의해 처음제기됐으나 그동안 경주시청과 경주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경주지역출신 국회의원 등이 주로 고도보존특별법 제정운동에 주력하는 바람에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었다. 2002년 11월 2일 경주발전협의회(회장 황윤기)는 경주시를 문화특별시로 승격시켜 줄 것을 대선후보에게 요구하기로 했다. 경주발전협의회는 건의서에서 "중앙정부 주도로 경주의 문화재를 종합정비하고 예산의 집중배정 등으로 외국인 유치에 노력하고 시민들의 사유재산권 보호 등을 위해 경주시를 특별시로 승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2년 11월 4일 경주발전협의회(회장 황윤기)는 경주의 국무총리 산하 문화특별시 지정을 골자로 성타(性陀) 불국사 회주스님, 백상승 경주시장, 이진구 경주시의회 의장, 진병길 신라문화원장을 비롯해 경주시의원 18명 등이 연대서명한 ‘경주 문화특별시 승격 건의서’를 각 정당 16대 대선후보들에게 전달했다. 경주발전협의회는 건의서에서 “불국사 등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2개 지구를 비롯 296점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 문화관광도시인 경주가 인력과 예산부족으로 도굴과 훼손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실정”이라며 “이같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특별시 지정과 함께 이미 국회에 발의되어 있는 고도보존법의 조속한 통과가 필수”라고 주장했다. 특히, “세계각국은 문화재 관리로 인해 시민들이 입는 피해를 최소화 하는 법률을 제정해 문화재 보호와 사유재산권 행사를 조화롭게 해결해 오고 있는 추세”라며 “지금까지 문화재 보존을 이유로 시민의 일방적인 희생만을 강요당해온 지금 시민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는 방안이 강구되어야 한다”고 경주발전협의회는 밝혔다. 경주발전협의회 황윤기 회장은 “경주 특별시 지정이 대선공약에 포함될 수 있도록 각 정당을 순회방문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2008년 11월 1일 경주보문단지 내 드림센터 회의실에서 개최된 제2회 신라학국제학술대회의 특별강연에서 경북대학교 문경현 명예교수는 ‘경주시의 문화특별시 지정 당위성’이라는 주제로 경주시를 특별시로 승격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 교수는 경주가 세계적 유물과 유적 위에 건설된 도시이기에 이같은 고적보존과 복원을 위해서는 체계적인 개발을 해야됨에도 지방자치단체의 능력으로는 재정감당이 안돼 수많은 유적지가 훼손일로에 있으므로 하루빨리 특별시로 승격시켜 국가가 특별예산지원을 맡아야 된다고 주장했다. 2013년 1월 10일 미디어워치에 따르면 일각에서 망국적 지역감정을 타파하고 국민대통합을 위해서는 신설되는 해양수산부 주도로 섬진강 주변 도시들을 묶어 ‘남해안해양특별시’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한국해양대학교 김성국 박사는 ‘남해안해양특별시’는 기존의 섬진강 주변 도시들을 묶어 특별자치시를 만들자는 ‘섬진광역시’ 계획에서 한단계 더 나아간 계획으로 단순히 행정적인 통합이 아니라 해양을 매개체로 하여 거대 해양산업도시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남해안시대를 위한 의원 연구모임’(공동대표 한나라당 정의화·이주영, 민주통합당 김성곤 의원)은 지난 2011년 12월 27일 ‘남해안 발전을 위한 정책토론회’를 개최하고, 지역감정 해소를 위해서 섬진강을 중심으로 인접한 도시들 묶어 인구 130여만명의 ‘섬진광역시’를 만들어야 한다고 발표한 바 있다. 가칭 ‘섬진광역시’에는 전라남도 여수시, 순천시, 광양시 및 경상남도 남해군, 하동군, 사천시가 포함되며, 교육과 관광, 미래 첨단기술과 성장동력 산업을 결합시킨 미래 친환경 복지도시로 만든다는 계획이었다. 한국해양대학교 김성국 박사는 이 남해안해양특별시 가 성공적으로 추진되기 위해서는 기획재정부의 경제자유구역의 관리권 이관, 지식경제부(현 산업통상자원부)의 조선산업 관리기능 이관, 국토해양부(현 해양수산부)의 도서 및 해양과 이어진 육지부분 개발권 이관, 행정자치부(현 안전행정부)의 행정구역개편 등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광역시 특별자치시 도 특별자치도 특정시 자치구 광역군(직할군) 서울특별시행정에 관한 특별법 - 국가기록원 분류:1946년 설치 분류:대한민국의 행정 구역 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정 구역
조선 팔도 팔도 (八道)는 1895년까지의 조선의 광역 행정 구역을 이르는 명칭이다. 1413년 태종은 한반도를 여덟 개의 도로 분할하였는데, 팔도는 조선 시대 대부분의 기간 동안 대체적으로 그 행정 구역을 유지하였다. 1895년(고종 32년)에 23부제를 시행해 급진적으로 해체되었다가, 이듬해인 1896년에 팔도 중 남부 3개 도와 북부 2개 도를 남·북도로 나눈 13도제가 시행되었다. 팔도 라는 말은 오늘날에도 한반도의 여러 지방 을 통틀어 일컫는 말로 쓰이며, 여러 지방의 아리랑이 팔도 아리랑 으로, 여러 지방의 김치가 팔도 김치 로도 불린다. 그러므로 팔도 라는 말은 한민족의 전통 문화 라는 의미로도 쓰인다고 할 수 있다. 각 도의 이름은 그 도의 대표적인 도시의 이름의 첫 두 글자로 만들었다. 예를 들면, 충청 은 충주의 충 과 청주의 청 을 따서 만들었다. 경기도만 예외적으로 수도(京) 사방 500리 이내로 임금이 직접 관할하는 땅 이란 뜻으로 기(畿) 라는 이름이 붙었다. 아래의 표는 도청 소재지와 지방 이름에 대하여 고산자 김정호가 1857년에 제작한 동여도(東輿圖) 및 1896년의 행정구역 개편을 따라서 정리한 것이다. 이름 이름의 유래 지방 방언 수부(首部) 감영 위치 1896년의 지명 현재의 행정 구역 강원도(江原道) 강릉 + 원주 관동 영동 영동 방언영서 경기 방언 원주 강원도 강원도 (남) 강원도 (북) 경기도(京畿道) 수도권 기전(畿甸) 경기 방언 한성 (돈의문 밖) 경기도 경기도 서울특별시 인천광역시 일부 황해북도 일부 경상도(慶尙道) 경주 + 상주 영남 동남 방언 상주 (1601년) → 대구 경상남도경상북도 경상남도 경상북도 부산광역시 대구광역시 울산광역시 전라도(全羅道) 전주 + 나주 호남 전라 방언 전주 전라남도전라북도 전라남도 전라북도 제주특별자치도 광주광역시 충청도(忠淸道) 충주 + 청주 호서 충청 방언 충주 (1602년) → 공주 충청남도충청북도 충청남도 충청북도 대전광역시 세종특별자치시 평안도(平安道) 평양 + 안주 관서 서북 방언 평양 평안남도평안북도 평안남도 평안북도 자강도 량강도 일부 평양직할시 남포특별시 함경도(咸鏡道) 함흥 + 경성 관북 함경도 방언 함흥 (1600년) → 영흥 함경남도함경북도 함경남도 함경북도 량강도 일부 라선특별시 황해도(黃海道) 황주 + 해주 해서 황해도 방언 해주 황해도 황해남도 황해북도 인천광역시 일부 이십삼부제 (1895) 십삼도 (1896) 한국의 지방 구분 한국의 행정 구역 대한민국의 행정 구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정 구역 분류:조선의 행정 구역 분류:1413년 설치 분류:1895년 폐지 분류:명수 8
대한민국의 행정구역 지도 시, 군, 자치구 전체 지도 대한민국의 행정 구역 (大韓民國의 行政 區域)은 대한민국의 통치권을 행사하는 지역에서 1개의 특별시, 6개의 광역시, 8개의 도, 1개의 특별자치시, 1개의 특별자치도로 구성된다. 이상 총 17개의 행정구역은 광역지방자치단체로 분류된다. 특별시는 자치구로, 광역시는 자치구와 군으로, 도는 자치시와 군으로 하위 행정구역을 둔다. 이상의 행정구역은 기초지방자치단체로 분류된다. 특별자치시는 그 자체로 하나의 기초지방자치단체를 구성한다. 특별자치도는 자치시가 아닌 행정시를 둘 수 있으며, 행정시는 특별자치도지사 직속으로 그 역할을 하며 기초지방자치단체로서의 권한이 없다. 2016년 10월 기준으로 특별시와 6개 광역시에는 총 69개의 자치구가 설치되어 있으며, 또한 6개 광역시와 8개 도에는 총 75개의 자치시와 82개의 군이 설치되어 있다. 특별·광역시를 제외한 인구 50만명 이상의 시에는 일반구를 둘 수 있다. 일반구는 기초지방자치단체로서의 권한이 없어, 특별·광역시에 설치된 자치구와 구별된다. 일반구의 구청장은 일반직 지방공무원으로 보(補)하고 시장이 임명한다. 구청장은 시장의 지휘·감독을 받아 소관 국가사무 및 지방자치사무를 맡아 처리하고 소속 직원을 지휘·감독한다. 시(자치시, 행정시)와 구(자치구, 일반구)는 읍·면·동으로, 군은 읍·면으로 하위 행정구역을 둔다. 다시 읍·면은 행정리로, 동은 통으로 나뉜다. 통 및 행정리는 말단 행정 구역인 반으로 나뉜다. 광역지방자치단체 기초지방자치단체 비자치구역 특별시 자치 구 행정 동 통 반 광역시 군 읍 · 면 행정 리 도 자치 시 읍 · 면 행정 동 행정 리 통 특정 시 일반 구 특별자치도 행정 시 특별자치시 행정 구역 넓이 (km²) 인구 시·도청 소재지 시 군 구 서울특별시 605.20 9,770,638 중구 - - 25 부산광역시 769.89 3,436,230 연제구 - 1 15 대구광역시 883.57 2,458,138 중구 - 1 7 인천광역시 1,062.60 2,956,063 남동구 - 2 8 광주광역시 501.24 1,459,208 서구 - - 5 대전광역시 539.35 1,487,605 서구 - - 5 울산광역시 1,060.79 1,153,735 남구 - 1 4 세종특별자치시 464.87 320,326 보람동 - - - 경기도 10,183.46 13,104,696 수원시, 의정부시 28 3 (17) 강원도 16,875.03 1,540,445 춘천시 7 11 - 충청북도 7,407.29 1,598,868 청주시 3 8 (4) 충청남도 8,226.14 2,125,372 홍성군(예산군과 접경계의 신도시) 8 7 (2) 전라북도 8,069.05 1,832,227 전주시 6 8 (2) 전라남도 12,318.79 1,875,862 무안군(목포시 생활권의 신도시) 5 17 - 경상북도 19,031.42 2,671,587 안동시(예천군과 접경계의 신도시) 10 13 (2) 경상남도 10,539.56 3,371,016 창원시 8 10 (5) 제주특별자치도 1,849.15 667,522 제주시 (2) - - 계 100,387.4 51,829,538 - 75 82 69 자료 행정안전부 지방자치단체 행정구역 및 주민등록 인구 (2019년 2월 기준) 서울특별시의 행정구역 지도 자치구 종로구 · 중구 · 용산구 · 성동구 · 광진구 · 동대문구 · 중랑구 · 성북구 · 강북구 · 도봉구 · 노원구 · 은평구 · 서대문구 · 마포구 · 양천구 · 강서구 · 구로구 · 금천구 · 영등포구 · 동작구 · 관악구 · 서초구 · 강남구 · 송파구 · 강동구 부산광역시의 행정구역 지도 자치구 중구 · 서구 · 동구 · 영도구 · 부산진구 · 동래구 · 남구 · 북구 · 강서구 · 해운대구 · 사하구 · 금정구 · 연제구 · 수영구 · 사상구 군 기장군 대구광역시의 행정구역 지도 자치구 중구 · 동구 · 서구 · 남구 · 북구 · 수성구 · 달서구 군 달성군 인천광역시의 행정구역 지도 자치구 중구 · 동구 · 미추홀구 · 연수구 · 남동구 · 부평구 · 계양구 · 서구 군 강화군 · 옹진군 광주광역시의 행정구역 지도 자치구 동구 · 서구 · 남구 · 북구 · 광산구 대전광역시의 행정구역 지도 자치구 동구 · 중구 · 서구 · 유성구 · 대덕구 울산광역시의 행정구역 지도 자치구 중구 · 남구 · 동구 · 북구 군 울주군 세종특별자치시의 행정구역 지도 하위 행정구역으로 시·군·구의 기초자치단체를 두지 않는 단층제 광역자치단체이다. 경기도의 행정구역 지도 경기도는 지리적으로 남북으로 나뉜 도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28시 3군을 남부와 북부로 나누어 관리하고 있다. 현재 경기 남부는 수원시에 소재한 경기도청에서, 경기 북부는 의정부시에 소재한 경기도청북부청사에서 각종 행정업무를 주관하고 있다. 일반구가 있는 자치시 수원시 : 장안구 · 권선구 · 팔달구 · 영통구 성남시 : 수정구 · 중원구 · 분당구 안양시 : 만안구 · 동안구 안산시 : 상록구 · 단원구 용인시 : 처인구 · 기흥구 · 수지구 자치시 광명시 · 평택시 · 과천시 · 오산시 · 시흥시 · 군포시 · 의왕시 · 하남시 · 이천시 · 안성시 · 김포시 · 화성시 · 광주시 · 여주시 · 부천시 군 양평군 일반구가 있는 자치시 고양시 : 덕양구 · 일산동구 · 일산서구 자치시 의정부시 · 동두천시 · 구리시 · 남양주시 · 파주시 · 양주시 · 포천시 군 연천군 · 가평군 강원도의 행정구역 지도 자치시 춘천시 · 원주시 · 강릉시 · 동해시 · 태백시 · 속초시 · 삼척시 군 홍천군 · 횡성군 · 영월군 · 평창군 · 정선군 · 철원군 · 화천군 · 양구군 · 인제군 · 고성군 · 양양군 충청북도의 행정구역 지도 일반구가 있는 자치시 청주시 : 상당구 · 서원구 · 흥덕구 · 청원구 자치시 충주시 · 제천시 군 보은군 · 옥천군 · 영동군 · 진천군 · 괴산군 · 음성군 · 단양군 · 증평군 충청남도의 행정구역 지도 일반구가 있는 자치시 천안시 : 동남구 · 서북구 자치시 공주시 · 보령시 · 아산시 · 서산시 · 논산시 · 계룡시 · 당진시 군 금산군 · 부여군 · 서천군 · 청양군 · 홍성군 · 예산군 · 태안군 전라북도의 행정구역 지도 일반구가 있는 자치시 전주시 : 완산구 · 덕진구 자치시 군산시 · 익산시 · 정읍시 · 남원시 · 김제시 군 완주군 · 진안군 · 무주군 · 장수군 · 임실군 · 순창군 · 고창군 · 부안군 전라남도의 행정구역 지도 자치시 목포시 · 여수시 · 순천시 · 나주시 · 광양시 군 담양군 · 곡성군 · 구례군 · 고흥군 · 보성군 · 화순군 · 장흥군 · 강진군 · 해남군 · 영암군 · 무안군 · 함평군 · 영광군 · 장성군 · 완도군 · 진도군 · 신안군 경상북도의 행정구역 지도 일반구가 있는 자치시 포항시 : 남구 · 북구 자치시 경주시 · 김천시 · 안동시 · 구미시 · 영주시 · 영천시 · 상주시 · 문경시 · 경산시 군 군위군 · 의성군 · 청송군 · 영양군 · 영덕군 · 청도군 · 고령군 · 성주군 · 칠곡군 · 예천군 · 봉화군 · 울진군 · 울릉군 경상남도의 행정구역 지도 일반구가 있는 자치시 창원시 : 의창구 · 성산구 · 마산합포구 · 마산회원구 · 진해구 자치시 진주시 · 통영시 · 사천시 · 김해시 · 밀양시 · 거제시 · 양산시 군 의령군 · 함안군 · 창녕군 · 고성군 · 남해군 · 하동군 · 산청군 · 함양군 · 거창군 · 합천군 제주특별자치도의 행정구역 지도 하위 행정구역으로 시·군·구의 기초자치단체를 두지 않는 단층제 광역자치단체이다. 다만, 행정시의 형태로 제주시와 서귀포시가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제3조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 고 되어 있다. 따라서 대한민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으며, 휴전선 이북 지역도 대한민국의 영토이다. 그러므로 휴전선 이북 지역의 행정 구분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정 구역을 인정하지 않고 1945년 광복 당시의 행정 구역 구분을 따르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북5도에 관한 특별조치법에 따라 행정안전부 산하에 이북5도위원회를 두고 있으며 도지사 및 시장·군수, 읍·면장을 임명하고 있다. 이북 5도의 지도 깃발 행정 구역 넓이 (km²) 인구 (광복 당시) 도청 소재지 시 수 군 수 100px 함경북도 20,346 1,124,000 청진시 3 11 100px 함경남도 31,977 2,116,000 함흥시 3 16 100px 평안북도 28,443 1,931,000 신의주시 1 19 100px 평안남도 14,939 1,826,000 평양시 2 14 100px 황해도 16,737 2,029,000 해주시 3 17 (휴전선 이북) 경기도 (수원시) 1 2 (휴전선 이북) 강원도 (춘천시) - 5 한국의 행정 구역 일제 강점기의 행정 구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정 구역 대한민국의 행정 구역 목록 대한민국의 도청 소재지 특별시 광역시 특정시 ISO 3166-2:KR 분류:1948년 설치
노벨 문학상 ( - 文學賞, 은 "이상(理想)적인 방향으로 문학 분야에서 가장 눈에 띄는 기여를 한 분께" 수여하라는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에 따라 1901년부터 해마다 전 세계의 작가중 한 사람에게 주는 상이다 (). 때때로 작가 개인의 작품 중 주목할 만한 특정 작품이 있는 경우가 있지만, 여기에서 "기여"란 한 작가가 쓴 작품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스웨덴 한림원이 특정 년도에 상을 받을 사람을 결정하며 수상자의 이름을 10월 초에 발표한다. 이 상은 다섯 분야의 노벨상 중 하나로 1895년에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에 따라 제정되었다. 다른 노벨상은 노벨 화학상, 노벨 물리학상, 노벨 평화상, 노벨 의학상 그리고 노벨 경제학상이 있다. 노벨 문학상은 작품에 수여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에게 수여한다. 문학 상이라는 번역에서 따라나오는 일반적인 오해로서, 역사가나 철학자에게 수여한 경우에 대해서 의문을 품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Literature가 문학에만 국한된 단어가 아닌, 쓰는 행위 일반에 대한 것이기 때문으로, 이 때문에 베르그송과 몸젠 같은 철학자나 역사가가 그들의 유려한 문체와 사상으로써 이 상을 수여받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다만 20세기 중반부터는 대개 문학가에 국한하여 수여하고 있다. 초기에는 노벨이 명시한 이상적라는 기준을 문학적 이상주의라는 협의로서 해석하여 수상 여부를 결정하였으나, 시대가 지나면서 점차 보다 광의의 이상 으로서의 기준을 적용하게 되었다. 1914년, 1918년은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시상식이 보류되었고, 1935년은 기타 사유로 인해 수상자가 없었다. 1940년부터 1943년까지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시상식이 보류되었다. 1958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소련 당국의 탄압으로 인해 수상을 거절했으며 1989년에 그의 아들이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그의 노벨 문학상 메달을 대신 받았다. 196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장폴 사르트르는 수상을 거부했다. 2018년에는 스웨덴 한림원에서 일어난 미투 운동 스캔들의 여파로 인해 수상자 선정이 보류되었다. 이에 따라 스웨덴 한림원 측은 2019년에 2명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선정할 예정이다. http://www.nobel.se/literature/laureates/index.html 분류:1901년 설립
1951년의 카와바타 야스나리 카와바타 야스나리의 탄생지에 세워진 비석 카와바타 야스나리 (, 1899년 6월 14일 ~ 1972년 4월 16일)는 일본의 소설가이다. 오사카부 오사카 시 기타 구의 차화정(此花町, 지금의 덴진바시 부근)에서 태어났다. 동경제국대학 문학부 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요코미쓰 리이치(横光利一) 등과 함께 『분게이지다이(文藝時代)』를 창간하여, 당시 유럽의 허무주의, 미래파, 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문학 유파였던 신감각파(新感覺派)의 대표적 작가로서 활약하였다. 『이즈의 무희()』, 『설국()』, 『천 마리의 종이학()』, 『산소리()』, 『잠든 미녀()』, 『고도() 』 등 죽음이나 유전 속 일본미(日本美) 를 표현한 작품들을 발표했고, 1968년(쇼와 43년)에 일본인으로서는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1972년(쇼와 47년)에 만 72세(향년74세)로 사망하였다. 1899년(메이지 32년) 6월 14일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의사였던 에이키치(榮吉)이고 어머니는 겐(ゲン). 누나는 와카코(芳子)였다. 1901년(메이지 34년)에 아버지가 죽고 외가가 있던 오사카부 니시나리 군(西成郡)의 도요사토무라(豊里村, 지금의 오사카 시 히가시요도가와구淀川区)로 옮겼으나 이듬해에 어머니마저 죽고 할아버지 미하치로(三八郞), 할머니 가네(カネ)와 함께 미시마 군(三島郡) 도요카와무라(豊川村, 지금의 이바라키茨木 시)로 옮겼다. 1906년(메이지 39년) 도요카와 심상고등소학교(豊川尋常高等小学校, 지금의 이바라키 시립 도요카와 소학교)에 들어갔는데, 이때 동급생으로는 사사가와 료이치(笹川良一)가 있었고 할아버지와는 함께 바둑을 두는 등 사이가 좋았지만, 9월에 할머니가 죽고 1909년(메이지 43년)에는 따로 살고 있던 누나마저 사망하는 비극이 이어졌다. 1912년(메이지 45년) 오사카 부립 이바라키 중학교(지금의 오사카 부립 이바라키 고등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하였다. 2년 뒤 할아버지까지 죽자 도요사토무라(豊里村)의 구로다(黒田) 집안으로 들어가게 되지만, 중학교 기숙사에 들어가 그곳에서 생활했다. 하급생으로 오오야 소이치(大宅壮一)가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도라타니(虎谷) 라는 이름의 책방이 있어 얼마 안 되는 돈을 털어 그곳까지 책을 사러 가곤 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시절의 카와바타 야스나리(1917년). 작가에 뜻을 두게 된 것은 중학교 2년때의 일로 1916년(다이쇼 5년)부터 『교한신보(京阪新報)』에 단편, 『분쇼세카이(文章世界)』에 단가를 투고하게 되었다. 1917년(다이쇼 6년)에 졸업하자 도쿄로 상경해 아사쿠사(浅草) 구라마에(蔵前)의 사촌 집에서 얹혀 살면서 예비학교에 다니기 시작하여 제1고등학교의 1부 을(乙) 영문과에 들어갔다. 이듬해 가을에 이즈(伊豆)를 여행하다가 떠돌이 예인과 만나 교유한 경험은 훗날 『이즈의 무희』의 모티브가 되었다. 그 뒤 10년 동안 유가시마(湯ヶ島) 온천 여관을 드나들게 되었다. 1920년(다이쇼 9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제국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하지만, 이듬해 국문과로 전과했다. 대학 동기로는 기타무라 기하치(北村喜八)、혼다 아키라(本多顕彰)、스즈키 히코지로(鈴木彦次郎) 등이 있었다. 입학한 해에 곤 도코(今東光)、스즈키 히코지로 등과 함께 동인지 『신사조(新思潮)』(제6차) 발행을 기획하여 국문과로 전과한 이듬해에 실행에 옮겼고, 그곳에 발표한 작품 「초혼제일경()」이 기쿠치 간()에게 인정받아 『분게이슌주(文芸春秋)』(1923년 창간)의 동인이 되어 문인의 길에 들어섰다. 1924년 대학을 졸업하고(졸업 논문은 「일본소설사 소론日本小説史小論」) 요코미쓰 리이치, 가타오카 갓페이(片岡鉄兵), 나카가와 요이치(中河与一), 사사키 모사쿠(佐佐木茂索), 곤 도코 등 14명과 함께 동인지 『분게이지다이()』를 창간, 「이즈의 무희」를 지면에 발표하며 문단에 등장했다. 초기에는 왕조문학이나 불교 경전의 영향을 받아 허무한 슬픔과 서정성이 넘치는 작품을 많이 썼다. 이후 비현실적인 미의 세계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전환해 「설국」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1937년 「설국」이 일본의 문예간담회상을 수상하였고, 1944년(쇼와 10년)에 「고향(원제 )」, 「석일(원제 )」 등의 작품으로 기쿠치 간 상을 수상한다. 이 무렵 미시마 유키오()가 가져온 「담배(원제 )」를 호평하였는데, 미시마에게 있어 카와바타는 그를 문단에 데뷔시킨 스승과도 같은 존재였다. 1945년(쇼와 20년) 4월에 일본 해군보도반(海軍報道班) 반원(소좌 대우) 자격으로 가지마(鹿島)까지 따라가 가미카제를 취재하기도 했다. 이때 함께 갔던 야마오카 소하치(山岡荘八)는 그 자신의 작가관까지 바뀔 정도의 충격을 받았고, 카와바타는 이때의 일을 토대로 「생명의 나무(원제 )」를 집필하였다. 그 뒤 「천 마리의 종이학」, 「산소리」 등을 단속적으로 발표하면서, 패전 뒤인 1948년에는 일본 펜클럽 제4대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또한 1957년에는 도쿄에서 열린 국제 펜클럽 대회에서 주최국 일본측의 회장으로서 활약하여 이듬해에 기쿠치 간 상을 또 한 번 수상한다. 1958년에 국제 펜클럽 부회장으로 취임하였다. 또한 1962년 세계평화 어필 7인 위원회에 참가하였고, 1963년에는 새로 생긴 일본근대문학관()의 감사(監事)역을 맡게 되었다. 1964년 노르웨이의 오슬로에서 열린 국제 펜클럽 대회에 출석하였다. 단속적으로 작품 「단포포()」의 연재를 『신조()』에 시작하였다. 1965년에 일본 펜클럽 회장직을 사임하였는데, 그 이듬해에 맹장염으로 도쿄대학 병원에 입원하였다. 무려 12년간이나 창작에 심혈을 기울였다는 《설국》은 카와바타의 미의식이 절정을 이루는 작품으로, 그 문학성이 인정되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68년 10월,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일본인의 심정의 본질을 그린, 몹시 섬세한 표현에 의한 서술의 탁월함(for his narrative mastery, which with great sensibility expresses the essence of the Japanese mind)."이 노벨상 위원회의 수상평이었다. 12월의 스톡홀름에서의 수상식에서 카와바타는 연미복이 아니라 일본 정부가 수여한 문화 훈장이 달린 몬쓰키하오리하카마(紋付羽織袴) 차림으로 수상에 임했고, 기념 강연 「아름다운 일본의 나() 그 서론」을 행했다. 이후 1969년부터 1974년에 걸쳐 신초샤에서는 「카와바타 야스나리 전집」(전19권)이 간행되었고, 타이베이의 아시아 작가 회의뿐 아니라 1970년에 한국에서의 서울 국제펜클럽 대회에 출석하였으며 일본 근대 문학관의 명예 관장으로도 취임했다. 하지만 노벨상 수상 뒤에 발표한 작품은 단편 몇 개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는 노벨상 수여에 따른 중압이 원인이었다고 한다. 2012년 9월 4일, 스웨덴 아카데미가 NHK의 공개 청구에 응하여 개시한 노벨 문학상 전형 과정의 자료를 통해 카와바타가 노벨상을 수상하기 7년 전인 1961년에 이미 노벨상의 후보로 결정되어 있었음이 밝혀져 NHK 뉴스를 통해 보도되었다. 노벨 문학상 3년 뒤인 1972년 4월 16일, 가나가와현 즈시 시의 맨션 「즈시 마리나」의 자택 작업실에서 카와바타 야스나리는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사인은 가스에 의한 자살. 향년 73세였다. 계명은 문경원전고산강성대거사(文鏡院殿孤山康成大居士) , 대도원수예문화강성거사(大道院秀藝文華康成居士) . 1973년에 재단법인 카와바타 야스나리 기념회에 의해 카와바타 야스나리 문학상이 제정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1985년에는 이바라키 시립 카와바타 야스나리 문학관 이 개관했다. 또한 이바라키시 명예 시민으로도 임명되었다. 이즈의 무희() 설국() 고도() 단포포() 산소리() 여자라는 것() 명인() 이즈의 여로() 무희() 이 외 다수. 1937년 - 「설국」으로 문예간담회상 수상 1944년 - 「고향」, 「석양」 등으로 기쿠치간상 수상 1952년 - 「천 마리의 종이학」으로 예술원상(芸術院賞) 수상 1954년 - 「산소리」로 제7회 노마 문예상(野間文芸賞) 수상 1958년 - 도쿄 국제 펜클럽에서 활약한 데에 대한 노고 치하로서 제6회 기쿠치간상 수상 1962년 - 「잠든 미녀」로 제16회 마이니치 출판 문화상(毎日出版文化賞) 수상 1968년 - 노벨 문학상 수상 카와바타 야스나리는 일본 문학사에 찬연히 빛나는 수많은 명작을 남긴 근현대 일본 문학의 중요한 작가로 오늘날까지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을 쓴 작가로 소개되곤 한다. 주요 작품은 대부분 문단의 연구 대상이 되었고 본인도 전문 잡지 등에 기고한 창작에 관한 수필 등에서는 약간 요설(饒舌)에 기술하는 것이 있었기에 작품 속에 다소 각색된 모델이나 로케이션, 등장 사물이 순전한 창작(가공의 사건)에 의한 것은 아니었음이 구체적으로 판명된 경우도 많다. 부립 이바라키 중학에 수석으로 입학하여 신동으로 불렸다. 다만 수필 등에서 나오듯이 카와바타의 관심은 입학한 뒤에 곧장 예술이나 어른들의 세계로 향하고 있었고 학교 공부는 뒷전이었다. 현재 남아있는 그의 졸업 성적표에 보면 카와바타의 작문 성적은 53점으로 전학생 88명 가운데 86등이었다. 교토 안에 현존하는 유일한 양조장 사사키 주조(佐々木酒造)에서 만든 일본술을 맛보고 "이 술의 풍미야말로 교토의 맛이다"라며 작품 이름을 「고도」라 지었다. 만년에 카와바타는 숙박지에서 구와바라 다케오(桑原武夫, 교토대 명예교수)와 면회했을 때에 "고도라는 술을 알고 계신가?" 라고 물어서 모른다고 대답한 구와바라에게 그 술을 맛보여 주고자 추운 밤에 직접 30분 걸리는 길을 걸어서 사러 갔다고, 구와바라는 회상하고 있다. 일본 기원(日本棋院) 내에 있는 대국용 방에는 카와바타가 쓴 「심오유현(深奥幽玄)」이란 족자가 있다. 바둑을 좋아하여 당시 조선인 출신으로 일본에서 문명을 떨치고 있던 김소운(金素雲)이 카와바타의 집에 갔다가 바둑판을 발견하고 "바둑을 얼마나 두십니까?" 라고 묻자 카와바타는 "그저 조금 두지요."라고 대답했고, 당시 8, 9급 수준도 되지 못했던 김소운은 자신 정도의 실력이려니 짐작하고 "언제 한 수 배울까요?" 하고 그에게 대국을 제안했고 카와바타는 "네, 연락 드리지요." 하고 승락했다. 하지만 돌아와서야 카와바타가 명인전(名人戰)의 기보(棋譜)까지 쓸 정도의 아마추어 최상급의 바둑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실수했음을 깨달았고, 마침 카와바타가 전화를 걸어 지난 번 약속대로 바둑을 두자고 하는 것에 다른 핑계를 대고 빠져버린 뒤, 『분게이슌주』에 수필을 실어서 카와바타에게 답했다고 한다. 전쟁 중에 가노야 해군항공대(鹿屋海軍航空隊)에 첩보반으로서 부임하고 있었을 무렵, 부대 소속의 소위 스기야마 유키테루(杉山幸照)는 그에게 예전 연료 보급을 위해서 착륙한 스즈카에서 오랜 비행으로 지쳐 얼굴이 창백한 와중에도 사관 식당에서 나온 카레라이스를 기운이 다 빠진 상태에서 깨끗이 비웠던 경험을 말하며 특공의 비인간성 에 대해 카와바타에게 이야기했다고 한다(당시 스기야마는 원래 특공대 쇼와대 소속으로, 전속 명령이 나와 카와바타와 함께 야타베의 해군 기지로 가는 중이었다). 스기야마는 훗날 자신의 저작에서 카와바타가 끝까지 특공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 유감이었다고 적고 있다. 카와바타는 부임전에 일본군 본영의 보도부 소속 다카도(高戸) 대위로부터 "특공을 잘 봐 두십시오. 다만 쓰고 싶지 않으면 쓰지 않으셔도 좋다. 언젠가는 이 전쟁의 실상을 글로 써주셨으면 좋겠다"라는 통고를 받았던 것이다. 후에 다카도는 "섬세한 신경이었기에 (특공에 관해서) 붓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하고 있다. 사망 당시 그의 사인은 자살로 보도되었고 이것이 통설이 되었는데, 이에 대해서 카와바타의 사망 전후 상황으로 볼 때 자살이 아닌 사고사가 아니냐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 교제가 깊었던 미시마 유키오의 할복 자살(이때 카와바타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여겨지며, 미시마의 장례식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 1971년 도쿄도지사 선거에 출마했던 자유민주당 후보 하타노 아키라(秦野章)의 지원 활동에 떠밀려 나간 것에 대한 수치(하타노는 낙선했다. 다만 카와바타가 본래 정치에 관심이 있었다고 하는 형적은 없다) # 늙음(창작 의욕의 감소)에 대한 공포 등으로 인한 강한 정신적 동요 # 카와바타가 좋아했던 가정부의 퇴직(이는 1977년 우스이 요시미의 소설로도 각색되었으나 유족들로부터 명예훼손 소송을 당해 합의 조건으로 절판). 이상이 카와바타의 자살 동기로서 거론되는 정황 증거들이지만, 자살설을 비판하는 측에서는 첫 번째 증거는 일시가 너무 떨어져 있고 두 번째 증거는 자살 동기로서는 너무 약하고, 세 번째 증거는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문예 평론가의 해석일 뿐 구체적 증명은 없으며 네 번째 증거도 주관적 기술에 불과하며 사실 검증은 되어 있지 않음을 지적하였다. # 이전부터 카와바타는 줄곧 수면제를 복용하고 있었다(심야에 집필하는 일이 많은 작가들에게서 수면제 복용은 드문 것이 아니다). # 유서가 없었다. # 보통 스스로 조작한적 없는 난방 기구의 사용 착오(가스 스토브의 미연소 가스가 방에 가득했다고 여겨진다). # 카와바타 일본 펜클럽 회장으로 있을 때의 부회장이었던 세리자와 고지로(芹沢光治良)는, 추도기 「카와바타 야스나리의 죽음(川端康成の死)」에서 자살은 아니었을 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카와바타의 죽음 전후로 그를 만났던 여러 관계자의 증언에서 카와바타가 자살했음을 암시해주는 어떤 징후도 없었다는 것이다(카와바타 자신도 그 해 가을에 개최된 국제 펜클럽 대회의 준비에서 책임자로서 여러 일을 하고 있었다). 미시마 유키오 오에 겐자부로 Hanami Web - Kawabata Yasunari 분류:1899년 태어남 분류:1972년 죽음 분류:일본의 소설가 분류:일본의 작가 분류:노벨 문학상 수상자 분류:일본의 노벨상 수상자 분류:오사카시 출신 분류:도쿄 대학 동문 분류:자살한 작가 분류:일본의 자살한 사람 분류:기쿠치 간상 수상자 분류:훈1등 욱일대수장 수훈자
보사노바 (, 새로운 성향)는 브라질 대중음악의 한 형식으로 1960년대에 브라질의 세계적인 작곡가 안토니오 카를루스 조빙(Antonio Carlos Jobim), 보사 노바의 신이라 불리는 주앙 지우베르투(João Gilberto)가 발전시켰다. 삼바(Samba)에서 나온 음악 형식이지만, 삼바보다 멜로디가 더 감미롭고, 타악기가 덜 강조된다. 이 장르는 재즈에서 큰 영향을 받았고, 1960년대에 미국, 브라질에서 크게 유행했다. 1959년 영화 《흑인 오르페우(Orfeu Negro)》(수록곡 카니발의 아침(Manhã de Carnaval))가 1960년 아카데미 외국 영화상을 수상한 이후 스탠 겟츠(Stan Getz)와 조아웅 지우베르뚜가 함께 녹음한 앨범 Getz/Gilberto와 그 앨범의 수록곡이며 아스트루지 지우베르뚜(Astrud Gilberto)가 부른 The Girl from Ipanema가 1965년 미국 빌보드, 그래미 어워드를 휩쓸며 전 세계적으로 보사 노바 붐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독일 재즈 평론가 요아힘 E 베렌트는 저서 재즈북 에서 "보사 노바는 삼바와 쿨 재즈가 합쳐진 것"이라고 규정했다. 브라질 뮤지션 이름의 발음에 관하여 포루투갈어의 R은 단어의 앞에 쓰일 경우 ㅎ발음을 한다, AL로 끝나는 이름은 아우로 발음한다 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빙(Antonio Carlos Jobim) 통 조빙(Tom Jobim)이라고도 부른다. 주앙 지우베르투(João Gilberto) 비니시우스 지 모라이스(Vinicius de Moraes) 호베르투 메네스카우(Roberto Menescal) 카를루스 리라(Carlos Lyra) 도리바우 카이미(Dorival Caymmi) 호자 파수스(Rosa Passos) 아스트루지 지우베르투(Astrud Gilberto) 오노 리사(小野リサ) 마르쿠스 발리(Marcos Valle) 가우 코스타(Gal Costa) 루이스 봉파(Luiz Bonfa) 스탠 게츠(Stan Getz) 엘리스 헤지나(Elis Regina) 세르지우 멘지스(Sergio Mendes) Aderbal Duarte Bossa Nova 분류:재즈 장르 분류:포르투갈어계 외래어
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빙 (, 안토니우 카를로스 조빔, 1927년 1월 25일, 리우 데 자네이루 ~ 1994년 12월 8일 뉴욕)은 브라질 출신의 세계적인 작곡가, 가수, 피아니스트로 보사 노바(Bossa nova)의 전설을 만든 인물이다. 통 조빔 (Tom Jobim)이란 이름으로도 유명하다. 섬세한 멜로디와 하모니로 유명한 조빙의 곡들은 브라질뿐 아니라 전 세계의 음악가들에 의해 연주되었다. 조빙이 주로 같이 작업한 가수로는 보사 노바의 또다른 창시자로 불리는 주앙 지우베르투(João Gilberto)와 엘리스 헤지나(Elis Regina), 세르지우 멘데스(Sergio Mendes), 아스트루드 지우베르투(Astrud Gilberto), 스탠 게츠(Stan Getz), 프랭크 시나트라 등을 들 수 있다. 조빙의 음악적 뿌리는 1930년대 현대 브라질 음악의 시효가 되었던 전설적인 음악가 피싱기냐(Pixinguinha)의 작품에서 찾을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조빙은 프랑스 인상주의 작곡가인 클로드 드뷔시와 재즈의 영향도 받았다. 조빙이 브라질에서 이름을 알린 것은, 시인이자 외교관인 비니시우스 지 모라이스(Vinicius de Moraes)와 1956년 연극 《Orfeu de Conceição》의 음악을 맡았을 때였다. 이 극에서 가장 유명해진 곡은 〈Se todos fossem iguais a você〉(내 삶을 밝혀줄 누구)였다. 이후 이 연극을 원작으로 프랑스 제작자인 Sacha Gordine가 영화 《흑인 오르페우》(Orfeu de Negro)를 만들 때 Gordine은 새로운 곡으로만 영화를 채우고 싶어 했고, 모라이스와 조빙에게 새로운 곡을 써주길 부탁한다. 그러나 모라이스는 제작당시 우루과이의 몬테비데오에 머물고 있었고, 둘은 전화를 통해서 단지 3개의 곡만을 만들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곡이 〈A Felicidade〉, 〈Frevo〉, 〈O Nosso Amor〉이다. 이 둘의 작업은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이후에도 모라이스는 조빙의 곡 중 가장 유명한 곡들의 가사를 써 주었다. 편곡가이자 지휘자, 작곡가인 클라우스 오거만(Claus Ogerman)은 조빙의 많은 곡들을 편곡해 주었다. 조빙은 그래미상을 수상한 1963년 《게츠/질베르투》GETZ/GILBERTO 앨범으로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이 앨범인 아스트루드 질베르투가 부른 대히트곡 〈The Girl from Ipanema〉가 수록되어 있다. 이후에도 조빙은 수많은 아름다운 앨범을 작곡한다. 조빙과 그의 작품들은 전 세계의 많은 음악가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예를 들면 미국의 재즈가수 엘라 피츠제럴드 와 프랑크 시나트라는 각각 《Ella Abraça Jobim》 (1981) 와《Francis Albert Sinatra & Antonio Carlos Jobim》(1967)란 앨범에서 조빙의 곡들을 불렀다. 조빙의 앨범인 《Wave The Antonio Carlos Jobim Songbook》(1996)은 오스카 피터슨, 허비 행콕, 칙 코리아, 투츠 틸레망 등의 연주를 수록하고 있다. 조빙은 세계적으로 20세기 음악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다. 1994년 12월 8일 죽음에 이를 때까지도 그는 계속 음악을 만들었으며, 마지막 앨범인 《Antonio Brasileiro》은 사후 발매되었다. 조빙은 리우데자네이루의 상 조앙 바치스타(São João Batista) 묘지에 묻혔으며, 리우데자네이루 공항의 이름은 1999년 그를 기념하여 갈레앙-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빙 공항(Galeão - Antônio Carlos Jobim)으로 바꾸었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하계 패럴림픽 마스코트인 통은 여기서 유래된 이름이다. "Chega de Saudade" (1957) 보사노바의 대표적인 곡 "Água de Beber" "Desafinado" (1959), 그래미상 3개 수상 "Samba de Uma Nota Só" (1959) "A Felicidade" e "O Nosso Amor", 영화 "흑인 오르페"" Orfeu Negro (1959) "Insensatez" (How Insensitive)(작사 Vinícius de Moraes) (1960) "Garota de Ipanema" (The Girl from Ipanema)(작사 Vinícius de Moraes) (1963) "Fotografia" (1965) "Triste" (1967) "Wave" (1967) "Águas de Março" (1970) "Luiza" "Corcovado" "Dindi" "Retrato em Branco e Preto" (시꾸 부아르끼 Chico Buarque와 공동작곡) "Samba do Avião" "Anos Dourados" "Meditação" "Só Tinha de Ser com Você" (1974) "Sabiá" "Eu sei que vou te amar" "Falando de amor" "Ela é carioca" "Bebel" "O Grande Amor" "Voce Vai Ver" (You ll See) "O Morro Não Tem Vez" (일명 "Favela") "Inútil Paisagem" (Useless Landscape) "Vivo Sonhando" (Dreamer) "Se Todos Fossem Iguais A Voce" "Só danço samba " "Amor em paz" (Once i loved) The Composer of Desafinado, Plays (Verve, 1963) Antonio Carlos Jobim (Elenco, 1964) The Wonderful World of Antonio Carlos Jobim (Warner, 1964) A Certain Mr. Jobim (Warner, 1965) Wave (A&M/CTI, 1967) Stone Flower (CTI, 1970) Tide (A&M/CTI, 1970) Matita Perê (Philips, 1973) Jobim (MCA, 1973) Urubu (Warner, 1975) Terra Brasilis (Warner, 1980) Passarim (PolyGram, 1987) Antonio Brasileiro (Columbia, 1994) Inédito (BMG, 1995) O Pequeno Príncipe (Festa, 1957) Sinfonia do Rio de Janeiro (Continental, 1954), (Billy Blanco 공동) Orfeu da Conceição (Odeon, 1956) Canção do Amor Demais - Elizete Cardoso (Festa, 1958) Amor de gente moça - Silvia Telles (Odeon, 1959) Chega de Saudade - João Gilberto (Odeon, 1959) Por tôda a minha vida - Lenita Bruno (Festa, 1959) Brasília - Sinfonia da Alvorada (Columbia, 1960) O Amor, o Sorriso e a Flor - João Gilberto (Odeon, 1960) João Gilberto - João Gilberto (Odeon, 1961) Getz/Gilberto - Stan Getz, João Gilberto (Verve, 1963) Jazz Samba Encore! (MGM/Verve, 1963) Caymmi Visita Tom (Elenco, 1965) (Dorival Caymmi , Danilo Caymmi, Dori Caymmi, Nana Caymmi 공동) Garota de Ipanema - vários intérpretes (Philips, 1967) Francis Albert Sinatra & Antonio Carlos Jobim (Reprise, 1967) The Adventurers (Paramount, 1970) Sinatra & Company - Frank Sinatra e Antonio Carlos Jobim (Reprise, 1971) Elis & Tom (PolyGram, 1974) ( Elis Regina 공동) Miucha & Antonio Carlos Jobim - vol. I (RCA, 1977) ( Miúcha 공동) Miucha & Tom Jobim - vol. II (RCA, 1979) (Miúcha 공동) Edu & Tom (PolyGram, 1981) ( Edu Lobo 공동) Gabriela (RCA, 1983), 영화 " Gabriela, Cravo & Canela " 사운드 트랙 O Tempo e o Vento (Som Livre, 1985) Disco de bolso - O Tom de Tom Jobim e o tal de João Bosco (Zen Editora, 1972) Tom, Vinicius, Toquinho, Miucha - 리우의 Canecão 극장 라이브 (Som Livre, 1977) Rio Revisited - Tom Jobim & Gal Costa (Verve/Polygram, 1989) Tom Canta Vinícius (Universal, 2000) Em Minas ao Vivo Piano e Voz (Biscoito Fino, 2004) Ao Vivo em Montreal (Biscoito Fino, 2007) Um encontro no Au bon gourmet (Doxy, 2015) Antonio Carlos Jobim Composer (Warner, 1995) Sinatra-Jobim Sessions (WEA, 1979) Meus Primeiros Passos e Compassos (Revivendo, 1997) Raros Compassos (Revivendo, 2000) The Antonio Carlos Jobim Songbook (Verve, 1994) - Ella Fitzgerald, Oscar Peterson ,Dizzy Gillespie 와 Getz/Gilberto에 참여한 음악가들의 레코딩 분류:1927년 태어남 분류:1994년 죽음 분류:브라질의 작곡가 분류:브라질의 음악 프로듀서 분류:재즈 기타 연주자 분류:재즈 프로듀서 분류:보사노바 음악가 분류:리우데자네이루 출신 분류:포르투갈계 브라질인 분류:작곡가 명예의 전당 헌액자 분류:미국에 거주한 브라질인 분류:20세기 작곡가 분류:포르투갈어 가수
A , a 는 로마자의 첫 번째 글자이다. 라틴어·독일어·네덜란드어·인도네시아어·베트남어·에스페란토 아 aː 프랑스어·이탈리아어·스페인어 아 a 영어 에이 eɪ (오스트레일리아 영어 아이 aɪ) 일본어 에 eː A는 소를 의미하는 그림 문자에서부터 왔다. Egyptian hieroglyphic ox head이집트 상형문자수소 머리 Proto-semitic ox head셈조어 문자수소 머리 Phoenician aleph페니키아 문자 알레프 Greek alpha그리스 문자 알파 Etruscan A에트루리아 문자 A Roman A로마 문자 A 문자 A a 유니코드 이름 인코딩 10진수 16진수 10진수 16진수 유니코드 65 U+0041 97 U+0061 UTF-8 65 41 97 61 수치 문자 참조 A A a a EBCDIC 193 C1 129 81 ASCII 65 41 97 61 문자 A a 유니코드 이름 인코딩 10진수 16진수 10진수 16진수 유니코드 65313 U+FF21 65345 U+FF41 UTF-8 EF BC A1 EF BD 81 수치 문자 참조 A A a a 16진법에서 A는 십진수 10을 나타내는 데 쓰인다. History of the Alphabet 분류:로마자 낱자 분류:모음자
F , f 는 로마자의 여섯 번째 글자이다. 한국어에는 없는 발음이며, 보통은 ㅍ으로 표기한다. 라틴어·독일어·프랑스어·영어·네덜란드어·인도네시아어 에프 ɛf 스페인어 에페 efe 이탈리아어 에페 effe 웨일스어 에브 ev 에스페란토 포 fo f는 국제음성기호에서 무성 순치 마찰음을 나타낸다. f는 수학 약자 중 함수(function)의 약자로 쓰인다 F는 갈고리를 뜻하는 그림 문자에서 왔다. 셈조어 문자 페니키아 문자 와우 그리스 문자 디감마 에트루리아 문자 F 로마 문자 F 셈조어 문자 페니키아 문자 와우 그리스 문자 디감마 에트루리아 문자 F 로마 문자 F F
K , k ( )는 로마 문자의 열한 번째 글자이다. K는 손바닥을 뜻하는 그림 문자에서 유래했다. 셈조어 문자 손바닥 페니키아 문자 카프 그리스 문자 카파 에트루리아 문자 K 로마 문자 K 셈조어 문자 손바닥 페니키아 문자 카프 그리스 문자 카파 에트루리아 문자 K 로마 문자 K k는 국제음성기호에서 무성 연구개 파열음을 나타낸다. K는 스카이캐슬 김주영 딸이다 카프 Κ, κ(그리스 문자) К, к(키릴 문자) K
블로그 ()란 웹(web)과 로그(log, 기록)를 합친 낱말로, 스스로가 가진 느낌이나 품어오던 생각, 알리고 싶은 견해나 주장 같은 것을 웹에다 일기처럼 차곡차곡 적어 올려서, 다른 사람도 보고 읽을 수 있게 열어 놓은 글들의 모음이다. 보통 시간의 순서대로 가장 최근의 글부터 보인다. 그러나 글 쓴 시간을 수정할 수 있는 블로그의 경우에는 시간을 고쳐 글 순서를 바꿀 수 있다. 여러 사람이 쓸 수 있는 게시판(BBS)과는 달리 한 사람 혹은 몇몇 소수의 사람만이 글을 올릴 수 있다. 이렇게 블로그를 소유해 관리하는 사람을 블로거 라고 한다. 블로그는 개인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때에 따라서는 인터넷을 통해 기존의 어떤 대형 미디어에 못지않은 힘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에 1인 미디어 라 부른다. 블로그의 시초는 원래 컴퓨터 통신 게시판에 자신의 이야기를 올리던 것이며, 인터넷이 발달하여 개인적으로 게시판을 운영할 수 있게 되는 서비스와 환경이 제공됨으로써 인기를 끌게 되었다. 처음에 나왔던 블로그에는 단순히 텍스트인 글을 올리고 읽는 기능만 있었으나, 사진, 음악, 플래시, 동영상 등을 포함할 수 있도록 발전하였다. 또한, 블로그에 댓글(Reply)과 트랙백(Trackback)을 달 수 있게 함으로써 독자와 블로거 사이의 의사소통이 확장되었다. RSS나 Atom으로 손쉽게 구독할 수 있도록 하는 질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한다. 텍스트 중심에서 분화되어 멀티미디어 자료를 구독할 수 있는 팟캐스트도 발전하고 있다. 1994년 미국의 저스틴 홀이 시작한 온라인 일기가 가장 초기의 블로그중 하나로 뉴욕 타임즈 등 일간지에 소개되었다. 초기 대부분의 웹페이지에는 새글(What s new)과 차례표(Index) 페이지가 있었으며 이때 차례표는 보통 가장 최신의 글이 위에서부터 게시되거나 순서대로 제목이 나열되는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전자게시판 동호회의 것과 같다. 개인 블로그는 뉴스를 전달하는 기능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데 대체로 다른 뉴스를 베껴 온다. 그러나 매트 드러지가 만든 드러지 리포트 사이트는 전문 뉴스 채널 못지 않는 속보와 특종으로 유명하게 되었다. 초기의 블로그는 간단한 프로그래밍이나 HTML 편집만으로도 가능하였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관리에 힘이 들어가게 되었고 곧 워드프레스, 무버블 타입, 블로거 나 라이브 저널 같은 블로그 소프트웨어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후 기존의 웹 서비스나 포털 서비스에서도 이러한 블로그 기능이 추가되어 개인화한 블로그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그 후 2003년 미-영 연합군의 바그다드 폭격에 한 이라크인이 블로그를 통하여 평화를 주장하여 블로그는 대중화 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2002년 11월 최초의 블로그 서비스 blog.co.kr이 시작되었으며, 2003년 네이버, 다음 등 포털이 블로그 서비스를 시작했다. 다음에서 블로거뉴스라는 메타블로그 서비스를 제공하고 포털 첫화면에 신문 기사와 함께 개인 블로그 포스트를 노출시키면서 블로그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졌다. 국적으로 분류할 수도 있지만 인터넷 접속은 국가 제약을 받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블로그 분류에 국적을 고려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인터넷 검열 때문에 티스토리 등 블로그 서비스에 접속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주로 회원가입 또는 웹호스팅이 필요한가 여부로 블로그를 분류한다. 가입형 블로그는 회원 가입만 하면 손쉽게 블로그를 생성할 수 있다. 포털, 신문사, 인터넷 서점, 블로그 전문 웹사이트 등이 블로그 서비스를 제공한다. 커뮤니티(관심, 즐겨찾기, 이웃 등) 형성, 콘텐츠(뉴스 기사, 책 정보 등) 퍼가기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HTML, CSS를 고칠 수 있는 곳도 있고 없는 곳도 있다. 포털 네이버, 싸이월드, 다음, 야후 등 신문사 오마이뉴스, 조인스닷컴, 한국경제, 조선닷컴, 한겨레 등 인터넷 서점 알라딘, YES24 등 블로그 전문 티스토리,토트, 블로거닷컴, 워드프레스닷컴, 타이프패드, 라이브저널, 이글루스 등 설치형 블로그는 서버에 블로그 저작 소프트웨어를 설치해서 운영할 수 있다. 서버의 다른 공간에 위키나 게시판을 운영할 수도 있고 플러그인 등을 사용할 수도 있다. 서버 컴퓨터를 운영하거나 웹호스팅을 해야 한다. 그래서 별도의 비용이 생기며, 컴퓨터, 네트워크 지식이 필요하다. 설치형 블로그 소프트웨어로 텍스트큐브, 워드프레스, 텍스타일, 무버블 타입 등이 있다. 블로그와 비슷한 인터넷 서비스들로 카페, 개인 홈페이지, SNS 등이 있다. 이러한 서비스 유형들이 고정된 것은 아니다. 인터넷 이전 시대인 1980년대부터 유즈넷이나 상업적인 전자게시판 서비스를 통해 동호회 형태의 커뮤니케이션이 발달하였다. 한국에서는 천리안, 하이텔과 같은 유료 PC 통신에서 여러 가지 동호회 기능을 서비스하고 이들 동호회에서 게시판에 글을 올리고 보는 것이 활성화 됐다. 이러한 게시판에 글이 자주 올라왔고, 회원 사이에서 인기를 끄는 글이 자연스레 생김으로서 온라인 커뮤니티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호회나 카페 등 커뮤니티는 집단적이라는 점에서 블로그와 다르다. PC 통신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등에서부터 시작해 다음의 카페에 이르기까지 ‘공동체 기반 서비스’만이 평정해왔던 한국 인터넷 서비스의 패러다임을 개인으로 처음 옮겨온 것은 네띠앙이다. 네띠앙은 개인 홈페이지 호스팅 서비스를 제공해주었다. 개인 홈페이지 사이의 관계 맺기 기능이 제공되지 않는 단점으로 인해 네띠앙은 점차 몰락한다. 블로그는 댓글, 트랙백, RSS 등 교류 기능을 기본적으로 제공해주고, 편리하게 내용을 고칠 수 있다. 그러나 개인 홈페이지는 편집이 어렵고 다른 사용자와 의견을 나누기도 까다롭다. 네띠앙이 쇠락하고 싸이월드의 미니홈피가 인기를 끌었다. 미니홈피와 비슷한 것으로 미국에는 페이스북, 마이스페이스 등이 있다. 이런 곳들을 통틀어 SNS라고 한다. SNS는 주로 오프라인 인맥에 기반하고 사생활들이 다뤄지기 때문에 대체로 블로그보다 폐쇄적이다. SNS도 댓글 기능이 있지만, 트랙백, RSS 기능은 없다. SNS 중에 트위터, 미투데이, 요즘(yozm) 등과 같이 마이크로 블로그로 불리는 것들은 글자 수 제한이 있는 대신 RSS 기능이 제공된다. 블로그에 광고를 포함시켜 수익을 얻기도 한다. 그러나 들어가는 노력에 비해서 많은 수입을 얻지는 못한다. 네이버 블로그 인스타그램 트위터 페이스북 인터넷에 ‘나’만의 집을 짓는다, 한겨레21, 제622호, 2006년 8월 9일 한국 블로그 문화의 현주소 (특집/기획회의 250호), capcold.net (블로그)
구심력 (求心力, centripetal force)은 원운동에서 운동의 중심 방향으로 작용하여 물체의 경로를 바꾸는 힘이다. 힘의 방향은 물체의 순간의 운동방향과 늘 직교하며, 방향은 곡면의 중심이다. 원운동은 운동방향이 늘 바뀌므로 등속도 운동이 아니다. 원운동 하는 물체의 경우 운동의 방향이 늘 바뀌므로 가속도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뉴턴의 운동 제1법칙에 따라 힘이 작용한다고 볼 수 있는데 이 힘을 구심력이라고 한다. 구심력은 물체의 속도 벡터에 수직으로 작용하므로, 물체의 속도의 방향만을 변화시키고 속도의 크기는 변화시키지 않는다. 또한 구심력은 물체와 물체의 운동의 중심을 잇는 선과 그 작용선이 항상 평행하므로, 구심력에 의한 돌림힘은 0이 된다. 따라서 구심력 외에 다른 힘이 작용하지 않는 등속 원운동의 경우, 각운동량 보존 법칙이 성립한다. 원운동을 하는 관찰자는, 구심력과 정반대 방향의 힘이 자신에게 구심력과 같이 작용하여 힘의 평형을 이룬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구심력에 반대되는 방향으로 작용된다고 생각하는 가상의 힘을 원심력이라고 한다. 질량이 m 인 물체가 v 의 속도로 반지름 r 의 원운동을 할 때 받는 구심력의 크기는 다음과 같다. 는 구심 가속도 이다. 원운동을 하는 물체가 받는 힘의 방향은 원의 중심이다. 힘이 속도의 제곱에 비례하므로 속도가 2배가 되면 힘은 4배가 된다. 반지름이 힘에 반비례 하므로 반지름이 절반이 되면 같은 속도를 내기 위해선 힘이 두배가 되어야 한다. 구심력은 각속도 ω 로도 표현할 수 있다. 각속도와 속도의 관계는 이므로 다음과 같다. 공전주기 T 를 이용하여 식을 표현할 수도 있다. 공전주기와 각속도의 관계는 이므로 다음과 같다. 입자가속기에선 입자가 빛의 속도에 가깝게 가속되므로 특수 상대성 이론에 따라 관성이 커지므로 똑같이 가속시키기 위해선 더 많은 힘이 필요할 것이다. 특수 상대성 이론을 고려하면 으로 나타낼 수 있다. 여기서 γ 는 이며 로런츠 인자라 불린다. 일정한 원운동을 하는 물체는 구심력을 필요로 한다. 구심력은 원의 중심을 향한다. 줄 끝에 묶여있는 물체가 수평면을 따라서 원운동을 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면, 물체에 가해지는 구심력은 밧줄의 장력에 의해 가해진다. 이때 밧줄의 경우 끌어당기는 힘이 구심력으로 작용한다. 벽의 수직항력에 의한 미는힘도 구심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뉴턴이 생각했던 구심력은 현대의 중심력에 해당한다. 어떤 인공위성이 행성의 주변에서 궤도운동을 할 때, 중력이 구심력으로 작용한다. 편심성 궤도의 경우 중력의 방향은 초점으로 향하지만, 구심력은 곡률중심을 향하지 않는다. 구심력의 다른 예로는 자기장 내에서 나선운동하는 하전입자를 들 수 있다. 이 경우 자기력이 구심력으로 작용한다. 원심력 분류:역학 분류:힘 분류:가속도
원심력 (遠心力)은 회전하는 좌표계에서 관찰되는 관성력으로, 회전의 중심에서 바깥쪽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관찰된다. 하지만 다른 관성력과 마찬가지로 실제 존재하는 힘은 아니다. 가속하는 계(비관성좌표계) 안의 물체들은 관성에 따라 운동하려하기 때문에, 계를 기준으로 하여 계가 받는 가속도의 반대방향 가속도를 설명하기 위한 가상의 힘이 관성력이다. 원심력은 관성력 중에서도 회전하고 있는 계 안의 관찰자가 느끼는 가상의 힘이다. 관성좌표계에서 물체는 관성에 따라 등속도 운동을 한다. 그러나 원운동하는 좌표계는 가속도 운동을 하기 때문에, 관성의 법칙이 성립하지 않고 원운동하는 계 안의 관찰자는 물체가 마치 바깥쪽으로 힘을 받는 것처럼 느끼고 이를 원심력이라 한다. 관성좌표계에서 이 가상의 힘을 원심력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오류이다. 관성좌표계에서 관찰했을 때 이 물체에 대해 바깥쪽으로 작용하는 힘은 없으며, 물체는 단지 관성에 따라 등속도로 운동하려는 것뿐이다. ‘회전하는 계에서 관찰되는 원심력’은, ‘비관성좌표계에서 설명하기 위한 가상적인 힘이고, 실존하는 구심력’과 크기가 같고 방향이 반대이지만, 구심력과 작용 반작용 관계는 아니다. 회전하는 계에서 관찰했을 때는 원심력만 관찰될 뿐, 구심력은 관찰되지 않는다. 관성좌표계에서 관찰했을 때는 구심력과 이에 대한 반작용만 존재할 뿐, 원심력은 관찰되지 않는다. 즉, 좌표계에 따라 구심력과 원심력 중 하나만 관찰된다. 따라서 회전하는 물체의 운동을 설명할 때, 하나의 좌표계에서 (혹은 좌표계를 명시하지 않고) 구심력과 원심력을 동시에 언급하는 것은 오류이다. 또한, 구심력은 실제 존재하는 힘이나, 원심력은 다른 관성력과 마찬가지로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힘이다. 파동 함수와 원 운동의 관계를 보여주는 그림. 오프셋은 x에 대한 최대 값이고, x = 기울기이고 각도가 0 일 때 파동이 여기에서 시작하고. 여기서의 움직임은 두 개의 전체 사이클 (두 개의 파장)을 나타낸다. 관성좌표계에서는 원심력은 관찰되지 않고, 구심력과 그 반작용만 존재한다. 관성좌표계에서는 원심력이란 개념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공을 줄에 매달아 손으로 회전시키는 경우를 보자. 관성좌표계에서 관찰시, 회전하는 공에는 줄을 통하여 구심력이 작용되고 이로 인해 회전운동을 하게 된다. 그리고 작용 반작용 법칙에 따라 반작용력은 손에 전달된다. 이 반작용력은 공에 작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공의 운동을 설명하는 데 필요하지 않으며, 이를 원심력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쉽게말해 원심력은 나가려는 힘, 구심력은 당기는 힘이다. ‘원심력과 구심력은 서로 대응되는 힘이다’ 실제로 원심력은 가상의 힘이므로 대응된다고 할 수 없다. 다만, 운동 좌표계에서 관측할때 작용/반작용처럼 보일 뿐이다. ‘원심력은 구심력과 작용 반작용 관계이다’ 실제로는 이렇지 않다. ‘원심력과 구심력이 평형을 이루고 있어서 끈에 매달린 공이 안정적으로 회전운동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틀린 설명이다. 원심력은 애초에 가상의 힘으로써 운동 좌표계에서의 운동을 서술하기 위해 도입된 것에 불과하다. 많은 경우 물체의 운동은 관성좌표계(정지좌표계)에서 설명하는 것이 직관적이고 단순하다. 관성좌표계를 기준으로 삼았을 때, ‘끈에 매달린 공은 관성 때문에 직선 운동을 하려 하나, 구심력이 작용하여 회전운동을 하게 된다’라고 설명해야 한다. 또한, ‘평형을 이루며 회전운동을 한다’는 것도 잘못된 개념이다. 만약 실제 존재하는 힘이 구심력과 평형을 이룬다면, 알짜힘은 0이 되어 물체는 직선운동하게 된다. ‘물체가 회전할 때에는 구심력이 작용하여 원운동을 하는데, 물체를 묶은 끈이 풀리게 되면, 원심력이 작용하여 물체가 직선으로 운동하게 된다’ 관성좌표계에서 설명할 때, 물체를 묶은 끈이 풀리게 되면 구심력이 더이상 작용하지 않아 관성에 의해 직선 운동하는 것이다. 따라서 올바른 설명은 ‘물체가 회전할 때에는 구심력이 작용하여 원운동을 하는데, 물체를 묶은 끈이 풀리게 되면, 구심력이 더이상 작용하지 않아 관성에 의해 직선 운동한다’이다. 관성력 코리올리 힘 구심력 분류:고전역학 분류:가속도 분류:힘
유니코드 로고. 유니코드 (Unicode)는 전 세계의 모든 문자를 컴퓨터에서 일관되게 표현하고 다룰 수 있도록 설계된 산업 표준이며, 유니코드 협회(Unicode Consortium)가 제정한다. 이 표준에는 ISO 10646 문자 집합, 문자 인코딩, 문자 정보 데이터베이스, 문자들을 다루기 위한 알고리즘 등을 포함하고 있다. 유니코드의 목적은 현존하는 문자 인코딩 방법들을 모두 유니코드로 교체하려는 것이다. 기존의 인코딩들은 그 규모나 범위 면에서 한정되어 있고, 다국어 환경에서는 서로 호환되지 않는 문제점이 있었다. 유니코드가 다양한 문자 집합들을 통합하는 데 성공하면서 유니코드는 컴퓨터 소프트웨어의 국제화와 지역화에 널리 사용되게 되었으며, 비교적 최근의 기술인 XML, 자바, 그리고 최신 운영 체제 등에서도 지원하고 있다. 유니코드에서 한국어 발음을 나타날 때는 예일 로마자 표기법의 변형인 ISO/TR 11941을 사용하고 있다. 유니코드의 기원은 19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 때 제록스의 조 베커와 애플의 리 콜린스, 마크 데이비스가 통일된 문자 집합을 만드는 것을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1988년 조 베커는 유니코드라는 이름의 국제/다언어 문자 인코딩 시스템(international/multilingual text character encoding system, tentatively called Unicode)를 위한 초안을 출판하였다. 유니코드 버전 버전 날짜 책 대응하는 ISO/IEC 10646 버전 문자 집합 수 글자들 전체 주요 추가 사항 1.0.0 1991년 10월 (Vol.1) 24 7,161 가타카나, 구르무키 문자, 구자라트 문자, 그리스 문자, 데바나가리, 라오 문자, 라틴 문자, 말라얄람 문자, 벵골 문자, 아랍 문자, 아르메니아 문자, 오리야 문자, 조지아 문자, 주음부호, 칸나다 문자, 키릴 문자, 타밀 문자, 타이 문자, 텔루구 문자, 티베트 문자, 한글, 히라가나, 히브리 문자 1.0.1 1992년 6월 (Vol.2) 25 28,359 20,902자의 한중일 통합 한자가 지정됨. 1.1 1993년 6월 ISO/IEC 10646-1:1993 24 34,233 기존 2,350자의 한글에 4,306자가 더 추가됨. 티베트 문자 삭제. 2.0 1996년 7월 ISO/IEC 10646-1:1993과 개정 5, 6, 7 25 38,950 기존의 한글 완성자를 삭제하고, 11,172자의 새 한글 완성자 영역을 새로 지정함. 티베트 문자 새 위치에 추가. 서러게이트 영역을 지정하였고, 제15, 제16평면을 사용자 정의 영역으로 지정함. 2.1 1998년 5월 ISO/IEC 10646-1:1993과 개정 5, 6, 7, 18 25 38,952 유로 기호 추가. 3.0 1999년 9월 ISO/IEC 10646-1:2000 38 49,259 룬 문자, 몽골 문자, 버마 문자, 시리아 문자, 신할라 문자, 에티오피아 문자, 오검, 이 문자, 점자, 체로키 문자, 캐나다 원주민 음절 문자, 크메르 문자, 타나 문자 3.1 2001년 3월 ISO/IEC 10646-1:2000 ISO/IEC 10646-2:2001 41 94,205 고대 이탈리아 문자, 고트 문자, 데저렛 문자와 음악 기호, 42,711자의 한중일 통합 한자. 3.2 2002년 3월 ISO/IEC 10646-1:2000과 개정 1 ISO/IEC 10646-2:2001 45 95,221 부히드 문자, 하누노오 문자, 타갈로그 문자, 타그반와 문자 등 필리핀 문자 4.0 2003년 4월 ISO/IEC 10646:2003 52 96,447 키프로스 문자, 림부 문자, 선형 B 문자, 오스마냐 문자, 샤비안 문자, 타이 러 문자, 우가리트 문자와 64괘 4.1 2005년 3월 31일 ISO/IEC 10646:2003과 개정 1 59 97,720 부기 문자, 글라골 문자, 카로슈티 문자, 신 타이 르 문자, 고대 페르시아 문자, 실헤티 나가리, 티피나그 추가, 콥트 문자가 그리스 문자에서 분리. 고대 그리스 숫자와 고대 그리스 음악 기호 추가. 5.0 2006년 7월 18일 ISO/IEC 10646:2003과 개정 1, 2, 그리고 개정 3의 문자 4개 64 99,089 발리 문자, 쐐기 문자, 응코 문자, 파스파 문자, 페니키아 문자 5.1 2008년 4월 4일 ISO/IEC 10646:2003과 개정 1, 2, 3, 4 75 100,713 카리 문자, 참 문자, 카야흐 리 문자, 렙차 문자, 리키아 문자, 리디아 문자, 올치키 문자, 레장 문자, 사우라슈트라 문자, 순다 문자, 바이 문자, 파이스토스 원반의 기호, 마작 타일과 도미노 타일 추가, 대문자 ß 추가. 5.2 2009년 10월 1일 ISO/IEC 10646:2003과 개정 1, 2, 3, 4, 5, 6 90 107,361 문자 15종류 추가, 4149자의 한중일 통합 한자 (CJK-C), 옛 한글 확장 자모 추가 6.0 2010년 10월 11일 ISO/IEC 10646:2010과 인도 루피 기호 93 109,449 문자 3종류 추가, 플레잉카드 기호, 교통 및 지도 기호, 연금술 기호, 이모티콘과 에모지. 222자의 한중일 통합 한자 (CJK-D) 추가. 6.1 2012년 1월 31일 ISO/IEC 10646:2012 100 110,181 문자 7종류 6.2 2012년 9월 27일 ISO/IEC 10646:2012와 터키 리라 기호 100 110,182 터키 리라 기호 6.3 2013년 9월 30일 ISO/IEC 10646:2012와 여섯 문자 100 110,187 좌서/우서 형식 문자 5자 7.0 2014년 6월 16일 ISO/IEC 10646:2012와 개정 1, 2, 루블 기호 123 113,021 문자 23종류와 딩뱃 8.0 2015년 6월 17일 ISO/IEC 10646:2014와 개정 1, 2, 조지아 라리 기호, 한중일 통합 한자 9자와 에모지 41자 129 120,737 문자 6종류와 5771 한중일 통합 한자(CJK-E), 체로키 소문자, 피부색 조정자 5자 9.0 2016년 6월 21일 ISO/IEC 10646:2014와 개정 1, 2, 아들람, 네와 문자, 일본 텔레비전 심벌, 74자의 에모지와 심벌 135 128,237 서하 문자 등 6종의 문자와 에모지 72자 10.0 2017년 6월 20일 ISO/IEC 10646:2016과 개정 1, 2, 변체 가나, 한중일 통합 한자 21자와 에모지 56자 139 136,755 소욤보문자 등 4종의 문자와 한중일 통합 한자(CJK-F) 11.0 2018년 6월 6일 ISO/IEC 10646:2017과 개정 1, 2, 드고라 문자 등 8종, 한중일 통합 한자 5자와 에모지 145자 146 137,439 드고라 문자 등 8종의 문자와 에모지 145자 유니코드 협회 유닉스/리눅스 사용자를 위한 UTF-8 유니코드 FAQ 디코드유니코드(DecodeUnicode) - 유니코드 위키 graphemica 문자 상세정보
언어 (言語)에 대한 정의는 여러가지 시도가 있었다. 아래는 그러한 예의 일부이다. # 사람들이 자신의 머리 속에 있는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나타내는 체계. # 사물, 행동, 생각, 그리고 상태를 나타내는 체계. # 사람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데 사용하는 방법. # 사람들 사이에 공유되는 의미들의 체계. # 문법적으로 맞는 말의 집합(절대적이 아님). # 언어 공동체 내에서 이해될 수 있는 말의 집합. 언어학은 이러한 언어가 발현되는 부분, 즉 음성, 의미, 문법, 형태 등을 연구하는 경우도 있고, 언어 자체를 연구대상으로 삼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접근하며 연구하는 학문, 즉 비교언어학, 언어유형학(유형론) 등까지를 포괄한다. 언어는 자연어와 인공어로 나눌 수 있는데, 자연어는 인류의 각 민족이 오래전부터 생활 속에서 사용해 왔던 언어이고, 컴퓨터나 수학 등 다른 학문의 분야에서 상호 효과적인 의사교환을 위해 고안된 것을 인공어라고 한다. 자연어 중에 세계적으로 많은 인구가 사용하는 언어는 다음과 같다. 사용하는 인구가 많은 순으로 나열하였으며 괄호 안은 해당 언어를 사용하는 지역을 나타낸다. 관화(官話) (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 싱가포르) :모어 인구 844,850,000명 스페인어(Español) (스페인, 멕시코, 쿠바, 코스타리카, 페루, 아르헨티나, 칠레 등) :모어 인구 450,600,000명 영어(English) (영국,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아일랜드, 남아프리카 공화국, 자메이카, 싱가포르, 인도 등) :모어 인구 344,500,000명 힌디어(हिन्दी)/우르두어(اُردوُ) (인도, 파키스탄) :모어 인구 315,445,000명 인도네시아어(Basa Indonesia)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모어 인구 280,000,000명 아랍어(العربية)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아랍에미리트, 알제리, 모로코 등) :모어 인구 231,500,000명 포르투갈어(Português) (포르투갈, 브라질 등) :모어 인구 181,000,000명 프랑스어(Français) (프랑스, 캐나다 퀘벡주, 벨기에, 스위스, 세네갈 등) :모어 인구 175,900,000명 러시아어(Русский язык) (러시아 등) :모어 인구 152,500,000명 벵골어(বাংলা) (방글라데시, 인도 등) :모어 인구 151,400,000명 일본어(日本語) (일본, 팔라우 앙가우르 주) :모어 인구 127,500,000명 베트남어(Tiếng Việt) (베트남, 미국, 캄보디아, 중화인민공화국, 프랑스 등) :모어 인구 97,000,000명 독일어(Deutsch)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벨기에, 룩셈부르크, 리히텐슈타인, 나미비아 등) :모어 인구(제1언어 사용 인구) 95,200,000명 우어(吳語) (중화인민공화국) :모어 인구 77,200,000명 한국어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모어 인구 76,500,000명 자와어(Basa Jawa)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프랑스, 수리남) :모어 인구 75,550,000명 펀자브어(ਪੰਜਾਬੀ, پنجابی) (파키스탄, 인도) :모어 인구 75,250,000명 텔루구어(తెలుగు) (인도) :모어 인구 69,750,000명 마라티어(मराठी) (인도) :모어 인구 68,050,000명 타밀어(தமிழ்) (인도, 스리랑카,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모리셔스,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 :모어 인구 65,850,000명 이탈리아어(Italiano) (이탈리아, 스위스) :모어 인구 61,850,000명 터키어(Türkçe) (터키, 아제르바이잔, 북키프로스) :모어 인구 54,500,000명 그리스어(ελληνικά) (그리스, 키프로스) :모어 인구 12,000,000명 어족의 분포 자연어는 어족 별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언어와의 친족 관계가 알려진 것이 없는 것은 고립된 언어라고 한다. 한국어는 현재 고립된 언어로 분류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일본어와 알타이어와 유사하다는 견해도 있다. 인도유럽어족 데네캅카스어족 * 중국티베트어족 우랄알타이어족 * 우랄어족 * 알타이어족 오스트로네시아어족 아프로아시아어족 니제르콩고어족 나일사하라어족 코이산어족 SVO형(주어-서술어-목적어) 언어 SOV형(주어-목적어-서술어) 언어 VSO형(서술어-주어-목적어) 언어 고립어 교착어 굴절어 포합어 대격 언어 능격 언어 삼분법언어 오스트로네시아형 결합 활격 언어 음성언어 음성으로 표현되는 언어이다. 한국어에서의 "백과사전"을 음성으로 표현하는 식이다. 문자언어 문자로 표현되는 언어이다. 한국어에서의 "백과사전"을 "백과사전"이라는 한글로 표현하는 식이다. 활어(活語) 현재 통용되는 언어이다. 한국어, 영어 등이 있다. 사어(死語) 현재 통용되지 않는 언어이다. 라틴어, 만주어...는 아래 참조, 차가타이어 등이 있다. 종교적 측면에서 보면 라틴어는 사어가 아닌 47억 기독교신도들의 종교언어이고, 지자체적 측면에서 보면 만주어는 사어가 아닌 둥베이, 프리몰, 하바롭의 공용어이다. 차가타이어란 차가타이(남서튀르크)어파의 공통조어로, 옛 대원제국의 차가타이汗국의 공용어였다. 지금은 사어로 판명. 손의 모양으로 의사 소통하는 수화도 언어의 일종이며 음성언어와 대비되는 독특한 특징을 지닌다. 인공어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지고 사용되는 언어가 아닌, 사람이 의도적으로 만들어 의사소통의 목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를 말한다. 인공어를 분류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나, 대부분의 경우 기본적으로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도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언어이다. 실제 커뮤니케이션, 혹은 그 유사 행동을 위해 만들어진 언어 에스페란토 같은 국제어, 소설 등의 매체에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예술어 등의 가공언어. 특히 인공어라는 단어가 요즈음에는 이 경우에 쓰이고 있다. 형식 언어 수학에서 사용하는 언어 프로그래밍 언어 컴퓨터에게 일을 시키기 위하여 고안된 언어 유인원과 인간을 구분해주는 특성은 인간이 언어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언어 목록 (분류) 언어 목록 (문서) 에스놀로그 - 언어, 위치, 인구, 기원의 목록 공용어 목록 언어의 기원 언어별 기초 회화 소리 언어 행위 네이버 캐스트 - 동물들은 왜 말을 못하나
심리학 (心理學은 인간의 행동과 심리과정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경험과목으로서, 인문과학에서부터 자연과학, 공학, 예술에 이르기까지 많은 분야에 공헌을 하고 있다. 인간이 관계된 모든 분야에는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인간의 행동과 사고에 관한 연구인 심리학의 학문적 뒷받침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특히 고도의 정보화 사회가 되어가면서 인간의 삶의 질과 관계된 문제들이 점점 더 그 중요성을 더하고 있고 이러한 문제에는 감각, 지각, 사고, 성격, 지능, 적성 등의 인간 특징들이 고려되어야 하기 때문에 인간의 행동과 기저 원리를 밝히는 심리학은 미래 사회에서 그 중요성을 점점 더해갈 것이다. 심리학은 연구 분야에 따라 크게 심리학의 기초 원리와 이론을 다루는 기초심리학 과 이러한 원리와 이론의 실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응용심리학 으로 나뉘며, 2014년 현재, 한국의 경우에는 14개 분과, 미국의 경우 본과 제외 56개 분과가 있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행동과 정신과정에 대한 과학” 이라고 정의되는 심리학은 다양한 접근방법만큼이나 조금씩 그 정의의 폭을 달리할수있겠으나 과학적인 절차를 수용하기 시작한 근대의 심리학 이후에서는 적어도 행동에대한 과학 이라는 협의의 정의를 빼놓을수는 없겠다. 기원전부터 심리학 에 대한 개념을 사용하지 않았을 뿐, 심리학에 대한 생각은 쭉 있어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현대 심리학의 정립 이전의 심리학은 그 경계가 모호하였으며 철학자들이 다루는 영역으로 간주되어 왔다. 일찍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식론에 관한 문제를 다루었으며 그에 대한 논쟁은 데카르트와 스피노자로 이어지게 되었다. 특히 데카르트는 유명한 심-신 문제에 있어서 이원론을 주장함으로써 마음과 몸이 별개의 실체임을 주장하여 마음에 대한 경험과학적 탐구를 중시하는 현대 심리학의 입장과는 사뭇 다른 입장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파티마 칼리파조의 선구적인 과학자 이븐 알하이탐은 1010년 출간된 그의 《광학》에서 실험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심리학적 개념으로서 시각을 설명하고 있다. 독일 스콜라 철학자 루돌프 괴켈(라틴어 이름 루돌프 고클레니우스)는 1590년 출간한 그의 저서에서 처음으로 조건을 사용한 심리 실험을 다루고 있다. 이 보다 60년 전 크로아티아의 휴머니스트 마르코 마루릭은 조건을 사용한 그의 작업 목록을 남겼으나 그 내용은 소실되었다. 독일의 형이상학 철학자 볼프가 그의 저서 《심리 실험과 심리 추론( Psychologia empirica and Psychologia rationalis , 1732년-1734년)》을 출간함으로써 조건을 사용한 실험은 일반적인 심리 실험의 방법이 되었다. 디드로는 이러한 심리 실험과 심리 추론의 차이점에 대해 그의 《백과사전》에 기술하였고 비랑에 의해 프랑스에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영국의 의사 윌리스(1621년 - 1675년)는 정신과적 치료의 목적으로 뇌의 기능을 연구하면서 "정신의 법칙"을 다루는 학문으로서 심리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19세기에 이르러 심리학은 철학에서 완전히 분화되어 과학의 한 분야로 자리잡게 되었다. 1879년, 흔히 "심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분트는 라이프치히 대학에 심리학 연구소인 정신물리실험실을 개설하였다. 그는 심리학을 연구하는 방법론으로 내성법 을 주장하였다. 미국의 철학자 제임스는 1890년 《심리학 개론》을 출간하였다. 그는 당시 심리학에서 다루는 주요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이 책을 저술하였다. 에빙하우스는 베를린 대학에서 기억에 대한 선구적인 실험을 수행하였다. 또한 러시아의 파블로프는 유명한 고전적 조건형성 실험을 통하여 학습 과정을 연구하였다. 게슈탈트 심리학은 1910년에서 1912년에 걸치는 기간 동안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시기는 독일 심리학자 베르트하이머(M. Wertheimer)가 자신의 논문 (Experimental studies on the perception of movement)을 통해 일상적인 지각 현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 시기이다. 게슈탈트 심리학의 창립에는 물리학자인 마흐, 철학자 에렌펠스, Carl Stumpf 의 세 사람이 큰 영향을 끼쳤다. 마흐는 특정한 공간-형태는 더 기본적인 요소로 환원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에렌펠스는 "형태질"의 존재를 주장하여 특정한 경험의 질은 개별적 감각요소 이상임을 역설했다. Stumpf는 Wundt와의 논쟁 과정에서 숙달된 청자들이 그렇지 않은 일반인들보다 음악적 관찰자로서 더 적합함을 주장하였다. 이후의 게슈탈트 심리학자들은 이들의 영향 아래 성장하였다. 베르트하이머는 가현운동(apparent motion)에 주목하였으며, 여기서 실제로는 없었지만 지각된 움직임을 파이(phi)운동 이라 불렀다. 이를 토대로 그는 "부분 과정 자체가 전체의 고유한 성질에 의해 결정된다" 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 연구는 게슈탈트 심리학의 문을 연 연구로 평가받고 있다. 베르트하이머의 피험자였던 Koffka와 Kohler 역시 게슈탈트 심리학자였으며, 모두 Stumpf 밑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특히 Koffka는 게슈탈트 심리학을 미국으로 전파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으며, Kohler는 이후 게슈탈트 이론의 보급에 노력을 기울였다. 이들은 특히 게슈탈트 현상이 어떤 원리로 조직되는지에 관심을 기울여 연구하였으며, 이 연구들로 밝혀진 것들을 게슈탈트 체제화 원리(Gestalt organizing principles)라 이름붙여 발표하였다. 이 원리는 근접성, 유사성, 좋은 연속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Lewin은 여러 가지 이력을 지닌 이색적인 심리학자였다. 그는 사회심리, 발달심리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업적을 남겼으며 특히 사회심리학의 창시자로 간주된다. 그의 장 이론(field theory)은 생활공간이라는 개념을 핵심으로 하며, 이에 따르면 행동에 영향을 주는 것은 환경과 사람 모두이다. Lewin은 이를 B=f(P,S)라 나타냈다. 또한 그는 위상기하학을 차용하여 자신의 개념들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곤 했다. 이외에도 리더쉽 연구, 개별 사례 연구 등의 업적을 남겼다. 1890년대에 이르러 오스트리아의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을 주창하여 독자적인 심리학 영역을 구축하였다. 그는 인간의 행동을 무의식과 의식, 자아와 초자아라는 독특한 개념으로 설명하면서 인간 행동의 기반을 성적 에너지인 리비도와 죽음의 본능인 타나토스로 보았다. 이 중 리비도는 초기 프로이트, 타나토스는 2차 대전을 경험한 이후의 프로이트가 제창한 개념이다. 정신분석이 심리학에 기여한 가장 중요한 점은 무의식 의 발견, 그리고 심적 결정론이라 할 수 있다. 프로이트 이후 직/간접적으로 그의 영향을 받은 수많은 정신분석가들이 배출되었으며, 그들 중 유명한 학자로는 분석심리학 을 창시한 융, 개인심리학 을 창시한 애들러 등이 있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은 곧 과학적 엄밀성의 결여, 경험적 증거의 부족, 이론체계의 반증불가능성 등으로 인해 혹독한 비판을 받게 되었으며, 특히 과학철학자 포퍼에 의해 유사과학의 세 가지 사례들 중 하나로 지적받게 되면서 그 지위를 크게 위협받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에 와서는 오히려 칼포퍼가 주장한 반증 가능성과 경험적 증거가 과학의 주요한 속성이라는 주장이 속속히 반박당하고 오류를 지니고 있음이 밝혀짐에 따라 이러한 지적은 상당부분 수그러들었다. 정신분석학의 과학적 지위에 대한 비판보다는 그 이론 자체가 적용되지 않은 부분들과 문제점, 그리고 프로이트 이론에 대한 반발감 등으로 영향력이 축소되어서 현대 심리학에서 정신분석이 차지하는 위치는 크지 않으며, 그들은 미국 심리학회 단체들 중 가장 큰 단체인 APA의 10% 미만, 그리고 또다른 중요한 단체인 APS의 5% 미만을 차지한다. 특히 실험심리학자들(기초심리학자들) 중 정신분석학을 지지하는 학자는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에 와서 정신분석학은 주로 임상가들에 의해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으며, 오히려 정신분석은 문학비평 등 심리학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 각광을 받고 있는 추세라 할 수 있다. 20세기 초 왓슨, 손다이크, 헐(C. Hull), 톨먼(E. Tolman), 스키너 등에 의해 행동주의 심리학이 주창되었다. 이들은 쥐, 비둘기 등의 동물을 이용하여 학습 과정을 연구하였고,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학습이 환경의 자극에 대한 반응이라 주장하였다. 이 자극 반응 이론(S-R 이론)으로 미국을 중심으로한 세계 여러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교육에 큰 영향을 주었다.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은 특히 심리학의 과학화에 큰 공헌을 하였다. 그들은 검증 가능한 것 을 강조하던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에 발맞춰 심리학 연구에 있어서도 검증 가능한 것 들만을 연구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그 이전의 큰 심리학적 흐름이었던 정신분석과 사뭇 다른 것이었다. 행동주의자들은 그러나 검증가능한 것 에 대한 지나친 집착 때문에 정작 심리학의 진정한 연구 대상이라 할 수 있는 심적, 내적 과정에 대한 탐구를 소홀히 한 결과 여러 가지 어려움에 부딪히게 되었고, 결국 인지혁명 이후 주된 패러다임의 자리를 인지심리학 등 다른 분야에 내주게 되었다. 이는 인간의 겉모습만 보고 판단한다는 과장된 비유적 비판을 받게 되었다. 원래 뜻은 인간의 성격이나 감정, 본능이 행동으로 직결되며 이 외의 요소나 우연 등의 예외적인 것들을 고려하지 않고 행동이나 언어 등 겉으로 나타나는 것들을 관찰로 얻은 정보와 연관지어 인간의 감정이나 성격을 확신하여 규명하는 것을 비판한다는 뜻이다. 인지심리학에 대한 현대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감각정보를 변형하고, 단순화하며, 정교화하고, 저장하며, 인출하고 활용하는 등 모든 정신과정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20세기 후반(1960년대 이후)에 일어난 이른바 인지혁명 은 심리학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당대를 지배하고 있던 행동주의 심리학은 인간을 단순한 자극-반응의 체계로 보았는데, 이로 인해 행동주의 심리학은 블랙박스 심리학 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행동주의 심리학은 관찰,측정이 가능한 것만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이로 인해 인간의 심적, 내적 과정에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 이러한 자극-반응이 어떠한 경로와 기제를 통해 일어나는지를 거의 규명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안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엄 촘스키 등 언어학자들과 앨런 튜링,폰 노이만 등의 컴퓨터과학자들의 영향을 받아 인지혁명이 시작되었다. 특히 촘스키는 심리학의 연구 대상은 인간의 내적 심리과정이어야 함을 주장하여 행동주의 심리학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당대 심리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이자 현재 심리학계의 가장 중요한 흐름 중 하나인 인지심리학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인지심리학은 행동주의 심리학과 달리 내적인 심리과정을 중시하며 이에 대한 연구를 주된 목표로 삼는다. 특히 인지심리학의 주된 특징 중 하나는 인간의 심리과정을 컴퓨터의 정보처리과정에 비유하여 이해한다는 것인데 이는 인접 학문들의 영향을 받은 결과다. 이로 인해 인지심리학은 흔히 인간정보처리론(human information processing)이라고도 불린다. 인지심리학은 현재 인접 학문들-철학, 컴퓨터과학, 신경과학, 언어학 등-과 협력하여 인간 인지과정의 신비를 벗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으며, 그 자체로서 크게 간학문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1950년대 사르트르 등의 철학자가 주창한 실존주의의 영향으로 인본주의 심리학이 파급되었다. 주요 심리학자로는 욕구이론을 주창한 매슬로, 인간중심 심리치료를 주창한 로저스, 직관적이며 전체적 인지를 중시한 장 이론인 게슈탈트 심리학을 주창한 펄스(F. Perls) 등이 있다. (실존주의 심리학과 인본주의 심리학은 같다.) 심리학도 다른 사회과학 분야들과 마찬가지로 질적 연구방법과 양적 연구방법, 두 가지를 모두 사용한다. 전자는 주로 임상가들에 의해, 후자는 주로 기초 분야 전공자들에 의해 많이 사용되나 양자가 혼용되는 경우도 많다. 양적 연구방법은 연구 대상의 특성을 수치화, 계량화하기 용이한 경우에 많이 사용되는데 이러한 연구방법이 적합한 사례로는 반응시간(response time)연구, 지능 연구와 같은 것이 있다. 양적 연구방법은 통계학의 지식들을 이용하여 연구 대상의 특성을 기술하고, 예측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한다. 심리학에서 주로 사용되는 양적 연구방법론에는 IRT(문항반응이론), 다층 모형(Multilevel model), 구조방정식모형(Structural equation model), 경로분석(path analysis), 요인분석(Factor analysis)등이 있다. 양적 연구방법론의 가장 큰 강점은 일반화하기에 용이하다는 것이다. 질적 연구방법은 이와는 다르게 소수의 사례를 깊이있게 분석하는 것이 주된 목적으로, 임상가들에 의해 주로 사용되고 있다. 질적 연구방법론에서는 상담, 질문지 작성 등의 방법을 주로 사용하며 내담자나 연구대상의 심리적 상태를 심도있게 기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심리학이 사용하는 방법의 과학성은 심리학을 경험과학답게 만들어 주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과학자형 모델로 대표되는 기초 심리학은 심리학의 학문적 바탕의 확립을 목표로 기초적 지식과 심리적 기제를 실험을 통해서 연구한다. 주로 인지 심리학, 지각 심리학, 사회심리학,생리심리학 등이 주로 포함되며, 이는 귀납적 사고를 사용하는 자연과학과는 다른 연역적 사고을 사용한다. 임상 심리학은 정신 질환 등 중증의 정신적 문제가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심리학이다. 병원에서 정신과 의사와 협조해서 일한다. 상담 심리학은 정신적 문제를 가진 사람들을 진단하고 치료해 증상을 낫게 하는 것을 목표로 가진 심리학 분야이다. 약물 처방을 정신과 의사만 내려줄 수 있으므로, 상담심리사는 약물 처방을 하지는 않지만 다양한 치료기법과 기술을 통해 환자를 치료한다. 중증 정신질환의 개선에는 약물치료와 상담치료가 병행되는 것을 이상적으로 본다. 실천가형 모델로 대표되는 응용 심리학은 심리학의 실재 현장 장면의 적용을 목표로 적용 방법과 원리를 연구한다. 무의식 초자아 트라우마 방어기제 정신분석 게슈탈트 붕괴 고전적 조건형성 조작적 조건형성 인지부조화 바넘 효과 (요약 "우린 달라") 심리 검사 성격 검사 초두효과 설단 현상 칵테일 파티 효과 전경-배경 이론 깨진 유리창 이론 정보처리이론 루시퍼 이펙트 * 스탠퍼드 감옥 실험 편안한 복제인간 증후군(Comfortable Clone Syndrome) 원인론 목적론 힐가드와 애트킨슨의 심리학 원론 빌헬름 분트 심리학의 아버지 헤르만 에빙하우스 망각곡선 연구 찰스 다윈 진화심리학의 시조. 감정표현 연구의 선구자 프랜시스 골턴 심리측정의 선구자 제임스 카텔 미국 심리측정학의 대가 비네 지능검사 고안자 쏜다이크 교육심리학, 심리측정의 대가 르윈 게슈탈트 심리학자, 인지심리학자, 사회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 정신분석의 창시자,의식-무의식 개념 카를 융 집단무의식 장 피아제 발달 이론의 대부, 지능을 수식으로 표현 벌루스 스키너 보상 처벌 이론, 처벌 금지 법안 데이비드 로젠한 논문 "제 정신으로 정신병원에 들어가기(On Being Sane in Insane Places)" 스탠리 밀그램 밀그램 실험, 권위에의 복종 필립 짐바르도 스탠퍼드 감옥 실험, 루시퍼 이펙트 에이브러햄 매슬로 욕구 제단계 이론 칼 로저스 인본주의 심리학의 아버지 에드워드 톨먼 잠재학습 연구 노엄 촘스키 언어 심리학자 네이서 인지심리학의 초창기 공헌자 레프 세메노비치 비고츠키 언어로 사회-문화적 맥락에 관련지어 설명 대니얼 카네만, 에이모스 트버스키 의사결정 과정에서 일어나는 편향과 추단법에 대한 연구로 노벨상 수상 라몬 이 카할, 골지 뉴런 연구의 선구자 폴 브로카, 베르니케 브로카 영역, 베르니케 영역의 발견 도널드 헵 헵의 법칙 발견 콘라드 로렌츠 각인 현상의 발견자 심리치료 사회심리학 발달심리학 재난심리학(disaster psychology) 군사심리학( Military psychology) *군중심리학 * 자살 예방( Suicide prevention) 환경심리학( Environmental psychology) * 깨진 유리창 이론 * 범죄예방 환경설계 심리역사학( Psychohistory) * 로이드 드마우스( Lloyd deMause) 의상심리학(clothing psychology) 여성심리학 의사소통(휴먼 커뮤니케이션) 대인간 커뮤니케이션( Interpersonal communication) * 잔소리 (심리)( Nagging) 편집성 인격 장애 폭력 / 가정폭력 아동학대 / 동물학대 한국심리학회 대한민국의 심리학회 한국 심리학회 한국 임상심리학회 한국 상담심리학회 한국 산업 및 조직심리학회 한국 사회 및 성격심리학회 한국 발달심리학회 한국 인지 및 생물심리학회 한국 사회문제심리학회 한국 건강심리학회 한국 소비자광고심리학회 한국 학교심리학회 한국 중독심리학회 미국의 심리학회 미국 심리학회 분류:행동과학
잠 자는 아이 잠 자는 새끼 고양이 잠 또는 수면 (睡眠)은 동물이 일정 시간 동안 몸과 마음의 활동을 쉬면서 의식이 없는 상태로 있는 것이다. 의식은 없거나 줄어들고, 감각 기관이 상대적으로 활동을 중단하며, 거의 모든 수의근의 움직임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자극에 대한 반응이 줄어드는 것으로 각성과 구별되며, 쉽게 의식을 되돌릴 수 있다는 점에서 겨울잠이나 혼수상태와는 구별된다. 수면 중에는 동화 상태가 고조되며, 성장과 면역, 신경, 뼈, 근육 계통의 회복이 두드러진다. 수면은 모든 포유류와 조류, 다수의 파충류, 양서류, 어류에서 발견된다. 수면의 목적과 기제는 부분적으로만 확인되었으며, 활발한 연구의 대상이다. 잠은 종종 에너지를 절약하는 것으로 여겨졌으나, 실제로는 신진대사를 약 5~10%만 줄일 뿐이다. 겨울잠을 하는 동물들은 겨울잠 중에 대사저하가 보이긴 하지만, 잠을 자야 하며, 이를 위해 저체온에서 발열 상태로 돌아온다. 항목 NREM(조용한 수면) REM(역설적 수면) 안전도 0 40~60/min 뇌전도 낮은 주파수 높은 주파수 심전도 느림 빠름 근전도 적정수준 긴장 마비 제1단계 뇌파가 베타파에서 알파파로 바뀌어 간다. 제2단계 방추형과 K 복합 뇌파가 나타난다. 제3, 4단계 델타파가 나오기 시작하며, 두 단계는 델타파의 양으로 구분한다. 렘(REM) 수면은 신체적, 심리적인 회복, 단백질 합성 및 기억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사람은 어릴수록 하루에 자는 시간이 길고 자랄수록 짧아진다. 생후 1주에는 18~20시간, 만 1세에는 12~14시간, 만 10세에는 10시간 정도를 잔다. 성인은 하루에 대략 5시간~8시간 정도를 잔다. 사람은 의도적으로 수면 시간을 조절하기도 한다. 15세 이상 사람의 평균 수면 시간은 대한민국을 예로 들면, 6시간 15분 정도, 미국은 7시간 정도다. 잠이 부족하면 피로를 느끼고 감정이 날카로워져 짜증이나 화를 내기 쉬워진다. 또한, 잠이 부족한 상태가 장기간 지속되면 심혈관계 질환이나 정신 질환 등 여러 질병에 걸릴 확률이 높아진다. 건강에 유익하고 수명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는 최적의 수면 시간은 연구에 따라 다르다. 7시간 정도가 가장 적절하다는 연구 결과가 많은데, 5시간~6시간 30분을 잘 때 수명이 가장 길다는 연구도 있다. 또한, 적절한 수면 시간에는 개인차가 있다. 연령대별로 얼마만큼 자야 적당한지 차이가 있기도 하다. 예컨대 미국수면재단에 따르면 26-64세 성인은 7-9시간을 권장하며, 6-10시간이면 적당하고, 6시간 이하 또는 10시간 이상이면 수면시간을 조절하는 것이 좋다. 꿈 겨울잠 불면증 기면증 졸림 수면 부채 잠꼬대 벼락치기 공부 네이버 캐스트 - 잠, 창의성의 보물창고
Heroin bottle.jpg|섬네일|right|마약의 일종인 헤로인. 마약 (痲藥은 향정신성 의약품의출물로서 환각과 중독을 일으키는 알칼로이드만을, 즉 "아편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마약이다."라고 말한다. 일반인들은 대부분의 향정신성 약품 및 중독성이 있는 알칼로이드 모두를 일컫는 말로 사용한다. 즉 한국에서는 관례적으로 인간의 중추신경계에 작용하는 것으로서 이를 사용할 경우 인체에 심각한 위해가 있다고 인정되는 물질로 분류되지 않은 민간제조약과 향정신성의약품, 대마 등을 말하며. 대부분 진정쌍떡잎식물군에 속한 식물이기도 하다. 일부 대한민국에서 마약으로 분류 된 물질 중에서는 환자의 고통을 줄이는 등 의학적인 목적으로도 쓰이지만, 마약의 사용은 신체에 손상을 가하고 중독 증세와 함께 심하면 사망을 유발할 수 있어서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을 통해 관리하고 있다. 중추신경계에 작용하면서 오용하거나 남용할 경우 인체에 심각한 위해가 있다고 인정되는 약물을 의미한다. 같은 종류의 약물이라도 약물에 따라 작용부위 및 작용기전이 달라 다른 효과를 나타내기도 하여 여러 분류에 속하는 경우도 있다. 흥분제로 중추 신경계(이하 CNS)를 흥분시켜 감각 및 운동기능을 항진시키는 약물이다. 소량 투여시 정신이 명료해지고 기분이 약간 고양되며 심장이 빨리 뛰고 혈압이 올라간다. 과량 투여시 환각 및 다행감 또는 신경이 예민해져 불안감을 유발하여 반사회적이고 폭력적인 양상을 띄게 된다. 기분 고조로 인해 주관적으로는 강해진 것 같고 우월감을 느끼게되며 객관적으로는 말이 많아지고 초조해하며 불안해지고 과민상태가 된다. 코카인 코카인에 들어있는 알칼로이드이다. 한때 코카콜라에 들어간 적이 있으며 진통제로 쓰인 적이 있다. 암페타민 대표적인 메스암페타민제제인 필로폰,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의 치료 약물로 쓰이는 덱스트로암페타민이 있다. 니코틴 담배에 들어있어 의존성을 유발한다. 카페인 커피에 들어있으며 청량음료, 이온음료 및 피로회복제에 들어간다. 잔틴 초콜릿에 들어있다. 진정제로 중추신경을 억제시키며, 진통 효과가 있다. 헤로인 모르핀을 아세틸화하여 만든 합성 물질이다. 라벤더 진정제 특징이 있다. 모르핀 아편에 들어있는 알칼로이드이다. 바비트레이트산염 진정 및 항 경련 효과가 있다. 벤조다이아제핀 신경안정의 효과가 있다. 술 행동을 억제하는 신 피질을 억제, 판단력의 저하(탈 억제)를 가져온다. 덱스트로메토르판 대표적으로 러미라로 알려진 진해거담제에 들어있는 아편계열 알칼로이드이다 시각과 촉각 및 청각 등의 감각을 왜곡하여 지각과정에 영향을 미친다. 어떤 사람은 기분 좋은 상태로 느끼는 반면 불쾌감, 우울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LSD 플래시백 현상이 나타난다. 펜시클리딘 방향감각을 상실케 하며, 혼수상태에 빠지게 한다. 뷰테인, 본드 , 벤젠 폴리페놀 타닌 , 톨루엔 몸을 녹이게 하는 느낌에 빠지게 한다. 본드의 경우 뇌세포를 파괴하며, 질식사할 수 있어서 매우 위험한 환각제이다. 엑스터시 정신착란과 사망에 이르게 한다. 유칼립투스 유칼립투스오일에 중독성은 상복부 작열감 오심 구토 현기증 무기력 피부창백 맥박이가늘고빨리뛰며 의식몽롱기면증이있으며 심할때는 일시적으로 정신착란과 경련을 일으킨다.또한 유칼립투스잎에는 항히스타민제가 들어있어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코알라가 유칼립투스잎을먹고 무려18시간에서 많으면 24시간 잠에취해있다고한다. 현재 대한민국 법률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에 따르면 마약류 는 마약, 향정신성의약품, 대마를 뜻한다. 마약 은 양귀비, 아편, 코카잎 및 그의 알칼로이드와 화학적 합성품을, 향정신성의약품 은 인간의 중추신경계에 작용하여 오남용시 심각한 위해를 끼칠 수 있는 물질을 뜻하며 대마 는 대마초칸나비스 사티바 엘( Cannabis sativa L. )와 그 수지(수지) 및 대마초 또는 그 수지를 원료로 하여 제조된 모든 제품을 말하나, 대마초의 종자(종자)·뿌리 및 성숙한 대마초의 줄기와 그 제품은 제외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아편을 제외한 마약은 마약류관리법에서 다루나 아편은 형법에서 규정중이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마약과 관련된 형법 조항은 형법 347조인데, 50g 이상의 마약을 제조 판매했을 때 15년 이상의 징역, 최고 사형까지 선고된다. 특히 1kg 이상의 마약을 유통하다 적발되면 예외 없이 사형을 선고함. 독일의 경우 스스로 마약을 사용하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건강 침해에 대해서는 형법상 처벌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소비를 위해 무허가로 마약을 소지하는 것은 마약법 제29조 제1항에 의해 처벌 대상이다. 공익광고협의회, https://www.kobaco.co.kr/websquare/websquare.jsp?w2xPath=/kobaco/businessintro/about/about_tv_detail.xml&nowPage %b0%f8%c1%df%ba%b8%b0%c7%2f%ba%b9%c1%f6&Matter 41 분류:아편유사제
of Pavlov s dogs.jpg|섬네일|right|265px|파블로프의 조건형성 실험에 쓰였던 개. 고전적 조건형성 (古典的條件形成, Classical Conditioning)은 행동주의 심리학의 이론으로, 특정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하던 자극(중성자극)이 그 반응을 무조건적으로 이끌어내는 자극(무조건자극)과 반복적으로 연합되면서 그 반응을 유발하게끔 하는 과정을 말한다. 파블로프의 개 실험이 이에 관하여 잘 알려져 있다. 생체가 본래 가지고 있는 반응을 〈무조건 반응〉(UR; UnConditioned Response)이라고 한다. (예) 개가 침을 흘린다. 무조건 반응을 일으키는 자극을 〈무조건 자극〉 (US; UnConditioned Stimulus)이라고 한다. (예) 개에게 주는 음식 무조건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자극을 〈중성 자극〉 (NS; Neutral Stimulus)이라고 한다. (예) 종소리를 들려준다. (학습 성립 전) 중성 자극에 의해 일어나는 반응을 〈비상관 반응〉이라고 한다. (예) 개가 귀를 기울인다. 중성 자극 직후에 무조건 자극을 주는 것을 반복하면 중성 자극만으로 무조건 반응이 일어나게 된다. 이것을 《고전적 조건형성》이라고 한다. 고전적 조건형성에 따른 자극을 〈조건 자극〉 (CS; Conditioned Stimulus)이라고 하며, 고전적 조건형성에 따른 반응을 〈조건 반응〉 (CR; Conditioned Response)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고전적 조건형성이 학습된 개에게 소리를 들려주는 것은 조건 자극이며, 이 소리에 반응하여 침을 분비하는 것은 조건 반응이다. 파블로프는 조건 형성이라는 과정을 통해 행동의 수정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조건 형성 이란 평소 특정한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했던 자극(중성자극, Neutral Stimulus NS)이 무조건적인 반응(무조건반응, UnConditioned Response UR)을 이끌어내는 자극(무조건자극, UnConditioned Stimulus US)과 연합하는 과정을 말한다. 조건 형성이 이루어지면 중성자극은 조건 자극(Conditioned Stimulus CS)이 되어 조건 반응(Conditioned Response:CR)을 이끌어낸다. 이 과정을 파블로프의 조건 형성 실험을 예로 들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조건 형성 이전 # 개는 음식을 보면 무조건 침을 흘린다. # 여기서 음식은 무조건자극 (US)이 되고, 침을 흘리는 반응은 무조건반응 (UR)이 된다. # 또한 종소리를 들려주면 개는 반응이 없다. # 여기서 종소리는 어떤 반응도 이끌어내지 못하는 중성자극 (NS)이 된다. 조건 형성 과정 # 개에게 음식을 줄 때마다(US) 반복적으로 종소리를 같이 들려준다(NS). # 이 과정을 무조건자극과 중성자극의 연합, 혹은 조건 형성이라고 표현한다. 조건 형성 이후 # 조건 형성이 된 후에는 중성자극인 종소리(NS)만 들려주어도 침을 흘리게 된다. # 여기서 조건 형성이 된 후의 종소리는 조건자극 (CS)이 되고, 조건 형성이 된 후에 침을 흘리는 반사는 조건반응 (CR)가 된다. 이런 고전적 조건 형성이 일어나는 이유는 어떤 유기체가 조건자극(CS)을 제공받으면 곧이어 무조건자극(US)도 함께 제공받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즉, 조건자극을 무조건자극이 제공된다는 신호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고전적 조건 형성을 실험한 예는 위의 예 말고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Watson&Rayner(1920)는 알버트라는 아이가 흰쥐에게 공포를 느끼도록 하였다. 이 아이는 본래 흰쥐에게 공포를 느끼지 않던 아이였다. 하지만 알버트가 흰쥐에게 다가가거나 만질 때마다 갑작스런 큰 소리를 들려주었고, 결국 알버트는 흰 쥐를 무서워하게 되었다. 사람은 원래 갑작스러운 큰 소리에 놀라는 반응을 한다. 여기서 큰 소리는 무조건자극이 되고, 놀라는 반응은 무조건반응이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무서움을 느끼지 않았던 흰쥐(중성자극)와 큰소리(무조건자극)를 지속적으로 연합하면 흰 쥐(조건자극)만 보아도 놀라는 반응(조건반응)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또한 고전적 조건 형성이라고 할 수 있다. 조건자극은 본래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중성자극이었다. 그러나 조건 형성이 이루어지고 나면 무조건자극과 같이 반응을 이끌어내게 된다. 이렇게 조건 형성이 된 자극은 다른 중성자극도 조건 형성을 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데, 위의 파블로프의 개 실험에서 조건 형성이 된 종소리와 함께 파란 불빛을 보여주면 파란 불빛만 봐도 침을 흘리게 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이차적 조건 형성 (Second-order Conditioning)이라고 하며 그 이상의 조건 형성을 삼차적 조건 형성, 사차적 조건 형성 등등 고차적 조건 형성 (Higher-order Conditioning)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삼차적 조건 형성 이상은 일어나기 힘들다. 이런 고차적 조건 형성에서는 조건자극들이 연달아 제공되고, 음식이 제공되지 않아 소거 의 과정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소거 (Extinction)는 조건 형성이 풀어져 조건자극이 다시 중성자극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만약 파블로프의 개 실험에서 조건자극인 종소리만 들려주고 계속해서 음식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개는 조건자극인 종소리를 듣고도 침을 흘리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즉, 조건자극과 함께 무조건자극을 계속해서 제공하지 않는다면 조건반응을 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소거가 되었다고 해서 조건반응 자체가 소멸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만약 소거가 일어난 파블로프의 개에게 종소리(조건자극)를 갑자기 제시하면 침(조건반응)을 흘린다. 이런 과정을 자발적 회복 (Spontaneous Recovery)이라고 한다. 이 자발적 회복은 학습이 영속적이라는 것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기도 하는데, 우리가 배운 내용을 잊어버렸다고 해서 두뇌에서 아예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계기에 의해 문득 떠오르기도 하는 것에서 경험하는 것과 같다. 또한 소거가 일어난 파블로프의 개에게 다시 함께 종소리와 음식을 제공한다면 종소리는 중성자극에서 다시 조건자극으로 회복되며 종소리(조건자극)와 음식(무조건자극)의 연결은 더욱 단단해지게 된다. 자발적 회복 (Spontaneous Recovery) 소거절차가 이루어진 후에도 음식물과 연합시키지 않은 채 다시 종소리만 반복적으로 개에게 들려주었을 때, 소거되었던 종소리에 침을 흘리는 반응이 재훈련 없이 다시 나타난다. 이를 조건반응의 자발적 회복 (Spontaneous Recovery)이라 한다. 이때 반응의 강도는 전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으나, 자발적 회복은 학습이란 영원히 소멸되는 것이 아님을 시사해 주고 있다. 자극일반화 (Stimulus Generalization)란, 조건자극과 유사한 다른 자극에 동일한 조건반응이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바로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 라는 우리 속담이 가지는 의미와 같다. 갈치구이를 먹다가 목에 가시가 걸린 적이 있는 아이가 식사 때마다 생선을 피하려는 모습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가시가 많지 않거나 씹어 먹으면 되는 생선통조림을 우연히 먹은 아이는 다시 생선을 먹을 수 있게 된다. 이런 현상을 변별 (Discrimination)이라고 한다. 변별 (Discrimination) 자극을 구분하여 반응하는 것을 변별이라 한다. 즉, 자극일반화는 자극 변별에 실패한 상태라 할 수 있다. 이렇게 고전적 조건 형성은 보통 수차례 반복이 되어야 자극 간의 연합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가르시아 효과라는 것이 있는데, 쥐에게 먹이를 주고 어느 정도 후에 열을 가해 매스꺼움과 구토등을 유발시켰더니 그 후에도 그러한 종류의 먹이를 피한다는 것이다. 차례 반복을 통한 연합이 아니라 단 한 번의 강렬한 경험으로 바로 조건반응을 일으키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정보화시대의 신세대를 위한 실기교육방법론 p 81 (자발적 회복, 변별) 조작적 조건화 관찰학습 행동주의 이반 파블로프 고전적 조건화의 행동적 연구 분류:학습 분류:행동주의 분류:교육심리학 분류:실험심리학 분류:러시아의 발명품
미래의 학교. (1901년 또는 1910년) 학습 (學習) 또는 배움 은 본능적인 변화인 성숙과는 달리, 직간접적 경험이나 훈련에 의해 지속적으로 지각하고, 인지하며, 변화시키는 행동 변화이다. 환경의 변화에 대한 생체의 일반적 적응과 신체적인 피로, 손상 등 일시적인 동기 부여 등에서 초래된 행동의 변화와는 구별된다. 학습과 공부가 대비되는 점은 학습이 외부적인 교육이나 현상에 대해 영향을 받는 데 비해 공부는 자발적인 면이 강하다. 고전적 조건형성과 도구적 조건형성이 대표적인 예이다. 비연합 학습 * 습관화 * 감작 연합 학습 * 조작적 조건화 * 고전적 조건형성 * 각인 놀이 문화화 일화적 학습 어떠한 사건의 결과로 발생하는 행동의 변화 멀티미디어 학습 청각적, 시각적 자극을 둘 다 이용하여 정보를 학습하는 과정 (Mayer 2001) 전자 학습 및 증강 학습 컴퓨터 강화 학습을 가리키는데 사용하는 포괄적인 용어 암기 학습 유의미 학습 학습된 지식이 다른 지식과 관계되는 정도로까지 완전히 이해되었다는 개념 비정형 학습 정형 학습 비형식 학습 대화적 학습 대화에 기반한 학습 우발 학습(우연 학습) 선생이나 학생에 의해 계획되지 않고, 경험, 관찰, 자기고찰, 상호작용, 특별한 사건, 일반적인 일과 같은 다른 활동의 분산물로서 발생 능동 학습 자신의 학습 경험을 통제할 때 발생 기계 학습:인공지능의 한 갈래로서 데이터로부터 학습할 수 있는 시스템에 대한 구성과 연구를 말한다. 이를테면, 기계 학습 시스템은 이메일 메시지가 스팸인지 스팸이 아닌지를 구별하기 위해 훈련을 받을 수 있다. 추론 학습 영역 학습지도 교육학 벼락치기 공부 성적 분류:교육학 분류:발달심리학 분류:교육심리학
발달 심리학 (發達 心理學은 사람의 출생부터 사망까지 일생동안 연령에 따른 정신과정과 행동상의 변화를 다루는 심리학의 한 분과이다. 개인의 일생의 지적·정서적·사회적 과정의 전개에 관심을 둔다. 발달 원리는 신체적·지적 변화가 급속히 이루어지고 행동 유형이 형성되는 생후 20세까지의 시기에 적용된다. 정체성, 인간관계, 창의력 등을 삶의 중요한 세 영역으로 본다.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은 인간의 발달을 8단계로 구분하고 각 단계별로 형성되는 특성을 설명하면서 각 시기마다 접하는 환경과 상황에 따라 자기 자신과 사회에 대한 인식이 결정된다고 보았다. 연구 영역은 신체적·지적·정의적(情意的)·사회적 발달로 나누기도 하고, 영아기·유아기·아동기·청년기·장년기·노년기로 나누기도 한다. 또는 어떤 특수 영역, 예를 들어 뇌의 발달, 양심의 발달, 성격의 발달 등으로도 나눌 수 있다. 운동능력의 발달, 인지발달, 성격 발달 등 심리학 분야의 다양한 연구방법과 주제를 포괄하기도 한다. 변화는 크게 질적 변화(구조적 변화, 단계적 변화)와 양적 변화(연속적 변화, 비단계적 변화)로 나눌 수 있다. 발달이 선천적인 영향을 많이 받는지, 후천적인 영향을 많이 받는지에 관해서는 이견이 분분했으나, 최근에는 반응의 범위 모형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워드 가드너 * 다중지능이론 자존감 유아심리학 발달(development) 한국발달심리학회 분류:심리학 분류:행동과학
Piaget.jpg|섬네일|right|270px|장 피아제의 흉상 인지 발달론 (認知發達理論, Theory of cognitive development)은 인간의 인지 발달을 유기체와 환경의 상호작용으로 파악한 피아제의 이론이며, 심리학의 인지이론에 있어 가장 영향력 있는 이론이다. 피아제의 이론 뿐 아니라 비고츠키의 이론 등 다양한 인지적 발달론들을 일반적으로 통칭하기도 한다. 피아제는 심리학자이면서 생물학자였다. 따라서 그의 이론은 생물학과 인식론에 그 뿌리를 두게 되는데, 여기서 인식론은 인간이 발생학적으로 인식하는 존재로 타고난다는 것이다. 인지 발달론 또한 생물학과 인식론에 그 뿌리를 두고 인간의 지적 능력은 유기체가 환경에 적응해 가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피아제는 한 사람의 아동기가 사람의 발달 과정에서 핵심적이고 중요한 역할을 기능한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인지 발달은 신체적 성숙과 환경적 경험으로부터 비롯되는 정신적 과정의 점진적 재조직이었다. 더 나아가 그는 인지 발달은 유기체로서의 인간의 핵심에 있으며 언어는 인지 발달을 통해 습득된 지식을 대변한다고 주장했다. 유기체가 환경에 적응한다는 말은 파란 신호일 때 길을 건너는 것, 구구단을 외우는 것 등을 말한다. 즉 인간의 지적 능력은 타고난 것이되, 그것이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인지의 발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피아제는 도식과 적응이라는 개념을 설정했다. 도식 도식은 사물이나 사건에 대한 전체적인 윤곽을 말한다. 쉽게 말해 사고의 틀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는 유사한 환경 안에서, 반복에 의해 변화되고 일반화된 행동의 구조 또는 조직화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5세 유아가 날아다니는 물체는 새라고 배웠다고 생각해 보자. 이를 통해 이 아이는 "날아다니는 물체는 새와 같다"는 도식을 보유하게 된다. 몇 가지의 도식은 인간이 탄생하기 이전부터 이미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빨기 도식이나 잡기 도식과 같은 것인데, 빨기 도식의 경우 그러나 그 기능면에서 변화된 것은 아니라서 적응의 과정을 통해 새로운 도식을 개발하고, 기존의 것을 변형시키면서 발전하게 된다. 적응 적응은 환경과의 직접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도식이 변화하는 과정을 말한다. 두 가지의 상호보완적인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바로 동화와 조절이라는 수단이다. 적응은 우리에게도, 또 동식물에게도 흔히 찾을 수 있다. 홍관조의 수컷은 선명한 붉은색인 반면에 암컷은 눈에 띄지 않게 엷은 갈색을 띠면서 종의 생존에 대한 위협을 줄인다. 이런 식으로 환경에 적응하는 것을 말하는데 인지적으로는 도식이 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경우, 새로운 도식을 만들거나 기존의 도식을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동화와 조절 동화 는 기존의 도식에 맞추어서 새로운 경험을 일반화하는 과정을 말한다. 쉽게 말해 새로운 경험을 기존에 가지고 있는 도식에 맞추어 보는 것을 의미하는데, 만약 새로운 경험이 기존의 도식에 맞는다면 유기체는 인지적으로 평형 상태가 된다. 위에서 날아다니는 모든 물체를 새라고 배운 아이는 날아다니는 비행기를 보면서도 새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아이는 이것이 털도 없고, 날개도 펄럭이지 않는 등 기존에 알고 있던 새와는 다르다고 느끼게 되면서 불평형의 상태가 된다. 피아제에게 동화는 외부적 요소를 생활 또는 환경, 혹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던 것들의 구조에 통합하는 것을 의미했다. 동화는 사람이 새로운 정보를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방법이고 새로운 정보를 기존의 인지 도식에 맞추는 과정이다. 새로운 경험에서의 동화는 기존의 개념에 맞추거나 조절하기 위해 재해석되며 동화는 사람들이 새롭거나 친숙하지 않은 정보에 직면하여 이를 이해하기 위해 이전에 학습한 정보를 언급하는 것이다. 조절은 만약 새로운 경험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도식에 맞지 않을 때, 유기체는 불평형의 상태를 겪게 되는데 이 상태에서 평형의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 기존에 가지고 있던 도식을 변경하거나 새롭게 만들게 되는 과정을 말한다. 불평형의 상태가 되었던 아이는 이제 새가 아니라고 결론짓고, 그것에 대해 새로운 이름을 만들어내게 된다. 이 과정을 조절 이라고 한다. 혹은 누군가가 그것은 새가 아니라 비행기라고 일러 줄 수도 있다. 이런 과정을 조절이라고 하는데, 조절의 과정에서는 도식의 형태에 질적인 변화가 나타난다. 조절 은 특정 환경에서 새 정보를 습득하는 과정이고 기존의 도식을 새 정보에 들어맞게 하기 위해 대체하는 것이다. 이는 기존의 도식(지식)이 작동하지 않을 때 발생하고 새 대상이나 상황을 처리하기 위해 변화되길 요구한다. 피아제는 사람의 두뇌는 평형화를 위한 진화를 통해 짜여졌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동화와 조절을 통한 내/외부적 과정에 의한 구조들에 영향을 미친다. 피아제는 동화와 조절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 독단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이해하였다. 하나의 대상을 기존의 정신 도식에 동화하기 위해 어느 정도 이 대상의 특징을 설명하고 조절해야 한다. 가령, 사과를 사과로 알게 되기(동화시키기) 위하여 그 대상의 외양에 집중(조절)해야 한다. 이를 위해 그 대상의 크기를 개략적으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발달은 두 기능 사이의 평형화를 증대시킨다. 조직화 조직화는 유기체가 현재 가지고 있는 도식을 새롭고, 더욱 복잡한 도식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을 말한다. 즉 지금 가지고 있는 도식을 어떤 새롭고 복잡한 구조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아까 새와 비행기를 구분하게 되었던 아이는 이제 날아다니는 대상의 하위 범주로 새와 비행기를 조직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조직화를 거듭함으로써 인지적인 발달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조직화는 인지적 발달의 핵심적인 요소이다. 피아제는 인간의 인지 발달은 네 단계를 통하게 되며, 질적으로 다른 이 단계들은 정해진 순서대로 진행되고 단계가 높아질수록 복잡성이 증가된다고 한다(Piaget,1954). 감각운동기 (Sensorimotor Stage)의 시기 출생 직후 ~ 2세 감각운동기에는 신생아의 단순한 반사들이 나타나는 출생에서 초기의 유아적 언어가 나타나고, 상징적 사고가 시작되는 2세 경에 끝난다. 이 단계에서 아동의 행동은 자극에 의해 반응하는 것에 불과한데, 이는 언어가 발달하기 이전의 단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동은 시각이나 청각 등의 감각과 운동기술을 사용해 외부 환경과 상호작용하게 된다.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대상영속성 (Object permanence)을 보유하게 되는 것을 들 수 있다. 이는 대상이 보이지 않더라도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을 말한다. 초기의 아동은 어떤 대상이 눈 앞에서 사라지면 세상에서 없어지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 시기가 지나게 되면 눈 앞에서 사라져도 아예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8개월 무렵부터). 또 이 시기가 지나면 모방이나 기억이 가능한, 정신적 표상 을 형성하게 되며 초기의 단순한 반사행동은 사라지고 점차 자신의 의도에 따라 계획된 목적행동 으로 바뀌게 된다 전조작기 (Preoperational Stage)의 시기 2세 ~ 6, 7세 조작이란 어떤 논리적인 사고를 통해 조작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즉, 전조작기란 조작이 가능하지 않은 이전의 단계라는 의미이다. 이 시기에는 대략 언어를 사용하면서 자신이 내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표상을 여러 형태의 상징으로 표현하게 된다. 전조작기 사고의 주요한 특징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상징적 사고 감각운동기까지의 인간은 자신의 행동이나 감각에 의존하여 생활한다. 그러나 감각운동기의 말기가 되면 점점 정신적 표상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정신적 표상은 언어의 발달이 가속화하는 특징이 있다. 전조작기 아동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표상들을 그림이나 언어 등의 형태로 표현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가상놀이 라는 것이 있는데, 소꿉놀이나 병원놀이와 같은 것으로 가상적인 사물과 상황을 실제 사물이나 상황처럼 상징하곤 한다. 자기중심적 사고 (Egocentrism) 아이들은 남을 배려하지 못한다. 피아제는 그 원인을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찾는다. 전조작기의 아이들은 타인의 생각, 감정, 지각, 관점 등이 자신과 동일하리라고 생각하는 특성을 가지게 되는데, 유명한 세 산 실험 (three mountain problem)의 결과에서 그 내용을 찾을 수 있다. :아동들에게 비대칭적인 산 모양을 보여준 후, 아동이 앉아 있는 위치와는 다른 위치에서 관찰자가 그 광경을 보았을 때 무엇을 볼 것인가를 물어보았다. 일반적으로 3, 4세의 아동은 타인도 자기가 보았던 것을 볼 것이라고 예상한다. 이런 실험을 통해 타인의 시각에서 보는 조망을 추론할 수 있는 조망수용능력 (Perspective Taking)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직관적 사고 (Intuitive Thinking) 크기, 모양, 색깔과 같은 한 가지 두드러진 속성에 근거하여 대상을 이해하려는 사고를 말한다. 즉, 지각적인 특성에만 의존하게 된다는 것인데 이러한 사고의 특성으로 전조작기 아동은 보존개념을 획득할 수 없게 된다. :예를 들어 A, B의 두 비커에 같은 양의 물을 담았다고 생각해 보자. A비커와 B비커는 모두 넓고 낮은 모양이므로 두 비커에 든 물의 양은 동일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B비커의 물을 좁고 높은 모양의 C비커에 담는다면 물이 늘어났다고 여기게 된다. 즉, 눈에 보이는 모양만을 보고 물의 양을 판단하게 되는 직관적 사고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물활론적 사고 모든 사물에 모두 생명이 있다고 여기는 사고를 말한다. 인공론적 사고 모든 것을 사람이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나를 위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사고를 말한다. concrete operational stage 보존 개념 보존 개념(conservation)이란, 모양이 넓은 같은 모양의 컵에 같은 양의 우유를 보여준 뒤, 한 컵의 우유를 모양이 다른 긴 컵에 부어도 긴 컵과 넓은 컵의 우유의 양은 같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즉, 동일성, 보상,역조작의 개념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또한 수의 개념에서도 달걀과 컵을 나란히 놓은 뒤 어느 것이 더 많으냐 하면 컵과 달걀의 수가 같다고 대답하지만 달걀이나 컵을 한쪽으로 모아놓으면 달걀과 컵의 수가 다르다고 생각했던 전조작기의 특성에서 벗어나게 된다. 전조작기 아동은 같은 양의 진흙으로 만든 두 개의 공을 보여준 뒤 아동 앞에서 하나를 핫도그처럼 길게 만들면 어느새 양이 달라졌다고 생각하지만 보존개념을 획득한 구체적 조작기에는 모양이 달라져도 그 양이나 수는 보존된다는 개념을 획득한다. 유목화 같은 모양의 구슬을 보고 쇠구슬과 유리구슬을 구분할 수 있게 됨 서열화 연역적 사고가 가능하게 됨 Formal operational stage 가설적 사고 새로운 상황에 직면 했을 때 과거와 현재의 경험을 통해 가설적 상황을 설정하여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된다. 과학적 사고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사전에 일련의 계획을 세우고 체계적으로 시험하면서 해결책을 찾을 수 있게 된다. 추상적 사고 현실 상황에는 없는 여러가지 추상적 개념을 이해할 수 있다. 현실에는 없는 개념도 상상하고 그려 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체계적 사고 자신과 다른사람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의 이상적인 기준에 따라 자신의 주장과 타인의 주장을 비교, 분석 할 수 있는 능력도 생긴다. 명제적 사고 현실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도 언어적 진술에 의한 명제의 논리를 평가할 수 있다. 연역적 사고 결합적 분석 추상적 추론 분류:심리학
Linckia Starfish.JPG|섬네일|산호초는 해양 생태계의 좋은 예이다. 생태계 (生態系는 상호작용하는 유기체들과 또 그들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주변의 무생물 환경을 묶어서 부르는 말이다. 생태계를 연구하는 학문을 생태학(ecology)이라고 한다. 같은 곳에 살면서 서로 의존하는 유기체 집단이 완전히 독립된 체계를 이루면 이를 생태계 라고 부를 수 있다. 이 말은 곧 상호의존성과 완결성이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는 데 꼭 필요한 요소라는 뜻이다. 하나의 생태계 안에 사는 유기체들은 먹이사슬을 통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경우가 많다. 이 먹이사슬을 통해 영양물질이 여러 유기체에 걸쳐 순환하고 에너지도 같이 이동하는데, 이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다양한 생태계가 생겨난다.(비둘기,금붕어,개미등 생태계 파손) 생태계 라는 용어가 서구 사회에 정립된 것은 1930년 로이 클라팸이라는 학자에 의한 것으로서 그는 환경 전반의 유기체와 생물들의 연관성에 대해 논하기 시작하였다. 후에 영국의 생태학자 아서 트랜스리가 앞서 정리한 로이의 연구 결과를 정제하여 발표한 것이 현재의 생태계(Ecosystem)이다. 생태계란 기본적으로 살아있는 유기체 간의 상호작용이 이뤄지는 체계라고 볼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개념은 모든 자연환경 상에 있어 모든 생물이 그물처럼 연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인간계의 생태학적 개념이란 인간과 자연이 함께 공존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작은 미생물에서부터 거대한 동물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작용이 서로 밀접한 위치에 있음을 상징한다. 생태계의 예로는 크게 육상 생태계, 연안 생태계, 육수 생태계로 나뉜다. 인류학적 관점에서 많은 사람들은 생태계가 모든 생산의 원천이자 상품과 용역의 기초가 된다고 본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목재나 유제품과 같은 제품들이다. 야생동물에서 얻은 육류는 생태학적 관념을 적용하면 훨씬 더 환경과의 조화를 꾀하고 수초를 보호하면서 경제적 이득을 취할 수 있다고 케냐와 남아프리카 일대의 연구에 보고된 바 있다. 그러나 사실 야생 생태계의 구조를 이용한 상업구조는 이렇다 할 성과가 많이 나오는 분야는 아니다. 생태 관광이라고 불리는 자연환경을 이용한 관광 산업이 가장 성공적인 분야라고 할 수 있다. 생태 관광은 자연환경을 보존하면서도 인간이 자연에서의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윈윈 전략이라고 여겨진다. 농생태계 수생 생태계 산호초 사막 숲 인간 생태계 해양 생태계 연못 생태계 프레리 우림 사바나 스텝 타이가 툰드라 도시 생태계 presa las niñas mogan gran canaria.jpg|섬네일|1000px|center|카나리아 제도의 그란 카나리아의 민물 생태계 생물지구화학적 순환 생태계 분류:공생 분류:초개체
위)는 DNA가 실타래처럼 감겨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유전자 는 DNA의 이중 나선 한 구간을 차지하고 있으며 정보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엑손 구간과 정보가 담겨있는 인트론구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전자 (영어 gene)는 유전의 기본단위이다. 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유전자를 지니고 있다. 유전자에는 생물의 세포를 구성하고 유지하고, 이것들이 유기적인 관계를 이루는 데 필요한 정보가 담겨있으며 생식을 통해 자손에게 유전된다. 현대 유전학에서 유전자는 "게놈 서열의 특정한 위치에 있는 구간으로서 유전형질의 단위가 되는 것"으로 정의된다. 게놈 서열 안에서 유전자는 DNA 서열의 일부분을 이루며 조절 구간, 전사 구간, 기타 기능이 부여된 구간 등으로 구성된다. 일반적으로 유전자를 대립형질과 같은 뜻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으나, 엄밀한 의미에서 대립형질은 유전자 서열에 의해 나타나는 유전형질의 한 종류이다. 유전자의 개념은 유전학의 발전과 함께 많은 변화를 겪었다. 유전학의 창시자인 그레고어 멘델은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유전적 특질이 통계적으로 예측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를 단순히 특질이라고 불렀다. 이후 멘델의 특질은 유전자라는 이름이 붙었으나 1950년대 DNA가 발견되면서 유전자의 물질적 토대가 해명되었다. 모든 생물은 유전자에 의한 다양한 유전형질을 갖고 태어난다. 눈 색깔, 혈액형과 같은 것을 비롯하여 특정한 유전적 질환과 같은 것도 유전된다. 뿐만 아니라 생명활동에 관여하는 수 천 가지의 생화학 작용도 유전자를 기반으로 한다. 극소수의 경우, 유전자가 세포주기의 간기때 유전정보가 잘못복제되어 돌연변이를 일으킴으로인해 기존의 형질과 다른 새로운 유전형질을 갖고 태어나는 경우도 있다. 세포 내에서 유전자는 DNA 서열 가운데 정보를 갖는 부분을 뜻한다. DNA의 대부분은 정보가 없는 무작위 서열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를 비부호화 DNA 서열이라 한다. 인간의 게놈 가운데 99%가 비부호화 DNA 서열에 해당한다. 한편, 생쥐의 비부호화 DNA 가운데 80%가 인간의 것과 상동성을 보인다. 이는 진화의 과정에서 두 종이 공통조상으로부터 분화되었음을 시사한다. 이에 반해 유전자는 "부호화된 DNA 서열"이라고 할 수 있다. 유전자에 의해 진행되는 전사 (생물학)등의 과정을 통해 유전형질이 발현되는 것을 유전자 발현이라 한다. 유전자의 발현은 개체의 발생과 성장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때 개체와 자연환경의 상호작용은 유전자의 발현을 조절한다. 이렇게 자연환경의 영향으로 인해 개체에 발현된 특징을 발현형질이라한다. 발현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 1850년대 그레고어 멘델 그의 유명한 완두콩 실험을통해 멘델의 유전법칙을 발견하였다. 완두콩 시험은 7년에 걸쳐 진행되었다. 그는 하나의 유전형질이 세대를 거듭하여도 변하지 않는 개체를 순종으로, 이 순종들의 교배를 통해 형질변화가 일어나는 개체를 잡종으로 불렀다. 잡종의 1세대에는 두 부모 개체의 대립형질 가운데 한 가지만이 발현되었는데 이를 우성, 1세대에 발현되지 않는 특성은 열성이라 하였다. 멘델은 잡종 교배 시험을 통해 1세대에 열성이 발현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사라진 것이 아니며 2세대, 3세대를 거치면서 다시 발현한다는 것과 발현의 빈도가 통계적으로 분명한 법칙에 의한 비율로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법칙의 발견으로서 멘델은 현대 유전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초창기 멘델의 발견은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1889년 휘호 더프리스가 《세포간 범생설》( Intracellular Pangenesis ) 을 출간하면서 멘델의 이론을 소개하여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더프리스는 멘델이 제시한 유전학 개념의 용어를 정리하여 유전형질, 발현형질과 같은 용어를 고안하였다. 유전자()라는 용어는 덴마크의 유전학자 빌헬름 요한센이 최초로 사용하였다. 1900년대에 이르러 멘델의 법칙은 다시 과학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토머스 헌트 모건은 유전자가 염색체에 위치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모건은 특정한 유전형질에 관여하는 유전자가 염색체의 특정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도 밝혀내었다. 1928년 모건은 초파리를 이용하여 최초로 유전자 지도를 제작하였다. 1928년 영국의 의사 프레더릭 그리피스는 페렴쌍구균을 연구하다가 우연히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된다. 그리피스 실험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이 시험을 통해 그리피스는 유전형질이 세균 사이에서 전달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는 매끈한 균주를 형성하는 S형과 거친 균주를 형성하는 R형 두 종류의 폐렴쌍구균을 이용하여 실험하였다. S형을 생쥐에 주사하면 쥐는 하루 만에 죽지만 R형은 병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리피스는 폐렴 백신을 만들기 위해 S형 균을 열처리하여 죽인다음 생쥐에 주사하였다. 죽은 S형 균은 병을 유발하지 않아 생쥐는 생존하였다. 그다음 그는 죽은 S형 균과 살아있는 R형 균을 혼합하여 주사하였는데 생쥐는 폐렴으로 죽었다. 죽은 생쥐의 혈액을 관찰한 결과 모든 균이 S형으로 변해있었다. 죽은 S형 균의 무엇인가가 R형 균을 S형 균으로 바꾼 것이다. 그리피스는 이 현상을 형질변환이라 불렀다. 1941년 조지 웰스 비들과 에드워드 로리 테이툼은 돌연변이가 대사회로의 이상에 의해 발생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이를 보다 연구하여 하나의 유전자는 하나의 효소를 지정하여 생성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1944년 오즈월드 에이버리, 콜린 먼로 매클라우드, 매클라인 매카시는 DNA에 유전자 정보가 있음을 밝혀냈다. 그리피스가 관찰한 형질변환은 바로 이 DNA의 이동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1953년 제임스 D.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DNA의 구조를 밝혀내었다. 이로써 하나의 효소를 지정하는 하나의 유전자는 사실상 DNA의 염기서열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즉, DNA의 염기서열이 RNA에 의해 전사되고 리보솜에 전달되면 그로부터 지정된 아미노산 서열의 결합이 이루어져 효소와 같은 단백질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1972년 월터 피어스의 연구팀은 박테리오파지 MS2를 이용하여 최초로 유전자 서열을 판독하였다. 유전자 전체의 서열을 게놈이라 한다. 2007년 8월 햅맵 프로젝트는 인간의 게놈 지도를 판독하였다. 개체차를 반영한 인간의 게놈 판독 결과는 2008년 네이처에 발표되었다. 유전 유전학 유전형질 대립형질 유전자 부동 유전자 이동 수평적 유전자 이동 멘델의 유전법칙 집단유전학 진화 슈도진 중립 진화 이론 그레고어 멘델 휘호 더프리스 오스왈드 에이버리 제임스 D. 왓슨 프랜시스 크릭 네이버 캐스트 - 유전자 재조합
DNA의 이중나선 DNA (, 디옥시리보 핵산 )는 뉴클레오타이드의 중합체인 두 개의 긴 가닥이 서로 꼬여있는 이중나선 구조로 되어있는 고분자화합물이다. 세포 핵에서 발견되어 핵산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지만 미토콘드리아 DNA와 같이 핵 이외의 세포소기관도 독립된 DNA를 갖고 있는 것이 있다. DNA는 4 종류의 뉴클레오타이드가 중합 과정을 통해 연결된 가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가닥은 시토신, 구아닌, 아데닌, 티민이라는 독특한 핵염기로 구분되기 때문에 흔히 DNA 염기서열이라고 부른다. DNA 염기서열은 유전정보를 나타내는 유전자 구간과 그렇지 않은 비부호화 DNA 구간으로 나눌 수 있다. 과거에 기능을 가진 유전자였더라도 돌연변이를 통해 기능을 상실한 슈도진이 되면 비부호화 DNA가 된다. DNA는 스스로를 복제하고 유전정보를 통해 유전자 발현이 일어나게 한다. 유전자는 DNA 사슬의 특정 구간으로 실제 단백질 형성과 같은 발현에 관여하는 엑손 구간과 그렇지 않은 인트론을 포함한다. DNA가 직접 유전자 발현을 실행하는 것은 아니며 실제 발현 과정은 DNA에서 전사된 전령 RNA(mRNA)가 지닌 코돈에 의해 진행된다. 코돈은 세 개의 염기서열이 묶인 유전단위로 시작 코돈과 종결 코돈 그리고 그 사이에 실제 아미노산 결합을 지시하는 코돈들로 이루어져 있다. mRNA는 리보솜에서 효소와 같은 단백질을 합성하게 한다. DNA는 1869년 스위스의 프리드리히 미셔(Friedrich Miescher)가 처음 발견했다. 그는 세포 핵 안에서 발견한 산이라는 의미로 뉴클레인이라고 불렀다. 이후 DNA는 유전의 원인으로 오랫동안 지목되어 왔으며 1944년 오즈월드 에이버리의 형질전환 실험을 통해 DNA가 유전물질임이 확인되었고 1952년 알프레드 허시(Alfred Hershey)와 마사 체이스(Martha Chase)의 허시-체이스 실험으로 확정되었다. DNA의 이중나선 구조는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1953년 네이처지에 실은 논문에서 처음으로 밝혔다. DNA는 뉴클레오타이드 중합체 두 가닥이 서로 꼬여있는 이중나선 구조로 되어있다. DNA를 이루는 뉴클레오타이드는 디옥시리보스를 중심으로 한 쪽에는 인산염이 결합되어 있고 다른 한 쪽에는 4 종류의 핵염기 가운데 하나가 결합되어 있다. 디옥시리보스와 인산기가 중합 과정을 통해 사슬 한 가닥의 뼈대를 이루고 핵염기들이 서로 상보적인 수소 결합을 통해 염기쌍을 이루며 이중나선을 만든다. 이중나선 구조는 DNA의 기능을 수행하는데 필수적이다. 뉴클레오타이드의 핵염기는 유전정보를 저장하는데 수소 결합으로 유지되기 때문에 쉽게 풀렸다 닫힐 수 있다. 이 때문에 이중나선은 유전자 발현을 위해 일부분이 풀렸다가 닫힐 수도 있고 세포 분열 과정에서 완전히 풀리면서 복제될 수도 있다. 일부 또는 전체가 풀린 이중나선은 유전자 발현이 종료되거나 복제가 끝나면 다시 닫히게 된다. 한편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돌연변이는 진화의 원인이 된다. 아데노신일인산의 구조. 가운데의 오각형이 디옥시리보스, 왼쪽이 인산, 오른쪽이 핵염기인 아데닌이다. 뉴클레오타이드는 디옥시리보스를 중심으로 한 쪽은 인산염이 다른 한 쪽은 핵염기가 결합되어 있는 DNA의 단위체이다. 생체에는 여러 종류의 뉴클레오타이드가 있으며 저마다 독자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예를 들어 아데노신은 결합된 인산염의 수에 따라 아데노신일인산, 아데노신이인산, 아데노신삼인산과 같은 형태로 존재한다. 아데노신삼인산은 인체의 모든 세포에 화학적 에너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맡고 있어 "세포의 에너지 동전"이라고도 불린다. 이데노신삼인산에서 인산염 하나가 분리되어 아데노신이인산이 되면서 에너지를 전달한다. DNA를 이루는 것은 이것보다 인산염 하나가 더 적은 아데노신일인산이다. DNA를 이루는 뉴클레오타이드의 핵염기는 시토신(C), 구아닌(G), 아데닌(A), 티민(T)의 네 종류이다. 이들 핵염기와 연결된 뉴클레오타이드는 마치 레고 블럭처럼 DNA를 이루는 기본 단위가 된다. 구아닌은 시토신과 아데닌은 티민과 서로 상보적으로 결합하여 염기쌍을 이룬다. 염기의 모양과 화학구조 때문에 상보적인 두 핵염기만이 꼭 들어맞기 때문이다. 그렇기때문에 DNA 가닥의 한쪽 염기서열만 알면 다른쪽은 자동적으로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쪽 가닥의 염기서열이 -A-C-G-T- 라면 다른 쪽 가닥의 염기서열은 -T-G-C-A- 가 된다. 아데닌(A)과 티민(T)은 두 개의 수소 결합으로 연결되고 구아닌(G)과 시토신(C)은 세 개의 수소 결합으로 연결된다. 수소결합의 개수 때문에 A-T 결합은 G-C 결합보다 결합력이 약하고 상대적으로 파손되기 쉽다. 생명체가 죽으면 DNA 역시 여러 이유로 손상을 입기 시작하는데, 상대적으로 결합력이 약한 A-T 쪽이 먼저 파괴되는 경향이 있다. 살아있는 동안에도 티민은 계속적인 손상을 입어 우라실로 대체되며 이렇게 손상을 입은 DNA는 소변을 통해 배출된다. chemical structure.png | 구아노신일인산 chemical structure.png | 티미딘일인산 chemical structure.png | 시티딘일인산 pair GC.svg | 구아닌과 시토신의 상보 결합 pair AT.svg | 아데닌과 티민의 상보 결합 대부분의 생물은 위 네 핵염기만이 DNA의 단위체이지만 바이러스의 일종인 일부 박테리오파지는 우라실도 단위체로 사용된다. 박실루스 슈브틸리스( Bacillus subtilis ) 종에 속하는 박테리오파지 PBS1과 PBS2 그리고 예르시니아( Yersinia ) 박테리오파지 piR1-37 의 DNA는 티민이 우라실로 대체되어 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생물에서 우라실은 RNA의 단위체로서만 관여한다. DNA가 나선 모양으로 꼬이는 것은 일차적으로 디옥시리보스와 인산의 중합 형성으로 생기는 구조 때문이다. 리보스와 디옥시리보스는 모두 탄소 5개로 이루어진 오탄당으로 단원자 산소를 매개로 오각형의 구조를 이룬다. 단원자 산소에서 시계방향으로 각 탄소마다 1번에서 5번까지 번호를 붙여 위치를 나타낸다. 뉴클리오타이드에서 디옥시리보스의 1번 탄소는 핵염기와 결합하고, 2번과 3번은 하이드록시기( -OH )와 결합하며 4번 탄소와 연결된 5번 탄소가 인산염과 결합한다. 그리고 다른 뉴클레오타이드와 결합하는 것은 5번 탄소에 연결된 인산염이다. 따라서 DNA 염기서열 사슬은 언제나 인산염을 사이에 두고 5번 탄소와 3번 탄소가 연결되게 된다. 이를 5 → 3 연결이라고 부른다. 인산염의 결합 위치때문에 DNA 가닥은 3차원에서 나선 구조를 지니며 꼬이게 된다. 한편, 두 가닥의 염기서열 뼈대에 연결된 핵염기가 상보적이기 때문에 한 쪽 가닥 말단이 3번 탄소라면 상대쪽은 5번 탄소이게 되고 그 반대로 한 쪽의 말단이 5번 탄소라면 상대쪽은 3번이게 된다. 그 결과 두 염기서열 뼈대는 서로 반대 방향으로 나란한 역평행성을 보인다. 이와 같이 하여 DNA는 두 개의 염기서열 뼈대가 서로 꼬인 이중나선 구조가 되고 두 사슬의 핵염기가 마치 사다리처럼 상보적으로 결합하여 안정적 구조를 유지하게 된다. | 디옥시리보스의 구조 C.svg | 5 → 3 연결 DNA chain antiparallel.png | DNA 사슬의 역평행성 | DNA 이중나선 DNA 이중나선의 종류. 왼쪽부터 A형, B형, Z형 DNA 이중나선은 대게 오른 나사 방향으로 꼬이는 B형이 일반적이긴 하지만 꼭 그것만이 유일한 구조는 아니다. 널리 알려진 유형으로는 A-DNA, B-DNA, Z-DNA가 있다. DNA 이중나선은 나선 사이에 홈이 패이게 되는데 넓게 패이는 주홈과 좁게 패이는 부홈을 구분할 수 있다. 가장 일반적인 B-DNA의 경우 한 번 감긴 나선 마다 10개의 염기쌍이 놓인다. 그런데 A-DNA는 나선의 기울기가 수직축을 기준으로 30°정도 기울어져 있어서 더 큰 폭으로 회전한다. 이 경우 나선 사이의 홈도 비슷하게 패여서 주홈과 부홈을 구분하기 힘들게 되며 나선 하나에 놓이는 염기쌍도 11개로 B형 보다 1개 더 많다. 한편 Z-DNA는 나사의 회전 방향이 B-DNA와 거울상 대칭을 보이고 나선 하나에 12개의 염기쌍이 놓이게 된다. 그 결과 Z-DNA는 B-DNA보다 길고 홀쭉하게 보이게 된다. DNA는 대부분 B형을 보이지만 매우 긴 DNA 사슬은 여러 형태의 DNA 사슬구조가 섞여 있다. 구아닌(G)과 시토신(C)이 반복하여 염기서열을 이룰 때 Z형 나선을 이루는 경향이 있으며 유전자와 인접한 Z형 나선은 유전자 발현에 영향을 미친다. 가운데가 환형 DNA이고 양쪽은 거울상 대칭을 보이는 초나선 DNA이다. 오랫동안 DNA 이중나선은 기다란 끈 모양으로 여겨져 왔지만, 전자현미경 관찰을 통해 많은 경우 양 끝이 공유결합을 통해 고리 모양을 이루는 환형 DNA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DNA 이중나선 역시 다시 한 번 꼬여서 초나선을 이룰 수 있다. DNA가 이렇게 고리 구조를 이루기 위해서는 사슬의 방향성 때문에 한쪽 끝의 3 말단이 반대편 끝의 5 말단과 공유결합을 하는 수 밖에 없다. 이렇게 하려면 DNA 사슬 자체가 1 회 이상 더 회전하여야 한다. DNA 사슬의 나사 진행 방향과 같은 방향으로 회전하여 고리를 만든다면 나선을 더 단단히 조이는 효과가 일어나고 이를 양성 초나선이라고 한다. 반대로 DNA 사슬의 나사 진행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회전하여 고리를 만든다면 DNA 나선을 풀어주는 효과가 나타나고 이를 음성 초나선이라고 한다. 실제 DNA는 그것의 나선 1회전 당 염기쌍 수를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구조를 변형하여 초나선에 의한 영향에 맞선다. 예를 들어 B-DNA는 나선축이 휘어져 나선 1회 당 10개의 염기쌍 주기를 유지한다. DNA의 위상적 구조가 갖는 생물학적 기능은 아직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게다가 DNA 구조는 늘 일정하게 고정된 것이 아니라 풀렸다 닫히기를 반복하면서 변한다. 토포이소머라제는 초나선 현상을 완화하는 효소로 공유결합된 말단을 풀어 고리를 끊고 너무 꼬여버린 줄을 풀어준다음 다시 연결한다. DNA에는 생물의 유전정보가 담겨있다. 그러나 DNA의 염기서열 모두가 유전자 발현에 관여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 유전형질의 발현에 관여하는 염기서열을 유전자라고 하고 그렇지 않은 부분을 비부호화 DNA라고 한다. 비부호화 DNA 가운데에는 예전에는 유전자로 기능하였으나 돌연변이 등으로 더 이상 기능하지 않는 슈도진이 포함되어 있다. 유전자가 직접 생물을 이루는 물질을 만들지는 않는다. 유전자에는 어떤 것을 어떻게 만들 지에 대한 정보만이 담겨있다. 따라서 DNA는 생물의 설계도를 담고 있는 청사진이라기 보다는 마치 요리책 처럼 해야할 작업을 순서대로 적은 레시피에 가깝다. DNA의 정보는 여러 단계를 거쳐 가공되고 처리되어 최종 결과물 생성에 관여하게 된다. 따라서 DNA의 기능은 다음의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DNA는 스스로를 복제한다. DNA는 유전정보를 보관한다. 유전자는 DNA의 일정 구간에 걸쳐 있는 염기 서열이다. 유전자에는 실제 유전정보가 담겨있는 엑손 구간과 발현에 관여하지 않는 인트론 구간이 있다. 엑손 구간의 시작은 촉진유전자(Promoter, 프로모터)에서 시작한다. 촉진유전자는 DNA 나선 두 가닥 중 어느쪽이든 있을 수 있다. DNA에 있는 유전자는 정보만을 지정하고 실제 단백질의 형성과 같은 일은 리보솜과 같이 세포 핵 밖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둘 사이의 정보 전달이 필요하다. 이 정보 전달은 전령 RNA(messenger RNA, mRNA)라고 불리는 "전령"이 담당한다. 촉진유전자는 바로 이 전령이 생성되는 시작점으로 어디서 시작해야 하는지 DNA의 두 가닥 가운데 어느 쪽을 이용해야 하는지 어느 방향으로 읽어야 하는지와 같은 정보를 지정한다. 촉진유전자의 염기 서열 자체가 한 방향으로만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거꾸로 읽히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유전 정보를 전달하는 전령인 mRNA는 RNA 중합효소에 의해 DNA에서 전사되어 형성된다. RNA 중합효소는 전사 시작 위치인 촉진유전자에 결합하는데 촉진유전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RNA 중합효소가 정확히 "착륙"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일단의 염기서열이 있다. RNA 중합효소는 이 유도 표지를 따라 접근하여 정확한 시작위치에 결합한 다음 DNA 사슬을 풀고 DNA와 상보적으로 형성되는 RNA 사슬을 엮는다. DNA와 달리 RNA는 아데닌의 상보적 핵염기로 우라실(U)이 사용된다. RNA 중합효소가 지나가면 DNA는 스스로 다시 감긴다. RNA 중합효소는 계속하여 mRNA를 결합하다가 종결 위치를 만나면 전사를 멈춘다. 종결 메커니즘은 복잡하고 한 종류 이상이다. RNA 중합효소(RNAP)에 의해 전령 RNA가 형성되는 과정 유전자가 전사된 mRNA는 염기서열 세 개가 모여 하나의 코돈을 이루는데 실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이 코돈이다. 코돈은 시작 코돈, 아미노산 지정 코돈, 종결코돈으로 이루어 진다. 예를 들어 우라실 셋이 모인 코돈 UUU는 아미노산의 하나인 페닐알라닌을 지정한다. 네개의 염기가 짝을 이루어 하나의 코돈을 이루는 경우의 수는 이므로 모두 64가지의 코돈이 있지만, 코돈이 다르더라도 동일한 아미노산이 지정되는 경우도 있어 실제 지정되는 아미노산은 모두 20개이다. 또한 코돈에는 한 개의 시작 코돈과 세 개의 종결 코돈이 있다. 진핵생물의 경우 전사는 두 단계를 거친다. DNA에서 곧바로 전사된 1차 전사체는 엑손 부분과 인트론 부분이 함께 전사되며 있다. 최종 형성되는 mRNA는 이 가운데 인트론 부분을 잘라내 버린다. 대개의 경우 인트론 전사체 RNA의 절단은 전사가 종결된 뒤 핵 안에서 이루어 지고, 핵 안에는 잘려진 다양한 크기의 RNA 분자가 남게 된다. RNA 절단에 관여하는 소자는 스프라이소좀으로 유전자 서열 자체에 어느 부분이 절단될 것인지를 지정하는 염기서열이 따로 있어서 매우 정교하게 잘라내어 접합한다. 잘려나가는 부위는 때로 전체 전사체의 90%에 달하는 경우도 있다. 리보솜에서 이루어지는 단백질 형성과정 이렇게 형성된 mRNA는 리보솜으로 옮겨가 번역된다. 리보솜은 세포내의 "공장"으로 실제 컨베이어 벨트에 자리한 조립공처럼 일한다. mRNA에는 리보솜 결합 부위라는 번역 개시 신호가 있어 어디서부터 아미노산 결합을 시작할 지 지시한다. 리보솜은 mRNA를 "읽어"들이고 그에 맞는 아미노산을 달고 있는 운반 RNA(transfer RNA, tRNA)를 받아들인 후 아미노산은 펩티드 결합에 사용하고 tRNA는 방출한 다음 다음 코돈을 읽는다. 이런 과정을 종결 코돈이 있을 때까지 반복한다. 비유하자면 mRNA는 작업지시서, tRNA는 운반도구, tRNA에 결합한 아미노산은 재료가 되는 셈이다. tRNA는 독특한 접합이 있는 RNA로 한쪽 끝엔 mRNA와 상보적인 안티코돈이 있고 다른 한쪽엔 특정 아미노산과 결합할 수 있는 구간을 지니고 있다. DNA에는 tRNA를 만들 수 있는 전사 구간이 별도로 존재하며 이 역시 유전자의 하나이다. tRNA는 세포 내에서 자신과 짝을 이루는 아미노산과 결합해 있다가 근처의 리보솜에 끌려들어가 아미노산 합성에 참여하고 방출된 뒤에는 다시 아미노산과 결합한다. 이 과정은 세포 내 물질의 밀도에 의존한다. 유전자 발현에서 단백질 합성의 재료가 되는 아미노산은 대부분 체내에서 합성되어 있다가 mRNA가 전달한 정보에 따라 단백질로 결합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동물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아미노산 전체를 모두 체내에서 생성하지는 못한다. 이때문에 반드시 음식을 통해 섭취해야 하는 필수 아미노산이 있다. 사람의 경우 20개의 아미노산 가운데 트립토판, 메티오닌, 발린, 트레오닌, 페닐알라닌, 류신, 이소류신, 리신의 8 개는 체내에서 합성하지 못한다. 이들 8개의 필수 아미노산은 우유, 계란, 고기 등에 풍부하므로 육식을 할 경우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채식주의자의 경우엔 콩이나 두부, 기타 여러 곡물 등을 혼합하여 필수 아미노산이 부족해 지지 않도록 식단에 주의하여야 한다. 결국 DNA에서 전사되어 형성된 mRNA와 DNA의 다른 구간에서 형성된 tRNA가 재료인 아미노산을 이용하여 리보솜에서 아미노산 사슬을 만들어 내는 것이 유전자 발현의 핵심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아미노산 사슬은 단백질 접힘과정을 거쳐 특정한 기능을 갖는 단백질이 된다. 대표적인 단백질로는 효소가 있다. 효소는 체내의 생화학 반응을 매개하는 촉매로서 3차원 구조가 기능에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효소가 작용하는 부위를 효소의 활성자리라고 하는데 효소의 구조가 변하면 이 활성 자리 역시 바뀌어 다른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유전자의 염기서열 어느 한 곳에 돌연변이가 일어났다고 가정하면 그 돌연변이의 결과 코돈이 바뀌게 되고 그에 따라 최종 형성되는 아미노산 역시 바뀌게 된다. 그 결과가 치명적이지 않다면 대개의 아미노산 변형은 자식에게 유전된다. 돌연변이는 자연적으로 계속하여 생성되며 방사선을 쬐거나 화학물질을 이용하여 인공적으로 유도할 수도 있다. 생물은 DNA 수선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어서 문제가 되는 돌연변이를 계속 수정한다. 그러나 모든 돌연변이를 다 수정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유전정보의 변이가 발생한다. DNA에는 유난히 돌연변이가 자주 일어나는 구간이 있으며 메틸화된 핵염기를 치환하면서 오류를 보인다. 유전 정보를 담지 않는 비부호 염기서열도 동일하게 이러한 돌연변이를 겪을 수 있는데, 미토콘드리아 DNA의 조절 부위는 별다른 유전자 발현을 하지 않으면서 돌연변이가 빈번하여 집단의 친연관계를 추적하는 도구로 이용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유전자의 동일한 위치를 놓고 원래의 유전정보 A와 변형된 유전정보 A 가 서로 경쟁하게 된다. 즉 어느 유전자가 후손에게서 더 많이 발현될 수 있는 가 하는 대립형질 발현빈도 문제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멘델의 유전법칙은 이렇게 발생한 대립형질에 우열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환경이 어느 한 쪽 형질에 유리할 경우 점차 유리한 형질만이 살아남게 되어 생물 집단 전체의 유전형질에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따라서 진화의 기본 조건은 계속하여 발생하는 돌연변이라고 할 수 있다. DNA는 스스로를 복제한다. 생물은 생장과 발달을 포함한 생애 전 단계에서 끊임 없이 세포분열을 필요로 한다. 세포가 분열될 때에는 그 세포가 갖고 있는 유전 정보 역시 빠짐 없이 나누어져야 한다. 이 과정에서 DNA 복제가 일어난다. DNA 사슬이 어떻게 풀리고 복제되는 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지만 1957년 메튜 메셀슨과 프랭클린 스탈의 실험을 통해 두 가닥이 풀린 후 각 가닥마다 새로운 상보적 염기서열이 형성되어 두 개의 DNA가 형성되는 반보존적 복제가 이루어짐을 확인하였다. 즉, 복제된 DNA 두 개는 각자 원래의 DNA 가닥 가운데 하나를 포함하고 있게 된다. DNA 복제 모식도 DNA 회전효소가 DNA 이중나선이 풀리면서 생기는 과도한 꼬임을 방지하기 위해 이중나선에 결합한다. 그 후 헬리카아제가 실제 이중나선의 결합을 푼다. 이중나선이 풀리면 DNA 중합효소가 복제를 시작한다. 하지만 DNA 복제에는 RNA로 이루어진 프라이머가 필요하다. DNA 복제를 진행하는 DNA 중합효소가 DNA의 시작점부터 직접 복제를 시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효소의 하나인 프리마아제가 열려진 DNA의 한쪽 가닥에 프라이머를 결합시킨 뒤 떨어져 나가면 그 자리에 DNA 중합효소가 결합하여 새로운 이중나선을 만들기 시작한다. 한편, 새로운 DNA 이중나선은 서로 반대되는 방향으로 생성된다. 원래의 DNA 나선에 DNA 회전효소가 지나가며 지퍼를 열듯이 나선을 분리하면 이렇게 열리는 방향과 같이 진행되는 선도 사슬(Leading strand)는 진행 방향을 따라만 가면 되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반대 방향으로 진행되는 지연 사슬(Lagging strand)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원래의 DNA 이중나선이 풀리고 충분한 길이의 새로운 염기서열이 확보 되어야 계속해서 복제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프리마아제가 헬리카아제의 뒤에 연결되어 임시로 토막토막 끊어지는 프리미어 RNA를 만들고 뒤에 거꾸로 향하는 DNA 중합효소가 절편을 만들며 잇는다. 이를 발견자의 이름을 따 오카자키 절편이라 한다. 이러한 복제 과정을 거치면 지연 사슬의 끝은 더 이상 프리미어를 놓을 자리가 없게 되고 그 결과 DNA 사슬의 말단 일부는 복제되지 않은 채 남는다. 이 때문에 복제가 거듭되면 염색체의 끝부분인 텔로미어가 점점 짧아지게 된다. 텔로미어가 짧아지는 현상은 노화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한편, 유성생식을 하는 생물은 자식 세대의 재생산을 위해 감수분열을 한다. 정자와 난자같은 생식세포는 유전자 재조합을 거치는 감수분열을 통해 성체가 가지고 있는 원래 유전 정보의 절반을 갖게 된다. 진핵생물의 세포에는 DNA와 핵 이외에도 여러 세포소기관이 있는데 미토콘드리아와 같은 대개의 세포소기관은 난자에서 기원한 것이다. 관행적으로 생식세포의 유전체를 n, 수정 이후의 유전 정보를 2n으로 표기하여 동수의 유전정보가 암수에게서 온다고 이해하고 있었으나 적어도 포유류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정자의 염색체만을 두배로 하여 2n이 되도록 하거나 난자의 염색체만을 두배로 하여 발생을 유도한 실험 모두에서 정상적인 발생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무엇인지 정확하진 않지만 일부 유전자는 반드시 정자를 통해 와야하고 또 다른 일부 유전자는 반드시 난자를 통해 유전되어야 한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DNA는 염기서열의 형태로 유전정보를 담고 있다. 한 생물이 지니는 DNA 염기서열 전체를 게놈이라고 한다. 한편, 세포 분열 과정에서 DNA 사슬은 염색체를 형성한다. 한 생물이 지니는 DNA 염기서열 전체를 게놈이라고 한다. 게놈은 유전자(Gene)와 염색체(chromosome)를 합성하여 명명한 낱말로 1920년 함부르크 대학교의 식물학 교수 한스 빙클러가 제안하여 널리 사용되고 있다. 한국어 번역어로는 유전체(遺傳體)가 쓰인다. 게놈의 길이는 생물마다 천차만별이다. 가장 먼저 게놈이 해독된 예쁜꼬마선충의 경우 게놈의 크기는 1억 쌍의 염기서열 정도이지만, 2003년 인간 게놈 프로젝트이 완료된 인간 게놈의 경우 DNA 한 가닥당 3,234.83 Mb(메가베이스)의 염기서열로 이루어져 있어 두 가닥을 합친 총 염기서열 양은 6,469.66 Mb이 된다. 각각의 세포마다 들어있는 게놈의 길이는 약 1.8 m에 달한다. 그러나 사람의 세포 핵의 크기는 5 μm에 불과하기 때문에 DNA는 매우 가늘고 긴 사슬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식물의 경우 매우 거대한 게놈을 갖기도 한다. 백합의 게놈은 인간보다 18배나 더 크다. 게놈이 해독되었다고 모든 유전자의 위치와 기능이 밝혀진 것은 아니다. 유전자의 기능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 DNA를 감은 히스톤과 그로 이루어진 염색체 염색체의 구조. ① 염색분체 ② 동원체 ③ p 팔 ④ q 팔 DNA는 평소 세포 핵 내부에서 단백질과 결합하여 염색질을 이룬다. 염색질은 매우 가늘고 긴 실과 같으므로 전자현미경을 통해서나 관찰이 가능하다. 그러나 세포분열 과정에선 염색체 단위로 뭉치게 되어 광학현미경으로 쉽게 관찰이 가능하다. 염색체는 생물 종마다 수와 크기가 다르다. 인간의 경우 22 쌍의 상염색체와 1쌍의 성염색체가 있다. 상염색체는 1번 염색체, 2번 염색체와 같이 번호로 불리고 성염색체는 x 염색체와 y 염색체 등으로 불린다. 성염색체는 동물마다 달라 어류는 ZO 성결정 체계를 따른다. 인간을 포함한 포유류의 성결정은 XX인 경우가 암, XY인 경우가 수로 수컷이형을 보이지만, ZO 성결정 체계는 Z 유전자 하나만 있을 경우 암, ZZ인 경우 수로 암컷이형을 보인다. XY 성결정 체계와 달리 ZO 성결정 체계는 암수의 유전적 구별이 보다 유연하기 때문에 자연적인 성전환이 일어나기도 한다. 어류의 경우 400여 종에서 생애 주기에 따라 성전환이 일어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감성돔은 모두 수컷으로 태어나지만 2~3년이 지나면 암컷으로 성전환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5~6년생이 되면 모두 암컷이 된다. 한편 조류의 경우엔 ZW 성결정 체계를 따른다. 염색체는 DNA 사슬이 염색질을 단위로 뭉친 것이다. DNA 사슬은 단백질의 일종인 히스톤을 실패삼아 감긴다. 히스톤은 모두 다섯 종류로 되어 있으며 이 가운데 히스톤 H2A, H2B, H3, H4 가 각 한 쌍씩 8개가 팔량체를 이뤄 실제 실패와 비슷한 구조를 만든다.. 히스톤 실패에 감긴 DNA를 뉴클레오좀이라 하는데 이것이 DNA 저장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가 된다. 146개의 염기쌍이 히스톤 실패를 1.65번 감는다. 한편 실패를 이루지 않는 히스톤 H1은 실패 밖에서 DNA를 고정하는 역할을 한다. 뉴클레오좀은 다시 꼬여서 더 두꺼운 코일을 형성하는데 나선 1회전에 6 개의 뉴클레오좀이 감긴다. 이렇게 만들어진 코일은 또다시 접혀져 루프를 만들고 이렇게 여러차례 겹쳐 만들어진 루프가 염색체를 이룬다. 염색체는 세포분열 과정에서 두 개의 염색분체가 동원체를 중심으로 묶여 있는 모습이 된다. 이 염색분체들은 세포분열 말기에 각자 다른 딸 세포의 극으로 끌려가 새로운 세포 핵을 형성하게 된다. 염색체는 동원체를 중심으로 긴 팔과 짧은 팔이 구분되데 긴 쪽을 q 팔, 짧은 쪽을 p 팔이라고 한다. q와 p는 염색체 위에서 유전자의 위치를 정할 때 기준이 된다. 동원체에서 가까운 쪽에서 부터 q1 또는 p1과 같이 번호를 붙이며 멀수록 p20 또는 q40과 같이 큰 번호가 부여된다. 1p1은 1번 염색체의 짧은 팔에서 동심원에 가장 가까운 위치를 뜻하게 된다. 예를 들어 ABL2 효소 합성을 지시하는 ABL2 유전자는 1번 염색체의 1q25.2 에 위치해 있다. 아래의 다이어그램에서 오른쪽 중간쯤에 그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인간 1번 염색체의 다이어그램 염색체 위의 유전자 위치를 밝혀내는 지도 작성은 매우 길고 복잡한 DNA 염기서열의 해독을 필요로 한다. 거대한 염기서열 전체를 한 번에 보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실제 지도 작성은 적당한 크기로 잘린 DNA 절편을 이용한다. 자잘하게 잘린 절편들은 겔 전기 영동법과 같은 방법으로 분리되어 염기서열이 해독된다. 동일한 정보를 갖는 여러 가닥의 DNA를 사용하면 직소 퍼즐을 맞추듯이 서도 들어 맞는 절편들을 차례로 이어 붙일 수 있다. 하나의 절편은 상보적 결합을 이용해 대량으로 복제하여 유전자 라이브러리를 만들 수 있고 이를 이용하면 해독의 시간과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 1983년 중합효소 연쇄반응(polymerase chain reaction, PCR)이 고안되어 소량의 시료로부터 라이브러리를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21세기에 들어서는 방사성 동위원소를 삽입한 핵염기가 분리될 때 발생하는 광자를 직접 검출하는 방식이 개발되어 더욱 빠른 해독이 가능해졌다. 미토콘드리아와 엽록체는 독자적인 DNA를 갖는다. 사람의 미토콘드리아 DNA에는 2 개의 RNA 유전자, 22 개의 tRNA 유전자, 13 개의 단백질 합성 유전자가 있다. 린 마굴리스는 진화 과정의 어느 시점에서 별개의 생물인 미토콘드리아와 엽록체가 진핵 생물의 조상과 공생을 이루었다는 가설을 제시하였다. 엽록체 DNA는 보통 120~150여개의 유전자가 배열되어 있으며 염기서열은 약 150 kb 내외이다. 초파리의 성염색체와 연관된 유전 발현. 열성인 흰눈이 발현된 초파리는 모두 수컷이었다. DNA는 1869년 스위스의 프리드리히 미셔(Friedrich Miescher)가 처음 발견했다. 그는 세포 핵 안에서 발견한 산이라는 의미로 뉴클레인이라고 불렀다. 미셔가 핵산을 발견한 직후 세포 핵에서 막대모양의 구조를 매우 진하게 염색시키는 방법이 개발되었다. 1879년 발터 플레밍은 핵에서 염색되는 물질을 설명하기 위해 염색질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세포 분열 과정에서 뭉쳐저 염색체가 된다는 것도 발견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셔의 뉴클레인과 플레밍의 염색질은 동일한 물질임이 확인되었다. 이 시기에 이미 많은 학자들이 염색질이 유전에 관여한다고 추측하였고 많은 실험들이 이루어졌다. 1910년 토머스 헌트 모건은 초파리를 대상으로 한 연구를 통해 염색체와 유전의 관계를 입증하였다. 그는 애초에 초파리의 짧은 세대 주기를 이용해 진화를 재현할 생각으로 2년간 실험했지만 실패하였다. 초파리를 빛이 들지 않는 암실에서 70세대 이상 사육하였으나 초파리의 눈이 퇴화한다거나 하는 현상은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그대신 초파리의 눈이 하얗게 변하는 돌연변이가 발견되었다. 그는 정상인 붉은눈 초파리와 돌연변이 흰눈 초파리를 교배하여 2세대에서 모두 붉은눈이 발현되는 것을 확인한 다음 3세대에서는 붉은눈과 흰눈이 섞여 나오는 것을 관찰하였다. 여기까지는 멘델의 유전법칙에 따른 우성/열성 유전형질 발현을 다시 확인한 셈이다. 그런데 흰눈 초파리가 모두 수컷이었다. 그는 초파리의 눈을 희게 만든 열성인자가 초파리의 성염색체에 놓여있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이후 모건은 초파리의 염색체 실험을 계속하여 여러 유전자가 염색체의 특정한 위치에 일렬로 배열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유전자 지도를 작성하였다. 염색체 위에 놓인 유전자가 유전형질을 결정한다는 사실이 확인되자 학자들은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발현되는 지를 놓고 가설을 세웠다. 영국의 아치볼드 게로드는 하나의 유전자가 하나의 효소를 지정한다는 1유전자 1효소설을 주장하였고, 1941년 조지 비들과 E. L. 테이텀이 붉은빵곰팡이를 이용한 실험을 통해 이를 입증하였다. 이들은 곰팡이에 엑스선을 쬐어 특정한 아미노산을 형성하지 못하는 돌연변이를 얻었다. 이렇게 하여 발생한 점돌연변이 때문에 돌연변이 곰팡이는 다른 기능이 정상이더라도 합성하지 못하는 아미노산을 외부에서 공급하지 않으면 효소를 만들지 못했다. 프레더릭 그리피스는 1928년 그리피스 실험을 통해 형질전환을 발견하였다. 폐렴쌍구균은 면역반응에 걸려 병을 유발하지 못하는 R형과 폐렴을 유발하는 S형이 있는데, S형이라 할지라도 열을 가해 균을 죽이면 폐렴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런데 죽은 S형 균을 R형 균에 섞어 넣었더니 R형이 모두 S형으로 전환된 것이다. 그리피스는 S형의 어떤 요소가 R형에게 전달되어 형질변환이 일어났다고 결론지었지만 그 요소가 무엇인지 특정하지는 못했다. Downie AW (1972). "Pneumococcal transformation—a backward view. Fourth Griffith Memorial Lecture". J. Gen. Microbiol. 73 (1) 1–11. PMID 4143929. 1944년 오즈월드 에이버리는 그리피스의 실험을 훨씬 정교하게 통제하여 열처리한 S형 균을 탄수화물,단백질, DNA로 구분하여 R형 균에 투입하였고, 그 결과 DNA가 형질변환의 원인임을 밝혀내었다. 에이버리의 실험 이후에도 유전 정보를 전달하는 물질이 무엇인지를 놓고 논쟁이 계속되었다. DNA는 처음부터 계속하여 강력한 후보였으나 단백질 역시 만만찮은 후보였다. DNA와 단백질 가운데 어떤것이 유전 요인인지를 확실히 구분할 필요가 있었다. 1952년 알프레드 허시와 마사 체이스가 더욱 정교한 통제 조건으로 허시-체이스 실험를 실시하였다. 허시와 체이스는 박테리오파지의 단백질과 DNA에 방사성 동위원소 표식을 달아 대장균에 주입한 후 무엇이 유전에 관여하는 지를 관찰하고 그것이 DNA임을 확정하였다. 51.jpg|섬네일|로절린드 프랭클린이 촬영한 사진 51 1953년 프랜시스 크릭이 연필로 스케치한 DNA 이중나선의 구조의 초안 DNA의 역할에 대한 논란과는 별개로 DNA의 구조 역시 오랫동안 여러 가설만이 제시될 뿐이었다. 1935년 러시아 출신의 미국 생화학자 피버스 레빈은 뉴클레오타이드가 인산을 통해 서로 연결된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당시 과학자들은 고분자 화합물인 DNA의 크기를 제대로 알 수 없었고, 실제로는 핵염기의 구성비 역시 제각각일 수 밖에 없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레빈은 DNA를 이루는 핵염기 4종이 모두 같은 비율로 존재할 것이라고 가정하고 이들이 짝을 이루는 사각형 구조를 가설로 제시하여 많은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실제 DNA의 핵염기 비율은 4종 모두가 똑같지는 않기 때문에 레빈의 가설은 근본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미국 생화학자 어윈 샤가프는 DNA의 핵염기가 모두 동일한 양을 지니는 것은 아니지만 아데닌과 티민, 구아닌과 시토신은 언제나 동률을 보인다는 것을 발견했다. 샤가프 스스로는 이 발견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지만, DNA 핵염기의 상보성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했다. 윌리엄 로런스 브래그가 이끄는 캐임브리지 대학교 캐번디시 연구소는 1948년부터 X선 회절을 이용해 DNA의 구조를 직접 관찰하고자 하였다. X선도 일종의 빛이기 때문에 굴절, 반사와 같은 현상이 일어나며 회절은 작은 물질을 지나가는 빛이 물질의 그림자 영역까지 애돌아 나가는 현상이다. 결정의 모양에 따라 회절 모양도 달라지게 되므로 역으로 이용하면 물질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 X선을 결정에 조사하면 브래그 법칙을 만족하는 방향으로만 X선이 회절되어결정구조가 반영된 패턴을 남긴다. 1952년 로절린드 프랭클린은 이후 DNA의 구조 파악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사진 51을 촬영하였다. 프랭클린의 사진 51은 프랜시스 크릭을 거쳐 제임스 왓슨에게 전달되었고 둘은 사진을 보고 DNA가 이중나선을 이룬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사진 51은 DNA의 구조가 이중 나선으로 되어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데이터로서 1953년 왓슨과 크릭은 《네이처》지에 사진 51과 함께 이중나선 구조를 설명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둘이 발표한 내용은 오늘날 익히 알려진 것과 같이 핵염기들이 A-T, G-C의 상보적 결합을 이루며 두 가닥의 사슬이 서로 꼬여 이중나선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DNA는 구조가 규명되자 마자 그것이 스스로 복제할 수 있는 물질임을 암시하였다. 핵염기는 오직 하나의 상보적 짝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DNA 사슬의 뼈대를 이루는 두 가닥이 분리되면 곧바로 새로운 이중나선을 구성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아서 콘버그는 이러한 DNA의 복제가 효소에 의해 통제될 것이라고 추측하였고 1953년 DNA 중합효소를 발견하였다. DNA 사슬 두 가닥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복제된다. DNA 이중나선이 풀리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선도 진행과 반대 방향으로 진행되는 지연 진행이 있다. 선도 진행이 연속적인 복제 과정을 거치는 것과 달리 지연진행은 DNA 이중나선의 물리적 특징 때문에 간헐적으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 1968년 부부였던 오카자키 레이지, 오카자키 츠네코를 비롯한 일본의 과학자들은 이 과정에서 지연 진행되는 DNA 사슬이 일정한 크기의 절편 단위로 복제되는 것을 발견하였다. 오카자키 절편은 DNA 복제 과정을 이해하는 필수적인 개념이다. 1970년 존스 홉킨스 의과대학의 해밀턴 O. 스미스는 DNA의 특정 부위를 절단하는 제한 효소를 발견하였다. 그가 발견한 제한 효소는 훗날 HindII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DNA 염기서열에서 GTYRAC 구간을 찾아내 절단한다. Y는 T또는 C, R은 A또는 G가 될 수 있다. 이 효소는 1세대 유전자 가위가 되어 분자생물학 연구에 큰 공헌을 하였다. 이후 유전자 가위로 사용될 수 있는 여러 효소들이 발견되었다. 오늘날에는 보다 정교한 작업이 가능한 크리스퍼가 유전자 가위로 쓰인다. 유전자 가위로 DNA의 원하는 부분을 절단하면 그것을 대장균과 같은 세균의 DNA에 주입하여 대량으로 복제시킬 수 있다. 이렇게 원하는 유전자를 대량으로 복제하는 기술을 클로닝이라고 한다. 클로닝은 DNA 감식, 유전자 편집 등 여러 용도에 두루 활용된다. 유전자 변형으로 색상을 바꾼 장미 유전자 가위와 클로닝 기술은 유전자 변형 생물을 만들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곡물이나 구근 식물은 농업의 주요 품종으로 여러 이유에서 유전자 변형이 연구되었으며 2002년 말 16개국에서 유채, 옥수수, 감자 등 15작물 68품종이 재배되고 있다. 유전자 변형 생물의 안전성 문제는 뜨거운 논쟁거리 가운데 하나이다. 한편 유전자 편집은 식물 뿐만아니라 동물도 적용 가능하다. 실험 동물에 특정한 유전형질을 발현시키기 위해 유전자 편집이 사용되기도 한다. 한편 2018년 중국에서는 인간을 대상으로 한 유전자 편집이 시도되어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DNA 염기서열에 있는 수 많은 유전자들이 발생의 어느 시점에서 발현하고 어느 시점에서 분화되어 고정되는 가 하는 주제는 발생유전학의 중요 관심사이다. 다세포 생물은 발생과 발달 과정에서 일정 시기를 지나면 세포 마다 발현될 특징이 결정된다. 피부에선 피부 세포만이 발현되고 간에선 간 세포만이 발현되어야 정상적인 활동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번 분화가 결정된 세포는 때어내어 다른 곳에 이식하여도 결정된 대로 발달한다. 줄기 세포는 아직 그 역할이 결정되지 않아 무엇으로건 분화할 수 있는 상태의 세포이다. 배아의 발생단계에서 미분화한 배아줄기세포와 성체가 되었지만 일부 계속해서 남아있는 성체줄기세포가 있다. 배아줄기세포는 미분화한 배아의 세포에서, 성체줄기세포는 혈액, 골수 등에서 얻는다. 줄기세포는 각종 질병 치료를 위한 목적으로 연구되고 있지만 현재로서는 미분화한 줄기세포를 특정 방향으로 분화시키는 메커니즘을 알지 못한다. 2005년 대한민국에서는 황우석 사건으로 큰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 황우석은 복제된 배반포에서 배아줄기세포를 획득하였다는 논문을 발표하였으나 실험이 조작되었다는 것이 폭로되어 논문이 철회되었다. DNA는 매우 큰 정보량을 갖고 있으며 개인 마다 서로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어 DNA를 통해 신원을 특정할 수 있다. DNA 감식에는 보통 STR 분석이 쓰이는데 특정 염기서열의 짧은 반복구간이 개인마다 다른 점을 이용한다. 유전자 감식은 각종 사건 사고의 신원확인, 실종자 확인과 같은 수사에 이용되며 전쟁이나 학살과 같은 오래된 역사적 사건의 유해 감식에도 쓰인다. DNA 감식은 범죄의 증거로도 체택된다. 감식의 결과 동일인으로 판정되면 충분히 해당 개인을 특정한 것으로 여겨진다. 대한민국에서는 유죄 확정된 범죄자의 DNA 시료를 채취하여 등록하고 있다. DNA에서 일어나는 돌연변이가 원인이 되어 발현하는 질병을 유전성 질환이라고 한다. 유전성 질환은 자식 세대에 유전되는데 우성/열성에 따라 발현이 되지 않고 유전 인자만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다. 널리 알려진 유전성 질환으로는 백색증, 혈우병, 겸형 적혈구 빈혈증, 샤르코 마리 투스 질환과 같은 것들이 있다. 핵산 RNA 뉴클레오타이드 DNA 수선 PCR 분류:나선
리보핵산 ( R ibo N ucleic A cid, RNA ) 은 오탄당의 일종인 리보스를 기반으로 뉴클레오타이드를 이루는 핵산의 한 종류이다. 하나의 나선이 길게 꼬여 있는 구조를 지니며 DNA의 일부가 전사되어 만들어진다. RNA는 단백질을 합성하는 과정에 작용하며 일부 바이러스는 DNA 대신 RNA를 유전물질로 갖기도 한다. 핵염기로 DNA와 달리 티민 대신 우라실을 갖는다. 최근 RNA 스스로 효소와 같은 기능을 가질 수도 있음이 발견되었다. 이것을 리보자임(ribozyme)이라 한다. RNA의 화학적 구조 RNA는 오탄당인 리보스를 기반으로 사슬구조를 이룬다. 오른쪽 그림에서와 같이 리보스에 있는 다섯개의 탄소에 번호를 붙였을 때 1번 탄소가 핵염기와 연결되며(이 그림의 경우 구아닌) 3번과 5번은 인산에 연결된다. 1번 탄소에 연결되는 핵염기는 구아닌 이외에도 아데닌, 우라실, 시토신이 있다. 인산은 당과 당 사이를 연결하여 사슬을 이룬다. 핵염기는 보통 다음과 같은 약자로 쓰인다. A - 아데닌 G - 구아닌 U - 우라실 C - 사이토신 핵염기는 수소결합에 의해 서로 짝을 이루어 결합할 수 있다. 아데닌은 우라실(DNA의 경우 티민)과 구아닌은 시토신과 상보적인 짝을 이룬다. RNA는 DNA와 달리 1개의 폴리뉴클레오타이드로 이루어진 단일 가닥이며, 자체적으로 상보적 염기쌍을 형성해 접힘으로써 고유의 입체 구조를 가질 수 있다. RNA에 존재하는 리보스의 2 탄소에 결합된 하이드록시기는 당-인산 골격의 인산이에스터 결합을 분해하는데 관여하므로 RNA는 DNA보다 빠르게 가수 분해되어 덜 안정하다. RNA는 분자구조와 생물학적 기능에 따라 9가지로 나뉜다. rRNA(리보솜 RNA ribosomal RNA ) 리보솜을 구성하는 RNA이다. mRNA(전령 RNA messenger RNA ) DNA의 유전 정보를 옮겨적은 일종의 청사진 역할을 한다. 이를 기본으로 하여 리보솜에서 단백질을 합성하게 된다. 이를 세부분으로 나누면, (Poly) cap, Polyadenyl, translation sequence(실제 번역되는 부분) 으로 나뉜다. tRNA(운반 RNA transfer RNA ) mRNA의 코돈에 대응하는 안티코돈을 가지고 있으며, 꼬리쪽에는 해당하는 안티코돈에 맞추어 tRNA와 특정한 아미노산을 연결해 주는 효소에 의해 안티코돈에 대응하는 아미노산을 달고 있다. miRNA(마이크로 RNA micro RNA ) 생물의 유전자 발현을 제어하는 역할을 하는 작은 RNA로, mRNA와 상보적으로 결합해 세포 내 유전자 발현과정에서 중추적인 조절인자로 작용한다. snRNA(소형 핵 RNA small nuclear RNA ) 핵 안에서 RNA를 스플라이싱 하는 기능이 있다. snoRNA(소형 인 RNA small nucleolar RNA ) 핵에서 RNA의 변형을 일으킨다. aRNA(안티센스 RNA antisense RNA ) 번역의 조절 역할을 담당한다. siRNA(소형 방해 RNA small interfering RNA ) RNA 방해 유발. 특정 단백질의 생산을 억제함으로써 유전자 발현을 방해한다. piRNA 바이러스와 같은 일부 미생물에서 RNA는 유전자로서 기능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진핵생물과 다세포생물은 DNA가 유전자의 역할을 하고 RNA는 단백질 형성 과정을 맡는다. 리보솜에서 이루어지는 단백질 형성과정 세포에서 이루어지는 단백질의 형성에는 DNA, RNA와 리보솜, 효소 등이 관여한다. 단백질의 형성과정은 다음과 같다. # DNA에서 mRNA가 전사된다. 동시에 세포 내에서는 아미노산 활성화 효소에 의해 tRNA에 아미노산(amino acid)이 부착된다. # mRNA의 뉴클레오타이드는 3개씩 짝을 이뤄 하나의 아미노산을 지정한다. 예를 들어 UUU(우라실-우라실-우라실)는 페닐알라닌을 지정한다. # 전사된 mRNA가 리보솜의 소단위체(small subunit)에 부착된다. # 1. 번에서 아미노산이 부착된 tRNA가 mRNA의 지정된 염기서열의 뉴클레오타이드에 부착된다.(오른쪽 그림의 첫 단계) # 리보솜의 큰 단위체(large subunit)가 소단위체(small subunit)와 결합한다. # mRNA의 다음 염기서열과 짝을 이루는 tRNA가 리보솜에 들어오고 여기에 부착된 아미노산은 앞의 tRNA에 부착된 아미노산과 결합한다.(오른쪽 그림의 두 번째 단계) # mRNA의 염기서열이 끝날 때까지 위 과정이 반복되면 긴 아미노산 사슬이 형성된다. 이것이 단백질이다. 단백질은 효소에 의해 접혀 적절한 모양을 갖추게 된다.(오른쪽 그림의 끝 단계) # 세포 내에는 수많은 리보솜이 있어 하나의 mRNA를 이용하여 동시에 작업할 수 있다. DNA에서 전사된 RNA DNA의 유전자의 염기서열에 상보적인 뉴클레오타이드를 순서대로 연결하여 RNA 사슬을 형성하는 중합반응을 전사라 한다. 전사의 과정에는 RNA 중합 효소가 관여한다. RNA 중합효소는 DNA 염기서열 중 전사를 시작할 곳을 찾아 DNA의 이중나선을 열고 두 가닥 중 한쪽을 사용하여 상보적인 염기서열대로 mRNA를 전사한다. 전사의 종료를 알리는 지점까지 도달하면 전사를 마치고 DNA 이중나선을 닫는다. 전사의 시작 지점을 알리는 DNA의 위치는 프로모터()라 하는데 전사 시작을 알리는 특정 염기서열과 첫 번째로 전사될 염기 및 전사를 조절하는 염기서열로 구성되어 있다. 코돈은 mRNA에서 하나의 아미노산을 지정하는 세개의 뉴클리오드 염기 순열이다. 생물의 단백질을 이루는 아미노산은 모두 20종으로 이를 지정하는 mRNA의 코돈은 아래의 표와 같다. 아미노산 코돈 아미노산 코돈 페닐알라닌 UUU, UUC 류신 UUA, UUG, CUU, CUC, CUA, CUG 이소류신 AUU, AUC, AUA 메티오닌 AUG 발린 GUU, GUC, GUA, GUG 세린 UCU, UCC, UCA, UCG, AGU, AGC 프롤린 CCU, CCC, CCA, CCG 트레오닌 ACU, ACC, ACA, ACG 알라닌 GCU, GCC, GCA, GCG 티로신 UAU, UAC 히스티딘 CAU, CAC 글루타민 CAA, CAG 아스파라긴 AAU, AAC 리신 AAA, AAG 아스파르트산 GAU, GAC 글루탐산 GAA, GAG 시스테인 UGU, UGC 트립토판 UGG 아르기닌 CGU, CGC, CGA, CGG, AGA, AGG 글리신 GGU, GGC, GGA, GGG mRNA 순열중 UAA, UAG, UGA 는 아미노산 연결 종료를 지시한다. 페닐알라닌과 아스파르트산의 tRNA tRNA는 75 - 95개의 뉴클레오타이드로 이루어진 작은 RNA 분자이다. 비교적 짧은 RNA 사슬이 접혀있는 모습을 갖고 있다. tRNA의 주요 역할은 리보솜에 들어온 mRNA에 따라 아미노산을 연결하는 것이다. 아미노산이 20종 이므로 세포 속에 있는 tRNA의 종류도 20종이다. tRNA의 말단은 아미노산과 연결되어 있고 접혀있는 특정 부분은 안티코돈이 된다. 예를 들어 왼쪽 그림의 페닐알라닌 tRNA의 안티코돈은 AAG로 리보솜에서 mRNA의 UUC코돈과 연결된다. (RNA 핵염기의 상보성은 A(아데닌)-U(우라실), G(구아닌)-C(사이토신)이다.) David P. Clark 저 이명석 역,알기쉽고재미있는분자생물학,(주)라이프사이언스,서울,PP427–436
리보솜 ()은 아미노산을 연결하여 단백질 합성을 담당하는 세포소기관으로 리보솜 RNA와 단백질로 이루어져 있다. 리보솜은 대단위체와 소단위체로 분리되어 있으며, 두 단위체가 결합하여 단백질 합성을 수행한다. 리보솜은 지름이 약 20 nm(200 Å)이고 65%의 리보솜 RNA와 35%의 리보솜 단백질로 구성되어 있다. 고세균, 진정세균 및 진핵생물의 리보솜은 서로 다른 다양한 단백질과 RNA로 구성되어 있다. 리보솜은 전령 RNA의 코돈을 번역하여 운반 RNA에 연결된 아미노산을 배열하여 단백질을 형성한다. 리보솜은 또한 효소로서 작용하기도 하는데 이때문에 리보자임 이라 불리기도 한다. 리보솜은 별도의 막이 없는 세포소기관이다. 단백질을 형성하지 않는 동안 RNA는 내부 원형질인(세포기질cytosol) 때에는 RNA로부터 구성되는데, 이는 RNA 세계의 흔적으로 추정된다. 리보솜은 1950년대 중반 루마니아 생물학자인 게오르그 에밀 팔라데에 의해 최초로 관찰되었다. 팔라데는 전자현미경을 이용하여 세포를 관찰하던 중 리보솜을 발견하였고, 이 공로로 1974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하였다. 리보솜이라는 이름은 1958년 리처드 B. 로버트가 명명하였다. 20세기 중반에 리보솜의 분자 구조와 기능이 발견된 이후 현재까지 활발한 연구가 계속되고 있다. 실제로, 아다 요나스(이스라엘), 벤카트라만 라마크리시난(미국)과 토머스 스타이츠(미국)는 리보솜의 기능과 구조에 관한 연구로 2009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세균의 리보솜은 세포질에 있는 유전자인 오페론을 전사하여 생성된다. 진핵생물의 경우 세포핵 안에 있는 핵소체에서 4 종류의 리보솜 RNA가 만들어지며 리보솜 단백질과 결합되어 리보솜이 생성된다. 리보솜에서 이루어지는 단백질 형성과정 리보솜이 mRNA의 코돈을 인식하여 단백질을 합성하는 과정을 번역이라 한다. 리보솜에서 이루어지는 단백질 생성과정은 다음과 같다. 준비 * 리보솜의 소단위체와 대단위체가 결합한다. 리보솜에는 운반 RNA가 들어설 수 있는 부위가 두 곳이 있는데 운반 RNA가 들어오는 쪽을 A 자리, 나가는 쪽을 P 자리라 한다. 초기화 * 소단위체에 전령 RNA가 결합하고, 시작 코돈이 확인되면 대단위체의 A 자리에 메티오닌과 결합한 운반 RNA가 도입되면서 단백질생성이 시작된다. 연장 과정 * 코돈 인식 폴리펩타이드를 달고 있는 P 자리의 tRNA가 코돈에 붙어있다. A 자리에 있는 전령 RNA의 코돈과 상보성을 갖는 안티코돈을 가진 운반 RNA가 아미노산을 가져와 결합한다. * 펩타이드 결합 형성 P 자리에 있는 기존의 폴리펩타이드와 A 자리에 있는 새로운 운반 RNA의 아미노산 사이에 펩타이드 결합이 형성된다. 이때 아미노아실 결합이 P 자리의 운반 RNA에서 새로운 폴리펩타이드 쪽으로 옮겨간다. * 변환 P 자리에서 자유로워진 운반 RNA가 빠져나간다. 이제 전령 RNA가 한칸 움직일 수 있게 되고 코돈이 바뀐다. * 반복 A 자리의 폴리펩타이드-운반 RNA 중합분자가 P 자리로 옮겨가면서 A 자리가 비워진다. 비워진 A 자리에는 바뀐 코돈과 상보적인 운반 RNA가 새롭게 결합된다. 위 과정이 계속 반복되면서 폴리펩타이드 사슬이 길어진다. 종료 * 종료 코돈에 종결 운반 RNA가 결합되면 합성되던 폴리펩타이드가 떨어져 나가면서 단백질 합성이 끝난다. 리보솜에서 일어나는 번역 과정의 에너지원 는 GTP의 가수분해이다. 250px 단백질 형성의 진행 ARDRA 분류:세포소기관 분류:리보자임 분류:단백질 생합성
바이러스 (, 는 다른 유기체의 살아 있는 세포 안에서만 생명활동을 하는 작은 감염원이다. 바이러스는 박테리아와 동물을 포함한 동물과 식물에서 미생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생물체를 감염시킬 수 있다. 드미트리 이바노비치의 1892년 연구가 다루었던 담배 모자이크 바이러스 이래로 진행된 연구들에서 바이러스는 감염된 세포 안에 있지 않거나 세포를 감염시키는 과정에 있는 동안 독립적인 입자의 형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비리온이라고도 하는 이 바이러스 입자들은 DNA나 RNA로 만들어진 유전 물질을 보호하는 두개 또는 세개의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전자 외피와 단백질 외피를 둘러싸는 긴 분자인 이 바이러스 입자들의 모양은 몇몇 바이러스 종들을 위한 단순한 나선형과 타원형 형태에서부터 다른 종들을 위한 더 복잡한 구조까지 다양하다. 대부분의 바이러스 종들은 너무 작아서 광학 현미경으로 볼 수 없는 바이러스를 가지고 있다. 평균적인 비리온은 평균적인 박테리아 크기의 약 100분의 1이다. 생명의 진화 역사에 있어서 바이러스의 기원은 명확하지 않다. 어떤 바이러스는 박테리아로부터 진화했을 수도 있는 세포들 사이를 이동할 수 있는 DNA의 플라스미드 조각들로부터 진화했을 지도 모른다. 바이러스는 진화 과정에서 수평적인 유전자 전달의 중요한 수단으로, 이는 유전적 다양성을 증가시킨다. 바이러스는 유전 물질을 운반하고, 생식하고, 자연선택을 통해 진화하기 때문에 생명체의 한 형태라고 간주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생명체로 분류하는데 필요한 주요 특성(예를 들어 세포 구조)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와 같이 바이러스는 생명체로서의 특성을 모두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부만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생명의 가장자리에 있는 유기체" 및 복제 물질로 묘사되어 왔다. 바이러스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퍼진다. 식물에 있는 바이러스는 진딧물과 같은 식물의 수액을 먹어 치우는 곤충에 의해 식물에서 식물로 옮겨지는 경우가 많다. 동물의 바이러스는 흡혈 곤충에 의해 옮겨진다. 이러한 질병을 갖고 있는 유기체들은 벡터라고 알려져 있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기침과 재채기를 통해 퍼진다. 바이러스성 위장염의 흔한 원인인 노로 바이러스와 로타 바이러스는 감염 경로를 통해 전달되며, 접촉을 통해 사람 간에 전달되고 . HIV는 성관계를 통해 감염된 혈액에 노출되어 전염되는 여러 바이러스 중 하나이다. 바이러스가 감염시킬 수 있는 숙주 세포의 범위는 "숙주 범위"라고 불리는데, 이것은 바이러스가 소수 종을 감염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널리 퍼진다는 것은 바이러스를 수동으로 감염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물들에게 바이러스가 감염되면 대개 감염되는 바이러스를 제거하는 면역 반응을 일으킨다. 면역 반응은 또한 특정 바이러스 감염에 대해 인위적으로 획득한 면역성을 부여하는 백신에 의해서도 생성될 수 있다. 하지만 에이즈나 바이러스성 간염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를 포함한 몇몇 바이러스는 이러한 면역 반응을 회피하고 만성 감염을 유발한다. 항생제는 바이러스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몇몇 항 바이러스제가 개발되는 등 바이러스성 질병을 억제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 되고 있다. 루이 파스퇴르는 광견병의 병원체를 찾을 수 없어서 현미경을 이용하여 매우 작은 병원균을 발견해내는 것에 대하여 궁리하였다. 1884년에 프랑스의 미생물학자 찰스 챔버랜드는 박테리아보다 더 작은 구멍을 지닌 필터를 발명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필터를 통해 박테리아를 포함한 용액을 통과시켜 이 용액으로부터 이들을 걸러낼 수 있었다. 1892년에 러시아의 생물학자 드미트리 이바놉스키(Ivanovskii, D. I.)는 이 필터를 이용하여 현재의 담배모자이크바이러스를 연구하였다. 그의 연구는 감염된 담배잎으로부터 으깬 잎 추출물이 필터 과정을 거쳤더라도 감염성이 유지되는 것을 입증하였다. 이바놉스키는 이 감염이 박테리아가 만들어낸 독성으로 인한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이 생각에서 더 앞으로 나아가진 않았다. 당시, 모든 감염체들은 필터를 통해 존속되어 영양배지에서 증식시킬 수 있다고 여겨졌고, 이는 질병의 배종설(매균설)의 일부가 되었다. 1898년에 네덜란드의 미생물학자 마루티누스 베이제린크(Martinus Beijerinck)는 이 실험을 되풀이하였고 필터 처리된 용액에 새로운 형태의 감염체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는 이 감염체가, 분리된 세포에서만 증식되는 것을 발견하였으나 그의 실험을 통해 그것이 입자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입증하지는 못했다. 그는 이를 contagium vivum fluidum 로 불렀으며 이 낱말을 바이러스( virus )라 하였다. 베이젠리크는 바이러스가 자연 상에서는 액체 상태로 되어 있다고 주장하였으나, 이 이론은 나중에 웬들 스탠리가 바이러스가 미립자성을 띠는 것을 입증함으로써 사실이 아님이 입증되었다. 같은 해에 프리드리히 뢰플러와 프로시는 최초의 동물성 바이러스(구제역을 일으키는 아프타바이러스)를 비슷한 필터를 통해 걸러내는 데 성공했다. 19세기 후반 바이러스 발견 직후 생물학자들은 그들의 기원에 대해 생각하였다. 초기에는 바이러스가 세포로 진화하지 못한 원형질체의 일부였을 것이라는 가설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 가설은 바이러스와 숙주세포 사이에 복잡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부정되었다. 두 번째 가설은 그들이 생존을 위해 핵산을 필요로 하는 세포내 기생체로부터 유래하였다는 가설이다. 바이러스가 숙주세포 내로 들어가면 핵산을 비롯하여 바이러스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을 숙주세포로부터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세번째 가설은 바이러스가 세포로부터 방출되었기 때문에 복제를 위해 숙주세포로 되돌아가야 하는 유전자라는 것이다. 바이러스는 숙주의 종류에 따라서 식물 바이러스·동물 바이러스 및 세균 바이러스(파지)로 나누기도 한다. 그러나, 생물 증식의 근원이 핵산에 있으므로 핵산의 종류에 따라 분류하게 되었다. 즉, 2종류의 핵산 중에서 어느 것을 가졌는가에 따라 DNA바이러스 아문과 RNA바이러스 아문으로 나뉘며, 이들은 다시 강·목·과로 세분화된다. 바이러스는 증식에 필요한 효소를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다른 생물에 기생하면서 숙주가 가진 것을 이용하여 증식한다. 천연두나 수두를 일으키는 바이러스나 대장균에 기생하는 T파지는 DNA바이러스이다. 이에 대해, 유행성 이하선염(항아리손님)·홍역·광견병·소아마비·일본뇌염 등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는 RNA바이러스이다. 노벨상 수상자인 데이비드 볼티모어는 바이러스를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 I dsDNA 바이러스(겹가닥 DNA 바이러스) - 아데노바이러스, 헤르페스바이러스, 마마바이러스 등 II ssDNA 바이러스(외가닥 DNA 바이러스) - 파르보바이러스 등 III dsRNA 바이러스(겹가닥 RNA 바이러스) - 레오바이러스 등 IV (+)ssRNA 바이러스(양성-극성 외가닥 RNA 바이러스) - 피코르나바이러스, 토가바이러스 등 V (−)ssRNA 바이러스(음성-극성 외가닥 RNA 바이러스) - 오르토믹소바이러스, 라브도바이러스 등 VI ssRNA-RT 바이러스(외가닥 RNA-RT 바이러스) - 레트로바이러스 등 VII dsDNA-RT 바이러스(겹가닥 DNA-RT 바이러스) - 헤파드나바이러스 등 바이러스는 RNA나 DNA의 유전물질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단백질 껍질(capsid, 캡시드)로 구성되는 매우 간단한 구조를 가진다. 단백질 껍질(캡시드)은 구슬 모양의 단백질(capsomere, 캡소머)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다. 어떤 바이러스는 단백질 껍질 이외에 지질로 이루어진 막을 가지기도 한다. 위의 그림에서 하단의 바이러스가 지질로 이루어진 층을 가지는 Enveloped Virus(외피로 둘러싸인 바이러스)이다. 이 지질층은 숙주세포의 세포막에서 유래한 것이다. 바이러스는 일반적인 영양 배지에서는 배양할 수 없지만 살아 있는 세포에서는 선택적으로 기증 ·증식한다. 이러한 특징을 가진 바이러스를 증식시키기 위해서, 미생물학자들은 1900년대 초, 페트리 접시에서 자라는 세포층에서 바이러스를 배양하는 방법(세포배양)을 개발하였다. 발견 초기에는 생물학자들 사이에서 바이러스가 생물인지 무생물인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이는 바이러스가 통상적인 세포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고전적인 생물학 차원에서 무생물(비생물)로 분류하기도 했지만, 생물과 무생물의 특징들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에 생물과 무생물의 중간 단계로 분류하는 것이 통상적이다. 생물적 특성 (숙주 세포의 효소를 이용한) 물질 대사가 가능하다. 증식, 유전, 적응등의 생명 현상을 나타낸다. 자기복제가 가능해 돌연변이가 나타날 수 있다. 무생물적 특성 핵이 없고 세포막 등의 세포 기관도 없다. 독립적인 효소가 없어 독립적 물질대사가 불가능하다. 생물체 밖에서는 결정체로 존재한다. 바이러스의 복제 경로 또는 생활환은 크게 두가지가 있다. 용균성(lytic) 숙주 세포를 감염시킨 후 숙주 세포를 파괴하며 복제된 바이러스가 외부로 방출 용원성(lysogenic) 잠재성 바이러스. 숙주 세포를 감염시킨 후 숙주 세포 염색체의 일부로 끼여들어간다. 세포 분열시 바이러스의 유전물질도 같이 복제가 되며, 암을 유발시키기도 한다. 조건에 따라 용균성 상태가 되기도 한다. Spanish Flu Virus.jpg|섬네일|전자 현미경(TEM)으로 관찰한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의 사진|alt=An electron micrograph of the virus that caused Spanish influenza 독감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원인 감기 리노 바이러스 또는 아데노 바이러스가 원인 에이즈 인간 면역 결핍 바이러스(HIV)가 원인 담배 모자이크 병 담배 모자이크 바이러스(TMV)가 원인 천연두 소아마비 구제역 에볼라 출혈열 에볼라 바이러스가 원인 상추 모자이크 병 상추 모자이크 바이러스가 원인 메르스 지카 바이러스 박테리오파지(bacteriophage):숙주 세균을 파괴하는 바이러스. 항생제의 급격한 사용으로 슈퍼박테리아가 탄생했다. 하지만 박테리오파지를 이용하면(파지 요법) 손쉽게 처리할 수 있다. 파지 요법이 연구가 중단되었지만, (항생제 때문에) 요즘 다시 파지 요법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바이러스학 바이러스 분류 Ricki Lewis 외,《LIFE》,6th Ed.,Mc Graw Hill(2009) ViralZone A Swiss Institute of Bioinformatics resource for all viral families, providing general molecular and epidemiological information "A Gazillion Tiny Avatars", article on viruses by Olivia Judson, NY Times, Dec 15, 2009 Viruses – an Open Access journal 분류:바이러스학 분류:독일어 낱말
김성수 (金性洙, 1891년 10월 11일 ~ 1955년 2월 18일)는 대한제국의 교육인 겸 언론인·기업인·근대주의 운동가였으며, 대한민국 초기 정치인, 언론인, 교육인, 서예가였다. 전라북도 고창출신이며, 전라북도 부안 줄포에서 자랐다. 본관은 울산이며 조선조 성리학자 하서 김인후(金麟厚)의 13대손이다. 자(字)는 판석(判錫), 아호는 인촌(仁村)이다. 1914년 와세다 대학교 정경학부를 졸업하였다. 귀국 후 1915년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하여 학교장을 지내는 등 교육 활동을 하였다. 1919년 3·1 운동 준비에 참여하여 자신의 집을 회합 장소로 제공하였다. 1919년 10월 경성방직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경성방직은 초기에 경영 상황이 어려웠으나 1926년 이후 성장하였다. 김성수는 경성방직을 운영하며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하였고, 1920년에는 양기탁, 유근, 장덕수 등과 동아일보를 설립하였다. 1932년 오늘날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였다. 1930년대 김성수는 실력양성론에 따라 자치운동을 지지하였다. 8·15 광복 이후에는 한국민주당 조직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봉대운동 등에 참여한 뒤 김구, 조소앙 등과 함께 신탁통치반대운동을 주관하였다. 1947년부터 한국민주당의 당수를 지내기도 했고 1947년 3월부터 정부 수립 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을 지냈다. 그 뒤 5.10 단독 총선거에 찬성하였다. 1949년 민주국민당의 최고위원이 되었고, 한국 전쟁 기간인 1951년 5월부터 1952년 8월까지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이 부산 정치 파동으로 헌법을 개정하여 재선을 추진하자 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1954년 이승만의 장기 집권에 반대하는 호헌동지회에 참여하여 통합 야당인 민주당의 창립 준비에 관여하였고, 1955년 2월 18일 병으로 사망하였다. 임종 직전 로마 가톨릭교회의 세례와 병자성사를 받았다. 사후 1962년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된 한편, 2002년 2월 28일 대한민국 국회의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 과 광복회가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에 수록되었고,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 친일인명사전에 언론계 친일파로 수록된 이후, 대법원에서 거짓서훈으로 인정, 2018년에 독립유공자 서훈이 박탈되어 논란이 되었다. 김경중.png|섬네일|130px|left|생부 지산 김경중 김성수는 1891년 10월 11일 전라북도 고창 부안면 인촌리에서 동방 18현의 한 사람으로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인 하서 김인후(金麟厚)의 13대손으로 출생했다. 당시 군수를 역임한 낙재 김요협(金堯莢)의 둘째 아들 김경중(金暻中)과 장흥 고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아들이 없었던 백부 김기중(金祺中)의 양자가 되었다. 어릴 적 이름은 판석(判錫)이었다. 김경중과 장흥 고씨는 인촌 위로 아들 셋을 두었으나 모두 태어난 지 얼마 안되어 병사를 하였다. 따라서 그가 사실상의 장남 역할을 하게 되었다. 다시 아들을 낳기를 갈망하여, 유교를 하는 집안임에도 어떤 중의 말을 따라 고창군 흥덕(興德)의 소요암에 가서 불공을 드렸다고 한다. 생모 장흥고씨의 꿈에 개천에서 한뼘이나 되는 새우가 헤엄치는 것을 보고 뛰어들어 치마폭으로 잡아 가지고 언덕에 올라와보니 길이가 석자나 되어보이는 잉어였다고 한다. 원파 김기중, 그의 교육, 계몽 사업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유년기에 큰 부자였으나 아들이 없었던 백부 김기중의 양자가 되었다. 그는 가계상 문정공파(文正公派) 신평파(莘坪派)에 속하는데, 파조 김계현(金繼賢)은 비변랑(備邊郞) 김익서(金翼瑞)의 차자로 하서 김인후의 6대손이다.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 역시 김인후의 후손으로 먼 일족이다. 큰어머니이자 양모였던 전주 이씨는 조선 태종 이방원의 차남 효령대군의 후손인 이경의(李景儀)의 딸이었다. 그의 가계는 하서 김인후의 선조인 민씨 부인이 태종비 원경왕후의 친족으로 태종 때 외척을 제거하자 화를 피하여 낙향, 전라남도 장성군으로 낙담(落膽)하면서부터 전라남도 장성군에 새 본거지로 삼아 가문이 융성하였다. 그 뒤 하서 김인후가 다시 관직에 올라 한성(漢城)에 거주하였으나 다시 벼슬을 버리고 전라남도 장성군으로 내려와 이후 대대로 거주하였다. 이후 그의 증조부 김명환(金命煥)이 자신의 셋째 아들 낙재 김요협을 전라북도 고창군의 거부인 연일 정씨(延日 鄭氏) 정계량(鄭季良)의 무남독녀와 혼인을 맺음으로써 처가인 전라북도 고창군에 정착하게 되었다. 증조부 김명환은 노인직으로 통정대부 첨지 중추부사가 되었다. 김요협은 관직에 진출하여 선공감감역 등을 지냈으며, 처가의 유산을 물려받아 재력을 형성하였다. 할아버지 김요협은 인촌 김성수의 가계를 실질적으로 일으킨 사람이라 한다. 감역으로 시작하여 참봉, 봉사, 도사, 별제, 주부 등의 경관직을 지내고 화순군수, 진안군수, 군위군수 등을 지냈으며, 처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으로 1,200석의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할아버지 요협은 자신의 두 아들에게 유산을 분배할 때 장남인 김기중에게는 1천 석의 농토를, 차남인 김경중에게는 2백 석을 물려주었으나 이재에 능한 김경중은 형보다 더 많은 토지를 갖게 되었다 한다. 김요협의 두 아들인 김기중과 김경중 역시 관직에 진출하여 군수를 지냈다. 그러나 그의 집안의 부의 축적과정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도 있는데, 그의 아버지와 생부 형제가 벼슬길에 있을 때 관권을 이용하여 백성들의 재물을 수탈했고, 심지어는 중국·일본과 밀수를 하여 돈을 모았다고 한다. 인촌 생가.jpg|섬네일|left|140px|부안 줄포리 생가 전경(1900년대 초 김성수, 김연수 형제의 생가) 유학시절의 김성수(왼쪽 앉은 이)와 김연수. 큰아버지 김기중의 양자로 간 김성수는 법적으로는 김연수의 사촌 형이었다. 조부 김요협은 전북 고창 부안면에 집을 짓고 거주하였고, 김기중과 김경중 형제는 줄곧 그 곳에서 거주하였으며 김성수 역시 조부가 세운 집에서 태어났다. 유년시절의 김성수는 조부 김요협 내외와 부모 김기중 내외, 생부모 김경중 내외와 함께 거주하였다. 양가와 생가는 한 마을에 울타리를 하나 두고 있었다. 할아버지 대에 가세를 일으켰지만 할아버지 김요협은 근검과 절약을 강조하였고 사치스러운 모습을 허락하지 않았다. 또한 맏손자인 인촌에게만큼은 회초리를 들기도 했다. 생가와 양가는 한울타리를 둔 집으로, 어린 김성수는 밤중에 생가를 찾아가곤 하였다. 그러나 생모(生母) 장흥고씨는 어머니(양어머니 전주이씨)의 허락을 받아오기 전까지는 안 된다며 단호하게 돌려보냈다. 유년기의 김성수는 장난기가 심한 소년이었다 한다. 엽전을 삼켰다며 병이 나으려면 호두를 먹어야 된다고 하였다가, 집안 일가가 호두를 가져오자 엽전을 먹은것은 내가 아니라 내 주머니였노라고 하기도 하였다. 소년기에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석재 서병오의 권유로 아호를 인촌(仁村)이라 지었다. 7세때까지 집에서 부모에게 글을 배우고 어머니에게서 선행가언을 배우며 한문교양을 쌓다가 7세 때 훈장을 모셔와 사설 서당을 차려서 한학을 배우게 되었고, 동리 아이들을 함께 공부하게 하였다. 소년 판석은 어린아이임에도 동네 아이들 중에 공부를 하고 싶으나 생활이 어려워 못하는 아이들을 불러다가 같이 공부하게 하였고 수업료와 지필묵도 사서 나눠 쓰기도 했다. 형편이 어려운 동리 아이들이 많았음에도 그는 아이들의 자존심을 건드리거나 비하, 모욕을 주지 않았다. 그는 유년기때 부모로부터 양반이 갖춰야할 예의범절과 한문 등을 배웠다. 9세 무렵 생부 김경중 내외에게 다섯째 아들이자 친동생인 김연수가 태어났다. 한편 백부 김기중의 소실인 공주김씨에게서도 서자이자 그의 서제인 김재수가 태어난다. 서당에서 그는 명심보감(明心寶鑑), 소학(小學), 동몽선습(童蒙先習)을 배우고 이어 자치통감과 공자, 맹자, 중국의 역사 등을 배웠다. 이어 당시(唐詩), 유학철학 등을 공부하여 성리학을 익히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사마천의 사기열전과 삼국지를 탐독하였다. 풍족한 가정 환경에서 자라났으나 사치를 모르고 성장하였다. 부안군 줄포리 인촌 김성수 생가 친구 송진우. 김성수의 죽마고우인 그는 죽기 전까지 앞장서서 궂은 일을 도맡아 하였다. 1903년 13세에 김성수는 자신보다 다섯 살이 많은 춘강(春崗) 고정주(高鼎柱)의 딸 고광석(高光錫)과 결혼하였다. 장인 춘강(春崗) 고정주(高鼎柱)는 장흥 고씨로 전라도 창평군(현 담양)에서 지주이자 관료로 계몽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장인 고정주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의 후손으로 규장각제학을 역임한 인사였다. 또한 그는 장학재단인 호남학회(湖南學會)의 발기인에 참여하여 신학문에도 관심을 가졌다. 고정주는 전남 담양군 창평에 창흥의숙(昌興義塾)을 설립하였다. 1906년 장인 고정주가 세운 창흥의숙에 입학하였다. 이후 김성수는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의 처가댁에 가서 생활하며, 장인이 설립한 창흥의숙에서 공부하였다. 창흥의숙에서는 한문, 영어, 일어, 수학 등을 가르쳤고, 그는 장인 고정주의 배려로 신학문을 접했다. 장인 고정주는 특별히 영어교사를 초빙하여 영학숙을 열고 자신의 아들 고광준(高光駿, 고재욱의 부)과 사위 김성수 등에게 영어공부를 시켰다. 창흥의숙에 수학하면서 김성수는 오랫동안 의기투합할 동지인 송진우를 만나 친분을 쌓았다. 송진우의 아버지 송훈은 고정주가 영학숙을 차렸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아들도 배우게 해달라고 부탁해서 송진우도 이때부터 영학숙에 들었다. 송진우 외에도 백관수 등을 이곳에서 만났다. 그중에서도 차분하고 내성적이었던 송진우는 그의 사람됨됨이를 알아보고 깊은 신뢰를 하게 된다. 송진우는 조선총독부와 협상하는 일과, 김성수가 곤경에 처할 때마다 자신이 대신 나서서 처벌을 받거나 불이익을 당하는 등 그를 앞장서서 도와주었다고 전해진다. Seong-soo and Song Jin-woo.jpg|섬네일|left|150px|친구 송진우와 함께 영학숙 재학 중 인촌 김성수가 먼저 초립동이인 송진우에게 허교를 제의했다. 다른 사람들은 통성명만 하면 허교하고 자네니 내지 했지만 고하와의 허교는 상당한 시일을 요했다. 그로부터 훨씬 뒤의 일이었다. “이제 우리 허교하지” 하고 송진우가 김성수를 향해 허교를 제의했다. 이 무뚝뚝한 소년 고하의 제의에 인촌은 무척 반가웠다. 후일 김성수는 송진우의 첫인상을 두고 이르기를, 쉽게 속마음을 열지는 않았으나 심지가 깊은 청년이라고 회상하였다. 이때 만난 송진우는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평생을 그와 함께 언론, 사회 활동, 정치 활동을 하는 정치적 동지가 된다. 그 뒤 그는 송진우와 함께 가족 몰래 비밀리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1906년 겨울 다시 전북 고창의 집으로 되돌아왔다. 친구인 송진우와 친분을 쌓은뒤 김성수는 이를 부모에게 보고하였다. 담양에서 얻은 것이 무엇이냐는 양아버지의 질문에 그는 송진우라는 친구를 얻었다고 했다. 1907년 민란과 화적떼를 피해 생가와 양가가 모두 고창군 인촌리에서 부안군 줄포면 줄포리로 이주하면서 함께 이주했다. 청련암.jpg|섬네일|right|140px|1907년 당시 부안군 내소사 청련암 일본인 상인들이 많이 들어오면서 일본 상인들이 면제품, 농기구, 냄비, 석유, 물감, 비누, 유리그릇, 거울, 가위, 사탕 등을 가게에 들여오거나 차에 싣고 산간벽지를 다녔다. 일본 상인이 싣고온 문물에 호기심을 보이자 할아버지 김요협은 그런 물건들은 삼강오륜을 해치는 이물(異物)이라 하여 가까이 하지 못하게 했으나, 호기심이 많던 김성수는 가게 같은 곳에 다니며 이것저것 살펴보았다. 한편 부산에서 온 박모라는 이와 어울려 화투에 빠졌고, 개화문물을 구경하느라 경성을 돌아다녔다. 그가 지방에서 온 건달과 어울린 것을 알게 된 할아버지 김요협은 대노하여 가족을 소집하고, 나라의 형편이 어떠한데 왜놈의 놀음에 정신을 팔고 있다며 김성수를 마당에 엎드리게 한후 볼기를 쳤다. 1907년 봄 김성수의 가족은 고창군에서 부안군 줄포면으로 이주했다. 1907년 김성수는 내소사(來蘇寺)의 청련암(淸蓮庵)으로 들어가서 공부를 더했다. 내소사 청련암에서 공부할 때 송진우가 다시 찾아왔다. 내소사 청련암에서는 백관수도 함께 수학했다. 백관수는 내소사 남쪽 20리쯤에 위치한 부안군 덕흥 출신으로 집안 어른들끼리 교분이 있었다. 여기서 그는 송진우, 백관수와 더욱 우의를 두텁게 했고 이러한 우정은 평생동안 변함없이 계속되었다. 인촌은 백관수에게서는 한문의 힘을 빌었고, 송진우에게서는 식견(識見)의 힘을 빌렸지만, 김성수 역시도 백관수에게는 신학문의 영향을 주었고, 송진우에게도 실천하는 힘의 영향을 깨우쳐 주었다. 1908년 4월 줄포 근처의 후포에서 있었던 한 교육계몽운동가의 시민권, 평등, 주권재민의 사상등에 대한 공개강연을 들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금호학교에 입학해 영어, 한국어, 역사, 지리, 물리, 화학, 음악 등 본격적인 근대 학문을 공부했다. 이곳에서의 새로운 교육을 통해 일본이라는 넓은 세계로 나아가 더욱 깊이 있고 더욱 새로운 학문을 배워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것으로 추정된다. 청년기에 김성수는 문맹 백성들을 보며 스스로 먼저 신학문을 배우고 그것에 기초해 선진사상과 선진기술을 동포에 전수시킴으로써 민족의 실력을 배양시켜서 조국의 자주독립을 이룩해야 한다는 신념 하에 동경유학을 결심 했다. 그는 무식함과 무지함이 조선의 멸망의 원인이라 확신하고 먼저 배워서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계몽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집안에서는 그의 유학을 반대하였다. 1908년 10월 상투를 단발하고, 상투를 자른 자신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사죄의 편지를 부모에게 남기고 송진우와 함께 비밀리에 일본(日本)으로 유학길을 떠났다. 가정 사정 때문에 백관수는 중도에 포기했지만 김성수는 송진우와 길을 떠났는데, 집안에서는 병환을 핑계로 노비를 보내 그를 불렀으나 자신을 부르려는 계획임을 간파하고는 하인을 돌려보낸 뒤 급히 전라북도 옥구군 군산항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송진우(宋鎭禹)와 함께 일본 도쿄에 도착한 김성수는 도쿄 시내에 하숙하며 세이소쿠 영어학교(正則英語學敎)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영어와 수학 등을 배웠는데, 일본어 실력이 다소 부족했던 김성수는 별도의 가정교사를 초빙하여 일본어 회화를 배웠다. 고향에서 부쳐주는 학비 외에 시내에서 송진우와 함께 점원 등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용돈과 학비를 조달하였다. 1909년 4월 송진우와 함께 긴조중등학교(錦城中等學敎) 5학년에 편입학했다. 이곳에서 영어를 주로 집중해서 배웠으며, 1910년 3월 긴조중등학교를 졸업하였다. 모교 와세다 대학교 1945.jpg|썸네일|오른쪽|180픽셀|장덕수, 일본 와세다 대학 시절 만난 친구로, 동아일보와 한민당을 함께 운영한 정치적, 사상적 동지였다. 이어 4월 김성수는 역시 송진우와 함께 일본 동경의 와세다 대학교(早稻田大學敎)에 입학하였다. 이후 와세다 대학교 예과(豫科)에서 수학하던 중, 8월 29일 대한제국이 강제로 병합되자 충격을 받은 송진우는 귀국하였고, 김성수는 홀로 일본에 남아 공부를 계속했다. 1911년 와세다 대학교 예과를 마치고, 와세다 대학교 본과에 입학, 정경학부에서 공부했다. 김성수는 집안에서 부치는 학비 등으로 어렵지 않은 생활을 하였다. 와세다 대학에서 사귄 친구들은 설산 장덕수, 해공 신익희, 민세 안재홍, 가인 김병로, 낭산 김준연 등이었다. 공부에만 몰두하지 않고 그는 정치강연회가 있으면 먼길이라도 찾아서 참석하였고,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가 제창한 비폭력 무저항운동인 간디이즘에 감격하여, 생활에 있어서는 간디이즘을 신조로 하여 물품과 물, 전기 등을 절약했고 나를 위한 소비를 최소한도 줄이고 그 남은 것으로 불우한 처지에 있는 이들에게 희사하였다. 유학 당시에도 그자신 역시 유학생의 신분으로, 김성수는 불우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학생들을 찾아 지원해주었고, 대신 학비를 납부해 주기도 하였다. 1914년 와세다 대학교 정경학부를 졸업한 뒤 그해 7월 귀국하였다. 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김승문에 의하면 인촌의 도움을 받은 확인된 사람만도 유학생 50여명을 포함 730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때 김성수는 일본에서 산업자본의 골간이 되는 부분들을 눈여겨 봐둔 뒤, 기업·학교·언론 등을 통해 현실적인 힘을 마련하겠다 고 다짐하였다. 당시 식민치하의 조국에는 자원이 빈약하다는 것을 인식한 그는 구국운동의 방략으로 그는 세가지 목표를 설정 인재배양 (人材培養), 경제자립 (經濟自立), 언론창달 (言論暢達)이라는 목표를 수립하였다. 김성수 (1914년 무렵) 1914년 가을 김성수는 교육계몽에 뜻을 품고, 사립 중등학교를 설립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가지고 서울로 떠났다. 이때 집안에서 자금을 주지 않자, 그는 3일동안 단식을 한 끝에 집안에서 자금을 마련해 갔다. 그의 첫 시도는 사립학교 설립안이었는데, 조선총독부 교육국으로부터 거절 당하면서 무산되었다. 1914년말 김성수는 최남선(崔南善), 안재홍(安在鴻) 등 일본 유학시절 동창들과 함께 교육자료를 모아 1915년 봄 백산학교(白山學敎)라는 이름의 사립학교 설립안을 만들고 학교설립을 추진하였으나, 조선총독부가 허가를 해주지 않아 좌절당하였다. 조선총독부의 설립인가 거절 이유로는 백산은 한민족의 영산(靈山)인 백두산을 뜻하는 것이니, 학교 이름이 불온하다고 퇴짜를 놨던 것이다. 그해 안희제 등이 세운 백산상회(白山商會)가 독립운동 자금을 공급하는 단체임이 총독부에 정보가 입수되면서 백산상회와의 관련성을 취조당했다. 중앙학교 인수 무렵 이때 경영난에 빠졌던 중앙학회가 그에게 "중앙학교의 운영을 맡아달라"고 요청한다. 1915년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있던 중앙학교로부터 운영을 맡아달라는 의뢰가 들어왔고, 김성수는 그 제안을 수락하였다. 그의 생부모는 지나친 모험이라고 반대하였으나 양아버지 김기중만이 그의 의견에 처음부터 지지하였다. 어렵게 생가 부모를 끈질기게 설득 인수 비용을 얻어내 1915년 4월 경영난에 허덕이던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하여 학교장을 지냈다. 중앙학교에 편입학생이었던 이희승은 인촌과 만남으로서 학교가 교세가 뻗어 나가게 되었다. 고 증언하였다. 안창호의 영향을 받은 그는 교육 계몽활동에 종사하면서, 교육과 문화의 힘으로 실력을 키워서 독립을 이룩하자는 실력양성론 을 강조하였다. 중앙학교의 인수와 동시에 자신도 중앙고등보통학교의 경제학 교수가 되었다. 경제학 원론 교과목을 가르치면서 교재가 없었던 터라, 김성수는 학생들에게 일일이 필기를 시키고 이를 꼼꼼히 지도하였다. 어려운 고학생들의 장학사업도 지원하였다. 1915년 9월에는 부모를 여의고 학비곤란으로 귀국한 이광수를 후원하여 일본으로 유학시켜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예과에 편입시키기도 했다. 이광수는 당시 형편상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이때 김성수는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가 일본 사람들에게 식민통치를 당하는 것은 우리가 모르기 때문이며, 알려면 배워야 한다. 그래야만이 자주독립을 할 수 있다. 지금 유행하는 학문이 계속 빛을 보리라는 생각은 잘못이다. 20년, 30년 후에는 바뀔 수가 있다. 문학보다는 과학에 관심을 가지라. 고 학생들에게 훈육하였다. 그의 감화를 받은 학생 정문기는 후에 수산학자가 된다. 장로인 박관준으로부터 개신교 입교를 권고 받았으나, 그는 기독교에 관심은 있다고 대답하였다. 일부 교인들의 끈질긴 선교노력에 일시적으로 교회에 출석하기는 하였으나 신앙에 별다른 관심을 갖지는 않았다. 또한 이론 교육 외에 체육활동에도 관심을 갖고 윤치영이 운영하는 중앙학교 야구부, 축구부의 활동에도 적극 지원했다. 식민 치하의 조선 백성들이 일본제 무명, 비단 등을 수입하며 일본제 제품이 한국에 유행던 시절, 마하트마 간디의 경제 자립운동에 영향을 받아 민족산업을 일으키기 위해 국내자본 육성 계획을 세웠다. 김성수는 중앙고보의 학생들로 하여금 국산 무명옷을 교복으로 입게하였다. 1917년 방직기술자인 이강현의 건의를 받아들여 일제 당국은 순순히 허락하지 않았으나 결국 그의 사업을 승인해주었다. 1917년 10월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광목제조 회사 경성직뉴주식회사 를 윤치소 등으로부터 인수하였다. 도입한 도요타 방직기, 일본 업체들과의 경쟁을 위해 일본 기계를 도입하여 생산량을 증가시켰으며, 그는 기계의 성능을 직접 시험하였다. 일본의 방직회사들이 조선에 진출해 있는 상황에서 그가 시장진출을 확보하는 방법으로 창안해낸 것은 조선인 지사들을 주주로 공모하는 것이었다. 이후 그는 외부 자본의 침투는 민족의 경제를 갉아먹고, 외환의 유출을 촉진한다는 점을 들어 조선인 인텔리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1918년 봄 경상북도 경주를 찾아 최부잣집의 후손 최준을 방문하였다. 김성수가 최준을 찾은 것은 경성방직과 후에 세우게 될 동아일보에 지방의 유력 인사들의 참여를 권유하기 위함이었다. 김성수가 경북 경주를 다녀간 지 1년 후 1919년 10월 경성방직이 설립되었고, 최준은 경성방직의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최준은 김성수와 안희제 등과 교류하면서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한다. 김성수는 한국인 최초의 방직회사 설립자가 되었는데, 그해 11월 부산에 설립된 조선방직회사는 일본인이 세운 것이었다. 중앙학교의 졸업생 중에서도 윤주복(尹柱福) 등은 그의 권고로 규슈대학 방적학과로 진학, 졸업한 뒤 경성방직에 입사하기도 했다. 전국을 다니며 모집한 끝에 많은 주주와 후견인들을 모았고 경방 창림 발기인들의 주식은 3,790주였고 16,210주는 일반공모주였다. 1918년에는 경성직뉴주식회사를 중앙상공주식회사 로 이름을 바꾸었다. 국내 의류업체들이 일본의 면직물 수입이 증가하면서 일본 면직물에 의존하여 제품을 생산, 한국의 면직물은 거의 소멸될 위기에 처하자, 1918년부터 중앙상공주식회사를 통해 직접 면의류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1919년 10월 5일 김성수, 박영효 등은 명월관 지점 태화관에서 창립총회를 가졌다. 하지만 경성방직은 설립되자마자 좌초의 위기에 처했고 1926년경에 가서야 조업 정상화에 성공한다. Joong Ang High School.jpg|썸네일|왼쪽|140px|송진우와 김성수 등이 3.1 만세운동을 모의하던 중앙고등학교 숙직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을 목적으로 설립된 파리강화회담에서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약소국 국민들의 운명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는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한 사실이 한반도에도 알려지면서 이를 접하고 독립운동을 준비했다. 민족자결주의에 감화된 김성수는 독립운동에 투신을 결심, 어릴때부터 오랜 친구였던 고하 송진우를 학교 학감직에 임명한 뒤 1919년초 그에게 중앙학교 학교장직을 넘기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이어 송진우의 도움을 받아 함께 일본 도쿄에 연락 동경 조선 유학생들과 기맥을 통하여 독립선언을 준비했다. 1918년부터 중앙학교 숙직실에서 독립운동을 준비하다가 송진우 등의 가담으로 중앙학교 교장직을 맡긴 후 주로 중앙학교 숙직실에 모여 비밀리에 추진하였다. 상하이에서 한인청년단이 1919년에 열릴 파리강화회의에 한국측 대표자를 파견한다는 것을 접하고, 범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각계의 참여가 필요함을 역설했다. 김규식이 자신의 활동을 위해서는 누군가는 호응하여 사건을 벌여야 된다고 하자 이를 입수한 그는 송진우와 함께 천도교와 기독교 세력의 포섭과 협력을 주선했다. 1918년 12월의 어느 날 미국으로부터 이승만이 보낸 밀사가 송진우와 김성수를 찾아왔다. 이승만의 밀사는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론의 원칙이 정식으로 제출될 이번 강화회의를 이용하여 한민족의 노예 생활을 호소하고 자주권을 회복시켜야 한다. 미국에 있는 동지들도 이 구국운동을 추진시키고 있으니 국내에서도 이에 호응해주기 바란다."는 내용의 밀서를 전해주었다. 이승만은 밀서를 통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을 계기로 해외에 알릴만한 거사를 하라는 뜻을 피력했다. 그러나 송진우는 이승만 밀서를 되돌려보냈다. 한편 김성수는 자신의 거처를 독립지사들에게 제공, 이승훈·한용운·최남선·최린 등이 그의 자택에서 3·1 운동을 준비했다. 형무소에 투옥, 수감 중인 송진우재벌이 부산에 조선방직회사를 설립하던 해여서 경방이 맞서게 되면 불리한 여건이었다. 경성방직은 초기에 경영상황이 어려워서 늘 사재를 털어서 보충해 나가는 중에 1926년 이후에 동생 김연수가 경영에 능하고 재능이 있어서 성장시겼다. 김성수는 경성방직을 운영하며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하였고, 1920년에는 양기탁, 유근, 장덕수등과 동아일보를 설립하였다. 1923년부터 1935년 사이에 경성방직은 사세가 확장되었고, 그 여세로 그는 1939년 만주에도 공장을 설립하여 경성방직을 해외의 투자와 수출을 하는 기업으로도 성장시켰다. 그러나 독립운동과 교육운동에 투신했고, 그 자신이 불령선인으로 분류된 것이 회사에 타격을 줄것이라 판단, 회사를 동생인 김연수와 매제인 김용완에게 넘겨주었다. 동아일보 창간호 동아일보 창간 무렵 일본계 언론의 활동과, 외신 기자들의 출입을 본 그는 국내 언론 설립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1920년부터 언론사 창간 활동을 준비한다. 민족언론 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그는 송진우와 서울 시내에 지인을 통한 홍보활동으로 주주와 창간발기인을 모은 뒤 1920년 4월 1일 양기탁·유근·장덕수 등과 동아일보를 설립하고, 발기인 대표로서 창립을 주관했다. 한때 동아일보의 기자로 활약했고 한겨레 신문을 창간했던 언론인 송건호는 당시 발기인 대표였던 그가 20대의 청년이라는 사실이 놀랍다고 평가하였다. 전국 각지를 다니며 홍보를 하여 각지의 지역유지들이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1920년 동아일보 주필로 활동 했다. 일제의 민간지 발행허가 계획에 따라 창간된 동아일보는 근본적으로는 민족주의 노선을 지향했다고는 하나 식민지시대라는 시대상황 속에서 기본적으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식민통치에서 벗어나려면 조선인이 스스로 자각, 깨우쳐서 실력을 양성해야 되는 것이었다. 기술을 배워서 익히고, 식품과 생산품을 자체 조달할 수 있어야 되며, 경제력을 바탕으로 실력을 양성해야 된다고 봤다. 특히 김성수의 개량주의 노선은 이같은 동아일보 노선의 사상적 골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동아일보는 1920년대 초반부터 총독부에 대해 조선인 자본의 보호를 요구하였고, 김성수는 1922~1926년 기간에 사이토 총독과 13번이나 만났다. 신문사 정착과 사회활동을 위해서는 총독부의 허가를 얻는 일이 필요했고, 조선인의 시각에서 조선인의 입장을 대변하는 언론이 몇 개 쯤은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이유로 총독부 공보국을 설득하였다. 인촌 김성수 송진우 출감후 김성수는 그와 함께 동아일보를 경영하였다. 이후 김성수는 송진우와 손잡고 단군릉 수축, 이순신 장군의 유적보존 및 사당 건립,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 등의 사업을 추진했다. 1920년 4월 15일 조선총독부는 평양에서의 반일시위를 보도했다는 이유를 달아, 창간 직후의 동아일보에 판매와 배포를 금지처분하였으나 김성수는 중단하지 않았다. 동아일보는 이후 총독부에 의해 기사 삭제, 압류, 배포금지, 정간 등 끝없는 탄압을 받아야 했다. 김성수는 송진우, 장덕수와 함께 수시로 총독부 공보담당 부서에 출입하며 보도내용을 해명해야 했다. 1923년 5월 송진우와 함께 어려운 환경에 있던 이광수에게 동아일보사에 입사할 것을 권유하여 객원논설위원으로 천거하였다. 1920년 10월초 석농 유근이 출옥하자, 출옥한 유근을 동아일보 주필로 추대하였다. 이후 김성수는 송진우 등과 함께 추진한 단군릉 수축, 이순신 장군의 유적보존 및 사당 건립,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 등을 주도하며 일경의 눈총을 샀다. 1924년 4월 2일에 《동아일보》가 박춘금등이 만든 정치깡패집단 친일 각파유지연맹을 비난했는데, 박춘금이 사장 송진우와 사주 김성수를 요정인 식도원으로 유인하여 권총으로 협박 및 구타를 가했다. 기독교선교사들의 농촌 계몽 운동에 자극을 받은 김성수는 1930년부터 농촌 계몽 및 문맹자 교화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지원하였고, 1931년부터는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브나로드 운동을 추진하였다. 경성 방직 주식 회사의 국산품 애용 선전 광고. 1920년초부터 그는 강연 활동을 다니며 국내에서 나는 물품을 애용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국내에 좋은 제품이 있는데도 외제를 선호한다면 이는 외국 자본의 침투를 도와주는 것이라는 것이었다. 1922년 이상재, 윤치호, 이승훈, 김병로 등과 함께 주동이 되고 발기인 1,170 명을 확보하여 민립대학 기성회를 출범시키고 모금활동을 했다. 그러나 일제 당국의 탄압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1923년부터는 조만식·안재홍·송진우 등과 물산장려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는 입어라 조선 사람이 짠 것을, 먹어라 조선 사람이 만든 것을 이라는 구호로, 국내에서 생산된 국산품을 애용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김성수가 세운 동아일보에서 외국상인·외국상품 배척을 주장하던 시기에, 역시 김성수가 세운 경성방직에서는 일본 기업과의 경쟁을 피해 북부지방으로 진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두고 에서는 북진정책으로 높게 평가하고 있지만, 실상은 일본기업과의 경쟁을 피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민립대학 기성회 광고.jpg|섬네일|right|200px|민립대학설립운동 홍보 광고(1923년 3월 20일자 동아일보) 실력 양성이 독립의 길이라고 생각한 그는 실력 양성을 위해서는 국민 개개인이 스스로 배우고 깨닭아야 된다고 판단했다. 그는 국산품을 애용하는 것이 곧 민족경제를 살리는 길이라며 조선에서 나는 물산을 구매해줄 것을 호소하며, 국산품 애용 운동을 펼쳐 나갔다. 그러나 국산 애용을 권고하면서도 경성방직 제품을 홍보하거나 광고하지는 않았다. 그의 국산 제품 애용 운동은 호소력을 얻어 조만식, 송진우, 이상재 등이 동참했다. 광목.jpg|섬네일|left|130px|태극성 광목 포스터 1921년 1월 이상재, 이승훈, 윤치호, 송진우, 유진태, 오세창 등과 함께 조선민립대학설립기성준비회를 발족하고 전국적으로 발기인 모집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이 운동은 1924년 중반을 기점으로 동력을 잃기 시작했다. 총독부는 ‘불온사상을 퍼뜨린다’는 이유로 기성회 임원을 미행하고 강연을 막았다.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경제가 불황에 빠지고 1923∼1924년 잇따른 가뭄과 홍수로 이재민 구호가 시급해지자 민립대학 모금은 지지부진해졌다. 또한 조선총독부의 수시 간섭으로 운동은 차질을 빚었다. 1922년 3월에는 태극성 광목을 출시하였다. 조선인에게 친근감을 줄 수 있는 상표를 고민하던 그는 조선말 박영효가 창안한 태극기에서 힌트를 얻어 태극성 광목이라 이름 붙였다. 경방에서 22년 3월에 출시한 태극성 광목은 조선 기술로는 최초로 대량 생산된 광목을 출하하였다. 이 때에 신제품의 상표인 태극성표(太極星標)의 태극 마크가 태극기라는 이유로 그를 소환하여 추궁하였다. 그러나 그는 "상표의 가운데 둥근 원은 회사의 무궁한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고, 원 가운데의 S자는 영문의 방직을 뜻하는 spinning 의 첫머리를 따서 방직회사를 뜻하며, 주위의 별8개는 조선팔도를 나타내어 광목이 조선팔도에 퍼져나가 잘 팔려 달라는 소원이 들어 있을 뿐"이라고 답변하고, 이 상표가 아무런 하자가 없었기 때문에 일본 특허국의 허가를 받은 것이 아니냐고 항변하자 조선총독부는 그를 되돌려보냈다. 1924년 자치운동의 일환으로 연정회(硏政會) 설립을 추진하였는데, 이는 소위 민족개량주의 혹은 실력양성론 이라는 미명하에 일제 조선총독부의 문화정치 에 발맞춰 일제와의 타협 속에 추진된 것으로, 비타협 민족세력의 반발로 중단되고 말았다. 그는 항상 자원이 부족한 사회에서 산업 시설과 기술 인재를 키워서 나라의 실력을 양성하는 것이 민족의 힘을 기르고, 국가가 자주 독립할 수 있는 길이라는 의사를 피력하였다. 넘치는 혈기에 반발하던 청년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의견에 공감하게 되었다. 1925년 사회주의자들의 반(反) 기독교 강연이 문제시되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국내 언론들은 기자들을 대량으로 해고해야 했다. 그는 해고된 기자들에게도 6개월간 생활비 등을 지원해 주었고, 해고된 기자들의 새로운 일자리 알선도 주선해 주었다. 총독부의 압력으로 억지로 해고당하는 것이었지만 사주인 그에게 원한을 품지는 않았다. 1925년 5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열린 제1차 태평양문제연구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온 김활란 등과 자주 만나 정치, 경제, 문화 등을 논의하곤 했다. 11월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이 아들의 활동에 짐이 될 것과 손자들의 건강을 우려해 귀국하였다. 인천까지의 배삯은 마련하였으나, 의지할 데가 없던 곽낙원은 차비 마련이 어려웠다. 곽낙원은 고심하다가 동아일보 인천지국을 찾아가 서울에 갈 차표와 차비를 구하였다. 서울에서 다시 동아일보 본사를 찾아가자 송진우가 곽낙원과 손자의 차비를 지불해주었다. 곽낙원의 동아일보 인천지국 및 본사 방문 소식을 접한 김성수는 직접 찾아가 곽 여사에게 생활에 쓰시라며 봉투를 건넸다.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국장 인산일에 중앙중학교 체육교사 조철호(趙喆鎬)가 학생들을 이끌고 단성사 근처로 집결, 가두시위를 벌였다. 순종의 영여가 창덕궁을 출발, 종로를 통과할 때 한 학생이 군중으로부터 빠져나와 격무늘 뿌리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주위에 정렬한 상복입은 군중들이 호응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사건으로 구속된 학생 중 100여명이 중앙중학교 학생이었다. 1926년 6월 11일 순종의 인산일을 계기로 벌어진 6·10 만세 운동의 배후의 한사람으로 지목되어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소환 조사를 받았으나 혐의점이 없어서 바로 풀려났다. 6월말 6.10 만세운동 당시 중앙학교 학생들이 만세운동을 주도하거나 만세시위에 연루되어 학교가 폐교될 위기에 처하자, 김성수는 학교 걱정말고 가서 싸우라 고 학생들을 독려하였다. 이후 많은 학생들과 청년들에게 의로운 지도자로 존경받았다. 1929년 3월 경성방직주식회사 고문이 되었다. 11월 3일 통학열차에서 일본인 남학생이 한국인 여학생을 희롱하다가 한인 남학생들이 가해 남학생을 구타, 한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간의 싸움이 발생하여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발생했다. 동아일보에서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자 보도정지령을 내렸으며, 그는 여학생 성추행 사건을 기회로 사태 확산을 획책한 것으로 의심받고 총독부에 소환되었다. 01.jpg|섬네일|right|140px|1927년의 마하트마 간디에게서 받은 편지 도쿄에서 열린 제3회 범태평양회의에 참가한 한민족 대표단. 좌로부터 백관수, 송진우, 윤치호, 유억겸, 김활란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의 사상에 감화된 그는 간디와 서신을 주고 받으며 자문을 구하였고, 1926년 10월의 편지에서 그는 간디에게 "식민지하 조선을 위한 고언"을 자문, 간디는 1927년에 보낸 답신에서 "조선은 조선의 것이 되길 바란다"는 답신을 발송하였다. 1926년 인촌은 연정회 부활운동 을 다시 전개하였으나 이는 도리어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의 단결을 촉진하는 계기가 돼 이듬해(1927년) 좌우합작 민족단체인 신간회(新幹會)가 창립되었다. 그는 송진우를 앞세워 신간회를 주도하고자 했으나, 사회주의 민족세력의 반발로 신간회에는 발도 들여놓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가 신간회에 가입하려는 것 역시 사회주의 세력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일각에서는 그가 자신의 재력을 이용해 신간회를 자신의 영향력하에 두려 한다는 루머가 나돌기도 했다. 1929년 말 출국, 구미 여행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에 들러 임시정부가 운영하던 한인 학교에 큰돈을 기부했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을 찾아뵙고 그들의 노고에 대한 그의 진심어린 경의를 표하여 도산 안창호 등 임정 요인들을 감격시키기도 하였다. 브나로드 운동 포스터 1930년 미국, 유럽으로 여행, 1931년 세계일주를 마치고 귀국했다. 이 때부터 송진우 등과 함께 농촌 계몽운동인 브나로드 운동(v narod movement)을 주도했는데 브나로드 운동이란, 러시아 어로 민중 속으로 라는 뜻이다. 1931년 7월 동아일보는 "배우자, 가르치자, 다 함께"라는 기치를 내걸고 브나로드 운동이라 불리는 농촌 계몽 운동을 주도했다. 농촌지역은 문맹과 기아, 질병이 만연하였으므로 농촌을 계몽하겠다는 이상을 품은 대학생들이 방학, 혹은 휴학기간을 이용해 농촌 계몽 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최용신, 심재영, 심훈 등이 브나로드 운동에 참여했고, 사회주의자들도 브나로드 운동에 동참하기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된다. 그는 조선총독부의 학무국과 경무국으로부터 반일사상 고취를 의심하여 방문, 소환, 전화 항의 등을 받았으나 별다른 혐의접이 없어 브나로드 운동 자체를 막지는 못했다. 이는 1938년 일제 당국의 탄압을 받고 중단되지만, 해방 이후 대한민국 대학의 농촌 봉사활동 (농활) 운동으로 이어진다. 한글학회 학자들에게 조용히 자금도 대주고 지원해 주었고, 연세대 한글 학자 외솔 최현배는 인촌을 울다 라는 기고를 통해서 그내용을 말하기도 했다. 동아일보 창간 후에는 문맹퇴치에 목표를 두고 많은 기획들을 실천했다. 한글을 좀더 아름답게 문법도 발전시키도록 한글학회 학자들과 연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 노력을 기울이는 중에 일제 식민정부는 많은 압박을 가했지만 지혜롭게 대처도 하고 폐간도 방어해 나가면서 우리나라와 민족의 문화적 지도자로서 고뇌하면서 나라를 지켜나가셨다. 일본 내선일체 정책인 창씨개명에는 끝까지 동조하지 않고 일본 이름만은 끝까지 만들지 않았다. 늘 드러나지 않게 은미하게 교육인으로서 지내고 싶어했으며 고려대학교는 직접 경영도 하면서 학교에 애착을 갖고 돌보셨다. 세계의 명문대들을 둘러본 후에 고려대학교 건물 모양을 듀크대학교의 모습에서 영감을 얻고 그 모습으로 미학적으로 학교건물도 짓고 손수 나무도 사재로 심고 가꾸면서 교육인으로 살고자 했다. (참고문헌:Choong Soon Kim. A Korean Nationalist Entrepreneur -A Life History of Kim Sŏngsu 1891-1955. New York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98) cheon 1934.jpg|섬네일|right|230px|1934년 보성전문학교 본관 신축공사장에서, 당시 그는 양부 원파 김기중의 상중이었다. 학생 교련 훈련.jpg|썸네일|오른쪽|200px|보성전문학교 학생의 교련 훈련 장면 1932년초 세계일주를 이유로 인천항에서 출국, 상하이의 임정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1932년 3월에는 자금난에 빠졌던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여 3월 26일 인수를 완료하고 보성전문학교 재단 주무이사에 취임하였다. 그해 6월 보성전문학교 제10대 교장에 취임하였다. 보성전문학교는 1905년 이용익이 창설한 이래 계속 재정난을 겪다가 손병희가 맡았으나 여의치 못해 그가 인수하게 된 것이며, 1946년 종합대학 고려대학교(高麗大學)으로 승격하여 오늘날의 고려대학교가 되었다. 보성전문학교 인수 이후 그는 교사를 정비하고 건물을 신축한다. 부친 상중에도 그는 친히 현장을 와서 현장감독들을 독려하곤 했다. 1934년 4월 길에서 문일평을 만났다. 일본 유학시절 도쿄에서 한 집에 하숙하였고, 함께 하숙집 주인의 딸을 연모하기도 했다. 김성수는 문일평의 손을 잡고 "어찌하여 세상 일이 여기에 이르렀소, 지조를 지키는 사람은 끝내 보기 어려운 것이오." 라고 탄식했다. 그는 문일평 등에게도 따로 생활비를 지불하기도 했고, 안창호 등에게도 자금을 보냈다. 1934년 동생 김연수와 함께 해동은행의 대주주였다. 늘 드러나지 않게 은미하게 교육인으로서 지내고 싶어했으며 고려대학교는 직접 경영도 하면서 학교에 애착을 갖고 돌보셨다. 세계의 명문대들을 둘러본 후에 고려대학교 건물 모양을 듀크대학교의 모습에서 영감을 얻고 그 모습으로 미학적으로 학교건물도 짓고 손수 나무도 사재로 심고 가꾸면서 교육인으로 살고자 했다.(참고문헌:Choong Soon Kim. A Korean Nationalist Entrepreneur -A Life History of Kim Sŏngsu 1891-1955. New York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98) 보성전문학교의 교장으로 있으면서 그는 조선어(한글)와 한국사, 교련 과목을 의무, 필수 과목으로 지정하도록 지시하였다. 조선총독부는 그가 조선어(한글)와 한국사, 교련을 필수 이수 과목으로 지정한 것을 두고 불령선인 양성 목적이 아니냐며 의혹을 제기, 트집삼았으나 그는 조선의 역사와 언어를 알게 하는 것이 목적이며 다른 뜻은 없다며 학무국 측을 무마하였다. 그러나 항일독립운동의 온상이자 불령선인의 양성소, 불순언론으로 지목되어 보성전문학교와 동아일보가 총독부의 압력으로 경영난에 빠지게 되자 그는 한강 철교에서 투신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번은 그의 투신기도를 접한 조선총독부 경찰의 제지로 실패한 적이 있었다. 경영난으로 다시 한번 한강에 투신자살을 기도하였다가 그의 투신 기도를 누군가 목격, 전화연락으로 접한 친구 박용희(朴容喜)와 장현식(張鉉軾)이 달려와 그를 말리고 각각 자산 500석을 희사하여 경영난을 모면할 수 있었다. 1935년 5월 보성전문학교장직에서 물러났다. 일장기말소사건.jpg|썸네일|180px|right|1936년 8월 25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일장기 말소 사건 장덕수.jpg|섬네일|left|150px|친구 장덕수와 함께 (1930년대 후반) 일제강점기 동안 김성수는 조선총독부의 감시를 받았고, 동아일보는 수시로 폐간을 당하여 마찰을 기도 했다. 그러나 1930년대 후기부터 일제 식민지 정책이 중일전쟁 (1937-1945)에 때맞춰서 민족말살정책으로 펼쳐지면서 더 많은 압제정책으로 한국의 지성인들을 강압적으로 동원하는 과정에서 암흑기였지만 독립을 멀리 내다 보시면서, 일본 식민지 정부가 우리나라 정부였기 때문에 강경하게 맞서지 않고 온화하게, 거부하지 않고 일본의 강압적인 동원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일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에 일제 식민정부는 한국인들이 존경하는 사람들을 더 압박하는 정책을 폈기 때문에 김성수는 학병을 모집하는 연설을 하도록 강요 받았고 전쟁물자 지원에도 앞장 서지 않을 수 없었다. 1935년 이후 김성수는 공직을 사퇴하고 고미술품과 예술품 수집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고미술품과 작품의 외국 반출을 막아야 된다며 거금을 치루고서라도 미술품, 서예 작품을 매입해들였고, 전형필, 송진우, 장택상 등도 그의 견해애 동조하여 거액을 들여서라도 미술품 입찰에 가서 그림, 서화 등의 작품을 구매했다. 1936년 영국 런던을 방문, 장덕수, 윤보선, 신성모, 윤치왕, 이활 등을 만나 보고 귀국했다. 1936년 8월 25일 기사에서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을 제패한 손기정 선수 사진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워버렸다. 동아일보에서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한 한국인 선수 손기정이 우승을 하자, 기자 이길용 등은 보도 사진에서 일장기를 삭제하고 내보냈다.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 사건 보도 이후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 등에서도 일장기 말소 기사를 내보냈고, 김성수는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연행되었다. 그러나 일장기 말소를 반대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에 의하면 일장기 말소사건의 후유증으로 동아일보는 강제폐간 당했다가 1937년6월 3일 복간하였다. 동아일보는 네 번 강제 폐간 당했고, 김성수는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불려가 수차례 협박과 멸시,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고려대학교 1937년 5월 26일 다시 제12대 보성전문학교장에 취임하였다. 이후 그는 정치적 활동을 최대한 회피하고 교육과 학교 정비에 치중하려 노력하였다. sihn song.PNG|섬네일|left|150px|1936년 영국 런던에서(좌측 김성수, 두 번째 이활, 우측 첫 번째 장덕수, 두 번째 신성모) 1937년 안창호가 수감되자 이광수는 안창호가 간장이 좋지 않음을 들어 석방을 도움을 호소한다. 이광수의 호소로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피체된 안창호의 보석금을 마련하여 지불하기도 했다. 안창호는 석방되었으나 곧 경성대학병원에 입원했고, 김성수는 그의 치료비까지 부담했지만 그는 차도없이 3월 10일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는 안창호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1937년 이화여전 재단 이사(뒤의 재단법인 이화학원 이사)에 취임하였고, 1938년 안창호가 작고하자 추모비를 세우는 데 참여하였다. 숭실전문학교의 신사참배 반대를 옹호하다가 총독부 경무국에 연행되었다가 풀려나기도 했다. 1930년대 후반 이승만이 영향을 발휘하던 독립운동단체 흥업구락부에서도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서대문경찰서에 감금된 윤치영의 진술로 1938년 5월 18일자 서대문경찰서장의 보고에 의하면 그는 흥업구락부의 동지회원의 한사람으로 보고되었다. 그러나 그는 흥업구락부와 관련되어 조사받거나 처벌받지는 않았다. 1939년 9월 경성방직주식회사 고문직을 사퇴하였다. 1939년 12월 18일 정동의 이화여전 강당에서 80여 명의 관계자들이 모인 가운데 후원회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에서 12개조의 후원회 장정을 통과시키고 25명의 위원을 선출했다. 이인도 이화여전 후원회 위원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 한편 동아일보에서 강제 해직된 직원들의 생계도 살피고, 그들에게 생활비도 지불하여 주었으며 복직시킬 수 있는 직원들은 다시 복직 시키고, 불가능한 경우에는 다른 일자리를 주선. 추천하여 주기도 했다. 그래서 해고당한 직원들도 그에게 앙심이나 원한을 품지는 않았다. PearlHarbor.jpg|섬네일|left|태평양 전쟁|220x220픽셀 1940년 8월 10일 일제가 동아일보를 강제폐간시키자, 김성수는 고향으로 돌아가 1945년 8.15 광복때까지 칩거,은거하였다. 1941년 태평양 전쟁 이후 일제로부터 창씨개명을 강요당하였으나 거절하였다. 또한 일제가 제안한 귀족원(상원의원)을 거절하였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어나 이희승·가람 이병기·김선기(金善琪) 등이 연행되어 옥고를 치렀다. 총독부는 김성수를 배후 지원자로 보고 연행, 심문하였으나 혐의점이 없어서 투옥은 모면하였다. 옥고를 치르고 출감한 김선기 등이 김성수를 찾아갔더니 그 손을 잡으며 고생했다 하며 고문을 당하면 못할 말이 어디있겠나 하며 이극로의 안부를 걱정했다. 잡혀간 이극로는 가혹한 고문에 못이겨 사전 편찬 등은 독립운동의 일환이라고 거짓 자백을 했으며 의 책임자로 있던 김성수도 관련이 있는 것처럼 자백을 강요당하였다. 당시 경무국 보안과장이 술 한 잔 사겠다는 이유로 김성수를 술집 청향원으로 불러, "조선어사전 편찬은 독립운동의 방법이었다"는 이극로의 자백을 들려주며 추궁하였는데 김성수는 "조선어 사전 하나 편찬해 독립이 된다면 진작 편찬하지 왜 이제 하겠는가."라며 반박했고 일본 경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Seong-soo Chairman of Boseong Callege.jpg|섬네일|right|200px|보성전문학교 교장 시절 1944년 4월 조선총독부의 지시로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 로 강제로 격하당하였으나, 1945년 9월 광복을 맞아 보성전문학교로 교명을 환원하였다. 1944년 7월 22일 일본 총리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여 항복하고 총독부 총독 아베 노부유키가 치안권 이양을 송진우에게 제시하였으나, 송진우는 거부의사를 알려왔고 김성수도 이에 동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훗날 1957년에 前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으로 지냈던 엔도 류사쿠는 인터뷰에서 이 같은 주장은 사실무근 이라고 밝혔다. 국내 각지를 순찰하던 그는 경기도 전곡(全谷)의 농장을 거쳐서 경성부의 집으로 돌아왔다.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실력양성운동을 비롯한 민족운동은 총독부의 가혹한 민족말살정책으로 탄압을받아 합법적 공간 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1942년 전후로는 김성수는 완전히 친일파로 변절했다.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폐간되었다가 1937년 6월 복간된 동아일보에는 일본의 침략전쟁을 위한 지원병을 적극 권장하거나 미화하는 기사글이 여러 번 올라왔다. 5월부터 보성전문학교 교장으로 다시 취임해 있었던 김성수는 7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김성수는 전쟁의 의미를 선전하기 위해 마련된 경성방송국의 라디오 시국강좌 담당 및 연설을 하였고(7월 30일과 8월 2일 이틀 동안), 8월 경성군사후원연맹에 국방헌금 1000원을 헌납했다. 9월에는 총독부 학무국이 주최한 시국강연대 의 일원으로 춘천, 철원 등 강원도 일대에서 연사로서 시국강연에 나섰다., 1938년 6월에는 친일단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이사 및 산하의 비상시생활개선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다. 이밖에 국민총력조선연맹 발기인 및 이사(1940)·국민총력조선연맹 총무위원(1943), 흥아보국단(興亞報國團) 결성 준비위원(1941), 조선임전보국단 감사(1941) 등으로 활동하면서 1943년~1945년 기간 동안 매일신보와 경성일보, 잡지 《춘추》등에 학병제·징병제를 찬양하는 내용의 총 25편의 논설 글 및 사설을 기고했다. 이 과정에서 그가 1930년 12월 30일 조선총독부 총독 사이토 마코토에게 보낸 편지가 일부 공개되었다. 그러나 김성수의 성명으로 발표된 것이 자의에 의한 발표인지, 단순 명의 도용인지 여부는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았다. 후일 1946년 한국독립당 당원이었던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명단》 교육 부문에는 김성수의 명의로 된 칼럼으로 인해 선(先)항일, 후(後)친일 인사로 분류되어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군상》에 수록된 것은 물론,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행한 『친일인명사전』, 대한민국 정부기관 『친일진상반민족행위규명위원회 보고서』에도 친일파로서 수록되었다. 반면, 김성수는 이광수나 서정주와는 달리 총독부의 창씨개명(創氏改名) 요구에 대해서는 끝까지 거부했고, 일제로부터 훈장이나 작위를 받은 경력은 없다. 김승학의 《친일파 명단》에 김성수는 "警察(경찰)의 迫害(박해)를 면하고 身邊(신변)의 安全(안전) 또는 地位(지위), 事業(사업) 等(등)의 維持(유지)를 위하여 부득이 끌려 다닌 者"로 유억겸과 함께 분류되었다. 1937년 도산 안창호가 고문후유증과 지병으로 병원에 입원중일 때 안창호의 가족들이 그를 방문하여 도움을 청했을 때 김성수는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며 거절하였다가 뒤로 몰래 사람을 보내 거액의 자금을 도산 안창호에게 전달했다는 증언이 있다. 유진오는 그의 회고록 《양호기》에서 김성수의 이름으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실린 학도병 기사는 매일신보사 기자 김병규가 유진오와 상의한 뒤에 대필하여 승인을 받은 글이라 주장하였다. 1993년 7월 8일 한국의 국가보훈처는 "역대 독립유공서훈자 가운데 친일의 흠결이 있는 자는 가려내 서훈을 취소하겠다"고 발표하고 대상인물로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받은 김성수를 포함한 8명의 명단을 공개했다. 당시 보훈처의 이같은 방침에 대해 『동아일보』는 이틀 뒤인 7월 10일자에서 친일혐의 독립유공자 명단 근거 없이 작성 유출 제하의 기사를 통해 보훈처를 비판했다. 1945년 8월 16일 여운형, 안재홍 등으로부터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그러나 그는 송진우, 김준연 등과 상의한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 봉대를 이유로 건준 참여를 거절하였다. 1945년 9월 8일 조선인민공화국 (인공)의 내각이 발표되었는데, 박헌영 진영의 추천으로 김성수는 인공 내각의 인민위원 겸 문교부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김성수는 송진우와 함께 충칭 임시정부가 정통성이라는 임정봉대론 을 주장하며 건준과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을 모두 부정하였다. 김성수는 송진우, 백관수, 장덕수, 윤보선 등과 창당을 준비하였고, 8월 16일 창당된 원세훈, 김약수의 고려민주당을 통합하여 한국민주당을 창당, 조직하였다. 10월 이승만이 귀국하여 독립촉성중앙회를 세우자, 송진우 등과 함께 가입하였다. Seongsu1946.jpg|썸네일|오른쪽|150픽셀|한국민주당 간부 시절의 김성수 10월초 주한미군이 한반도에 상륙, 미 군정을 세우자 한민당에서 군정청에 사절단을 파견한 뒤, 김성수도 하지 사령관을 만나 면담하였다. 1945년 10월 28일 김창숙 등과 함께 순국의열사봉영회 기금관리위원에 위촉되었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귀국 제1진이 환국하자 송진우, 허정, 장택상, 조병옥, 김준연과 함께 경교장을 방문, 6시간을 기다린 후 그들을 만났다. 1945년 12월 3일. 임시정부요인 귀국기념 사진. 1945년 12월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임시정부 환영회 참석하였다. 12월 김구(金九)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김성수도 여기에 참가,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46년 미 군정청이 보성전문학교의 종합대학 승격을 인가하면서 고려대학교로 바뀌게 되었다. 1946년 보성전문학교가 고려대로 승격되면서 그는 이사장에 취임하고, 현상윤을 총장으로 임명하였다. 1946년 1월 16일 김구를 위원장으로 하는 반탁독립투쟁위원회가 결성되었을때, 조성환, 조소앙 등과 함께 반탁독립투쟁위 부위원장에 피선되었다. 그가 한민당을 맡게 됨에 따라 1946년 2월 19일 보성전문학교 교장직을 사퇴하고, 후임자로 현상윤을 내정하였다. 1946년 1월, 김성수는 김원봉을 찾아가 민주의원에 협력해줄 것을 설득하였으나, 김원봉에게 이는 좌우 분열을 일으키는 것 이라며 정중히 거절 당하고 되돌아왔다. 1946년 2월 14일 비상국민회의 산업경제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46년 2월 민주의원이 창립되자 그는 자발적으로 기금을 냈다. 46년 2월 반탁독립투쟁위원회를 구성하고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6월 15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 10인협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 협의원으로 지명되었다. 석조전. 이곳에서 미소공위가 개최되어 좌우합작위원회 회담이 열리곤 했었다. 한민당 내에서도 일부 찬탁 주장이 나왔으나 그는 반탁노선을 주장하였다. 1946년 1월 한반도 내 총선거를 위한 미소 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그는 한민당 내에서도 미소공위에 반대했고, 공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장덕수와 갈등하였다. 1946년 10월 미군정의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 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47년 1월에 반탁독립투쟁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47년 3월 12일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트루먼 독트린 을 발표하자, 한민당 위원장이었던 그는 트루먼에게 찬사를 표하는 무선 전보를 보냈다. 이후 김성수는 한민당과 미군정청의 제휴에 노력을 기울였다. 19470221.jpg|썸네일|왼쪽|180픽셀|1947년 2월 21일 AP도쿄 지국장을 만난 김성수와 윤치영 1946년 5월의 미소공위 회의장에서 열린 신탁통치 반대 운동 김성수가 개인 김성수로 그치지 않고 김성수 계열 이라고 하는 하나의 집단을 형성한 데는 김성수 개인의 독특한 개성이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그는 일본 유학길에 예전부터 잘 알고 지냈던 송진우를 동반했고, 이후에도 백관수, 장덕수 등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김성수는 주위의 유능한 젊은 지식인들에게 재정 지원을 해주었다. 결국 그는 이러한 힘을 바탕으로 하여 해방 이후 대표적인 우익 정당이었던 한국민주당을 창당할 수 있었다. 송진우와 백관수, 장덕수 등은 모두 한국민주당의 중요한 대들보가 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 참여를 놓고 한국민주당은 당론으로 찬성하여 반대하자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 중 장덕수와 허정은 미소공위 찬성론을 주장했고, 그는 미소공위 참가에 반대하였다. 미소공위 참여를 놓고 갈등하던 중 그는 미소공위에 대한 입장 표명을 유보한다. 1947년 1월 18일 김구, 조소앙, 이철승 등과 함께 매국노 소탕대회 및 탁치반대 투쟁사 발표대회에 참석하였다. 1월 18일 하오 2시 매국노 소탕대회 및 탁치반대 투쟁사 발표대회가 천도교 강당에서 각급학교 맹원 2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거행되었다. 김성수는 김구와 함께 이 대회에 격려사를 하였다. 1월 26일 경교장에서 열린 반탁독립투쟁회 결성에 참여하고 반탁투쟁회 부위원장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 1947년 9월 5일 이승만을 임시정부 주석, 김구를 부주석으로 추대하고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새로 보선할 때 김승학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추가 보선되었다. 김성수는 임시정부의 법통 아래 이승만·김구·김규식의 삼자 합작에 의한 독립정부의 실현을 정치목표로 설정했다. 이를 위해 "한민당과 한독당이 통합함으로써 민족 진영이 대동단결해야 한다." 는 것이 그의 정치적 신념이었다. 그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의 삼자회담을 주선하기도 하였다. 김성수는 자신이 이끄는 한민당과 김구의 한국독립당의 합당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승만을 고문으로 하며 김구를 위원장으로 하는 반탁독립투쟁위원회의 부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이로써 양당의 합당이 이루어지는 듯하였으나 끝내 입장차이로 결렬되었다. 장덕수 1947년 우익정당의 통합 논의에서 김성수는 한독당과의 통합을 찬성하였으나, 장덕수는 한독당과의 통합은 당을 임정 요인들에게 헌납하는 것이라며 반대하였다. 미소공위 참여에 대해서도 공위참가에 반대하던 김구와 찬성하던 장덕수사이에 고성이 오가기도 했다. 결국 1947년 12월 한국독립당 김석황계열에 의한 장덕수의 암살로 한국독립당과 한국민주당의 통합은 무산되고 말았다. 송진우가 암살되면서 당을 사실상 떠맡았고, 임시 당수로 원세훈을 천거했으나 반발이 있자 그는 당수직은 장덕수에게 맡겼다. 그러나 장덕수마저 암살되자 그는 한민당의 당수직까지 맡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당수직을 원치 않았고, 조소앙 등과 통합을 추진했다. 또한 김규식과도 교섭, 그에게 당수직을 제의했으나 김규식은 한민당 당수직을 거절했다. 1948년 3월 1일 남로당 중앙위원회로부터 "제국주의자의 앞잡이가 되어 조국의 분할 침략계획을 지지하고 나라를 팔아먹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김성수등의 정체를 폭로하고 인민으로부터 고립·매장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비판을 받았다. 한편 남북협상론이 대두되자 그는 타협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부정적인 시각을 피력하였다. 조소앙 등은 방북을 중단할 것을 설득하기도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48년 3월 5일 이승만이 단독정부 수립을 위해 소집한 민족지도자 33인의 한 사람으로 선발되었다. 4월,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이긴 하지만 한반도에 합법적이고 민주적인 정부가 들어서야 한다고 생각, 5월 10일 국회의원 총선거에 참여를 결정한다. 해방 직후 한민당의 당수인 송진우와 장덕수, 근로인민당수 여운형 등이 신탁통치의 불가피성을 주장하거나 신탁통치, 미소공위 개최에 찬성하다가 암살당했다. 공주군 갑부인 김갑순의 사위 윤명선은 강도의 침입으로 피습, 절명했다. 김규식과 안재홍 역시 테러와 암살 위협에 시달렸고, 박헌영과 김원봉은 전국 각지에 거처를 마련하고 거처를 옮겨다녔다. 혼란의 와중에도 일제 강점기때부터 가택에 사설 경호원을 고용해 두고 있었고, 미군정이 추가로 보낸 병사들의 경호를 받은 그는 안전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의 보고서 에 의하면 김구는 김성수의 암살을 기도 해왔다 한다. 그는 한민당과 한독당의 통합에 찬성 하였지만 김구측에 의한 김성수 암살 기도 가 미수로 끝났다. 미군정 하지 중장에게 김규식이 일방적으로 김구가 송진우도 암살하고 김성수도 암살하려고 했다고 다른 사람들이 영어 못하는 점을 악용해서 보고 했으나, 김구가 그랬는지는 확실하지는 않다. 이때 그는 김구나 한독당에 대한 언급을 회피했지만, 한민당측은 김성수 암살 기도의 실패 이후 임정을 노골적으로 증오하게 되었다. 장덕수가 암살된 뒤 1948년 한국민주당 수석 총무직을 잠시 지낸 것과 1951년 5월부터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부통령직을 맡았던 것을 제외하고는 결코 앞에 나서지 않았다. 김성수는 종교와 가깝게 밀착하지 않았다. 근대 이후 한국의 정치 세력들과 정치가들은 대부분 종교와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다. 즉, 김구와 김성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정치세력들은 개신교, 천주교, 유교, 불교 등 종교와 연관을 맺고 정치활동을 전개하였다. 해방 이후부터 새 정부가 수립되면 김구, 김규식 이외에 총리 내정자로 지목된 것은 그였다. 정부수립 직전까지만 해도 내외의 관측은 그가 국무총리 임명이 기정사실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7월 22일 이윤영을 총리서리로 내정했고, 이는 한민당의 반대로 부결되었다. 7월 29일 이승만은 이범석을 국무총리로 지명했다. 그가 총리에 지명되자 한민당의 당수였던 김성수는 이범석에게 만나자고 연락하였다. 김성수는 한민당 당원으로 민족청년단의 간부 훈련을 받은 조영규(曺泳珪)를 통해 방문 연락을 제의했고 평소에 김성수에 대한 존경심을 가졌다고 고백했던 그는 직접 방문을 약속했다. 김성수를 방문하기 직전, 김성수는 조영규를 통해 그의 총리 인준을 협력하겠다고 약속하였고, 7월 29일 저녁 만찬에서 김성수는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내각의 각료배석에 관련된 문제를 제기했다. 김성수 1950.png|썸네일|왼쪽|150px|인촌 김성수 (1950년 무렵) 김성수는 내각 책임제를 가장 이상적인 정치 제도로 생각했다. 조선시대의 유교적 가치관과 권위주의적인 사고관이 아직 당시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대통령이 절대권력을 행사하면 독재를 할 수 있다고 봤다. 조선시대를 살던 사람들이 그때가지도 생존하고 있었고, 대통령을 황제나 왕으로 생각하는 국민들도 존재했다. 그는 이 점을 들어 대통령 중심제는 아직 시기상조라고 판단했다. 그는 이승만을 찾아 내각 책임제를 수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정부 수립 초기, 이승만의 반대가 거세자 그는 혼란 수습을 위해 일단 자신의 이상을 뒤로 미루고, 한민당원들을 손수 설득하였다. 일단 한민당원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조치였지만 내각제가 이상적인 정치 체제라는 그의 신념은 바뀌지 않았다. a20ba4f3 c1-2.jpg|썸네일|140px|right|1950년 3월에 개정되어 공포된 농지개혁법안. 김성수는 자신과 한민당원 전 의원이 이범석의 총리인준에 동의하는 조건으로 각료 8석을 요구했다. 이범석은 당시 12개 부와 4개 처의 조직에서 장관 8석은 지나친 요구라고 했으나, 곧 김성수의 제의를 수용하였다. 이범석은 국방부장관 직을 겸하라는 제의를 받았으나 그는 이승만에게 한민당에서 지명한 인물을 천거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자신이 생각해둔 인사가 있다 하여 그의 부탁을 받은 이범석의 8명 중 3명만을 입각시켰다. 1948년 8월 국회와 농림부에서 농지개혁을 추진했다. 이때 농지개혁 조항인 헌법 제86조가 대규모의 농토를 갖고 있던 인촌의 주변사람들과 마찰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왜냐 하면 김성수와 그의 친인척들의 호남 지역에 소유한 농지가 무려 3,247 정보로 최대의 지주여서 농지개혁법 제86조에 난색을 표했기 때문이다. 헌법을 기초한 유진오는 그 초안을 김성수에게 보여주어야 했는데, 제86조의 농지개혁 조항이 문제였다. 고려대학교의 교수이던 유진오가 그를 찾아 농지 개혁이 공산당을 막는 길 이라고 설득하였다. 주변에서는 반발이 있었으나 김성수는 쾌히 유진오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시, 김성수는 이승만으로부터 재무장관 제의를 받았으나 모욕적이라고 생각한 인촌은 거절하였다.1948년 9월 출국하는 서재필을 면담하고 선물을 전달하였다. 뒤에 장택상이 거듭 찾아와 재무장관에 취임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김성수는 거절하였다. 그 뒤 김성수는 농지개혁법 시행법령 제정을 마냥 지연시켜 당시 농림부 장관이던 윤영선(尹永善)에게 이승만은 "춘경기가 촉박했음으로 추진상 적지않은 곤란이 유할 것이나 만난을 배제하고... (농지개혁법)을 단행하라"는 특별 유시를 하게 된다. 1949.JPG|섬네일|130px|left|민국당 창당 무렵의 김성수 (1949년) 김성수 초상화 1949년까지 그는 한국민주당을 이끌어 오다가 2월 10일 한민당이 신익희의 대한국민회와 통합하여 민주국민당(제2공화국 집권여당 민주당 (대한민국, 1955)의 전신)을 창당하고 민주국민당 최고위원에 취임하였다. 그는 민주국민당의 대표격이었다. 그해 8월 20일 김규식을 총수로 하는 민족진영강화위원회(약칭 민강위)가 조직되었다. 8월 20일 김성수는 민족진영강화위원회 상무위원에 선출되었다. 6월 26일 한국독립당 당수 김구가 암살되자 김구의 국민장에 참석하였다. 민족진영강화위원회에 참여하면서 그는 김규식에게 민주국민당을 맡아줄 것을 청하였으나 김규식은 이를 거절한다. 1950년 5월 그에게 대통령 후보에 출마하라는 권고가 있었으나, 그는 자신의 부덕함을 이유로 대통령 후보직을 사양하였다.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가족들을 피신시킨 뒤, 서울시내에 은신해 있다가 정부가 있는 대전으로 남하했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를 따라 대전에서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이동하였다. 부산피난지에서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몸수색을 당하였으나 한번도 불쾌한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다. 전쟁중이던 1952년 5월 제2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한국민주당에서 이시영이 대통령 후보로 출마할 때 러닝메이트가 되어 부통령 후보에 출마하였다. 9.28 국군의 서울 수복 이후에 친 자식처럼 보살피던 이인수를 잃고 고통스러워했다. 이인수는 영국 유학을 다녀와서 중앙학교에서부터 영어를 가르쳤고 고려대 교수로 유능한 교육자였는데, 6.25 한국전쟁 때 인민군이 밀려들어와서 강압적으로 반미 선전에 동원하여 마지못해 가담한 이력을 죄목으로 사형을 당하였다. 인촌은 이인수를 구명하려고 이승만을 찾아갔는데 얼른 재빨리 처형한 북한 앞잡이 신성모 국방 장관이 늦었다고 하여 항의를 하기도 했다. Seong-su and Syngman Rhee.jpg|섬네일|right|230px|부산 피난지에서 이승만과 함께 (1951년) 5.10 총선을 적극 동조했는데, 야당 지도자로서 국회의원 출마할 것을 권유 받았지만 민족이 지도자 조만식을 배려하여 이윤영을 위하여 여러번 출마를 사양하였다. 5월 17일 국회 1차 투표에서 김성수는 65표, 이갑성은 53표, 함태영은 17표로 과반수가 넘지 못하여 결선투표에 들어갔고 그 결과 김성수 78표, 이갑성 75표로 아슬아슬한 차이로 이갑성을 제치고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는 공화구락부가 민국당에 합세하여 민국당의 부통령후보였던 그를 밀어준 결과였다. 5월 17일 제2대 부통령(副統領)에 취임하였다. 김성수는 처음에 부통령직 제의를 받아 들이지 않았다. "이승만정부의 실정(失政)에 대한 희생양이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 그의 이유였다. 김성수는 그러나 동료들의 끈질긴 간청으로 부통령직을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성수는 부통령이 되자마자 이승만이 신성모를 주일본한국대사로 임명하는 것을 정실인사라며 반대하여 이승만과 충돌하였다. 한국 전쟁 당시 이승만이 수도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발언을 한 것도 정치도의를 어긴 것이라 여겼고, 이승만과의 사이에 점차 불협화음과 감정이 생겨나게 되었다. Seong-soo-South Korean Vicepresident 1951.jpg|썸네일|왼쪽|180px|부통령 재직 시절의 김성수 부통령 재임 중 김성수는 자신에게 폐하 라고 부르는 관료를 보고 충격을 받고, 고관이나 고위장성에게 흔하게 쓰이던 각하 의 칭호를 없앴다. 부통령 당선 후 대통령 이승만을 견제하다가, 인사문제 등으로 이승만과 갈등하던 중 1952년 6월 이승만은 재선 목적으로 헌법을 개정했다. 또한 이승만을 신적으로 미화하고 맹목적으로 추앙, 추종하는 자유당 부하들을 질타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이 다른 한 사람을 우상으로 숭배하는 행위를 혐오하였다. 자신을 과도하게 추켜세우는 한민당, 민국당원들에게도 자제하라고 경고를 주었다. 이승만의 재선 목적으로 헌법이 개정되면서 부산 정치파동 사건이 터지자, 김성수는 이 사건에 대해 민주주의를 유린한 행동 이라면서 강하게 반발하였고 부통령 퇴임을 앞두고 있던 시기였던 5월 29일, 이승만을 규탄하는 장문의 사퇴서를 발표한 뒤 중도 사임하였다. 이후 부산의 국제구락부에서 열리기로한 반독재민주구국 선언대회에 참석하여 그는 민주주의 수호만이 대한민국을 지키는 길 이라는 내용을 준비하여 연설을 하려 하였으나, 이정재를 비롯한 정치폭력배들이 회의장에 난입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제출한 사표는 7월 6일에 수리되었다. 6월 20일 정부측에서 발표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이 부결되자 정부는 국회 해산과, 반(反) 민의(民意) 국회의원들을 소환하겠다고 위협했다. 국회가 내각제 개헌안으로 맞서자 정부는 백골단, 땃벌떼 등을 동원하여 국회의원들을 위협했다. 이에 이시영은 장면, 김성수 등 81명과 함께 부산의 국제구락부에 모여 반독재 구국선언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1952년 8월 이승만은 발췌 개헌안이 통과되자 대통령은 직선제로 선출했다. 이때 조봉암이 나서자 민국당은 서둘러 이시영을 옹립했다. 김성수는 김창숙·이동하·신익희·장면 등 8명이 8월초 이시영을 추대하자는 성명을 낼 때 참여하였다. 1953년초 중풍에 걸려 자리에 누웠고, 병원에 다니며 통원치료를 하였다. 1954년 11월 1일 친구인 최두선의 회갑연에 아내의 부축을 받고 방문하였다. 1954년부터 통합야당인 민주당의 창당을 주도하였으나 완성을 못보고 병으로 사망하게 된다. 만년의 김성수는 중풍과 심근염 등으로 고생하였다. 중풍과 여러 질병으로 김성수는 신당 창당 활동에서 한발 물러서 있게 되었다.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김성수는 병상에서 혁신계의 조봉암을 신당 운동에 참가시키는 민주세력의 대동 단결을 호소하였다. 1954년 11월 30일 자유당의 장기집권에 맞서기로 한 무소속 국회의원들과 함께 60명과 기타 자유당 탈당파 장면 등이 호헌동지회를 구성할때 김성수도 호헌동지회에 참여하였다. 1955년 1월 21일 호헌동지회 총회가 열릴 때 조봉암의 참여를 놓고 호동은 민주대동파(대동단결파)와 자유민주파로 나뉘었다. 이때 김성수는 자유민주파에 영향력을 주고 있었다. 중앙고등학교에 김성수 동상. 김성수는 조봉암에게 사람을 보내 공산당이 아니라는 성명서를 내줄 것을 부탁하였다. 대한민국의 장관과 국회부의장을 지낸 조봉암은 굴욕감을 느꼈지만 순순히 받아들여 "인촌이 그리 하기를 원한다면 내가 그리하겠다." 하고 자신은 공산당이 아니다 라는 성명서를 언론에 발표했다. 호헌동지회에 참여하려던 조봉암은 김성수를 찾아가 자신이 전향했음을 거듭 확인시키기도 하였다. 조봉암과의 면담에서 그가 공산주의는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상이라는 것을 역설하는 것을 듣고 그는 조봉암 영입 결심을 굳혔다. 호헌동지회가 조봉암의 참여를 놓고 찬성하는 서상일, 박기출, 장택상과 반대하는 장면, 김준연, 김도연, 조병옥 등으로 나뉘었을 때 신익희는 한발 물러서 있었다. 논쟁이 벌어졌으나 김성수는 조봉암의 참여를 공개적으로 적극 찬성하였다. 후일 윤제술은 김준연과 조병옥이 조봉암을 받아들이는 것을 극렬하게 반대하자, 신도성은 김준연이 조봉암을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것을 격렬히 비난했고, 조병옥이나 신익희는 어물어물 할 다름이라고 증언했다. 이 문제에서 신익희는 회피하였다. 김성수는 "민주대동이라고 했으면 그대로 해야지, 왜 딴소리들을 하느냐. 해공의 책임회피가 문제야."라며 양쪽 모두 공박하였다. 김성수는 민주국민당이 조봉암의 신당 참여문제로 알력이 심하였을 때, 민주대동의 입장에서 조봉암과 합작할 것을 보수파에 권고하였다. 보수파들은 김성수의 정치적 영향력에 마지못해 조봉암이 반공주의노선을 견지하겠다는 것을 공적으로 약속한다면 좋다는 태도로 나와, 김성수는 조봉암에게 태도를 명확히 표명해줄 것을 권고하였다. 조봉암은 새로운 성명서를 작성해서 2월 22일 발표하였으나 김성수는 조봉암의 새로운 성명서는 보지 못하고 말았다. 병중에도 그는 야당인사들의 단결과 단합을 주문하였다. 김성수의 데드마스크 그는 신경쇠약증, 만성기관지염, 근류머티스 등으로 고생하다가 환갑을 맞은 해에는 뇌혈전으로 병상에 쓰러지기도 했다. 1955년 1월 다시 뇌일혈로 고생하던 중, 2월초 병세에 호전을 보이던 그는 보행연습을 하다가 갑자기 위출혈을 일으켰다. 위궤양에 의한 출혈이었다. 치료 끝에 수그러드는 듯 했으나 2월 15일 밤 11시경 두 번째로 크게 위출혈을 일으켰다. 혈관 질환도 악화되었고, 간장 역시 나빠졌다. 서울대학교 병원으로 응급 이송되었다. 김성수 임종.jpg|섬네일|left|200px|김성수 임종 장면 (1955년 2월 18일) 수일간 혼수상태에 있던 그는 2월 18일 오전 11시경에 깨어났다. 그의 위독소식을 듣고 장면이 찾아왔다. 혼수상태에서 의사의 지시로 아무도 그를 만나지 못했다. 장면은 이아주를 통해 천주교에 입신하도록 권고하였다. 오전 11시경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그는 이아주로부터 장면의 권유를 전해듣고 수긍하였다. 부인의 연락을 받은 장면은 12시경 가회동 성당의 박병윤(朴炳閏) 신부와 함께 계동으로 찾아갔다. 김성수는 신부에게서 조상봉사를 해도 좋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영세를 받았다. 세례명은 바오로 라 하였다 김성수 국민장.JPG|섬네일|오른쪽|1955년 2월 24일 서울운동장에서 치러진 국민장 허정은 김성수의 죽음을 아쉬워하였다. "조국이 그를 가장 필요하게 여길 때, 꼭 있어야 할 인물인 그가 이 나라를버렸다는 것은 일종의 원망과 질책이 어린 슬픔이요 아쉬움이었다. 65세라는 원숙한 나이를 생각할 때 그가 좀더 오래 살았다면 얼마나 훌륭한 일을 더욱 많이 이룩했을 것인가"라며 탄식했다. 1955년 2월 18일 오후 5시 25분 서울특별시 계동 133번지 자택에서 심근염(心筋炎) 등이 악화되어 합병증으로 사망하였다. 이때 김성수의 나이 만 65세였다. 곧 범 국민장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장례위원으로 함태영, 신익희, 변영태, 변영로, 변영만, 조병옥, 장면, 최두선 등이 구성되었다. 2월 24일 서울운동장에서 국민장(國民葬)(장의위원장 함태영)으로 치러졌다. 인촌 김성수 국민장 장례식장 kim.JPG|섬네일|오른쪽|240px|동아일보 사옥 내부에 전시되어 있는 인촌 김성수 동상. 국민장은 노제를 거쳐 서울운동장에서 치러진 뒤 고려대학교 경내 본관 뒷편 공원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소는 초기에 고려대학교 경내에 안장되었다가 뒤에 경기도 남양주시로 이장되었다. 1962년에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고려대학교와 중앙고등학교 본관 앞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사후, 19세기에 할아버지 김요협이 지었던 그의 생가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39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가 출범을 고대하던 민주당은 조봉암을 제외한 채 출범했고 이후의 민주당계 정당의 모태가 되었다. 김성수 사후 바로 인촌김성수기념사업회가 출범했고, 1965년 재단법인 인촌기념회로 재창립되었다. 1965년 그를 추모하는 인촌기념상이 수립되었고, 1973년에는 각계 문화인사들을 대상으로 한 인촌문화상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교내 민족 해방 계열 학생들에 의해 친일 자본가로 매도당하면서 고려대학교 경내에 안장되었던 그의 묘소와 고려대 경내에 세워진 그의 동상은 수난을 당하기도 한다. 1991년 6월 29일 각계 인사 840여 명이 모여 인촌선생 탄신 1백주년 기념 사업추진위원회 를 발족시켰다. 10월 18일 고려대학교 교내에 인촌기념관(仁村紀念館)이 건립되었다. 1991년 11월 11일 남서울대공원에 국민성금으로 동상이 건립ㆍ제막되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에 학도병 참가를 권유하는 기고문을 실었다 하여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 국회의원과 시민단체 등이 친일파 708명의 명단을 발표했던 2002년 3월 신원미상의 한 사람이 인촌 동상에 빨간 페인트로 김성수는 친일파 라고 써놓는 사건이 발생했다. 2005년 고려대학교의 총학생회와 고려대학교 민주동호회 등으로 구성된 고려대 일제잔재청산위원회가 발표한 고려대 100년 속의 일제잔재 1차 인물 10인 명단에도 들어 있다. 그러나 명의 도용이라는 유진오 등의 증언과 반론이 있어 논쟁의 여지가 있다. 2008년 8월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 하반기호(43호)에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특집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 을 선발, 건국의 기초를 다진 32명을 선정할 때 정치 부문의 한사람으로 선정되었다. 이후 친일인명사전은 발간되었고, 2009년 11월 27일 인촌기념회에서는 항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1914년 귀국 직후 고향과 경성을 오가며 송진우, 백관수, 장덕수, 최두선, 안재홍 등과 교류하며 정치담론을 토론하였다. 1917년 3월 30일~1918년 3월 중앙중학교 교장 1924년 양어머니 전주 이씨 사망 1926년 러시아 혁명 10주년 기념 논문 필화사건으로 서무부장 김철중(金鐵中)과 함께 총독부 경무국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출옥하였다. 1926년 6월 6.10 만세운동 직후 송진우와 함께 황제의 유서를 위조하려다가 실패했다. 1928년 3월 경성방직주식회사 사장직 사퇴 1929년 3월 경성방직주식회사 고문 1929년 일본 교토에서 열린 제3차 범태평양회의에 윤치호, 유억겸, 김활란과 함께 참여하였다. 1929년 39세에 늑막염으로 한동안 입원하기도 했다. 1930년 만보산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모략이라 생각, 중국 영사관에 5천원의 위문금을 보냈다. 광복 후 중화민국 총통 장개석으로부터 감사의 표시로 친인선린 (親仁善隣)이라는 글자가 각자된 은패(銀牌)를 선물로 받았다. 1930년 4월 동아일보 창간 10주년 기념호에, 네숀의 주필이 보내온 축사를 게재하였다가 총독부에서 이것을 트집잡아 5월부터 9월까지 동아일보를 정간시켰다. 1930년 ~ 1931년 출국, 세계 일주를 다녀왔다. 1931년 9월 1일 중앙고등보통학교장( ~ 1932년 5월 9일) 1932년 3월 26일 보성전문학교를 인수, 동학교 주무이사에 취임. 1932년 6월 4일 제10대 보성전문학교장( ~ 1935년 5월) 1932년 7월 대전 감옥에 수감된 여운형을 석방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1933년 도산 안창호가 형무소에서 출옥하여 면담하였다. 그러나 안창호는 고문 후유증으로 병원에 입원하였고, 김성수는 그 치료비를 부담하였다. 1934년 평양 숭실전문학교 학생들의 신사불참배사건을 옹호하였다가 총독부 경찰에 소환되었다. 1935년 3월 15일 조선기념도서출판관 초대 관장에 취임 1936년 8월 동아일보의 기자가 손기정 일장기 말소 게재, 김성수는 두 번째 일장기 말소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었고 이로 인해 동아일보는 무기 정간처분을 받았다. 송진우, 장덕수 등이 총독부 기자실을 찾아가 항의하였으나 정간처분을 취소시키지는 못하였다. 1936년 일제의 압력으로 동아일보 이사직에서 사임. 1937년 5월 26일 제12대 보성전문학교장(~1946년) 1937년 이화여전 재단 이사(뒤의 재단법인 이화학원 이사)에 취임 1938년 안창호가 작고하자 추모비를 세우는 데 참여하였다. 1939년 9월 경성방직주식회사 고문직 사퇴 1942년 창씨개명 요구가 들어왔으나 거절하였다. 태평양 전쟁 권고 협조가 들어왔으나 그는 병으로 거절하고 피신해 다녔다. 1950년 7월 한국 전쟁으로 부산으로 피난가다. 1952년 이화여전 이사에서 사퇴 일제 강점기부터 그를 알고 지냈으며, 해방 후 대통령 권한대행과 국무총리를 지낸 허정(許政)은 인촌은 이해로써 사람들을 조종하거나 감언이설로 현혹시키는 사람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는 단지 굽힘 없이 주장하면서 이 정도로 실현할 방안을 제시하는 떳떳한 태도로 일관했다. 누구나 그의 사심없는 마음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의 설득에는 남과는 다른 힘이 있었다. 덕망이 뒷받침하는 설득은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설득인 것이다. 라고 평가했다. 그는 인간적으로도 매력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매우 담백하고 때로는 천진난만하기조차 해서 그를 대하노라면 저절로 마음이 놓이고 믿음이 앞섰다. 그러므로 마음을 활짝 열고 그와 의논을 하고 함께 일을 해 나갈수 있었다. 고 평하였다. 허정은 인촌에게는 개인적인 야심이 없었다. 그에게 명예나 권세를 추구할 야심만 있었다면, 그는 해방 후 자신의 야심을 손쉽게 달성할 많은 기회를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명예나 권세에는 조금도 뜻이 없었다. 어떤 곤경이나 위기를 맞아, 자칫하면 자신의 명성에 흠이 가지 않을까 해서 다른 사람들이 피하려고 하는 자리를, 맡아 위기를 수습하고는 조용히 뒤로 물러나곤 했다. 는 것이다. 1916년 당시 중앙고등보통학교의 학생이자 대한민국의 한글학자였던 일석 이희승은 자상하면서도 근엄하였다. 고 평가하였다. 또한 틈틈이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워주는 말씀을 들려주던 모습은 잊혀지지 않는다. 고 하였다. 소설가 춘원 이광수는 1931년에 쓴 김성수의 인물평전인 에서 그의 성공을 시세(時勢) 2 + 재력 3 + 인격 5 라고 평가하였다. 15대 대통령 김대중(金大中)은 그에 대해 비록 감옥에 가고 독립투쟁은 하지 않았지만 어떠한 독립투쟁 못지않게 우리 민족에 공헌을 하였으며 중앙고와 고려대를 운영해서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여 일제 강점기를 극복하고 이 나라를 이끌 고급 인력을 배출, 우리 민족의 내실 역량을 키웠고, 근대적 산업규모의 경성방직을 만들어서 우리 민족도 능히 근대적 사업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김대중은 그가 민족의 앞날을 이끈 탁월한 스승이자 지도자였다고도 평가하였다. 추기경 김수환은 1991년 10월 11일 인촌 탄생 100주년 추념사 에서 "인촌 선생은 한 시대를 이끌어 온 각계의 훌륭한 일꾼을 수없이 길러낸 ‘민족사의 산실’과 같은 존재"라고 하였고, 함께 민주당 창당활동을 하였던 조병옥은 1958년 출간한 자신의 회고록에서 그를 "일제 암흑정치하에서도 민족의 실력 배양을 위해 교육기관 언론기관 산업기관 등을 창설해 우리 사회에 지대한 공헌을 한 민족의 위대한 선각자"였다고 평가하였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로 시작해 조선인민공화국으로 이어져 가던 한반도 해방정국의 좌익적 급류를 대한민국의 건국이라는 방향으로 우선회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정치지도자들 중 비정치적 인 정치지도자 라는 평가도 있다. 중앙중·고등학교에서 7년간 근무한 김형석은 그와 함께 지내게 된 것을 평생의 추억으로 기억하고 있다. 김성수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깨우침을 얻을 수 있었다. 그의 애국심과 대인관계의 지혜로움을 본받고 싶다 고 회상하였다. 김성수의 친일 의혹에 대해 김형석은 과거사 재조명을 하면서 김성수를 친일분자로 몰고 가는 것을 보면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된다며 일제 강점기에 인촌 같은 이가 없었다면 과연 우리가 자주독립의 기반을 닦을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갖는다. 그 시대를 살아보지 못한 사람들이 흑백논리적 잣대로 역사인물을 평가하는 것은 어색한 일 이라 하였다.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 서중석은 그의 저서 조봉암과 1950년대(상)(역비한국학연구총서 15) 에서 김성수가 민주당 창당 전까지 살아 있었더라면 범야신당이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박태균은 김성수 자신이 앞에 나서려 하지 않던 점을 들어 "후계자를 양성하지 못하고 주도권 장악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한국현대 정치인들에게는 귀감"이 된다고 평가하였다. 김규식의 비서였던 송남헌은 후일 토론에서 그가 호헌동지회에 조봉암을 영입하려 한 것은 연구대상이라 하였다. 그는 한민당의 창당 주역의 한사람이었던 점을 든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인품에 감화를 받아 일부 재력가들과 유지들은 교육사업과 방직회사 설립에 뛰어들기도 했다. 전 국회의원 김성곤은 평소 인촌 김성수 선생님 을 가장 존경하였다고 하며, 그의 인품에 감화받아 김성수의 인격·사상 ·사업을 자신속에 구현하고자 하였다. 김성곤은 인촌을 본받아 자신도 금성방직, 쌍용양회를 설립하고, 국민대학교를 지원하였고, 고향의 현풍학원을 인수 운영하였으며, 고려대학교 지원에 적극적이었다 한다. 1920년대 초중반에 물산장려운동을 비롯한 실력양성운동이 지지부진하자, 자치운동쪽으로 기울어져 민족개량주의 노선을 걸었다는 것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있다. 중국에 사는 조선족들은 김성수, 김연수 형제가 만주에 설립한 남만방직주식회사에서 노동자들을 가혹하게 노동착취했다고 비판한다. 이들의 말에 의하면 "그때 사람들은 김성수의 돈 뭉치를 서울에서 만주 봉천까지 깔아도 못 다 깐다고 했다"며 생동한 비유를 했다. 이어서 이들은 이 공장의 생산품들은 모조리 일본군으로 납품했는데, 전쟁이 발발한 이후 노임을 주는 노동자들 보다 학생들을 상대로 의무노동을 강요했다고 비판한다. 1993년부터 그의 건국공로훈장을 치탈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이후 적극적 친일이냐, 소극적 친일이냐, 생존을 위한 호신책이냐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논란 끝에 1996년 국가보훈처는 가짜나 친일혐의가 있는 독립유공자 5명의 서훈취소에 김성수는 제외되었다 이를 두고 당시 일부 시민단체는 보훈처가 동아 눈치를 본 결과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민족문제연구소 등에서는 "친일혐의가 분명한 인촌에게 주어진 건국훈장을 치탈해야한다"며 국가보훈처를 비판하기도 했다. 1962년 3월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 → 2018년 박탈 《인촌문집》 (열락당, 1999) 김성수는 독립을 위한 방법으로 실력 양성을 부르짖었다. 안창호(安昌浩)의 감화를 받은 그는 실력 양성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으로 그는 교육, 물산 장려, 언론 육성을 제시하였다. 교육을 통하여 문물을 배우고 기술을 익혀 일본이나 주변국보다 뛰어난 우수한 두뇌를 길러내 학자와 기술자를 육성하는 것이었다. 교육 육성을 위해 그는 자신의 사재를 털어 중앙중학교와 보성전문학교 등을 인수하였고, 사립 전문학교 설립을 여러 번 추진하기도 했다. 또한 학비 조달이 어려운 학생들의 학비를 스스로 지원해주기도 하였다. 일찍부터 동경유학을 결심했던 까닭은 스스로 먼저 신학문을 배우고 그것에 기초해 선진사상과 선진기술을 동포에 전수시킴으로써 민족의 실력을 배양시키는 것이 조국의 자주독립에 도움이 되리라는 인식에 도달했던데 있다. 이점에서 그는 자강론자들의 애국계몽주의적 실력배양론의 입장에 서 있었다 는 평가도 있다. 물산 장려를 통해 국내에서 생산되는 제품들의 원료와 자재를 국내에서 자체적으로 조달하여 생산하고, 국내에서 생산되는 제품을 장려하여 국가의 산업자본과 경제력을 육성하자는 것이었다. 그 결과 일본에서 면과 마의 원료를 수입하는 것을 보고 국내에서 면직물과 마직물을 생산하는 회사 설립을 추진하여 경성직뉴를 인수한 뒤, 경성방직회사로 규모를 키우게 되었다. 또한 물산장려운동에도 적극 가담하여 국산품을 애용하는 운동에 동참하기도 했다.올바른 언론의 육성을 통해 정보의 전달과 민족의 입장을 대변할 통로를 열자는 것이었다. 임종 직전에 장면의 권고로 천주교에 귀의하기 전까지 그는 별다른 종교적인 면모는 보이지 않았다. 유년기에 할아버지 김요협의 가르침과 선조들의 가훈을 이어 유교 성리학적 대의명분을 중시하였으나 유학 이후 성리학과는 거리를 두었으며, 일시적으로 전도 권고로 기독교 교회에 출석하기도 했으나 신앙과는 거리가 있었다. 임종 직전 로마 가톨릭교회(천주교)의 세례와 병자성사를 받았다.(세례명 바오로) 그는 제2대 부통령 재임 중 각하 라는 호칭을 삭제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그가 부통령직에서 물러나면서 각하 라는 호칭은 다시 부활했고, 1960년 제2공화국 때 일시적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각하 라는 경칭은 5.16 군사 정변 이후 다시 부활, 1987년 당시 대통령후보자 노태우가 6.29 선언을 통해 공약, 당선이후 공식, 비공식 석상에서 각하라는 호칭을 삭제하도록 지시할 때까지 항상 각하 라는 경칭이 계속 통용되었다. 그는 억지로 꾸밈이 없었고, 부유함을 내세워 화려하게 꾸미려 하지 않았다. 겉을 보기 보다는 그 사람의 내면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였다. 화려한 것 보다는 내실이 있는 것을 좋아하였다. 물건을 하나 고르더라도 외양이 화려한 것보다는 실속이 있는 것을 선호하였다. 허정은 후일 회고담에서 "그의 첫 인상은 매우 솔직하고 소박하다" 고 평하였다. 공선사후 (公先私後) 또는 선공후사 (先公後私)를 주장하였다. 개인 사적인 것보다 공적인 것을 우선적으로 여기게 하였다. 또한 신의일관 (信義一貫)도 그의 좌우명이었다. 또한 쓸 곳에 쓴다 , 돈은 잃어도 사람을 잃으면 안 된다 는 좌우명도 있었다.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라 한다. 또한 그는 꾸밈없고 솔직한 성격으로 억지로 겉치레를 하는 것을 상당히 싫어하였다. 자신을 자랑하거나 드러내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송진우, 장덕수가 연이어 암살당하면서 정계에 직접 나서게 되었다. 사람을 대할 때 조건을 제시하거나 차별하지 않았고, 한번 신뢰한 사람은 끝까지 신뢰하였다. 허정은 그가 개인적인 이익을 위하여 다른사람의 뒤통수는 치지 않았다 고 진술하였다. 호남 만석꾼의 장손으로 태어났음에도 검소하였고 사치하지 않았으며 자신에게 엄격하였다. 그는 무슨 일에서나 항상 뒤에서 돕기를 좋아했다. 허정은 이것은 철저한 자기 희생의 정신과 이타심(利他心)이 없으면 범인으로서는 흉내조차 내기도 어려운 인촌의 미덕이었다.„고 주장했다.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꺼리고 주저하는 성격이었지만, 그는 뒤에 숨어서 얄팍한 술수를 써서 다른 사람을 조종하지는 않았다 한다. 허정에 의하면 "인촌은 이해로서 사람들을 조종하거나 감언이설로 현혹시키는 사람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는 단지 정도를 굽힘 없이 주장하면서 이 정도를 실현할 방안을 제시하는 떳떳한 태도로 일관했다. 누구나 그의 사심없는 마음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의 설득에는 남과는 다른 힘이 있었다."고 평하였다. 성격은 솔직한 편이었다. 허정은 "그는 인간적으로도 매력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담백하고 때로는 천진난만하기조차 해서 그를 대하노라면 저절로 마음이 놓이고 믿음이 앞섰다. 그러므로 마음을 활짝 열고 그와 의논을 하고 함께 일을 해 나갈수 있었다."고 했다. 술이 건해지면 천진난만한 주사도 심했던 인촌 김성수 라고 회고하였다. 그는 사심이 없었는데, 허정은 이 점을 높이 평가했다. 인촌에게는 개인적 야심이 없었다. 그에게 명예나 권세를 추구할 야심만 있었다면, 그는 해방 후 자신의 야심을 손쉽게 달성할 많은 기회를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명예나 권세에는 조금도 뜻이 없었다. 어떤 곤경이나 위기를 맞아, 자칫하면 자신의 명성에 흠이 가지 않을까 해서 다른 사람들이 피하려고 하는 자리를 맡아 위기를 수습하고는 조용히 뒤로 물러나곤 했다. 그에게는 실제로 양부에게서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이 있었으나, 그는 이를 독립운동과 보성전문학교, 중앙학교, 동아일보 등에 대부분 투자했다. 이중재(李重載)의 회고에 의하면 보전에 들어가려고 친구 들과 원서를 받으러 갔더니 허름한 영감이 정원을 가꾸고 있었다. 원서를 가지고 나오다 보니 잔디밭이 좋길래 들어가 앉아서 노닥거렸다. 그랬더니 그 영감이 와서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 있다고 해서 나왔다. 그 후 보전 입학식에서 훈시하는 교장선생님을 보니 바로 그 영감님이었다 한다. 한만년(韓萬年)의 회고에 의하면 선친(한기악)께서 중앙학교를 나오셨다. 내가 보통학교 3학년 봄에 우리는 중앙학교 교내로 이사를 가 살게 되었다. 저녁 때가 되면 한복을 입은 허술한 아저씨가 나와 운동장도 쓸고 잔디도 깎고 했다. 학교 수위 같았다. 그 해 여름이었는데 이사간 지도 얼마 안 되고 어린 데다가 친구도 없어서 저녁을 먹고 학교 구내에서 놀다가 김기중 선생 동상 밑에서 잠이 들었다. 그때 누가 와서 깨웠는데 그 분은 바로 잔디 깎는 수위였다. 나는 어린 마음에도 죄송하단 생각이 들었는데 그 어른은 꾸중을 안 하시고 찬 데다 뺨을 대고 자면 입이 비뚤어지는 법이다. 이런데서 자지 말고 집에 가서 자라고 타이르셨다. 그래서 어찌나 황송하고 미안했던지 지금도 그 일이 잊혀지지 않고 있다. 그 수위가 다름 아닌 仁村 선생이었다. 한다. 사진이 10년동안 그대로 사용하였다. 새로운 사진을 왜 장만하지 않느냐는 주변의 질문에 만날 그 모습이 그 모습인데 새로이 할 필요가 굳이 없지 않는가, 혹은 그런데 돈을 들이려거든 그보다 더 긴요한데 쓰는게 좋다고 대답하였다. 부통령 재임 시 각하 라는 호칭을 폐지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허정에 의하면 술이 거나해지면 천진난만한 주사도 심했다고 한다. 한편 허정은 그의 인물평을 하면서도 스스로 나는 그를 평가할 자리에 있지 않다. 그에 대한 평가는 역사가 맡아야할 것이다. 라고 하기도 했다. 허정에 의하면 그 평가가 어떻든 내 마음속에 남아 있는 탁월한 인물 인촌에 대한 추모의 정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라는 것이다.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재직 중에도 그는 이희승, 한만년, 허정, 윤치영, 윤일선, 김원봉, 이현상 등 다양한 학생들과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학생들을 대함에 있어서도 검소하고 겸손한 태도로 대하여 학생들의 반발을 사지 않았다. 광복 이후 그는 1940년대 후반에 촬영한 사진을 줄곧 사용, 10년여 동안 같은 사진 한장으로 사용하였다. 지인이 그에게 그때그때 사진 한장쯤 왜 장만하지 않느냐 며 묻자 그는 일 그얼굴이 그얼굴일진대 새로이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 며 응대하였다. 조선 총독도 함부로 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고이소 구니아키 총독은 당시 보성전문학교 이철승의 징병 거부 면담을 하면서 이철승의 스승을 물어보며 "김성수 군은 물샐틈 없는 인물이지.." 하며 그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구는 우익 정당 통합 노력을 추진했고, 김성수는 김성수 대로 조소앙에게 우익 정당의 통합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조소앙은 범 우익 정당의 단결에는 원칙적으로 동조하였으나, 통합의 방법을 놓고 김성수와 대립하게 되었다. 1947년 12월의 장덕수 암살 사건으로 범우익 정당 통합 노력은 깨지고 말았다. 김성수는 송진우의 피살로 인해 부득이 한민당을 맡았으나, 정당의 당수를 안 하고 임정 요인들과 합쳐서 당의 기반을 공고히 하려는 구상을 세웠다. 당시 우익 학생운동가였던 이철승(李哲承)은 김성수와 조소앙의 사이의 연결을 주선했다. 뒷날 이철승은 제일 존경했던 조소앙 선생하고 또 한민당의 인촌 선생과 합작이 이뤄지길 기대하면서 학생의 신분이었지만, 두 분을 만나게 하는 역할을 했던 겁니다. 라고 회고했다. 그러나 남북협상 뒤에도 일부 한민당원의 꾸준한 반대에도 김성수는 조소앙을 끌어들여야 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김성수는 조소앙이 남북협상의 실패를 인정하고 공산당의 프락치를 축출한 뒤에도 조소앙에게 여러 번 통합 제의를 했다. 계동의 김성수의 집에서는 채식주의자였던 그의 입맛에 맞도록 인촌의 부인 이아주가 손수 음식을 장만하면서까지 두 차례나 만나게 되었는데, 이철승의 표현에 의하면 애석하게도 인촌 선생의 한민당과 조소앙 선생의 사회당과의 합당은 성사되지 못했 다고 회고하였다. 김성수와 조소앙 간의 회함에서 당의 명칭과 중앙위원들의 숫자는 합의됐지만, 토지 개혁정책 때문에 결국 그 합당문제가 실패하고 말았 다. 송진우, 장덕수 등의 암살 배후로 지목되었던 김구는 김성수 암살 미수의 배후로도 지목되었다. 미 군정의 보고서 에 의하면 김구는 김성수의 암살을 기도 해왔다 한다. 그는 한민당과 한독당의 통합에 찬성하였지만 김구측에 의한 김성수 암살 기도 가 미수로 끝나면서 한민당측은 임정을 노골적으로 증오하게 되었다. 김성수는 불쾌감을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내심 분개했고, 김구에 대한 한민당과 그 후신들의 시선 역시 곱지 않게 되었다. 1989년 3월 부정입학과 학내 등록금 인상 문제로 본관을 점거한 1천명의 고대생들이 인촌 김성수 동상을 검은 천으로 싸서 나일론 끈으로 묶은 채 며칠째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곧 재단측의 퇴학 조치 압력으로 무산되었다. 1989년 4월 고려대학교 경내에 세워진 김성수 동상에 민족 해방 계열 학생들이 올라가 하얗고 굵은 광목 끈으로 칭칭 동여맸고, 100여 명의 학생들이 동상에 매단 줄을 잡아당겼다. 1980년대 이후 학생운동계에서 김성수의 친일행적 의혹이 제기되었고, 교내 운동권을 탄압하는 재단과의 물리적인 갈등의 성격이 있었다. 이전에도 김성수의 동상은 친일파라 하여 민족고대에 있으면 안 된다며 학생들이 쓰러뜨리려 시도했으나 재단과 일제 강점기에 졸업한 선배들의 제지로 실패하였다. 그 때마다 재단측이 창립자의 동상을 훼손하면 엄벌에 처하겠다고 하여 시도하였으나 미수에 그쳤다. 1989년 4월 수백 명의 학생들이 교사 내외에서 현장을 목격하고 있었고, 100여 명의 학생들이 김성수의 동상을 끌어내리려 하였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졸업한 졸업생이 나타나 김성수를 변호했고, 일부 학생들은 그들의 견해에 동조하여 동상을 끌어내리려는 학생들과 논쟁이 벌어지면서 동상 수난 사태는 유야무야 종결되었다. 2002년 3월 신원미상의 한 사람이 인촌 동상에 빨간 페인트로 김성수는 친일파 라고 써놓는 사건이 발생했으며, 이 해에 고대 사상 처음으로 가 꾸려지기도 했다. 2005년 3월 9일에는 한승조 사태와 관련된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에서 한승조 교수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김성수의 동상에 대한 것이 언급되었다. 유병문 총학생회장은 "대표적 친일파인 인촌 김성수 동상이 학교 정문 앞에 여전히 서 있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라며 "건립 1백주년을 맞은 올해 제대로 고대의 친일 문제를 정리하고 가야 한다"고 밝혔다. 할아버지 김요협 (金堯莢, 호는 낙재, 1833년 ~ 1909년, 조선 고종때 선공감 감역 역임) 할머니 증 정부인 연일정씨(延日鄭氏, 1831년 ~ 1911년) * 생부 김경중(1863년 ~ 1945년 4월 27일) - 통정대부 비서원승 역임 외할아버지 고제방(高濟邦) * 생모 장흥 고씨 * 양부 김기중(金祺中, 1859년 ~ 1933년) - 가선대부 동복군수 역임 * 양모 전주 이씨(全州李氏) ** 형 요절 ** 형 요절 ** 형 요절 ** 남동생 김연수(金秊洙, 1896년 8월 25일 ~ 1979년 12월 4일) - 삼양그룹 창업자 ** 제수 박하진 ** 누이 김수남(金壽男), 연일정씨 정익원(鄭翼源)에게 시집감 ** 누이 김영수(金榮洙), 안동김씨 김오진(金吾鎭)에게 시집감 ** 여동생 김점효 - 前 전경련 회장 김용완의 부인 * 서모 공주김씨 김영희(金永熙, 1875년 ~ 1963년) ** 서제 김재수(金在洙, 1899년 ~ 1954년) * 장인 고정주(高鼎柱, 1863년 ~ 1943년, 호는 춘강(春崗), 첫 부인 고광석의 친정아버지) ** 처 고광석(高光錫, 1886년 ~ 1919년) *** 아들 김상만(金相万, 1910년 1월 19일 ~ 1994년 1월 26일, 전 동아일보 회장·명예회장) **** 손자 김병관(金炳琯, 1934년 7월 24일 ~ 2008년 2월 25일, 전 동아일보 회장) ** 둘째 처남 고광준 * 장인 이봉섭(李鳳涉, 본관은 용인, 둘째 부인 이아주의 친정아버지) ** 처 이아주(李娥珠, 1899년 음력 7월 19일 ~ 1968년 9월 11일) *** 아들 김남(金楠), 윤보선 대통령의 비서 *** 아들 김상석(金相晳) *** 며느리 윤성선(尹成善, 1924년 8월 11일 ~, 숙명여자대학교 교수) 내무장관 윤치영과 정치인 이은혜의 딸 **** 손자 김병기(金炳基, 교육자·고려대학교 교수) *** 아들 김상흠(1919년 10월 27일 ~ 1991년 11월 2일, 국회의원) *** 아들 김상기(金相琪, 1918년 4월 14일 ~ ) *** 딸 김상현(金相玹, 1926년 9월 ~ ) **** 손자 이상교 (1961년 3월 ~ ) *** 아들 김상종(金相淙, 1929년 1월 ~ , 우진토건 회장) *** 셋째 딸 *** 셋째 사위 이병린(李秉麟), 이활 (李活)의 장남 ** 사돈 송진우(宋鎭禹, 1890년 5월 8일 ~ 1945년 12월 30일) ** 사돈 이한동, 전 국무총리, 증손주며느리 이정원(李晶媛)의 친정아버지 ** 매제 김용완(金容完, 1904년 4월 9일 ~ 1996년 1월 17일, 누이 김점효의 남편), 경방 일가 풍족한 환경에서 자랐고 만년에는 야당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음에도 사치하지 않았고, 전용차량 대신 인력거, 버스, 택시 등의 대중교통을 이용하였다. 메이지 대학 재학 당시 간디이즘에 감격한 그는 자신을 위한 소비를 줄이고 남은 것으로 타인을 돕는 것을 자신의 신념이자 의무로 여겼다. 기독교의 개화운동에 자극을 받아 민립대학기성회, 농촌계몽운동, 문맹자 퇴치운동 등에 뛰어들기도 했다. 허정은 그에게 가해진 비판 중 업적을 남긴일이 없다는 비판에 대해 반론을 달았다. 만일 그가 고위 현직에 앉아 큰 업적을 남긴 일이 없다고 해서 인촌이 한 일이 무엇이냐고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혹시라도 있다면, 그는 그야말로 나무를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는 사람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각 분야에서 그가 다음어 놓은 초석이 우리 문화의 발전에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가는 아는 사람은 우리 현대사에 남긴 그의 업적을 소홀히 다루지 못할 것이다. 는 것이다. 한편 불우이웃과 고학생을 소문없이 뒤에서 도우는 것, 등으로 인망을 얻어 호남의 어른 , 고창의 어른 , 전북의 어른 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해방 이후 줄곧 매년 1월 1일이면 이승만을 찾아 세배를 드렸고, 정치적으로 갈라선 뒤에도 병석에 눕기전까지 그를 찾아 세배를 드리곤 했다. 정치인 이중재는 1952년 부산 피난시절 부통령인 그의 개인비서로 정계에 입문 하였다. 정욱 - 1981년 (제1공화국), MBC 드라마 신구 - 1982년 (종로부루스), 영화 허기호 - 2002년 (야인시대), SBS 드라마 김인후 김요협 김경중 김기중 동아일보 동아일보사 물산장려운동 브나로드 운동 민립대학기성회 보성전문학교 김병로 송진우 경방 김연수 장덕수 백관수 백남훈 안재홍 원세훈 국민대회준비위원회 한국민주당 민주국민당 민주당 김구 김규식 여운형 이승만 실력 양성론 외교 독립론 이아주 장면 신익희 조봉암 김상만 김상협 김준연 김도연 유진오 이순탁 이활 조만식 김활란 정인보 신탁 통치 반대 운동 반탁국민회의 박순천 조병옥 안창호 윤보선 윤치영 윤치소 윤치호 임영신 장택상 주요한 함태영 이시영 김규식 이광수 정일형 고려대학교 중앙대학교 중앙고등보통학교 중앙학회 최두선 현상윤 흥사단 김용완 간디이즘 한국전쟁 한국독립당 제1공화국 마하트마 간디 김도연 이윤영 이범석 김병기 김대중 김영삼 박헌영 여운홍 조소앙 주요섭 한근조 한기악 한만년 *독립유공자로 대통령장을 수여받은 사람 최시중, 《인촌 김성수:겨레의 길잡이 시대의 선각자》 (동아일보사, 1986) 동아일보, 《인촌 김성수의 사상과 일화》(동아일보편집부 편, 동아일보사, 1988) 브루스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김자동 역, 일월서각, 1986) 신일철 외, 《평전 인촌 김성수》(신일철 외 지음, 동아일보사, 1991) 동아일보사 편집부, 《한국의 선택(2천년대를향한)》 (편집부 편, 동아일보사, 1991) 김성주, 평전 인촌 김성수:조국과 겨레에 바친 일생 (동아일보사, 1991) 백남주, 高敞 의 빛 仁村金性洙先生, 芹村白寬洙先生銅像除幕 (동아, 1983) 인촌기념회, 《인촌 김성수 평전》(인촌기념회, 동아일보사, 1991) 인촌기념회, 《인촌김성수전》 (인촌기념회, 1976) 인촌기념회, 《인촌기념회사 1956-1991》 (인촌기념회, 1992) 인촌 김성수 서거 50주기 추모집간행위원회, 《인촌 김성수 서거 50주기 추모집 인촌을 생각한다》 (인촌 김성수 서거 50주기 추모집간행위원회, 2005) 인촌기념회, 《인촌기념강좌》 (고려대학교, 2002) 유진오, 양호기 (고려대학교출판부, 1977) 홍일식, 《고려대학의사람들》 1~3 (고려대민족문화연구소, 1986) 이희승, 《일석 이희승 전집 7》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7) 한승옥, 《이광수(문학의 이해와감상31)》 (한승옥, 건국대학교출판부, 2008) 김성수, 《인촌선생문집》 (열락당, 1999) 김중순, 《문화민족주의자 김성수》 (김중순, 류석춘 역, 일조각, 1998) 최기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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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근 경색 (心筋梗塞, 또는 대중적으로 심장 마비 (心臟痲痺는 허혈성 심질환의 하나이다. 흔히 심장마비라고 하나, 이는 심근 경색만을 지칭하는 용어는 아니다. 심장 근육은 관상동맥이라 부르는 3가닥의 혈관을 통해서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받으면서 일생 동안 혈액을 전신으로 펌프질하는 중요한 기관이다. 따라서 관상동맥에 이상이 생기는 경우에는 심장 근육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관상동맥의 구조를 살펴보면, 그 가장 안쪽 층을 내피세포가 둘러싸고 있는데 내피세포가 건강한 경우에는 혈전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고지혈증, 당뇨병, 고혈압, 흡연 등에 의해서 내피세포가 손상을 받게 되어 죽상경화증이 진행되고, 관상동맥 안을 흐르던 혈액 내의 혈소판이 활성화되면서 급성으로 혈전이 잘 생기게 된다. 이렇게 생긴 혈전이 혈관의 70% 이상을 막아서 심장 근육의 일부가 파괴(괴사)되는 경우가 심근경색증이고, 괴사되지는 않지만 혈관 내 혈액의 흐름이 원활하지 않아 가슴에 통증 이 생기는 것이 협심증이다. 이 같은 상황을 잘 유발시킬 수 있는 위험인자들은 다음과 같다. # 고령 # 흡연 # 음주 # 고혈압 혈압 ≥ 140/90mmHg 이거나 항고혈압제를 복용하고 있는 경우 # 당뇨병 # 가족력 부모형제 중 남자 55세 이하, 여자 65세 이하의 연령에서 허혈성 심질환을 앓은 경우 # 그 외 비만, 운동부족 등 환자는 대부분 갑자기 가슴이 아프다고 호소한다. 대개 가슴을 쥐어짠다 , 가슴이 쎄한 느낌이 든다 고 호소하며 주로 가슴의 정중앙 또는 약간 좌측이 아프다고 호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러한 증상 없이도 명치가 아프다 또는 턱끝이 아프다 고 호소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비전형적이기는 하지만 흉통 없이 구역, 구토 증상만 있는 경우도 있고, 소화가 안 된다 , 속이 쓰리다 고 호소하는 경우도 있다. 흉통은 호흡곤란과 같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으며 왼쪽 어깨 또는 왼쪽 팔의 안쪽으로 통증이 퍼지는(방사) 경우도 있다. 흉통은 대개 30분 이상 지속되며 니트로글리세린 설하정을 혀 밑에 투여해도 증상이 호전되지 않는다. 때에 따라서는 흉통을 호소하기도 전에 갑작스런 실신이나 심장마비로 응급실에 실려가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광범위한 부위에 걸쳐서 급성으로 심근경색증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심근경색증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상태로 구별할 수 있다. # ST절 상승 심근경색증 관동맥이 100% 막혀서 응급으로 혈관 재개통이 필요한 심근경색증 # 비(非) ST절 상승 심근경색증 관동맥이 완전히 막히지 않은 심근경색증 심근경색증의 치료는 크게 막힌 혈관을 넓히는 관혈적 치료와 이후 약물치료로 나뉜다. ST절 상승 심근경색의 경우에는 가능한 한 빠른 시간 내에 막힌 혈관을 넓히는 시술 또는 약물이 요구된다. 비 ST절 상승 심근경색증의 경우에는 쇼크가 동반되는 경우와 같이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약물 치료 후 안정화된 상태에서 시술할 수도 있다. 최근에는 여러 대형 병원에서 응급 심혈관성형술, 스텐트삽입술, 혈전용해술을 시행하여 경과 및 예후가 많이 향상되었다. 심혈관성형술, 스텐트삽입술은 요골 또는 대퇴동맥을 통하여 심혈관 조영술을 시행하여 막힌 혈관을 찾아낸 후, 혈관 안으로 도관을 삽입하여 풍선으로 넓히고 스텐트라는 철망을 삽입하여 혈관을 수리하는 시술이다.심근경색증에 의한 합병증이 없다면 대부분 병원에서 1주일 이내에 퇴원할 수 있다. 그러나 시술 직후 흔히 재관류에 의해 심장 근육에 2단계 충격이 오기 때문에 시술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고 하더라도 경과를 낙관할 수는 없다. 심혈관 조영술 결과 심혈관성형술, 스텐트삽입술을 시행하기에 적합하지 않거나 다혈관 질환일 경우에는 관상동맥 우회로 수술을 시행할 수 있다. 심근경색증에 대한 약물 치료는 향후 협심증 또는 심근경색증이 재발하지 않도록, 심근경색증으로 인한 심실의 변화를 방지하도록 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또한 스텐트를 삽입한 경우에는 스텐트에 혈전이 생겨서 혈관이 다시 막히는 상황을 예방하는 것도 중요한 약물 치료 목적 중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스텐트 혈전증의 치사율이 50%에 달할 정도로 상당히 높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혈전 억제제인 아스피린과 플라빅스를 포함하여 심장 보호 효과가 부가적으로 있는 혈압약을 복용하게 되며, 고지혈증 약물 그리고 당뇨가 있는 경우에는 경구 혈당 강하제, 인슐린을 처방받게 된다. 또한 니트로글리세린 등의 혈관 확장제가 추가될 수도 있다. 아직까지는 심근경색증 치료 중에 죽은 심장 근육을 획기적으로 회생시키는 방법은 없다. 그러나 서울대학교병원을 비롯하여 유럽과 미국의 연구팀들이 줄기세포를 이용하여 심장 근육을 재생시키는 연구 결과를 지속적으로 발표하고 있고, 현재도 대규모의 환자를 대상으로 개선된 프로토콜로 임상시험에 환자를 등록하고 있어서 그 성과가 크게 주목되는 바이다. 특히 서울대학교병원 심혈관센터에서 시행하는 매직셀(MAGIC-CELL) 프로그램은 다른 나라에서 시행하는 골수를 직접 채취하는 방법이 아니라, 싸이토카인을 이용해서 골수 줄기세포를 말초혈액으로 동원한 후 이를 말초혈액에서 쉽게 채취하는 방법으로서, 환자 부담을 줄인다는 장점이 있으면서 심기능 호전 효과가 뚜렷하여, 2004년도 Lancet, 2005년도 Canadian Medical Association Journal, 2006년도 Circulation, 2007년도 American Heart Journal, 2008년도 Heart와 같이 심혈관계의 세계 최고 권위지에 매직셀 프로그램의 장기 결과가 계속 발표되고 있다. 점점 그 추이가 늘고있다. 심정지 심장학 심장대사(cardio metabolism) 대사 증후군(메터볼릭 증후군) 인슐린 저항성(IR) 분류:사인별 죽음 분류:심장혈관 질환
대구광역시 (大邱廣域市)는 대한민국의 동남부 내륙에 있는 광역시이다. 동쪽으로 경상북도, 경산시, 영천시, 서쪽으로 고령군, 성주군, 북쪽으로 칠곡군, 군위군 남쪽으로 경상남도 창녕군과 인접한다. 팔공산과 비슬산 등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으로 인해 대한민국에서 가장 기온이 높은 편에 속하는 도시이며, 대구 특수형 기후 지역으로 분류된다. 조선시대에는 경상 감영 소재지로서 영남 지방의 중심지였다. 섬유 산업을 중심으로 도시가 성장하면서 1981년 7월 1일 대구시가 달성군 월배읍·성서읍·공산면, 칠곡군 칠곡읍, 경산군 안심읍·고산면을 편입하여 직할시로 승격되었고, 1995년 3월 1일 달성군을 편입하였다. 동성로와 중앙로를 중심으로 도심을 형성하고 있다. 시청 소재지는 중구 동인동 1가이고, 행정구역은 7구 1군이다. 독수리(시조) 대구의 활달하고 진취적인 기상과 개척자적 시민정신을 나타낸다. 전나무(시목) 많은 나무들 가운데 전나무는 대구 시민의 강직성과 영원성, 그리고 곧게 뻗어가는 기상을 상징하는 나무이다. 목련(시화) 목련은 순박하고 순결하며 희생정신의 시민기질을 나타낸다. symbol.jpg|alt=대구광역시 로고|대구광역시 로고 대구광역시 캐릭터 of Daegu.png|alt=대구광역시 브랜드 슬로건|대구광역시 브랜드 슬로건 대구시의 로고는 「팔공산과 낙동강」의 이미지를 형상화 한 것으로 미래지향적 진취성과 세계지향적 개방성을 추구하는 활기에 가득찬 도시적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다. 색채가 “다양한, 다채로움”을 의미하여 젊고, 밝고, 멋지고, 화려하고, 활기찬 도시 이미지를 제공하여 다양한 모습의 발전적인 대구를 나타낸다. 대구 달서구 월성동에 구석기시대의 유물인 좀돌날 석기가 포함된 유적의 발굴로 미루어 대략 2만~1만년 전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이 된다. 대구의 옛 이름엔 다벌(多伐), 달벌(達伐), 달불성(達弗城), 달구벌(達句伐), 달구화(達句火), 대구(大丘) 등이 있다. 모두 어딘가 비슷한 이름인데 한자의 뜻과는 관계없는 고유어의 음차이며, 이 가운데 물론 달구벌과 대구(大丘)가 가장 유명하다. 달구벌이라는 말의 어원에 대한 설명은 매우 다양하다. 그중에 달구 의 달 에 "높다", "크다"의 의미가 있고, 신라의 계림사상에서 기원된 새로움 혹은 철기 문화의 상징인 닭 에서 유래하였다는 연구자료가 있다. 그래서 달구벌은 대체로 크고 넓은 벌판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선사시대 달구화(達句火), 달구벌 (達句伐), 달불(達弗), 달성(達城)으로 성읍이 형성되었다. 청동기시대 부족국가가 형성되었다. 108년 신라에 병합되었다. *261년(신라 첨해이사금 15년) 달벌성이 축조되었다. (244년 축성 시작) 5세기말~6세기초 달구벌을 달구화현 (達句火縣, 達弗城)이라 칭하였다. 689년(신라 신문왕 9년) 신라의 수도를 서라벌에서 달구벌로 천도하려 하였다. 757년(신라 경덕왕 16년) 위화군(喟火郡)을 수창군(壽昌郡)으로, 달구화현(達句火縣, 達句伐)이라 칭하던 것을 대구현 으로 개칭하였다. 양주 관하에 두었다. 927년(신라 경순왕 원년) 후백제 견훤과 고려 왕건 사이의 공산 전투가 현재의 팔공산 일대에서 있었다. 940년(고려 태조 23년) 수창군을 수성군으로 개칭하였다. 1018년(고려 현종 9년) 수성군·장산군·해안현(解顔縣)과 대구현·화원현(花園縣)·팔리현(八里縣)·하빈현(河濱縣)으로 행정 계통이 양분되었다. 대구현 등은 성주군 관하에 두었다. 1143년(고려 인종 21년) 대구현이 현령관으로 승격하여 하빈현, 화원현을 영속하였다. 1203년(고려 신종 6년) 무신정권기에 부인사 승려의 반무신란이 있었다. 1232년(고려 고종 19년) 몽골 제국의 침입으로 팔공산 부인사의 대장경을 소실하였다. 1255년(고려 고종 42년) 공산성에서 항몽 투쟁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대구도호부의 영역이 현재의 대구광역시 중구, 남구, 서구, 동구(안심동 제외), 북구(옛 칠곡동 지역 제외), 수성구(고산동 제외), 달서구, 달성군(현풍면, 유가면, 구지면 제외), 청도군 각북면, 풍각면, 각남면에 이를 정도로 넓었다. 1394년(조선 태조 3년) 대구현이 수성현·해안현·하빈현을 영속하였다. 1419년(조선 세종 원년) 5월 대구현·수성현·해안현·하빈현 이상 4개 현을 통합하여 대구군 으로 승격하였다. 1466년(조선 세조 12년) 대구군을 대구도호부 로 승격하였다. 1590년(조선 선조 23년) 대구읍성이 토성으로 축성되었다. 1592년(조선 선조 25년) 임진왜란 중 대구읍성은 파괴되었다. 1601년(조선 선조 34년) 경상도 감영을 대구부로 이전, 설치하였다. 화원현·경산현·하양현을 편입하였다. 1607년(조선 선조 40년) 경산현·하양현은 대구도호부 관할에서 분리되었다. 1684년(조선 숙종 10년) 풍각현의 각북면·각현내면·각초동면·각이동면 이상 4개 면이 대구도호부에 편입되었다. 1658년(조선 효종 9년) 약령시가 경상감영 안의 객사 주변에서 처음 열리기 시작하였다. 1736년(조선 영조 12년) 대구읍성이 석성으로 4월에 축조에 들어가 이듬해 6월 완공하고, 11월 선화당에서 준공식을 가졌다. 1750년(조선 영조 26년) 유생 이양채가 구(丘) 자가 대성 공자의 휘자에 저촉되므로 피해야 한다(피휘)며, 대구(大丘)를 대구(大邱)로 개칭할 것을 상소하였다. * 정조·헌종 때는 대구(大丘)와 대구(大邱)로 혼용하다가 철종 이후에는 대구( 大邱 )만 사용하였다. 1895년 6월 23일(조선 고종 32년 음력 윤5월 1일) 8도(道)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실시되어, 대구부 대구군이 되었다. 1896년(건양 원년) 8월 4일 13도제가 실시되어, 경상북도 대구군 이 되었다. 1899년(광무 3년) 2월 대구제일교회가 대구 최초 서양식 병원 제중원(동산병원의 전신)이 설립되었다. 1899년(광무 3년) 7월 대구 최초 근대 중등교육기관 달성학교(1916년 대구고등보통학교 계승, 1950년 경북중학교와 경북고등학교로 분리, 1970년 경북중학교 폐교, 현 경운중학교 계승)가 설립되었다. 1902년(광무 6년) 애덤스 선교사에 의해 신명여자소학교가 여성교육기관으로 처음 문을 열었다. 1905년(광무 9년) 달성공원이 조성되었다. 1906년(광무 10년) 9월 24일 대구군 소속 각북면·각현내면·각초동면·각이동면 이상 4개 면은 청도군으로 이속하였다. 1906년(광무 10년) 10월 대구읍성 성벽이 대구군수 겸 관찰사 서리였던 박중양에 의해 황제의 윤허없이 철거되었다. 또한, 경상감영의 선화당 정남쪽에 위치했던 포정문(布政門)의 문루인 관풍루를 지금의 달성공원으로 옮겼다. 1906년(광무 10년) 일제 통감부 이사청이 설치되었다. 1907년(광무 11년) 2월 대구에서 김광제, 서상돈 등이 중심이 되어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여 전국적으로 큰 호응을 얻었다. 1907년(광무 11년) 대구 첫 영화관 금좌(錦座)가 현재 태평로2가에 문을 열어 12년 동안 번창하였다. 1907년(광무 11년) 애덤스 선교사의 부인 부르엔(Marda Bruen)에 의해 여자중등학교로 신명여학교가 문을 열였다. 1908년(융희 2년) 경상감영의 객사와 주요 건물이 파괴되었고, 약령시를 현재 남성로로 이전하였다. 1909년 경상북도관찰사로 부임한 박중양은 이른바 십자도로(포정동에서 서문로에 이르는 동서 도로와 종로에서 대안동에 이르는 남북 도로)를 개통하였으며, 공사비는 국고에서 지원됐다. 일제 강점기에 대구는 일본어로 다이큐()라고 불렀다. 1910년(융희 4년) 8월 29일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을 병합했다. 1910년 10월 1일 대구군을 대구부 로 개칭하였다. 1911년 11월 14일 일본 제국은 동상면과 서상면을 통합해 대구면을 설치한 후 동명을 일본어식으로 전면 개정하였다. 1913년 대구역이 건립되었다. 322호에 전기가 들어왔다. 1914년 4월 1일 대구부를 분해하여, 도시 지역인 대구면만 대구부 로 남기고, 대구면을 제외한 대구부의 나머지 면과 현풍군이 달성군으로 개편되었다. 1915년 1월 15일 서상일 등은 영남지역 인사들과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는데 3.1만세운동에서 대구지역 운동을 주도하였다. 1917년 4월 1일 달성군 수성면 대명동과 봉덕동의 각일부를 대구부에 편입해 대봉정을 신설하였다. 1919년 3월 8일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1920년 7월 1일 시내버스가 운행되었다. 대구역을 기점으로 시내 각 방향으로 물론이고 팔달교 및 동촌까지 운행하였다. 1923년 서문시장이 현재의 자리로 이동하였다. 1923년 대구자혜의원은 경북도립 대구의원이 되었다. 이것이 경북대병원의 전신이다. 1927년 10월 16일 장진홍이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신간회 대구지회가 조직되었다. 1932년 대구 최초의 백화점 이비시야 백화점이 등장하였다. 현재의 동성로 성내1동 LG패션자리이다. 1938년 10월 1일 달성군 수성면, 달서면 일부(감삼동 제외), 성북면 일부(동변동·서변동·연경동 제외)을 대구부에 편입하였다. 1938년 11월 2일 옛 수성면, 옛 달서면, 옛 성북면 지역에 대구부 동부출장소·서부출장소·북부출장소가 각각 설치되었다. (3출장소) 1941년 대구 약령시가 폐쇄되었다. 1942년 대구공립상업고등학교 학생들 중심으로 태극단 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났다.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은 광복을 맞았다. 1945년 9월 29일 대구역에서 열차끼리 충돌하여 73명이 사망하고 120여명이 중상을 입는 참사가 일어났다. 1946년 10월 1일 대구 10·1 사건(10월인민항쟁)이 일어났다. 1947년 4월 1일 일본식 동명이 한국식 동명으로 개정되었다. 미국의 대한군사원조(AFAK)를 통한 자재 원조로 지어진 대구시청사 감사식(1955년) 1949년 8월 15일 대구부에서 대구시 로 개칭하였다. 1950년 7월 16일 6.25전쟁으로 인해 8월 17일까지 대한민국의 임시 수도가 되었다. 또한 대한민국 육군본부 주한 미8군 사령부가 이전 설치되었다. 1951년 6월 9일 대구시 남부출장소가 설치되었다. (4출장소) 1952년 1월 16일 동인동, 삼덕동, 칠성동이 분동하였다. (87법정동) 1953년 4월 1일 대구시 중부출장소·종로출장소를 설치하였다. (6출장소) 1958년 1월 1일 달성군 동촌면, 월배면, 성서면, 가창면, 공산면을 편입하였다. 동촌출장소 등을 설치하였다. 1960년 2월 28일 대구지역 고등학생들은 2.28학생의거를 일으켰다. 이 의거는 4.19의거로 연결되었다. 1963년 1월 1일 대구시 공산출장소(서변동·동변동 제외)가 달성군 공산면으로, 가창출장소(파동 제외)가 가창면으로, 성서출장소가 성서면으로, 월배출장소가 월배면으로 환원되었다. 구제(區制)가 실시되어 중부출장소 등이 중구·동구·서구·남구·북구로 승격하였다. ※ 이후의 행정구역 변경에 대한 내용은 각 구별 문서로 대신한다. 1965년 2월 1일 동 행정구역 개편으로 행정동의 수가 89개로 줄었다. (5구 89행정동 106법정동) 1976년 8월 1일 동구 동촌출장소가 대구시 동촌출장소로 승격하였다. 1980년 4월 1일 수성구가 동구에서 분리·신설되었고, 동촌출장소를 폐지하였다. (6구) 1981년 7월 1일 경상북도 대구시, 달성군 월배읍·성서읍·공산면 및 칠곡군 칠곡읍, 경산군 안심읍·고산면 일원을 편입하여 대구직할시 가 설치되었다. 1983년 11월 15일 어린이회관을 개관하였다. 1984년 6월 27일 88올림픽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 1984년 7월 중순 대구 인구 200만명 돌파 1988년 1월 1일 서구 및 남구의 일부를 관할로 달서구가 설치되었다. (7구) 1991년 3월 26일 성서 초등학생 5명이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1991년 7월 8일 지방자치제도의 부활로 대구직할시의회가 개원하였다. *대구광역시 의회1991년 12월 7일 대구 도시철도 1호선 기공 1992년 11월 27일 동화사 남북통일발원 약사여래 석조대불이 완공되었다. 1995년 1월 1일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면서 대구광역시 로 개칭하였다. 1995년 3월 1일 달성군 전역을 경상북도로부터 편입하였다. 시역은 885.6 km2로 확장되어 현재에 이른다. (7구 1군) 1995년 4월 28일 대구 상인동 가스 폭발 사고가 일어나 101명이 사망하였다. 1996년 9월 1일 달성군 논공면이 논공읍으로 승격 1996년 12월 19일 대구 도시철도 2호선 기공 1996년 12월 대구 인구 250만명 돌파 1997년 11월 1일 달성군 다사면이 다사읍으로 승격 1997년 11월 26일 대구 도시철도 1호선(진천~중앙로) 개통 - 대구의 지하철 시대 개막 1998년 5월 2일 대구 도시철도 1호선(중앙로~안심)이 완전 개통되었다. 2002년 5월 10일 대구 도시철도 1호선(대곡~진천)이 연장 개통되었다. 2002년 6월 10일 한일월드컵 미국전 대구월드컵스타디움에서 열림 2002년 6월 29일 한일월드컵 터키전 대구월드컵스타디움에서 열림 (한일월드컵 3,4위 전) 2003년 2월 18일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의 발생으로 192명의 사망자와 148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2003년 8월 21일 2003년 하계 유니버시아드가 개막하여, 8월 31일 폐막하였다. 2005년 10월 18일 대구 도시철도 2호선(문양~사월)이 개통되었다. 2008년 4월 25일 동구 등 6개 지구의 대구광역시, 구미시 등 5개 지구의 경상북도에 경제자유구역을 지정받았다. 2009년 7월 24일 대구 도시철도 3호선 기공 *2011년 8월 27일 2011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개막하여, 9월 4일 폐막하였다. 이는 1991년 일본 도쿄, 2007년 일본 오사카에 이어 아시아 국가로서는 2번째로 개최하였다. 또한 대한민국은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스웨덴, 일본, 독일에 이어 FIFA 월드컵, 하계 올림픽, 세계육상선수권대회 등 국제 스포츠 3대 이벤트를 모두 개최하는 7번째 국가가 됨으로써 세계적 스포츠 강국으로 부상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220x220px 2012년 9월 19일 대구 도시철도 2호선이 경상북도 경산시에 있는 영남대학교까지의 연장구간이 개통하였다. (사월 ~ 영남대) 2012년 10월 11일 부터 10월 17일까지 제93회 전국체육대회가 열렸다. 2012년 11월 6일 지상파 아날로그 TV방송이 종료되었다. 2013년 10월 13일 ~ 10월 17일 세계에너지총회가 열렸다. 2015년 4월 12일 ~ 4월 17일 제7차 세계 물 포럼이 열렸다. 2015년 4월 23일 대구 도시철도 3호선(칠곡경대병원~용지)이 개통되었다. 2016년 9월 8일 대구 도시철도 1호선(대곡~설화명곡)이 연장 개통되었다. 2018년 11월 1일 달성군 옥포면, 현풍면이 옥포읍, 현풍읍으로 승격 대구광역시는 대한민국 동남부 내륙에 위치한 광역시이다. 대구는 영남 지방 내륙 지방의 중앙에 위치한다. 동쪽으로 경상북도 경산시, 영천시, 서쪽으로 고령군, 성주군, 북쪽으로 군위군, 칠곡군, 남쪽으로 청도군, 경상남도 창녕군과 경계를 접한다. 없음 대구는 높고 규모가 큰 산줄기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이다. 북쪽에는 팔공산(1,193m)의 산줄기가 이어져 있고, 남쪽으로는 비슬산(1,084m)의 높은 산줄기가 이어져 있다. 하천으로는 신천이 남에서 북으로 흐르고 북쪽에서 금호강과 합쳐진다. 대구 시가지는 신천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넓게 펼쳐져 있다. 대구는 전체적인 강수량이 적은 소우지이다. 최고기록기온이 40˚C, 최저기록기온이 -20.2˚C에 달한 적이 있었다. 대구는 대한민국에서 여름 평균 기온이 높은 편이다. 1942년에 기록한 40도는 관측 이래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최고 기온 기록이기도 하다. 이런 특수한 기후로 인해 지리적 기후 구분으로는 남부 내륙 중에서도 대구 특수형 기후 에 속한다. 이러한 여름 기온으로 인해 인터넷 커뮤니티를 시작으로 대프리카 (대구+아프리카)라는 신조어가 등장하였고, 최근에는 언론, 방송 등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대구광역시청 본관 대구광역시는 7개 구 와 1개 군 으로 이루어져 있다. 2017년 12월 31일 주민등록 인구는 1,006,753세대 2,501,673명이다. 300px 자치구·군 한자 세대 인구 (명) 면적 (km2) 중구 中區 37,698 79,759 7.06 동구 東區 148,473 351,206 182.18 서구 西區 86,890 194,379 17.33 남구 南區 73,476 153,963 17.44 북구 北區 174,238 446,201 94.08 수성구 壽城區 164,819 440,743 76.47 달서구 達西區 224,509 586,532 62.34 달성군 達城郡 95,141 248,890 426.68 대구광역시 大邱廣域市 1,006,753 2,501,673 883.57 대도시권 교통관리에 관한 1특별법 시행령(대통령령)의 별표 1(대도시권의 범위(제2조관련))에 의하여 대구광역시, 경상북도의 구미시, 영천시, 경산시, 군위군, 청도군, 고령군, 성주군, 칠곡군, 경상남도의 창녕군이 대구권으로 규정되어 있다. 범물지구 택지개발사업은 대구도시공사, 한국토지주택공사 등에서 공영개발 방식으로 추진하고 있다. 무주택 시민에게 양질의 택지를 저렴하게 공급하기 위하여 도로·수도·전기·통신·도시가스·난방 등 생활기반 시설을 모두 갖추고 있고, 공원·학교·녹지·운동장 등 공공시설과 편의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대구도시공사 시행 대한주택공사 시행 한국토지공사 시행 한국토지주택공사 시행 지산지구 (1992년)범물지구 (1993년)상인지구 (1994년)노변지구 (1995년)시지지구 (1997년)용산지구 (1998년)장기지구 (1999년)동서변지구 (2002년)죽곡1지구 (2007년)죽곡2지구 (2010년)등촌지구 (2014년)각산지구 (2015년) 불로지구 (1986년)송현지구 (1987년)월배지구 (1987년)안심1지구 (1987년)천내1지구 (1988년)천내2지구 (1990년)월성지구 (1992년)칠곡1지구 (1993년)칠곡2지구 (1994년)안심2지구 (1994년) 성서지구 (1997년)대곡지구 (1997년)칠곡3지구 (2000년)명곡1지구 (2001년)동호지구 (2002년)명곡2지구 (2002년)본리지구 (2004년)칠곡4지구 (2005년)율하1지구 (2008년)매천지구 (2008년) 율하2지구 (2009년) 금호지구신서지구 옥포지구 (2016년) 연경지구 (2018년) 대구광역시의 일반행정은 대구광역시청이, 유·초·중등교육행정은 대구광역시교육청이 담당한다. 두드리소는 경상도 사투리의 정감이 느껴지면서, 민원을 두드리면 언제든지 들어주고 해결해 주는 공간이라는 의미의 대구광역시의 민원 서비스이다. 두드리소(https://web.archive.org/web/20180927050440/http://dudeuriso.daegu.go.kr/%3Cnowiki/%3E%29%EC%97%90%EC%84%9C 인터넷, 모바일, 콜센터, SNS로 신청한 모든 민원과 제안의 처리과정을 신청방법과 상관없이 한 곳에서 상세하게 확인할 수 있다. 없음 120달구벌콜센터는 대구시에 관한 민원이나 궁금한 사항을 상담해주는 콜센터이다. 전화, 문자상담, 온라인상담, 예약상담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어 보다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으며 외국어상담(영어, 중국어, 일본어)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어 외국인 역시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없음 ‘스마트시티 아시태평양 어워드 2018’에서 최우수 프로젝트로 선정 된 뚜봇은 자가학습을 통해 자동 답변을 하도록 만들어진 인공지능 자동상담시스템이다. 24시간 여권, 차량등록, 지역축제, 시정 등 다양한 분야의 민원을 채팅을 통해 해결하고 있다. 없음 + 대구광역시 미래비전 2030 비전 World Smart Leader, DAEGU 목표 Again! 대한민국 대도약의 심장 첨단기술과 휴머니즘의 도시 글로벌 Top 30 도시 추진방향 글로벌 미래산업 허브 월드클래스 대도시권의 중심 시민이 행복한 도시 공동체 핵심사업 제조업 스마트 혁신 5+α 신산업 연구·생산기지 4차 산업혁명 생태계 조성 글로벌 게이트웨이 1,000만 대구대도시권 구축 대도시권 중심도시 역량 강화 대구 케어 프로젝트 스마트 & 세이프 시티 시민 학습문화도시 대구광역시(에 해당하는 영역)의 연도별 인구 추이 연도 총인구 인구그래프 비고 1925년 1930년 1935년 1940년 1944년 1949년 1955년 1960년 1966년 1970년 1975년 1980년 1985년 1990년 1995년 2000년 2005년 2008년 2009년 2010년 2011년 2012년 2013년 2014년 2015년 2016년 2017년 2018년 대학교(국공립, 사립) * 경북대학교 - 북구, 중구 * 영남대학교 - 남구 * 계명대학교 - 달서구, 남구 * 대구교육대학교 - 남구 *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 달성군 전문대학(국공립, 사립) * 계명문화대학교 - 달서구 * 대구공업대학교 - 달서구 * 대구과학대학교 - 북구 * 대구보건대학교 - 북구 * 수성대학교- 수성구 * 영남이공대학교 - 남구 * 영진전문대학교 - 북구 * 한국폴리텍Ⅵ대학 대구캠퍼스 - 서구 * 한국폴리텍대학 섬유패션캠퍼스 - 동구 직업훈련기관 * 한국폴리텍Ⅵ대학 달성캠퍼스 - 달성군 고등학교 대구국제학교 교육청 * 대구광역시교육청 ** 남부교육지원청 ** 달성교육지원청 ** 동부교육지원청 ** 서부교육지원청 대구광역시 교육기관 (2017년) 학교별 계 대학원 대학교 전문대학 고등학교 중학교 초등학교 유치원 학교수 830 4 4 9 93 125 228 367 학생수 456,692 12,126 67,258 57,391 87,694 68,993 124,280 38,950 교원수 25,079 462 1,890 1,037 6,312 4,723 7,675 2,960 자료 2018 시정현황 대구광역시 대표 축제에는 컬러풀대구페스티벌, 국제오페라축제, 치맥페스티벌, 국제뮤지컬페스티벌이 있다. 컬러풀대구페스티벌은 매년 5월에 열리는 대구광역시의 대표적인 시민축제로 다양한 문화 예술 체험행사와 화려한 퍼레이드를 자랑하는 대구만의 페스티벌이다. 유네스코 음악창의도시로 선정된 대구는 국제뮤지컬페스티벌(DIMF)을 통해 대구시민은 물론 세계인과 함께 뮤지컬을 향유할 수 있도록 2006년부터 매해 개최하고 있다. 국제뮤지컬페스티벌은 대한민국 유일의 국제 뮤지컬 페스티벌이다. 치맥페스티벌은 대구를 대표하는 치킨과 맥주를 모토로 탄생한 페스티벌이다. 매년 100만 명의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고, 치킨과 맥주 그리고 체험 공간까지 있어, 관광객의 오감을 만족시키는 페스티벌이다. 「대구국제오페라축제」는 대구오페라하우스의 개관을 계기로 하여 매년 9~10월경에 열리며, 지역의 풍부한 음악적 역량을 활용하고 문화콘텐츠 개발을 통하여 타 도시와 차별화된 축제로 발전시키기 위하여 대구광역시가 개최하고 있다. 컬러풀페스티벌.jpg|alt=컬러풀대구페스티벌|컬러풀대구페스티벌 제11회 뮤지컬페스티벌(투란도트 공연장면).jpg|alt=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 대구국제오페라축제.jpg|alt=대구국제오페라축제|대구국제오페라축제 대구광역시의 축제 목록 + 대구광역시 문화재 현황(2018) 종별 총계 국가지정문화재 시지정문화재 소계 국보 보물 사적 천연기념물 국가민속문화재 국가무형문화재 소계 유형문화재 무형문화재 기념물 민속분화재 등록문화재 문화재자료 계 265 87 3 66 9 2 5 2 114 76 17 17 4 11 53 대구광역시의 유형문화재 대구광역시의 무형문화재 대구광역시의 기념물 대구광역시의 민속문화재 대구광역시의 문화재자료 대구광역시의 테마별 관광코스로는 대구 속 시간여행 코스 , 이렇게 좋을 수가 코스 , 금수강산 느림보 코스 , 팔공산 힐링 코스 이 4가지 권역별 관광코스가 있다. 대구 속 시간여행 코스 이월드/83타워 → 서문시장 → 삼성상회 옛터(이병철 고택) → 근대골목 → 약령시 → 동성로 →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방천시장 이렇게 좋을 수가 코스 앞산 전망대 케이블카 → 수성못 → 들안길 → 스파밸리 → 힐크레스트 → 대구 미술관 → 대구 스타디움 → 녹동서원/달성한일우호관 금수강산 느림보 코스 디아크/강정보고령보 → 낙동강 자전거길 → 대구수목원 → 마비정 벽화마을 → 비슬산 암괴류 → 국립 대구과학관 → 도동서원 팔공산 힐링 코스 갓바위 - 동화사 - 대구방짜유기 박물관 - 팔공산 벚꽃길 - 대구시민 안전테마파크 대구시의 관광자원을 널리 홍보하기 위하여 2000년 12월 2일 시작된 시티투어는 각종 문화유적, 관광지, 시정현장 등을 순회하며 대구의 문화와 역사, 관광지 등을 둘러볼 수 있는 관광 체험 프로그램이다. 동대구역 → 불로동고분군 → 봉무공원 → 구암 팜스테이 → 갓바위 → 방짜유기박물관 → 동화사 → 팔공산동화집단시설기구 →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 → 팔공산온천관광호텔 1코스(팔공산권) 불로동고분군 → 봉무공원 → 동화사 → 방짜유기박물관 → 신숭겸 장군 유적지 2코스(비슬산권) 현풍곽씨12정려각 → 도동서원 → 비슬산자연휴양림 → 유치곤 장군 호국기념관 → 현풍 석빙고 3코스(화원권) 월곡역사박물관 → 대구수목원 → 화원동산 → 남평문씨리세거지 → 용연사 4코스(시지·가창권) 녹동서원 → 힐크레스트(구 허브힐즈) → 대구스타디움 → 대구 스포츠기념관 → 둔산동경주 최씨종가 5코스(다사권) 환경시설공단 → 계명대학교 행소박물관 → 계명한학촌 → 매곡정수장 → 육선사 6코스(도심권) 약령시한의약문화권 → 달성공원 → 대구향교 → 국립대구박물관 → 구암서원 두류공원 공원명 위치 주요시설 달성공원 중구 달성동 ㆍ달구벌 토성, 향토역사관, 동물원, 관풍루, 최재우동상 ㆍ달성서씨, 유허비, 어린이 헌장비 등 경상감영공원 중구 포정동 ㆍ조선조 경상감영이 있었던 곳 ㆍ선화당, 징청각, 통일종각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중구 동인동 ㆍ달구벌대종, 도서관, 영상시설, 화합의 광장, 명언의 오솔길 ㆍ국채보상운동기념관 2·28기념 중앙공원 중구 동인동 ㆍ중앙분수, 실개천, 청소년광장 앞산공원 남구 대명동 ㆍ낙동강 승전기념관, 충혼탑, 안일사, 은적사 ㆍ케이블카, 승마장, 심신수련장 두류공원 달서구 성당동 ㆍ야외공연장, 문화예술회관, 관광정보센터, 도서관, 이월드 ㆍ인물동산, 야구장, 수영장, 유도관, 테니스장 팔공산자연공원 동구 도학동 ㆍ동화사, 파계사, 부인사, 갓바위, 북지장사, 야영장(3개소) ㆍ통일약사대불, 팔공스카이라인, 집단시설지구(3개소) , 시민안전테마파크 등 비슬산자연공원 달성군 유가면 ㆍ용연사, 유가사, 대견사, 대견봉 ㆍ참꽃군락지, 처연기념물 제435호 비슬산 암괴류 대구광역시가 선정한 대구 12경으로 팔공산, 비슬산, 강정고령보(디아크), 신천, 수성못, 달성토성, 경상감영공원, 국채보상기념공원, 동성로, 서문시장, 83타워 그리고 대구스타디움이 있다. 팔공산.jpg|alt=1경 팔공산|1경 팔공산 비슬산.jpg|alt=2경 비슬산|2경 비슬산 강정고령보.jpg|alt=3경 강정고령보(디아크)|3경 강정고령보(디아크) 신천.jpg|alt=4경 신천|4경 신천 수성못.jpg|alt=5경 수성못|5경 수성못 달성토성.jpg|alt=6경 달성토성|6경 달성토성 경상감영.jpg|alt=7경 경상감영공원|7경 경상감영공원 국채보상기념공원.jpg|alt=8경 국채보상기념공원|8경 국채보상기념공원 동성로.jpg|alt=9경 동성로|9경 동성로 서문시장.jpg|10경 서문시장 83타워.jpg|alt=11경 83타워|11경 83타워 대구스타디움.jpg|alt=12경 대구스타디움|12경 대구스타디움 대구광역시 10미에는 육개장, 막창 구이, 뭉티기(소 생고기), 동인동 찜갈비, 논메기매운탕, 복어불고기, 누른국수, 무침회, 야끼우동, 납작만두가 있다. 육개장|1미 육개장 대구는 버스와 도시철도가 주요한 대중교통 수단이다. 외부 지역 및 국가와는 철도, 버스, 항공 등으로 연결된다. 아시아 고속도로 1호선이 대구를 관통하고 있으며, 경부고속도로 등 7개 고속도로 노선 및 5개 국도 노선이 시가지를 방사형으로 연결하고 있다. 신천대로, 앞산순환로, 신천동로 등 도시고속도로로 확충되어 있다. 분기점 금호 분기점, 도동 분기점, 동대구 분기점, 옥포 분기점, 현풍 분기점 나들목 남대구 나들목, 동대구 나들목, 북대구 나들목, 서대구 나들목, 성서 나들목, 수성 나들목, 칠곡 나들목, 유천 나들목, 화원옥포 나들목, 달성 나들목, 북현풍 나들목, 현풍 나들목, 팔공산 나들목 시외버스 두 개의 고속버스 터미널과 다섯 개의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전국 각지로 가는 버스가 운행된다. 시내버스 수입금의 분배는 대구광역시에서 맡아 하고, 버스의 운행은 개별 회사가 맡아 하는 준공영제로 운영된다. 도시 규모에 비해 도시철도망이 부족한 대구의 대중교통에서 시내버스의 역할은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버스 운임은 다음과 같다. 일반/좌석버스의 운임은 현금은 어른 1,400원, 청소년 1.000원, 어린이 500원이고, 교통카드는 어른 1,250원, 청소년 850원, 어린이 400원이다. 급행버스의 운임은 현금은 어른 1,800원, 청소년 1,300원, 어린이 800원이고, 교통카드는 어른 1,650원, 청소년 1,100원, 어린이 650원이다. 교통카드를 이용하여 버스와 도시철도 모두 최초 교통 수단의 하차부터 30분 이내에 다음 교통 수단으로 갈아탈 경우 무료/할인 환승 혜택을 받을 수 있다. ( 대구광역시 버스노선 안내 시스템) 대구 도시철도 도시철도는 대구도시철도공사가 관리하고 운행한다. 대구광역시를 북동·남서를 대각선으로 관통하는 1호선과 동서로 관통하는 2호선과 남동·북서를 대각선으로 관통하는 모노레일 노선인 3호선이 운행되고 있다. 대구 도시철도 노선도(2018년) 중형택시의 경우 기본요금 2km까지 3,300원으로, 이후 거리요금은 144m당 100원으로, 시간요금은 34초당 100원으로 책정되어 있다. 소형택시의 경우 기본요금 2km까지 2,200원으로, 이후 거리요금은 144m당 50원으로, 시간요금은 34초당 50원으로 책정되어 있다. 경형택시의 경우 기본요금 2km까지 1,800원으로, 이후 거리요금은 144m당 20원으로, 시간요금은 34초당 20원으로 책정되어 있다. 나드리콜 대구시에서 중증장애인, 만65세이상의 사람으로서 대중교통이용에 어려움이 있는 사람 등을 대상으로 운영하고 있는 콜택시이다. 기본요금이 1,000원이고 거리당 요금이 책정되며, 시내는 최대 3,300원 시외는 최대 6,600원이 한도이다. 대구역과 동대구역에서 경부선, 경북선, 대구선, 동해선 열차를 이용할 수 있다. KTX와 SRT는 동대구역에서만 이용할 수 있다. 대구권 광역철도 2018년 4월 구미 ~ 경산 구간 공사에 들어가고 2020년에 개통한다. 2, 3단계로 나누어져 있고 밀양과 김천까지 공사를 할 계획이고 서대구역을 복합환승센터로 건설해 KTX가 개통된다. 광장|섬네일|동대구역|351x351px|없음 대구국제공항 동구 지저동에 대구국제공항이 있다. 대구국제공항은 제주국제공항, 인천국제공항 등 국내외 도시와 연결되어있다. 대구국제공항의 항공편은 매년 동계항공기간이 끝나면 대폭 늘어난다. 항공노선은 국내선 인천, 제주, 김포 3개 노선이 일일 38편이 운항하고 있으며, 국제선은 매주 중국(상하이, 베이징, 선양, 싼야) 25편, 일본(가고시마, 구마모토, 도쿄, 오사카, 후쿠오카, 삿포로, 오키나와) 127편, 동남아(홍콩, 마카오, 하노이, 세부, 방콕, 타이베이, 다낭) 117편, 대양주(괌) 7편,러시아(블라디보스톡) 3편이 운항하고 있다( 대구국제공항) +항공노선 구분 노선명 운항편수 취항 항공사 비고 국내선(3) 대구-인천 4편/일 대한항공 대구-제주 32편/일 대한, 아시아나, 티웨이, 제주, 에어부산 대구-김포 2편/일 에어부산 국제선(23) 중국 대구-상하이 7편/주 中동방항공 대구-베이징 3편/주 제주항공 대구-선양 2편/주 대한항공 대구-싼야 4편/주 에어부산 일본 대구-구마모토 3편/주 티웨이항공항공 대구-가고시마 3편/주 제주항공 대구-도쿄 35편/주 티웨이항공, 에어부산, 제주항공 대구-오사카 36편/주 티웨이항공, 에어부산 대구-후쿠오카 28편/주 티웨이항공, 에어부산 대구-삿포로 14편/주 에어부산 대구-오키나와 8편/주 티웨이항공 동남아 대구-홍콩 6편/주 티웨이항공 대구-타이베이 23편/주 티웨이항공, 에어부산, 타이거에어, 제주항공 대구-세부 12편/주 티웨이항공 대구-다낭 42편/주 티웨이항공, 에어부산, 제주항공, 비엣젯항공 대구-나트랑 2편/주 제주항공 대구-클라크 3편/주 티웨이항공 대구-하노이 7편/주 티웨이항공 대구-마카오 5편/주 제주항공 대구-방콕 14편/주 티웨이항공 대양주 대구-괌 7편/주 티웨이항공 유럽 대구-블라디보스톡 3편/주 티웨이항공 2012년 대구의 지역내 총생산(GRDP)은 38조7천억 원이며, 실질성장률은 2.4%이다. 2013년 대구광역시의 1인당 개인소득은 16개 시도 중 6번째로 상위권이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3년 지역소득(잠정)’에 따르면 대구의 1인당 개인소득은 1천538만원으로 울산 1천916만원, 서울 1천869만원, 부산 1천618만원, 대전 1천576만원, 제주 1천564만원에 이어 16개 시ㆍ도중 6번째로 높았다. 시ㆍ도 전체 명목 개인소득은 796조원으로 1년 전보다 30조원(3.9%)이 늘었다. 실질 지역 내 총생산 성장률(경제성장률)도 3.8%로 전국 5위를 나타냈다. 이밖에 대구의 지역 총소득은 52조6천억원으로 전국의 3.7%를 차지했으며 지역 내 총생산 대비 지역 총소득 비율은 117.3 수준이었다. 2015년 대구의 지역내총생산(GRDP) 규모는 48조 8,690억원으로 전년에 비해 2조 3,453억원(5.0%)이 증가했으며 16개 시도 중 11번째를 기록했다. 또한, 1인당 개인소득은 1천975만원으로 증가했다. 대구의 농업은 1995년 달성군과의 도농 통합으로 비중이 높아졌다. 2015년 기준 농가호수는 16,571호, 농가인구는 44,542명, 농경지면적은 8.291ha이다. 낙동강과 금호강을 끼고 있는 달성군 지역에서 쌀이 많이 생산되었으나, 현재는 근교농업과 낙농업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대구는 옛날부터 교통의 요충지에 있어 영남지방 상권의 중심지로 발달하였고, 조선시대에 이미 전국 3대 시장의 하나인 서문시장과 약령시가 이름을 떨쳤다. 2017년 기준 대구에는 9개의 백화점과 21개의 대형마트, 7개의 쇼핑센터, 151개소의 등록시장, 1개의 종합유통단지가 있다. + 대구광역시 유통시설 계(단위 개소) 백화점 쇼핑센터 대형마트 전문점 등록시장 그밖의 대규모점포 207 9 7 21 4 151 15 +주요 전통시장 시장명 소재지 점포수(단위 개) 서문시장 중구 국채보상로 380일원 3,817 칠성시장 북구 칠성시장로 28일원 996 팔달시장 북구 팔달로 37길 11일원 900 서남(신)시장 달서구 달구벌대로 329길 17일원 196 봉덕(신)시장 남구 봉덕로 27길 16일원 323 +종합유통단지 구분 계 전시컨벤션센터 도매단지 기업관 물류단지 지원시설 공공시설용지 면적(㎡) 837,721.1 79,966.0 165,102.6 56,449.2 160,588.3 50,470.8 325,144.2 업체수 2,977 32 2,538 217 108 82 - 대구는 한국의 대표적인 내륙공업지역으로 주종산업인 섬유·금속·기계 공업 부문을 통해 지속 성장해 왔다. 과거 섬유업체 수가 전채 사업체 중 절반 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섬유공업에 편중된 구조였으나. 2017년 대구시 전체 산업단지 내 업체 수는 기계·금속공장이 3,882개소로 섬유공장 1,736개소보다 비중이 크다. 산업단지 명 위치(구·군) 면적(천m2) 업체수 등급 비고 성서산업단지 달서구, 달성군 다사읍 10,835 2,566 지방 1, 2, 3, 4, 5차 달성산업단지 달성군 논공읍, 구지면 6,820 316 지방 1, 2차 대구염색산업단지 서구 비산7동 855 124 지방 비산염색공단 검단산업단지 북구 검단동 796 323 지방 옥포농공단지 달성군 옥포읍 160 38 농공 구지농공단지 달성군 구지면 193 23 농공 제3공단 북구 노원동 1,094 991 일반 서대구공단 서구 상중이동 2,417 533 일반 현풍공단 달성군 현풍읍 265 8 일반 대구 사이언스 파크 달성군 구지면 265 8 국가 대구 첨단의료복합단지 동구 신서동 1,030 0 국가 2009~2038년 대구는 미래첨단의료 선도도시, 미래형 자동차 선도도시, ICT․IoT 기반의 스마트시티 조성, 청정에너지 글로벌 허브도시 조성을 통한 미래 신성장 산업 육성을 추진하고 있다. 의료산업 분야는 2018년까지 국책연구기관 15개, 의료기업 130개, 양질의 일자리 창출 4,300개, 의료관광객 유치 25,000명을 목표로 「메디시티 대구」 조성에 매진하고 있으며, 첨단의료복합단지의 글로벌 수준 발전과 의료관광의 확대 등을 통해 대구를 세계적인 메디시티로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대구 소재 한국뇌연구원-첨단장비센터 +의료기관 현황(2017년) 계 상급종합 종합병원 병원 요양병원 정신병원 의원 치과병원 치과의원 한방병원 한의원 조산원 부설의원 3,667 4 8 112 61 1 1,714 18 868 2 871 - 8 미래형 자동차산업 분야에서는 전기상용차 생산공장 건립 투자협약, 대동공업-르노삼성 컨소시엄을 통한 1톤급 전기상용차 개발 및 생산 확정, 자율주행자동차 시범운행단지 지정(국토부), 전기자동차 보급 및 충전인프라 구축 등 미래형자동차 선도도시로서의 기반을 조성하고 있다. 2017년 대구국제미래자동차엑스포 스마트시티 분야에서는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지역혁신플랫폼인 ‘대구형 스마트시티’ 조성하기 위하여 ICT·IoT(사물인터넷) 융합기술 경쟁력확보, SW융합 산업육성, ICT융복합스포츠산업 육성을 추진하고 있다. 대구 2017 대한민국ICT융합엑스포 대구광역시는 청정에너지 글로벌 허브도시 조성을 위해 2030년까지 신재생 에너지 보급률 20% 이상, 에너지 소비 15% 절감 목표로 에너지 신사업 Test-bed 구축. 분산전원 및 에너지 효율 극대화, 지역에너지 관련 산업 육성 등을 지속해서 추진하고 있다. 대구 2017 국제그린에너지엑스포 대구광역시와 경상북도 전역을 방송권역으로 하는 민영 방송사인 TBC, 공영 방송사인 KBS대구방송총국, 대구문화방송이 주요 방송사이다. 그 밖에 라디오 방송사는 대구교통방송, CBS 대구방송, 대구극동방송, 대구가톨릭평화방송, 대구불교방송, 대구원음방송, 대구국악방송 등이 있다. 케이블 방송사는 CMB 대구방송, HCN 금호방송, TCN 대구방송, 한국케이블TV푸른방송 등이 있다. 주요 신문사로는 매일신문과 영남일보, 대구신문, 대구일보 등이 있다.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 프로야구단 삼성 라이온즈와 2002년에 창단된 K리그1 대구 FC가 대구를 연고지로 한다. 리그명 팀명 창단연도 홈 경기장 KBO 리그 삼성 라이온즈 1982년 대구삼성라이온즈파크 K리그1 대구 FC 2002년 DGB대구은행파크 한강 이남에서는 대전권(대전, 계룡, 논산)과 함께 주요 국방 도시이기도 하다. 제2작전사령부, 제50보병사단, 제5군수지원사령부 등의 육군 부대와 K2 공군비행장에 공군공중전투사령부, 제2중앙방공통제소, 공군군수사령부, 제11전투비행단 등과 주한 미군 부대 캠프 워커, 캠프 헨리가 대구에 주둔하고 있다. 6.25 전쟁 당시 낙동강 방어선의 전진기지 중 하나였으며 지금도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대구광역시는 다음 도시와 자매결연 또는 우호협력 관계를 맺었다. 도시 국가 자매결연시기 애틀랜타 시 1981년 11월 10일 알마티 시 1990년 11월 26일 칭다오 시 1993년 12월 4일 미나스제라이스 주 1994년 6월 21일 히로시마 시 1997년 5월 2일 상트페테르부르크 시 1997년 11월 3일 플로브디프 시 2002년 10월 24일 타이베이 시 2010년 11월 4일 닝보 시 2013년 6월 8일 밀라노 시 2015년 7월 2일 청두 시 2015년 11월 10일 밀워키 시 2017년 9월 20일 다낭 시 2018년 8월 3일 도시 국가 자매우호시기 양저우 시 2003년 3월 21일 옌청 시 2003년 12월 7일 선양 시 2003년 12월 9일 고베 시 2010년 7월 23일 호찌민 시 2015년 5월 29일 샤오싱 시 2015년 10월 26일 우한 시 2016년 3월 24일 방콕 시 2017년 8월 17일 창사 시 2018년 7월 31일 가오슝 시 2018년 9월 13일 박닌성 2019년 2월 22일 광주광역시(전라남도) 부산광역시 인천광역시 광주광역시 대전광역시 울산광역시 대구광역시청 대구광역시청 홈페이지 대구광역시의회 홈페이지 대구광역시교육청 홈페이지 분류:대한민국의 도시 분류:대한민국의 옛 임시 수도 분류:1995년 설치
좌관상동맥(LCA)와 우관상동맥 (RCA) 관상동맥 우회 수술중인 수술방 관상동맥 (Coronary artery, 冠狀動脈)은 심장의 근육(심근)에 혈류를 공급하는 동맥들을 말한다. 심장 동맥 이라고도 한다. 심장은 온몸에 피를 보내는 펌프로 인체에서 심장에 의해 피를 공급받지 않는 기관이나 조직은 없으며, 심장 자체도 예외가 아니다. 관상동맥은 심장이 필요로 하는 피를 공급하는 동맥과 그 가지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관상동맥은 대동맥의 기시부에서 좌우 두갈래로 분지하며 심장 전체를 둘러싸는데, 둘러싸는 모양이 관(冠)과 같다 하여 관상동맥이라 불린다. 관상동맥은 우(右)관상동맥(RCA)과 좌(左)관상동맥(LCA)이 둘로 나뉘어 이루어진 좌전하행지(LAD)와 좌선회관상동맥(LCx)의 크게 3가지로 나뉜다. 관상동맥의 동맥경화는 관상동맥질환이라 불리며 협심증과 심근경색의 원인이 된다. 분류:심장 분류:동맥
선저우 5호의 임무 휘장 선저우 5호 (神舟五号)는 2003년 10월 15일, 창정(長征) 2F 로켓에 실려 성공적으로 발사된 중화인민공화국 최초의 유인 우주선이다. 선저우 5호는 현지 시각 9시(UTC +8) 정각 간쑤 성 주취안 위성발사센터에서 발사되어, 9시 10분에 궤도로 진입했다. 이 우주선에는 전 전투기 조종사 양리웨이(楊利偉) 중령이 탑승했다. 이 발사로 중국은 소련, 미국에 이어 사람을 우주 궤도에 진입시킨 세 번째 국가가 되었다. 발사 장면은 생중계되지는 않았고, 발사 직후 CCTV를 통해 짧게 소개되었다. 우주선은 지구 궤도를 14회 선회한 다음 발사된 지 21시간 만에 귀환했다. http://space.com/missionlaunches/shenzhou5_launch_031014.html 분류:유인 우주선 분류:선저우 계획 분류:중국국가항천국 분류:중국의 우주 개발 분류:2003년 우주 개발 분류:2003년 10월 분류:2003년 중국
미터 (, , , 기호 m )는 길이나 거리의 SI 단위이다. 이 단위는 현재 진공에서 빛이 1/299,792,458초 동안 진행한 거리로 정의되어 있다. 이러한 정의는 최근에 측정 기술이 길이와 단위를 매우 높은 정확도로 재현할 수 있게 되면서 제안된 것으로, 시간의 경우에는 1013의 정확도로 재현할 수 있다. 미터(m)라는 단어는 ‘’으로부터 유래하였으며, ‘단위’를 뜻하는 ‘’가 그 기원이다. 1790년, 프랑스 정부에서 전 세계적인 단위의 표준을 정할 필요성을 느끼고 미터법을 제정할 당시, 거리의 기준을 지구로 삼았다. 이에 따라 지구 적도에서 북극점까지의 거리를 정확하게 10,000km, 이 거리의 4배인 지구 전체 자오선 길이인 40,000km를 기준으로 하는 미터법이 제정되었다. 참고로 전체 자오선 길이가 아닌, 적도에서 북극점까지 거리인 10,000km를 십진법상의 표준이 된 이유는 당시의 기술 수준으로 남반구 지역에 관측소를 설치하는 것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지리적으로 1m는 적도에서 극점까지 거리의 1000만분의 1을 기준으로 하게 되었다. 1797년 처음 영어에서의 활용이 보고되었다. 초기의 1m의 표준 원기는 금속 물질로 제작했으나, 금속의 특성상 온도와 습기 등의 환경에 따른 미세한 변화가 존재하기 때문에 미터를 정의하는 방법은 시간이 흐르면서 바뀌었다. 1889년 6월부터 1960년 3월까지 미터의 정의로 사용되었던 국제 미터 원기 1793년 남북극과 적도 사이의 거리의 1/10,000,000. 1795년 황동으로 된 임시 미터 원기의 길이. 1799년 백금으로 된 표준 미터 원기의 길이. 1889년 단면이 X자이며, 백금-이리듐 합금으로 된 국제 미터 원기 원형의 길이. 1960년 진공에서 크립톤-86 원자의 2p10과 5d5 준위 사이의 전이에 해당하는 복사 파장의 1650763.73배. 1983년 진공에서 빛이 1/299,792,458초 동안 진행한 거리. (빛의 속력 참고) SI 접두어를 갖는 미터는 다음과 같이 사용한다. 10n 이름 기호 10n 이름 기호 100 미터 m 101 데카미터 dam 10−1 데시미터 dm 102 헥토미터 hm 10−2 센티미터 cm 103 킬로미터 km 10−3 밀리미터 mm 106 메가미터 Mm 10−6 마이크로미터 µm 109 기가미터 Gm 10−9 나노미터 nm 1012 테라미터 Tm 10−12 피코미터 pm 1015 페타미터 Pm 10−15 펨토미터 fm 1018 엑사미터 Em 10−18 아토미터 am 1021 제타미터 Zm 10−21 젭토미터 zm 1024 요타미터 Ym 10−24 욕토미터 ym *프랑스원정대의 자오선 측정보고서(French Geodesic Mission) A Dictionary of Scientific Units - including dimensionless numbers and scales. 5th Edition 1986. H.G. Jerrard and D.B. McNeill. SI 단위계 History of the metre at the U.S. National Institute of Standards and Technology (NIST) History of the metre at the International Bureau of Weights and Measures (BIPM) Timeline of history of the metre at the NIST Bureau International des Poids et Measures - Lengths 분류:길이의 단위 분류:SI 기본 단위
이토 히로부미 (, 1841년 10월 16일 ~ 1909년 10월 26일)는 에도 시대 후기의 무사(조슈 번사)이자 일본 제국의 헌법학자, 정치가이다. 일본 제국의 초대 내각총리대신이며 조선통감부의 통감을 역임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 정부의 요직을 거쳤으며, 일본 제국 헌법의 기초를 마련하고, 초대·제5대·제7대·제10대 일본 제국 내각 총리대신을 역임했다. 또한 초대·제3대·제8대·제10대 추밀원 의장,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 귀족원 의장, 관선 효고현 지사 등을 지냈다. 입헌정우회를 결성해 원로로 활동했다. 대훈위 종일위()를 받고, 작위는 백작이며, 사후 공작으로 추증되었다. 영국 런던 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 유학하여 화학을 공부하였으며, 훗날 미국 예일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1887년부터 1889년 2월까지 약 3년간에 걸쳐 일본 제국 헌법 제정 작업에 참여하였고, 1886년부터는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일본 내에서 각 학교에서 여자 학생을 받아들이고, 여자 대학을 창설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아명은 리스케()로, 후에는 슌스케(, 로 불렸다. ‘슌보’()나 ‘소로카쿠슈진’() 등이라고 불렸으므로, ‘슌보 공’()이라고 쓴 것도 많다. 한국에서는 을사늑약과 관련해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대한제국의 식민지화를 주도한 인물로, 일반적인 일본인의 시각에서는 초기 근대 정치인의 한 사람이자 일본의 근대화에 있어 기여한 중요한 인물로 기억된다.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1909년 6월 14일 통감직을 사퇴하고 추밀원 의장에 임명됐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한국인 안중근이 쏜 총탄 3발을 맞고 피격 20여 분 만에 사망하였다. 사후 메이지 천황으로부터 충정군()에 추봉되었고, 대한제국의 순종 황제는 그에게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Ito as Governor of Korea.jpg|210px|섬네일|왼쪽|한복을 입은 이토. 한국 통감 시대, 전열, 왼쪽에서 두번째가 통감부인 이토 우메코 이토 히로부미는 1841년 10월 16일 조슈 번 스오 국 구마게 군(지금의 야마구치현 히카리 시) 야마구치의 스오구니 촌()에서 농민 출신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래의 그의 성은 하야시 즉, 하야시 가문 출신이었다. 이토의 아버지의 이름은 하야시 주조()였으며 이토 히로부미의 어릴 때 이름은 하야시 리스케()였다. 아버지가 조슈 번의 주겐()계급인 이토 다케베()의 양자가 되면서 성을 하야시에서 이토()로 바꾸었고, 그 역시 양조부의 성을 따서 이토로 성을 바꾸었다. 후에 이토 다케베가 최하급 무사 신분인 아시가루가 되면서 이토도 무사 신분을 얻게 되었다. 어려서 가난한 생활을 하였지만 아버지가 무사인 이토 다케베의 양자가 되면서 그의 가정은 어느정도 여유가 생겼다. 그러나 그의 신분은 미천하였고, 그는 입신양명을 꿈꾸게 된다. 11~12세 때 동네 서당에서 글을 익혔고, 14세에 번의 무사들이 하는 일 중 잡역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문자와 한학, 독서하는 것을 보고 그의 가능성을 알아보는 이가 나타난다. 15세 되던 해에 임무를 띠고 파견된 번사들의 조수로 잔심부름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 그가 모시던 구루하라 료조가 이토 히로부미의 재능을 알아보고 요시다 쇼인을 찾아가 볼 것을 권고한다. Yoshida.jpg|섬네일|200px|스승 요시다 쇼인 이어 구루하라 료조는 요시다 쇼인에게 이토를 소개하는 소개장을 써주어서 보냈다. 1857년 요시다 쇼인()을 만나 그의 사상에 감화받고, 요시다가 운영하는 쇼카손주쿠()에 입학하여 수학하게 되었다. 이후 10대 후반까지 번의 하급 무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요시다 쇼인의 학당에서 수학하였고, 한편으로 기도 다카요시, 이노우에 가오루,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과 교제하게 된다. 신분이 미미하였던 탓에 쇼카손주쿠 생활 초기에 문벌가문 자제들로부터 무시와 박대를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스승 요시다는 신분에 구애됨 없이 그의 재능을 높이 샀고, 그는 요시다의 사상에 감복하여 더욱 학업에 정진하였다. 청년 지사 시절의 이토 히로부미 스승 요시다 쇼인의 동상 1859년 그의 스승인 요시다 쇼인이 처형된 이후 다카스기 신사쿠가 조직한 미다테구미라는 조직의 조직원으로서 여러 테러활동에 가담했다. 그는 부국강병론과 애국사상을 전수한 스승의 가르침을 평생 잊지 않았다. 그는 유교의 충효의 개념과 존왕 사상에 입각하여 막부 타도와 천황의 직할 통치론을 주장하였다. 1863년 1월 영국 공사관에 대한 방화를 시작으로 2월에 막부의 밀정인 우노 도카이 암살에 공범으로 가담했고, 천황 폐위의 전례를 알아봐 달라는 막부의 자문에 응한 것으로 여겨지던 국학자인 하나와 지로와 그의 문하생을 살해했다. 같은 해에 존왕양이 활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기도 다카요시의 시종으로서 준무사()로 한 단계 신분 상승을 하게 된다. Five.jpg|섬네일|120px|왼쪽|영국에 파견된 5명의 유학생 장주 5걸, 좌측 상단에 앉은 이가 이토 히로부미 5월에는 이노우에 가오루가 번에 건의하여 이루어진 영국 유학생 5명 중 한 명으로 선발되었다. 그해 5월말 엔도 긴스케(), 이노우에 마사루() 등 이른바 장주 5걸이라 불리는 청년 지사들과 함께 영국에 파견 되었다. 이때 이토의 짐은 단순하여 1862년에 발행된 오류 투성이인 "영일 번역 사전" 1권과 잠옷 뿐이었다 한다. 그러나 영국에 간 이후 그는 놀라운 속도로 영어를 익혀 기본적인 회화가 가능하였다. 런던 도착 후 화학자인 알렉산더 윌리엄슨 런던 대학교 교수의 저택에서 하숙하면서 그는 영어와 영국식 예의 범절의 지도를 받았다. 런던에서 영어 공부와 함께 박물관과 성곽을 방문하고 해군 시설, 공장 등을 견학하여 견문을 넓혔다. 그는 유교적 대의명분론에 입각한 존왕양이론자였으나 영국 유학 중 영국과 일본의 너무 압도적인 국력의 차이를 목격하고 개국론으로 사상을 전환하게 된다. 그러나 1년간 영국의 신문물을 견학하고 익혔으나 조슈 번과 외국 함대의 전쟁 소식을 듣고 이노우에 가오루와 함께 1864년 6월에 귀국하였다. 이후 이노우에 마사루와 함께 전쟁을 막으려고 중재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한다. 귀국 후 요코하마 도착 후 영국 공사 존 올칵과 통역관 어니스트 새토()를 만나 협상, 중재를 부탁하였으나 거절당한다. 이후 그는 번에 양이 노선 중지를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유리아라스 호로 함장 쿠퍼와의 강화회의에 다카스기의 통역으로 참가했다. 강화회의 직후 이때 양이 파의 암살 계획을 알고 다카스기와 함께 피신해 있기도 했다. 1864년 12월, 조슈 번이 막부와의 싸움에서 막부에 공손한 자세를 보이자 보수파를 타도하기 위한 다카스기 신사쿠의 거병에 참여했다. 이후 메이지 유신까지 번의 토막() 정책을 수행하였다. 이후 강력한 천황제의 필요성을 느낀 그는 그는 막부 타도 운동에 가담하였고, 막부 세력의 타도를 위한 정변을 계획한다. 이때 다카스기 등이 청년 무사 조직을 이끌고 거병한다. 이때 다카스기에게 가장 먼저 달려온 것은 이토였다. 이후 군인들도 참가하는 등 각처에서 세력을 늘려 보수파와 막부 지지세력과 투쟁을 시작, 혁신파 정치 세력을 구성한다. 이후 꾸준한 투쟁 끝에 막부 지지 세력을 타도하고 천황 친정체제 구축에 가담한다. 이후 이토는 이 때를 일컬어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자랑할 수있는 것이 있다면 이 때 가장 먼저 다카스기 씨에게 달려온 것이다"고 말했다. 막부 세력과 지방의 번들을 토벌하는데 성공한 개화파 세력은 전권을 천황에게 양도한다. 이로써 메이지 유신 시대가 열리게 된다. mission members.jpg|210px|섬네일|오른쪽|이와쿠라 사절단. 오른쪽부터 오쿠보 도시미치, 이토 히로부미, 이와쿠라 도모미, 야마구치 나오요시, 기도 다카요시.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이토 히로부미로 개명하고, 조슈 번의 유력자로 영어 등에 통달한 것을 인정받아 정계 입문, 외국 사무국 판사, 관선 효고현 지사, 초대 공부성 장관 등 정부의 요직을 역임했다. 1871년부터 73년까지 이와쿠라 사절단의 일원으로 서양 각국을 시찰했다. 귀국 후 정한론쟁에서는 오쿠보 도시미치, 이와쿠라 도모미 등과 함께 시기상조라는 의견을 표명했다. 논쟁에서 오쿠보와 기도, 이와쿠라 등의 사이를 오가며 만남을 주선하고 계책을 제시해 내치파의 승리에 기여했다. 논쟁이 내치파의 승리로 끝난 직후, 이토는 내각 참의 겸 공부성경이 되었다. 정한 논쟁 이후에는 오쿠보 도시미치가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는 1874년에 오키나와 원주민 피살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대만 침략을 결정했는데 청국과의 전쟁을 우려하며 반대했던 기도는 이에 반발해 사임하게 된다. 하지만 오쿠보로서도 조슈파의 리더인 기도의 협조를 원했기 때문에 이토는 1875년 1월 오사카에서 오쿠보와 기도의 만남을 주선했다(오사카 회의). 이러한 정치적 활동들을 통해 이토는 오쿠보를 비롯한 여러 선배 정치가들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되면서 정치적 실력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1878년 당시 정부 내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오쿠보가 암살되면서 권력에 공백이 나타난다. 이토는 오쿠보의 뒤를 이어 내무상으로 승진했으며 곧 권력 장악을 꿈꾸게 된다. 이때 역시 야심있고 재능있는 정치가인 오쿠마 시게노부와 대립하게 되었다. 달변가이기도 했던 이토는 잇따른 정치적 수완과 달변을 발휘하여 1881년까지 오쿠마와 그의 지지자들을 정부에서 축출했으며, 천황과 정부 고관들을 설득하여 헌법을 제정할 것을 건의했다. 하지만 오쿠마의 딸과 부정한 행위가 발각되어 그의 권력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Emperor.jpg|섬네일|200px|일본 천황 메이지, 그는 이토를 신임하였고 그의 개혁 정책을 전폭 후원하였다. 1877년부터 1878년까지 이른바 유신삼걸로 불리던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가 모두 사망하면서 이토는 정권의 중심이 되었다. 1878년 5월에는 오쿠보의 후임으로 참의 겸 내무경이 되었다. 한편 1879년 말 정부에서 입헌제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지면서 참의 전원이 그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하도록 했는데 1881년 참의 겸 대장경이었던 오쿠마 시게노부는 영국식 내각책임제에 가까운 급진적인 안을 제출했고 이로 인해 같은 해 10월 그 자신과 관련 관료들이 물러나게 되었다. 이를 이른바 메이지 14년 정변이라고 하는데 이토는 이후 헌법 제정을 위해 이듬 해인 1882년 유럽에 건너가서 1883년 8월 귀국 할 때까지 독일 제국을 모델로 헌법을 연구했다. 귀국 후에는 참의 겸 궁내경 겸 궁내성 제도취조국 장관으로서 헌법 초안을 기초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에서 갑신정변이 일어났을 때는 전권대사로 청국에 파견되어 1885년에 톈진 조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같은 해에 입헌제 도입에 앞서 내각 제도가 창설되면서, 초대 총리대신이 되었다. 총리대신으로 있으면서 헌법 및 황실전범의 초안을 완성했으며, 1888년 5월 8일에는 헌법 초안을 심의할 추밀원이 신설되자 스스로 총리를 사임하고 초대 의장이 되었다. 1889년 2월에 헌법이 발포 되자 헌법 제정 공로로 욱일동화대수장()을 받았다. 1887년부터 3년간 그는 일본 제국 헌법 제정에 참여한다. 1887년 나쓰시마()에서 이토는 이노우에 다카시, 가네코 겐타 등과 함께 헌법 초안의 검토를 시작한다. 이때 이토는 자신이 법령에 부족할 수 있다고 판단, 국내와 외국인 법학자들을 불러 자문을 구하기도 한다. 3년간의 논의 끝에 1889년 2월 11일 구로다 내각 하에서 일본 제국 헌법이 발포된다. 헌법이 공포되자 이토는 가족 모임과 여러 공, 사적 모임을 소집하여 헌법에 대해 언급하고 입헌 정치의 중요성, 특히 일반 국민을 정치에 참여시키는 것의 중요성을 주장하였다. 그해 6월 "헌법 정의 해제"를 간행한다. 그 뒤 1892년에는 천황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법치주의적, 국수주의적 정당 결성을 주장하지만, 천황의 반대에 의해 좌절된다. 메이지 헌법 제정 이후 실시된 의회제에서는 1890년 귀족원 의장으로 취임했다. 한편 의회제 시행 이후 여소야대 정국에서 정부는 야당의 예산삭감 투쟁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이에 굴복해 마쓰카타 내각이 1892년 중의원을 해산하자 이토가 다시 총리로 선출되어 제 2차 이토 내각을 조직했다. 이후 총리로서 청일전쟁을 지휘하고 1895년 청국과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한편 그가 총리로 있는 동안 임명한 미우라 고로 주한 일본 공사에 의해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1896년 8월 28일에 총리를 사임하고 이듬 해 5월 영국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 기념 축하 사절로 영국에 갔다. 귀국 후 12월 야당의 공세에 중의원이 해산되자 1898년 1월 12일에 총리로 임명되면서 제 3차 이토 내각이 출범했다. 그러나 총선 후 제 1당이 된 자유당과 제 2당인 진보당이 손잡고 정부의 증세안을 부결시키자 6월 10일 의회를 해산하였다. 이를 계기로 정당 결성의 필요성을 느낀 이토는 신당 창당을 추진했지만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반대에 직면하자 6월에 총리를 사임했다. 1900년 9월 15일에 입헌정우회를 창당하고 총재가 되었으며 야마가타가 총리직을 사임하면서 같은 해 10월 19일에 다시 이토가 총리가 되어 제 4차 이토 내각이 발족하게 되었으나 총리가 된 이후 건강이 악화되어 휴양을 하게 되고, 또한 이토의 대(對)러시아 정책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이 이토 내각을 흔들었기 때문에 1901년 5월 2일 내각의 의견 불일치를 이유로 자진 사퇴하면서 다시 단명 내각으로 그치고 말았다. 1901년 9월부터 구미 순방에 나섰다. 순방 중 10월에 예일대학에서 명예 법학 박사학위를 수여 받았고 11월에는 프랑스를 방문했다. 미국의 예일대는 1901년 10월 23일 창립 2백주년을 맞았는데, 이 행사를 기념해 정우회 총재였던 이토에게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주었다. 학위 수여에는 예일대학 철학과 교수인 조지 트럼벌 래드 박사의 추천이 작용했는데, 그는 이토 히로부미 후작과 함께 한국에서() 라는 글을 쓰기도 했다. 래드는 1906년 일본에 놀러오며 이토의 종용으로 한국을 다녀갔다. 당시 일본은 비밀리에 영국과의 동맹을 추진하고 있었지만 이토는 개인적으로 러시아와의 만한교환 협상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11월 28일 러시아에서의 협상은 성과 없이 끝났고 반면 다음 달 영국 방문에서는 환대 속에 영국 외상과 영일동맹 문제에 관한 의견을 나누게 되었다. 그리고 이토가 1902년 1월 23일 유럽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월 30일 영일 동맹이 성립되었다. 1903년 7월에 다시 추밀원 의장으로 취임했다. 1904년 2월 4일에는 원로로서 어전회의에서 러일전쟁 개시를 결정했다. 전쟁 개시 이후인 3월에는 서울을 방문해서 고종을 알현하고 일본에 대한 협조를 강요했다. Ito and Crown Prince of Korea.jpg|섬네일|오른쪽|180px|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의 황태자 영친왕 이은과 함께 찍은 사진 (1905년) 하세가와 대장과 함께 통감부로 향하는 이토 히로부미 (앞쪽) 러일 강화 조약 체결 이후 1905년 10월 27일 한국과 보호조약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손에 넣는다는 고무라 주타로 외상의 구상이 내각 회의에서 통과된 이후 이토는 한국 정부에 조약을 강요하는 일을 맡았다. 그 해 11월 17일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해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시켰다. 1905년 어느 날, 이토 히로부미는 수원 관광을 갔다가 열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을사늑약에 불만을 품은 조선인 청년 원태우가 던진 돌에 머리를 맞아 중상을 입기도 했다. 원태우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게 된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스스로 통감을 맡았다. 그리고 1906년 3월 이토가 초대 통감(총독)으로 취임해 조선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을 행사했다. 1907년 5월 22일 을사늑약에 공을 세운 이른바 을사오적을 중심으로 하는 새 내각을 조직하도록 했다. 일본에 망명 중이던 박영효를 불러들여 궁내대신으로 삼은 이 내각은 총리대신 이완용, 탁지부대신 고영희, 법무부대신 권중현, 농상공부대신 송병준, 내부대신 임선준, 군부대신 이병무, 학부대신 이재곤(李載崑 또는 李載崐) 등으로 구성되었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그는 대한제국의 황태자 이은의 스승을 자처한다. 유교적 학식이 있었던 그는 이은의 보호자이자 스승이라는 명목으로 그를 데리고 도일한다. 이토는 일본어와 군사 지식을 직접 가르쳤다 한다. Hirobumi.jpg|섬네일|160px|왼쪽|조선통감 재직 시절 1907년 7월 1일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이토 히로부미 앞으로 날아온 한 장의 전문이 한국 황실과 정부를 초긴장 상태로 몰아넣었다. 한국 황제의 밀사를 자처하는 한국인 3명이 헤이그에서 열리고 있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석을 요구하면서 1905년에 일본과 맺은 보호조약은 한국 황제의 뜻이 아니며 따라서 무효 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헤이그 주재 일본공사가 외무성에 보낸 긴급 전문을 다시 외무성이 이토에게 전달한 것이다. 7월 3일 이토는 총리대신 이완용을 통감 관저로 불러 어디서 입수했는지 고종의 밀사를 통해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호소 친서의 초고라는 것을 증거로 제시하면서 이완용을 추궁했다. 이완용은 한때 친러시아파 인물이라 의심받고 있었다. 이토는 이완용에게 "이같은 행위는 보호조약을 위반한 것이며 일본에 대한 적대적 행위이다. 그러므로 일본은 한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협박했다. of the Korean Empire 01.jpg|섬네일|210px|오른쪽|대한제국 황제 고종(일본정부와 이토 히로부미가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물어오자 이완용은 고종의 퇴진이 왕실과 국민들을 지키는 것이라고 판단하게 된다.) 이토의 추궁에 대해 이완용은 우선 이번 사건은 내각에서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고 극구 변명하며 선처를 빌었다. 이에 대해 이토는 "나 역시 이 사건에 책임을 지고 본국 정부의 조치를 기다리는 몸이다. 그런데 어떻게 남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라고 냉정하게 대답했다. 이완용은 이토 앞에서 몸둘 바를 모르고 전전긍긍하다가 거듭 사죄하고 물러 나왔다. 이토는 이어 7월 3일 오후 일본 해군 연습함대의 장교들을 데리고 황제 고종을 알현한 자리에서도 문제의 친서라는 것을 고종에게 보이며 책임을 추궁했다. 이토는 "이와 같은 음흉한 방법으로 일본의 보호권을 거부하려는 것은 차라리 일본에 대해 대해 당당하게 선전포고하는 것만 못하다.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황제가 져야 하며 이런 행동은 일본에 대해 적대적 의도가 있다는 것을 공공연히 드러낸 것으로 협약을 위반한 것이다. 따라서 일본은 한국에 선전을 포고할 수 있는 권리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총리대신에게 통고했다."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 사건으로 이토가 일시 궁지에 몰린 듯한 것은 사실이다. 일본 신문들이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은근히 한국정부에 대한 감독을 소홀히 한 이토의 책임을 거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토와 일본은 이 사건을 오히려 한국 정부의 주권을 말살하기 위한 호기로 역이용하기로 작정하고 우선 총리대신 이완용을 불러 선전포고 운운의 협박을 한 것이다. 이후 이완용은 고종에게 순종의 황제 대리청정을 진언하였고, 고종은 처음에는 그의 대리청정 주장을 거부하다가 수용한다. 고종은 순종에게 양위하기 직전 순종에게 이완용의 진언대로 황제 대리 의식을 거행하게 한다. 그리고 고종은 그해 말 양위한다. 이토는 고종의 양위식에 참석하였다. 이완용은 조칙이 내려진 19일 곧바로 황제 대리 의식을 거행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의식을 집행해야 할 궁내부 대신 박영효가 이를 반발해 병을 핑계로 대궐에 나타나지 않음으로서 식을 치룰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이완용은 자신이 스스로 궁내부대신 임시서리가 되어 7월 19일 황제 대리 의식을 강행했다. 순종의 황제 대리 의식이 있던 7월 19일 그 시간에 반일 단체인 동우회 회원들이 덕수궁에서 2킬로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이완용의 남대문 밖 중림동 집으로 몰려가 집을 완전히 불살라버렸다. 이 사건으로 가재도구는 말할 것도 없고 고서적 등이 모두 타버려 이완용은 10만원 상당의 재산 피해를 입었다. Joong Keun 1908.jpg|섬네일|오른쪽|170px|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한국인 저격조의 한 사람 안중근 의사. 1907년 7월에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1909년 봄, 가쓰라 다로 총리와 고무라 외상은 한국을 강제 합병할 방침을 정하고 이토와 상의했는데, 강제 합병 계획이 없다고 1907년 밝힌 이후 평소 강제 합병에 반대하는 것으로 알려져 온 이토는 이 자리에서 강제 합병에 아무런 이의 없이 동의했다. 강제 합병 방침이 결정된 이후 이토는 1909년 6월 14일에 통감직을 사임하면서 같은 날 추밀원 의장에 임명됐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러시아 재무상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회담하기 위해 만주의 하얼빈 역에 내렸다가 대한의군 참모 중장(大韓義軍 參謨 中將)으로 복무하고 있던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당했다. 향년 69세. 장례는 1909년 11월 4일에 히비야 공원에서 국장으로 치러졌다. 근왕지사로서는 그는 동료들 보다 오래 살았다. (혁명가는 집안에서 죽지 않는다고 한다.)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제국의 재무장관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오게 되었다.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등은 이토가 코콥초프를 만나러 만철열차 편으로 뤼순과 하얼빈을 경유한다는 정보를 대동공보사에서 전해들었으며, 안중근이 이토의 처단을 자원했다. 10월 21일에 대동공보사 기자 이강(李剛)의 지원을 받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안중근은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에 도착했다. 애초엔 둥칭 철도()의 출발지인 창춘의 남창춘() 및 콴청쯔()역과 도착지인, 차이자거우() 및 (다음 역인)하얼빈 의 4개 지점에서 암살하려 했으나 자금, 인력이 부족하여 거사를 도착지(차이쟈거우 또는 하얼빈)로 변경했다. 이에 따라 우덕순과 조도선은 차이쟈거우 역으로 이동하였으며 안중근은 하얼빈 역에서 공격하기로 했다. 차이자거우 역에서의 계획은 이를 수상하게 여긴 러시아 경비병에 의해 실패하였다. 10월 26일 오전 9시, 이토의 열차가 하얼빈에 도착했다. 이토는 코콥초프와 열차 안에서 회담한 후 9시 30분경 러시아 군의 사열을 받기 위해 하차했다. 안중근은 사열을 마치고 열차로 돌아가던 이토를 브라우닝제 반자동권총 M1900으로 저격했다. 안중근은 총탄 일곱 발 중 세 발로 이토를 맞혔고, 나머지 네 발 중 세 발은 각각 그 곁의 수행비서관,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 만철 이사를 맞혔다. 그의 나이 69살이었다. 히로부미 장례 행렬.JPG|섬네일|300px|오른쪽|도쿄 가스미가세키 부근을 지나는 모습 이토는 바로 하얼빈의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과다 출혈로 10월 26일 오전 11시 경 사망했다. 죽음이 확인된 뒤, 그의 시신은 열차편으로 오전 11시 40분 하얼빈 역을 출발하여 오후 6시 장춘 역에서 쉬다가 다시 장춘을 떠나 1909년 10월 27일 밤 다롄에 도착, 만철 병원으로 옮겨졌다. 만철병원의 영안실에서는 방부제인 포르말린 액이 투입되고, 총탄에 뚫린 세 군데에는 반창고를 붙였다. 이어 시신은 일본 천황이 보낸 회나무관에 들어갔다. 일본제국 군함 아키쓰시마()로 운구되었다. 시신은 동해를 출발, 현해탄을 건너 일본 시모노세키와 모지() 사이의 관문해협으로 들어섰다. 이어 11월 1일 오전 11시 도쿄 근처 항구 요코스카 부두에 입항했다. 시신이 도착하기 전, 요코스카 항에는 인파가 몰려 운구가 지체됐다. 11월 1일 오후 1시경 시신은 인파를 비집고 6량으로 편성된 포차(砲車)에 실려, 2일 오후 1시경 신바시 역에 닿았다. 신바시 역 광장은 약 2천명의 출영자로 붐볐다. 시신은 2일 오후 2시 40분경 아카사카 구() 영남판() 추밀원 의장 관저에 도착했다. 이 관저는 이토의 국장 기간 중 국장 사무소로 쓰였다. 추밀원 회의와 내각 회의는 이 장례를 국장으로 결정했다. 시신이 도쿄로 운구되는 동안 장례식 준비는 완료됐고, 호송 의장병 책임자로는 일본 제국 육군 대장이, 국장의 건축 설계자로는 일본 근대건축의 원로인 내장두() 가타야마()가 임명됐다. 당시 정권 강화와 일본 내부의 불만을 해결하기 위해서 일본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정권 안정화를 위하여 일본 국민들을 그의 장례식으로 단결시키기위하여 국장을 강제로 진행하였다. 국장일인 1909년 11월 4일, 관은 오전 9시에 관저를 출발했고 노제는 히비야 공원에서 치뤘다. 오전 10시 반 히비야 공원에서 유럽식으로 열린 이 국장의 참배객들은 대부분 서양복을 입었으며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및 러시아인 외교관들과 내외빈의 조사가 낭독됐다. 50년 친구라는 후작 이노우에 가오루는 낙담이 아주 격했다 는 내용의 조사를 낭독했다. 메이지 천황은 왕정 복고, 유신 공헌, 헌법 초창, 조선 지도 등 공헌 의 결과로 이토를 충정군()으로 추봉하고, 백작에서 공작으로 추증했다. of ito hirobumi nishioi shinagawa tokyo 2009.JPG|섬네일|오른쪽|140px|도쿄 시내에 소재한 이토 히로부미의 묘소 식이 끝나자 이토의 시신은 마차에 옮겨졌다. 영구는 장지인 도쿄도 임원군() 대정정자 곡수분영(, 지금의 도쿄시 시나카와 구() 곡수묘지())에 안장됐다. 그의 묘역은 묘역 1천5백 평을 도쿄시 예산으로 사들였다. 장남인 농상무 서기관 이토 분키치()가 앞장섰고, 시신은 오후 2시 30분 묘지에 도착했다. 매장이 끝나고 유족과 일부 대관들은, 묘역에서 가까우며 천황이 1906년 이토에게 준 저택인 오모리()의 은사관()으로 향했다. 이곳은 현재 시나가와 구에 속하고 광우구락부()가 되어 있다(일본광학공업의 소유). 그 집 앞길은 ‘이토 도로()’라고 불린다. 임시증간호 은 장례 후 6일뒤인 1909년 11월 10일에 발행됐는데 이 책에 이토의 무덤이 실렸다. 대한제국 순종은 11월 4일, 궁내부대신 민병석과 조선민족 대표 조중응을 이 국장에 보내고, 대한제국 황실을 대표해서 이토 가족에게 은사금으로 10만원을 전달했다. 그러나 한국 황실의 이와 같은 반응은 이미 국권이 대부분 넘어간 상황인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고, 일제의 계산된 공작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이후 경성부 종로에 이토를 모시는 사당을 세우고 남산 근처에는 대형 신사인 박문사가 건립하며 조선 각지에 이토의 동상을 세웠으나, 이 동상들은 1945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한 후에는 모두 파괴됐다. 이토 히로부미의 초상화가 그려진 유통된 일본 1,000엔 지폐 (1963년부터 1984년까지 통용됨.) 일본의 근대화를 추진하고 국방력과 국력의 향상에 기여했으며, 일본 근대 헌법의 제정과 일본 양원제의 확립에 기여했다. 1963년 11월 1일에 발행된 세 번째 1,000엔 지폐의 도안으로 이토 히로부미의 초상화가 사용되었으며, 이는 1984년 11월 1일에 인물이 나쓰메 소세키로 바뀔 때까지 유통됐다. 1909년 10월 28일 대한제국 순종은 그에게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일본 헌법 정의 해제》 (1882년) 이토 히로부미의 본래 성씨인 하야시 가문은 뿌리가 오토모(大友) 일족의 파생된 일족, 또는 지역 명에 따온 성이라고 한다. 히로부미 이후에는 이토 라는 성을 사용하였다. 히로부미의 장남 이토 분키치는 1909년 11월 10일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분키치의 이복형제인 이토 히로쿠니()는 공작에 올랐다. (증조부) 이토 야에몬() * (조부) 이토 스구에몬() * (조모) 모리타 미치타네()의 딸 ** (부) 이토 주조(, 1816년 ~ 1896년) ** (모) 이토 고토코() - 아키야마 조자에몬()의 딸 *** (부인) 이토 스미코() *** (부인) 이토 우메코(, 1848년 ~ 1924년) **** (양자) 이토 히로쿠니(, 1870년 ~ 1931년) - 친부는 이노우에 미쓰토() **** (양자부) 이토 다마코() - 다카시마 가에몬(, 역술가)의 장녀 ***** (양손) 이토 히로요시() ***** (양손부) 이토 후쿠코() - 다카하시 고레키요()의 손녀 ****** (양증손녀) 센게 후미코() - 히로요시의 셋째 딸, 센게 다쓰히코(, 이즈모 국조가())의 부인 **** (서장남) 이토 분키치(, 1885년 ~ 1951년) - 본디 히로부미의 서자이나 기다 이쿠자부로()의 장남으로 길러졌고 후에 히로부미의 양자로서 호적에 올려졌다. **** (서장자부) 가쓰라 다로()의 다섯째 딸 **** (서차남) 이토 신이치(, 1890년 ~ 1980년) - 어머니는 신바시의 게이샤 **** (장녀) 이토 사다코() - 요절, 어머니는 우메코 **** (차녀) 스에마쓰 이쿠코() - 어머니는 우메코, 스에마쓰 겐초(, 내무대신)의 부인 **** (삼녀) 니시 아사코() - 어머니는 히로부미의 하녀(女中, 다마 지역 출신), 니시 겐시로(, 루마니아 공사)의 부인 ***** (외손녀) 후지이 세이코() - 니시 겐시로 부부의 딸, 후지이 게이노스케(, 체코슬로바키아 공사)의 부인 ****** (외증손녀) 다쓰케 미요코() - 후지이 게이노스케 부부의 장녀, 다쓰케 가게이치(, 덴마크 공사)의 부인 ****** (외증손녀) 후지사키 후사코() - 후지이 부부의 차녀, 후지사키 마사토(, 일본 최고재판소 판사)의 부인 ******* (외고손) 후지사키 이치로() - 후지사키 마사토 부부의 아들, 외무심의관 ****** (외증손녀) 쓰루미 쓰다코() - 후지이 부부의 셋째 딸, 쓰루미 기요히코(, 스위스 대사)의 부인 ****** (외증손녀) 마쓰모토 에쓰코() - 후지이 부부의 넷째 딸, 마쓰모토 주로(, 방위청 장관)의 부인 ******* (외고손) 마쓰모토 다케아키(, 1959년 ~ ) - 마쓰모토 주로 부부의 아들, 중의원 4선 의원 **** (사녀, 서녀) 오타케 사와코() - 스에마쓰 겐초 부부의 양녀로 입적, 오다케 도라오(, 오다케 다케(, 기계공학자)의 아들)의 부인 조선인 출신의 배정자(裵貞子)를 수양딸이자 제자로 삼았고 역시 조선인 출신의 박중양(朴重陽)을 제자로 삼았다.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화학과 학사 예일 대학교 명예 법학 박사 유교의 춘추대의와 대의명분론에 입각한 존왕양이론자였으나, 국비 시찰단으로 영국에 파견된 이후 영국과 일본의 국력차이에 절망하고 이후 개화론자로 사상을 바꾸게 된다. 이후 그는 영국과 미국과의 수교와 개항, 무역론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1886년 그는 한참 개항과 교육의 중요성을 설파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이토는 여성의 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것은 인식하지 않고 않았다. 그러나 이후 여자 교육의 필요성을 통감하게 된 이토는 우연히 여성 교육을 장려하는 단체를 조직하는데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1886년 여자 교육 장려 회의 창립위원회를 설립하고 위원장에 취임했다. 1887년 이 단체를 한층 발전시켜 정식으로 일본 여성교육 장려 협회를 출범한다. 이후 그는 위원회를 주도하며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일본 각지에 홍보하고 다닌다. 이후 그의 여성 교육의 필요성에 공감한 사와 에이치, 이와사키 등이 참가, 도쿄 여자 대학관(도쿄 여자 대학의 전신)을 창설하는 등 여성 교육의 보급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또한 이토는 일본 여자 대학의 창시자인 진조 나루세()로부터 여대 설립 계획에 협력을 요청을 받자, 이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또한 일본 각지를 다니며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한 결과 일본의 각 학교에서는 여학생도 받아들이게 되었다. 여자 교육자인 쓰다 우메코는 이토와 함께 이와쿠라 사절단의 한사람으로 도미 때 함께 다녀온 뒤로 그와 교류가 있었다. 일본으로 되돌아온 뒤 우메코는 이토에게 영어 교육과 통역을 위해 고용해 이토 집에 머물면서, 이토는 물론 이토의 딸의 가정 교사가되어, 또한 "복숭아 여성 학원"에 영어 교사로도 활동하였다. 우메코는 1885년 이토의 추천으로 여성 학습원에서 독립하여 설립된 여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활동하며 여성 교육에 앞장섰다. 우메코는 이토의 부국강병론에도 적극 동의하게 된다. 정일성, 《이토 히로부미: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지식산업사, 2002) 이종각, 《이토 히로부미:원흉과 원훈의 두 얼굴》 (동아일보사, 2010) 윤덕한, 《이완용 평전》 (도서출판 중심, 1999) 이토 히로부미의 글씨 이토 히로부미 이토는 도쿄에서 한국으로 돌아올 때마다 상궁들에게 시계, 목걸이 등을 선물하였다고 한다. 또 이때 선물한 초콜릿이 한국 최초의 초콜릿이란 설도 있다. 이토를 사살한 대한제국의 안중근은 이토를 동양평화의 파괴 원흉으로 규정하고, 근거로 총 15개 조를 제시했다. 재판, 신문 조서에서 밝혔던 모두 크게 다르지 않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안중근의 이 지적은 1조와 15조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이 이토가 통감으로 있던 시기의 행위와 일치하며, 안중근이 수차 밝힌 내용과 대동소이함을 감안하면 안중근의 저격은 오랜 기간에 바탕한다 하겠다. 이는 20세기 초반의 한국인들이 이토를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 보았는지를 알리는 자료이다. 제1조의 민황후는 명성황후를 지칭한다. 한국 《로스트 메모리즈》 (2002년) - 황영일 《도마 안중근》 (2004년) - 윤주상, 정주환 일본 《바람의 검심 전설의 최후편》 (2014년) - 오자와 유키요시 한국 대원군 (1990년, MBC 조선왕조 오백년 시리즈) - 이묵원 안중근 (1996년, SBS 3.1절 특집드라마) - 박근형 찬란한 여명 (1995년 - 1996년, KBS1) - 김성원 명성황후 (2001년, KBS) - 윤주상 중국 주향공화 (2003년, CCTV) - 히라타 야스유키 일본 대하드라마 (NHK) * 세 자매 (1967년) - 후쿠다 요시유키 * 료마가 간다 (1968년) - 나카무라 아츠오 * 화신 (1977년) - 비토 이사오 * 사자의 시대 (1980년) - 네즈 진파치 * 봄의 물마루 (1985년) - 이타미 주조 * 나는 듯이 (1990년) - 오구라 히사히로 * 료마전 (2010년) - 오노에 히로유키 * 야에의 벚꽃 (2013년) - 카토 토라노스케 * 꽃 타오르다 (2015년) - 게키단 히토리 한국 영웅 (2009년) - 조승룡, 이희정 영웅 (2010년) - 조승룡 영웅 (2011년) - 조승룡, 이희정 영웅 (2012년) - 김도형, 이희정 영웅 (2014년) - 김도형, 이희정 영웅 (2015년) - 김도형, 조승룡 영웅 (2017년) - 김도형, 이정열, 윤승욱 천엔 지폐 박중양 규장각 - 이토가 규장각에서 빼돌린 상당수의 고서들이 현재까지도 일본 궁내청 서릉부(일본왕실 도서관)에 있다 이토 히로부미 이토 히로부미 일본 근대의 초상(일본 국립 도서관) 일본은행권 1,000엔 일본의 묘소 이토 히로부미 이토 히로부미 기념자료관 이토 히로부미 가택 역대 일본제국 총리 분류:1841년 태어남 분류:1909년 죽음 분류:화기에 죽은 사람 분류:이토 공작가 분류:메이지 유신 원로 분류:일본의 내각총리대신 분류:일본의 각료역임자 분류:일본의 외무대신 분류:일본의 암살된 정치인 분류:일본의 암살자 분류:일본의 인물신 (일본 제국) 분류:히카리시 분류:일본 귀족원 의원 분류:일본의 외교관 분류:일본의 공작 분류:일본의 후작 분류:일본의 백작 분류:효고현지사 분류:이와쿠라 사절단 관련자 분류:청일 전쟁 관련자 분류:시모노세키 전쟁 관련자 분류:일본의 러일 전쟁 관련자 분류:동양척식주식회사 관련자 분류:제국주의 분류:지폐의 인물 분류:금척대훈장 수훈자 분류:일본의 사법대신 분류:일본의 내무대신 분류:일본의 인물신 (막말) 분류:일본의 인물신 (일본 제국) 분류:바스 훈장 분류:적수리 훈장 수훈자 분류:대훈위 국화장경식 수훈자 분류:대훈위 국화대수장 수훈자 분류:성 알렉산드르 넵스키 훈장 수훈자 분류:성 마우리조·라자로 훈장 수훈자 분류:러시아 제국 백수리 훈장 수훈자 분류:시나가와구의 역사 분류: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수훈자 분류:훈1등 욱일대수장 수훈자 분류:레지옹 도뇌르 그랑크루아 훈장 수훈자 분류:영국에 거주한 일본인 분류:히카리시의 역사 분류:메이지 시대의 내각총리대신 분류:일본의 무신론자
대한민국의 국기 는 태극기 (太極旗)라 불린다. 태극기는 흰 바탕의 기 위에 짙은 적색과 남색의 태극 문양을 가운데에 두고 검은색의 건·곤·감·리 4괘가 네 귀에 둘러싸고 있다. 태극기의 최초 도안자는 고종이다 . 태극기는 1882년 고종이 조선의 왕을 상징하는 어기(御旗)인 태극 팔괘도 를 일부 변형하여 직접 만들었고, 1882년 5월 22일 조미 수호 통상 조약과 9월 박영효 등 일본 수신사 일행에 의해 사용되었다. 태극기는 조선, 대한제국,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공식 국기로 사용되었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계속 정식 국기로 사용되고 있다. 어기 "태극 팔괘도" 태극기는 1882년 고종의 명을 받아 조선의 왕을 상징하는 어기(御旗)인 "태극 팔괘도"를 일부 변형하여 제작하였다. 1882년 고종은 태극기 제작 과정에 직접 참여하여, 백성을 뜻하는 흰색과 관원을 뜻하는 푸른색과 임금을 뜻하는 붉은 색을 화합시킨 동그라미를 그려넣은 기를 제작하게 하였다. 이는 고종이 계승하고자 했던 정조의 군민일체(君民一體) 사상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깃발은 다소 일본 제국의 국기와 비슷하다고 하여, 김홍집은 “반홍반청(半紅半靑)의 태극 무늬로 하고 그 둘레에 조선 8도를 뜻하는 팔괘를 그리면 일본 국기와 구분이 될 것”이라 하여, 태극기 문양이 정해졌다. 국왕을 상징하는 어기가 아닌 나라를 상징하는 국기를 만들게 된 계기는 청나라의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에서 “조선이 독립국이면 국기를 가져야 한다”라는 글과 함께 4개의 발을 가진 용 모양을 제시해 놓은 데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마건충이 제안한 조선의 국기인 ‘청룡기’는 청의 국기인 ‘황룡기’의 도안에 착안하여 동쪽을 의미하는 색인 청색과 황룡기보다 적은 용의 발의 수를 제시함으로써, 마건충이 말한 “조선이 독립국”이라는 사실과는 거리가 있고, 청의 속국임을 나타내게 하려 했다. 미국 전권특사 슈펠트 제독은 만약 조선이 청나라의 황룡기 와 비슷한 깃발을 게양한다면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하려는 자신의 정책에 위배되는 처사라고 생각해, 조선 대표인 신헌과 김홍집에게 "국기를 제정해 조인식에 사용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1882년 5월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당시 김홍집은 고종의 명을 받들어 역관 이응준에게 지시하여 직접 배 안에서 태극기를 그려서 사용하도록 하였고, 9월 박영효 등 수신사 일행이 일본에 파견되어 갈 때에도 일본의 증기선 메이지마루 배 안에서 직접 태극기를 그려서 사용하였다. 1882년에 고종의 명을 받아 처음 제작되고 사용되었던 태극기 는 1883년 3월 6일(고종 20년 음력 1월 27일) 정식으로 ‘조선국기’로 채택되었다. of Korea (1899).svg|200px|섬네일|대한제국 태극기 1897년(광무 원년) 10월 12일 고종 황제는 대한제국 의 수립을 선포하고, 기존의 태극기를 그대로 대한제국의 국기로 사용하였다.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svg|200px|섬네일|대한민국 임시 정부 태극기 1919년 3월 1일 3·1 운동이 발발하며 전국적인 만세 시위에 태극기가 사용되자 태극기는 항일 운동의 상징으로 각인되었다. 1919년 4월 11일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도 태극기를 사용하였으나 임정 수립 초기에는 태극기를 국기라 칭하지는 않고 단체의 깃발로 사용하다가 1942년부터 한국의 국기를 ‘태극기’라고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선언과 함께 태극기 사용이 자유로워졌고, 태극기는 해방된 조선의 당연한 국기로 인식되어 1946년 1월 14일 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에서도 태극기를 조선 국기로서 게양하였고, 소련 군정 하의 북한 지역에서도 태극기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정권 수립 선포를 앞둔 1948년 7월 8일 최고인민회의 제5차 회의에서 그때까지 내내 사용하던 태극기를 인공기(홍람오각별기)로 교체하였다. of South Korea (cropped).jpg|섬네일|태극기가 게양된 모습, 깃봉은 무궁화이다 Jack of South Korea.svg|섬네일|해군 선수기(船首旗)(선미기(船尾旗)는 태극기 사용) 1948년 7월 12일 대한민국 제헌국회에서 태극기가 국기로 공식 제정되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태극기는 흰 바탕에 태극과 4괘로 구성한다는 원칙만 있을 뿐, 통일된 작도법이 없어 다양한 규격의 태극기가 통용되어 통일의 필요성이 커졌다. 이를 위해 정부가 국기시정위원회를 구성하여 여러 안이 수렴되었으며, 여러 토론 끝에 최종적으로 우리국기보양회 의 안이 채택되었다. 최종적으로 1949년 10월 15일 문교부 고시로서 현행과 같은 태극기 규격이 정해졌다. 1950년 깃봉제작법 제정계기로 태극기가 개정되었으나, 법으로 통합국기로 채택되었다. 1984년 대통령령으로 ‘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이 제정되었고, 2007년 대한민국 국기법 이 제정되어 태극기의 제작, 게양, 취급의 지침이 되고 있다. 세로로 늘여서 게양한 태극기 태극기는 《주역》의 계사상전(繫辭上傳)에서 나와 있는 태극→양의(兩儀)→사상(四象)→팔괘(八卦)라는 우주 생성론을 나타내는 태극도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조선의 태극 팔괘도는 복희 선천 팔괘(伏羲先天八卦)가 아닌 문왕 후천 팔괘(文王後天八卦)이다. 원이 나타나는 태극은 만물을 생성시키는 근원을 의미하며 도교에서는 태소(太素), 탄드라밀지에서는 카르마무드라라고 하며 사고의 개입이 없는 순수하고 완전한 행위를 의미하는 무아전위(無我全爲)의 우주일체가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상징한다. 원 안의 모양은 음양 양의를 나타나고 4괘는 팔괘(八卦)를 대표하는 사정괘(四正卦)를 나타내는 것과 동시에 그 하효(下爻)와 중효(中爻)로 태양(太陽)·소음(少陰)·소양(少陽)·태음(太陰)이라는 사상(四象)도 나타낸다. 구분 이름(卦名) 자연(卦象) 계절(季節) 방위(方位) 사덕(四德) 가정(家庭) 성정(性情) 56px 건(乾) ☰ 천(天, 하늘) 춘(春, 봄) 동(東) 인(仁) 부(父) 강건(健) 56px 감(坎) ☵ 수(水, 물) 동(冬, 겨울) 북(北) 지(知) 중남子 함몰(陷) 56px 곤(坤) ☷ 지(地, 땅) 하(夏, 여름) 서(西) 의(義) 모(母) 유순(順) 56px 리(離) ☲ 화(火, 불) 추(秋, 가을) 남(南) 례(禮) 중녀女 화려(麗) 사괘는 본래 팔괘 중에서 넷을 선택한 것인데, 팔괘는 중국에서 삼황으로 떠받들고 있는 태호 복희가 만든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복희는 동이족으로 서술되고 있으며, 그가 팔괘를 처음 만든 사람이라고 밝힌 것은 《주역》 계사전이 최초이다. 다만 조선에 복희 선천 팔괘가 아닌 그것을 고쳐서 만든 문왕 후천 팔괘를 따르는 까닭은 복희가 팔괘를 만든 까닭이 우주 생성 원리를 설명하려 함인 반면 문왕은 우주 생성 원리를 인간의 치세 원리에 반영(“선천 변위 후천도”에서 이르는 〈“자연조화의 체”를 “인사의 용”에 적용〉한다는 사상)하려고 만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종래 주장에서는 팔괘에서 “넷을 제하여” 만들었다고 하였으나, 근래에는 “선천 변위 후천도”에서 선천 팔괘와 후천 팔괘의 관계를 밝히어 팔괘 가운데 “넷을 선택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태극기의 규격은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의 국기 규격 태극기의 공식 색상은 대한민국국기법 시행령에 지정되어 있다. 색표시방법 먼셀 색 체계 CIE 1931 색 공간 팬톤 색 체계 웹 색상 RGB 빨간색 6.0R 4.5/14 0.5640, 0.3194, 15.3 186 Coated #CD313A 205-49-58 파란색 5.0PB 3.0/12 0.1556, 0.1354, 6.5 294 Coated #0047A0 0-71-160 검은색 N 0.5 N/A N/A #0E0E0E 14-14-14 흰색 N 9.5 N/A N/A #FFFFFF 255-255-255 국경일과 그밖의 지정하는 날에 게양한다. 1월 1일 새해 3월 1일 3·1절 6월 6일 현충일 (조기 게양) 7월 17일 제헌절 8월 15일 광복절 10월 1일 국군의 날 10월 3일 개천절 10월 9일 한글날 국가장(國家葬) 기간 (조기 게양) 정부가 따로 지정하는 날 지방자치단체가 조례 또는 지방의회의 의결로 정하는 날 (해당 지방자치단체에 한함)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공공단체의 청사, 학교, 공항·호텔 등의 국제적인 교류 장소 등에는 연중 국기를 게양하도록 되어 있다. 국기는 24 시간 게양할 수 있으며, 야간 게양 시에는 적절한 조명을 해야 한다. 강우, 강설, 강풍 등으로 인해 국기의 훼손이 우려될 경우에는 하기 해야한다. 국기를 해가 뜬 동안에만 게양하고자 하는 경우, 다음 시각에 맞추어 게양하고 강하한다. 기 간 게양 시각 강하 시각 3월 – 10월 07:00 18:00 11월 – 이듬해 2월 07:00 17:00 2016년에 발생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되자, 박근혜 대통령 지지자를 비롯한 보수 단체들이 퇴진 운동에 대항하기 위해 태극기를 들고 탄핵 반대 시위에 참가하면서 국민들 사이에 국가의 상징인 태극기가 특정 정치 세력의 상징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후 이러한 문제점은 문재인 대통령 취임 후에 이어진 문재인 대통령 퇴진 운동 등 후속 집회에서도 그대로 이어지며, 더불어민주당의 반대함으로 한국경찰이 태극기 집회자를 해산할 계획를 세우며 대기할 때 까지 친박계를 해산할 때까지 태극기집회자를 감시를 하고있다. of the Joseon Navy.svg| 조선 시대 군기인 좌독기 of the king of Joseon.svg| 조선 국왕의 어기 of Korea 1882.svg| 1882년 7월 미국에서 제작한 《해양 국가들의 국기》이라는 제목의 책에 나온 태극기 朝鮮國旗.jpg| 박영효의 태극기 (1882년 9월) 11월작 태극기.jpg| 영국 국립문서보존소에 있는 태극기 (1882년 11월) 高麗國旗.png| 통장장정성안휘편에 수록된, 대청국속 조선국기 (1883년 3월) of Korea (1888, Denny Taegukgi).svg|데니 태극기 (1888년) of Korea (1893).svg| 태극기 (1893년) of Korea (1899).svg| 대한제국 (1897년 ~ 1910년) s Taegukgi.png| 일제 강점기의 태극기(안중근이 혈서로 대한독립이라고 씀)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1919).svg|3·1 운동 당시의 태극기 (1919년) 3·1 운동 당시 평양 숭실학교에서 제작된 국기이다.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svg|대한민국 임시 정부 (1919년 ~ 1945년) countries Korea flag stamp.png|1944 년 11 월에 발표된 미국 우표에 그려진 태극기 Independence Army Marching Flag.svg|독립군의 부대장이 보관하고 있던 진군기(進軍旗) of South Korea (1945-1948).svg| 8·15 광복 당시 태극기. (1945년 ~ 1948년)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의 국기이기도 하였으나, 정부수립 이전 한반도에서 태극기를 사용하였다. of the People s Committee of Korea.svg|8·15 광복 이후 설립된 조선인민공화국의 제2의 국기. (1945년 ~ 1946년) of South Korea (1948-1949).svg|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문교부 지침으로 규정된 태극기. (1948년 ~ 1949년) of South Korea (1949-1997).svg| (1949년 ~ 1997년) 태극기의 건곤감리 배치가 달라졌다. of South Korea.svg| 1997년 이후 사용되는 현행 국기. 태극의 색조가 수정되었다. 뉴욕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 게양 태극기 - 등록문화재 제381호 데니 태극기 - 등록문화재 제382호 미 해병대원 버스비어 기증 태극기 - 등록문화재 제383호 동덕여자의숙 태극기 - 등록문화재 제384호 남상락 자수 태극기 - 등록문화재 제386호 대한독립만세 태극기 - 등록문화재 제387호 김구 서명문 태극기 - 등록문화재 제388호 한국광복군 서명문 태극기 - 등록문화재 제389호 유관종 부대원 태극기 - 등록문화재 제390호 경주 학도병 서명문 태극기 - 등록문화재 제391호 건국법정대학 학도병 서명문 태극기 - 등록문화재 제392호 이철희 사변폭발 태극기 - 등록문화재 제393호 불원복 태극기 - 등록문화재 제394호 명신여학교 태극기·현판·완문 - 등록문화재 제468호 강릉 선교장 소장 태극기 - 등록문화재 제648호 한국의 기 목록 한반도기 국기에 대한 맹세 팔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기 태극기 휘날리며 (영화) 분류:국기 국기
알고리즘 (라틴어, 독일어 Algorithmus, 은 수학과 컴퓨터 과학, 언어학 또는 관련 분야에서 어떠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해진 일련의 절차나 방법을 공식화한 형태로 표현한 것을 말한다. 알고리즘은 연산, 데이터 진행 또는 자동화된 추론을 수행한다. 산법(算法)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알고리즘은 9세기 페르시아의 수학자인 무하마드 알콰리즈미(Muhammad al-Kwarizmi)의 이름을 라틴어화한 algorismus에서 따온 말이다. 영어로 algorithm의 발음 기호는 ӕlgərɪðəm이며 ð는 this ðɪs의 ð 발음이기 때문에, algorithm을 알고리즘으로 읽는 것은 this를 "지스"로, rhythm rɪðəm을 리즘 으로 읽는 것과 마찬가지의 잘못이라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알고리즘이라는 표기가 알고리듬이라는 표기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정지 문제의 결과로 알고리즘이 정지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일반적으로 측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알고리즘에 대해 단순한 직관을 만족하는 형식적인 정의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알고리즘의 공식적인 정의는 없다. 대부분의 알고리즘은 유한한 수의 규칙에 따라 구별 가능한 기호들을 조작하여 입력 정수에서 출력 정수를 생성하기 위한 일반화된 작업을 정의한다. 다음은 좋은 알고리즘의 특징이다. 정밀성 변하지 않는 명확한 작업 단계를 가져야 한다. 유일성 각 단계마다 명확한 다음 단계를 가져야 한다. 타당성 구현할 수 있고 실용적이어야 한다. 입력 정의된 입력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출력 답으로 출력을 내보낼 수 있어야 한다. 유한성 특정 수의 작업 이후에 정지해야 한다. 일반성 정의된 입력들에 일반적으로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알고리즘은 자연어, 의사코드, 순서도, 프로그래밍 언어, 인터프리터가 작업하는 제어 테이블, 유한 상태 기계의 상태도 등으로 표현할 수 있다. 다음은 알고리즘 개발의 정형적인 단계이다. :문제 정의 → 모델 고안 → 명세 작성 → 설계 → 검증 → 분석 (복잡도 등) → 구현 → 테스트 → 문서화 알고리즘을 설계하는 기술에는 운용 과학의 방법, 설계 패턴을 이용하는 방법 등이 있다. 대부분의 알고리즘은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구현되지만, 전기 회로나 생물학적 신경 회로를 사용하기도 한다. 구현 재귀적 알고리즘, 연역적 알고리즘, 결정론적 알고리즘, 근사 알고리즘, 양자 알고리즘 등. 설계 무차별 대입 공격, 분할 정복 알고리즘, 그래프 순회, 분기 한정법, 확률적 알고리즘, 리덕션, 백트래킹 등. 최적화 문제 선형 계획법, 동적 계획법, 탐욕 알고리즘, 휴리스틱 함수 등. 이론적 분야 검색 알고리즘, 정렬 알고리즘, 수치 알고리즘, 그래프 알고리즘, 문자열 알고리즘, 암호학적 알고리즘, 기계 학습, 데이터 압축 등. 입력의 크기가 일 경우, 점근 표기법 를 사용하여 다음과 같이 나타낸다. 에 관계없이 일정 시간 이하에 수행되는 알고리즘이다. 예) 파일의 첫 번째 바이트가 널(null)인지 검사하는 것. 에 비례하는 시간 이하에 수행되는 알고리즘이다. 예) 이진 탐색. 에 비례하는 시간 이하에 수행되는 알고리즘이다. 예) 기수 정렬. 에 대략 비례할 수 있는 시간 이하에 수행되는 알고리즘이다. 예) 정렬 알고리즘. 에 비례하는 시간 이하에 수행되는 알고리즘이다. 예) 최장 공통 부분 수열 문제. 에 비례하는 시간 이하에 수행되는 알고리즘이다. 예) 행렬 곱셈. 과 같은 꼴의 수행 시간 이하에 수행되는 알고리즘이다. 예) 충족 가능성 문제. 즉 과 같은 꼴의 수행 시간 이하에 수행되는 알고리즘이다. 예) 배열의 모든 순열을 검사하는 것. 대부분의 알고리즘은 의 수행 시간을 가진다. 가장 단순한 알고리즘 가운데 하나는 임의로 나열된 숫자들 가운데 가장 큰 수를 찾는 것이다. 다음은 목록 안에 있는 모든 수를 살펴보는 알고리즘이다. Input A list of numbers L . Output The largest number in the list L . if L.size = 0 return null largest ← L 0 for each item in L , do if item > largest , then largest ← item return largest Garbage in, garbage out Introduction to Algorithms 계산 이론 고속 푸리에 변환 라메의 정리 람다 대수 순서도 알고리즘 트레이딩 처치-튜링 명제 추상 기계 휴리스틱 이론 기사의 여행
위키책 로고 위키책 (Wikibooks)은 위키백과의 자매 프로젝트로 2003년 1월 10일에 시작되었다. 프로젝트는 공동으로 집필한 책 형태의 공개 교과서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사이트는 미디어위키 기반이며, 따라서 누구나 편집단추를 눌러 위키책의 내용을 고칠 수 있다. 프로젝트는 영어 위키백과 사용자인 Karl Wick가 고급교육의 기회를 모든 이들에게 확대하기 위해 비용과 제한이 없는 열린 콘텐츠의 생화학, 물리학 등의 교과서를 올려놓을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에 따라 만들어졌다. 프로젝트의 범위(교과서만 할 것인가, 모든 책을 대상으로 할 것인가)와 사이트의 내용에 대한 저작권을 어떤 식으로 해야 할 것인가, 프로젝트의 이름, URL)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버지니아 주의 올드 도미니언 대학교의 학생들은 위키책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교재를 직접 편집, 교재로서 사용하고 있으며 미래에는 교과서의 대체제로서의 가능성이 주목된다고 밝혔다. 위키주니어 (Wikijunior)는 위키책의 서브프로젝트(subproject)로서, 어린이용 책을 다루는 위키이다. 이 프로젝트는 잡지와 웹사이트로 구성되어 있고, 현재 네덜란드어, 독일어, 러시아어, 스페인어, 아랍어, 영어, 이탈리아어, 일본어, 중국어, 카탈루냐어, 터키어, 포르투갈어, 프랑스어, 핀란드어판 위키책에서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위키주니어는 벡 재단()에서 지원을 받고 있다. 위키책 대문 한국어 위키책 분류:위키미디어 프로젝트
MySQL (마이에스큐엘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오픈 소스의 관계형 데이터베이스 관리 시스템(RDBMS)이다. 다중 스레드, 다중 사용자 형식의 구조질의어 형식의 데이터베이스 관리 시스템으로서 오라클이 관리 및 지원하고 있으며, Qt처럼 이중 라이선스가 적용된다. 하나의 옵션은 GPL이며, GPL 이외의 라이선스로 적용시키려는 경우 전통적인 지적재산권 라이선스의 적용을 받는다. 위와 같은 지원 방식은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이 프로젝트에 저작권을 적용하는 방법과 비슷한 JBoss의 모델과 유사하다. 그러나 기반코드가 개인의 소유자에게 저작권이 있고 커뮤니티에 의해 개발되는 아파치 프로젝트와는 다르다. MySQL AB는 또한 MaxDB라고 불리는 MySQL AB와는 기반코드가 다른 데이터베이스 관리 시스템을 판매했으나 2007년 이래로 MaxDB는 SAP AG가 소유하고 있다. 썬 마이크로시스템즈에 10억 달러에 인수되었으나, 썬 마이크로시스템즈가 오라클에 인수되며 같이 넘어갔다. 작동하는 MySQL 워크벤치 MySQL은 관계형 데이터베이스 관리 시스템(RDBMS)으로, 데이터베이스를 관리하거나 자료를 관리하기 위한 GUI 관리툴은 내장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이용자들은 명령 줄 인터페이스 도구들을 이용하거나 또는 데이터베이스를 만들고, 관리하는데, 데이터를 백업하는데, 상태를 검사하고, 데이터베이스 구조를 생성하거는데, 또는 데이터 레코더를 작성하는데 있어서 MySQL 프론트엔드 데스크톱 소프트웨어나 웹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해야 한다. 공식적인 MySQL 프론트엔드 툴인 MySQL 워크벤치는 오라클에 의해 개발되었으며,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공식 툴인 MySQL 워크벤치는 사용자에게 MySQL 데이터베이스 관리를 그래픽적으로 지원하게 하며, 데이터베이스 구조의 설계도 시각적으로 하게 해주는 MySQL AB에 의해 개발된 자유로운 집적 환경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이전의 패키지 소프트웨어였던 MySQL GUI 툴즈를 대체하였다. 여타의 제3자 패키지와 유사하지만, MySQL 현장에서 신뢰할 수 있는 툴로 여겨지고 있으며, 이것은 이용자가 데이터베이스를 설계하고, 모델링, SQL 관리(MySQL 쿼리 브라우저 대체) 그리고 데이터베이스 관리(MySQL Administrator 대체)까지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MySQL 워크벤치는 2가지 판이 존재하는데, MySQL 홈페이지에서 다운받을 수 있는 보통의 자유, 공개 소스인 ‘커뮤니티 판’( Community Edition )과 커뮤니티 판을 확장하여 개선시킨 유료의 ‘스탠더드 판’( Standard Edition )이 존재한다. 응용 프로그램에서 MySQL 데이터베이스에 접근하기 위해 다수의 프로그래밍 언어로 된 API를 사용할 수 있다. 이들 API는 언어에 종속적이다. MySQL은 공식적으로 아래의 프로그래밍 언어를 지원한다. C/C++ C#/F# 볼랜드 델파이 (dbExpress를 통한) 자바 (네이티브 자바 드라이버를 통한) 파이썬 루비 REALbasic (매킨토시 계열) 프리베이직 스몰토크 Eiffel 리스프 펄 Tcl PHP PHP4 PHP5 PHP6 델파이1 델파이2 델파이3 델파이4 델파이5델파이6델파이7델파이8 델파이2007델파이2008델파이2009 파파라치 MySQL은 MyODBC라고 불리는 ODBC 인터페이스를 지원해서 다른 프로그래밍 언어를 지원한다. 그 예로 ASP와 콜드퓨전을 들 수 있다. MySQL은 대부분 ANSI C로 구현되었다. MySQL은 미디어위키와 드루팔과 같은 인기있는 웹 애플리케이션에 사용된다. 그리고 LAMP, MAMP, WAMP (리눅스/매킨토시/윈도-아파치-MySQL-PHP/펄/파이썬) 플랫폼의 데이터베이스 구성체로서 작동하며 버그질라와 같은 오픈소스 버그 추적 도구에도 사용된다. 웹 애플리케이션으로서의 MySQL의 인기는 PHP의 인기도와 맞물려 있다. PHP는 종종 MySQL과 결합되며, 다이내믹 듀오(Dynamic Duo)라는 별칭이 붙었다. 인터넷 상의 여러 웹사이트, 혹은 서적을 통해서 MySQL과 PHP의 연동에 대한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최근의 플랫폼에서는 이들의 연동을 자동으로 해 주는 경우가 있다. 또한 SUN 인수 이후, 중소기업이나 개인용 사이트뿐만 아니라 대기업에서도 점차 관심을 보이고 있다. 위키백과, 구글(검색 엔진은 제외), 페이스북, 트위터, 플리커, 노키아닷컴, 유튜브 등에서 사용하고 있다. Define $now = 12/11/2012 Define $begindate = 01/01/1999 Define $width = 700 Define $warning = 380 # $width - 120 Define $height = 750 ImageSize = width:$width height:$height PlotArea = left:40 right:10 bottom:100 top:20 DateFormat = dd/mm/yyyy Period = from:$begindate till:$now TimeAxis = orientation:ver Alignbars = early Legend = orientation:vertical position:bottom columns:1 ################################################## # Color definitions # ################################################## Colors = id:col5.1 value:rgb(0.4,0.6,1) Legend:Active_Development id:col5.0 value:rgb(1,0.6,0.4) Legend:NO_Active_Development id:col2.0-l1 value:black id:col2.0-l2 value:gray(0.98) id:colbg value:gray(0.98) id:colgrmaj value:gray(0.5) id:colgrmin value:gray(0.8) id:lighttext value:rgb(0.5,0.5,0.5) ScaleMajor = gridcolor:colgrmaj unit:year increment:1 start:$begindate ScaleMinor = gridcolor:colgrmin unit:month increment:3 start:$begindate BackgroundColors = canvas:colbg PlotDat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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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ar:4.0 mark:(line,col2.0-l1) align:center fontsize:S textcolor:red at 01/10/2001 text:"4.0.0 Alfa" shift:(46,-3) at 26/08/2002 shift:(48,-3) text:"4.0.3 Beta" at 14/12/2002 shift:(45,-3) text:"4.0.6 RC" at 15/03/2003 shift:(51,-2) text:"4.0.12 FCS" at 12/02/2004 shift:(40,-3) text:"4.0.18" at 04/03/2005 shift:(40,-3) text:"4.0.24" at 12/02/2007 text:"4.0.30" shift:(0,5) ################################################## # 4.1 filled bar # ################################################## bar:4.1 width:40 from:03/04/2003 till:01/12/2008 color:col5.0 mark:(line,col5.0) ################################################## # 4.1 line for all other versions # ################################################## bar:4.1 mark:(line,col2.0-l2) at 01/12/2003 shift:(0,-15) # 4.1.1 at 28/05/2004 shift:(0,-15) # 4.1.2 at 16/09/2004 shift:(0,-15) # 4.1.5 at 10/10/2004 shift:(0,-15) # 4.1.6 at 14/12/2004 shift:(0,-15) # 4.1.8 at 12/02/2005 shift:(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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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filled bar # ################################################## bar:5.0 width:40 from:22/12/2003 till:21/03/2012 color:col5.0 mark:(line,col5.0) ################################################## # 5.0 line for all other versions # ################################################## bar:5.0 mark:(line,col2.0-l2) at 01/12/2004 shift:(0,-15) # 5.0.2 at 16/04/2005 shift:(0,-15) # 5.0.4 at 26/05/2005 shift:(0,-15) # 5.0.6 at 10/06/2005 shift:(0,-15) # 5.0.7 at 05/07/2005 shift:(0,-15) # 5.0.9 at 27/07/2005 shift:(0,-15) # 5.0.10 at 06/08/2005 shift:(0,-15) # 5.0.11 at 02/09/2005 shift:(0,-15) # 5.0.12 at 10/11/2005 shift:(0,-15) # 5.0.16 at 14/12/2005 shift:(0,-15) # 5.0.17 at 21/12/2005 shift:(0,-15) # 5.0.18 at 31/03/2006 shift:(0,-15) # 5.0.20 at 18/04/2006 shift:(0,-15) # 5.0.20a at 02/05/2006 shift:(0,-15) # 5.0.21 at 24/05/2006 shift:(0,-15) # 5.0.22 at 27/07/2006 shift:(0,-15) # 5.0.24 at 25/08/2006 shift:(0,-15) # 5.0.24a at 12/09/2006 shift:(0,-15) # 5.0.25 at 03/10/2006 shift:(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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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56 at 30/03/2008 shift:(0,-15) # 5.0.56sp1 at 28/04/2008 shift:(0,-15) # 5.0.60 at 27/06/2008 shift:(0,-15) # 5.0.60sp1 at 12/05/2008 shift:(0,-15) # 5.0.62 at 10/06/2008 shift:(0,-15) # 5.0.64 at 09/07/2008 shift:(0,-15) # 5.0.66 at 16/07/2008 shift:(0,-15) # 5.0.66a at 23/10/2008 shift:(0,-15) # 5.0.66sp1 at 04/08/2008 shift:(0,-15) # 5.0.67 at 13/08/2008 shift:(0,-15) # 5.0.68 at 27/09/2008 shift:(0,-15) # 5.0.70 at 24/10/2008 shift:(0,-15) # 5.0.72 at 13/01/2009 shift:(0,-15) # 5.0.72sp1 at 03/12/2008 shift:(0,-15) # 5.0.74 at 30/04/2009 shift:(0,-15) # 5.0.74sp1 at 17/12/2008 shift:(0,-15) # 5.0.75 at 28/01/2009 shift:(0,-15) # 5.0.77 at 06/02/2009 shift:(0,-15) # 5.0.78 at 09/03/2009 shift:(0,-15) # 5.0.79 at 01/05/2009 shift:(0,-15) # 5.0.80 at 01/05/2009 shift:(0,-15) # 5.0.81 at 20/05/2009 shift:(0,-15) # 5.0.82 at 21/07/2009 shift:(0,-15) # 5.0.82sp1 at 29/05/2009 shift:(0,-15) # 5.0.83 at 07/07/2009 shift:(0,-15) # 5.0.84 at 30/09/2009 shift:(0,-15) # 5.0.84sp1 at 11/08/2009 shift:(0,-15) # 5.0.85 at 09/09/2009 shift:(0,-15) # 5.0.86 at 15/10/2009 shift:(0,-15) # 5.0.87 at 03/02/2010 shift:(0,-15) # 5.0.87sp1 at 04/11/2009 shift:(0,-15) # 5.0.88 at 02/12/2009 shift:(0,-15) # 5.0.89 at 05/05/2010 shift:(0,-15) # 5.0.91 at 05/05/2011 shift:(0,-15) # 5.0.93 at 05/07/2011 shift:(0,-15) # 5.0.94 ################################################## # 5.0 line & text for first version every year # ################################################## bar:5.0 mark:(line,col2.0-l1) align:center fontsize:S textcolor:red at 22/12/2003 text:"5.0.0 Alfa" shift:(46,-3) at 27/07/2004 shift:(36,-3) text:"5.0.1" at 23/03/2005 shift:(48,-3) text:"5.0.3 Beta" at 22/09/2005 shift:(48,-8) text:"5.0.13 RC" at 19/10/2005 shift:(51,1) text:"5.0.15 FCS" at 04/03/2006 shift:(40,-3) text:"5.0.19" at 19/01/2007 shift:(50,-3) text:"5.0.30sp1" at 11/01/2008 shift:(52,-3) text:"5.0.50sp1a" at 05/01/2009 shift:(40,-3) text:"5.0.76" at 15/01/2010 shift:(40,-3) text:"5.0.90" at 07/02/2011 shift:(40,-3) text:"5.0.92" at 10/01/2012 shift:(40,-3) text:"5.0.95" at 21/03/2012 shift:(0,5) text:"5.0.96" ################################################## # 5.1 filled bar # ################################################## bar:5.1 width:40 from:25/11/2005 till:$now color:col5.1 mark:(line,col5.1) ################################################## # 5.1 line for all other versions # ################################################## bar:5.1 mark:(line,col2.0-l2) at 29/11/2005 shift:(0,-15) # 5.1.3 at 21/12/2005 shift:(0,-15) # 5.1.4 at 10/01/2006 shift:(0,-15) # 5.1.5 at 01/02/2006 shift:(0,-15) # 5.1.6 at 27/02/2006 shift:(0,-15) # 5.1.7 at 12/04/2006 shift:(0,-15) # 5.1.9 at 25/05/2006 shift:(0,-15) # 5.1.11 at 24/10/2006 shift:(0,-15) # 5.1.12 at 05/12/2006 shift:(0,-15) # 5.1.14 at 25/01/2007 shift:(0,-15) # 5.1.15 at 26/02/2007 shift:(0,-15) # 5.1.16 at 04/04/2007 shift:(0,-15) # 5.1.17 at 08/05/2007 shift:(0,-15) # 5.1.18 at 25/05/2007 shift:(0,-15) # 5.1.19 at 25/06/2007 shift:(0,-15) # 5.1.20 at 16/08/2007 shift:(0,-15) # 5.1.21 at 29/01/2008 shift:(0,-15) # 5.1.23 at 08/04/2008 shift:(0,-15) # 5.1.24 at 28/05/2008 shift:(0,-15) # 5.1.25 at 30/06/2008 shift:(0,-15) # 5.1.26 at 28/08/2008 shift:(0,-15) # 5.1.28 at 11/10/2008 shift:(0,-15) # 5.1.29 at 19/03/2009 shift:(0,-15) # 5.1.31sp1 at 12/02/2009 shift:(0,-15) # 5.1.32 at 13/03/2009 shift:(0,-15) # 5.1.33 at 02/04/2009 shift:(0,-15) # 5.1.34 at 25/06/2009 shift:(0,-15) # 5.1.34sp1 at 13/05/2009 shift:(0,-15) # 5.1.35 at 16/06/2009 shift:(0,-15) # 5.1.36 at 13/07/2009 shift:(0,-15) # 5.1.37 at 10/10/2009 shift:(0,-15) # 5.1.37sp1 at 01/09/2009 shift:(0,-15) # 5.1.38 at 04/09/2009 shift:(0,-15) # 5.1.39 at 06/10/2009 shift:(0,-15) # 5.1.40 at 25/11/2009 shift:(0,-15) # 5.1.40sp1 at 05/11/2009 shift:(0,-15) # 5.1.41 at 15/12/2009 shift:(0,-15) # 5.1.42 at 15/01/2010 shift:(0,-15) # 5.1.43 at 25/03/2010 shift:(0,-15) # 5.1.43sp1 at 04/02/2010 shift:(0,-15) # 5.1.44 at 01/03/2010 shift:(0,-15) # 5.1.45 at 06/04/2010 shift:(0,-15) # 5.1.46 at 23/06/2010 shift:(0,-15) # 5.1.46sp1 at 06/05/2010 shift:(0,-15) # 5.1.47 at 02/06/2010 shift:(0,-15) # 5.1.48 at 09/07/2010 shift:(0,-15) # 5.1.49 at 28/09/2010 shift:(0,-15) # 5.1.49sp1 at 03/08/2010 shift:(0,-15) # 5.1.50 at 10/09/2010 shift:(0,-15) # 5.1.51 at 11/10/2010 shift:(0,-15) # 5.1.52 at 21/02/2011 shift:(0,-15) # 5.1.52sp1 at 03/11/2010 shift:(0,-15) # 5.1.53 at 26/11/2010 shift:(0,-15) # 5.1.54 at 01/03/2011 shift:(0,-15) # 5.1.56 at 05/05/2011 shift:(0,-15) # 5.1.57 at 05/07/2011 shift:(0,-15) # 5.1.58 at 15/09/2011 shift:(0,-15) # 5.1.59 at 16/11/2011 shift:(0,-15) # 5.1.60 at 10/01/2012 shift:(0,-15) # 5.1.61 at 21/03/2012 shift:(0,-15) # 5.1.62 at 07/05/2012 shift:(0,-15) # 5.1.63 at 09/08/2012 shift:(0,-15) # 5.1.65 at 28/09/2012 shift:(0,-15) # 5.1.66 ################################################## # 5.1 line & text for first version every year # ################################################## bar:5.1 mark:(line,col2.0-l1) align:center fontsize:S textcolor:blue at 25/11/2005 text:"5.1.3" shift:(36,-8) at 10/01/2006 text:"5.1.5" shift:(36,1) at 25/01/2007 text:"5.1.15" shift:(40,-3) at 24/09/2007 text:"5.1.22 RC" shift:(49,-3) at 29/01/2008 text:"5.1.23" shift:(40,-3) at 14/11/2008 text:"5.1.30 GA" shift:(49,-5) at 19/01/2009 text:"5.1.31" shift:(40,0) at 15/01/2010 text:"5.1.43" shift:(40,-3) at 07/02/2011 text:"5.1.55" shift:(40,-3) at 10/01/2012 text:"5.1.61" shift:(40,-3) ################################################## # 5.5 filled bar # ################################################## bar:5.5 width:40 from:07/12/2009 till:$now color:col5.1 mark:(line,col5.1) ################################################## # 5.5 line for all other versions # ################################################## bar:5.5 mark:(line,col2.0-l2) at 04/01/2010 shift:(0,-15) # 5.5.1 at 12/02/2010 shift:(0,-15) # 5.5.2 at 24/03/2010 shift:(0,-15) # 5.5.3 at 09/04/2010 shift:(0,-15) # 5.5.4 at 06/07/2010 shift:(0,-15) # 5.5.5 at 13/09/2010 shift:(0,-15) # 5.5.6 at 14/10/2010 shift:(0,-15) # 5.5.7 at 12/03/2010 shift:(0,-15) # 5.5.8 at 07/02/2011 shift:(0,-15) # 5.5.9 at 15/03/2011 shift:(0,-15) # 5.5.10 at 07/04/2011 shift:(0,-15) # 5.5.11 at 05/05/2011 shift:(0,-15) # 5.5.12 at 31/05/2011 shift:(0,-15) # 5.5.13 at 05/07/2011 shift:(0,-15) # 5.5.14 at 28/07/2011 shift:(0,-15) # 5.5.15 at 15/09/2011 shift:(0,-15) # 5.5.16 at 19/10/2011 shift:(0,-15) # 5.5.17 at 16/11/2011 shift:(0,-15) # 5.5.18 at 08/12/2011 shift:(0,-15) # 5.5.19 at 10/01/2012 shift:(0,-15) # 5.5.20 at 17/02/2012 shift:(0,-15) # 5.5.21 at 21/03/2012 shift:(0,-15) # 5.5.22 at 12/04/2012 shift:(0,-15) # 5.5.23 at 07/05/2012 shift:(0,-15) # 5.5.24 at 30/05/2012 shift:(0,-15) # 5.5.25 at 05/07/2012 shift:(0,-15) # 5.5.25a at 02/08/2012 shift:(0,-15) # 5.5.27 at 28/09/2012 shift:(0,-15) # 5.5.28 ################################################## # 5.5 line & text for first version every year # ################################################## bar:5.5 mark:(line,col2.0-l1) align:center fontsize:S textcolor:blue at 07/12/2009 text:"5.5.0 M2" shift:(45,-3) at 24/03/2010 text:"5.5.3 M3" shift:(45,-3) at 13/09/2010 text:"5.5.6 RC" shift:(45,-3) at 03/12/2010 text:"5.5.8 GA" shift:(45,-3) at 07/02/2011 text:"5.5.9" shift:(36,0) at 10/01/2012 text:"5.5.20" shift:(40,-3) ################################################## # 5.6 filled bar # ################################################## bar:5.6 width:40 from:11/04/2011 till:$now color:col5.1 mark:(line,col5.1) ################################################## # 5.6 line for all other versions # ################################################## bar:5.6 mark:(line,col2.0-l2) at 11/04/2011 shift:(0,-15) # 5.6.2 at 03/10/2011 shift:(0,-15) # 5.6.3 at 20/12/2011 shift:(0,-15) # 5.6.4 at 10/04/2012 shift:(0,-15) # 5.6.5 at 07/08/2012 shift:(0,-15) # 5.6.6 at 29/09/2012 shift:(0,-15) # 5.6.7 at 07/11/2012 shift:(0,-15) # 5.6.8 at 12/11/2012 shift:(0,-15) # 5.6.9 ################################################## # 5.6 line & text for first version every year # ################################################## bar:5.6 mark:(line,col2.0-l1) align:center fontsize:S textcolor:blue at 11/04/2011 text:"5.6.2 M5" shift:(45,-3) at 04/10/2012 text:"5.6.5 M8" shift:(45,-3) 버전 별 두드러진 특징은 다음과 같다. 1994년 MySQL의 원 개발(마이클 위데니우스와 데이빗 액스마크에 의한) 1995년 5월 최초의 국제화판 3.19 판 1996년 말, www.tcx.se에서 3.20 판 1997년 1월 1998년 1월 8일 윈도 판(Windows 95와 NT) 출시 3.21 판 제품 출시 1998년 www.mysql.com 에서 3.22 판 1998년부터 알파, 베타판 3.23 판 2000년 7월 베타판으로부터, 2001년 1월 22일 제품 출시 4.0 판 2002년 8월 베타판으로부터, 2003년 3월 제품 출시(unions) 4.01 판 2003년 8월 베타판으로부터, Jyoti 데이터베이스 트래킹용으로 MySQL 채택 4.1 판 2004년 6월 베타판으로부터, 2004년 10월 제품 출시 (R 트리와 B 트리, 서브쿼리, prepared statements 지원) 5.0 판 2005년 3월 베타판, 2005년 10월 제품 출시(커서, 저장 프로시저, 트리거, 뷰, XA 트랜잭션 지원) :페더레이티드 스토리지 엔진의 개발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Federated 스토리지 엔진은 proof-of-concept 스토리지 엔진이지만", 주요 MySQL 5.0 판에 포함되어 기본값으로 활성화되어 있다. "MySQL Federated 테이블에 일부 단점들을 정리한 문서 The Missing Manual". 썬마이크로시스템즈는 2008년 MySQL AB를 인수했다. 5.1 판 2008년 11월 27일 출시(이벤트 스케줄러, 파티셔닝, 플러그인 API, 열 기반의 복제, 서버 로그 테이블) :5.1 판에는 5.0에 있던 35개의 현재의 버그 외에 20개의 알려진 크래싱, 그리고 잘못된 결과 버그를 포함하고 있다. (5.1.51판에는 거의 모두 픽스함) . :MySQL 5.1과 6.0은 데이터 웨어하우징으로 사용할 때는 빈약한 성능을 보인다. — 부분적으로 단일 쿼리를 진행할 때 다중 CPU 코어를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오라클이 2010년 1월 27일 썬마이크로시스템즈를 인수했다. MySQL 서버 5.5는 현재 널리 사용가능하다(). 다음과 같은 성능 향상과 특징을 가지고 있다 * 기본 스토리지 엔진이 InnoDB이며, 이것은 트랜잭션과 참조 무결성 제한을 지원한다. * 개선된 InnoDB I/O 서브시스템 * 향상된 SMP 지원 * Semisynchronous 복제. * SQL 표준에 대응한 SIGNAL 과 RESIGNAL 구문. * 유니코드 문자셋 utf16, utf32, 그리고 utf8mb4 지원. * 사용자 정의 파티셔닝에 대한 새로운 옵션. MySQL 서버 6.0.11-알파가 6.0 라인의 최신 판으로 2009년 5월 22일 발표되었다. 이후의 MySQL 서버 개발은 새로운 릴리스 모델을 사용할 것이다. 6.0은 미리 출시판으로 통합될 것이다. MySQL 5.6은 새로운 출시판의 시금석이 될 예정으로 2011년 MySQL 이용자 컨퍼런스에서 소개되었다. 새로운 특징으로 쿼리 옵티마이저에 대한 성능 향상과 InnoDB의 고성능 트랜잰션 결과, 새로운 NoSQL-스타일 메모리 캐시된 API, 대용량 테이블의 조작과 퀘리를 위한 파티셔닝의 성능 향상, 복제와 성능 모니터링 개선을 PERFORMANCE_SCHEMA를 통해 데이터 확장으로 나은 성능을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마리아 DB MySQL 공식 홈페이지 MySQL 5.5 Reference Manual 분류:자유 소프트웨어 분류:데이터베이스 관리 시스템 분류:1995년 소프트웨어 분류:오라클 소프트웨어 분류:GPL 라이선스 소프트웨어 분류:관계형 데이터베이스 관리 시스템 분류:자유 데이터베이스 관리 시스템
비주얼 베이직 (은 마이크로소프트에서 만든 베이직 프로그래밍 언어의 일종으로, 마이크로소프트 비주얼 스튜디오 제품군의 하나이다. 비주얼 베이직은 사건 기반 프로그래밍의 3세대 프로그래밍 언어이면서, 또한 마이크로소프트의 컴포넌트 오브젝트 모델에 따른 풍부한 구성 요소를 가진 통합 개발 환경 및 RAD을 가리키기도 한다. 비주얼 베이직은 초보자가 접근하기 쉬운 장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시각적인 개발 환경과 더불어 베이직 언어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으로 간주된다. 비주얼 베이직은 베이직의 영향을 받았으며, GUI 응용 프로그램의 RAD개발을 가능하게 해 주며, 데이터베이스에 대한 접근을 데이터 액세스 오브젝트, 원격 데이터 오브젝트, 또는 ActiveX 데이터 오브젝트들, 그리고 Active X컨트롤과 개체의 생성을 통해 가능하게 한다. 비주얼 베이직 포 애플리케이션이나 비주얼 베이직 스크립트와 같은 스크립트 언어들은 문법적으로 비주얼 베이직과 유사하지만, 그 기능은 다르다. 프로그래머는 비주얼 베이직에서 제공하는 구성 요소를 응용 프로그램에 삽입할 수 있다. 또한 비주얼 베이직으로 만든 프로그램은 윈도 API를 사용할 수 있으나, 추가적인 외부 함수 선언이 필요하다. 비주얼 베이직의 마지막 버전은 1998년에 출시된 비주얼 베이직 6.0이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연장 지원 기간은 2008년 3월에 끝났으며, 공식적인 후계 제품은 비주얼 베이직 닷넷이다. 비주얼 베이직의 비어있는 폼. 프로그래밍 언어 베이직과 마찬가지로, 비주얼 베이직은 쉽게 배우고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비주얼 베이직은 간단한 GUI기반의 응용 프로그램의 개발 뿐만 아니라, 복잡한 프로그램의 개발까지도 가능하게 한다. 비주얼 베이직에서의 프로그래밍은 폼(Form)위에 놓인, 시적으로 정렬된 GUI 위젯(비주얼 베이직에서는 컨트롤이라고 한다)들의 조합이다. 이 컨트롤들은 특별한 속성과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기능의 확장을 위해 추가적인 코드의 입력이 가능하다. 기본적인 속성과 역할이 이들 컨트롤에 기본값으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간단한 프로그램의 경우 프로그래머는 그다지 많은 코딩 없이 만들 수 있다. 성능상의 문제가 이전 버전에서 많이 보고되었지만, 기술의 발전에 따른 컴퓨터 성능 향상과 원시 코드(Native Code) 컴파일을 통해 이 문제는 많이 사라졌다. 비주얼 베이직 5.0부터 원시 코드로 컴파일된 실행 파일 작성이 가능해 졌지만, 비주얼 베이직으로 작성된 실행 파일은 여전히 1메가바이트 정도 크기의 라이브러리 파일을 필요로 한다. 이 파일은 윈도 2000과 이후 윈도 버전에서 기본적으로 설치되었지만, 그 이전의 윈도 95, 윈도 98, 윈도 NT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때문에 비주얼 베이직으로 만든 실행 파일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이 라이브러리 파일 또한 함께 배포하여야 했다. 폼은 끌어다 놓기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커서를 통해 텍스트 상자, 단추 등과 같은 컨트롤들을 폼 위에 놓는다. 컨트롤들은 속성을 가지며, 이벤트 처리자를 통해 서로 연결된다. 기본값들은 컨트롤이 만들어질 때 함께 제공된 것이지만, 프로그래머에 의해 변경될 수 있다. 많은 속성값들은 프로그램이 실행 중일 때, 응용 프로그램의 사용자의 조작이나 외부 환경의 변화에 의해 변경될 수 있으며, 이것은 동적인 응용 프로그램을 가능하게 해 준다. 예를 들면, 창의 Resize(크기 변경) 이벤트 처리자에 컨트롤들의 위치를 재조정하는 코드를 삽입할 수 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특정 컨트롤이 계속해서 창의 중앙에 위치하게 하거나, 창 전체를 다 채우는 등의 제어를 할 수 있게 된다. 텍스트 상자의 KeyPress(키 눌림) 이벤트 처리자에 코드를 삽입함으로써, 해당 응용 프로그램은 자동적으로 입력된 문자의 대소문자를 변환하거나, 특정 문자의 삽입을 막을 수도 있다. 비주얼 베이직은 실행 파일, ActiveX 컨트롤, DLL 파일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비주얼 베이직의 가장 기본적인 사용 용도는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용 응용 프로그램과 데이터베이스 조작 프로그램의 개발에 있다. 덜 기능적인 대화 상자들은 팝업 능력에 사용된다. 프로그래머가 추가적인 코드를 적당한 이벤트 처리자에 삽입해야 하긴 하지만, 컨트롤들은 응용 프로그램에 기본적인 기능성을 제공한다. 예를 들면, 문자열의 입력이 가능한 드롭 다운 리스트 컨트롤은 자동적으로 자신이 가진 목록을 보여주며, 사용자가 항목을 선택할 수 있게 한다. 사용자에 의해 항목이 선택될 때, 이벤트 처리자가 호출되며, 이 이벤트 처리자는 프로그래머가 추가적으로 코딩한 코드를 처리하는데, 이때 사용자가 선택한 항목의 관련 항목의 출력과 같은, 사용자의 컨트롤에 대한 구체적인 동작에 따른 처리를 할 수 있다. 한편, 비주얼 베이직으로 사용자 인터페이스가 존재하지 않는 프로그램이나 추가적으로 제공되는 컴포넌트 오브젝트 모델을 통한 Active X 개체를 구성할 수도 있다. 이것은 서버 측면에서의 처리나 추가 모듈을 가능하게 해 준다. 비주얼 베이직은 레퍼런스 카운팅을 통한 쓰레기 수집을 수행하며, 방대한 규모의 추가적인 라이브러리들과, 기본적인 객체 지향 프로그래밍을 지원한다. 대다수의 일반적인 위젯들이 초기 프로젝트 구성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비주얼 베이직 프로그래머가 추가적인 라이브러리를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다. 다른 대다수의 프로그래밍 언어와는 달리, 비주얼 베이직은 일반적으로 대소문자 구분을 하지 않으며, 대신에 키워드를 표준 대소문자 설정으로 변환한 뒤, 강제로 변수명의 대소문자를 기호 테이블의 내용으로 변환시킨다. 문자열 비교에 관해서는 대소문자 구분을 하지만, 프로그래머가 원한다면 대소문자 구분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비주얼 베이직의 컴파일러는 다른 비주얼 스튜디오 제품군(C, C++)과 호환성이 있지만, IDE상의 제한으로 인해 윈도 모델 DLL이나 스레드의 사용 등은 불가능하다. 비주얼 베이직은 C 언어 계열의 언어들과 비교했을 때,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C 언어에서 가능한 다중 할당은 불가능하다. 비주얼 베이직에서 코드 A C 는 변수 A, B, C의 값을 같게 하지 않는다. "Is B = C?" 불린 결과값이 A에 들어간다. 결국 A에 들어가는 결과치는 거짓(0) 또는 참(-1)이 될 것이다. 불린 상수 True는 숫자값 -1을 갖는다. 이렇게 처리하는 이유는, 비주얼 베이직에서 불린 자료형은 16비트 부호 있는 정수 형태로 저장되기 때문이다. 이 구조에서 -1은 16진수 1로 계산되고(불린 값은 True이다), 0은 16진수 0으로 계산된다.(불린 값은 False이다.) 이것은 16비트 부호 있는 정수값 0인 Not 연산을 할 때 정수값 -1을 반환하는 것을 통해 명백하게 설명되는데, 다시 말해 True = Not False이다. 이러한 비주얼 베이직의 고유한 처리 방식은 And, Or, Xor, Not과 같은 정수 비트의 논리 연산에 유용하다. 이러한 True의 정의는 1970년대 마이크로소프트가 만들었던 베이직 제품에서의 처리와 일치하며, 이것은 당시의 CPU 명령어의 특성과 관련이 있다. 논리 및 비트 연산자가 통합되어 있다. 이것은 논리 연산자와 비트 연산자가 구분되어 있는 펄과 같은 C 언어 계열의 언어와는 다르다. 이 요소는 베이직언어의 전통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가변 배열 기반이다. 배열의 정의는 파스칼이나 포트란과 같이, 유사한 최대 인덱스(Upper Bound)와 최소 인덱스(Lower Bound)의 지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또한 Option Base 구문을 통해 최소 인덱스의 지정을 할 수 있다. Option Base 문의 사용은 비주얼 베이직 코드를 볼 때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데, 이것을 피하는 최선의 방법은 언제나 명시적으로 배열의 최소 인덱스를 지정하는 것이다. 이 최소 인덱스는 0 또는 1뿐만 아니라, 선언에 따라서는 다른 값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최소 인덱스와 최대 인덱스 모두 프로그래머의 제어가 가능하다. 대조적으로, 서브스크립트 제한적 언어(Subscript-Limited Language)들에서, 배열의 최소 인덱스는 가변적이지 않다. 이러한 독특한 특성은 비주얼 베이직 닷넷에서도 나타나지만, 비주얼 베이직 스크립트에는 없다. OPTION BASE 는 1970년대 후반 ANSI Minimal BASIC을 통해 표준으로 지정되었다. 상대적으로 마이크로소프트 윈도 및 컴포넌트 오브젝트 모델과 강력하게 통합되어 있다. 실수를 정수로 바꿀 때, 기본적으로 Round함수를 통해 반올림을 한다. 반올림 방법으로는 Round-to-even 을 사용한다. 일반적인 나누기 연산자인 /를 통해 자동적으로 정수가 실수로 변환되므로, 짝수 정수부에 의한 홀수 정수부는 직관적으로 올바른 연산 결과를 보여준다. 한편, 자동으로 반올림을 하는 정수 나누기 연산자인 \도 있다. 기본값으로, 만약 변수가 선언되지 않았거나 자료형이 선언되지 않을 경우, 변수는 Variant형으로 선언 된다. 그러나 이것은 DefInt, DefBool, DefVar, DefObj, DefStr와 같은 DefType 구문을 통해 바꿀 수 있다. 비주얼 베이직은 6.0의 경우 12개의 DefType 구문이 지원된다. 기본 형은 특별한 접두어인 #를 통한 선언을 통해 Double형으로, !를 통해 Single형으로, &를 통해 Long 형으로, %형으로 Integer형으로, $를 통해 String형으로, @를 통해 Currency 형으로 오버라이드되거나, 예약어 As (type)를 통해 오버라이드 될 수 있다. 또한 무조건 명시적인 변수 선언만 허용하도록 할 수도 있는데, 이 때는 Option Explicit 명령을 사용한다. 비주얼 베이직 1.0은 1991년 5월 발표되었다. 사용자 인터페이스 개발에 있어서의 끌어다 놓기 방법은 앨런 쿠퍼가 개발한 프로토타입 폼 제작기에서 온 것이며, 쿠퍼가 재직했던 회사에서는 이 프로그램을 트라이포드 라고 불렀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 3.0용 프로그래밍 가능 폼 제작 시스템의 개발을 위해 쿠퍼의 개발팀과 계약 한 후, 프로젝트의 코드네임을 루비 라고 명명하였다. (루비 프로그래밍 언어와는 관계 없다.) 트라이포드는 프로그래밍 언어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았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비주얼 베이직을 만들기 위해 루비와 베이직 언어를 합치기로 결정했다. 루비 인터페이스 개발기는 비주얼 베이직의 "시각적인" 부분이 되었으며, 이것은 다시 마이크로소프트의 취소된 데이터베이스 시스템인 "오메가"용으로 설계된 "EB"(임베디드 베이직 엔진)와 합쳐졌다. 루비는 또한 훗날 비주얼 베이직 확장(VBX)이라고 명명될 추가적인 컨트롤들을 포함하기 위한 DLL 로드 기능을 지원하였다. 버전 5.0에서 Win16 코드와의 호환성을 버리고 전반적인 기능을 강화했다. 버전 6.0에서는 인터넷 관련 기능이 대폭 강화되었다. 비주얼 베이직 닷넷은 기존 버전과 다르게, 닷넷의 일부분으로 동작하고 객체지향 프로그래밍이 강화되었다. 또한 기존 버전과의 호환성이 없기 때문에 기존 비주얼 베이직 코드를 비주얼 베이직 닷넷 코드로 옮겨 주는 마법사가 있다. 그러나 네이티브 비주얼 베이직은 버전 6.0 이후로 마이크로소프트가 완전히 포기하여 사라진 언어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2011년 현재, 프로그래밍 입문 언어로서 시스템에 관한 구체적인 지식(변수, 메모리 등)이 없이도 프로그래밍의 시작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또, 액셀 등 오피스에서 사용되는 VBA 의 문법이 비주얼 베이직 6.0 버전과 호환됨에 따라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입문용으로도 또 실무용으로도 사용하고 있다. 선더(Thunder)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1991년 5월,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열린 컴덱스에서 윈도용 비주얼 베이직 1.0이 발매되었다. 1992년 3월, 도스용 비주얼 베이직 1.0이 발표되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도스 기반 베이직 컴파일러인 퀵베이직과 베이직 전문 개발 체계(BASIC Professional Development System)의 차기 버전으로 개발된 것이기 때문에, 언어적인 특성 자체는 윈도용 비주얼 베이직과 전혀 호환되지 않았다. 도스용 비주얼 베이직은 문자 기반 윈도(Character Oriented Windows)를 사용했으며, 확장 아스키문자를 통해 GUI를 구현해 내었다. 1992년 11월, 비주얼 베이직 2.0이 발매되었다. 프로그래밍 환경이 더욱 쉽게 개선되었으며, 속도 또한 향상되었다. 특히, 폼이 인스턴스적인 개체가되었으며, 이러한 기본적인 클래스 모듈의 개념은 후에 비주얼 베이직 4.0에서 적용된다. 1993년 7월, 비주얼 베이직 3.0이 발매되었다. 이 때는 스탠다드 에디션과 프로페셔널 에디션으로 구분되어 발매되었다. 이 비주얼 베이직 3.0은 제트(또는 액세스)1.x 데이터베이스를 읽을 수 있는 마이크로소프트 제트 데이터베이스 엔진 1.1을 포함하고 있었다. 1995년 8월, 비주얼 베이직 4.0이 발매되었다. 비주얼 베이직 4.0은 32비트와 16비트 윈도 프로그램 둘 다 개발할 수 있는 첫 번째 버전의 비주얼 베이직이었다. 또한 GUI가 없는 클래스를 비주얼 베이직에서 개발할 수 있는 기능이 추가되었다. 비주얼 베이직 4.0 제품들간의 비호환성은 설치와 운영상의 문제를 낳았다. 이전 버전의 비주얼 베이직은 VBX 컨트롤을 써 왔었지만, 비주얼 베이직 4.0은 OLE 컨트롤(확장자가 .OCX인 파일)을 썼다. 이 OLE 컨트롤은 훗날 ActiveX 컨트롤이라고 이름지어진다. 1997년 2월 발매된 비주얼 베이직 5.0은 32비트 버전으로만 발매되었다. 16비트 프로그램의 개발을 계속 했던 프로그래머는 비주얼 베이직 4.0의 소스 코드를 비주얼 베이직 5.0으로 옮길 수 있었으며, 비주얼 베이직 5.0 프로그램이 비주얼 베이직 4.0으로 옮겨 가기도 쉬웠다. 비주얼 베이직 5.0은 또한 사용자 정의 컨트롤을 만들 수 있는 기능, 또한 원시 코드로 윈도용 실행 파일을 컴파일 할 수 있는 기능, 대량의 계산에서의 속도 향상 등의 기능이 추가되었다. Active X 컨트롤의 개발을 위해 다운로드 받을 수 있는 무료 버전 또한 배포되었는데, 이 버전은 일종의 시험판으로, 일반적인 .exe 프로젝트가 IDE에서는 실행되었지만 컴파일되지는 않았다. 1998년 6월, 많은 영역에서 개선을 이룬 비주얼 베이직 6.0이 발매되었다. 특히 비주얼 베이직 6.0은 웹 기반 응용 프로그램의 개발 기능이 추가되었다. 비주얼 베이직 6.0은 2008년 3월 마이크로소프트의 "지원 안함" 단계에 해당 됨으로써 종료되었다. 이처럼 비주얼 베이직 6.0의 개발 환경은 더 이상 지원되지 않기는 하지만, 실행에 필요한 라이브러리는 윈도 비스타, 윈도 서버 2008, 그리고 윈도 7에 계속 지원되고 있다. 2005년 3월 31일, 마이크로소프트 비주얼 베이직 6.0의 주요 지원이 종료되었다. 확장 지원은 2008년 3월 종료되었다. 이에 대하여, 비주얼 베이직 유저 커뮤니티는 우려를 표현하고 제품의 계속적인 지원을 청원하였다. 하지만 마이크로소프트는 기존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흐름도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시기(2005년)에 발표된 마이크로소프트의 새로운 바이러스 검사 소프트웨어인 마이크로소프트 앤티스파이웨어는 비주얼 베이직 6.0으로 개발된 프로그램이었다. 이 프로그램의 대체품인 윈도 디펜더는 C++ 코드로 재작성되어 개발되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여러 스크립트 언어들은 비주얼 베이직으로부터 파생한 것이다. 비주얼 베이직 자체는 베이직과 강력한 연관성을 가지며, 결과적으로 닷넷 프레임워크 플랫폼 버전으로 대체되었다. 다음 언어들은 비주얼 베이직에서 파생한 것이다 비주얼 베이직 포 애플리케이션(VBA)는 많은 마이크로소프트의 응용 프로그램들(특히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및 솔리드웍스, 오토캐드,워드퍼펙트 오피스, 아크GIS, 그리고 ACCPAC와 같은 서드 파티 제품들에 포함되어 있다. 서로 다른 응용 프로그램들간에 약간의 불일치는 존재하지만, 이것들은 전체적으로 비주얼 베이직 6.0과 같은 언어이며, 같은 런타임 라이브러리를 사용한다. 비주얼 베이직 스크립트는 액티브 서버 페이지의 기본 언어이다. 비주얼 베이직 스크립트는 또한 마이크로소프트 윈도 스크립팅과 클라이언트측 웹 페이지 스크립팅에도 사용된다. 비주얼 베이직과 문법적으로 닮아 있지만, 이 언어는 비주얼 베이직 런타임 라이브러리와 대립되는 vbscript.dll을 통해 실행된다는 점에서 두 언어는 구분 된다. ASP와 비주얼 베이직 스크립트는 컴파일된 웹 페이지용 닷넷 프레임워크를 사용하는 액티브 서버 페이지 닷넷과 혼동하지 말것. 비주얼 베이직 닷넷은 마이크로소프트의 비주얼 베이직 6.0의 후속작으로 설계된 제품이며, 마이크로소프트의 닷넷 프레임워크 플랫폼의 일부분이다. 비주얼 베이직 닷넷은 닷넷 프레임워크를 통해 실행되며, 실행 파일을 컴파일한다. 비주얼 베이직 닷넷은 비주얼 베이직 6.0과 하위 호환성이 없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제공하는 Visual Basic 6.0 to Visual Basic .NET Upgrade Assessment Tool 를 이용하여 변환시 생길 수 있는 문제점들을 확인할 수 있다. 스타 베이직은 선 마이크로시스템즈가 개발한 스타 오피스 제품군에 포함되어 있는 인터프리터 언어이며, 비주얼 베이직과 호환성이 있다. 감바스는 비주얼 베이직의 영향을 받은 GNU/리눅스용 자유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밍 언어이다. 감바스는 비주얼 베이직의 클론은 아니지만, 비주얼 베이직 프로그램을 감바스로 변환하는 기능이 있다. K베이직은 비주얼 베이직의 영향을 받은 리눅스, 매킨토시, 윈도용 자유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밍 언어이다. K베이직은 비주얼 베이직의 클론은 아니지만, 비주얼 베이직 프로그램을 K베이직으로 변환하는 기능이 있다. MS는 무료 지원과 중요 업데이트 제공을 끝으로 2005년 3월 말 VB6에 대한 표준 지원을 중단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두 서비스 모두 앞으로 3년 동안은 유료 서비스로 남아있게 된다. MS는 2000년 VB.NET을 내놓았으며 그 후 VB6 이하 버전을 사용하는 개발자들은 끊임없이 감소해왔다. 비주얼 베이직을 등지고 떠난 많은 개발자들은 VB.NET으로 옮겨가지 않고, MS의 언어가 아닌 자바로 옮겨갔다는 설문 조사 결과가 있다. 2005년 현재, 북미 전체 개발자 중 비주얼 베이직 닷넷 개발자가 34%인데 비해 비주얼 베이직 개발자들은 45%다. 기존 VB6 응용 프로그램을 VB 닷넷으로 옮기는 게 어려운 점이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다만 2008년 VB6 SP6에 대한 일부 취약한 보안 문제와 관련된 패치가 있었다. 그리고 마이크로소프트가 추후 공개할 윈도 8부터 비주얼 베이직 및 기반 프로그램들을 더 이상 지원하지 않는다. 다음은 이 언어의 예제 코드이다. 창이 호출되면 "Hello, World!" 메시지 상자를 표시한다 Private Sub Form_Load() Hello, World라는 내용의 메시지 상자를 띄웁니다. MsgBox ("Hello, World!") End Sub 아래 코드는 Count 변수가 1초에 1씩 올라가도록 한다.(작동을 위해서는 타이머 컨트롤이 필요하다) Option Explicit Dim Count As Integer Private Sub Form_Load() Count = 0 Timer1.Interval = 1000 밀리초 단위 End Sub Private Sub Timer1_Timer() Count = Count + 1 lblCount.Caption = Count End Sub 비주얼 베이직 닷넷 프로그래밍 언어의 비교 FreeBASIC – a programming language rooting from QBasic. Gambas - Open source competitor to Visual Basic IIf – a function in several editions of Visual Basic roughly equivalent to the ? ternary operator of C and related languages. 마이크로소프트 비주얼 스튜디오 익스프레스 - a free scaled down version of Visual Basic .NET for independent developers. 창 (컴퓨팅) PowerBasic – A language based on the BASIC- dialect PureBasic – A language based on the BASIC- dialect REALbasic – Competitor to Visual Basic DarkBASIC – harness DirectX from BASIC applications VB 6.0 at MSDN VB 6.0 at MSDN UK Migrating from Visual Basic 6.0 to Visual Basic 2008 (MSDN UK) 분류:베이직 프로그래밍 언어 계열 베이직 분류:1991년 개발된 프로그래밍 언어
디버그 (), 디버깅 ()은 컴퓨터 프로그램의 정확성이나 논리적인 오류(버그)를 검출하여 제거하는 과정을 뜻한다. 일반적으로 디버깅을 하는 방법으로 테스트 상의 체크, 기계를 사용하는 테스트, 실제 데이터를 사용해 테스트하는 법이 있다. 디버거()는 디버그를 돕는 도구이다. 디버거는 주로 원하는 코드에 중단점을 지정하여 프로그램 실행을 정지하고, 메모리에 저장된 값을 살펴보며, 실행을 재개하거나, 코드를 단계적으로 실행하는 등의 동작을 한다. 고급 디버거들은 메모리 충돌 감지, 메모리 누수 감지, 다중 스레드 관리 등의 기능도 지원한다. 안티 디버깅(Anti-Debugging)이란 디버깅을 방해하고 분석을 방해하는 기술이다. 디버깅을 당한다면 해당 디버거 프로그램을 종료시키거나 에러를 발생시키는 방법등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여 분석을 방해한다. 안티 디버깅 기술에는 수 많은 방법이 존재하며 발전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이를 우회하는 기술도 계속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표명 충돌 (컴퓨팅) 디버거 오류 정정 컴퓨터 프로그래밍 소프트웨어 테스트
춘천시 (春川市)는 대한민국 강원도 중서부에 있는 시이자, 강원도청 소재지이다. 태백산맥의 서쪽에 위치하며, 영서 지방의 거점 도시이다. 경춘선 철도의 시·종점이고, 중앙고속도로와 서울양양고속도로가 교차한다. 해발고도 1,000m 이상의 태백산맥 지맥에 둘러싸인 분지 지형이다. 봉의산(301m)을 등지고 북한강과 소양강이 합류하는 충적지에 곡구 시장 취락으로 발달하기 시작하여 현재의 도심을 이루었다. 소양호·춘천호·의암호 등 호수가 많아 하류의 홍수조절과 관광지 및 내륙수로 역할을 한다. 대한민국 육군 제2군단 본부 및 그 예하 부대가 위치하고 있어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지역이다. 시청은 옥천동에 있고, 행정구역은 1읍 9면 15동이다. 춘천 지역은 고대 부족 국가인 맥국의 수도로서 후일 신라에 정복되었으며, 637년(선덕여왕 6년)에 우수주(牛首州)라 부르고 군주(君主)를 두었다. 673년(문무왕 13년)에 수약주(首若州)로 개칭하였고, 경덕왕 때 삭주(朔州)로, 후에 광해주(光海州)로 고쳤다. 940년(고려 태조 23년) 춘주(春州)라 칭하고 고려 성종 14년(995년), 단련사(團練使)를 두어 안변부에 예속, 신종 6년(1203) 도호부로 승격, 지춘주사(知春州事)로 격하되었다. 태종 13년(1413) 춘천으로 고쳐 군이 되고 1415년 도호부, 고종 24년(1887) 춘천 유수군(留守郡)을 두고, 이궁(離宮)을 신축하여 위급할 때의 피난지로 지정했다. 1895년 6월 23일 춘천부 춘천군 1896년 8월 4일 강원도 춘천군 1914년 4월 1일 면·리를 통폐합하였다. :12면 - 부내면, 신북면, 사북면, 서하면, 신남면, 남산외일작면, 남산외이작면, 동산외일작면, 동산외이작면, 서상면, 사내면, 북산외면 1917년 부내면을 춘천면, 동내면으로 분면하고, 남산외일작면은 남면으로, 남산외이작면은 남산면으로, 동산외일작면은 동면으로, 동산외이작면은 동산면으로, 북산외면을 북산면으로 각각 개칭하였다. (13면) 1931년 4월 1일 춘천면을 춘천읍으로 승격하였다. (1읍 12면) 1934년 서상면, 서하면을 서면으로, 남산면, 남면을 남면으로 합면하고, 남면 의암리를 신동면에 편입하였다. (1읍 10면) 1939년 10월 1일 신북면 일부 등을 춘천읍에 편입하고, 신남면과 동내면을 신동면으로 합면하였다. (1읍 9면) 1945년 9월 2일 미국과 소련이 38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함으로써 군역(郡域)의 대부분이 미군정 관할이 되었고, 38선 이북인 사내면 전부과 북산면·사북면의 일부는 소련군정 관할 아래 들어갔다. (1읍 9면 → 1읍 8면) * 11월 소련군정이 38선 이북의 사내면을 김화군에, 그 밖의 춘천군 지역을 화천군에 편입시켰다. 1946년 6월 1일 춘천읍을 춘천부로 승격하였다. 춘천군은 춘성군으로 개칭하였다. (8면) 1949년 8월 15일 춘천부를 춘천시로 개칭하였다. 1953년 7월 27일 한국 전쟁의 결과, 춘천군의 전 지역을 수복하였다. (9면)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에 대한 행정권이 회복되었고, 사내면을 화천군으로 이관하였다. (8면) 1964년 2월 1일 신동면 신촌출장소를 설치하였다. 1967년 12월 5일 남면 발산출장소를 설치하였다. 1973년 7월 1일 신북면 신동리와 신동면 삼천리, 칠전리, 송암리, 서면 현암리 일부와 금산리 일부가 춘천시로 편입, 동산면 북방리가 홍천군 북방면으로, 풍천리가 홍천군 화촌면으로 편입되었다. 1989년 4월 1일 신동면 신촌출장소를 동내면으로, 남면 발산출장소를 남면으로 각각 승격 분리하고 기존 남면은 남산면으로 개칭하였다. (10면) 1992년 2월 1일 춘성군의 명칭을 춘천군으로 환원하였다. 1995년 1월 1일 춘천군 일원과 춘천시 일원을 관할로 도농복합형태의 춘천시가 설치되었다. * 3월 2일 신북면을 신북읍으로 승격하였다. (1읍 9면) 1998년 10월 12일 5천미만의 동사무소를 통폐합했다. 이에 따라 중앙동, 소낙동, 소양동이 소양동으로, 근화동, 호반동이 근화동으로, 약사동, 죽림동이 약사명동으로, 온의동, 삼천동, 칠송동이 강남동으로, 사우동, 우두동, 사농동, 신동이 신사우동으로 통합되었으며, 동조례에 의거 서면 덕두원출장소, 사북면 용산출장소, 북산면 조교출장소가 폐지되었다. (1읍 9면 15행정동) 1999년 춘천시 조례 제338호로 신동면 정족리 일부와 온의동 일부를 칠전동에 편입하였다. 2016년 본래 춘천시청을 철거하고 옛 춘천여자고등학교 부지를 2018년 4월까지 임시청사로 활용했다. 2018년 5월 14일 본래 춘천시청 자리에 춘천시청 신청사를 개청했다. 춘천시는 강원도의 중서부에 있으며, 북한강 지류, 소양강 본류와의 합류점에 가까운 남안에 위치한다. 동쪽으로 인제군, 양구군, 서쪽으로 경기도 가평군, 북쪽으로 화천군, 남쪽으로 홍천군과 접한다. 시의 동 · 서 · 남쪽에는 넓은 춘천 분지가 전개되어 있다. 춘천은 북한강 침식 분지의 중심에 위치하며, 시가는 호수 가운데 발달하여 수향 도시를 이루며, 호반의 도시 라 별칭된다. 시의 중앙부에는 춘천의 진산인 봉의산(鳳儀山)이 솟아 있다. 춘천시의 행정 구역은 15동 1읍 9면 이다. 면적은 1,116.35 km²이고, 이 중 시내 동 면적은 52.66 km²이다. 인구는 2017년 3월 31일 기준으로 116,273세대, 282,439명이다. 성별 인구는 남성 139,427명, 여성 144,092명이다. 읍면동 한자 면적 세대 인구 신북읍 新北邑 57.23 3,495 8,121 동면 東面 134.2 7,251 19,435 동산면 東山面 80.81 733 1,504 신동면 新東面 48.19 1,060 2,542 동내면 東內面 36.62 6,678 16,704 남면 南面 73.2 629 1,132 남산면 南山面 124.11 1,924 3,774 서면 西面 141.64 1,975 4,033 사북면 史北面 152.57 1,394 2,635 북산면 北山面 214.98 588 960 소양동 昭陽洞 1.26 4,765 11,042 교동 校洞 0.5 2,227 3,903 조운동 朝雲洞 0.32 1,734 3,312 약사명동 藥司明洞 0.52 1,752 3,668 근화동 槿花洞 9.59 3,395 7,410 후평1동 後坪一洞 1.86 6,013 12,862 후평2동 後坪二洞 0.67 5,246 13,187 후평3동 後坪三洞 1.21 7,735 18,956 효자1동 孝子一洞 0.65 2,153 5,222 효자2동 孝子二洞 1.16 6,783 12,183 효자3동 孝子三洞 0.85 2,676 5,070 석사동 碩士洞 4.08 15,231 39,045 퇴계동 退溪洞 4.13 16,970 44,653 강남동 江南洞 14.65 7,238 18,042 신사우동 新史牛洞 11.62 7,724 20,098 합계 春川市 1,163.35 116,273 282,439 700px 2014년 국토교통부에서 확정한 20개 중추도시생활권에서 춘천시, 홍천군, 화천군, 철원군, 양구군을 춘천권 으로 규정하고 있다. 춘천시(에 해당하는 지역)의 연도별 인구 추이 연도 총인구 1965년 191,576명 1970년 209,821명 1975년 204,246명 1980년 210,985명 1985년 213,198명 1990년 217,869명 1995년 234,528명 2000년 252,547명 2005년 260,887명 2010년 276,232명 2015년 281,596명 2017년 283,519명 제19~20대 국회의원은 김진태이다. 춘천시·군(춘성군)의 대통령 선거 투표 성향은 여타의 강원도 지역과 비슷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전국 득표율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는 경우도 가끔씩 있었다. 19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윤보선이 41,774표를 얻었고 박정희가 28,984표를 얻었다. 다만 춘성군 지역에서는 박정희에 투표한 비율이 더 높았다. 이런 성향은 1967년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양 후보가 약 2천여표 차로 줄어드는 변화를 겪다가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박정희가 48,607표를 얻고 김대중이 38,802표를 얻는 등 강원도의 일반적인 성향과 비슷해지는 모습을 보였다. 이후 직선제 개헌으로 1987년 16년 만에 직선으로 치러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노태우가 65,431표를 얻었고 김영삼이 34,751표를 얻었으며 김대중이 12,220표를 얻어 전국적으로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후보의 득표율이 비등했던 과는 달리 노태우 후보가 상대적으로 많은 표를 얻었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영삼이 46,580표를 얻었고 김대중이 18,716표를 얻었으며 정주영이 44,675표를 얻어 전국 개표 결과와는 달리 김영삼과 정주영이 거의 비슷한 득표율을 보였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대중 33,598표를 얻었고 이회창이 57,576표를 얻었으며 이인제가 38,011표를 얻어 이인제가 오히려 당선되었던 김대중보다 더 높은 득표율을 보였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이회창 64,221표를 얻었고 노무현 54,187표를 얻었으며 권영길이 6,523표를 얻었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이명박이 66,113표를 얻었고 정동영이 22,632표를 얻었으며 문국현이 9,591표를 얻었다. 가장 최근에 치러진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새누리당 박근혜가 93,414표를 얻었으며 민주통합당 문재인은 69,365표를 획득하였다. 현 시장은 민선 7대로 당선된 제36대 이재수 시장이다. 대수 이름 임기 비고 제1대 정은섭 강원도 춘천군수 제2대 심상대 제3대 박교병 제4대 한기명 제5대 심헌구 제6대 이호직 제7대 김병선 제8대 이상용 제9대 전인걸 제10대 김재웅 제11대 이원규 제12대 이풍섭 제13대 유득춘 제14대 박영찬 제15대 주여준 제16대 박두식 제17대 이원규 제18대 이동진 제19대 김형배 제20대 원낙희 제21대 김명한 제22대 손주용 제23대 한석용 제24대 이길원 제25대 석영철 제26대 배계섭 제27대 김광용 제28대 현영환 제29대 손인완 제30대 김승규 제31대 홍순호 제32대 안구순 제33대 김세기 제34대 이명기 제35대 유재덕 대수 이름 임기 비고 제1대 홍창섭 강원도 춘천시장 제2대 신옥철 제3대 양재익 제4대 이상용 제5대 심헌구 제6대 심헌구 제7대 심헌구 제8대 이병우 제9대 박학주 제10대 최명도 제11대 박달인 제12대 신철균 제13대 전영춘 제14대 원병의 제15대 박종성 제16대 유기천 제17대 최재영 제18대 김종구 제19대 박건주 제20대 엄대현 제21대 이진호 제22대 이판석 제23대 김태옥 제24대 손주용 제25대 이영래 제26대 조성운 제27대 배계섭 제28대 박환주 제29대 김승래 춘천시·춘천군 통합 제30대 배계섭 민선 1기 제31대 배계섭 민선 2기 제32대 류종수 민선 3기 제33대 이광준 민선 4기 제34대 이광준 민선 5기 제35대 최동용 민선 6기 제36대 이재수 민선 7기 시의원 선거구는 총 7개 선거구로 되어 있으며 한 선거구당 2~4명의 의원을 선출하는 중선거구제로 되어있다. 2015년 현재 춘천시의회는 제9대 시의회이다. 1991년 초대 춘천시 · 춘성군의회가 개원하였으며 1995년 통합 시의회가 출범하였고 제2대 의회가 개원하였다. 선거구 지역 가선거구 신동면, 남면, 남산면, 강남동 나선거구 동면, 동산면, 동내면 다선거구 효자1동, 효자2동, 석사동 라선거구 교동, 후평1동, 후평2동, 후평3동, 효자3동 마선거구 신북읍, 서면, 사북면, 북산면 바선거구 소양동, 조운동, 약사명동, 근화동, 신사우동 사선거구 퇴계동 경지 면적 7,015㏊ 중 논 2,222㏊, 밭 ,793㏊이며, 농가 가구 5,878, 농가 인구 15,272이다. 도시인을 상대로 하는 고등채소 및 과일류 등의 근교 원예농업이 활발하며, 주요 농산물은 쌀·콩·저류다. 춘천·의암·소양강·화천(華川) 등의 수력발전소에서 약 40만kW의 전력을 공급받는데다가 공업용수와 노동력이 풍부하여 좋은 공업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지만 상수원보호구역, 군사구역 등 각종 규제때문에 개발이 제한되어있다. 1969년부터 춘천경공업단지가 조성되었으며, 73년 5월 공업장려지구로 지정되었다. 후평공단은 69년 조성된 공업단지로 전자·식품·섬유 등의 약 30개 업체가 입주해 있고, 1985년에 창촌(倉村), 1989년에 퇴계·당림 농공단지가 조성되어 식품·섬유·조립금속기계장비 등의 제조업체가 입주해 있다. 2008년에 거두리 농공단지, 2013년 수동 농공단지가 준공하였다. 금·은·형석 등이 매장되어 있으나, 사북면에 신포형석광이 가행되고 있을 뿐이며, 연간 8천 톤 내외를 채굴하여 주로 일본에 수출한다. 수력자원으로서는 시설용량 4만 5천kW의 의암발전소와 5만 7,600kW의 춘천발전소, 20만kW의 소양강 발전소가 준공되어 대한민국 주요 전력공급지로서 산업 성장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중앙시장·풍물시장 등 6개 시장이 있는데 연간 거래액은 2조여 원에 달하며 그중 약사명동에 위치한 중앙시장이 역사도 오래거니와 규모나 거래액에 있어서도 제일 크며 최근 낭만시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2010년 약사천 복원사업으로 인해 약사동에 위치하였던 풍물시장이 온의동 경춘선 하부 공간으로 이전하였다. 시내에 생산업체가 없기 때문에 생필품은 대부분 서울에서 반입하며 그 밖에 아케이드·백화점이 여러 곳 있어 각종 의류와 귀금속·일용 잡화가 매매되고 있다. 또 사농동에 농산물도매시장이, 퇴계동에 수산물 유통센터가 있어 신선한 농수산물이 싼 값에 신속히 공급되고 있다. M백화점 (조양동) 이마트 춘천점 (온의동) 롯데마트 춘천점 (온의동) 롯데마트 석사점 (석사동) 홈플러스 춘천점 (퇴계동) 소양2교소양2교 소양강댐 해마다 5월에는 소양제가 열린다. 호반의 도시라는 특성을 살리는 다양한 행사가 펼쳐지는데, 봉의산제, 민속놀이, 수상불꽃놀이, 보트 경주대회, 국악경영 등이 진행된다. 봉의산제는 고려 때 몽골군의 침입을 막으려고 봉의산성에서 싸우다 전사한 선현의 넋을 달래는 추모제이다. CGV 춘천 CGV 춘천명동 메가박스 남춘천 강원대학교 백령아트센터 봄내극장 상상마당 춘천 춘천문화예술회관 춘천인형극장 축제극장 몸짓 한림대학교 일송아트홀 춘천은 의암호 · 춘천호 · 소양호로 인해 호반 도시로 전국에 널리 알려져 해마다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데, 연간 1000만여 명에 달하여 관광 수입도 많다. 소양강댐의 주운을 중심으로 내설악의 관광루트가 개발되어 관광도시로서의 면모를 확고히 하고 있다. 관광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고 항공편을 비롯한 각종 교통이 편하다. 호수 외에 공지천 유원지·고산 소금강·추곡약수·등선폭포·구곡폭포 등의 경승지가 있다. 그 밖에 춘천호반에는 중도선사유적지를 비롯해 남이섬, 청평사 등의 관광지가 있다. 강원숲체험장 강촌 강촌 레일파크 고슴도치섬 공지천 구곡폭포 김유정문학촌 강원도립화목원 제이드가든 수목원 집다리골 자연휴양림 용화산 자연휴양림 의암 류인석 유적지 청평사 추곡약수 춘천숲 자연휴양림 꿈자람 물놀이장 어린이 글램핑장 남이섬 춘천댐 춘천호 소양강댐 소양호 의암댐 의암호 의암호 스카이워크 소양강 스카이워크 대추나무골마을 문배마을 물레길 카누체험 별관측소 옥광산 원평팜스테이 춘천 섬배마을 춘천 솔바우마을 강원경찰박물관 강원대학교중앙박물관 강원대학교 미술관 강원도산림박물관 강원드라마갤러리 국립춘천박물관 권진규 미술관 춘천막국수체험박물관 모형항공기박물관 애니메이션박물관 이상원 미술관 춘천미술관 한림대학교박물관 구봉산 전망대 명동 상상마당 춘천 소양강처녀상 엘리시안 강촌 춘천향교 춘천인형극장 물레길 봄내길 자전거길 애견체험박물관 남산면에 조성 중으로 2017년 개장 예정 영어 테마파크 서면에 조성 예정으로 2017년 개장할 예정 레고랜드 코리아 중도에 건설 중으로 2020년 상반기 개장 예정 헬로키티 아일랜드 삼천동에 건설 중으로 2018년 개장 예정 숲체험 교육장 신북읍 삼한골에 어린이 글램핑장, 작은 천문대, 에코 어드벤처, 서바이벌장 등 다양한 체험시설을 조성할 예정으로 2018년 준공 예정 삼악산 로프웨이 삼천동에서 호수를 가로질러 삼악산과 연결되는 관광 삭도시설로 2019년 상반기 준공 예정 김유정문학제 춘천마임축제 춘천아트페스티벌 춘천古음악축제 춘천인형극제 춘천국제연극제 춘천국제애니타운페스티벌 월드디제이페스티벌 춘천 닭갈비·막국수 축제 소양강문화제 의암제 춘천전국인라인마라톤대회 (매년 4월) 함기용세계제패기념춘천호반마라톤대회 (매년 4월) 코리아오픈 춘천국제태권도대회 (격년 6월) 전국MTB강촌챌린지대회 (매년 9월) 조선일보춘천마라톤대회 (매년 10월) 춘천호반마라톤축제 (매년 10월) 국제레저대회 과거, 서울과 춘천 사이를 잇는 철도 노선인 경춘선이 있어 수도권에 접근하는 교통이 비교적 편리한 편이었으며, 2010년 12월 21일, 경춘선이 복선 전철화 개량사업이 완료됨과 동시에 수도권 전철 노선으로 개편되면서, 서울로의 접근성이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개선되었다. 2012년 2월 25일에는 ITX-청춘이 경춘선에서 운행을 시작하였다. 춘천에서 출발하여 대구광역시를 거쳐 부산광역시까지 이어지는 중앙 고속도로가 2001년 개통되고, 2009년, 서울특별시에서 출발하여 춘천을 거쳐 양양군으로 이어지는 서울양양고속도로가 개통되는 등, 타 지역과의 도로 연결망도 잘 갖추어진 편이다. 2016년 7월 8일 서울∼춘천~속초간 동서고속화철도 건설사업이 최종 확정되어 기존 경춘선 복선전철 연장되어 속초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철도 ● 경춘선 (수도권 전철) 가평역 ↔ 굴봉산역 ↔ 백양리역 ↔ 강촌역 ↔ 김유정역 ↔ 남춘천역 ↔ 춘천역 35px 경춘선 (ITX-청춘) 가평역 ↔ 강촌역 ↔ 남춘천역 ↔ 춘천역 (단, 강촌역은 선택정차) 고속도로 중앙고속도로 춘천 나들목 ↔ 춘천 분기점 ↔ 홍천 나들목 서울양양고속도로 설악 나들목 ↔ 강촌 나들목 ↔ 남춘천 나들목 ↔ 동산 요금소 ↔ 조양 나들목 ↔ 춘천 분기점 ↔ 동홍천 나들목 일반 도로 공지로, 금강로, 소양로, 영서로 경춘로, 순환대로, 춘양로 사내천로, 가락재로 서상로, 김유정로 충효로, 소주고개로, 강촌로, 지내고탄로 춘화로 버스 터미널 25px 춘천고속버스터미널 고속 버스 운행 (온의동) 25px 춘천시외버스터미널 시외 버스 운행 (온의동) 춘천시 북산면 조교리와 홍천군 두촌면 자은리를 잇는 마을버스가 2013년 4월 29일 개통하였다. 4륜구동인 쌍용 코란도 투리스모 1대로 운영한다. 강원 FC 1부리그인 K리그 클래식소속으로 강릉종합운동장, 원주종합운동장, 속초종합운동장과 함께 춘천종합운동장을 경기장으로 사용한다. 강원 FC는 2016년 12월 성남 FC와의 승강 플레이오프에서 승리하여 2017년 K리그 클래식으로의 승격에 성공한다. 2017년 부터는 평창 알펜시아 스키점프장을 홈 경기장으로 사용한다. 이후 스플릿 라운드부터 다시 송암레포츠타운을 홈구장으로 사용중이다. 한화 이글스 1986년에 창단해 2015년부터 춘천 의암야구장을 제3경기장으로 사용한다. 하이원 아이스하키단 프로 아이스하키팀으로 아시아리그에 참가하며 춘천 의암실내빙상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한다. 춘천 FC 4부리그 격인 K3 리그에 속한 축구단으로 홈 구장은 춘천송암레포츠타운 내에 위치한 송암주경기장이다. 강원대학교 백령스포츠센터 춘천봄내체육관 춘천호반체육관 한림대학교 한림스포츠센터 춘천송암레포츠타운 강원대학교 함인섭 광장 한림대학교 신관 종합대학 국공립대학교 강원대학교 춘천교육대학교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강원지역대학 사립대학교 한림대학교 전문대학 사립전문대학 송곡대학 한림성심대학교 폴리텍대학 한국폴리텍3대학 사이버대학 서울사이버대학교 강원 제1캠퍼스 고등학교 일반계 강원고등학교 강원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봉의고등학교 성수고등학교 성수여자고등학교 유봉여자고등학교 춘천고등학교 춘천여자고등학교 대안 전인고등학교 특성화 강원애니고등학교 소양고등학교 춘천기계공업고등학교 춘천한샘고등학교 특수목적 강원체육고등학교 춘천고등학교부설방송통신고등학교 춘천여자고등학교부설방송통신고등학교 강서중학교 강원중학교 강원체육중학교 광판중학교 남춘천여자중학교 남춘천중학교 대룡중학교 동산중학교 봉의중학교 소양중학교 신포중학교 우석중학교 유봉여자중학교 창촌중학교 춘성중학교 춘천여자중학교 춘천중학교 후평중학교 가산초등학교 광판초등학교 교동초등학교 근화초등학교 금병초등학교 금산초등학교 남부초등학교 남산초등학교 * 서천분교 남춘천초등학교 당림초등학교 동내초등학교 동부초등학교 동춘천초등학교 만천초등학교 봄내초등학교 봉의초등학교 부안초등학교 상천초등학교 서상초등학교 석사초등학교 성림초등학교 성원초등학교 소양초등학교 송화초등학교 신남초등학교 신동초등학교 오동초등학교 우석초등학교 조양초등학교 중앙초등학교 지촌초등학교 * 지암분교 천전초등학교 추곡초등학교 춘천교육대학교 부설초등학교 춘천삼육초등학교 춘천초등학교 호반초등학교 효제초등학교 후평초등학교 강원명진학교 춘천계성학교 춘천동원학교 체결 연도 도시 이름 국가 1991년 10월 29일 야마구치현 호후 시 2003년 10월 31일 기후현 가카미가하라 시 2003년 11월 28일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2004년 5월 2일 아디스아바바 시 2011년 10월 37일 경기도 안산시 2016년 10월 18일 베트남 달랏시 체결 연도 도시 이름 국가 1994년 9월 1일 저장 성 항저우 시 1998년 11월 14일 랴오닝 성 선양 시 2001년 3월 28일 랴오닝 성 다롄 시 2009년 10월 29일 장쑤 성 창저우 시 2012년 9월 15일 허난 성 난양 시 춘천시청 (공식) 춘천관광포털 사이트 춘천-홍천축 광역 버스정보시스템 춘천생활정보-춘천사랑 춘천관광포털 분류:강원도의 도시 분류:1949년 설치 분류:1995년 폐지 분류:1995년 설치
협업 소프트웨어 , 혹은 그룹웨어 (groupware)는 여러 사용자가 각기 별개의 작업 환경에서 통합된 하나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소프트웨어이다. 로터스 소프트웨어의 로터스 노츠 (Lotus Notes)가 그 효시이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협업 소프트웨어의 가치는 증대되었다. 예를 들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수시로 일정을 기록함으로 인해 일정 기록이 매우 유용해진 것처럼 말이다. 그룹웨어의 확장으로 협업 미디어 가 있을 수 있는데, 이는 여러 명의 사용자가 동시에 웹사이트 내의 정보를 생성하고 관리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이다. 협업 미디어의 예로는 위키와 슬래시닷 (slashdot)을 들 수 있다. 그룹웨어는 협업의 수준에 따라 세 개의 범주로 나뉘어 설명하기도 한다. 이 세 범주는 각각 커뮤니케이션 도구, 회의 도구, 그리고 협업 관리도구이다. 전자적인 커뮤니케이션 도구 는 메시지나 파일, 데이터, 혹은 문서를 사람들 사이에 주고 받을 수 있게 만들어 정보의 공유를 증진시킨다. 그 예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전자 메일 * 팩스 보내기 * 음성 메일 * 웹 전자적인 회의 도구 는 좀 더 상호 대화적인 방식으로 정보의 공유를 증진시킨다. 그 예는 다음과 같다. * 데이터 회의 - 네트워크로 연결된 PC 상에서의 “화이트 보드”를 통한 회의 * 음성 회의 - 전화를 활용한 상호 대화 * 화상 회의 및 음성 회의 * 대화방 * 전자 회의 시스템 (EMS) 협업 관리 도구 들은 그룹 내의 활동을 관리하고 증진시킨다.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전자 캘린더 (일정관리 소프트웨어) * 프로젝트 관리 시스템 * 업무흐름관리 시스템 * 지식 관리 협업 소프트웨어들은 웹 기반일 수도 있고, 데스크톱 PC 상의 소프트웨어일 수도 있다. 또한 최근에는 모바일 사용이 늘어남에 따라 모바일에서의 업무처리 및 커뮤니케이션이 늘어나고 있다. 방법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웹 기반 협업 도구 소프트웨어 협업 도구 영역 별로는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지식 관리 도구 지식 생성 도구 정보 공유 도구 협업 소프트웨어를 도입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은 사람들에게 그것을 쓰도록 유도하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소프트웨어에 익숙해지기까지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래서, 피고용자들이 협업 소프트웨어를 사용하여 기여하는 데에 대한 대가가 있어야 하며, 그 대가는 금전적이거나, 심리적인 형태로 주어진다. 많은 경우 협동작업은 회사의 사내문화와 잘 맞지 않을 수 있으며, 따라서 협업 소프트웨어의 도입이 오히려 불화를 일으킬 수 있다. 경쟁적인 것에서 협동적인 것으로 사내 문화를 바꾸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며, 대부분의 경우 최고경영자를 포함한 조직의 모든 단계의 변화가 요구된다 그룹웨어는 클라우드 기반 협업 서비스 개념으로 발전을 하고 있다. 해외에는 마이크로소프트의 Office 365와 구글의 G.Suite등이 서비스를 하고 있고 최근에는 페이스북도 Worksplace라는 서비스를 내놓으면서 차세대 그룹웨어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국내의 경우 통신사형 그룹웨어, 호스팅형 그룹웨어, 개발형 그룹웨어가 있다. 그룹웨어 * 웹 기반 솔루션 ** phpGroupWare * 분산 솔루션 ** Lucane Groupware 협업 미디어 * 웹 기반 솔루션 * 위키 기반 솔루션들 ** usemod * scoop * SlashCode * everything engine 협업을 위한 개발 도구 소프트웨어 * CVS * RCS * Subversion * Git 마이크로소프트 셰어포인트 워크스페이스 **마이크로소프트 윈도 기반의 P2P 플랫폼 * 마이크로소프트 윈도 서버 기반 마이크로소프트 Office 365 Google G. Suite Facebook Workplace 나눔기술 그룹웨어 더존 Bizbox Alpha 다우오피스 핸디 그룹웨어 구축형/Hybrid형 그룹웨어 가온아이 ezEKP 메트컬프의 법칙 정보 기술 관리 전자 비즈니스 지식 관리 프로젝트 관리 경영학 마케팅 협업 미디어에 대한 Perl 개발자들의 토론 분류:사무용 소프트웨어 분류:컴퓨터 매개 통신
인류학 (人類學은 인간에 관한 모든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연구의 대상과 범위가 매우 광범위하다. 19세기 이후 학문으로서 체계화되었으며 미국과 유럽에서 서로 다른 관심을 갖고 발전되어 왔다. 오늘날 인류학은 보다 전문적인 여러 하위 학문으로 나뉘어 있다. 하위 학문으로는 형질인류학, 고고학, 문화인류학 등이 있다. 형질인류학의 연구분야로는 인간의 기원과 진화를 다루는 분야와 현대 인류의 다양성을 연구하는 분야가 있다. 고고학은 선사시대와 같은 오래된 인류의 유적 등을 연구하여 당시의 문화 등을 규명하는 것을 주요 연구분야로 삼고있다. 문화인류학은 오늘날 다양하게 존재하는 여러 문화들에 대해 총체적으로 연구하는 것이다. 여전히 석기를 사용하는 문화에서부터 현대 산업사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에 대해서 가족, 친족관계, 경제생활, 정치생활, 종교생활과 같은 여러 문화적 생활을 연구하여 해당 사회의 내적 규칙을 발견하고자 한다. 이밖에도 민족학(ethnology), 민속학(folklore) 등을 인류학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오늘날 인류학이라고 하면 사회문화인류학을 지칭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인류학과 연관된 사회나 문화를 중심으로한 연구분야는 많은 현대이론의 형성에 영향을 끼쳤으며 핵심적 기초과학 학문이다. 인류학의 관점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는데, 문화상대주의(cultural relativism)·비교문화론·총체적 접근(holistic approach)이 그것이다. 문화상대주의는 자신만의 관점으로(자신의 문화를 기준으로) 타문화를 평가하는 것을 경계하며 특정한 가치를 절대 기준으로 삼지 않아야 함을 뜻한다. 문화상대주의와 반대되는 용어로는 자민족중심주의 또는 자문화중심주의(ethno-centrism)이다. 비교문화론(또는 비교문화론적 접근)이란 연구대상이 되는 문화를 다른 문화와 상호 비교하여 서술하는 것을 말한다. 절대적인 가치 기준이 없고, 있다 하더라도 문화라는 추상적 대상을 객관적으로 서술할 방법은 없다. 오직 다른 문화와의 비교를 통해 서술할 수밖에 없다. 그래야 인류의 공통적인 문화라는 것에 대하여 그 뿌리나 원리(the root and the nature)를 탐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총체적 접근이란 근대의 다른 학문들처럼 특정한 주제에 한하여 연구를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분석적·기계적 관점으로 인간과 사회를 보는 것을 의식적으로 피하는 것을 뜻한다. 이를 통하여 문화인류학자들은 복잡한 실태를 파악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문화인류학은 총체론적 관점에서 사회와 문화를 정치·종교·역사·경제·법·제도·예술 등등이 기계적으로 통합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이 하나의 총체"로서 종교가 곧 정치이고 정치가 경제이며 경제가 역사라는 안목을 강조한다. 즉 하나의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 인간 개개인의 관념과 행동에 초점을 맞추어 그것이 어떻게 전체와 연결되는지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보통 형질인류학, 문화인류학, 고고학, 언어인류학으로 분류된다. 다양한 민족들에 관한 자연 그대로의 설명과 해석이 인류학의 특징이지만 그 주제나 연구방법이 고유한 것은 아니다. 인류학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듯이 역사와는 다르다. 이는 인류학이 민족·제도·종교 또는 관습에 대한 역사적인 연구를 배제하기 때문이 아니라 문서자료를 통한 설명보다 인간, 인간의 활동, 인간의 생산물에 대해 가능한 한 직접 관찰을 중요시 한다. 또한 이런 모든 연구 결과를 인간에 관한 총체적인 기록의 일부로 볼 뿐 아니라, 인류의 생물학적·문화적인 발전과 관련된 복합적인 과정을 더 깊이 이해하는 데 기여하는 것으로 본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신체·정신의 다양성과 집단적인 차이를 연구한다는 측면에서 인류학의 접근방법은 생리학 또는 심리학과도 다르다. 인류학자들은 인류의 전역사에서 시간과 공간의 측면에서 특정 집단과 활동이 갖는 고유한 특성을 연구하고 해석하려 한다. 형질인류학 은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인간을 진화학적 틀에서 연구한다. 인간이 어떻게 지구상에 넓게 퍼져 살게 되었는가가 관심분야이며 어떻게 지역적으로 인류가 다르게 살고 있는가에 대한 연구등 종족으로서 인류를 연구한다. 문화인류학 은 문화와 사회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민족지같은 현장에서 참여하며 관찰하는 것을 중요시 한다. 고고학 은 물질적 인간문화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유물을 통한 연구가 주로 이루어진다. 언어인류학 혹은 인류학적 언어학은 인간의 의사소통과정을 이해하고자 하는 학문이다. 음성이나 비음성적인 다양한 언어를 시간과 공간, 사회적 언어의 사용 그리고 언어와 문화와의 관련을 연구한다. 인류학은 영국에 전통을 둔 사회인류학, 미국에서 발전해 온 문화인류학, 독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등을 중심으로 형성된 민족학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현대 인류학은 수많은 갈래로 퍼져나가고 있으며, 그중 21세기 초기에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분야 학문 중 개발인류학, 의료인류학 등이 있다. 1600년대 루소와 로크의 인식론적 접근법 1800년대 진화론의 발상과 인종적 분류법 - 스펜서, 타일러 1900년대 초기 보아스 * 보아스는 많은 제자를 두었으며 미국 인류학계의 아버지라 불린다. 그와 그의 제자들은 다양한 문화에 대한 조사기록을 축적했으며 미대륙 인디언의 문화 보존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한편 1920년대에 영국에서는 식민지에 대한 통제가 문제시되면서 사회의 안정을 연구하는 구조주의와 기능주의 인류학이 말리노프스키와 래드클리프브라운에 의해 대두되었다. 영국 구조주의 기능주의 구조기능주의 상징주의 탈근대론 신근대 현대 인류학은 대륙발견시대에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기술적으로 발전해 있던 유럽 문화는 다양한 토착문화와 폭넓게 접촉하게 되었는데, 유럽인들은 이 문화들을 일괄적으로 야만 또는 원시 문화로 규정했다. 19세기 중반에 학문에 대한 종교적인 통제가 약화됨에 따라 인간의 기원, 인종 분류, 비교해부학, 언어와 같은 주제가 유행했고, 1859년 다윈이 〈종의 기원〉 출판을 통해 공식적으로 진화 개념을 언급함에 따라 인류발전과 시간의 흐름에 따른 사회·문화 발전에 대한 연구가 크게 활성화되었다. 당대 유행하던 주제와 비교의 관점, 진화론·우생학 등 학문의 지적 유산에 영향을 받은 인류학은, 친족형태의 진화, 문명의 진화, 종교의 진화 등을 중심적으로 연구하며 인종주의 및 제국주의의 발흥에 기여하기도 했다. 이 때 (19세기 후반) 주류였던 인류학은 단선적인 역사개념을 토대로, 모든 인간집단은 문화적인 진화의 특정 단계들, 즉 야만 또는 미개 상태를 거쳐 문명인 (예를 들면 서구 유럽인) 단계로 발전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같은 시기에 마르크스와 그 영향을 받은 사상가들은 그와는 다른 사회진화론을 주장했다. 마르크스의 이론에 따르면 한 사회의 경제적인 생산양식이 일련의 지배원리를 결정한다. 이 지배원리는 생산양식이 변한 후에도 한동안 지체되는 것이 특징이며, 그결과 지배원리와 생산양식 사이에 갈등이 일어남으로써 새로운 사회질서가 생긴다. 이러한 통일된 이론들은 여행가·상인·선교사 들이 수집한 지식을 바탕으로 씌어진 프레이저 경의 〈황금 가지 The Golden Bough〉(1890) 같은 대중적인 저서와 달리 몇 년 안 되어 학문적으로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다. 문화인류학이 독자적으로 하나의 성숙한 사회과학 분과로 발전하는 동안 형질인류학은 자연현상에서 차지하는 인간의 위치를 규정하고, 인간과 다른 영장류 사이의 차이를 알아내고, 다양한 인종의 신체적인 차이를 분류하는 일에 계속 관심을 두었다. 19세기 후반 다윈의 진화론이 일반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진 가운데, 형질인류학자들은 고대인류를 추적하는 데 고고학자들과 고생물학자들의 발굴 성과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20세기가 시작되면서 서구 유럽과 북아메리카 초기 인류학자들이 갖고 있던 강한 문화적인 편견이 점점 사라지고, 사회와 문화의 폭넓은 다양성에 대한 다원론적이고 상대주의적인 견해가 우세하게 되었다. 문화적 상대주의에 바탕을 둔 이 입장은 모든 문화를 물리적인 환경, 문화적인 접촉, 그밖의 다른 여러 가지 요소들의 독특한 산물로 파악했다. 이러한 견해에 뒤이어 경험적인 자료, 현지조사, 일정한 문화적·자연적 환경 안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행동에 관한 구체적인 증거를 강조하는 경향이 생겼다. 이러한 접근방법을 행한 가장 주요한 본보기가 된 사람은 문화사학파의 시조로 알려진 독일 태생 미국의 인류학자 보아스였다. 1900년 초기에 그는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진화론을 부정하고 고전적 인류학의 근간이 되는 네 가지 접근법 (언어학, 고고학, 문화인류학 그리고 체질인류학) 의 기초를 닦았다. 보아스와 베네딕트, 미드, 사피어 등 그의 제자들은 20세기 전반을 통해 미국 인류학의 주류를 형성했다. 문화사학파는 문화적인 자료에 기능주의적인 방법으로 접근하여 한 문화에 속한 여러 다양한 양식·특징·관습을 조화시켜 표현하려 했다. 한편 프랑스의 경우 파리대학교의 민족학연구소 설립자인 모스는 인간사회를 자기조절 할 뿐 아니라, 문화통합체계를 보존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총체적인 체계로 보는 입장에서 연구를 진행시켰다. 모스는 프랑스의 레비스트로스, 영국의 말리노프스키와 래드클리프브라운과 같이 이질적인 접근방법을 꾀한 이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말리노프스키는 계속 엄격한 기능주의적인 접근방법을 추구했으며, 래드클리프브라운과 레비스트로스는 구조주의 원리를 발전시켰다. 두 학파는 사회사를 사회이론의 토대로 보지 않는 점을 제외하고는 별개의 방향으로 발전했다. 기능주의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사회현상을 분석하는 단 하나의 타당한 방법은 그 현상이 사회에서 수행하는 기능을 규정하는 것이었다. 반면 구조주의자들은 사회구성원들이 신화와 상징을 통해서만 인식하는 폭넓은 현상의 구조적 성격 및 대상을 알아내려 했다. 1930년대에 베네딕트가 행한 미국 남서부 인디언에 관한 연구를 통해 문화심리학이라는 문화인류학의 파생분야가 생겨났다. 베네딕트의 주장에 따르면 문화는 천천히 발전하면서 구성원들에게 독특한 심리적인 성향 을 갖게 하는데, 구성원들은 환경적인 요소에 상관없이 문화를 통해 정해진 방향을 따라 현실을 해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른바 전통사회는 물론, 현대사회의 문화적인 통합 또는 가치체계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는 것처럼 문화와 인성(人性)의 상호관계는 폭넓은 연구주제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20세기가 시작되면서 확실한 증거를 바탕으로 인종이 분류되었으며, 고등 영장류 사이의 차이점에 관한 개괄이 이루어졌다. 1900년 멘델의 일반유전법칙이 재발견되고, ABO식 혈액형계가 처음 발견되면서 종(種)의 진화적인 변화 개념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다. 20세기 후반 형질인류학자들은 두개골 화석에서 나타난 증거를 바탕으로 약 50만 년 동안의 인류진화과정을 도표로 만들 수 있게 되었다. 현대인류학의 관심과 기법은 물리학·생물학·행동과학·사회과학 등 폭넓은 전문분야에 걸쳐 있다. 예를 들면 원자물리학 덕분에 고고학적인 발굴물의 상대적인 연대를 측정하기 위한, 방사성 탄소를 이용한 연대측정법과 같은 기술이 발전했다. 여러 민족의 지리적인 기원을 알아내기 위한 연구에는 인간의 유전을 연구하는 생물학자들이 개발한 방법이 이용되고 있다. 유럽 집시들이 원래 인도 태생이었다는 추측을 입증할 수 있었던 것은 유전학 기술을 응용해 혈액형을 조사함으로써 밝혀진 사실이다. 여러 민족들의 가족관계, 근친상간 금기와 같은 종교적·법적인 관습을 이해하는 데에는 정신분석이론에 주로 바탕을 둔 심리학의 원칙이 채택되고 있다. 인류학자는 현지조사(fieldwork, 현지연구, 현장연구, 현장조사 등으로 번역됨)를 통해 연구대상에게 다가간다. 이러한 방법론은 문헌연구의 허구성을 통렬히 반박하며 "발로 뛰는" 학문으로서 인류학의 실천적 성격을 형성하여왔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무문자사회를 연구하는 경우 1년 이상 현장 연구하는 것이 기본인데, 1년이란 기간은 지구상 대부분의 사회에서 기본적인 생활의 주기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현지에서 인류학자는 먼저 해당 사회의 언어를 습득하고 라포르(rapport), 즉 현지인들과의 신뢰관계를 몇 개 월을 걸쳐서 먼저 확립하고, 실질적인 조사는 그 다음에 시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참고로 문화인류학이라고 하면 무문자사회 또는 "미개사회"를 연구하는 것이라는 편견도 있다. 그러나 이때 무문자사회라는 것도 반드시 문명과 동떨어진 사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가 있더라도 문자로 기록되지 않는 부분에 대한 연구를 수행함을 의미한다. 이처럼 무문자사회 의 개념이 확장된 이유는 20세기 들어 국민교육이 전 세계적으로 보편화하면서 무문자사회가 점차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문자가 있는 사회나 심지어는 예컨대 서구와 같은 "문명사회"에 대한 조사를 할 경우도 있다. 그러한 경우, 현지조사 이전에 문헌조사를 하는 것이 권장된다. 현지조사는 내실적으로 참여관찰, 인터뷰, 설문조사법 등이 포함되는데, 그밖에 지도 그리기, 물질문화 수집, 영상촬영 및 녹음 등등의 다양한 방법이 동원된다. 또 현지조사를 할 경우에는 자신의 입장이 내부자적 입장인지 외부자적 입장인지에 따라 현지조사의 결과물인 민족지(ethnography, 문화기술지/민족지)의 서술 전략이 달라지므로 스스로의 입장에 대한 고민과 반추가 요구된다. 모든 학문은 당대의 관념을 반영하며, 특히 인류학처럼 인간 을 연구하는 학문은 사회와 각종 영향관계가 폭넓고도 깊다. 제국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인류학은 인종주의와 서구 중심주의(우월주의)의 근거를 제공하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인류학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제국주의·식민주의 자체의 특성이며, 국민국가 형성기에 벌어진 타자화의 과정 속에서 다른 학문들 모두가 함께 저지른 과오이다. 그러나 인류학은 여느 학문과 달리 상대론적 세계관을 재빨리 확립하였고, 이어서 연구대상들에 대한 인간적인 관계 맺음을 통해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기 시작하였다. 즉 진화주의의 오류를 극복하고, 문화를 현상적으로 파악하지 않고서는 보이지 않는 인간 내면의 각종 논리와 사고의 연구에 집중하면서 오늘날에는 지구촌 차원에서 모든 인간들이 서로 평등함을 인식케 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특히 소수민족 연구는 현대 도시 내에서의 타자로 전락한 수많은 마이너리티들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의 기반이 되었으며, 오늘날 인류학은 사회의 긍정적인 변화에 앞장서서 각종 의제를 던지고 기존의 거대담론이 갖는 폭력성을 고발하고 있다. 인류학 용어집 History of Anthropological Theory, McGee and Warms 2004 Mapping Transdisciplinarity in Human Sciences Fundamental Theory of Anthropology 일본 국립민족학박물관 ( 공식 홈페이지) 분자인류학( Molecular anthropology) 문화인류학
워드 커닝햄 워드 커닝햄 (Ward Cunningham, 1949년 5월 26일 - )은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위키위키의 개념을 만든 사람이다. 그는 1995년에 Portland Pattern Repository라는 최초의 위키 사이트를 만들었다. 여전히 운영중인 그 사이트는 "사람, 프로젝트, 패턴"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프로그래밍과 관련한 아이디어들의 비공식적인 역사"를 담고 있다. 예를 들어, 소프트웨어 개발을 위한 패턴 언어에 대한 정보라든지, extreme programming의 방법론 등을 담고 있는 사이트이다. 커닝햄 자신은 위키의 개념을 착안한 것이 1980년대 후반이었으며, 그 개념을 처음으로 구현한 것은 하이퍼 카드(HyperCard) 스택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하이퍼카드를 사용해서 매킨토시에서 작동하는 위키의 전신인 패턴브라우저라는 소프트웨어를 만들었다. 그는 (Bo Leuf와 함께) The Wiki Way 의 공동 저자이기도 하다. 워드 커닝햄은 커닝햄&커닝햄 사의 설립자이다. 그는 또한 Wyatt Software 사의 개발 책임자로서 근무했었고, Tektronix Computer Research Laboratory에서 선임 연구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워드는 객체 지향 프로그래밍 방법론의 일종인 익스트림 프로그래밍에 관련된 공헌으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그는 힐사이드 그룹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워드 커닝햄은 현재 인디애나주 미시간 시티 (인디애나주)에 살고 있다. 위키위키웹 Bo Leuf, Ward Cunningham, The Wiki Way Quick collaboration on the Web , Addison-Wesley Longmann (April, 2001) * The Portland Pattern Repository의 위키 * http://c2.com/cgi/wiki?WelcomeVisitors 워드의 위키 방명록 * http://www.c2.com/cgi/wiki?WardCunningham 연락처 * https://web.archive.org/web/20031001092602/http://www.c2.com/profile.html#contact 분류:1949년 태어남 분류:살아있는 사람 분류:미국의 프로그래머 분류:위키 분류:익스트림 프로그래밍 분류:퍼듀 대학교 동문
자유 저작물 ()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 복사, 수정 및 재배포할 수 있도록 특별한 제한이 없는 작품이나 창작물, 정보를 말한다. 자유 소프트웨어의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는 자유 의 개념을 모든 저작물로 확장한 개념이다. 자유 저작물은 저작권이 소멸된 퍼블릭 도메인은 물론, 저작권이 있지만 위 기준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허락된 저작물도 포함한다. 자유 저작물은 저작물의 내용을 수정한 후에도 역시 같은 제한을 가진 라이선스로 배포해야 하는 카피레프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수정한 버전은 다른 조건으로 (때로는 자유 저작물이 아닌 조건으로) 배포할 수도 있다. GNU 자유 문서 사용 허가서는 카피레프트 라이선스의 대표적인 예이고, BSD 허가서는 카피레프트가 아닌 라이선스의 예이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로 배포된 작품의 경우, "비영리"나 "변경금지" 제한이 없는 경우는 자유 저작물에 해당한다. 하지만 비영리 혹은 변경금지 제한이 있는 경우에는 자유 저작물에 속하지 않는다. 퍼블릭 도메인 카피레프트 오픈 소스 GNU 자유 문서 사용 허가서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자유 소프트웨어 오픈 콘텐츠 구텐베르크 프로젝트 "free cultural work"의 정의 - 공개 저작물의 정의로 널리 쓰인다. 위 문서를 번역한 "자유로운 문화적 저작물"의 정의 분류:저작권 라이선스
쑹메이링 (, 1897년 3월 5일 ~ 2003년 10월 23일)은 세 명의 쑹 자매중에 한 명으로, 중화민국 총통인 장제스의 부인이다. "권력을 사랑한 여인"으로도 알려졌다. 상하이 출신으로 쑹아이링·쑹칭링의 여동생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화민국에 의존할 때 도운 공로로 1966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훈1등)을 수여받았다. 유학 시절의 쑹메이링 원적지는 중화민국 광둥 성 광저우이다. 상하이에서 감리교 목사 출신의 사업가인 찰리 쑹의 여섯 자녀 중 넷째로 태어나, 1908년 미국으로 건너가 기숙사 학교를 다녔다. 1917년 힐러리 클린턴의 모교로 유명한 명문여대 웰즐리 대학교에서 영문학 전공, 철학 부전공으로 학사학위를 취득했다. 1920년 장제스를 처음 만났는데, 그가 그녀보다 10년 연상이고, 불교 신자였으며 이미 부인이 있었다는 이유로 그녀의 어머니가 결혼에 반대했지만, 장제스가 원래 부인과 이혼하고, 개신교로 개종하겠다는 약속을 받으면서 결혼을 허락했다. 아버지인 찰리 쑹은 하이난 섬에서 태어난 객가 출신으로 추정되며, 쑹이라는 성은 그가 쿨리로서 미국에 있을 때 얻은 이름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본래 성은 한 씨라고 한다. 하원에서 연설하는 쑹메이링 Kai Shek and wife with Lieutenant General Stilwell.jpg|오른쪽|200px|섬네일|미국의 스틸웰 소장과 함께 쑹메이링은 신생활 운동을 시작하며 중국 정치에 활발하게 관여하게 된다. 장제스가 장군이 되고 중국 국민당의 총수가 되며 쑹메이링은 영어 번역가, 비서, 조언자로의 역할을 시작했다. 미국과 중국을 넘나들며 활동하던 쑹메이링은 중국과 서방의 문화에 모두 익숙해 양국 모두에서 개인적인 인기를 모았으며, 조지프 스틸웰은 그녀가 국방장관으로 임명될 것이라고 예측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미국 방문 중에 3만 명의 인파를 모았고, "올해의 남편과 아내", "용의 여인"이라는 제목으로 타임지의 표지를 두 차례 장식했다. 1943년 2월 18일 그녀는 중국인 최초로, 그리고 여자로서 두 번째로 미국 의회에서 연설하게 된다. 또한 카이로 회담에서는 남편의 통역으로 활약한 것으로 유명했다. 1949년 국공 내전에서 남편인 장제스가 이끌던 중국 국민당의 패배가 사실상 확실해진 후, 그녀는 남편을 따라 타이완으로 이주했으나 그녀의 큰 언니 쑹칭링은 중국 대륙에 남아 중국 공산당을 지지했고, 그 이후로 죽을 때까지 만나지 않고 지냈다. 분단 이후에도 쑹메이링은 중화민국의 국제적 외교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는데, 국제 적십자사의 후원자, 대중국 영국 연합 원조 기금(British United Aid to China Fund)의 명예의장, 최초의 권리장전기념회원이었다. 1960년대 말에는 계속적으로 미국의 가장 존경하는 10인의 여성에 포함되었다. 1975년 남편인 중화민국 총통 장제스가 사망하자 1978년 타이완에서 미국 롱아일랜드의 가족 소유지로 이주해 왔다. 1995년에는 캐피톨 힐에서 마련된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 50주년과 그녀를 기념하는 자리에 오랜만에 나와 일반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2000년 중화민국 총통 선거에서는 국민당 측에서 쑹메이링이 보냈다고 하는 자당의 후보 찬리엔을 무소속 후보 쑹추위보다 선호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공개하여, 그 편지의 진위에 대해 큰 논란이 일었다. 그녀는 2003년 3월 5일 자신의 106번째 생일을 맞았으며, 1998년 이래 거주해 오던 뉴욕의 맨해튼의 자신의 집에서 그해 10월에 향년 10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966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훈1등) 쑹칭링 쑹아이링 장제스 쑨원 중화민국 김구 1943년 미 의회연설 웰슬리 대학의 전기 추도문 타임지 올해의 남편과 부인 (1937년) 분류:1897년 태어남 분류:2003년 죽음 분류:타이완의 정치인 분류:중국계 미국인 분류:상하이시 출신 분류:중국의 백세인 분류:장제스 분류:중국의 반공주의자 분류:타이완의 개신교도 분류:중국의 저술가 분류:웰즐리 대학교 동문 분류:타임 올해의 인물 분류:퍼스트 레이디 분류:중국국민당 당원 분류:중국의 제2차 세계 대전 관련자 분류:중화민국 대륙 국민정부 초기 시대 인물 분류:중국 대륙 본토계 타이완인 분류:하카인 분류: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자 분류:국공 내전 관련자
찰스 존 허펌 디킨스 (Charles John Huffam Dickens, 1812년 2월 7일 - 1870년 6월 9일)는 빅토리아 시대에 활동한 영국 소설가이다. 화가 시모어(Robert Seymour)의 만화를 위해 쓰기 시작한 희곡 소설 《The Pickwick Papers, 원제:The Posthumous Papers of the Pickwick Club》(픽위크 페이퍼스)을 분책(分冊)으로 출판하여 일약 유명해졌다. 그는 특히 가난한 사람에 대한 깊은 동정을 보이고, 사회의 악습에 반격을 가하면서, 사회에 대한 실제의 일들의 묘사를 이야기 형식으로 완성했다. 후기 소설에는 초기의 넘치는 풍자는 약해졌으나, 구성의 치밀함과 사회 비평의 심화는 주목할 만하다. 그의 작품으로 자전적 요소가 짙은 《데이비드 코퍼필드》 《위대한 유산》 등을 비롯 《올리버 트위스트》 《크리스마스 캐럴》 《두 도시의 이야기》 등이 있다. 찰스 디킨스는 영국의 포츠머스에서 해군 경리국의 하급 관리였던 존 디킨스와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 배로의 슬하 여덟 아이 가운데 둘째 아들로 1812년 2월 7일 태어났다. 찰스가 다섯 살 때, 가족은 채텀(Chatham)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그가 열 살 때, 가족은 다시 런던의 캄덴으로 이사했다. 사립학교에서 약간의 교육을 받았지만, 경제관념이 부족했던 아버지가 채무 관계로 갇히면서 가세가 점점 기울었다. 디킨스는 공부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으나, 부모님의 권유로 돈을 벌기 위해 12살 때 런던의 한 구두약 공장에 견습공으로 취직하여 열악한 환경 속에서 하루 10시간의 노동을 해야 했다. 이로 인해 디킨스는 어른들을 믿지 못하게 되었고, 이 경험은 그에게 큰 상처를 남겼으며, 자서전적인 소설인 《데이비드 코퍼필드》(1849∼1850)에는 중산층에 속한다고 생각했던 어린 찰스가 노동자로 전락하여 느끼는 고통스러운 좌절감이 잘 나타나 있다. 자본주의 발흥기(勃興期)에 접어들던 19세기 전반기의 영국 대도시에서는, 번영의 이면에 무서운 빈곤과 비인도적인 노동(연소자의 혹사 등)의 어두운 면이 있었다. 디킨스는 중학 과정의 학교를 2년 정도 다니다가 15세때 변호사 사무실에서 사환을 했으며 다음해 1828년 법원의 속기사를 거쳐서 신문사 속기 기자가 되었다. 이후 그는 여러 신문사에 글을 기고하게 되는데, 1834년 《아침 신문》의 의회 담당 기자가 되어 처음으로 ‘보즈’라는 필명으로 런던의 삶에 대한 여러 편의 글을 발표했고, 1835년 조지 호가스가 편집인인 《저녁 신문》에 〈런던의 풍경〉 등 여러 글을 기고했다. 디킨스는 조지 호가스와 인연을 맺으면서 그의 딸인 캐서린과 결혼하게 되었고, 처제인 메리를 데리고 첼시에 정착하는데, 메리가 1837년에 갑작스러운 병으로 죽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순수했던 메리에 대한 그리움은 나중에 《골동품 가게 이야기》(1840∼1841)에서 어린 넬로 재현된다. 소설의 인기로 많은 돈을 벌게 된 디킨스는 가정적으로는 별로 행복하지 못했다. 결국 거듭된 과로로 인해 《에드윈 드루드의 비밀》을 완성하지 못하고, 1870년 6월 9일 58세의 나이로 개즈 힐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후 디킨스는 성공회 교회인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시인들의 묘역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디킨스가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노동자들은 주막에서 “우리의 친구가 죽었다”고 울부짖었다 한다. 디킨스의 사망 소식에 당시 신문과 잡지들은 며칠 동안 그의 일대기로 지면을 도배하다시피 했다. 한 신문의 부고는 디킨스의 소설이 갖는 시대적 의미를 보여준다.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들을 몇 작품 든다면, 《위대한 유산》, 《데이비드 코퍼필드》, 《올리버 트위스트》, 《니콜라스 니클비》, 《크리스마스 캐럴》 등이 있다. 그의 사후에 출판된 책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가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의 대상이 아닌, 본받음의 대상으로 따르려고 하고 있다. 그의 자녀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해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쓴 책이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코퍼필드》는 논쟁의 여지는 있지만, 그의 대표적인 소설이며 자서전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Little Dorrit》은 신랄한 풍자로 이루어진 명작이다. 디킨스의 소설들은 사회적인 기록을 작품으로 옮긴 것들이었다. 그는 빅토리아 시대의 빈곤과 사회 계층에 대한 신랄한 비평가였다. 디킨스는 세상에서 탈출하는 한 수단으로 연극에 매료되었고, 이러한 연극과 연극인에 대한 그의 태도는 그의 작품 《니콜라스 니클비》에 녹아 있다. 디킨즈 자신도 자신의 작품의 장면들을 대중들 앞에서 매우 자주 낭독하여 연출가로서의 역량을 보여 주었다. 그는 공연 투어를 통해 영국 전역과 미국을 널리 여행했다. 디킨스의 작품 스타일은 현란하고 시적이다. 영국 귀족주의의 속물근성에 대한 그의 풍자 — 그는 그의 작품 속에서 그러한 인물을 “고귀한 냉장고”라고 부른 바 있다 — 는 사악할 정도로 익살맞다. 그의 소설속에 나오는 인물 중의 몇몇은 괴기스럽기까지 하여, 그의 작품중에는 유령이 등장하거나, 유령 이야기가 나열되는 작품들이 있다. 예를 들면 하나의 성탄절 벨에는 일곱 명의 유령이 등장하는 데, 그에 맞서 싸우는 스크루지가 묘사된다. 그와 동시대 작가 중 몇몇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그의 작품들 중 몇 가지는 반유대주의로 비판되고 있다. 예를 들어, 《올리버 트위스트》의 패긴이라는 인물은 메부리코와 탐욕스러운 눈을 가진 전형적인 유대인으로 묘사되어 있다. 물론 디킨즈가 홀로코스트가 일어나기 이전의 사회에 살았음은 기억해두어야 한다. 그리고 단지 드라마틱한 효과를 위해서 그러한 인물을 설정했다는 것에도 일견 타당성이 있다. 《크리스마스 캐럴》에 등장하는 악역인 스크루지는 동양과 서양이 섞인 혼혈인으로 설정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전 작품을 통해, 디킨스는 보통 사람들에 대한 공감을 유지하고, 상류사회에 대한 회의를 간직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실업자, 성 노예자 등의 인물에 대한 연민을 찾아 볼 수 있다. 디킨스의 탁월성은 대중성과 사회 현안에 대한 성찰에 있다. 디킨스의 인생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대중과의 연애였다. 그는 평생 대중과 연애하듯이 그들에게 충심을 다했고 그의 모든 일이 대중의 관심을 받았다. 그는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 소설 낭독을 위해 영국 곳곳과 미국을 여행했다. 가는 곳마다 대대적인 성공이었고 대중들의 눈물 어린 환대와 지역 유지의 영접을 받았다. 그의 낭송 여행은 개인적 이벤트로 생각되지 않았고 처음부터 끝까지 공적이며 국제적인 행사로 받아들여졌다. 디킨스에 대한 대중의 사랑은 평생 변함이 없었다. 그는 사람들의 마음에 호소하여 경탄을 받은 정도가 아니라 사랑을 받았고 친구로 여겨졌다. 디킨스는 마치 현대의 최고 할리우드 스타가 누리는 만큼의 대중적 인기를 소설가로서 누렸고, 현대 주요 일간지가 사회 현안에 미치는 영향만큼이나 그의 의견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찰스 디킨스는 다시 말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하나이다. 찰스 디킨스는 가난에 대한 경험, 부의 경험도 누려본 작가로서 둘에 대한 비판을 수월하게 해내였다. 하지만 요즘에 화두에 오르는 매체에 의하면 찰스 디킨스는 가난한 사람들이 구걸할 때에는 귀찮다는 식으로 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루머일 뿐, 찰스 디킨스의 디킨지안(dickensian) 소설은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Sketches by Boz》(1836) 《픽윅 보고서》(1836) 《올리버 트위스트》(1837-1839) 《니콜라스 니클비》(1838-1839) 《골동품 가게 이야기》(1840-1841) 《Barnaby Rudge》(1841) 《크리스마스 캐럴》(1843) 《Martin Chuzzlewit》(1843-1844) 《Dombey and Son》 (1846-1848) 《데이비드 코퍼필드》(1849-1850) 《A Child s History of England》(1851-1853) 《황폐한 집》(1852-1853) 《어려운 시절》(1854) 《Little Dorrit》(1855-1857) 《두 도시 이야기》(1859) 《위대한 유산》(1860-1861) 《Our Mutual Friend》(1864-1865) 《에드윈 드루드의 비밀》(1870) 디킨즈에 대한 페이지 작품 원문과 다른 관련 페이지들로의 링크가 실려 있다. 디킨즈에게 바쳐진 또다른 페이지 디킨즈 가문의 가계도 디킨즈의 문학 분류:1812년 태어남 분류:1870년 죽음 분류:영국의 소설가 분류:포츠머스 분류:지폐의 인물
섬네일 아파치 오픈오피스 (, 이전 이름 OpenOffice.org)는 다양한 운영 체제에서 사용할 수 있는 오피스 제품군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97-2003 포맷을 비롯한 다양한 포맷을 지원할 뿐만 아니라 데이터 교환을 위한 고유 파일 포맷으로 ISO 표준인 오픈도큐먼트 포맷(ODF)을 지원한다. 오픈오피스는 스타디비전이 개발하고 1999년 8월 썬 마이크로시스템즈(지금의 오라클)가 인수한 스타오피스에 기반을 두고 있다. 썬 마이크로시스템즈는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높은 품질의 대안을 제공함으로써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의 지배적인 시장 점유율을 줄이려는 목적으로 2000년 7월에 스타오피스의 소스 코드를 공개하였다. 이후 오픈오피스 커뮤니티(OpenOffice.org)에서 오픈오피스 개발 및 관련 활동을 책임지고 있고, 썬 마이크로시스템즈는 오픈오피스 커뮤니티에 소스 기여/자금 기여/인력 기여 등을 통해 오픈오피스 개발과 활동을 지지하는 관계로 변하였다. 그리고 썬 마이크로시스템즈는 그렇게 개발되는 오픈오피스를 기반으로 전용 구성 요소를 추가한 스타오피스를 판매하였다. 그 뒤 현재는 아파치 소프트웨어 재단이 이 소프트웨어 제품군을 관리하고 있다. 오픈오피스는 아파치 라이선스 2.0을 따르는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이다. 원래 독일 회사인 스타디비전이 스타오피스라는 독점 소프트웨어로 개발했으나 1999년에 썬 마이크로시스템즈가 코드를 인수했다. 1999년 8월에는 스타오피스 버전 5.2를 무료로 제공하였다. 2000년 7월 19일, 썬 마이크로시스템즈는 스타오피스에 대한 오픈 소스 개발 커뮤니티를 형성할 의도로 LGPL과 SISSL에 따라 소스 코드를 내려받을 수 있도록 한다고 발표했다. 새로운 프로젝트 이름은 OpenOffice.org 이며, 2000년 10월 13일에 공식 웹 사이트가 열렸다. 2003년 초에 다음과 같은 사항을 목표로 버전 2.0에 대한 작업을 시작하였다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와의 호환성 확대, 성능 개선, 속도 향상과 메모리 사용량 감소, 폭넓은 스크립팅 지원, 그놈과의 향상된 통합, 보고서, 양식, 쿼리를 손쉽게 작성할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 프론트엔드, 새로운 내장 SQL 데이터베이스, 향상된 사용성. 베타 버전은 2005년 4월에 출시되었다. 2005년 9월 2일, 썬은 SISSL을 폐기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오픈오피스 커뮤니티 협의회는 다시는 오픈오피스를 이중 라이선스로 제공하지 않으며 앞으로 나올 버전은 LGPL만 사용한다고 발표했다. 2005년 10월 20일, 오픈오피스 2.0이 공식적으로 출시되었다. 버전 2.0이 출시된 지 8주 후에 업데이트 버전인 오픈오피스 2.0.1이 출시되었다. 여기에는 작은 버그 수정과 새로운 기능이 포함되었다. 오픈오피스는 2.0.3 버전부터 업데이트, 기능 향상, 버그 수정을 배포하기 위한 배포 주기를 종전의 18개월에서 3개월로 변경했다. 현재, 새로운 기능을 포함한 버전(feature release)은 그 사이에 나오는 버그 수정 버전(bug fix release)과 번갈아 가며 6개월마다 배포된다. 썬은 오픈오피스를 기반으로 한 상용 독점 소프트웨어 스타오피스를 위해 오픈오피스 개발을 보조하고 있다. 스타오피스는 버전 6.0 이후로 오픈오피스 소스 코드를 기반으로 하여 다음과 같은 추가 독점 구성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추가 글꼴. Adabas D 데이터베이스. 추가 문서 템플릿. 클립 아트. 아시아 버전을 위한 정렬 기능. 추가 파일 필터. 마이그레이션 평가 도구 (기업 버전). 매크로 마이그레이션 도구 (기업 버전). 구성 관리 도구 (기업 버전). 오픈오피스는 OpenOffice.org XML 파일 포맷을 포함하여 스타오피스의 많은 기능을 물려받았는데, 이 포맷은 버전 2에서 ISO 표준인 오픈도큐먼트 포맷(ODF)으로 바뀔 때까지 유지되었다. 선언문을 보면, 오픈오피스 프로젝트는 “모든 주요 플랫폼에서 동작하고, 오픈 컴포넌트에 기반을 둔 API와 XML에 기반을 둔 파일 형식을 통해서 모든 기능과 데이터에 대한 접근을 제공함으로써 세계를 선도하는 오피스 제품군을 만드는 커뮤니티가 되는 것” 이다. 오픈오피스는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와 경쟁하고,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와 비슷한 외관과 느낌을 구현하는 것을 지향한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를 비롯한 많은 다른 응용 프로그램들이 사용하는 파일 형식 중 대부분을 읽고 쓸 수 있다. 이는 많은 사용자에게 꼭 필요한 기능이다. 오픈오피스는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의 이전 버전 파일뿐만 아니라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에서 열지 못하는 손상된 새 버전의 파일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이전 매킨토시 워드 파일(MCW)은 열 수가 없다. 오픈오피스는 리눅스, 윈도, OS X, 솔라리스, FreeBSD, OpenVMS, IRIX에서 사용할 수 있다. 현재 가장 중점적으로 지원되는 플랫폼은 윈도, 리눅스, 솔라리스이다. 오에스 텐용 버전의 경우 2.x버전의 경우 X11이 설치되어 있어야만 제한적인 기능으로 사용할 수 있었으나 3 버전부터는 OS X의 아쿠아 인터페이스에서 네이티브로 작동하는 향상된 버전으로 제공되고 있다. 그 외로 OS X 전용으로 개발된 네오오피스도 있다. 네오오피스는 오픈오피스에서 떨어져 나간 프로젝트이다. 이 프로젝트는 오픈오피스 2.X 시절부터 아쿠아 버전의 오픈오피스를 제공하였다. 오픈오피스는 최신 오피스 제품군에서 제공하는 기능들을 제공하는 응용 프로그램들이 모여 있으며, 그 안에 들어있는 각 프로그램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많은 구성 요소가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와 호환되도록 설계되었다. 구성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다. 48px 라이터(Writer) 워드 프로세서(Text Document)로 마이크로소프트 워드와 비슷한 인터페이스를 가지고 있으며, 마이크로소프트 워드에 필적하는 기능과 도구를 제공한다. 또한, 추가 소프트웨어 없이 포터블 도큐먼트 포맷(PDF)으로 내보낼 수 있는 기능과 웹 페이지를 만들고 편집하기 위한 WYSIWYG 편집기 기능을 포함하고 있다. 라이터와 마이크로소프트 워드의 가장 큰 차이점은 라이터에서는 칼크(아래 참조)에서 쓸 수 있는 많은 함수와 숫자 형식을 라이터의 표 안에서 쓸 수 있다는 점이다. 48px 칼크(Calc) 스프레드시트(Spreadsheet)로 마이크로소프트 엑셀과 상당히 비슷한 기능을 제공한다. 칼크는 액셀에서 제공하지 않는 사용자 데이터의 레이아웃에 기반을 두어 그래프의 급수를 자동으로 정의하는 시스템 등의 기능을 제공한다. 또한, 스프레드시트를 곧바로 PDF 파일로 저장할 수 있다. 48px 임프레스(Impress) 프레젠테이션(Presentation) 프로그램으로 마이크로소프트 파워포인트와 비슷하다. 프레젠테이션을 어도비 플래시(SWF) 파일로 내보낼 수 있는 기능이 있어, 플래시 플레이어가 설치된 어떤 컴퓨터에서든 프레젠테이션을 재생할 수 있다. 또한, PDF 파일을 만드는 기능도 포함하고 있으며, 마이크로소프트 파워포인트 파일 형식인 .ppt 파일을 읽을 수 있다. 임프레스는 사전에 제공되는 프레젠테이션 디자인이 부족한 점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인터넷에서 템플릿들을 손쉽게 구할 수 있다. 48px 베이스(Base) 데이터베이스(,Database) 프로그램으로 마이크로소프트 액세스와 비슷하다. 베이스는 데이터베이스를 만들고 관리할 수 있으며, 최종 사용자가 데이터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양식과 보고서를 만들 수 있다. 액세스와 마찬가지로 베이스는 액세스 데이터베이스(JET), ODBC 데이터 소스, MySQL/PostgreSQL 등의 여러 서로 다른 데이터베이스 시스템들에 대한 프론트-엔드로 사용된다. 베이스는 오픈오피스 제품군에 있던 HSQL을 수정하여 버전 2.0부터 제품군에 포함되었다. 베이스는 앞서 나열된 모든 데이터베이스의 프론트-엔드가 될 수 있지만, 베이스를 사용하기 위해 이들 가운데 어떤 것을 설치할 필요는 없다. 48px 드로우(Draw) 드로윙(Drawing)프로그램,벡터 그래픽 편집기로 기능에서는 코렐 드로우에 필적한다. 도형들을 다양하게 “연결”할 수 있는 기능이 특징적이며, 여러 가지 선 스타일을 사용하여 순서도와 같은 도면을 구축하기에 편리하다. 이는 Scribus와 마이크로소프트 퍼블리셔와 같은 탁상출판 소프트웨어와 비슷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48px 매쓰(Math) 수식(Formula)을 만들고 편집하기 위한 도구로 마이크로소프트 수식 편집기와 비슷하다. 수식은 라이터 문서와 같은 다른 오픈오피스 문서 안에 포함할 수 있다. 여러 가지 글꼴과 PDF로 내보내기 기능을 지원한다. MathML을 지원하며, MathML을 지원하는 다른 수식 편집기와 자료 호환을 할 수 있다. 윈도와 리눅스에서 컴퓨터 시작 시 구동되는 프로그램이다. 컴퓨터가 시작될 때 오픈오피스를 위한 핵심 파일들과 라이브러리들을 로드하여 나중에 제품군의 응용 프로그램을 사용할 때 빨리 시작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오픈오피스 응용 프로그램들의 시작 시간은 1.0 버전의 제품군에서 공통된 불만이었으며, 퀵스타트는 이런 종류의 문제의 해결 방법으로 나온 것이다. 버전 2.2에서는 이 부분에서 많은 개선이 이루어졌다. 사용자의 동작을 기록하여 이를 OOoBasic(오픈 오피스 오브젝트 베이직)을 이용하여 재생함으로써 작업의 자동화에 도움을 주는 다이알로그 프로그램으로 매크로 기록기는 다이알로그 인터페이스외에도 오픈오피스베이직의 베이직 에디터(The Basic Editor)를 제공하는데 이는 직접적인 프로그래밍언어로 조작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매크로 기록기는 오픈오피스베이직으로 소스코드에의한 직접적인 사용방법도 가능하다. 내장된 오픈오피스(오브젝트)베이직(OpenOfficeBasic)이 기본으로 구동되지만 파이썬,빈 쉘(Bena Shell),자바 스크립트등도 연동시킬수있다. 윈도에서는 이들 구성 요소를 따로따로 설치할 수는 있어도 별개로 다운로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대부분 리눅스 배포판에서는 이 구성 요소들을 패키지로 쪼개서 배포하며 따로따로 다운로드하고 설치할 수 있다. 오픈오피스 베이직은 스타오피스 베이직에 기초한 프로그래밍 언어로 응용 프로그램용 마이크로소프트 비주얼 베이직(VBA)과 비슷하다. 오픈오피스 2.0 노벨 에디션은 추가로 마이크로소프트 VBA 매크로를 지원하며, 이 기능은 주 버전에서도 곧 통합될 것으로 기대된다. 오픈오피스 베이직은 라이터(Writer)와 칼크(Calc) 응용 프로그램에서 쓸 수 있다. 이는 서브루틴이나 매크로를 부르는 함수로 쓰이며, 각 매크로는 한 문단에서 단어 수를 세는 것과 같은 서로 다른 일을 수행한다. 오픈오피스 베이직은 특히 프로그램 안에 내장되지 않은 반복 작업을 하는 데 유용하다. 오픈오피스 데이터베이스 프로그램인 베이스는 라이터를 이용해 리포트와 폼을 만들기 때문에, 베이스 또한 오픈오피스 베이직으로 프로그램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오픈오피스 베이직의 프로그래밍작업은 같이 제공되는 베이직 에디터(The Basic Editor)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베이직 에디터(The Basic Editor)를 이용한 일괄 패치 매크로 소스 예 다음은 라이터(Text Document)에서 다수의 매쓰(Fomula)오브젝트들을 삽입한후 "글자크기,폰트,가운데정렬"을 위한 일괄 패치 매크로 소스이다. REM **** BASIC **** Sub Main embeddedObjects = ThisComponent.getEmbeddedObjects() elementNames = embeddedObjects.getElementNames() for i=0 to UBOUND(elementNames) element = embeddedObjects.getByName(elementNames(i)).Model if (element.supportsService("com.sun.star.formula.FormulaProperties")) then element.BaseFontHeight = 11 element.FontNameVariables= "Noto Serif CJK KR,Italic" element.FontNameFunctions = "나눔명조" element.FontNameNumbers= "Noto Serif CJK KR" element.Alignment =com.sun.star.style.TabAlign.CENTER endif next i ThisComponent.reformat() End Sub 오픈오피스 베이직의 프로퍼티를 구성하는 API는 사용자가 거의 대부분의 오픈오피스 자원에 접근할 수 있게 도와준다. 오픈오피스는 썬 마이크로시스템즈버전의 스타오피스의 전통을 유지하므로 여전히 API 참조에서도 스타오피스의 프레임을 찾아볼수있다. 탁상출판(DTP)용도를 완전히 지원한다. 다양한 출판물의 사이즈와 커스터마이징이 가능하며, 이미지 뿐만아니라 그래픽SVG등과 수학등의 수식을 삽입하는 출판물에 활용도가 높다. 오픈오피스는 ISO/IEC 표준 오픈도큐먼트 파일 형식을 만들었고, 이를 기본 고유 형식으로 사용한다. 또한, 많은 예전 전용 형식들(예 워드 퍼펙트, 로터스 소프트웨어, MS 웍스, 리치 텍스트 형식)을 읽을 수 있으며, 일부는 쓰기도 가능하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형식으로 일부 버전은 현재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보다 오히려 더 잘 읽어들인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오피스 오픈 XML을 쓰는 쪽으로 움직이는 것에 대응하여, 노벨은 오픈오피스를 위한 오피스 오픈 XML을 플러그인을 자유로운 BSD 라이선스 조건으로 내놓았는데(GNU GPL 그리고 LGPL 라이선스 라이브러리들과 병행하여), 이는 OpenOffice.org 프로젝트 안으로 포함되도록 제공될 것이다. 이는 오픈오피스에서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07에서 만들어진 .docx 파일을 읽을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오픈오피스 API는 유니버설 네트워크 오브젝트(UNO)로 알려진 컴포넌트 기술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는 CORBA와 같은 인터페이스 서술 언어에서 정의된 광범위한 인터페이스들로 구성되어 있다. 사용되는 문서 파일 형식은 XML 형식과 여러 가지 내보내기/가져오기 필터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오픈오피스가 읽어들이는 모든 외부 형식들은 내부 XML 표현을 통해 서로 변환된다. XML을 디스크에 저장할 때에는 압축을 사용하여 똑같은 이진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문서들보다 더 작다. 버전 1.0에서 문서 저장을 위해 쓰던 고유 파일 형식은 OASIS 오픈도큐먼트 파일 형식 표준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이는 버전 2.0에서는 기본 파일 형식이 되었다. 제품군 개발 버전은 OpenOffice.org 웹 사이트의 개발자 존에서 몇 주마다 한 번씩 나오고 있다. 이 배포 버전들은 새로운 특징을 테스트해보고 싶거나 단순히 앞으로 있을 변경들이 궁금한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다. 이들은 실무용으로는 적당하지 않다. 오픈오피스 1.0은 운영되는 플랫폼을 위해서 고유로 개발된 응용 프로그램의 룩 앤드 필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버전 2.0을 시작하면서, 오픈오피스는 고유 응용 프로그램들과 더 잘 어울리고 사용자들에게 더 매끄러운 경험을 제공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플랫폼에 걸쳐 있는 고유 위젯 툴키트, 아이콘, 그리고 폰트 렌더링 라이브러리를 적용했다. 특히 GNOME과 KDE 양쪽과 통합을 더욱 향상시키기 위한 프로젝트들이 진행되고 있다. 이 문제는 특히나 맥 OS X에서 뚜렷한데, 표준 유저 인터페이스가 윈도나 X-11 기반 데스크톱 환경 어느 쪽과는 눈에 보이게 많이 다르며, 대부분 오픈오피스 개발자와는 친숙하지 않은 프로그래밍 툴킷을 쓰라고 요구한다. 오에스 텐에서 오픈오피스를 쓸 수 있는 두 가지 버전이 있다. 공식 버전은 X11.app 또는 XDarwin을 설치하여 달라고 요구하며, 잘 테스트 된 유닉스 버전에 딱 들어맞는 포팅이다. 이는 기능으로는 유닉스 버전과는 동등하며, 유저 인터페이스는 그 버전의 룩 앤드 필과 닮았다. 예를 들어 응용 프로그램은 화면 상단의 오에스 텐 메뉴 대신에 자체 메뉴를 사용한다. 이는 또한 오픈오피스를 위한 X11 형식의 시스템 글꼴이 필요한다(이는 응용 프로그램 설치 도중에 할 수 있다.). (X11 오픈오피스는 2.X 버전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제공되지 않는다.) 오픈오피스 아쿠아는 X11 오픈오피스를 대체하여 현재에는 정식 버전의 맥용 오픈오피스 지칭한다. 그러므로 오픈오피스 아쿠아라는 용어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다. 오픈오피스에서 파생된 프로젝트들은 상당히 많이 있다. 대표적으로 스타오피스와 네오오피스가 있고, 그룹웨어 솔루션을 포함한 상당한 수의 보완 프로그램도 있다. 이는 독자적인 포팅으로 OS X의 아쿠아 유저 인터페이스를 자바, 카본, 그리고 점점 더 비중이 높아지는 코코아 툴킷을 써서 통합을 구현하였다. 네오오피스는 OS X UI 표준에 꽤 가까우며, OS X에 설치된 글꼴과 프린터들을 직접 사용한다. 이는 공식 오픈오피스 X11 릴리즈보다는 뒤처져서 발표되는데, 개발팀이 규모가 작고 유저 인터페이스를 포팅하는 데에 쓰는 기술 개발을 같이하기 때문이다. OpenGroupware.org는 OpenOffice.org 문서, 캘렌더, 주소록, 이메일, 인스턴트 메시징, 그리고 블랙 보드를 공유할 수 있고 다른 그룹웨어 응용 프로그램들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해 주는 프로그램이다. 또한, OOExtras에서는 문서 템플릿과 쓸모 있는 추가물들을 만들고 공유하기 위한 노력이 있다. 외부 프로그램에서 OpenOffice.org 문서 처리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펄 확장기능들을 CPAN에서 구할 수 있다. 이들 라이브러리는 OpenOffice.org API를 쓰지 않는다. 이들은 펄 표준 압축/압축 풀기, XML 접근, 그리고 UTF-8 인코딩 모듈을 이용해서 OpenOffice.org 파일을 직접 읽고 쓴다. “휴대용 OpenOffice.org”라고 부르는 OpenOffice.org 배포판은 USB 플래시 드라이브에서 제품군을 돌리고자 설계되었다. OpenOffice.org보다 향상된 다음과 같은 기능을 제공한다. 칼크에서 응용 프로그램용 비주얼 베이직(VBA)매크로를 돌릴 가능성(테스트용) 임프레스를 위한 다중 모니터 지원 향상된 칼크 HTML 내보내기 베이스를 위한 향상된 액세스 지원 보안 수정 향상된 성능 향상된 컬러 팰릿 향상된 도움말 메뉴, 추가 사용자 매뉴얼, 그리고 초심자를 위한 확장된 팁들 옵션으로 다음이 제공되며, 개인과 업무용으로 무료로 쓸 수 있다. 클립아트와 사진으로 이루어진 3,200개가 넘는 그래픽. 다양한 템플릿과 보기 문서 90개가 넘는 공짜 글꼴 OOoWikipedia와 같은 추가 도구 버전 2.0.4부터, OpenOffice.org는 모질라 파이어폭스와 비슷한 방식으로 확장기능을 지원한다. OpenOffice.org 서지 프로젝트는 강력한 참고문헌 관리 소프트웨어를 이 제품군으로 통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새로운 주요 추가물들은 2007년 후반이나 2008년 중반에 나올 표준 OpenOffice.org 릴리즈에 포함되기 위한 후보로 정해져 있으나, 프로그래머들의 선호도에 따라서 더 늦어질 수도 있다. 오픈오피스는 보안 팀을 따로 가동하고 있으며, 보안 사이트인 Secunia는 2007년 9월 현재까지 이 소프트웨어에 대한 패치 되지 않은 보안 문제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또한, 카스퍼스키 연구소에서는 오픈오피스에 존재할 수 있는 바이러스의 형태를 제시하였다. 이는 오픈오피스 바이러스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지만, 현재까지 알려진 바이러스는 없다. 프랑스 국방성의 비공개회의에서, 매크로에 관련된 보안 문제가 제기되었다. 오픈오피스 개발자들은 이 폭로에 가깝게 발표된 취약점이 “미리 규정된 절차”에 따라서 발표되지 않았으며, 국방부가 구체적인 내용은 하나도 공개하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했다. 하지만, 추측되는 취약점에 대해서는 개발자들과 연구원들의 논의가 진행 중이다. 오픈오피스의 경우 인터넷 사이트, 미러 사이트, 피어투피어 네트워크, CD, 리눅스 배포판 등 다양한 경로로 배포되기 때문에 정확한 시장 점유율을 추정하기 어렵다. 따라서 오픈오피스 측에서는 표본 조사를 통해 시장 점유율을 추정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가 전체 시장에서 95%의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지만, 오픈오피스와 스타오피스는 2004년에는 대형 엔터프라이즈 시장에서 14%를, 중소규모 비즈니스 시장에서는 2005년에 19%를 확보했다. 오픈오피스 웹 사이트는 2009년 10월 28일에 다운로드 수 1억 회를 돌파했다고 발표했다. 오픈오피스를 대규모로 쓰는 사용자는 싱가포르 국방부, 그리고 영국의 브리스톨 시청 등이다. 프랑스에서는 오픈오피스가 소프트웨어 조달을 합리화시키면서도 안정되고, 기록 보관을 위한 표준 파일 형식을 원하는 지역과 국가 행정부의 관심을 끌었다. 리눅스를 쓰는 인도 대법원과 알라하바드 고등법원은 완전히 오픈오피스에 의존하고 있다. 2005년 10월 4일, 선과 구글은 전략 파트너십을 선언했다. 합의 일부로써, 선은 구글 검색 바를 오픈오피스에 추가하고, 선과 구글은 공동 마케팅 활동은 물론 공동 연구 개발을 약속했으며, 구글은 오픈오피스 배포를 도울 것이다. 스타오피스 말고도, 오픈오피스에서 파생된 여러 가지 상업 제품들도 있다.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SISSL 라이선스로 개발되었다(오픈오피스 2.0 베타 2까지 유효하다.). 대체로 이들은 지역 특화 또는 틈새 시장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음성 인식 모듈, 자동 데이터베이스 연결, 또는 더 나은 CJK 지원과 같은 전용 애드-온이 들어 있다. 예전에 오픈오피스는 자유 소프트웨어가 아닌 자바 런타임 환경에 의존성이 커지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선 마이크로시스템이 자바 창시자이자 오픈오피스의 선도 후원자라는 사실은 이 기술 채택에 숨은 뜻이 있다는 비판을 낳았다. 버전 1은 몇몇 보조 기능을 위하여 현재 사용자 컴퓨터에 있는 자바 런타임 환경(JRE)에 의존하지만, 버전 2에서는 자바 사용이 늘어나면서 이 제품군은 JRE를 요구한다. 그에 대응하여, 레드햇은 자유 자바 구현을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을 늘렸다. 레드햇의 페도라 코어 4(2005년 6월 13일 출시)는 GCJ와 GNU Classpath에서 동작하는 오픈오피스 버전 2를 포함하고 있다. 1.1 문서를 PDF 형식과 SWF 형식으로 출력할 수 있다. 2.0 공개 표준안인 OpenDocument 형식을 기본 포맷으로 사용한다. 한글 97의 hwp 형식을 읽을 수 있다. 오픈오피스의 한국어화 작업은 처음 썬마이크로시스템의 의뢰로 미지리서치가 스타오피스를 한국어화하고 그 결과물을 오픈오피스에 반영하였다. 이후 한국어판은 썬마이크로시스템의 지역화 팀에서 계속 관리하고 있는데, 2008년 4월 배포된 2.4판 이후부터는 오픈오피스 한국어 팀이 참여하였다. 현재까지 한국어 오픈오피스는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와 리눅스, OS X에서 사용할 수 있다. 빌드 넘버 635 한글을 입력할 수 있고, 메뉴가 조금 한국어화되었다. 도움말은 아직 영문이다. 1.0 대부분의 도움말이 한국어화되었으며 모든 메뉴가 한글이다. 1.1 아이콘까지 한국어화되었고, 번역된 문장이 더 자연스럽다. 2.0 한/글 3.0 및 97 파일 포맷 지원. 워디안 계열의 신형 파일 포맷은 지원되지 않는다. 2.1 한자 키를 눌러서 입력기를 통한 한자 변환이 가능하다. 2.4.0 오픈오피스 한국어 팀이 참여하였다. 3.0.0 사용자 인터페이스와 도움말의 한국어화가 100% 완료되었다. 3.1.0 안티 앨리어싱을 비롯한 몇 가지 기능개선이 이루어졌다. 3.2.0 라이터의 OOXML 불러오기 호환성 개선 등의 몇 가지 추가적인 기능 개선이 이루어졌다. 4.1.2 오픈 소스 라이선스의 나눔글꼴이나 본고딕,본명조 등의 한글 사용이 문서작성 프로그램에서 뿐만아니라 오브젝트 삽입내부에서도 안정적이다. 리브레 오피스 티맥스 오피스 오픈오피스 홈페이지 한글 오픈오피스 프로젝트 오픈오피스 한국어 커뮤니티 오픈오피스 문서 프로젝트 OpenOffice.org Portable — 무설치 분류:자유 소프트웨어 분류:사무용 소프트웨어 분류:2002년 소프트웨어 분류:C++로 작성된 자유 소프트웨어 분류:자바로 작성된 자유 소프트웨어 분류:크로스 플랫폼 자유 소프트웨어
Writer.png|섬네일|200px|오픈오피스 라이터(Writer) 업무용 응용 소프트웨어 제품군 ()은 워드 프로세서, 데이터베이스, 프레젠테이션, 스프레드시트 등의 응용 소프트웨어 의 모음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한컴 오피스 리브레 오피스 (우분투 리눅스 기본 오피스) 오픈오피스 스타 오피스 IBM 로터스 심포니 아이워크 폴라리스 오피스 씽크프리 오피스 폴라리스 오피스( Polaris Office) 네이버 오피스 * 네이버 워드 * 네이버 슬라이드 * 네이버 셀 오픈도큐먼트 소프트웨어 분류:개인 정보 관리자 분류:사무용 소프트웨어
리눅스 ()는 리누스 토르발스가 커뮤니티 주체로 개발한 컴퓨터 운영 체제이다. 혹은 커널을 뜻하기도 한다. 리눅스는 자유 소프트웨어와 오픈 소스 개발의 가장 유명한 표본으로 들 수 있다. 리눅스는 다중 사용자, 다중 작업(멀티태스킹), 다중 스레드를 지원하는 네트워크 운영 체제(NOS)이다. 엄밀하게 따지면 이 ‘리눅스’라는 용어는 리눅스 커널만을 뜻하지만, 리눅스 커널과 GNU 프로젝트의 라이브러리와 도구들이 포함된, 전체 운영 체제( GNU/리눅스 라고도 알려진)를 나타내는 말로 흔히 쓰인다. 리눅스 배포판은 핵심 시스템 외에 대다수 소프트웨어를 포함한다. 현재 200여 종류가 넘는 배포판이 존재한다. 초기 리눅스는 개개인의 애호자들이 광범위하게 개발하였다. 이후 리눅스는 IBM, HP와 같은 거대 IT 기업의 후원을 받으며, 서버 분야에서 유닉스와 마이크로소프트 윈도 운영 체제의 대안으로 자리잡았다. 리눅스는 데스크톱 컴퓨터를 위한 운영 체제로서도 인기가 늘어가고 있다. 지지자와 분석자들은 이와 같은 성공을 벤더 독립성과 적은 개발비, 보안성과 안전성에서 기인한다고 분석한다. 리눅스는 처음에 인텔 386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위해 개발되었으나 현재는 다양한 컴퓨터 아키텍처를 지원한다. 리눅스는 개인용 컴퓨터에서부터 슈퍼컴퓨터는 물론 휴대 전화, 스마트 TV, 개인용 비디오 레코더와 같은 임베디드 시스템까지 광범위하게 이용되고 있다. 리눅스 재단에 따르면 퍼블릭 클라우드 워크로드의 90%, 세계 스마트폰의 82%, 임베디드 기기의 62%, 슈퍼 컴퓨터 시장의 99%가 리눅스로 작동한다. Galaxy Note series 2.jpg|섬네일|안드로이드는 리눅스 커널을 활용한 스마트폰 운영체제이다. 1983년 9월 리처드 스톨만은 GNU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GNU 프로젝트의 목적은 프리웨어로만 구성된 완전한 하나의 유닉스-유사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었다. 1989년, GNU는 시스템 라이브러리, 컴파일러, 텍스트 에디터, 셸 등의 커널을 제외한 시스템의 핵심적인 부분을 완성했다. 1990년 시작된 허드(Hurd) 커널은, 초기에는 BSD 4.4-Lite 커널을 기반으로 개발하려 했으나, 원래의 BSD 커널을 개발했던 버클리 프로그래머들과의 협력이 이루어지지 않아 실패했다. 1987년 리처드 스톨만은 허드를 마하(Mach)라는 마이크로 커널을 기반으로 개발하려 했다. 그러나 마하는 예상외로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허드의 개발은 지체되었다. 그러던 중(1991년), 리눅스라는 이름의 또 다른 커널이 극적으로 등장하였다. 리눅스는 핀란드 헬싱키 대학의 대학원생인 리누스 토발즈가 취미 삼아 개발한 커널이었다. 토르발스는 원래 앤드루 스튜어트 타넨바움 교수가 운영 체제 디자인을 가르치기 위해 만든 교육용 유닉스인 미닉스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타넨바움이 미닉스를 다른 사람이 함부로 개조하지 못하도록 제한을 두자, 미닉스의 기능에 만족하지 못했던 토르발스는 새로운 운영 체제를 개발하고자 했다. 리눅스는 본래 운영 체제 위에서 실행되는 터미널 에뮬레이터였다. 초기에는 시리얼 포트를 이용한 간단한 신호를 주고 받는 작업밖에 할 수 없었지만, 토르발스는 디스크의 파일도 읽고, 쓰게 하고 싶었다. 이처럼 완전한 파일 제어가 가능해지자, 토르발스는 이것을 포직스(POSIX)에 호환되는 운영 체제 커널로 발전시키기로 마음먹고 이를 기반으로 리눅스를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리눅스의 첫 번째 버전인 0.01은 1991년 9월 17일 인터넷을 통해 공개되었고, 첫 공식버전인 0.02는 같은해 10월에 발표되었다. 그 이후 지금까지, 전 세계 수천만의 개발자들이 리눅스 개발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초창기 리눅스는 설치와 부팅을 하기 위해서는, 미닉스와 같은 다른 운영 체제가 필요했다. 그러나 리로(lilo)와 같은 부트로더가 개발되고, GNU 프로젝트가 만들어낸 모든 유틸리티를 리눅스에서 사용할 수 있게 됨에 따라, 리눅스는 빠른 속도로 미닉스를 능가하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토르발스는 리눅스 커널 개발을 지휘하고 있다. 현재 리눅스는 X 윈도를 기반으로 한 GNOME이나 KDE와 같은 통합 데스크톱 환경과 수많은 응용 프로그램을 실행시킬 수 있으며, 많은 기업과 단체의 후원을 받고 있다. 턱스(Tux)라는 이름의 펭귄은 1996년 래리 유윙이 창조한 리눅스의 마스코트이다. 리눅스라는 이름은 리누스 토발즈가 아닌, 아리 람케라는 사람이 지었다. 그는 ftp.funet.fi 사이트의 운영자였는데, 미리 리눅스라는 이름의 폴더를 ftp에 만들어, 토르발스가 커널을 올릴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 토르발스는 원래 자신이 만든 커널의 이름을 프릭스(Freax)로 하려 했는데, 아리 람케의 주장으로 결국 리눅스라는 이름을 선택하게 되었다. 리눅스라는 이름의 어원은 리누스의 미닉스(LINUs miniX)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리눅스는 현재 리누스 토르발스의 등록상표(trade mark)이다. 리눅스가 인기를 얻자, 개방형 소스(오픈 소스)의 특성에 힘입어 다양한 리눅스 기반의 운영 체제가 쏟아져 나왔다. 페도라, 우분투 등의 획기적인 운영 체제가 등장하였고, 구글에서 배포하는 모바일 운영 체제인 안드로이드도 리눅스 기반의 오픈소스 운영 체제이다. 리눅스 커널은 원래 IA-32 Intel 80386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위해 설계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양한 컴퓨터 아키텍처를 지원한다. 리눅스는 광범위한 아키텍처에 포팅된 운영 체제 중 하나이며, 포팅뿐 아니라 이러한 장치를 위한 배포판 또한 존재한다. 그래서 HP 아이팩과 같은 PDA에서부터 메인프레임 최신 장비인 IBM zEnterprise System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스템에서 이용된다. 리눅스 커널과 대부분 GNU 소프트웨어는 GNU 일반 공중 사용 허가서 라이선스를 따른다. GNU GPL의 조항에 따르면, 수정이 가능한 소스코드를 배포해야 하며 수정된 소스코드는 반드시 같은 라이선스로 배포해야 한다. 때로 이 라이선스는 카피레프트라고 불린다. 1997년에 리누스 토르발스는 리눅스를 GPL로 만든 것이 완벽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 라이선스보다 제약이 덜 한 것도 있다. 예를 들면 많은 라이브러리가 GNU LGPL(Lesser General Public License)과 같이 제약이 더 줄어든 라이선스를 사용하며 X 윈도 시스템의 경우에는 MIT 라이선스를 사용한다. 미국의 경우 리눅스는 리누스 토르발스가 등록한 상표이다. 1997년에 일부 개인이 상표를 등록하고 리눅스 배포자에게 상표권 사용료를 내라고 한 적이 있었다. 토르발스 쪽에서도 상표권을 등록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상표권 침해를 막기 위해서 등록했다고 한다. 대한민국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현재 200여 종류가 넘는 배포판이 존재한다. 리눅스의 원형이 되는 UNIX가 애초부터 통신 네트워크를 지향하여 설계된것처럼 리눅스 역시 서버로 작동하는데 최적화되어있다. 리눅스 데스크탑환경은 이러한 서버기능에 기초가 되는 멀티 태스킹과 다중 사용자시스템에 GUI환경인 X 윈도 시스템을 올려놓은것이므로 대부분의 데스크팝 리눅스 배포판이라도 아파치 HTTP 서버등의 설치로 서버환경의 구축이 동시에 가능하다. 한편 리눅스 서버 배포판들은 GUI환경인 X 윈도 시스템이 빠져있고 서버기능 최적화에 필요한 프로그램들이 그자리를 메우고 있다. 리눅스는 부팅 수준에서 GRUB등을 통해 여러 OS로 부팅하는것을 지원하다. 또한 리눅스는 GRUB를 통해 콘솔모드 부팅뿐만아니라 콘솔모드에서 X 윈도 시스템환경인 GUI모드와 상호변환을 완벽히 지원한다. 카카오뱅크는 2017년에 대한민국 금융권 중 최초로 전산 시스템에 리눅스를 도입하였다. 국민은행은 2020년도의 차세대 전산 시스템으로 메인프레임과 함께 리눅스를 도입하기로 결정하였다. 원래는 차세대 전산 시스템으로 유닉스를 도입하려고 했으나 그 계획은 취소되었다. 증권(주식) 거래소인 한국거래소(KRX)는 대한민국 자본 시장 거래 시스템 최초로 2014년에 리눅스 시스템을 도입하였다. 리눅스 재단 운영 체제의 목록 리눅스 문서화 프로젝트 적재 가능 커널 모듈 운영 체제 시장 점유율 리눅스 커널 공식 페이지 - http://www.kernel.org/ 오픈수세 사용자 그룹 KLDP 한국 우분투 사용자 모임 한국 리눅스 사용자 그룹 한국데비안사용자모임 리눅스 커뮤니티 하모니카 분류:유닉스 계열 분류:자유 소프트웨어 분류:1991년 소프트웨어
미합중국 (美合衆國, , 약자 US, USA), 약칭 합중국 (合衆國, , U.S.) 또는 미국 (美國)은 주 50개와 특별구 1개로 이루어진 연방제 공화국이다. 태평양의 하와이주를 제외한 모든 주와 수도인 워싱턴 D.C.는 북아메리카에 있으며, 북측으로는 캐나다와 남측으로는 멕시코와 국경을 맞댄다. 북아메리카 북서측에 있는 알래스카주는 동측으로는 캐나다와 서측으로는 베링 해협을 사이로 러시아와 마주한다. 미합중국은 태평양과 카리브 해에 해외 영토를 보유한다. 세계 여러 나라 중에 미국은 총면적 기준으로 세번째고 세 번째로 인구가 많은 국가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다문화 국가고 세계 각국에서 수많은 이민자가 들어온다. 미국의 경제는 2018년 기준 명목상 국내 총생산이 20조 4128억 달러로, 세계 1위 최대 경제 규모로 현재 2위인 중국이 국내 총생산 14조 925억 달러로 세계 2위 수준이다. 아시아 대륙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이는 아메리카 원주민은 오늘날 미국 본토에 오랜 세월 동안 살아왔으나 아메리카의 유럽 식민지화 이후 전쟁과 질병으로 급감하였다. 미국은 대서양 해안을 따라 늘어선 13개 식민지에서 건국되었다. 13개 주 국가는 1775년 5월에 식민 본국인 영국과 전쟁을 벌였고(미국 독립 전쟁), 1776년 7월 4일에는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 민족 자결의 권리를 바탕으로 한 연맹체 국가의 성립을 선포했다. 이후 1783년까지 전쟁을 벌인 미국은, 파리 조약을 통해 영국의 식민지 중에서 최초로 독립을 쟁취했다. 1787년 9월 17일, 필라델피아 헌법회의에서 오늘날의 미합중국 헌법이 채택되었으며, 이듬해에 비준되어 이 주들은 강력한 중앙 정부를 둔 단일 공화국이 되었다. 1791년에 비준된 미국 권리장전은 10개의 수정 헌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여러 기본적인 민권과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19세기에 미국은 프랑스, 스페인, 영국, 멕시코,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영토를 획득하고, 텍사스 공화국과 하와이 공화국을 병합했다. 이 외에도 태평양과 카리브 해에서 영토를 획득했다. 농업 중심의 미국 남부와 산업화된 미국 북부 간에 주의 권리와 노예제 확대 문제를 놓고 갈등하면서 1860년대에 미국 남북 전쟁이 일어났다. 북부가 승리하면서 영구적인 국가 분열 사태를 막았으며, 미국에서 노예제가 폐지되었다. 이후 1870년대에 미국 경제는 가속화된 산업화와 함께 세계 최대 규모로 발전하였다. 미국-스페인 전쟁과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미국은 군사 강대국의 지위를 굳혔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미국은 최초로 핵무기를 보유하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 이사국이 되었다. 냉전이 종결되고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면서 미국은 세계의 유일한 초강대국이 되었다. 이 나라는 전 세계 군비 지출의 3/5를 차지하고 있으며, 세계의 정치, 경제, 문화를 선도하는 강대국이다.http://news.bbc.co.uk/2/hi/americas/country_profiles/1217752.stm Country Profile United States of America, BBC News, 2008-04-22. 1507년, 독일의 지도학자인 마르틴 발트제뮐러가 세계 지도를 만들었는데, 그는 이 지도에서 서반구에 있는 땅을 이탈리아의 탐험가이자 지도학자인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을 따 "아메리카"라고 명명했다. 과거 영국 식민지 시대에 미국 독립선언서에서 "미합중국의 만장일치 선언"(unanimous Declaration of the thirteen United States of America)이라고 나와 처음으로 이 나라의 현 명칭이 쓰이는데, 이것은 1776년 7월 4일에 "아메리카 합중국 대표자"들이 채택한 것이었다. 1777년 11월 15일에 제2차 대륙 회의에서 연합 규약(Articles of Confederation)을 채택하면서 "이 연합의 입구는 미합중국 (The United States of America)이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오늘날의 국호가 확립되었다. 이 국호의 축약형인 United States 도 표준 명칭이다. 그 밖에 흔히 쓰이는 명칭으로는 the U.S. , the USA , America 가 있다. 일상 회화에서 쓰이는 이름으로는 the U.S. of A. 와 the States 도 있다. 미국의 대중적인 명칭인 컬럼비아 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서 유래한 말로, 수도인 워싱턴 컬럼비아 특별구 에서도 나오는 이름이다. 영어권에서 미국인을 이를 때 아메리칸 (American)을 사용한다. 또 미국의 정식 수식어는 United States of America 이지만, America 이나 U.S. 가 가장 흔히 미국을 일컫는 수식어다. 한편 오늘날 대한민국 및 중화권에서 쓰이는 미국 (美國)이라는 명칭은 청나라 시대 중국인들이 아메리칸 을 중국어 발음에 가깝게 적은 음역인 美利堅 에서 왔다. 이 말의 기원은 미국이라는 뜻인 American 에서 나온다. 당시 청나라 시대 중국인들은 이것을 메리칸 으로 들었고, 가까운 중국어 발음인 메이리지안(美利堅) 이라고 했다. 이를 줄여 메이궈 (美國)로도 표기하였고, 당시 조선인들이 이를 한국어식 한자음으로 읽어 美利堅(미리견) , 미국(美國) 으로 읽고 표기했다. 일본에서는 亞米利加 (아미리가)로 표기했으며, 이를 줄여서 베이코쿠(米國) 로 표기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도 이 표기를 사용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현재에도 일본식 음역인 미국(米國) 을 사용한다. 그 밖에도 한국어에서 며리계 (彌里界)라는 독자적인 음차 표기도 있었다. 알래스카 원주민을 비롯한 북아메리카 본토의 원주민들은 주로 아시아에서 이주해 온 것으로 여겨진다. 12,000년 ~ 40,000년 전에 아메리카에 온 것으로 보이는 이들 북아메리카의 동남부와 서남부의 원주민 집단은 진보한 농경과 건축을 통해 국가 수준의 사회를 이룩했고 북미 전지역에 걸쳐 다양하고 복잡한 문화를 형성했으나, 유럽인들에 의해 전파된 천연두 등 수많은 외래 질병과 전쟁 및 노예화와 착취로 인해 수많은 아메리카 토착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1492년경 8천만 명에 이르렀던 원주민의 인구는 1650년경에는 8백만 명 정도로 줄어들었는데, 이는 유럽의 흑사병을 넘어선 인류의 대재앙 이라고 서술하기도 한다.)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갔다. 그림은 윌리엄 핼샐의 플리머스 항구의 메이플라워 호 , 1882년작. 1492년, 제노바 출신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포르투갈의 지원을 얻지 못하자 이사벨 1세의 주도로 카스티야와 아라곤왕국이 연합하여 성립된 스페인 왕실과 계약을 맺어 카리브 해 제도까지 다다라, 원주민들과 처음으로 조우하였다. 1513년 4월 2일, 스페인의 정복자 후안 폰세 데 레온이 스스로 "라 플로리다"(La Florida)라고 부른 땅에 처음으로 발을 디뎠는데, 이때가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본토에 도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지역에 스페인 정착지가 들어서고 연이어 오늘날의 미국 서남부지역인 멕시코까지 이어졌다. 프랑스인인 모피 무역상 쿠레르 데 브와들은 오대호 주변 지역에 누벨 프랑스라는 전초 식민지를 건설했으며, 마침내 프랑스는 멕시코 만에 이르는 북아메리카 내륙 지방 대부분을 자신들의 영토로 주장했다. 정착에 성공한 초기 영국인 정착지로는 1607년 제임스타운의 버지니아 식민지와, 1620년 청교도들의 플리머스 식민지다. 1619년에 이들 식민지는 이미 버지니아 회의를 구성했는데 이는 메이플라워 협약보다도 앞선 미국 최초의 민주적인 의회였다. 1628년에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회사의 칙허로 말미암아 이주민들이 대거 흘러들어오게 되며, 1629년에 메릴랜드에, 1634년에 뉴 잉글랜드에는 10,000여명의 청교도들이 살게 되었다. 1610년대 말에서 미국 혁명에 이르기까지 약 50,000명의 죄수들이 영국령 아메리카 식민지로 이송되었다. 1614년부터 네덜란드 정착민들이 맨해튼 섬의 뉴암스테르담 등 허드슨 강 하구를 따라 정착했다. 이주해온 대다수의 인구는 잉글랜드의 청교도, 프랑스와 스위스의 위그노, 아프리카에서 노예로서 이주하거나 중남미 식민지에서 들어온(이미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력을 위해 도입되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었다. 이들은 뉴잉글랜드와 버지니아를 중심으로한 미드 애틀랜틱 지역, 캐롤라이나를 중심으로한 남부 곳곳에 이주하여 미국의 역사가 태동했다. 후에 뉴욕으로 개명하고 급격히 발전하게 된다. 1664년작. 1674년, 영국-네덜란드 전쟁 이후 네덜란드는 자신들의 아메리카 영토를 영국에 할양했으며, 뉴네덜란드 주는 뉴욕 주로 개명되었다. 새 이주민 다수는 특히 남부로 몰렸는데, 이들은 계약 노동자들로, 1630년~1680년 사이에 버지니아의 전체 이주민 가운데 약 2/3가 계약 노동자들로 남부 대지주들의 플랜테이션이나 잡일을 위해 고용되었다가 계약 후에 자유 시민이 되었다. 18세기에 들어, 아프리카 노예들이 담보 노동의 주요 원천이 되었다. 1729년 북부와 남부의 경제·사회적인 갈등으로 캐롤라이나가 노스캐롤라이나와 사우스캐롤라이나로 분리되고, 1732년 스페인을 견제하기 위하여 조지아에 식민지가 설치되면서, 이후 미합중국을 이루게 될 영국의 식민지 13개 식민지가 모두 성립됐다. 이들 각 주는 대부분의 남성 자유민들이 참여하는 선거를 통해 지방 정부를 두었는데, 옛 영국인의 권리에 헌신하고 공화주의를 고무시킨 지방 자치의 관념이 발전하였다. 모든 주에서 아프리카 노예 무역을 합법화했다. 아메리카 식민지는 출산율이 높고 사망률이 낮으며, 여성을 포함한 이민자가 끊임없이 유입하여 인구가 급속히 증가했다. (미국의 평균수명은 영국의 평균수명보다 10세이상 앞서있었다.) 프렌치 인디언 전쟁에서 영국군이 프랑스에게 캐나다를 빼앗았으나, 이 곳의 프랑스어를 쓰는 주민들은 남쪽 식민지와는 정치적으로 독립된 상태를 유지하였다. 아메리카 토착민들을 제외한 이들 13개 식민지의 인구는 1770년에 260만여 명으로 당시 영국의 1/3 수준이었으며, 아메리카 인구의 1/5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노예들이었다. 아메리카 식민지는 영국에 조세를 납부했으나, 영국 의회에 대표자를 두지 못했다. 1730년대와 1740년대의 대각성 운동이라는 기독교 부흥주의 운동으로 종교와 종교 자유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또한 이 운동으로 인해 미국 대학의 역사가 시작되는데, 종교의 자유와 과학의 탐구를 위해 적지않은 대학들이 설립되었다. 1636년에 하버드 대학교가, 이후에 윌리엄 앤 메리 대학교, 예일 대학교, 프린스턴 대학교,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등 소위 아이비리그로 지칭되는 명문 사립 대학들이 설립되었다. of Independence (1819), by John Trumbull.jpg|섬네일|독립 선언. 존 트럼벌 그림. 1817-18년작. 1760년대와 1770년대 초 혁명기에 아메리카 식민지와 영국 사이 대립으로 미국 독립 전쟁(1775년 ~ 1781년)이 일어났다. 1775년 6월 14일,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대륙 회의에서 대륙군을 창설했고, 사령관으로 조지 워싱턴을 임명했다. 1776년 7월 4일 이 회의에서 토머스 제퍼슨이 초안을 쓴 독립 선언서를 채택했다. 이 날이 오늘날 미국의 독립기념일이다. 1777년 연합 헌장으로 결속력이 약한 국가연합 정부를 설립해서 1789년까지 존속했다. 프랑스 지원을 받은 아메리카 군대가 영국을 무찔러,(요크타운 전투) 영국은 미합중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이들 주에게 미시시피 강 동쪽의 아메리카 영토에 대한 주권을 승인했다. 독립 당시 미국의 수도는 뉴욕이었다. 조세권을 가진 강력한 국가를 창설하길 바라는 사람들이 1787년에 필라델피아 헌법회의를 조직하였다. 1789년에 미국 헌법이 비준되었으며, 1789년에 신생 공화국의 초대 상하원 의회가 출범하고 조지 워싱턴이 대통령에 취임했고, 1790년에는 수도를 필라델피아로 옮겼다. 연방 정부가 개인의 자유 및 다양한 법적 보호 보장의 제한을 금한 권리 장전이 1791년에 채택되었다. 1800년에는 수도를 다시 워싱턴 D.C.로 옮겼다. 노예제에 대한 입장은 유동적이었는데, 미국 헌법 1조 9항에서는 아프리카 노예 무역 폐지를 20년간 유보했다. 북부 주에서는 1780년에서 1804년 사이에 노예제를 폐지했으나, 남부 주에서는 "특별한 관습"(peculiar institution)을 옹호하며 노예주로 남았다. 1800년경에 시작된 제2차 대각성 운동으로 복음주의가 노예 제도 폐지 운동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 개혁 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미국의 연도별 영토 확장. 미국은 서부로 영토를 확장하며 아메리카 인디언 전쟁이 일어났으며 인디언 제거 정책을 펴서 원주민들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보내졌다. 1803년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이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를 매입하여 국토의 면적은 거의 두배로 늘어났다. 여러 이유로 영국과 벌인 1812년 전쟁은 승패가 분명히 갈리지는 않았으나 미국의 민족주의를 강화시켰다. 미국 군대가 플로리다를 수 차례 침입하면서 1819년에 미국은 스페인에게서 플로리다와 여타 멕시코 만 연안 영토를 할양받게 된다.(아담스-오니스 조약) 1845년에 미국은 텍사스 공화국을 병합하였다. "명백한 운명"이라는 관념이 대중화 되는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1846년 영국과 오리건 조약을 맺으면서 미국은 오늘날의 미국 북서부를 통치하게 된다. 멕시코-미국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하면서 1848년에 캘리포니아와 오늘날의 미국 남서부를 할양받게 되었다. 1848년~49년의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로 서부 이주가 가속화되었다. 새로이 철도가 부설되면서 정착민들의 이동이 쉬워지고, 원주민과의 갈등도 커졌다. 50년 만에 4천만 마리 이상의 아메리카들소(버팔로)가 가죽과 고기를 얻거나 철도망 확대의 편의를 위해 학살당했다. 평원 인디언들의 자원이던 버팔로를 잃어 원주민 문화는 큰 타격을 입었다. of Gettysburg, by Currier and Ives.png|섬네일|왼쪽|"게티즈버그 전투", 쿠리에 & 이브의 석판화. 1863년경. 노예주와 자유주는 주와 연방 정부간의 관계를 놓고 갈등했으며, 신설 주의 노예제 시행 여부를 놓고 폭력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런 가운데, 주로 노예제 반대 입장이었던 공화당 후보 에이브러햄 링컨이 1860년에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링컨의 취임에 앞서 일곱 노예주는 분리 독립을 선언하여 남부 연합을 결성했다. (연방 정부는 이를 불법으로 규정하였다.) 남부 연합이 섬터 요새를 공격하면서 미국 내전이 발발하였으며, 노예주 네곳이 남부 연합에 추가로 가입했다. 이에 링컨은 노예 해방 선언에서 남부 연합 노예의 자유 선언을 했다. 1865년에 남부 맹방이 패배하여 미국 헌법은 세차례 수정되어 당시 노예 신분이었던 아프리카 노예 4백만여 명이 자유를 보장받았으며, 미국 시민이 되었고, 투표권을 부여받았다. 이 전쟁으로 연방 정부의 권력이 크게 증대되었다. 링컨이 암살당하면서, 새로이 해방된 노예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한편 남부 주를 재건하고 재통합하는 목표로 했던 공화당의 재건 정책이 급진화되었다. 1876년 대선 논쟁이 1877년의 합의로 해결되면서 미국의 재건 정책이 종식되었으며, 이내 짐 크로 법으로 수많은 아프리카계 미국 시민들이 시민권을 박탈당하였다. 북부에서는 도시화가 이루어지고 남유럽과 동유럽에서 전례없이 많은 이민자들이 유입되면서 미국의 산업화가 더욱 진전하였다. 1929년까지 지속된 이민 물결로 노동력이 유입되고 미국 문화가 변화하였다. 국가 기반 시설이 발전하면서 경제는 호황을 이루게되었다. 1867년 러시아에서 알래스카를 매입하면서 미국 본토의 영토 확장이 일단락되었다. 영토를 잃은 원주민이 1890년 운디드 니 학살로 최후의 대규모 무장 투쟁을 벌였으나 실패했다. 1893년, 태평양 하와이 왕국의 왕정이 미국 거류민들이 주동한 정변으로 전복되자, 1898년에 미국은 이 군도를 병합했다. 같은 해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미국은 강대국의 면모를 보이게 되었으며, 푸에르토리코, 괌, 필리핀을 병합했다. (50여년 뒤에 필리핀은 미국에서 독립했으나, 푸에르토리코와 괌은 미국 영토로 남아있다.) Bowl - Dallas, South Dakota 1936.jpg|섬네일|왼쪽|1936년 더스트볼로 버려진 사우스다코타의 농장. 1914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할 때 미국은 중립 태도를 취했다. 미국인 대부분은 영국과 프랑스를 동정했으나, 많은 이들이 참전에 반대했다. 1917년 미국은 결국 연합군으로 참전하면서 전황은 동맹국에 불리하게 전개된다. 전후 상원은 국제 연맹을 창설한 베르사유 조약에 비준하지 않았다. 미국은 고립주의에 경도된 일방주의 정책을 추구했다. 1920년대에 여권 신장 운동은 여성 투표권을 보장하도록 헌법이 수정되는 성과를 얻었다. 번영을 구가하던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는 대공황의 단초가 된 월 가의 대폭락 즉 검은 목요일로 끝나버렸다. 1932년에 대통령에 당선된 프랭클린 D. 루즈벨트는 경제 위기에 맞서 수정자본주의인 뉴 딜 정책으로 대응하였다. 하지만 1930년대 중반, 중부 지역에 극심한 사막화인 더스트 볼(Dust Bowl) 현상으로 수많은 농촌이 빈곤에 빠졌으며 서부로 이주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에 미국은 중립을 유지하다, 1939년 9월에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1941년 3월 무기대여법을 통해 연합국에 물자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급습하면서 미국은 추축국에 대항하여 연합군에 참전했다. 참전으로 미국의 자본 투자와 산업 능력이 높아졌다. 주요 참전국 가운데 유일하게 미국은 전쟁 덕분에 부유해진 나라였다. 연합국의 브레튼 우즈 회의와 얄타 회담으로 미국과 소비에트 연방이 세계 정치의 중심에 서게 되는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게 되었다. 유럽 전선에서 연합국이 승리하자 1945년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전후에 발효한 유엔 헌장이 도출되었다. 처음으로 핵무기를 개발한 미국은 그 해 8월에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무기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1945년 9월 2일 일본이 항복하면서 전쟁이 끝났다. United Nations Secretariat Building.jpg|섬네일|뉴욕의 미드타운 맨해튼에 위치한 유엔 본부 Luther King - March on Washington.jpg|섬네일|왼쪽|위오른쪽|1963년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고 연설하고 있는 마틴 루터 킹 2세.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냉전기에 미국과 소련은 각자 북대서양 조약기구와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통하여 유럽의 군사 현안을 주도하며 패권을 놓고 경쟁했다. 미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법치주의를 발전시켰으며, 소련은 전체주의와 공산주의 & 사회주의 &관치경제를 이끌어갔다. 양자는 대리전을 통하여 전쟁을 벌이고 여러 독재 정권을 지원했다. 1950~53년의 한국 전쟁에서 미군은 중국 공산군과 싸웠다. 하원 반미 활동 위원회(HUAC)에서는 좌익 단체의 국가 전복 혐의를 캐내는 조사 활동을 벌였으며, 매카시 상원 의원은 반공 정서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1961년 소련이 최초의 유인 우주선을 쏘아올리면서,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미국이 최초로 "달에 사람을 보내겠다"는 계획을 내세워 1969년에 기어이 실현했다. 또 케네디는 쿠바에서 소련군과 핵 위기에 직면하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 미국 경제는 계속 발전했다. 마틴 루서 킹 2세의 비폭력 저항주의와 맬컴 엑스와 스토클리 카마이클이 주도한 과격주의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흑인 인권운동을 전개했다. 1963년에 케네디가 암살당한 뒤, 린든 B. 존슨 대통령이 1964년 민권법, 1965년 투표권법을 통과시켜 흑인의 민권이 성장했다. 하지만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여러 인권운동 지도자들이 암살 당하는 등, 사회가 혼란스러웠다. 후임 대통령인 리처드 닉슨은 동남 아시아로 대리전을 확대했다가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했다. 그런 가운데 반문화 운동이 반전 운동과 흑인 민족주의, 성 혁명의 영향을 받아 널리 성장했다. 1960년대는 각종 암살사건, 흑인 민족주의, 여성해방운동, 히피 문화, 동성애문화가 등장한 변혁과 격동의 시기였다. 워터게이트 사건의 불명예로 1974년에 닉슨은 탄핵되는 것을 피하고자 최초의 사임 대통령이 되었으며 제럴드 포드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였다. 1970년대 말 지미 카터 행정부 시대에는 스태그플레이션과 이란 인질 사건이 중요한 사건이었다. 1980년에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미국 정치가 우익화되고 대중들도 1960년대의 히피문화에서 보수주의로 변화하였다. 레이건 2기 정부 때는 이란-콘트라 사건이 일어나고, 소련과 괄목할만한 관계 증진을 이루기도 하였다. 이후 소련이 붕괴하면서 냉전이 종식되었다. 2001년 9월 11일 아침에 일어난 세계 무역 센터 테러. 조지 H. W. 부시 대통령 시기에 미국은 유엔을 주도하여, 걸프 전쟁의 승인을 받아냈다. 빌 클린턴 대통령 시대에 현대 미국 역사상 최장 기간의 경제 성장(1991년 3월 ~ 2001년 3월)이 이루어졌으나, 닷컴 거품 현상이 생겼다. 르윈스키 스캔들로 인해 1998년에 빌 클린턴이 탄핵받았으나, 끝내 임기를 지켰다. 2000년 대선에서 조지 H. W. 부시의 아들 조지 W. 부시가 연방대법원의 결정에 따라 근소한 표차로 당선되었다. 2001년 9월 11일, 알 카이다 테러범들이 뉴욕 시의 세계 무역 센터와 미국 국방부 펜타곤에 테러 공격을 감행하여, 3천 여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부시 행정부는 이에 대응하여 "대테러 전쟁"을 개시했다. 2001년 말, 미군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탈레반 정권과 알 카에다 훈련소를 제거했고 2002년, 이라크에 정권 교체 압박을 가했다. Old’ and ‘New’ Europeans United Public Attitudes Towards the Iraq War and US Foreign Policy , John Springford, Centre for European Reform, December 2003. 부시는 2003년에 이라크를 선제 공격했으며, 과거 미국의 동맹자였던 독재자 사담 후세인을 제거했다.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발생하여 멕시코 만 연안 지대 상당 지역을 심각하게 파괴했으며, 대도시 뉴올리언스를 황폐화했다. 2008년 11월 4일, 세계적인 경제 침체 속에서 버락 오바마가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경기 침체는 계속되었으나, 대공황 수준은 아니었고, 2011년 이후 우려와 기대 속 회복 단계에 있다. 2017년에는 도널드 존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본토의 위성 지형 사진. 미국 본토의 육지 면적은 약 7억7천만 헥타르다. 본토와 떨어진 알래스카는 미국에서 가장 넓은 주로, 면적이 1억5천만 헥타르다. 북아메리카 대륙 남서쪽으로 태평양 한 가운데에 자리한 군도인 하와이 주 면적은 1백6십만 헥타르를 겨우 넘는 정도다. 미국은 러시아와 캐나다 (또는 중국)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넓은 나라 3, 4위인데, 중국과 비슷한 수준이다. 미국과 중국의 면적 순위는 중국-인도간의 영토 분쟁 지역 및 미국 총 면적의 계산 방식에 따라 달라진다. 미국의 면적을 놓고 CIA 월드 팩트북에서는 9,826,676 km2, 유엔 통계국에서는 9,629,091 km2, 브리태니커 사전에서는 9,522,055 km2 으로 쓰고 있다. 육지 면적만 따지자면 미국은 러시아, 중국과 캐나다 다음인 4위이고, 오스트레일리아보다 약간 크다. Eagle Portrait.jpg|섬네일|왼쪽|160px|1782년 이래 미국의 국조인 흰머리수리. 대서양의 해안 평원에서 내륙으로 가면 피드먼트의 낙엽수 삼림과 구릉 지대로 이어진다. 애팔래치아 산맥은 동부 연안과 오대호, 중서부를 가른다. 세계에서 네 번째로 긴 수계인 미시시피 강-미주리 강은 국토의 심장부를 남북으로 가로지른다. 평평하고 비옥한 대초원을 이루는 대평원은 남동부의 고원 지역까지 서쪽으로 뻗어있다. 대평원 서쪽 끝에 있는 로키 산맥은 국토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며, 콜로라도에서는 고도가 4,300m까지 높아지기도 한다. 더 서쪽으로 가면 로키 산맥의 대분지(그레이트베이슨)와 모하비 사막 등 사막이 있다. 시에라네바다 산맥과 캐스케이드 산맥은 태평양 연안과 가까이 뻗어있다. 알래스카에 있는 고도 6,194m의 매킨리 산은 미국과 북아메리카 전체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알래스카의 알렉산더 제도나 알류샨 제도, 하와이의 화산 등 활화산도 흔하다. 로키 산맥 옐로스톤 국립 공원 밑에 있는 초화산은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큰 화산체다. 광대한 영토에 다양한 지리 환경을 지닌 미국에서는 거의 모든 기후 형태를 찾아 볼 수 있다. 서경 100도선 동쪽으로는 기후대가 북쪽의 습윤 대륙성 기후에서 남쪽의 온대 습윤 기후에 이른다. 플로리다 남쪽 끝 지역은 하와이처럼 열대 기후이다. 서경 100도선 서쪽의 대평원 지역은 반건조 기후다. 서부 산맥 상당 지역은 고산 기후를 나타낸다. 남서부의 사막과 대분지의 기후는 건조하며, 캘리포니아 해안은 지중해성 기후가 나타나고, 오리건과 워싱턴주 및 알래스카 남부는 서안 해양성 기후를 보인다. 알래스카 대부분은 아극 기후나 극기후다. 극단적인 기후 현상도 종종 일어나는데, 멕시코 만과 접한 주에는 허리케인이 곧잘 발생하며, 세계 토네이도의 대부분도 미국 내, 특히 중서부 토네이도 길목(Tornado Alley)에서 주로 일어난다. 미국의 생태는 최다 생물다양성 국가(megadiverse countries)로 여겨진다. 미국 본토와 알래스카에는 관다발식물 17,000여 종이 있으며, 하와이에서는 속씨식물 1,800 종 이상이 발견되는데, 이들 가운데 본토에서도 서식하는 종은 적은 수에 불과하다. 미국은 포유류 400종, 조류 750종, 파충류 및 양서류 500종 이상이 서식하는 땅이다. 곤충은 91,000종 이상이 서식한다고 한다. 1973년의 멸종 위기종 법안은 위기종과 취약종 및 이들의 서식지를 보호하는데, 미국 어류 및 야생생물 보호국에서 이들 서식지를 감시한다. 미국에는 58개의 국립 공원이 있으며, 그 밖에도 연방 차원에서 관리하는 공원, 숲, 야생 지역이 수백곳 있다. 미국 정부는 국토 육지 중 총 28.8%를 소유하고 있다. 이 가운데 대부분의 지역은 보호 구역이며, 일부 지역은 원유 및 가스 시추, 광산 채굴, 벌목, 목축을 위해 임차한 곳도 있으며, 군사 목적으로는 2.4%가 이용되고 있다. 1970년대 이후로 환경 문제가 국가 의제에 계속해서 제기되어왔다. 원료와 원자력 에너지에 관한 논쟁, 공기와 수질 오염, 야생동물과 산림 벌채, 지구 온난화에 대한 국제적 대응 등 환경갈등이 계속되었다. 환경문제는 대부분 연방정부와 국가기관이 참여하고있다. 이렇게 환경문제가 제기되면서 가장 눈에 잘 띄는 점은 1970년대 대통령명으로 만들어진 미국 환경보호국 (ERA)이다. 1964년 정부가 소유하고있는 토지 중 황무지를 사용하는 일환으로 원시지역 보호법을 만들었다. 1973년 절멸 위기종 보호법은 멸종 위기에 처한 동식물들을 보호하기위해 만들어졌고, 미국 어류 및 야생동물관리국에서 관리한다. 출신 국가별 인종 분포, 2000년 기준. 인종/민족 (2014년 조사 기준) 인종 백인 77.4% 아프리카계 미국인 13.2% 아시아계 5.4% 아메리카 원주민, 알래스카 원주민 1.2% 하와이 원주민, 태평양 섬 원주민 0.2% 기타 6.2% 혼혈인 2.5% 민족 히스패닉/라티노 17.4% 히스패닉/라티노 이외 82.6% 미국은 지구상의 모든 인종과 민족이 뒤섞여있는 세계 최대의 다민족국가다. 2000년 조사된 인구 분포도를 보면 백인 이 전체인구의 75.1~81.1%, 흑인 이 약 12.3~12.6%, 아시아계 3.7~3.9%, 미국원주민 이 0.8%다. 백색인종이 압도적으로 많으며 그중에서도 영국계, 독일계, 아일랜드계 등이 가장 많다. 미국의 발전은 그 역사를 통해서 유럽·아프리카·아시아로부터의 이민에 의해서 유지되어 왔는데, 오늘날 이들 민족은 융합하여 새로운 아메리카 민족을 구성해 가고 있다. 그러나 같은 영어를 사용하고, 같은 미국적인 생활을 영위한다는 점을 제외하면, 외견상 분명히 몇 인종으로 나눌 수 있다. 유럽 백인이 다수를 차지하며, 그중에서도 출신 국가별로는 영국계, 독일계, 아일랜드계 등이 가장 많다. 최초로 이주해 온 것은 영국인과 네덜란드인이며, 독립할 때까지는 이 밖에 독일인 등이 추가되었지만 중심은 영국인이었으므로 현재도 미국에서는 영어가 일상어다. 미국에서 사용하는 영어 (미국 영어)는 표준 영국 영어와 어휘나 문법 등에서 많은 차이를 보인다. 남북전쟁 이후는 종래의 북유럽계의 이민에 비하여 이탈리아인·슬라브인 등의 남유럽계·동유럽계 이주자의 비중이 높아지고, 20세기 초에는 전 이민의 8할을 이들 이민이 차지하였다. 이민을 가장 많이 온 때는 1880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이며, 그 전후를 포함하여 1820년부터 1961년까지의 4,200만 명이 입국했다. 또한 19세기 말부터는 중국인·일본인·한국인·필리핀인·멕시코인·쿠바인·푸에르토리코인 등이 증가하고 있어, 이들을 총칭하여 신이민이라고도 한다. 마찬가지로 19세기 이래 이주하게 된 유대인은 특이한 존재로서, 현재 전 세계 1,500만의 유대인 중 약 550만이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데, 그들 중에는 자산가나 훌륭한 학자가 많고, 각지에 집단적인 생활을 하며, 미국 사회에서는 무시하지 못할 세력을 가지고 있다. 비(非)백인 가운데 가장 큰 인구를 가진 소수민족은 히스패닉으로, 라틴 아메리카로부터의 이민 유입 및 높은 출산율 등으로 오랫동안 가장 많은 소수 집단이었던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넘어섰다. 또한 서부 지역에 살고 있는 상당수 히스패닉계 주민은 원래 멕시코 영토였던 그들의 거주지가 미국에 병합됨으로써 자동적으로 미국인이 되기도 했다. 흑인은 전체 인구의 약 12%를 차지한다. 아시아계 이민은 점점 증가하는 추세이나 캘리포니아주를 제외한 대부분의 주에서 아직 주류는 아니다. 한국계 주민들은 약 2백만명, 중국인은 약 3백만명, 일본인은 약 80만명 정도로 대부분이 캘리포니아주를 중심으로한 서부 지역에 많다. 미국 남부에는 흑인이 밀집해있으며, 이 지역의 백인은 주로 영국계, 독일계, 아일랜드계다. 동북부 지역의 인종 구성은 매우 다양하다. 중북부 지역은 독일계, 아일랜드계, 동유럽계, 북유럽계 백인이, 남서부는 히스패닉이, 서부는 히스패닉과 아시아계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미국에는 전 세계 거의 모든 국가 출신이 모여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의 공용어는 사실상 영어 (미국 영어)이나, 히스패닉계 인구가 많은 서부 지역에서는 스페인어를, 특정 민족의 인구가 많은 구역은 그 민족의 언어를 공공 표지판 등에 병기하기도 한다. 미국 내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오늘날 아메리카 대륙에 해당하는 영토내에 거주하고 있는 원주민, 그리고 이들의 현대 후손이다. 이 표현은 광범위한 부족, 국가, 민족을 포괄하며 이 중 많은 무리들은 오늘날에 정치적 공동체로 살아남았다. times square night 2013.jpg|섬네일|타임 스퀘어 (2013), 뉴욕, 언론과 미국 소비자뿐만 아니라 브로드 웨이 극장 등 지구를 나타낸다. 미국은 일찍이 도시화된 국가로, 도시별 특성과 문화적 차이가 존재한다. 각 지역은 자원, 자본, 노동력 모두 충족되어야 발전이 이루어졌고, 이는 처음으로 북동부가 달성했다. 이후 기후와 자연경관이 발전에 굉장히 중요하게 작용해서, 이를 가진 서부가 각종 산업의 꽃을 피웠으며, 최근 남부 및 미국 남서부가 미국 경제를 뒷받침하고있다. 북동부와 버지니아 지역은 초기 미국 역사가 시작된 곳으로, 현재까지도 각종 산업의 중심지이고, 서부는 세계대전과 골드러시 이후 광공업과 군사업을 바탕으로 급격히 발전하다가 영화산업과 첨단산업 그리고 농업이 뒤이어 발전해, 현재 북동부 지역의 경제력과 필적한다. 남부는 남북전쟁 이전에는 소수 영국계 백인 귀족이 플랜테이션을 바탕으로 목화산업과 담배산업으로 성장했으나, 남북전쟁 이후 쇠퇴하고, 최근 들어 제조업과 각종 서비스업이 발전하고 있다. 20세기까지 세계의 경제, 문화를 주도했던 미국 북동부 지역의 뉴욕과 보스턴은 미국 내에서도 가장 밀집되고 고층건물이 많은 메갈로폴리스를 구성하며, 근교에는 많은 산업도시와 주거지역이 형성되어있다. 뉴욕은 세계 금융, 문화, 예술의 중심지로 일찍이 발전했으며, 보스턴 또한 우수한 교육을 바탕으로 금융업이 매우 발달했다. 내륙으로는 미국 최초의 계획도시이자 건국 초기 중심지이었던 필라델피아와 철강도시 피츠버그가 위치해있다. 이들 내륙 지역은 러스트 벨트에 속해, 근래 미국 제조업의 쇠락으로 불경기의 진원지에 서있다. Las vegas strip.jpg|섬네일|왼쪽|미국의 오락, 관광산업의 중심지인 라스베이거스. 뛰어난 지리적 조건과 기후, 풍부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20세기부터 급격히 발전한 캘리포니아주는 최남단에 샌디에이고가, 북쪽으로 해안선을 따라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가 위치해있으며 내륙으로 리버사이드와 새크라멘토와 같은 대도시가 있다. 이들 도시는 연중 온화하고 건조한 기후를 바탕으로 많은 이민자를 받아들였으며, 현재 히스패닉과 아시아계 이민자가 백인과 함께 주류를 이루고있다. 로스앤젤레스는 영화와 연예, 오락산업이 특히 발달해 세계 대중문화를 주도하고 있고 뉴욕에 이어 인구가 가장 많다. 샌디에이고는 군수산업과 해양과학이 특화된 과학도시며, 샌프란시스코는 새너제이(San Jose)와 이어져 실리콘밸리를 이뤄 첨단산업을 이끌고 있는 도시다. 내륙 지역과 분지/계곡 지역은 농업이 발달했는데, 집산지인 베이커즈필드를 중심으로 광대한 과수원과 쌀 농장이 위치해 지역의 경제를 주도하고 있다. 미국 서부 지역은 캘리포니아주 외에도 워싱턴주의 시애틀, 네바다주의 라스베이거스, 오리건주의 포틀랜드, 콜로라도주의 덴버, 애리조나주의 피닉스 등이 위치한다. 시애틀은 항공산업과 선박업이, 라스베이거스는 오락과 관광업이, 포틀랜드는 임업이, 덴버는 로키 산맥 지방의 교통과 상업 중심지이자 요양지다. 이들 지역은 선 벨트에 속하며, 인종이 매우 다양하고 그 분포가 고르다. 스페인어를 많이 사용하는 히스패닉의 영향력이 매우 크다. 또한 한국인을 포함한 아시아계 이민자가 가장 많이 진출한 지역이기도 하다. Valley, Big Island.jpg|섬네일|하와이주의 자연경관 미국 중서부 지역은 오대호를 중심으로 시카고, 디트로이트, 클리블랜드, 밀워키, 버펄로 등의 대도시가 위치해있으며, 시카고는 상업과 금융업을 바탕으로 미국 제 2의 도시로 발전하였다. 자동차 산업의 중심지인 디트로이트는 현재 미국 내에서 가장 쇠퇴하는 도시 중 하나이기도하다. 이들 지역의 기후는 대체로 추워 스노벨트에 속하며, 20세기 후반에 들어 침체된 경제를 일컬어 러스트 벨트라고 불린다. 오대호와 미시시피 강을 중심으로한 교통이 매우 발달했고, 중공업과 과학이 매우 발달했다. 서쪽으로는 그레인 벨트라고 불리는 세계 최대의 곡물 지대가 있다. 미국 남동부 지역은 애틀란타, 뉴올리언스, 내슈빌, 샬럿, 버밍햄 등의 대도시가 있으나 도시화와 산업화가 늦은 지역이다. 최근 따뜻한 기후와 낮은 물가를 바탕으로 서남부 지역과 함께 선 벨트를 이루고있어, 인구가 증가하는 지역이다. 애틀란타는 상공업이, 재즈의 고향인 뉴올리언스는 미국의 대표적 항구도시이며 석유산업이 발달했고, 내슈빌은 음악(종교/컨트리)과 출판업이, 샬럿은 금융업이, 버밍햄은 제철업이 발달했다. 이들 지역은 흑인의 인구비가 높아 블랙 벨트로 불리며, 과거 흥했던 농업이 쇠퇴해 20세기 중반까지 산업이 발달하지 못했던 지역이나, 최근 서비스업과 제조업이 급격히 발전 중이다. 미국 중남부 지역에는 휴스턴, 댈러스, 포트워스, 샌안토니오, 오클라호마시티 등의 대도시가 있는데, 풍부한 자원과 멕시코와의 접근성으로, 최근 급격히 발전하는 지역이다. 휴스턴은 우주산업이, 댈러스는 석유산업과 서비스업이, 샌안토니오는 교육과 군사시설이 많다. 플로리다주는 남부에 속하고 아메리카 연합국에 가맹한 적도 있으나, 문화와 역사는 독립적인데, 히스패닉이 주류이고, 온화하고 강렬한 햇빛을 가져, 오렌지 등의 과수재배가 활발하고, 휴양지가 많다. 마이애미는 중남미와 미국을 잇는 거점도시로, 항구도시이자 관광도시다. 탬파 등의 산업 도시뿐만 아니라 해안가 전부가 관광도시로 이뤄져있다. 하와이주는 섬 지역으로, 독특한 풍토와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바탕으로 관광업이 주된 산업으로 하고있다. 군사적 요점이기도 한 하와이는 아시아계 미국인이 가장 많은 지역이기도 하다. 알래스카주는 미국에서 가장 넓은데, 광활한 토지에 다이아몬드와 석유를 포함한 각종 광물자원을 가지고있다. 매우 추운 날씨로 인구는 적으나, 광공업과 관광업을 바탕으로 소득이 높다. 버지니아주, 메릴랜드주와 워싱턴 D.C.는 D.C를 중심으로한 정치와 첨단과학의 중심지역이다. 이들 지역은 비교적 소득이 높고, 군사와 행정기능이 발달했고 역사도 오래되었다. 여기에는 워싱턴 D.C.를 포함한 볼티모어 등의 도시가 위치해있다. 미국은 한국과 같은 광역시의 개념이 없기 때문에, 대도시와 주변 소도시들을 광역권으로 포함시켜 인구를 측정한다. 다음은 인구순으로 나열한 도시 목록이다. 다양하고 복잡한 국민성을 다음의 항목에 열거하였다. 선택의 자유와 책임감 사상적 자유와 소비 선택, 진로 선택 등의 자유는 완벽히 보장되며 그에 따른 책임감은 항상 따른다. 독립과 자립 미국 부모의 자녀 교육의 최고 목표는 독립심을 길러주는 것으로, 어린이는 어릴 때부터 이를 기른다. 가치의 존중과 인간애 정신 민주주의와 타 문화에 대한 개방성 준법정신과 국가협력적 태도 및 애국심 교통질서뿐만 아니라, 범법적 준법정신이 투철하고, 범죄자에 대한 자비는 없다. 감옥체계가 발달되었다. 가족 중심의 사회 그리고 높은 이혼율과 가족관계의 경제적 선택 가족이 모든 개인의 중심에 있고 서로 의지하나, 경제적인 관점에서는 독립되어있고, 이에 따라 이혼이 쉽게 인정된다. 기독교 문화 속 휴일과 감사하는 태도 추수감사절과 성탄절은 국가 최대 휴일이고 광범위한 일에 걸쳐 기독교 정신이 자리 잡고있다. 남녀평등과 개방적인 성문화 남녀의 성적 역할은 최대한 효율적으로 이용하나, 성적 차이는 차별받지 않으며, 성문화가 개방적이다. 물질적 번영과 미국제일주의 높은 국민 소득과 생활 수준이 미국 것이 제일이라는 안이한 태도를 만들기도 한다. 소비 생활과 사치성 문화, 대중 문화 미국은 이민의 국가이기 때문에 이민 정책은 국가의 기초를 설계하는 가장 중요한 정책 가운데 하나다. 초기에 미국은 경제발전을 위한 값싼 노동력을 얻기 위해 유색인 이민을 받아들였으나, 이미 일터에 뿌리를 내린 백인 노동자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시대에 따라 유색인 이민문호를 조절했다. 미국은 1850년 무렵부터 아시아계 이민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다가 이들의 영향력이 커질 조짐이 있자, 1882년 중국인 이민부터 금지시키더니 1924년 아시아계 이민을 완전히 금지시켰다. 당시 미국 식민지였던 필리핀은 여기에서 예외였다. 캘리포니아주는 이보다 앞선 1913년 외국인 토지소유 금지법을 제정해 외국인의 토지소유를 막았는데, 표적은 아시아계였다. 토지를 소유하면 자본을 축적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법은 미국시민(미국 시민권을 소유한 자)이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은 토지를 소유할 수 없도록 규정했는데 아시아계 이민 1세는 미국시민이 될 수 없었다. 그러다 2차 대전에서 중국과 연합국으로 싸우게 되자 중국에 이민문호를 개방한 것이 1943년, 인도가 1946년, 한국과 일본에 대해서는 1952년에 와서야 이민문호를 다시 열었다. 문호를 개방했다고 하지만 실제로 이민이 허용되는 숫자는 생색내기 수준이었다. 그렇지만 1952년 개정법으로 아시아 이민 1세도 미국시민이 될 수 있었다. 시민이 될 수 있다는 말은 투표권이 있다는 말로 크건 작건 정치적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전쟁까지만 해도 미국은 이민의 국가이면서도 인종차별을 법적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인종 문제가 사회적으로 개선되기 시작한 것은 1965년 이후 마틴 루서 킹 목사의 활약에 힘입은 바가 크다. 앵글로-색슨족(Saxons)을 중심으로 하는 유럽 북방계의 이주자들은 이주 시기가 빨랐다는 점도 있어 일찍이 융합하였으며, 현재 미국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19세기 후반 이후 이주한 신이민들은 일반적으로 신참자(新參者)로서 생활의 기반이 약한 데다가 유대인·아시아인 등은 인종·문화가 구(舊)이민과 이질적이어서 동화하기 어려우며, 배척을 당하는 일도 많았다. 따라서 그들은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경향이 있고, 사회생활에서도 차별대우를 받는 일이 있다. 그러나 현재 인종문제로서 최대의 문제는 인구의 1할을 차지하는 흑인의 문제다. 식민지 시대에 아프리카로부터 노예로 팔려 온 그들은 해방 후 전국 어느 곳에나 거주하게 되었는데, 아직도 일부에선 교육·취직·거주 등의 분야에 불평등한 점이 남아 있고, 이에 항의하는 흑인의 행동도 차츰 격렬해지고 있어, 오늘날 미국 내에서 최대의 사회 문제로 되어 있다. 또한 푸에르토리코인은 뉴욕을 중심으로 하는 북부에 한정되어 있고 절대수도 많지는 않은데 신이민으로서 흑인과 함께 사회의 최하층을 형성하는 수가 많다. 그리고 빈곤으로 인해 그들의 생활상태는 차츰 사회문제화되어 가고 있다.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영국에서 이민 온 개신교 신자들 즉, 청교도들은 초기에는 아메리카 토착민들의 전통종교를 배격했으며 , 같은 기독교 종파들인 성공회와 로마 가톨릭교회도 성공회 기도서 사용 금지, 성공회 신자 추방, 로마 가톨릭교회 신자 이민거부로 배척했다. 하지만 건국 후에는 헌법으로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고, 다수의 인종·민족으로 구성된 나라라는 미국의 특징상 거의 모든 종류의 종교를 볼 수 있지만, 유럽에서 온 이민이 주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다. 그러나 주 1회 교회에 가는 사람은 점차 적어지고 있다. 개신교 신자가 다수며 그외 가톨릭교회 및 기타 다양한 종교가 있다. 또한 유대교도도 많아서 이스라엘의 인구보다도 더 많은 유대교도가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신앙심도 미국인들은 매우 높아 신 또는 영혼의 존재를 믿는 비율이 94%에 달할만큼 기독교적인 국가라고 할 수 있다. 종교적인 이유로 가톨릭교회와 유대인을 공격했던 시기도 있었고, 존 F. 케네디외에는 가톨릭교회 신자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지 않았던것도 이와같은 배경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의 이스라엘 지원과 같이 종교나 민족이 미국의 외교 정책에 큰 영향을 끼치는 일도 적지 않다. 영국 종교개혁으로 성공회가 가톨릭교회에서 분리된 이후, 일부 칼뱅주의자들은 철저한 개혁을 요구했다. 이들은 성경에 언급되지 않은 전통들을 배척한 성경주의자들로서, 성공회를 개혁하고자 했다. 일부 청교도들은 네덜란드와 미국으로 이주했는데, 네덜란드에 이주한 ‘암스테르담 제2 영국교회 분리주의자 형제’들을 후에 침례교 또는 침례교인이라고 불렀다. 미국에 1620년 이주한 이들은 영국 플리머스 항을 떠나 메이플라워호에 탑승했는데, 본래 이들은 버지니아 식민지에 가고 싶어했다. 하지만 태풍을 만나면서 플리머스 정착지에 이주했다. 이 플리머스 정착지는 메사추세스 식민지에 흡수된다. 후에 이들을 일컬어 필그림 파더스 라고 하게 되었으며, 종교의 자유를 찾아 개척되었다는 미국의 이미지의 대명사가 되었다. 하지만 미국이 청교도들에 의해 개척된 기독교 국가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낭만적인 신화라는 설명도 있다. 그 실례로 개혁교회 목사인 마이클 호튼은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나침반)에서 독립혁명으로 미국을 건설한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이 아니라 이신론자들이었음을 지적한다. 미국은 청교도들이 개척한 나라로서 초기 청교도 사회에서는 기독교인만 선거에 참여할 수 있었다. 물론 청교도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확고한 신앙을 갖고 있었고, 청교도 목사들은 신자의 자녀에게만 세례를 집례했다. 그런데 이들은 다른 사상이나 종교를 다소 배격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실제로 로저 윌리엄스() 前 성공회 사제는 제정분리사상 즉, 종교와 정치의 분리사상을 주장하여, 1635년 청교도 사회로부터 추방되었다. 로저는 아메리카 토착민들의 도움을 받아 매사추세츠주 남부에 정착하여 프로비던스(, 현재 로드아일랜드)를 건설했다. 프로비던스는 종교의 자유를 존중했기 때문에, 앤 허친슨처럼 종교적 박해를 받던 사람의 안식처가 되었다. 앤 허친슨은 보스턴 주민이었는데, 창세기의 아브라함 이야기에 근거, 하나님이 자신에게 말씀하셨다고 주장했다. 또한 사도행전 18장 26절과 디도에게 보낸 편지 2장 3~5절에 근거, 여성도 교회에서 가르칠 수 있다고 보았는데, 이 때문에 재판을 받았다. 결국 그녀는 추방명령을 받았고, 프로비던스로 피신했다. 물론 로저는 앤 허친슨의 신앙을 존중하여 그녀를 프로비던스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로저 윌리엄의 종교적 자유 포용은 미국 민주주의의 모태가 되었다. 17세기 청교도 사회에서 기독교의 영향력이 줄어들자, 대다수 청교도들은 이것을 사탄의 세력에 의한 것으로 두려워했다. 이것은 1692년 살렘 마녀 사냥으로 폭발하는데, 메사추세스주 살렘에서 일부 시민들이 마녀로 몰려 고문치사 또는 사형당한 사건으로, 50000명 중 1명이 교수형을 당했다. 이 사건은 초기 청교도 사회의 오점 중 하나다. 근대 미국과 유럽교회에서는 자유주의 신학이 영향을 주었다.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 신학의 근대적 해석으로 기독교와 시대의 연관성을 추구했다. 특히 미국교회의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의 다스림의 윤리성을 강조한 사회복음주의가 등장하는 등 기독교인의 사회참여를 강조하는 성향을 보였고, 미국 성공회, 감리교, 교회들이 자유주의 신학을 따르고 있었을 정도로 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장로교는 뉴욕 유니온을 중심으로 한 축을 형성하였을 뿐 여전히 정통 칼뱅주의가 주류였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미국 보수 기독교계에서는 기독교 근본주의()를 주장하였다. 근본주의 신학은 일부 감리교회와 극소수의 장로교회(예:칼 매킨타이어)와 절대다수의 침례교회에서 영향력을 보였는데, 1915년 출판된 《근본》이라는 소책자에서 그 이름이 유래한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 예수의 신성, 예수의 대속적 죽음, 예수의 재림, 축자영감설에 근거한 성경무오설이 근본주의의 교리적인 특징이며, 예수를 믿지 않는 다른 종교인들은 심판으로 멸망한다는 구원관, 음주나 흡연에 반대하는 종교적인 금욕주의, 신학 교육과 자연과학에 대한 거부도 근본주의의 특징이다. 이들 근본주의자들은 조선에서의 개신교 선교를 했기 때문에, 한국 개신교회는 근본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현재 미국에서 가장 압도적인 종교는 기독교이며, 70.6%가 기독교인이다. 이 중에서 개신교 신자는 46.5%며, 성공회, 침례교, 감리교, 장로교, 오순절교회, 그리스도의 교회, 루터교회, 개혁교회 등의 다양한 교파가 있다. 이중 그리스도의 교회는 미국 교회에서 19세기 소위 환원운동이라는 종교운동으로 발생한 자생적인 교파다. 가톨릭교회는 20.8%로 단일 교단으로는 최대 규모다. 미국 정교회는 3%다. 최근 들어 다소 감소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미국에서는 대통령 취임식이나 학교 졸업식에 개신교 목사가 기도를 할 정도로 개신교회의 영향력이 강하다. 한편, 미국 가톨릭교회 내 일부 보수주의 법조계 인사들은 보수 정치계와 관계를 맺고 있다. 20세기 초에야 차별이 완화된 미국 가톨릭 신자들에게 법조계는 유일한 출세의 수단이었기 때문에, 현재 미국 법조계내 보수주의 대변자들은 가톨릭 신자들인데, 2005년 감리교 신자인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 존 로버츠를 대법원장으로 지명한 데 이어, 또 다시 보수 가톨릭 신자 새뮤얼 얼리토를 대법관으로 추천하는 등 미국 보수 로마 가톨릭과 보수적 복음주의간의 연대가 시도되고 있다. 그 외 미국 기독교 교파로는 미국 성공회()가 있는데, 청교도들이 미국을 개척한 시기에는 성공회 기도서 사용금지, 성공회 신자 추방 등의 탄압을 받았으나, 종교의 자유가 존중되면서 일부 주에서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현재 미국 성공회 관구장 즉, 미국 성공회를 대표하는 지도자는 얼 쇼리 주교(1957년생)다. Building Full View.jpg|섬네일|300px|미국 의회 의사당 서쪽 정면. 미국 상하원이 이곳에 있다. 미합중국은 1776년 성립되어, 전 세계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연방 국가다. 미국은 "법에 의하여 소수자의 권리를 보호하여, 다수결의 원칙을 조정하는" 대의 민주주의 입헌 공화국이다. 미국 정부는 미국 최상위 법전인 헌법에 규정된 견제와 균형 체제에 따라 통제된다. 미국의 연방 제도에서 시민은 보통 세 단계의 정부 즉 연방, 주, 지역 단위에 속한다. 미국 헌법은 연방 정부의 권한에 관한 것을 구성 주에서 위임받았는데, 그 가운데 국방·외교 정책·대외 무역의 조정 기능, 통화, 최고 법 집행기능, 주간 통상의 조정, 이민 등은 연방정부의 가장 중요한 책임권에 속한다. 주 정부의 주요 기능은 교육, 농업, 자연보호, 고속도로 관리, 차량 감독, 공공안녕, 교도행정, 주내 통상의 조정, 교육·보건·복지 정책의 시행 등이다. 지역 정부의 업무는 보통 각 군과 시 정부에 나눠 맡기고 있다. 거의 모든 경우에 행정부와 입법부 공무원은 구역별로 시민의 다수 투표에 따라 선출된다. 연방 차원의 비례대표제는 없으며, 하위 정부 단위에서도 이 제도는 드물다. 남쪽 정면. 미국 대통령의 관저이다. 미국의 정치는 다른 나라와 비교하여 볼 때 특이한 측면들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특성들은 주로 정치제도나 정치행동의 측면에서 발견될 수 있으며, 이는 곧 정치문화와 연결되어 있다. 미국의 정치문화는 미국인들의 정치적 성향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가브리엘 앨몬드(Gabriel A. Almond)가 지적하였듯이 미국의 정치문화는 동질적이고 세속적이다. 인종의 도가니라고 불리는 미국에서는 인종뿐만 아니라 종교·문화·경제 등에 걸쳐서 차이가 크며 시민의 이해(利害)도 대립하기 쉽다. 따라서 식민지 시대부터 정치의 목표는 항상 현실적이며, 동의에 입각한 이해관계의 조정이 이루어졌다. 미국의 정치문화는 많은 가치가 복합된 정치문화인 동시에, 합리적이고 타산적이며, 경험적인 정치문화이다. 때문에 미국의 정치무대는 마치 혼잡한 분위기 속에서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는 자유시장을 방불케 한다. 미국에서는 자유로운 개인의 정치 참여 원칙이 관철되어 왔다. 제도적인 측면에서 볼 때, 미국은 3권분립을 엄격히 고수하고, 독립국에 가까운 주(州)제도를 채용하여 지역의 자주성을 존중하고 있는 것도 이와 같은 역사적 경위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형태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 분립된 3권간에는 권력의 중복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미국의 정치체제 간에는 행정부·입법부·사법부가 중복되는 역할을 담당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연방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미국의 정부는 구성주정부가 연방정부에 위임하는 권한을 헌법에 명시하고 있으며, 그 외의 권한은 국민과 50개의 주가 보유하고 있다. 50개주는 연방 정부와 마찬가지로 주 정부도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3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 각부는 연방 정부의 각부와 동등한 기능 및 영역을 지닌다. 각 주의 행정 수반은 주지사다. 연방정부와 주정부간의 권력의 분리에도 불구하고, 양자 간에는 권력 분포와 행사에 있어서 중복현상과 마찰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20세기적인 상황이기는 하지만, 미국도 행정부의 권력이 비대해짐에 따라 의회의 권한은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있다. 미국 정치에서 의회가 차지하는 위치나 역할은 매우 중요하며, 또한 강력하다. 단지 시대적인 차원에서 행정부의 권한이 강화된 반면, 의회의 권한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을 뿐이다. 미국은 50개주에 포함되지 않는 괌, 북마리아나제도 등의 속령 등 해외영토를 보유하고 있다. 미국 대통령은 국가 군대 최고 통수권자의 직함을 가지며, 국방 장관과 합동 참모총장을 임명한다. 미국 국방부는 육군, 해군, 해병대, 공군을 비롯한 군 전체를 총괄한다. 해안 경비대의 경우 평화시에는 국토안보부에서, 전시에는 미 해군에서 관할한다. Navy 060618-N-8492C-212 An Air Force B-2 bomber along with other aircrafts from the Air Force, Navy and Marine Corps fly over the Kitty Hawk, Ronald Reagan and Abraham Lincoln Carrier Strike groups.jpg|섬네일|키티호크, 로널드 레이건호, 에이브러햄 링컨호와 해안경비대, 해군, 공군 비행기으로 이루어진 항모타격단. 미국은 세계 군사력 순위 1위 강국이다. 라이벌인 소련과 양자체제를 유지하다가, 소련이 붕괴 되므로 미국은 독자체제로 세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대통령은 국가의 군대 총사령관 지위를 가지고 있고, 국방부 장관과 미국 합동참모본부를 임명 할 수 있다. 미국 국방부는 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를 포함한 군대를 통솔한다. 해안경비대는 평상시에는 미국 국토안보부가, 전쟁 상황에는 미 해군에서 통솔한다. 2008년 현역으로 있는 군인이 140만 명을 넘겼다. 예비군과 주방위군까지 합치면 230만 명이 넘는다. 또한 국방부는 계약직을 포함하지 않은 민간인 70만 명을 고용하고있다. 평상시에는 모병제지만, 전시 상황에서는 의무 징병 등록제를 통해 대부분 징병제로 뽑는다. 미국 군대는 공군의 신속한 수송기, 해군의 11대 현역 항공모함, 해병 원정부대 해군 함대사령부와 태평양 함대를 통해 빠르게 투입 할 수도 있다. 또한 해외에 865개의 해외 주둔 기지를 두고있고, 25개 국가에는 미군을 주둔시키고있다. 이러한 세계적 규모의 주둔군은 미국 "제국의 기반"이라고 일부 학자들은 말한다. 2011년 총 국방비 지출은 7,000억 달러 이상인데, 이는 세계 국방비의 41%며 상위 14개 국가의 국방비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수치다. 미군 국방비는 GDP 전체의 4.7%로, 상위 15개 국가 중 사우디아라비아 다음으로 두 번째로 높은 수치다. CIA에 따르면 2012년 GDP 대비 미국 국방비 지출은 세계에서 23번째라고한다. 미국 국방비는 냉전 시대 이후 최근 수 십년간 계속해서 감소하고 있는데, 1953년 전체 GDP의 14.2%, 1954년 연방비 69.5%를 맡은 것에 비해 2011년에는 GDP의 4.7%, 연방비는 18.8%로 감소했다. 2012년 국방비 예산은 2011년보다 4.2% 증가한 5,530억 달러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군사작전때문에 1,180억 달러가 추가되었다. 2011년 12월에는 이라크에 마지막 미군을 보냈다. 이라크 전쟁 중 미군 4,484명이 사망했다. 2012년 4월에는 약 9만 명의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되었다. 2013년 11월 8일까지 아프가니스탄 전쟁 중 2,285명이 사망했다. 경제 지표 실업률 3.8% 2018년 5월 GDP 성장률 4.0%2014년 3/4분기 2.8%2014년 CPI 인플레이션 2.9% 2011년 2월 ~ 2012년 2월 공공 채무 17조 2,300억 달러 2014년 7월 빈곤율 12.7%2016년 국가 부(총 가치) 82조 2,000억 달러2015년 1/41분기 NYSE.jpg|섬네일|왼쪽|월 가의 뉴욕 증권거래소. 미국의 경제 체제는 민주주의적 혼합 경제로, 풍부한 천연 자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기반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고 높은 생산성을 누리고 있다. 미국이 부유한 경제를 이룩한 것은 풍부한 인적·물적 자원의 존재와, 기술혁신이 뒷받침된 국내 산업이나 해외에서의 활발한 투자활동으로 대표되는 고도의 자본주의 체제에 의한 것이다.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미국의 국내총생산은 20조 4128억 달러로, 시장 환율로 세계총생산(GWP)의 23%, 구매력 평가(PPP) 대비 세계총생산의 약 21%를 차지한다고 한다. 미국의 GDP는 세계 최대 규모며, 1인당 명목 GDP 9위, 구매력 평가 1인당 GDP 10위다. 미국은 세계 최대 재화 수입국이며, 수출 규모는 세계 1위인데 1인당 수입액은 비교적 낮다. 주요 무역 상대국으로는 캐나다, 중국, 멕시코, 일본, 독일이 있다. 2007년, 자동차는 주요 수출입 품목이었다. 중국은 미국 공공 채무를 가장 많이 보유한 해외 채권국이다. 약 6년간 성장하던 미국 경제는 2007년 12월부터 침체기를 맞고 있다. 한편 미국은 국제 경쟁력 보고서에서 2위에 등재되었다. 2009년 미국 경제에서 개인 부문은 전체 중 55.3%를 차지하는 것으로 집계되었는데, 연방 정부 활동은 24.1%, 주 및 지역 정부 활동(연방 이전액 포함)은 20.6%를 기록했다. 미국 경제는 탈산업화 단계로, 서비스 부문이 GDP의 67.8%를 차지하지만, 지금도 미국은 산업 강국이다. 기업 총수령액 기준 주요 사업 문야는 도소매 무역이며, 순수입 기준으로는 제조업이 주된 분야다. 화학 공학 제품은 주요 제조업 분야이다. 미국은 세계 3위 석유 생산국이며, 최대 수입국이기도 하다. 미국은 전기 및 핵 에너지를 비롯하여 액화 천연 가스, 황, 인지질, 소금 생산에서 세계 1위다. 농업은 미국 GDP의 1%를 넘지 않으나, 미국은 옥수수 와 콩 의 세계 최대 생산국이다. 뉴욕 증권거래소는 세계에서 달러가 가장 많은 곳이다. 코카콜라, 맥도날드는 세계에서 브랜드 인지도가 가장 높은 기업이다. 2009년 3/4분기에 미국 노동 인구는 1억 5,440만 명이었다. 이 중 고용 인구의 81%가 서비스 부문에 종사하고 있다. 2,240만 명을 거느린 미국 정부는 주요 고용처다. 미국 노동자의 노동 조합 조직률은 12% 정도로, 서유럽의 30%에 비하여 낮은 수준이다. 세계 은행은 미국을 노동자의 고용과 해고가 가장 쉬운 나라 1위로 들었다. 1973년에서 2003년까지 미국인의 연간 평균 노동 시간은 199시간에 이르렀다. 이런 이유도 있어서, 미국은 세계에서 노동 생산성이 가장 높은 수준이다. 2008년에 미국은 시간당 노동 생산성 면에서 십년 전까지만해도 미국보다 높던 노르웨이, 프랑스, 벨기에, 룩셈부르크를 따라 잡았다. 유럽과 견주어 미국의 자산 및 법인 소득세율은 보통 높은 편이며, 노동 특히 소비세율은 낮다. 미국은 내수경제가 튼실한 국가다. 그렇기 때문에 제조업에서 내수 위주로 산업기반을 바꾸기도 했다. 세계최대 석유 비축량에 셰일 가스까지 보유하고 있다. 최첨단 공산품을 많이 생산하며 정치적으로 소외된 계층이나 불공평한 대접을 받는 계층이 적고 엘리트 계층이 솔선수범하여 내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며 영토는 넓고 자원은 풍부하며 새로운 인력이 끊임없이 외부에서 공급된다. Rotunda.jpg|섬네일|250px|버지니아 대학교, 토머스 제퍼슨이 설계했으며, UNESCO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미국의 교육은 초기 식민지 시절부터 중요시되어왔는데, 고등교육기관의 발전은 전쟁과 과학 연구 등에 있어 미국의 역사와 함께해왔다. 초기에서부터 현재까지 교육에 있어 종교의 영향은 매우 크며, 엘리트들의 국가 경영이 장려되는 사회여서, 사학이 발달했다. 크게 사립과 주립 혹은 국공립 교육기관으로 나뉘며, 대부분의 주에서는 6세에서 16세까지 무상·의무 교육을 실시한다. 미국 학생들의 절대 다수가 중등교육을 마치는 17, 18세 (K-12 학제 상 고등학교 졸업반)까지 학교에 다닌다. 부자들은 대체로 사립 학교에 다닌다. 실용적인 교육 철학은 교육의 마지막 기간인 대학교와 대학원의 우수성에서 알 수 있는데, 특히 대학교와 대학원 등 고등교육은 그 명성과 학열, 학생 수준, 그리고 연구 실적에서 세계 여느 나라의 고등교육기관을 압도한다. 미국에서 대학에 진학하려면 ACT(주로 중부 쪽 대학)나 SAT(주로 동부, 서부 쪽 대학)를 치러야 한다. 다른 유럽의 국가들처럼 미국도 중등 교육 단계부터 학점제를 채택한다. 교육에서는 영어를 사용하고, 외국어로는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이탈리아어, 중국어, 일본어, 한국어 중 하나를 선택한다. 미국에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고등교육기관이 많이 있다. 학문, 연구, 스포츠, 예술 등 각종 분야에서 권위와 영향력이있는 명문 대학교로는 하버드 대학교를 포함하는 아이비리그와 공립 대학교(퍼블릭 아이비)인 UC 버클리, UCLA, 윌리엄 & 메리 칼리지, 버지니아, 미시간 대학교, 그리고 사립 대학교인 스탠퍼드, 시카고, 워싱턴 세인트루이스와 MIT가, 미국 남부의 대표적 사립 대학교인 듀크, 밴더빌트, 라이스와 에모리 대학교 등이 있다. 총 의 길이를 자랑하는 인터스테이트 하이웨이 시스템 지도. 개인 교통수단 중 가장 많이 차지 하는 것은 자동차로,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긴 도로망을 가진 나라 중 하나인데 1억 3천 만개의 도로가 펼쳐져있다. 또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자동차 시장이며, 미국인 1,000명당 765대의 자동차를 가지고있어 세계에서 가장 높은 1인당 자동차 보급율을 기록하고있다. 이러한 개인용 자동차의 40%는 밴, SUV, 소형 트럭이다. 미국인들은 하루 평균 29마일 (47 km)을 다니며 55분을 운전하는데 보낸다. 미국인 전체 출퇴근자의 9%는 매스 트랜싯을 이용한다. 철도를 이용한 화물수송은 광범위 한 반면에 여객 철도 이용률은 조금 떨어지는편이다. 하지만 암트랙의 국가 여객 철도 시스템의 이용자 수는 2000년부터 2010년까지 37%가 증가했다고한다. 또한 매년 경전철 개발이 증가하고있다. 미국은 국토가 넓은 덕에 항공 산업이 매우 잘 발달되어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3개의 항공사 (아메리칸 항공, 델타 항공, 유나이티드 항공)가 모두 미국에 있으며 2013년 아메리칸 항공이 US 에어웨이즈와 합병되면서 세계에서 가장 큰 항공사가 되었다. 또 세계에서 가장 바쁜 공항 30개 중 미국에서 가장 바쁜 공항인 하츠필드 잭슨 애틀랜타 국제공항을 포함해 16개 공항이 이름을 올렸다. 아메리카 대륙에 신세계를 구축한 개척자들은 엄격한 청교도며 그 금욕사상은 모든 경쟁이나 즐거움을 죄악시하여 종교적인 활동을 제외하고 생산과 결부되지 않은 활동을 부정했다. 따라서 영국에서 도입된 예술·스포츠 문화가 신세계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기까지는 꽤 오랜시간이 걸렸다. 개척민들은 그들 고유의 언어와 문화관을 가지고 있었으나 빠르게 미국사회에 동화되었고 새로운 문화를 형성해 나갔다. 건축, 미술, 문학, 음악 등 다방면에서 미국적인 사고와 양식이 표출되었으며, 특히 지금까지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가지는 것은 대중음악과 영화를 들 수 있다. 주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할리우드 사인. 세계 최초의 상업적 그림 전람회는 1894년 토마스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를 사용해 뉴욕에서 열렸다. 다음 해 뉴욕에서 최초로 상업적인 영화 상영이 이루어졌고, 미국은 이후 수 십년 동안 유성 영화의 성장에 힘썼고 영화에 있어서는 최고의 국가가 되었다. 20세기 초반 이후 미국의 영화 산업은 캘리포니아 주 할리우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감독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는 영화 기법을 발전시키는데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오손 웰즈의 《시민 케인》(1941)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 중 대표적인 예다..
니콜로 파가니니 니콜로 파가니니 (, 1782년 10월 27일 ~ 1840년 5월 27일)는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바이올린 연주가, 작곡가이다. 10대 초에, 이미 종전의 연주 기법의 대부분을 마스터한 파가니니는 15세가 되자 하루 10시간 이상의 격심한 연습으로 혼자서 새로운 연주기법을 습득해 나갔다. 그의 노력이 결실하여 1799년 17세에 북이탈리아 지방에서 열광적인 환영을 받아 곧 명성과 부(富)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러나 급속한 성공으로 자만에 빠진 소년 파가니니는 방탕과 도박에 빠져 건강을 해치고 거액의 빚을 져서 결국 연주에 필요한 바이올린마저 잃게 되는 파국에 이르고 말았다. 1801년부터 1804년까지 한 귀부인과 토스카나에 있는 그녀의 성에서 동거 생활을 보냈으나 그 동안 연주회를 열지 않았기 때문에 애인 살해죄로 투옥되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하지만 사실은 이 기간에 건강 회복을 기도하면서 하모닉스나 중음주법, 스타카토 등의 새로운 주법을 개척하고 있었다. 1804년 22세 때 출생지 제노바로 돌아와 다음해부터 다시 연주활동을 개시하여 이전보다 더한 칭송을 받았다. 그 명성으로 인해 나폴레옹의 누이 동생에게 초대되어 보케리니의 출생지 루카의 궁정 가극장에서 3년간의 지휘 생활을 보냈다. 1808년 26세 때부터 1828년의 46세까지 20년간에 걸쳐 이탈리아 각지로 연주 여행을 하였으며 종전의 바이올린 개념을 훨씬 초월한 입신(入神)의 기(技)를 펴냈고 청중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그 묘기는 이탈리아 이외의 각지로 퍼져나가 파가니니의 이름은 온 유럽 음악 애호가들의 입에 존경하는 마음으로 오르내리게 되었다. 1828년 파가니니는 처음으로 국외 연주 여행을 하였다. 3월 말 빈에서 있었던 연주회는 미증유의 대성공을 거둬, 파가니니의 이름을 팔아 상점마다 "파가니니 스타일"이라는 양복·모자·장갑·구두 등이 범람하였다. 다음해 1829년 베를린에서도 이러한 성공을 거둔 파가니니는 독일 각지를 순회한 끝에 폴란드로 갔고 또 1831년엔 파리, 이어 영국으로 건너가 가는 곳마다 열광적인 박수로 환영을 받았다. 1832년 가을, 5년에 걸친 연주 여행으로부터 귀국하여 북이탈리아의 파르마를 안주의 땅으로 정하였다. 만년에는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왕복하면서 연주 활동을 하는 한편 프랑스의 악보 출판상에 자작의 작품을 출판하려고 했으나 파가니니가 요구하는 인세가 너무 높아 출판은 진척이 안되었고, 결국 파가니니의 생전에 출판된 작품은 극히 적다. 더욱이 출판된 작품이 적은 것은 파가니니가 자기 연주 기법이 공개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은 것과 관계가 있다. 1834년 1월 파가니니는 신진 작곡가로 세상의 주목을 끈 베를리오즈를 파리에서 만나 자신의 비올라를 위한 비올라 협주곡의 작곡을 의뢰했다. 완성된 작품은 파가니니의 기대만큼 비올라의 역할을 화려하게 다루지 않았으므로 마음에 들지 않아 파가니니는 이를 "이탈리아의 하롤드"로 발표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 무렵부터 파가니니의 건강은 매우 악화되어 연주 활동도 뜸해져 1840년 5월 27일 인후 결핵으로 남프랑스의 니스에서 57세로 결국 사망하였다. 파가니니는 4옥타브에 걸치는 넓은 음역을 자유자재로 구사했으며 음을 하나하나 끊어 연주하는 스타카토 주법, 현을 손끝으로 튕겨서 소리를 내는 피치카토 주법 현에 손가락을 가만히 대서 휘바람 같은 소리를 내는 하모닉스, 이중 트릴 (떨꾸밈음)등의 화려한 연주 기법을 만들어 냈다. "파가니니의 발치에 사슬 이 감겨있고 악마 가 나타나 연주를 도왔다" 파가니니의 놀라운 연주를 들은 관객들은 감동한 나머지 집단 히스테리를 일으키기도 했다. 나폴레옹의 여동생이며 루카의 군주인 엘리자 보나파르트는 그의 연주만 들으면 까무러쳤다. 파가니니가 바이올린의 현을 두 개만 사용하는 곡을 선보이자, 엘리자는 “그럼 하나로만 연주할 수도 있느냐?”고 물었다. 이에 영감을 얻은 파가니니는 정말로 G현 하나로만 연주하는 곡을 만들었는데, 그의 평생을 따라다닌 괴소문이 바로 거기서 비롯되었다. 즉 파가니니가 연주하는 바이올린의 G현은 젊은 시절 그가 목 졸라 살해한 애인의 창자를 꼬아 만든 줄이라는 소문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파가니니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탁월한 실력을 얻었으며, 바이올린 활을 움직이는 것은 그가 아니라 사탄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이런 소문이 어찌나 파다했는지 교회를 중심으로 파가니니를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세력이 생겨났다. 공연 때마다 관객들은 혹시 무대 어느 한 구석에 정말 악마가 숨어 있는지 보려고 눈을 크게 떴으며, 파가니니가 지나갈 때마다 정말 악마 특유의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걷는지 보려고 시선을 집중했다. 소설가 스탕달과 작곡가 리스트도 이런 소문을 마치 사실인 양 언급했고, 시인 하이네는 공연 중에 파가니니의 발치에 ‘사슬’이 감겨 있고, ‘악마’가 나타나 연주를 도왔다고 단언했다. 바이올린 한 줄로만 연주하는 파가니니의 모습을 풍자한 삽화(1810년경) 왜 이런 헛소문이 그토록 기세를 떨쳤던 것일까? ‘마법’이나 ‘악마’야말로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은 듯한 파가니니의 실력을 설명하는 가장 간단하고 그럴싸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관습과 권위를 무시하는 특유의 괴팍함과 자유분방함은 물론이고, 꼬챙이 같은 체구에 치렁치렁한 머리카락, 두드러진 매부리코와 광대뼈를 지닌 파가니니의 외모도 악의적인 헛소문의 생성에 일조했다. 당시의 언론도 선정적인 기사를 함부로 써내 소문의 전파를 부추겼다. 나중에는 파가니니 본인이 해명에 나섰지만 소용이 없었다. 베른트 비테의 말마따나 “소문이란 제 나름의 생명력을 가지고 때로는 불멸의 존재로 화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비단 파가니니의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인터넷 시대에도 마찬가지이리라. 작곡가서도 파가니니는 알려져있다. 작품에서 그가 항상 사용한 중음주법, 프라지오레토, 스타카토와 레가토의 극단적인 대비, 왼손으로 연주하는 피치카토 등은 바이올린의 표현력을 한 층 빛나는 것으로 높였다. 대표작으로는 , 무반주 를 들 수가 있다. 파가니니의 초절적인 기교에 자극된 19세기의 작곡가들, 예컨대 리스트, 브람스, 라흐마니노프 등은 파가니니의 멜로디를 차용하여 많은 피아노 난곡(難曲)을 작곡했다.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기교를 피아노로 전용하여 피아노의 새로운 표현을 개척해야겠다는 의욕이 환기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도리어 이런 점에 파가니니의 작곡가로서의 역사적인 역할이 있었다 하겠다. 분류:1782년 태어남 분류:1840년 죽음 분류:낭만주의 작곡가 분류:이탈리아의 서양 고전 작곡가 분류:이탈리아의 고전 바이올린 연주자 분류:제노바 출신
마이클 크라이튼 (Michael Crichton, 1942년 10월 23일 ~ 2008년 11월 4일)은 미국의 과학소설가이자 텔레비전·영화 프로듀서이다. 시카고에서 태어나 하버드 대학교에서 학부와 메디컬 스쿨을 졸업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혈액암의 일종인 림프종으로 사망했다. 가장 잘 알려진 작품으로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영화화한 《쥬라기 공원》(1991)이 있다. 그는 또한 전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텔레비전 시리즈 《ER》의 책임 프로듀서이기도 하다. 그 외 유명한 작품으로 《스피어》(Sphere) (1987), 《프레이》(Prey) (2002), 《콩고》(Congo),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된《타임라인》(Timeline) 등이 있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과학 소설의 범주에 포함된다. 미국 시카고 대학교 초빙교수를 역임하였으며 소설 이외의 저서로는 자신의 자전적인 일을 다룬 《Travel》이 있다. 분류:1942년 태어남 분류:2008년 죽음 분류:미국의 SF 작가 분류:미국의 영화 제작자 분류:미국의 텔레비전 프로듀서 분류:미국의 대학 교수 분류:시카고 대학교 교수 분류:스코틀랜드계 미국인 분류:시카고 출신 분류:암으로 죽은 사람 분류:에드거상 수상자 분류:하버드 대학교 동문 분류:쥬라기 공원
윌리엄 헨리 "빌" 게이츠 3세 (, 1955년 10월 28일 ~ )는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 설립자이자, 기업인이다. 어렸을 때부터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하버드 대학교를 자퇴하고 폴 앨런과 함께 마이크로소프트를 공동창립했다. 그는 당시 프로그래밍 언어인 베이직 해석프로그램과 알테어용 프로그래밍 언어인 알테어베이직을 개발했다. 레이크사이드 스쿨 졸업 (1969년 ~ 1973년) 하버드 대학교 응용수학과 중퇴 (1973 ~ 1974년) 하버드 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2007년) 윌리엄 헨리 게이츠 3세는 1955년 10월 28일에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아버지 윌리엄 H. 게이츠 시니어와 어머니 매리 맥스웰 게이츠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영국계 미국인이자 독일계 미국인이며,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 이민자였다. 그의 가정은 상중류층으로, 아버지는 저명한 변호사였으며 어머니는 교사였다고 한다. 또한 외할아버지인 J.W. 맥스웰은 미국 국립은행의 부은행장이었다. 게이츠에게는 누나 크리스티앤(Kristianne)과 cnnn 리비(Libby)가 있었다. 그는 그의 가문에서 윌리엄 게이츠라는 이름을 물려받은 네 번째 남자이지만 실제로는 윌리엄 게이츠 3세로 불리는데, 이는 그의 아버지가 자신의 이름에서 3세 라는 접미어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빌 게이츠가 어렸을 때, 그의 부모는 그가 법조계에서 일하게 되기를 바랬다. 그는 13세 때 상류층 사립 학교인 레이크사이드 스쿨에 입학했다. 8학년이 되었을 때, 학교 어머니회는 자선 바자회에서의 수익금을 텔레타이프라이터 단말기와 제네럴 일렉트릭 (GE) 컴퓨터의 사용시간을 구매하는 데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게이츠는 이 GE 시스템에서 베이직(BASIC)으로 프로그래밍하는 것에 흥미를 갖게 되었으며, 이에 프로그래밍을 더 연습하기 위해 수학 수업을 면제 받기도 했다. 그는 이 시스템에서 동작하는 틱택토 (Tic Tac Toe) 게임을 만들었는데, 이는 그가 만든 최초의 프로그램으로 사람이 컴퓨터를 상대로 플레이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또한 다른 게임인 달 착륙 게임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는 입력된 코드를 언제나 완벽하게 수행하는 이 기계에 매료되었다. 게이츠가 훗날 회고한 바에 따르면, 당시의 기억에 대해 그는 그때 그 기계는 나에게 정말 굉장한 것이었다 라고 말했다. 어머니회의 기부금이 바닥나자, 게이츠와 몇몇 학생들은 DEC의 미니컴퓨터의 사용 시간을 샀다. 이 시스템 중 일부는 PDP-10이라는 것으로 컴퓨터 센터 코퍼레이션(CCC)에서 생산된 것이었는데, 훗날 게이츠를 포함한 네 명의 레이크사이드 스쿨 학생(폴 앨런, 릭 와일랜드, 켄트 에번스)은 이 시스템의 운영 체제가 가진 버그를 이용해 공짜로 컴퓨터를 사용한 것이 발각되어 이 회사로부터 사용을 금지당하기도 했다. 심지어 컴퓨터를 1달동안 사용을 금지 하기도 하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 하버드 대학교에 진학하여 응용수학을 전공했으나 재학 중 1975년 폴 앨런과 함께 마이크로소프트를 설립하고 학업을 중단했다. 당시에 그는 사업이 안 풀리면 학교로 돌아갈 예정이었으나 마이크로소프트의 성공으로 그럴 일은 없었다. 그래서 빌 게이츠는 컴퓨터의 황제로 불리고 있다. 자신이 죽을 경우 전 재산의 대부분을 사회에 기증하고 세 명의 자녀들에게는 1인당 1천만 달러씩만 상속한다고 밝혔다. 이는 빌 게이츠 전 재산의 8000분의 3에 불과한다. 영국의 YouGov에서 전세계 23개국에서 조사한 2015년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 에서 9.2점을 받아 남성 인물 중 가장 존경받는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버락 오바마(6.4), 시진핑(5.3)이 뒤를 이었다. 1971년 정보 과학사 급여 산출 프로그램 개발 1972년 트래프 오 데이터( 교통자료 포착 이라는 뜻)설립 1974년 베이직(BASIC) 개발 1975년 마이크로소프트 설립 1975년 ~ 2000년 마이크로소프트 CEO 1980년 MS-DOS 개발 1981년 마이크로소프트 주식회사로 전환 1985년 윈도우 1.0 개발 1986년 31세의 나이로 억만장자가 됨 1987년 윈도우 2.0 개발 1990년 3월 윈도우 3.0 개발 1994년 1월 멜린다 게이츠와 결혼 1995년 윈도우 95 개발, 인터넷 익스플로러 1.0 개발, MSN 컴퓨터 통신시장 진출, 워렌 버핏 더 많은 재산을 소유한 부자 1996년 인터넷 익스플로러 3.0 개발 1998년 윈도우 98 개발 2000년 ~ 2008년 마이크로소프트 기술고문 2000년 빌 & 멜린다 게이츠 재단 설립, 스티브 발머를 마이크로소프트 최고 경영자로 임명후 자신은 회장이 됨 2007년 윈도우 비스타 개발 2008년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직 은퇴 2015년 클린 에너지 기금 설립 2005년 영국 명예 KBE 훈장(honorary KBE, 외국인 대상 정원외) 2010년 보이스카우트 실버 버펄로상(Silver Buffalo Award) 미국 실리콘 밸리의 신화 마이크로소프트 빌 & 멜린다 게이츠 재단 워렌 버핏 스티브 잡스 IBM 테라파워(TerraPower) * 토륨기반 원자력( Thorium-based nuclear power) * 액체불소 토륨 원자로(LFTR, Liquid fluoride thorium reactor) * 진행파 원자로(TWR, Traveling wave reactor) 빌 게이츠 공식 사이트 – The Gates Notes 네이버 캐스트 오늘의 인물 - 빌 게이츠 Biography of Bill Gates at Microsoft.com Forbes topic page on Bill Gates Bill & Melinda Gates Foundation 분류:마이크로소프트 사람 분류:미국의 기업인 분류:미국의 프로그래머 분류:하버드 대학교 동문 분류:컴퓨터 선구자 분류:스코틀랜드계 미국인 분류:시애틀 출신 분류:1955년 태어남 분류:살아있는 사람 분류:미국의 억만장자 분류:미국의 자선가 분류:미국의 로마 가톨릭교도 분류:타임 올해의 인물 분류:명예 대영제국 훈장 사령관 기사 분류:독일계 미국인 분류:잉글랜드계 미국인 분류:윈도우 관계자 분류:마이크로소프트의 역사 분류:미국의 투자가 분류:더들리윈스롭가
아햏햏 은 다양한 뜻을 지니는 대표적인 인터넷 유행어이다. 아햏햏은 2002년과 2003년에 유행하였으며 국립국어연구원에 의해 짤방과 같이 신조어로 정식 인정된 적도 있으나(2002년 신어 보고서에 수록), 2003년까지 쓰였으나 2004년에 들어선 이후로는 더이상 사용되지 않으며, 심지어 아햏햏이 만들어진 디시인사이드에서도 사용되지 않는다. 아햏햏은 디씨인사이드 사용자들이 이 모호하고 기분이 언짢은 상황을 표현했던 글로 의성어로는 어리석다는 뜻과 혀과 꼬이면서 당혹스러운 상황을 표현한다. 한자로는 亞行杏(아행행)으로 표기하며, 로마자로는 ahehheh으로 표기한다. 재미로 아헿헿 , 아핳핳 , 으흫흫 등으로 표기하는 경우도 있다. 아햏햏은 현대 국어에 잘 쓰이지 않는 ㅎ 받침을 써서 발음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란이 많다. 발음을 생각지 않고 태어난 유행어이니만큼 아무렇게나 발음해도 상관 없다는 의견이 있지만, 여러 의견 중에서 발음 가능한 표현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아행행 햏자, 수햏, 亞行杏 등의 용례를 고려한 발음이다. 아해해 ㅎ 받침을 생략한 발음이다. 아해탣 (←아핻핻) 한국어 발음 규칙에 따른 발음이다. 자음의 끝소리 규칙에 따라 ㅎ 받침은 ㄷ 받침으로 발음되고, 첫 번째 햏핻 의 받침은 뒤의 햏 의 초성 ㅎ 과 음운 동화가 일어나 ㅌ 으로 소리난다. 이는 대구광역시 교육청 주관 2012년 고1 영남권 모의고사 국어영역 11번 문제에 아햏햏 의 발음법에 대한 문제의 답안이 되기도 했다. 2002년 4월 엽기갤러리에서 유행하기 시작하던 같은 내용의 댓글만 다는 고정리플 유저들이 생겨났다. 홀맨, 피바다, 정신과전문의 표진인 등등 고정리플들을 다는 사람들이 한창 활동하던 중 한 유저가 "아햏햏 소피티아"라는 고정 리플을 달면서 엽기 갤러리에서 알려지게 되었다. *방법하다 (손발리 오그라진다) 부산지역의 어떤 할머니가 자신의 방석을 돌려달라고 쓴 글을 본 사람들이 사용하게 된 것이, 사이버 시위의 의미로 확대되었다. 사투리로 응징하다 라는 뜻이 있다는 설도 있음 *왜? 달아서 한 과일 가게에서 포도를 잡수시고 혼수상태. 왜? 달아서 , 수박을 드시고 사람을 알아보지 못함. 왜? 달아서 등과 같은 글을 적은 것을 보고 사람들이 따라함 *쌔우다 한 가정집의 길가 화단에 개똥 쌔우지 마세요 로 시작하는 게시물이 붙었다. 사동형 접미사 우 는 싸다 는 말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싸게 하다 는 뜻으로 쌔우다 를 쓰는 것은 잘못되었지만, 표현이 재미있게 느껴져 널리 쓰이게 되었다. (게시물 등을) 올리다, 하다의 뜻으로 쓰임 *(양심) 업ㅂ은/업ㅂ다 위의 쌔우다 가 유래한 게시물의 마지막에 이 양심업ㅂ(쌍비읍 받침)은 인간들아 라고 적힌 것을 보고 사람들이 사용하게 되었다. 컴퓨터에 한글 받침으로 쌍비읍을 입력할 수 없기 때문에 업ㅂ 과 같은 표기법이 생겼다. *자빠링하고싶다 *하오체 초창기에 취화선의 포스터를 합성하면서 장승업의 말투를 따라한 것이다. *필수요소 합성 사진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 또는 사물을 이르는 말 *햏자, 수햏, 득햏, 햏력 햏을 도에 비유했다. *폐인 *압박(스크롤의 압박 등) 2002년 월드컵때 코스타리카 기자의 티셔츠에 적혀있던 "코스타리카의 압박"에서 시작된 말. 압박은 기자라는 뜻의 Press를 번역기로 돌려서 나온 말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스압 스크롤바가 상당히 짧을 정도로 상당히 긴 글에 사용되는 말. 햏자행자, 行者는 아햏햏으로부터 파생된 말의 하나로, 디시인사이드에서 활동하는 네티즌들이 자신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하였던 단어이다. 이들은 낮에 자고 밤에 활동하거나 라면을 주로 먹으며 인터넷상의 모든 표현에 "아햏햏"을 쓰는 등의 자신들의 특징을 "수햏"하는 활동으로 표현한다. 이들은 평소에 합성사진을 만들어 공유하거나 게시물에 답변을 먼저 달기 위해 경쟁하는 등수놀이, 성인물 감상 등을 즐겨하였다. 아햏햏과 마찬가지로 현재는 자신을 햏자로 지칭하는 사람이 없다(다른 사람을 부를 땐 쓴다). 햏자의 다른 뜻으로는 무엇인가를 한다는 혹은 행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파생어로 햏테(햏력 테스트=햏자 능력 테스트;짤방을 어디서 찍었는지 알아맞추는 테스트)가 있다. *아햏햏 티셔츠 T09 피터판규햏자가 만든티셔츠로, 붓글씨로 적힌 아햏햏이 새겨진 티셔츠이다. *아햏햏 D.O.G. MSN 메신저와 연동되어 각종 상황을 소리나 진동으로 알려주는 강아지 모양의 인형이다. *아햏햏 밴드 정식명칭은 저질카피밴드 아햏햏 으로 아햏햏 사이트의 햏자들(아랑쑈, 풍걸,윤득햏, 풍각, 피터판규, 오사마)이 모여서 만든 밴드이다. *김풍 - 웹툰 작가로, 아햏햏 문화를 배경으로 한 웹툰으로 유명해졌다. *스타쉬피스 디시인사이드 - 득햏의 길 아햏햏 도원 고구마 언덕 분류:인터넷 신조어 분류:디시인사이드
RMS의 개인 홈페이지 GNU 철학 페이지 Original GNU 공지사항 뉴스그룹 Free As In Freedom, 한 라 봉 그의 유즈넷 기고 글 분류:1953년 태어남 분류:살아있는 사람 분류:미국의 프로그래머 분류:미국의 해커 분류:GNU 분류:하버드 대학교 동문 분류:컴퓨터 선구자 분류:프로그래밍 언어 설계자 분류:저작권 활동가 분류:인터넷 명예의 전당 분류:미국의 블로거 분류: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 동문 분류:유대계 미국인 분류:GNU 관계자 분류:리눅스 관계자 분류:반출생주의자 분류:미국의 무신론자 분류:그레이스 머리 호퍼상 수상자
해킹 ()은 전자 회로나 컴퓨터의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네트워크, 웹사이트 등 각종 정보 체계가 본래의 설계자나 관리자, 운영자가 의도하지 않은 동작을 일으키도록 하거나 체계 내에서 주어진 권한 이상으로 정보를 열람, 복제, 변경 가능하게 하는 행위를 광범위하게 이르는 말이다. 크래킹과 개념이 다르다. 해킹이 다른 사람의 컴퓨터 시스템이나 통신망에 정당한 접근 권한 없이 접근하거나 허용된 접근 권한의 범위를 초과하여 침입하는 행위 자체를 의미한다면, 크래킹은 그러한 불법적 접근을 통해 다른 사람의 컴퓨터 시스템이나 통신망을 파괴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본래 거칠게 자르거나 헤집는다는 뜻의 해크()이라는 낱말에 지금의 의미를 부여한 것의 유래는 분명하지 않으나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MIT)에서 한 동아리 회원들이 자신들을 해커()라고 부른 데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해킹의 정의는 시간에 따라 변화되어 왔는데 초기에는 개인의 호기심이나 지적욕구의 바탕 위에 컴퓨터와 컴퓨터간의 네트워크를 탐험하는 행위 를 말했다. 이후 악의적인 행동이 늘어나면서 다른 컴퓨터 시스템을 침입할 때 파괴적인 계획을 갖고 침입하는 행위 라는 부정적 의미를 갖게 되었으며, 일명 크래킹이라 하였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해킹이란 의미는 대체적으로 어떠한 의도에 상관없이 다른 컴퓨터에 침입하는 모든 행위 로서 전산망을 통하여 타인의 컴퓨터 시스템에 엑세스 권한 없이 무단 침입하여 부당 행위를 하는 것을 말하며, 여기서 부당 행위란 불법적인 시스템 사용, 불법적인 자료 열람, 유출 및 변조 등을 뜻한다. 반면 긍정적 의미로는 각종 정보 체계의 보안 취약점을 미리 알아내고 보완하는 데에 필요한 행위 란 뜻을 가지고 있다. 대한민국의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은 해킹을 "침해사고"의 한 원인으로 나열하고 있다. 크래킹 웹해킹 취약점 공격(익스플로잇) 사이트 간 스크립팅(XSS) 사회 공학 iOS 탈옥 라이프핵( Life hack) - 분야불문 모든 일상생활의 효율성을 높여주는 팁이나 테크닉 해커 화이트햇 해커 블랙햇 해커 그레이햇 해커 레드 해커 스크립트 키디 국가사이버안전센터 (국정원 소속) 사이버안전국 (경찰청 소속) 대한민국 방송통신위원회 대한민국의 해커그룹 해킹에 관한 MIT 갤러리 hacked. (팟캐스트)그것은 알기 싫다. 2015년 7월 16일.
dictionary.jpg|섬네일|300px|right|그라츠 대학 도서관의 라틴어 사전 사전 (辭典은 낱말의 뜻을 서술하는 것 내지는 도표와 함께 모아 놓은 것, 또는 어떤 낱말과 대응하는 다른 나라말의 낱말을 가나다 순서대로 배열한 것이다. 많은 사전들은 발음기호도 포함하고 있으며 응용, 역사, 어원, 그림, 사용법, 예문을 서술하고 있다. 예전에는 종이로된 문서 형식의 사전을 많이 사용했으나 지금은 인터넷을 많이 사용한다. 발견된 가장 오랜 사전은 BC 3400년경 쓰인 아카드 제국의 쐐기문자 조각으로, 수메르어와 아카드어의 대역쌍 목록이다. 우라 후불루 용어집(Urra=hubullu glossary)이라 불리는 이 사전의 이름은 용어집의 첫머리에 나오는 이자가 붙는 채무 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다. 근대 유럽의 사전들은 이중언어 사전으로 시작했다. 1502년에 나온 언어학자이자 수사인 암브로조 깔레피노(Ambrogio Calepino)의 코르누코파이아(Cornucopia)가 그것인데 이중언어사전이라기 보다는 다국어사전이다. 라틴어를 라틴어, 이탈리아어, 영어, 불어, 독어로 설명하는 구성을 가지고 있다. 사뮤엘 존슨(Samuel Johnson)의 영어사전(A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 1755)은 영어사전의 역사에서 한 이정표였다. 이전까지의 사전은 대부분 유사 어휘들을 분류해서 기술하는, 기린 옆에 사자를 나열하는 그런 방식이었는데 존슨은 그 모든 어휘를 예외 없이 알파벳 순으로 나열하여 첫 번째 근대적인 사전을 완성했다. 사전은 해당 항목의 대표형을 보여주는 표제어 아래 크게보아 뜻풀이와 예문 그리고 기타정보로 이루어져있다. 뜻풀이는 해당 의미를 대상언어로 해설한 것이고 예문은 그 의미로 사용된 문장의 사례이다. 기타정보에는 발음, 품사, 통사구조, 형태정보, 관련어 등 해당 항목을 잘 이해하도록 돕는 문법적 해설이나 부가적인 해설을 말한다. 어학사전 vs 백과사전 일반사전 vs 특수사전 정의식 vs 기술식 사전은 크게 어학사전 (辭典, dictionary)과 백과사전(百科事典, encyclopedia)으로 나뉘는데 이 둘 사이에는 단어에 대한 설명을 담는 책이라는 공통점과 언어학적인 접근을 하느냐 마느냐라는 차이점이 있다. 기존에 종이책으로만 출간이 가능했을 때에는 이러한 구분이 비교적 엄격했으나 인터넷 사전의 경우 사람들이 양자를 구분하지 않고 찾는 경향을 보인다. 그 이전부터 한국어의 표준국어대사전이나 일본어의 코지엔과 같은 어학사전들은 백과사전다운 면을 많이 갖추고 있었다. 어학사전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먼저 뜻풀이 대상언어에 따라 일국어사전과 이중언어사전이 있다. 일국어사전은 한국어사전, 영영사전과 같은 표제어와 뜻풀이가 같은 언어로 된 사전이다. 이것도 모국어 화자를 대상으로 하느냐 아니면 외국인 학습자를 대상으로 하느냐에 따라 나뉜다. 외국인 학습자를 대상으로 한 사전이 더 자상한 뜻풀이를 담고있다. 이중언어사전은 영한사전, 한영사전과 같은 표제어와 뜻풀이가 다른 언어로 된 사전이다. 이국어사전이라고도 한다. 같은 영한사전이라고 해도 영어화자를 대상으로 하느냐 아니면 한국어화자를 대상으로 하느냐에 따라 편집 체제가 많이 다르다. 사전의 기술 태도에 따라서 어휘를 규정(prescription)하는 사전이 있고 기술(description)하는 사전이 있다. 규정하는 것은 정의를 적고 이후 해당 정의에 해당되는 예문을 찾거나 추가설명하는 방식이고 기술하는 것은 말뭉치 언어학의 방법론을 사용하여 해당 어휘의 사용빈도와 사용분포를 살펴 현상을 있는 그대로 적어넣는 방식이다. 이 구분은 상대적일 뿐 기술사전도 규정하는 면이 있고 또 규정사전도 기술하는 면이 있다. 범용 사전(general dictionary)은 흔히 국어사전이나 영어사전이라 부르는 언어사전을 말한다. 한 단어에 여러 의미가 담길 수 있다. 구분된 의미는 많이 사용되는 순서로 나열될 수도 있고, 오래된 용법 순서대로 나열될 수도 있다. 일상어를 대상으로 한다. 특수 사전(specialized dictionary)은 한정적인 분야를 다룬 사전이다. 제주어 사전이라거나 윤동주 시어사전 처럼 특정 범위를 가지고 특화된 목적으로 만들어진 사전이다. 좀 더 특화된 사전들도 있다. 유의어사전(thesaurus)은 유의어, 반의어 등을 모아놓은 사전으로 글쓰기 할 때 유용하게 사용된다. 유사한 형태로 단어의 계통을 정리해놓은 사전인 갈래사전이 있다. 자전(字典)은 한자사전을 말하는데, 한자문명권에서는 개별 한자가 특별한 형태소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한자어 말고도 개별 한자에 대한 의미를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다른 형태로도 분류가 가능하다. 듣기, 읽기에 적합한 수동사전(passive dictionary)이 있고 말하기, 쓰기에 적합한 능동사전(active dictionary)이 있다. 이 외에도 외국어 학습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면서 다양한 종류의 특수 사전이 나오고 있다. 연어사전, 구동사사전, 관용구사전 등이 그것이다. 용어사전(specialized dictionary 혹은 glossary)은 해당 분야의 전문용어만을 모아놓은 용어집이다. 용어사전이 많이 모이면 백과사전이 된다고도 볼 수 있다. 백과라는 말 자체가 수많은 분야라는 의미를 가진다. 백과사전은 인간 지식중에서 기본으로 생각되는 것들을 균형있게 골라 서술한 책이다. 백과사전이 넓고 평평한 범위를 다루는 사전이고 용어사전은 좁고 깊은 범위를 다룬다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다. 백과사전과 어학사전의 가장 큰 차이라면 백과사전은 일상적인 의미를 잘 다루지 않고 개별 영역의 전문적인 의미를 다룬다는 점이다. 어학사전이 기능어를 많이 다룬다면 백과사전은 고유명사를 주로 다룬다고 해도 된다. 한한대사전 전자 사전 사전 편찬 자전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개방형 인터넷 백과사전 우리말 유의어사전 낱말창고
여러 종류의 자료 중 일부. 자료 (資料, , 데이터는 수, 영상, 단어 등의 형태로 된 의미 단위이다. 보통 연구나 조사 등의 바탕이 되는 재료를 말하며, 자료를 의미있게 정리하면 정보가 된다. 즉, 자료는 또한 "주어진" 자료의 정신에 반대하여 높은 해석상의 본질을 가진 인문학 (특히 발전되가는 digital humanities) 에 사용되어 오고있다. 가능성의 엄청난 수와 그 주의를 지향하게한 하위 집단간의 구별을 위해 Peter Checkland는 용어 "capta" ("~을 취하다" 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capere"로 부터온) 를 소개했다.‘Johanna Drucker’는 인문학이 지식의 생성이 "놓여있고, 불완전하고, 구성적인" 과 같다고 단언함과, 자료 의 사용은 별개이거나 관찰자 독립적인 현상과 같은 역효과를 일으키는 추정들을 소개하기 위해 주장했다. 구성요소와 같은 관찰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한 단어인 capta 는 인문학에서의 시각적 묘사들을 위한 자료 의 대안으로 제공되었다. 자료는 질적 자료와 양적 자료로 구분된다. 질적 자료(qualitative data, 정성적 자료)는 수치로 측정이 불가능한 자료이다. 분류 자료 또는 범주형 자료(categorical data)라고도 한다. :예 전화번호, 등번호, 성별, 혈액형, 계급, 순위, 등급, 종교 분류 등. 양적 자료(quanitive data, 정량적 자료)는 수치로 측정이 가능한 자료이다. 또는 수치적 자료(Numerical data)라고 하기도 합니다. 예 온도, 지능지수, 절대온도, 가격, 주가지수, 실업률, 매출액, 기업내 과장의 수 등. 양적자료는 풍부한 의미를 상실할 여지를 비롯해서 수치가 갖는 약점도 있다. Parsimony(간결성)의 문제를 갖는 것이다. 수치화되지 않는 개념을 양화하기 위해서는 개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을 측정하는 데 어떤 것을 포함할 것인가의 특정한 문제에 집중하게 되면 우리는 그것을 제외한 다른 모든 의미들이 배제된다. 그렇기에 어떤 정교한 양적 측정도 이에 상응하는 질적 기술에 비해 의미가 덜할 수밖에 없다. 정보 자료형 데이터 처리 데이터 마이닝 데이터 웨어하우스 통계분석연구회 분류:정보
운영 체제 (運營 體制 또는 오퍼레이팅 시스템 (은 시스템 하드웨어를 관리할 뿐 아니라 응용 소프트웨어를 실행하기 위하여 하드웨어 추상화 플랫폼과 공통 시스템 서비스를 제공하는 시스템 소프트웨어이다. 최근에는 가상화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실제 하드웨어가 아닌 하이퍼바이저 위에서 실행되기도 한다. 입출력과 메모리 할당과 같은 하드웨어 기능의 경우 운영 체제는 응용 프로그램과 컴퓨터 하드웨어 사이의 중재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응용 프로그램 코드는 일반적으로 하드웨어에서 직접 실행된다. 운영 체제는 휴대 전화, 게임기에서부터 슈퍼컴퓨터, 웹 서버에 이르기까지 컴퓨터를 포함하는 거의 모든 장치에서 볼 수 있다. 운영 체제는 한 면으로는 소비자를, 다른 한 면으로는 프로그램 개발자를 함께 하나의 시장으로 데려다 놓을 수 있는 양면 플랫폼이다. 잘 알려진 현대의 PC 운영 체제에는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맥 OS X, 리눅스가 있다. 이 밖에 BSD, 유닉스 등의 PC용 운영 체제도 존재한다. 운영 체제는 실행되는 응용 프로그램들이 메모리와 CPU, 입출력 장치 등의 자원들을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고, 이들을 추상화하여 파일 시스템 등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또한 멀티태스킹을 지원하는 경우, 여러 개의 응용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있는 동안, 운영 체제는 이러한 모든 프로세스들을 스케줄링하여 마치 그들이 동시에 수행되는 것처럼 보이는 효과를 낸다. 운영 체제는 컴퓨터 과학의 연구 분야이기도 하다. 싱글 태스킹 운영 체제는 한번에 오직 하나의 프로그램만 실행할 수 있으나 멀티태스킹 운영 체제는 하나 이상의 프로그램이 동시에 실행할 수 있게 한다. 이는 운영 체제의 작업 스케줄링 하부 시스템에 의해 제각기 반복적으로 인터럽트 처리되는 여러 프로세스 사이에서 이용 가능한 프로세서 시간을 쪼개는 시분할을 통해 이루어진다. 멀티태스킹의 경우 선점형과 협동형(비선점형)이 있다. 선점형 멀티태스킹의 경우 운영 체제는 CPU 시간을 쪼개어 프로그램들 각각에 슬롯을 할당해준다. 솔라리스, 리눅스, 아미가OS와 같은 유닉스 계열 운영 체제들은 선점형 멀티태스킹을 지원한다. 협동형 멀티태스킹은 정해진 방식에 따라 다른 프로세스들에 시간을 제공하기 위해 각 프로세스에 의존함으로써 수행된다. 16비트 버전의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는 협동형 멀티태스킹을 사용하였다. 32비트 버전의 윈도우 NT, 윈도우 9x의 경우 선점형 멀티태스킹을 사용하였다. 단일 사용자 운영 체제는 사용자 구별이 없으나 여러 프로그램이 나란히 실행하는 것은 허용한다. 다중 사용자 운영 체제는 디스크 공간과 같은 리소스와 프로세스를 식별하는 기능을 갖춘 멀티태스킹의 기본 개념을 확장하며, 여러 사용자에 속해 있으면서 여러 사용자가 동시에 시스템과 상호 작용할 수 있게 한다. 시분할 운영 체제들은 시스템의 효율적인 이용을 위해 태스크를 스케줄링하며, 프로세서 시간, 기억 공간, 인쇄, 기타 자원을 여러 사용자에게 비용적으로 할당하기 위한 회계 소프트웨어를 포함할 수 있다. 분산 운영 체제는 구별된 컴퓨터 그룹을 관리하고 이들이 마치 하나의 컴퓨터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 준다. 서로 연결되어 통신하는 네트워크화된 컴퓨터들이 개발되면서 분산 컴퓨팅이 활성화되었다. 분산되는 연산들은 하나 이상의 컴퓨터에서 수행된다. 하나의 그룹에 속하는 컴퓨터들이 협업을 할 때 분산 시스템을 형성하게 된다. 운영 체제에서, 배포 형식 및 클라우드 컴퓨팅 환경에서 판형은 하나의 가상 머신 이미지를 게스트 운영 체제로 만드는 것을 가리키며, 실행 중인 여러 개의 가상 머신을 위한 도구로 이를 저장한다. 이 기법은 가상화와 클라우드 컴퓨팅 관리에 둘 다 사용되며, 대형 서버 웨어하우스 환경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임베디드 운영 체제는 임베디드 컴퓨터 시스템에서 사용할 수 있게 설계되어 있다. PDA처럼 조그마한 기계에 동작하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제한된 수의 자원으로 동작한다. 매우 크기가 작고 극히 효율적으로 설계되어 있다. 임베디드 운영 체제의 예로 윈도우 CE와 미닉스 3이 있다. 실시간 운영 체제는 특정한 짧은 시간 내에 이벤트나 데이터의 처리를 보증하는 운영 체제이다. 실시간 운영 체제는 싱글태스킹일 수도 있고, 멀티태스킹일 수도 있으며 멀티태스킹의 경우 특수한 스케줄링 알고리즘을 사용한다. 라이브러리 운영 체제는 네트워크 등 일반적인 운영 체제가 제공하는 서비스들이 라이브러리 형태로 제공되는 것을 의미한다. 운영 체제는 많은 부분을 이룬다.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가 커널인데, 커널은 일반인이 일반적으로 보지 못하는 낮은 수준의 프로세스를 제어한다. 얼마나 메모리를 읽고 쓸 것인지, 어느 프로세스를 실행할 것인지, 모니터, 키보드, 마우스와 같은 장치를 통해 어떠한 정보를 주고받을 것인지, 네트워크를 통해 받은 정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를 제어한다.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컴퓨터 사용자가 직접 프로그램을 제어하고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운영 체제의 기능이다.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아이콘과 바탕 화면을 지닌 그래픽이나 명령 줄을 지닌 문자를 이룰 수 있다. 이와 비슷한 기능으로 API가 있는데 이것은 응용 프로그램이 다른 프로그램과 상호 작용할 수 있게 하는 서비스와 코드 라이브러리가 한데 모여 있으며 운영 체제 그 자체라고 할 수도 있다. 운영 체제에 따라 이러한 구성 요소들 가운데 다수가 실질적인 부분으로 취급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를테면 윈도우는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운영 체제의 일부로 여기는데 반해 수많은 버전의 리눅스는 그렇지 않다. 운영 체제의 중요한 목적은 이를테면 다음과 같다. 사용자에게 컴퓨터의 프로그램을 쉽고 효율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컴퓨터 시스템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 자원을 여러 사용자 간에 효율적 할당, 관리, 보호하는 것 운영 체제는 제어 프로그램으로서 사용자 프로그램의 오류나 잘못된 자원 사용을 감시하는 것과 입출력 장치 등의 자원에 대한 연산과 제어를 관리한다. 일반적인 응용 프로그램들을 제외한 컴퓨터 시스템은 개념적으로 세 개의 구성 요소로 구분하기도 한다. 그 세 부분은 운영 체제, 셸, 그리고 (낮은 수준의) 필수 유틸리티들이다. 셸은 사용자가 시스템을 운용할 수 있게끔 해주는 기본적인 응용 프로그램이다. 이런 셸의 행동들은 결국 운영 체제에 명령을 내리는 일이 된다. bash 등의 이러한 셸은 그러나 엄밀히 운영 체제의 일부가 아니며 운영 체제 입장에서는 셸이나 필수 유틸리티들이나 모두 응용 프로그램일뿐 구별하지 않는다. 다만 이러한 구분은 사용자의 입장에서 필수적인 응용 프로그램이라는 뜻이다. 하드웨어 ↔ 운영 체제 ↔ 셸 / 응용 프로그램 ↔ 사용자 달에 사람을 착륙시키는 데 도움을 준 컴퓨터를 포함하여 OS/360은 1966년부터 대부분의 IBM 메인프레임 컴퓨터에 쓰였다. 초기의 컴퓨터들은 계산기처럼 일련의 단일 작업들을 수행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여러 프로그램들을 연속으로 자동 실행하여 처리 속도를 높일 수 있었던 레지던트 모니터와 같이, 1950년대에는 기본적인 운영 체제의 기능들이 개발되었다. 운영 체제는 1960년대 초까지만 하여도 현대의 운영 체제와 같이 더 복잡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았다. 하드웨어 기능에 런타임 라이브러리, 인터럽트, 병렬 처리가 추가되었다. 개인용 컴퓨터가 애플, 아타리, IBM, 아미가와 같은 기업 덕택에 1980년대에 유명해졌다. 이 업체들은 한때 메인프레임과 미니 컴퓨터에 널리 쓰였던 운영 체제 기능을 추가하였다. 나중에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와 같은 수많은 기능들이 개인용 컴퓨터 운영 체제를 위해 개별적으로 개발되었다. 1950년대 초에 컴퓨터는 한 번에 하나의 프로그램만 실행할 수 있었다. 각 사용자는 컴퓨터만을 사용하여 예약된 시간에 천공 카드와 테이프의 프로그램과 데이터에 접근하여야 했다. 프로그램이 컴퓨터에 적재되면 컴퓨터는 프로그램이 끝나거나 충돌을 일으킬 때까지 계속 동작하였다. 토글 스위치와 패널 불빛을 이용하여 앞면 패널을 통해 프로그램을 디버깅할 수 있었다. 그 뒤에 나온 컴퓨터는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어셈블리어로부터의 기계어 발생이나 입출력과 같은 기능을 도와주기 위하여 사용자 프로그램을 연결해 놓은 소프트웨어 라이브러리와 함께 등장하였다. 이때가 바로 현대 운영 체제의 탄생 시기이다. 그러나 여전히 컴퓨터는 한 번에 하나의 일만 할 수 있었다. 1950년대를 통해 일괄 처리, 입출력 인터럽트, 버퍼링, 멀티태스킹, 스풀링, 런타임 라이브러리, 파일 정렬을 위한 프로그램을 포함한 수많은 주요 기능들이 운영 체제 분야에 포함되었다. 이러한 기능들은 프로그래머의 취향에 따라 응용 소프트웨어에 포함되어 있기도 했고 포함되지 않기도 했다. 1959년에 IBM 704, 709, 7090 메인프레임 컴퓨터를 위한 셰어 운영 체제(SHARE)가 통합 유틸리티로 출시되었다. PC-DOS는 명령 줄 인터페이스 기능을 제공하였던 초기의 개인용 컴퓨터 운영 체제였다. 최초의 마이크로컴퓨터는 메인프레임과 미니컴퓨터를 위해 개발해 둔 운영 체제에 대한 필요성도 그만한 용량도 없었다. 모니터스( Monitors )라는 이름의 매우 작은 운영 체제가 개발되었으며 롬에서 불러들였다. 눈에 띄는 초기의 디스크 기반 운영 체제로 CP/M이 있었는데 수많은 초기 마이크로컴퓨터에서 지원되었으며 IBM PC에 널리 쓰였던 MS-DOS(IBM 버전의 것은 IBM DOS, 곧 PC-DOS로 불렸다)와 매우 비슷하였다. 1980년대에 애플 컴퓨터사(지금의 애플사)가 애플 II 시리즈의 마이크로컴퓨터를 버리고, 혁신적인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맥 OS 운영 체제에 갖춘 애플 매킨토시 컴퓨터를 도입하였다. 32비트 아키텍처에 페이징 기능을 갖춘 인텔 80386 CPU 칩이 도입되면서 개인용 컴퓨터가 초기의 미니컴퓨터와 메인프레임 컴퓨터에서 실행할 수 있었던 멀티태스킹 운영 체제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DEC용 VMS 운영 체제를 개발하였던 데이비드 커틀러를 해고함으로써 이러한 진행에 응하였다. 그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운영 체제 기반을 다룰 윈도우 NT 운영 체제 개발을 이끌었다. 애플의 공동 창립자 스티브 잡스는 NeXT 컴퓨터사를 차렸고 유닉스 계열 넥스트스텝 운영 체제를 개발하였다. 넥스트스텝은 훗날 애플에 인수되었으며 FreeBSD 코드가 맥 OS X의 중심이 되었다. 프로그래머 리처드 스톨만이 사유 유닉스 운영 체제를 대체하는 자유 소프트웨어를 목표로 GNU 프로젝트를 시작하였다. 이 프로젝트가 유닉스 여러 곳의 기능을 복제하는 데 큰 성공을 이루자 GNU 허드 커널 개발은 비생산적인 것으로 입증되었다. 1991년 핀란드 컴퓨터 과학부 학생인 리누스 토르발스는 최초의 리눅스 커널 버전을 출시하였다. 곧 GNU 유저랜드와 시스템 소프트웨어에 병합되면서 컴퓨터 운영 체제를 이루게 되었다. BSD는 유닉스 계열로서 1970년대에 시작하여 수많은 미니컴퓨터에 포팅되었으며 마침내 FreeBSD, NetBSD, OpenBSD와 같이 개인용 컴퓨터에도 쓰이게 되었다. 유닉스 계열의 역사 유닉스는 처음에는 어셈블리어로 작성되었다. 켄 톰프슨은 BCPL에 기반을 둔 B를 작성하였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그는 유닉스를 작성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멀틱스 프로젝트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C는 B를 대체하였으며 유닉스는 현대의 모든 운영 체제에 영향을 미쳤던 크고 복잡한 계열의 상호 관련 운영 체제로 발전하였다. (역사 참조) 유닉스 계열 운영 체제는 유닉스에서 파생한 계열이며 시스템 V, BSD, GNU/리눅스,와 같은 주된 하부 분류가 몇 가지 있다. 유닉스라는 이름은 어느 운영 체제와도 사용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을 표명한 오픈 그룹의 상표이다. 유닉스 계열은 원래의 유닉스를 닮은 커다란 집합의 운영 체제들을 가리키는 데 흔히 쓰인다. 유닉스 계열 운영 체제는 다양한 컴퓨터 아키텍처에서 돌아간다. 이들은 비즈니스 분야의 서버와 학술 및 공학 환경에서의 워크스테이션에서도 쓰인다. GNU/리눅스와 BSD와 같은 자유 유닉스들은 이러한 분야에서 널리 쓰인다. HP의 HP-UX와 IBM의 AIX는 제조업체의 하드웨어에만 동작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솔라리스와 같은 것들은 x86 서버와 PC를 포함한 여러 종류의 하드웨어에서 돌아간다. 넥스트스텝, 마하, FreeBSD에서 파생한 하이브리드 커널 기반의 BSD류인 애플의 맥 OS X은 유닉스 계열이 아니었던 애플의 초기 맥 OS를 대체하였다. 유닉스의 정보 처리 상호 운용성은 POSIX 표준을 확립함으로써 드러난다. POSIX 표준은 이것이 비록 다양한 유닉스 계열을 위해서 만들어지기는 하였으나 다른 어떠한 운영 체제에라도 적용할 수 있다. 월드 와이드 웹을 위한 최초의 서버는 BSD 기반의 넥스트스텝에서 실행하였다. 유닉스 계열의 하부 집합 가운데 하나로 BSD 계열이 있다. 여기에는 FreeBSD, NetBSD, OpenBSD를 포함한다. 이러한 운영 체제들은 웹 서버에서 가장 쉽게 찾을 수 있지만 개인용 컴퓨터 운영 체제로의 역할도 한다. 인터넷은 BSD와도 많은 관련이 있는데, 네트워크에 연결하여 데이터를 주고 받는 데 흔히 쓰이는 현재의 프로토콜들 가운데 다수가 BSD에서 정의하여 널리 쓰이게 된 것이다. 또, 월드 와이드 웹은 넥스트스텝이라는 BSD 기반 운영 체제를 실행하는 수많은 컴퓨터에서 처음 입증되었다. BSD는 유닉스에 뿌리를 두고 있다. 1974년에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는 최초의 유닉스 시스템을 설치하였다. 시간이 지나 컴퓨터 과학부의 학생들과 직원들은 그곳에서 문서 편집기와 같은 새로운 프로그램을 이러한 것들에 일찍이 추가하기 시작하였다. 버클리 대학교가 최초의 유닉스 시스템이 설치된 새로운 VAX 컴퓨터를 1978년에 도입하였을 때 대학생들은 컴퓨터 하드웨어의 가능성을 이용하기 위하여 유닉스를 수정하였다. 미국 국방부의 방위고등연구계획국이 이에 관심을 가져 프로젝트에 투자하기로 결정하였다. 수많은 학교와 회사, 정부 단체들은 이를 알아채고 AT&T에서 제공하는 공식적인 것이 아닌 버클리 버전의 유닉스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1985년에 애플을 떠났던 스티브 잡스는 넥스트스텝이라 불리는 BSD류를 실행하는 고성능 컴퓨터를 제조하였던 기업 NeXT사를 세웠다. 이러한 컴퓨터들 가운데 하나는 팀 버너스 리가 최초의 웹 서버로 월드 와이드 웹을 만드는 데 사용하였다. 맥 OS X은 매킨토시 컴퓨터에 미리 최신으로 설치되어 있으면서도 애플이 개발하여 판매한 사유 그래픽 운영 체제이다. 맥 OS X은 1984년 이후로 애플의 사유 운영 체제였던 원래의 맥 OS의 뒤를 잇는 것이다. 전작과 달리 맥 OS X은 1980년대 2/4 분기부터 애플이 1987년 초에 이 회사를 사들일 때까지 NeXT에서 개발한 기술로 만든 유닉스 운영 체제이다. 이 운영 체제는 1999년에 맥 OS X 서버 1.0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출시하였으며 그 뒤 2001년 3월에 데스크톱 지향 버전인 맥 OS X v10.0을 출시하였다. 그 뒤로 맥 OS X의 "클라이언트", "서버" 에디션 여섯 가지가 공개되었으며, 최신 제품은 2014년에 출시된 OS X 요세미티이다. 서버 에디션인 맥 OS X 서버는 구조적으로 데스크톱의 것과 비슷하지만 일반적으로 애플의 매킨토시 서버 하드웨어에서 돌아간다. 맥 OS X은 메일 전송 에이전트, 삼바, LDAP 서버, DNS 등을 비롯한 네트워크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게 하는 워크 그룹 관리 및 관리 소프트웨어 도구를 포함하고 있다. 켄 톰프슨, 데니스 리치, 더글라스 맥길로이는 벨 연구소에서 유닉스 운영 체제를 개발하기 위하여 C 프로그래밍 언어를 설계하고 개발하였다. 벨 연구소의 프로그래머들은 현대의 배포 환경을 위해 계획된, 플랜 9와 인페르노를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플랜 9는 네트워킹 운영 체제로 발돋움하기 위하여 계획된 것이었으며 당시 그래픽이 제공되지 않았던 유닉스와 달리 그래픽을 내장하였다. Lucent 공중 허가 사용 허가서 하에 출시되었다. 인페르노는 Vita Nuova Holdings에 팔려 GPL/MIT 라이선스로 배포되고 있다. 12.04 Final Live CD Screenshot.png|300px|섬네일|리눅스의 데스크톱 배포판인 우분투. 4.0.png|섬네일|180px|left|안드로이드는 리눅스 커널을 이용하는 대중적인 모바일 운영 체제이다. 리눅스는 BSD 및 그 변종과 달리 실제 유닉스 코드 없이 개발된 유닉스 계열 운영 체제이다. 슈퍼컴퓨터에서부터 손목시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기에 쓰인다. 리눅스 커널은 오픈 소스 라이선스로 배포되므로 누구나 코드를 읽고 수정할 수 있다. 리눅스는 다양한 전자 기기에서 동작하도록 수정되고 있다. GNU 프로젝트는 완전한 원래의 코드를 제외하고 유닉스와 비슷하게 완전하게 자유롭고 열려 있는 운영 체제를 만들고 싶어하는 프로그래머들의 협동적인 노고 그 자체이다. 이 프로젝트는 1983년에 리처드 스톨만이 시작하였고 대부분의 리눅스의 수많은 부분을 책임지고 있다. 이 까닭에 리눅스는 GNU/리눅스로 불리기도 한다. 실질적으로 모든 운영 체제를 위한 수많은 소프트웨어가 GNU 일반 공중 사용 허가서 하에 배포된다. 이 가운데 리눅스 커널은 핀란드의 대학교 학생이었던 리누스 토르발스의 부차적인 프로젝트로 시작되었다. 1991년에 토르발스는 이 작업에 착수하여 프로젝트에 대한 정보를 컴퓨터 학생과 프로그래머를 위한 뉴스그룹에 게시하였다. 크롬은 구글이 리눅스 커널을 기반으로 설계한 운영 체제이다. 크롬은 대부분의 시간을 인터넷으로 보내는 이용자들을 대상으로 한다. 기술적으로는 어떠한 응용 프로그램도 없는 웹 브라우저만을 이용하며 문서 작성이나 미디어 보기와 같은 작업을 위해 웹 브라우저에 쓰이는 인터넷 애플리케이션에 의존한다.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는 개인용 컴퓨터에 가장 흔히 쓰이는 사유 운영 체제 계열이다. 개인용 컴퓨터를 위한 가장 흔한 운영 체제이며 약 90%의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최신 버전은 개인용 컴퓨터의 경우 윈도우 10이, 서버의 경우 윈도우 서버 2012 R2이다. 1981년에 IBM PC용의 오래된 MS-DOS 운영 체제에 추가 기능으로 나온 것이 기원이다. 1985년에 마이크로소프트는 개인용 컴퓨터의 비즈니스 분야를 지배하기 시작하여 수많은 산업 표준을 정립하기에 이르렀다. 윈도우 XP를 시작으로 현대의 모든 윈도 버전은 윈도우 NT 커널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현재 나오는 윈도우 버전은 IA-32와 x86-64 프로세서에서 동작하지만 그 이전에 나왔던 버전들은 다른 아키텍처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틈새 시장에 존재하는 오래된 운영 체제로는 IBM과 마이크로소프트의 OS/2, 애플 맥 OS X의 유닉스를 이용하지 않는 이전작 맥 OS, 또 BeOS와 XTS-300이 있다. RISC OS, MorphOS, 아미가OS 4도 열성적인 커뮤니티와 전문 분야를 위한 소수 플랫폼으로 개발이 이어지고 있다. DEC의 OpenVMS도 휴렛 패커드가 계속 개발하고 있다. 도스 등의 운영 체제도 FreeDOS와 같은 프로젝트를 통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그 밖의 운영 체제는 운영 체제 교육용이나 학술용, 또는 운영 체제 개념의 연구 등을 위해 예외적으로 쓰인다. 학술과 연구 역할을 모두 수행하는 시스템의 전형적인 예로 미닉스가 있다. 반면 순수 연구 목적으로 쓰이는 것으로는 싱귤래리티가 있다. 운영 체제를 이루는 요소는 컴퓨터의 다른 부분들과 함께 동작하게 만들기 위하여 존재한다. 금융 데이터베이스부터 영화 편집 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소프트웨어는 모두 소프트웨어에 쓰이는 하드웨어가 단순히 마우스나 키보드만 이용하든지 아니면 인터넷 연결같이 복잡한 방식을 이용하든지 상관 없이 하드웨어를 이용하기 위하여 운영 체제로 말미암아 실행해야 한다. 커널이 응용 소프트웨어를 컴퓨터 하드웨어에 연결하고 있다. 펌웨어와 장치 드라이버의 도움을 받아 커널은 모든 컴퓨터 하드웨어 장치에 대한 가장 기초 수준의 제어권을 제공한다. 커널은 램을 통해 프로그램을 위한 메모리 접근을 관리하며 어느 프로그램이 어느 하드웨어 자원에 접근할지를 결정하며 CPU의 동작 상태를 늘 최적으로 설정 및 초기화하고 디스크, 테이프, 플래시 메모리와 같은 매체의 파일 시스템을 갖춘 장시간 비휘발성 기억 장치를 위한 데이터를 정리한다. 운영 체제 내에서의 커널의 영역과 그 구성에 따라 모노리딕 커널(monolithic kernel), 마이크로 커널(micro kernel) 등으로 분류한다. 운영 체제는 응용 프로그램과 하드웨어 사이의 인터페이스 역할을 한다. 운영 체제는 응용 프로그램 개발을 단순하게 하는 서비스의 집합이다. 프로그램을 실행하면 운영 체제가 프로세스를 만든다. 커널은 메모리와 다른 자원을 할당하여 프로세스를 만들며, 이로써 멀티태스킹 환경에서 프로세스에 대한 우선 순위를 확립하고, 메모리에 프로그램 코드를 적재하며 프로그램을 실행한다. 그 뒤 프로그램은 사용자 및 장치와 상호작용한 다음 원하는 명령을 수행하게 된다. 운영 체제는 프로세스들을 생성하거나 삭제하고, 중단시키거나 재개시킨다. 프로세스 간의 동기화와 통신, 교착상태 처리에 관한 메커니즘을 제공한다. # 사용자 및 시스템 프로세스의 생성과 종료 관리 # 프로세스의 일시 중지와 속개 # 프로세스 동기화를 위한 수단의 제공 # 프로세스간 통신을 위한 수단의 제공 # 교착 상태 처리를 위한 수단의 제공 인터럽트는 주변 환경에 반응하고 상호작용하는 데에 효율적인 방법을 운영 체제에 제공하므로 운영 체제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동작을 요구하는 이벤트(폴링)를 위한 다양한 소스의 입력을 운영 체제가 감시할 수 있는 다른 대안은 스택이 매우 작은 구형 운영 체제에서 볼 수 있으나 스택이 큰 현대의 운영 체제에서는 드문 편이다. 인터럽트 기반의 프로그래밍은 현대의 대부분의 CPU에서 직접적으로 지원된다. 인터럽트는 자동으로 로컬 레지스터 컨텍스트를 저장하고 이벤트에 반응하는 특정 코드를 실행하는 방법을 컴퓨터에 제공한다. 매우 기초적인 컴퓨터들은 모두 하드웨어 인터럽트들을 지원하며 이벤트가 발생할 때 실행될 코드를 프로그래머가 지정할 수 있게 한다. 프로그램이 운영 체제에 인터럽트를 발생시키는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프로그램이 하드웨어에 접근하고자 한다면 운영 체제의 커널을 가로막을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제어권을 커널에 넘겨준다. 그 뒤 커널은 요청을 수행한다. 프로그램이 메모리(또는 공유 자원)와 같은 추가 자원이 필요하면 커널이 집중할 수 있게 인터럽트를 발생시킨다. rings.svg|섬네일|보호 모드에서 사용할 수 있는 x86용 권한 링. 운영 체제는 어느 프로세스가 개별 모드에서 실행할 것인지 결정한다. 현대의 CPU는 여러 모드의 명령을 지원한다. 이러한 기능을 지원하는 CPU에는 두 가지 모드가 있다 보호 모드, 수퍼바이저 모드. 수퍼바이저 모드는 메모리의 기록 및 삭제 방식을 제어하는 것과 그래픽 카드와 같은 장치와 통신하는 것과 같이 운영 체제의 커널이 하드웨어에 제한 없이 액세스해야 하는 낮은 수준의 태스크를 위해 사용한다. 반대로 보호 모드는 그 밖의 거의 모든 용도로 사용된다. 응용 프로그램들은 보호 모드 안에서 동작하며, 수퍼바이저 모드의 모든 것을 제어하는 커널과 통신해야만 하드웨어를 이용할 수 있다. CPU는 오래된 프로세서를 가상으로 구현하기 위한 가상 모드와 같이 보호 모드와 비슷한 다른 모드들을 지니고 있을 수도 있다. (이를테면 32비트에서 16비트 프로세서를, 아니면 64비트에서 32비트 프로세서를 가상으로 구현할 때) 컴퓨터가 처음 시동할 때 자동으로 수퍼바이저 모드에서 실행된다. 컴퓨터를 켜자마다 먼저 실행되는 몇 안 되는 프로그램들이 바이오스와 부트로더이며 운영 체제는 하드웨어에 제한 없이 접근한다. 그리고 운영 체제가 다른 프로그램에 대한 제어권을 보낼 때 CPU를 보호 모드에 놓을 수 있다. 멀티프로그래밍 운영 체제 커널은 현재 프로그램이 이용하는 모든 시스템 메모리를 관리해야 한다. 이로써 어느 특정한 프로그램이 다른 프로그램이 이미 사용하고 있는 메모리와 상호 작용하지 않게 한다. 프로그램이 시분할하므로 각 프로그램은 메모리에 독립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수많은 운영 체제는 하드 디스크와 램에 분산된 메모리를 이용하여 마치 가상 메모리로 불리는 메모리 덩어리가 연속적인 것처럼 프로그램을 속일 수 있다. 페이징이나 세그먼테이션과 같은 가상 메모리 어드레싱을 이용하면 커널은 어느 메모리를 각 프로그램이 주어진 시간에 사용할 수 있게 할지 설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운영 체제가 여러 개의 태스크에 같은 메모리 위치를 사용할 수 있게 한다. 프로그램이 접근할 수 있는 메모리 범위에 없는 메모리에 접근하려고 하지만 그곳에 할당되면 커널은 프로그램이 마치 할당된 메모리를 초과 사용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인터럽트 처리한다. 유닉스에서 이러한 종류의 인터럽트를 페이지 실패라고 부른다. 커널이 페이지 실패를 감지하면 이러한 문제를 일으킨 프로그램의 가상 메모리 영역을 수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로써 요청된 메모리에 프로그램이 접근할 수 있게 한다. 현대의 운영 체제에서 자주 접근하지 않는 메모리는 일시적으로 디스크나 다른 매체에 저장하여 다른 프로그램에게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 준다. 이를 스왑 처리(swapping)라고 하며 이를 통해 여러 개의 프로그램이 특정한 메모리 영역을 차지할 수 있다. 멀티태스킹은 여러 개의 독립적인 컴퓨터 프로그램을 하나의 컴퓨터에 실행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마치 태스크들이 동시에 수행하는 것처럼 보여 준다. 대부분의 컴퓨터가 한 번에 최대 한 두개를 수행할 수 있고 이는 일반적으로 시분할을 통해 수행된다. 다시 말해 각 프로그램은 컴퓨터의 실행 시간의 일부를 사용한다. 운영 체제 커널은 스케줄러라는 프로그램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프로그램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각 프로그램이 실행에 소비하게 할 것인지를 결정하며 여기서 실행 제어권이 프로그램에 넘어갈 수 있게 한다. 제어권은 프로그램이 CPU와 메모리에 접근할 수 있게 하는 커널로 말미암아 프로세스로 넘어간다. 나중에 다른 프로그램이 CPU를 사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제어권은 같은 메커니즘을 통하여 커널로 반환된다. 커널과 응용 프로그램 간의 제어권 이동을 이른바 문맥 교환이라고 부른다. 파일 시스템은 디렉터리(폴더)를 이용하면서 사용자와 프로그램이 컴퓨터 파일을 정리하고 정렬할 수 있게 해 준다. 디스크에 저장된 데이터로 접근하는 것은 모든 운영 체제의 기본 기능이다. 컴퓨터는 더 빠른 접근, 더 높은 신뢰성을 위해, 또 드라이브의 남은 공간을 더 잘 이용하기 위한 특정한 방식으로 구조화된 파일을 이용하여 디스크에 데이터를 저장한다. 파일을 디스크에 저장하는 이러한 방식을 파일 시스템이라고 부르며 파일이 이름과 특성을 가질 수 있게 한다. 또, 이러한 파일들을 디렉터리 트리로 정렬되는 특정 계급의 디렉터리와 폴더에 저장하게 한다. 초기의 운영 체제는 일반적으로 한 종류의 디스크 드라이브와 한 종류의 파일 시스템을 지원하였다. 초기의 파일 시스템들은 용량, 속도, 또 파일 이름과 디렉터리 구조의 종류에 제한이 있었다. 이러한 제한은 설계된 운영 체제의 제한에 반영되므로 특정한 운영 체제가 하나 이상의 파일 시스템을 지원하는 것을 매우 어렵게 만들었다. 더 단순한 수많은 운영 체제들은 기억 장치의 시스템에 접근하기 위한 제한된 옵션들을 지원하였는데, 유닉스와 GNU/리눅스와 같은 운영 체제들은 가상 파일 시스템(VFS)이라는 기술을 지원한다. 유닉스와 같은 운영 체제는 공통 API를 통해 접근하는 파일 시스템이나 디자인에 관계 없이 다양한 기억 장치를 지원한다. 그러므로 프로그램을 개발할 때 장치 접근에 대한 정보를 공부하지 않아도 되게 한다. VFS는 다양한 파일 시스템에, 특정한 장치 드라이버와 파일 시스템 드라이버를 사용하여 프로그램들이 무제한의 장치에 접근할 수 있는 기능을 운영 체제에 제공한다. 연결된 하드 드라이브와 같은 기억 장치들은 장치 드라이버를 통해 접근한다. 장치 드라이버는 드라이브의 특정한 언어를 이해하고 이 언어를 운영 체제가 모든 디스크 드라이브에 접근할 때 사용하는 표준 언어로 번역할 수 있다. 유닉스에서 이를 블록 장치의 언어라고 한다. 장치 드라이버는 하드웨어 장치들과 상호 작용할 수 있도록 개발된 특정한 종류의 컴퓨터 소프트웨어이다. 장치 드라이버의 주된 설계 목적은 추상화이다. 하드웨어의 모델은, 특히 같은 종류의 장치라 하더라도 각기 다르다. 제조업체들은 더 신뢰할만한, 더 나은 성능을 제공하기 위해 더 새로운 모델들을 출시하고 이러한 새로운 모델들은 다르게 동작하기도 한다. 컴퓨터들과 운영 체제들은 현재든 앞으로든 모든 장치를 어떻게 제어할 것인지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운영 체제들은 반드시 어떠한 종류의 장치가 제어될 것인지를 지시하여야 한다. 그러면 장치 드라이버의 기능이 이러한 운영 체제의 함수 호출을 장치 특유의 호출로 번역하게 된다. 이론적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제어되는 새로운 장치는 적절한 드라이버를 사용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올바르게 동작한다. 새로운 드라이버는 운영 체제의 관점에서 장치가 평소처럼 동작하과 있음을 보증하게 된다. 비스타 이전의 윈도우, 2.6 미만의 리눅스 버전에서는 모든 드라이버 실행이 협동적이어서, 드라이버가 무한 루프에 진입하면 시스템이 정지하는 일이 발생한다. 더 최근에 나온 운영 체제들은 커널 선점을 사용한다. 이 경우 태스크 제공을 위해 커널이 드라이버를 간섭하며 장치 드라이버로부터 응답을 받을 때까지 자신을 프로세스로부터 분리시키며 더 많은 태스크를 부여할 수 있다. 현재 대부분의 운영 체제는 다양한 통신 프로토콜, 하드웨어, 응용 프로그램을 지원한다. 다시 말해, 서로 비슷하지 않은 운영 체제를 실행하는 컴퓨터가 자원(유무선 연결을 이용한 연산, 파일, 프린터, 스캐너)을 공유하기 위해 같은 망에 참여할 수 있다. 네트워크는 컴퓨터의 운영 체제가 원격 컴퓨터의 자원에 접근하는 데 필수적이다. 마치 리소스가 로컬 컴퓨터에 바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 준다. 여기에는 컴퓨터의 그래픽, 사운드 하드웨어를 공유하거나 네트워킹 파일 시스템을 이용하는 등 단순한 통신에서 나오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일부 네트워크 서비스는 컴퓨터의 자원을 투명하게 접근할 수 있게 한다. 이를테면 SSH는 네트워크로 이어진 사용자들이 컴퓨터의 명령 줄 인터페이스에 직접 접근할 수 있게 한다. 컴퓨터의 보안은 수많은 기술이 올바르게 동작하고 있는 지에 달려 있다. 또, 운영 체제는 보안을 위하여 특정 환경에 대한 권한을 사용자나 프로그램에 개별적으로 설정하고 인증 프로세스를 제공한다. 인터넷 보안은 특히 여러 사용자가 사용하는 시스템에 적절하다. 시스템을 사용하는 각 사용자는 개인 파일을 다른 사용자가 읽을 수 없게 할 수 있다. 명령 줄의 한 예. 각 명령어는 프롬프트 뒤에서 입력하면 되며 이에 대한 출력은 아래에 나타난다. 현재의 명령 프롬프트가 아래에 있다.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의 한 예. 프로그램들은 화면 위에 그림의 모습을 띠고 있으며 파일, 폴더, 응용 프로그램들은 아이콘과 기호의 모습을 띤다. 마우스는 컴퓨터를 탐색하는 데 쓰인다. 어떠한 종류의 입력을 받는 모든 컴퓨터는 사람이 컴퓨터와 소통할 수 있게 하는 사용자 인터페이스가 필요하다. 키보드, 마우스와 같은 장치들이 이러한 역할을 하지만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이를 위한 소프트웨어로 이루어진다.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역사적으로 컴퓨터 명령어를 한 줄씩 입력해 나가는 명령 줄 인터페이스와 일반적으로 창, 단추, 아이콘을 이루는 시각 환경이 존재하는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로 나뉜다. 현대의 대부분의 컴퓨터 운영 체제는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UI)를 지원한다.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와 맥 OS와 같은 일부 컴퓨터 시스템에서 GUI는 커널에 통합되어 있다. 기술적으로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운영 체제의 서비스가 아니지만 운영 체제 커널에 통합하면 GUI가 출력 명령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수많은 문맥 교환을 없앰으로써 GUI를 더 반응적으로 만들 수 있다. 다른 운영 체제로는 그래픽 하부 시스템을 커널과 운영 체제로부터 분리시키는 모듈성이 있다. 1980년대 유닉스에서 VMS 등은 이러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운영 체제였다. GNU/리눅스 및 맥 OS X 또한 이러한 방식을 취한다. 윈도우 비스타와 같은 현대의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는 거의 사용자 공간에 위치한 그래픽 하부 시스템을 포함하고 있지만 윈도 NT 4.0과 윈도우 서버 2003 버전 사이의 그래픽 구현 루틴은 거의 커널 공간에 존재한다. 윈도우 9x는 인터페이스와 커널 사이의 구별이 거의 없다. 수많은 컴퓨터 운영 체제는 사용자가 원하는 인터페이스를 만들어 설치할 수 있게 하고 있다. X 윈도 시스템을 GNOME이나 KDE와 함께 쓰면 유닉스 및 유닉스 계열 시스템에서 이러한 설정을 할 수 있다. 수많은 윈도우 셸 치환을 통해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에서도 이러한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데, 윈도우 셸을 교체하는 방식을 쓰지만 윈도우로부터 셸 자체를 분리할 수는 없다. 실시간 운영 체제 (RTOS)는 정해진 기간 안에 수행이 끝나야 하는 응용 프로그램을 위하여 만들어진 멀티태스킹 운영 체제이다. (실시간 연산) 이러한 응용 프로그램들에는 조그마한 임베디드 시스템, 자동차 엔진 제어 장치, 산업 로봇, 우주선, 산업 제어 장치, 일부 대형 컴퓨터 시스템 등이 있다. 초기의 대형 실시간 운영 체제는 이를테면 아메리칸 항공과 IBM이 사브레 항공 예약 시스템을 위하여 개발한 트랜잭션 프로세싱 퍼실리티(TPF)가 있다. 일부 임베디드 시스템은 실시간 연산을 지원하지 않더라도 심비안 OS, 팜 OS, BSD, GNU/리눅스와 같은 운영 체제를 이용한다. 운영 체제 개발은 컴퓨팅에 취미를 둔 사람들이 관여하는 가장 복잡한 활동들 가운데 하나이다. 취미로 만드는 운영 체제는 기존의 운영 체제로부터 직접적으로 코드를 가져오지 않은 것으로 분류될 수 있으므로, 사용자들과 활동 개발자들의 수는 적은 편이다. 취미 활동으로 개발된 운영 체제의 예로는 ReactOS와 Syllable 등이 있다. +2013년 운영 체제별 전 세계 기기 선적량 운영 체제 2012년 (단위 100만 기기) 2013년 (단위 100만 기기) 안드로이드 504 878 윈도우 346 328 iOS/맥 OS 214 267 블랙베리 35 24 기타 1,117 803 전체 2,216 2,300 출처 가트너 리눅스 재단에 따르면 퍼블릭 클라우드 워크로드의 90%, 세계 스마트폰의 82%, 임베디드 기기의 62%, 슈퍼 컴퓨터 시장의 99%가 리눅스로 작동한다. 운영 체제는 잘 정의된 인터페이스를 가지므로 운영 체제와 응용 프로그램 간의 구분은 명확하지만, 어느 정도의 서비스를 운영 체제 안에 포함시켜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는 기술적인 문제일뿐만 아니라 사업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이 문제는 다음의 경우에 분명히 드러난다. 1998년 미국 법무부는 마이크로소프트에 대해 소송을 제기하였는데, 요점은 마이크로소프트가 운영 체제에 너무 많은 기능을 포함시켜 응용 프로그램 제작업체들에게 피해를 주었다는 것이다. 운영 체제의 역사 운영 체제의 목록 운영 체제 최적화 범용 운영 체제 전용 운영 체제 실시간 운영 체제 (RTOS) 임베디드 시스템 객체 지향 운영 체제 O Brien, J. A., & Marakas, G. M.(2011). Management Information Systems . 10e. McGraw-Hill Irwin. 운영 체제의 동작 원리 세계 최초의 컴퓨터 운영 체제 운영 체제에 관한 TUNES 리뷰
한글날 () 또는 조선글날 (朝鮮--)은 한글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날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한 날인 10월 9일을 한글날 로 정하여 태극기를 게양하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날인 1월 15일을 조선글날 로 정하고 있다. jeong-eum.jpg|섬네일|오른쪽|훈민정음 언해 《세종실록》에는 1446년(세종 28년) 음력 9월에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한 것으로 쓰여 있다. 이를 근거로 1926년 지금 한글 학회의 전신인 조선어연구회와 신민사가 당시 음력 9월의 마지막 날인 음력 9월 29일(양력 11월 4일)에 훈민정음 반포 여덟 회갑(480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가지고, 이 날을 ‘가갸글’이라는 그때 한글의 이름에 따라 제1회 ‘ 가갸날 ’이라고 했다. 국어학자인 주시경이 ‘한글’이라는 이름을 지은 뒤인 1928년 ‘한글날’로 이름을 바꾸었다. 1931년 또는 1932년부터 양력인 그레고리력으로 당시 날짜를 따져 10월 29일에 지냈다. 한글연구단체인 조선어학회 회원이었던 국어학자 이희승과 이극로는 이를 1932년부터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1931년부터 양력으로 지냈다는 신문 기사도 있다. 1934년부터는 전문가들 의견을 따라 1582년 이전에 율리우스력을 썼던 것으로 가정하여 계산한 10월 28일에 지내었다. 1940년에 《훈민정음》 해례본을 발견하였다. 이에 따르면 훈민정음은 9월 상순에 책으로 펴냈다고 되어 있는데, 1446년 9월 상순의 마지막 날인 음력 9월 10일을 그레고리력으로 계산하면 10월 9일이 된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10월 9일을 한글날로 제정하고 공휴일로 만들었다. 1949년 6월 4일 대통령령 "관공서의공휴일에관한건"이 제정되면서, "10월9일(한글날)"도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1949년부터 1990년까지 매년 10월 9일 한글날은 공휴일이었다. 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관한법률"이 제정되었는데, 당시 국경일은 3·1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 네 개였고, 한글날은 포함되지 않았다. 1970년 6월 15일 "관공서의공휴일에관한건"이 "관공서의공휴일에관한규정"으로 전부개정되었는데, 한글날은 계속해서 공휴일로 포함되었다. 1982년 5월 15일 "각종기념일등에관한규정"이 개정되면서, "별표 각종기념일표"에 한글날이 포함되었다. 1984년 2월 21일 "대한민국국기에관한규정"이 제정되면서, 제12조에서 국경일, 국군의 날, 현충일 등과 함께 한글날에도 국기를 게양한다는 것을 규정했다. 1984년부터 지금까지 매년 10월 9일 한글날에 국기를 게양하고 있다. 공휴일이 지나치게 많아 경제 발전에 지장이 있다는 이유로 1990년 11월 5일 "관공서의공휴일에관한규정"이 개정되면서, 국군의 날과 함께 한글날이 공휴일에서 빠졌다. 이에 따라 1991년부터 2012년까지는 매년 10월 9일 한글날이 공휴일이 아니었는데, 다만 1994년, 2005년, 2011년에는 쉬었다. 2005년 10월 5일 대한민국 국회 문화관광위원회는 ‘한글날 국경일 지정 촉구 결의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2005년 11월 30일 국회 행정자치위원회는 법안심사 소위를 열어 한글날을 국경일로 격상하는 내용의 ‘국경일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상정했고, 이 개정안은 2005년 12월 8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했다. 이로써 2005년부터 지금까지 매년 10월 9일 한글날은 국경일이다. 국경일이라고 해서 공휴일인 것은 아니다. 한글날은 국경일이면서 쉬지 않는 날이었다. 2006년 9월 6일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이 개정되면서, "별표 각종기념일표"에서 한글날이 제외되었다. 한글날은 국경일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별표에서 따로 규정하지 않아도 기념행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07년 1월 26일 대한민국국기법 이 제정되면서, 제8조에서 국경일에 국기를 게양한다는 것을 규정했고, 2007년 7월 27일 "대한민국국기법 시행령"을 제정하면서, 같은 날 "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을 폐지했다. 한글날은 국경일이므로 당연히 국기를 게양한다. 한글날을 공휴일로 지정하기 위한 노력이 다각도로 진행되었는데, 한글학회, 한글문화연대 등 시민단체의 연합체인 한글날 공휴일 추진 범국민연합은 한글날을 앞두고 국민청원서를 제청하기는 등 했고, 한글날의 기념일 주관 부서인 문화체육관광부는 한글날을 공휴일로 재지정하는 방안을 추진했으며, 정치권에서는 민주당이 어버이날과 함께 한글날을 공휴일로 지정하는 내용의 공휴일에 관한 법률을 발의했다. 2012년 11월 7일 한글날을 다시 공휴일으로 지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관련 규정의 일부 개정안이 입법 예고되고, 법률 절차를 거쳐 2012년 12월 24일, 국무회의에서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 일부 개정령안이 통과됨에 따라, 2012년 12월 28일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이 개정되면서, 한글날은 다시 공휴일로 지정되었으며, 2013년부터 매년 10월 9일 한글날은 공휴일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아래와 같은 법률 및 시행령으로 한글날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그외에 다른 한글 진흥을 위한 부분은 국어기본법 및 시행령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에서 주관하여 진행하고 있다. 2005년에 국어기본법과 국어기본법 시행령을 제정하여 한글날 기념 부분을 법률화하고, 2006년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을 개정해서 한글날 관련 별표가 삭제되었다. 이전에는〈각종기념일등에관한규정〉에 따라 한글날에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주관하여 “세종대왕의 성덕과 위업을 추모하고 한글의 우수성을 선양하기 위한 행사를 한다”라고 되어 있었다. 한글 훈민정음 국립국어원 한국어 한글날의 유래와 변천 - 새국어 소식 1998년 제3호 분류:대한민국의 국경일 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념일 분류:대한민국의 공휴일 분류:한글 분류:10월의 기념일 분류:1월의 기념일 분류:10월 9일 분류:1월 15일 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휴일
그래픽 소프트웨어 ()는 컴퓨터 그래픽에서 사람이 이미지나 모델을 시각적으로(visually) 조작할 수 있게 해주는 프로그램 또는 프로그램 모음을 의미한다. 화상 편집 소프트웨어 라고도 한다. 크게 공간에 따라 3차원(입체)과 2차원(평면)으로 나뉘며, 좌표 설정 방식에 따라 벡터방식과 래스터(픽셀) 방식으로 나뉜다. 슈퍼페인트(SuperPaint, 1973년 4월)가 최초의 그래픽 응용 소프트웨어 가운데 하나이다. Fauve Matisse(이후 매크로미디어 xRes로 명칭 변경)는 1990년대 초에 선구적인 프로그램이었으며, 고객 소프트웨어 내에 레이어 개념을 도입하였다. 현재 미국에서는 어도비 포토샵이 가장 흔히 사용되고 가장 잘 알려진 그래픽 프로그램들 가운데 하나이다. 코렐드로는 유럽에서 어도비 보다 더 강력한 사용자 기반을 보유하고 있다. GIMP는 어도비 포토샵을 대체하는 대중적인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이다. 어도비 포토샵 페인트샵 프로 코렐 페인터 김프 ACDSee 어피니티 포토 어도비 일러스트레이터 어도비 플래시 코렐 드로우 잉크스케이프 어피니티 디자이너 오토캐드 3D 스튜디오 맥스 마야 라이트웨이브 소프트 이미지 XSI 스케치업 ZBrush 블렌더 스크라이버스 페이지메이커 분류:응용 소프트웨어 분류:컴퓨터 그래픽스
튜링 기계의 작동 방식을 묘사하는 그림 이론 전산학에서, 튜링 기계 ()는 긴 테이프에 쓰여있는 여러 가지 기호들을 일정한 규칙에 따라 바꾸는 기계이다. 상당히 간단해 보이지만 이 기계는 적당한 규칙과 기호를 입력한다면 일반적인 컴퓨터의 알고리즘을 수행할 수 있으며 컴퓨터 CPU의 기능을 설명하는데 상당히 유용하다. 1936년 앨런 튜링은 계산하는 기계를 대표할 수 있는 가상의 장치를 만들었고 이 장치에 영어 단어인 automatic의 a를 따서 "a-기계"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기계가 바로 나중에 창시자인 앨런 튜링의 이름을 따서 튜링 기계라 불리게 되었다. 1948년 "똑똑한 기계"라는 글에서 앨런 튜링은 자신의 "a-기계"를 간결히 정의하였다. 1936년 논문 "계산 가능한 수와 결정성 문제에의 응용"을 언급하며 튜링기계(이 글에서는 논리적 계산 기계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튜링 기계는 수학적 모형의 일종으로, 특수한 테이프를 기반으로 작동하는 기계이다. 튜링 기계가 사용하는 테이프 위에는 테이프 머릿기호를 바탕으로 기계가 인식하거나 기록할 수 있는 기호들이 있다. 작동 방식은, “42번째 상태에서 0이라는 기호가 있다면 1을 쓴다. 1이라는 기호가 있다면 17번째 상태로 간다. 17번째 상태에서 0이라는 기호가 있다면 1을 쓰고, 1이라는 기호가 있다면 6번째 상태로 간다”와 같이 유한한 개수의 기초적 지시문으로 이루어진다. 원문(“계산가능수와 결정문제에 대한 응용에 관하여On computable numbers, with an application to the Entscheidungsproblem”)에 따르면 튜링이 상상한 것은 이러한 연산을 특출하게 수행할 수 있는 "컴퓨터"라 불릴 사람이었다.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튜링 기계는 다음과 같은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다. # 테이프 테이프는 서로 연속한 단위 구간들로 나뉜다. 각각의 구간은 알파벳을 가지고, 특정 알파벳은 비어있음을 나타낸다. 테이프는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임의적으로 확장될 수 있으며, 한번도 쓰이지 않은 구간은 비어있다는 기호로 표시된다. 어떤 테이프는 왼쪽을 고정시키고 오른쪽을 무한히 확장시키는 반직선의 형태로 되어있다. # 머리 기계가 머리를 읽으면 테이프를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한 칸 (오직 한 칸만) 이동시키는 역할을 한다. 다른 모델에서는 머리가 움직이고 테이프가 고정되기도 한다. # 상태 기록기 는 튜링 기계의 유한히 많은 상태 중 하나를 기록한다. ‘개시 상태’는 상태 기록기를 초기화시키는 특별한 상태이다. # 유한한 표 (또는 행동표) 는 특정한 상태(qi)에 있는 기계가 어떠한 기호(aj)를 읽을 때 해야 할 행동을 다음과 같이 지시한다(5튜플). ## 기호를 지우거나 적고 (aj를 aj1으로 치환) ## 머리를 옮긴다 (‘L’은 왼쪽으로 한 칸 가는 것을, ‘R’은 오른쪽으로 한 칸 가는 것을, ‘N’은 정지하고 같은 자리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 그리고 같은 상태나 새로운 상태로 간다 (qi에서 qi1으로) 튜링 기계가 가진 기호와 상태, 그리고 행동은 모두 유한하고 이산적이며, 구분 가능하다. 호프크로프트와 일맨은 7투플의 단일 테이프 튜링 기계를 로 정의했다. 각 변수들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는 유한하고 비어있지 않은 상태들의 집합 *는 유한하고 비어있지 않은 기호와 알파벳들의 집합 *는 비어있음을 알려주는 기호 (테이프 위에서 유일하게 무한하게 나타날 수 있는 기호) *는 입력가능한 기호들의 집합 *는 초기상태 *는 최종상태, 또는 수락 상태 *는 부분함수 이 정의를 바탕으로 작동하는 모든 것은 튜링 기계라고 불린다. ===튜링 기계를 실행하거나 실체화하기 위해 필요한 추가적인 요소=== 반 엠데 보아스(1990)에 따르면, “7투플의 이론적 구상은 기계의 행동과 계산의 극히 단적인 부분밖에 보여주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예를 들면, 기호들을 실제로 결정하는 데 많은 과정이 소모될 것이다.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이동시키는 동작은 머리가 테이프 위에서 이동하게 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튜링 기계를 만들 때 테이프가 머리 아래에서 왔다 갔다 하게 만드는 것이 더 현실적이다. 테이프는 유한하지만 필요한 만큼 비어있는 상태로 확장될 수 있다. 하지만 오히려 테이프가 무한하게 확장될 수 있고 유한한 분열의 머리가 채워져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정의들은 설명을 위해 조금씩 다르게 표현되지만, 항상 같은 계산력을 가지도록 유도된다. 예를 들어, 집합 를 로 바꾸는 연산은 기계의 계산력을 높여주지 않는다. 가장 일반적인 정의는 튜링 기계의 지시를 튜링표로 표현한 것이다. 이것은 9개의 5투플로 구성되어 있다. (튜링(1936), 해독불가능에 대해서, p. 126-127과 데이비스(2000) p. 152) (정의 1) (qj, Sj, Sk/E/N, L/R/N, qm) : ( 현재의 상태 qj, 읽혀진 기호 Sj, 쓰이는 기호 Sk/ 지우기 E/ 아무것도 하지 않음 N, 한 칸 왼쪽으로 이동 L/ 오른쪽으로 이동 R/ 움직이지 않음 N, 새로운 상태 qm) 다른 저자들 (민스키(1967), p. 119, 호프크로프트와 일맨 (1979) p. 158, 스톤 (1972) p. 9)은 새로운상태 qm이 읽혀진 기호 Sj의 바로 뒤에 위치하게 함으로써 다른 정의를 취했다. (정의 2) (qj, Sj, qm, Sk/E/N, L/R/N) : ( 현재의 상태 qi, 읽혀진 기호 Sj, 새로운 상태 qm, 쓰이는 기호 Sk/ 지우기 E/ 아무것도 하지 않음 N, 한 칸 왼쪽으로 이동 L/ 오른쪽으로 이동 R/ 움직이지 않음 N) 이 글의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정의 1” (튜링/데이비스 정의)를 사용할 것이다. 예시 3-상태 2-기호의 아주 바쁜 기계를 5투플로 표현한 상태표 현재 상태 읽혀진 기호 쓰이는 기호 이동 종류 최종(다음) 상태 5투플 표현 A 0 1 R B ( A , 0, 1, R, B ) 1 1 L C ( A , 1, 1, L, C ) B 0 1 L A ( B , 0, 1, L, A ) 1 1 R B ( B , 1, 1, R, B ) C 0 1 L B ( C , 0, 1, L, B ) 1 1 N H ( C , 1, 1, N, H ) 다음 표에서 볼 수 있듯이, 튜링의 본래 모델은 N1, N2, N3라고 불리는 세 가지의 행동만을 허용했다. 예를 들어, 읽혀진 구간의 지우기를 0번째 기호인 S0=”지움” 또는 “비어있음” 등으로 표현하는 것은 허용했으나 아무것도 쓰지 않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행동에는 “기호 Sk를 인쇄한다” 또는 “지운다”라는 명령이 포함되어 있었다. 약어들은 튜링이 만든 것인데, 튜링의 원문이 나온 이후 기계 모델은 9가지의 5투플을 포함하고 있다. 현재 m-배형(튜링 상태) 테이프 기호 인쇄 테이프 행동 최종 m-배형(튜링 상태) 5투플 5투플 주석 4투플 N1 qi Sj Print(Sk) Left L qm (qi, Sj, Sk, L, qm) "blank" S1, etc. N2 qi Sj Print(Sk) Right R qm (qi, Sj, Sk, R, qm) "blank" S1, etc. N3 qi Sj Print(Sk) None N qm (qi, Sj, Sk, N, qm) "blank" S1, etc. (qi, Sj, Sk, qm) 4 qi Sj None N Left L qm (qi, Sj, N, L, qm) (qi, Sj, L, qm) 5 qi Sj None N Right R qm (qi, Sj, N, R, qm) (qi, Sj, R, qm) 6 qi Sj None N None N qm (qi, Sj, N, N, qm) Direct "jump" (qi, Sj, N, qm) 7 qi Sj Erase Left L qm (qi, Sj, E, L, qm) 8 qi Sj Erase Right R qm (qi, Sj, E, R, qm) 9 qi Sj Erase None N qm (qi, Sj, E, N, qm) (qi, Sj, E, qm) 어떠한 종류의 튜링표도 위의 아홉 개의 5투플로부터 조합될 수 있다. 기술적인 이유로 세 개의 “N” 지시는 무시되기도 한다. 반면, 4투플은 잘 사용되지 않는다. 이들은 튜링 지시를 단순화할 때 사용된다. 튜링 기계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상태라는 말은 두 가지의 뜻을 가진다. 대부분의 경우는 현재 지시의 이름이나 내용을 뜻한다(상태 기록기에 저장된 정보). 하지만 튜링 (1936)은 계산과정 상에서 기계의 m배열과 기계의 진행 상태를 확실하게 구분했다. 튜링이 “상태식”이라 표현했던 것은 현재의 지시와 테이프 상의 모든 기호들을 포함한다. 3-상태 아주 바쁜 기계의 상태표 (“P”=1을 인쇄하거나 씀) 테이프 기호 현재 상태 A 현재 상태 B 현재 상태 C 쓰이는 기호 테이프 이동 다음 상태 쓰이는 기호 테이프 이동 다음 상태 쓰이는 기호 테이프 이동 다음 상태 0 P R B P L A P L B 1 P L C P R B P R HALT diagram 3 state busy beaver 2B.svg|섬네일|500px|right|3-상태 아주 바쁜 기계의 튜링 기계를 유한 오토마타에 입각해 표현해본 것. 각각의 원은 표의 상태를 나타내고, m배열, 지시, 또는 명령은 화살표로 표현된다. 화살표 위의 표식은 특정한 변화를 야기하는 ‘읽히는 기호’를 결정하고 슬래쉬 뒤의 동작은 따라오는 행동을 의미한다. 이 정의는 맥클럭시(1965), 부스(1967), 힐 그리고 피터슨에 의해 보여졌다. 이러한 모식도들은 일련의 계산 궤적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순간을 포착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아주 바쁜 기계는 작동하는 동안 항상 동일한 궤적을 따라 진행하지만 다른 유사한 기계의 경우에는 아닐 수도 있다. 단순한 범용 튜링 기계보다 더 높은 계산능력을 지니고 있는 기계가 존재할 것이라는 주장이 있었지만, 그러한 가상 기계들은 결국 범용 튜링 기계와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홉크로프트와 울만, p. 159, cf Minsky(1967)). 그 기계들이 더 높은 속도와 적은 저장 공간을 가질지언정, 범용 튜링 기계보다 더 많은 수학적 함수들을 계산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처치-튜링 명제는 모든 기계가 이러한 법칙을 따를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모든 계산 가능한 문제는 튜링 기계로 계산할 수 있으며, 그 역 역시 성립한다는 의미이다.) 몇 개의 다른 모델들도 튜링 기계와 동일한 계산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중에는 다중 테이프 튜링 기계, 다중 트랙 튜링 기계, 입력과 출력이 있는 튜링 기계, 비결정론적 튜링 기계등이 있다. 튜링은 미결정성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지금은 이 발견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당시(1936)로서는 정말 놀라운 발견이었다. 일부 학자들은 튜링이 범용 기계(Universal Machine)"이라고 부른 이 계산 모델이 프로그램 내장식 컴퓨터를 위한 기초적인 이론적 해결책을 제시했다고 생각한다. 계산복잡도의 측면에서 보면 다중테이프 튜링 기계는 이 기계가 시뮬레이트하는 기계에 비해 로그 인수만큼 느려야 한다. 이 결과는 1966년에 F.C. 헨리와 R.E. 스턴에의해 얻어졌다.(아오라와 바락, 2009, 정리 1.9) 흔히들 튜링 기계는 다른 오토마타와 다르게 실제 기계만큼 강력하고 실제 프로그램이 할 수 있는 연산을 모두 실행할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 간과하고 있는 사실은 실제 기계는 유한개의 배형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이 "실제 기계"는 선형 구속 오토마타에 그친다. 그에 비해 튜링 기계는 연산을 위한 무한한 저장 공간을 가진 기계이다. 튜링 기계는 컴퓨터를 모델링한 것이 아니라 연산 자체를 모델링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고정된 내부 저장장치를 이용해 연산하는 컴퓨터는 튜링 기계보다 훨씬 나중에 개발되었다. 튜링 기계는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 실제 컴퓨터의 모형으로서 상당히 유용하다. #실제 컴퓨터가 연산할 수 있다면 튜링 기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렇기에 튜링 기계의 한계는 곧 실제 컴퓨터에도 적용된다. #실제 컴퓨터와 튜링 기계의 차이점은 처리할 수 있는 데이터의 양이다. 튜링 기계의 경우 무한한 양의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으나, 실제 컴퓨터가 처리할 수 있는 데이터의 양은 유한하다. 하지만 유한한 시간에서는 튜링 기계도 실제 기계처럼 유한한 양의 데이터만 조작 가능하다. #튜링 기계처럼 실제 기계도 하드 디스크와 같은 기타 저장 매체들을 이용해 저장 공간을 확장시킬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저장 매체들이 구하기 힘들어진다면 튜링 기계와 실제 기계의 격차는 벌어질 것이다. 하지만 연산들이 실패하는 이유는 대부분 저장 공간의 작은 크기가 아닌 느린 연산 속도이다. #실제 기계를 설명할 때 더 단순하고 추상적인 모델을 사용한 실제 설명보다 튜링 기계를 이용한 설명이 더욱 간단하다. 만약 튜링 기계가 하나의 알고리즘을 설명하는데 몇 백개 정도의 상태가 필요하다면 같은 설명을 하는데 결정적 유한 오토마타는 수 천조의 상태가 필요하다. #튜링 기계는 얼마나 많은 메모리를 사용하는지에 관계없이 알고리즘을 설명할 수 있다. 튜링 기계는 실제 기계의 발전과 전혀 관계 없이 알고리즘에 대한 이론적인 설명이 가능하다. #튜링 기계는 알고리즘의 설명을 간단케 한다. 튜링 동치인 추상적 기계를 사용하여 알고리즘을 실행하는 것은 실제 기계보다 훨씬 일반적이다. 실제 기계에는 메모리 공간 부족과 같은 특수한 상황이 존재하며 또 자료의 종류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튜링 기계도 어떤 경우에는 실제 프로그램에 대한 좋지 못한 모델이 될 수 있다. 운영 체제나 워드 프로세서 같은 경우에는 시간에 따라 무한한 입력을 받을 수 있어야 하는데 튜링 기계는 그러한 무한한 연산의 경우 모델링이 힘들다.(그렇지만 역시 부분적인 과정들은 모델링할 수 있다.) 튜링 기계의 한계는 일부 배열들의 능력을 잘 모델링하지 못한다. 현대의 저장 프로그램 컴퓨터들은 추상적인 랜덤 접근 저장 프로그램 기계(Random Access Store Program Machine, RASP machine)들의 실질적인 예이다. 범용 튜링 기계와 같이 RASP는 무한개의 구분 가능한, 동시에 셀 수 있지만 무한한 레지스터(정수를 하나 저장할 수 있는 메모리 공간)를 가지고 있다. RASP의 유한 상태 기계는 하나의 레지스터가 다른 레지스터의 주소를 포함 하는 등 간접적으로 주소를 저장하는 것이 가능하다. 따라서 RASP의 프로그램은 레지스터 배열에 있는 다른 레지스터를 호출하는 것이 가능하다. 메모리 인덱스를 이용한 연산의 최적화가 튜링 기계에서는 불가능하므로 튜링 기계로 모델링 할 때 일부 알고리즘에 대해서는 시간복잡도의 잘못된 하한을 줄 수 있다. 예를 들어 이진 검색 알고리즘의 경우 튜링 기계 모델보단 RASP 모델로 훨씬 더 빠르게 연산이 가능하다. 앨런 튜링(1912-1954)의 제자이자 평생의 친구인 로빈 간디(1919-1995)는 계산 기계(calculatng machine) 의 관념의 기원을 배비지에서 찾았으며 실제로 배비지 이론을 제안했다. 간디는 배비지의 해석 기관을 다섯 개의 연산으로 묘사했다. #산술적 함수 +, -, × (이 때의 -는 y≥0 일 때 x-y=0이 되는 적절한 뺄셈이다.) #그 어떤 일련의 연산도 하나의 연산으로 표현될 수 있다. #반복 (연산 P를 n번 반복) #조건부 반복 (시험 T가 성공한다는 조건 하에 연산 P를 n번 반복) #조건부 이동 (결과값에 따라 계산 순서가 변경) 간디는 1, 2, 4에 의해 계산될 수 있는 함수를 계산 가능한 함수로 정의했다. 1900년 수학자 다비트 힐베르트가 제안한 힐베르트의 문제들 중 열 번째 문제는 그 개념이 정립되기 이전에 거의 30년 가까이 해결되지 않은 채 부유했다. 힐베르트의 열 번째 문제는 다음과 같다. :10. 디오판토스 방정식의 풀이 가능성을 결정하라.임의의 주어진 디오판토스 방정식의 정수해를 유한한 연산을 통해 얻어낼 수 있는가? 1928년 힐베르트는 다음의 세 물음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좀 더 엄밀하게 만들었다. #수학은 완전한가? #수학은 모순을 포함하지 않는가? #수학은 결정 가능한가? 첫 번째와 두 번째 문제는 1930년 쿠르트 괴델에 의해 해결되었으나, 세 번째 문제는 1930년대 중반까지 해결되지 않았다. 1935년 봄, 케임브리지 킹스 칼리지의 젊은 박사 과정 학생이었던 튜링은 한 과제에 직면했다. 그는 논리학자 뉴먼의 강의에 자극을 받았으며, 결정 문제에 대한 괴델의 연구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뉴먼은 기계적 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으며, 1955년 튜링의 부고에 뉴먼은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튜링은 그의 일생동안 기계에 대한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아래에도 나와있지만, 튜링은 그의 박사후과정 동안 불 논리 곱셈 기계를 만들었다. 그의 박사후과정 논문인 Systems of Logic Based on Ordinals 는 계산 가능한 함수에 대한 다음의 정의를 담고 있다. 튜링이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독일의 암호 기계인 에니그마 the Enigma 를 해독하기 위한 방법을 구상하는 것에 참여했다. 그는 ACE(Automatic Computing Engine)의 개발에 참여하기도 했다. ===1937-1970 디지털 컴퓨터, 그리고 컴퓨터 과학의 탄생=== 1937년, 그의 박사후 과정을 위해 프린스턴에서 연구하는 동안 튜링은 전기-기계식 릴레이를 이용해 디지털(Boolean-logic) 곱셈 기계를 만들었다. 튜링의 발명은 단순한 호기심과 실험 정신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같은 방향을 향하는 연구들이 독일과 미국에서 행해지고 있었으며, 그러한 노력의 결과물은 2차 세계 대전 동안 연합국과 주축국의 군사 활동에 사용되었다. 1950년대 중반 하오 왕과 마빈 민스키는 튜링 기계를 좀 더 간단한 형태로 바꾸었다. 동시에 유럽의 연구자들은 최신식의 전자 컴퓨터를 현재의 튜링 기계인 컴퓨터와 같은 이론적 오브젝트 로 환원시켜 생각했다.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초반에 멜자크와 레벡(1961), 민스키(1961), 셰퍼슨과 스터기스(1961) 등의 유럽 연구자들은 일련의 연구들을 통해 튜링 기계를 좀 더 친숙하고 컴퓨터와 같은 셈 기계 counter machine 로 만들었다. 이후 1970년대 초반에는 엘곳과 로빈슨(1964), 할트마니스(1971), 쿡과 렉하우(1973) 등은 이 연구를 진척시켜 기록 기계 register machine 와 RAM의 모델로 발전시켰다. 오늘날의 셈 기계, 기록 기계, 그리고 RAM은 그 근간을 튜링 기계에 두고 있으며, 수많은 연구자들은 계산 이론을 풀어나가는 데에 있어서 튜링 기계를 사용한다. 특히 계산 복잡도 이론의 경우 튜링 기계의 사용이 필수적이다. 확률적 튜링 기계 양자 튜링 기계 교대 튜링 기계 범용 튜링 기계(UTM, Universal Turing machine) B. Jack Copeland ed. (2004), The Essential Turing Seminal Writings in Computing, Logic, Philosophy, Artificial Intelligence, and Artificial Life plus The Secrets of Enigma, Clarendon Press (Oxford University Press), Oxford UK, . Contains the Turing papers plus a draft letter to Emil Post re his criticism of "Turing s convention", and Donald W. Davies Corrections to Turing s Universal Computing Machine 마틴 데이비스 (ed.) (1965), 해독불가능에 대해서 , Raven Press, Hewlett, NY. 에밀 포스트 (1936), "Finite Combinatory Processes—Formulation 1", Journal of Symbolic Logic , 1, 103–105, 1936. 해독불가능에 대해서 에 재출판됨. pp. 289ff. 에밀 포스트 (1947), "Recursive Unsolvability of a Problem of Thue", Journal of Symbolic Logic , vol. 12, pp. 1–11. 해독불가능에 대해서 재출판됨. pp. 293ff. In the Appendix of this paper Post comments on and gives corrections to Turing s paper of 1936–1937. In particular see the footnotes 11 with corrections to the universal computing machine coding and footnote 14 with comments on Turing s first and second proofs. (and ). Reprinted in many collections, e.g. in 해독불가능에 대해서 pp. 115–154; available on the web in many places, e.g. at Scribd. 앨런 튜링, 1948, "Intelligent Machinery." Reprinted in "Cybernetics Key Papers." Ed. C.R. Evans and A.D.J. Robertson. Baltimore University Park Press, 1968. p. 31. F. C. Hennie and R. E. Stearns. Two-tape simulation of multitape Turing machines . JACM, 13(4):533–546, 1966. Some parts have been significantly rewritten by Burgess. Presentation of Turing machines in context of Lambek "abacus machines" (cf Register machine) and recursive functions, showing their equivalence. 테일러 L. 부스 (1967), Sequential Machines and Automata Theory , John Wiley and Sons, Inc., New York. 공대 졸업생 수준의 책. 넓은 범위의 주제를 다루며 9장 튜링 기계 는 재귀 이론에 대해서 조금 다루고 있다. . On pages 12–20 he gives examples of 5-tuple tables for Addition, The Successor Function, Subtraction (x ≥ y), Proper Subtraction (0 if x < y), The Identity Function and various identity functions, and Multiplication. . On pages 90–103 Hennie discusses the UTM with examples and flow-charts, but no actual code . A difficult book. Centered around the issues of machine-interpretation of "languages", NP-completeness, etc. Distinctly different and less intimidating than the first edition. Stephen Kleene (1952), Introduction to Metamathematics , North–Holland Publishing Company, Amsterdam Netherlands, 10th impression (with corrections of 6th reprint 1971). Graduate level text; most of Chapter XIII Computable functions is on Turing machine proofs of computability of recursive functions, etc. . With reference to the role of Turing machines in the development of computation (both hardware and software) see 1.4.5 History and Bibliography pp. 225ff and 2.6 History and Bibliography pp. 456ff. *Zohar Manna, 1974, Mathematical Theory of Computation . Reprinted, Dover, 2003. 마빈 민스키, Computation Finite and Infinite Machines , Prentice–Hall, Inc., N.J., 1967. See Chapter 8, Section 8.2 "Unsolvability of the Halting Problem." 초보자도 읽을만 하며 재밌는 부분도 있다. Chapter 2 Turing machines, pp. 19–56. Chapter 3 The Church–Turing Thesis, pp. 125–149. Peter van Emde Boas 1990, Machine Models and Simulations , pp. 3–66, in Jan van Leeuwen, ed., Handbook of Theoretical Computer Science, Volume A Algorithms and Complexity , The MIT Press/Elsevier, place?, (Volume A). QA76.H279 1990. Valuable survey, with 141 references. Rogozhin, Yurii, 1998, " A Universal Turing Machine with 22 States and 2 Symbols", Romanian Journal Of Information Science and Technology , 1(3), 259–265, 1998. (surveys known results about small universal Turing machines) Stephen Wolfram, 2002, A New Kind of Science , Wolfram Media, Brunfiel, Geoff, Student snags maths prize, Nature , October 24. 2007. Jim Giles (2007), Simplest universal computer wins student $25,000, New Scientist, October 24, 2007. Alex Smith, Universality of Wolfram’s 2, 3 Turing Machine, Submission for the Wolfram 2, 3 Turing Machine Research Prize. Vaughan Pratt, 2007, " Simple Turing machines, Universality, Encodings, etc.", FOM email list. October 29, 2007. 마틴 데이비스, 2007, " Smallest universal machine", and Definition of universal Turing machine FOM email list. October 26–27, 2007. Alasdair Urquhart, 2007 " Smallest universal machine", FOM email list. October 26, 2007. Hector Zenil (Wolfram Research), 2007 " smallest universal machine", FOM email list. October 29, 2007. Todd Rowland, 2007, " Confusion on FOM", Wolfram Science message board, October 30, 2007. 로빈 간디, "The Confluence of Ideas in 1936", pp. 51–102 in Rolf Herken, see below. 스티븐 호킹 (editor), 2005, God Created the Integers The Mathematical Breakthroughs that Changed History , Running Press, Philadelphia, . Includes Turing s 1936–1937 paper, with brief commentary and biography of Turing as written by Hawking. 앤드류 호지스, Alan Turing The Enigma , Simon and Schuster, New York. Cf Chapter "The Spirit of Truth" for a history leading to, and a discussion of, his proof. Hao Wang, "A variant to Turing s theory of computing machines", Journal of the Association for Computing Machinery (JACM) 4, 63–92 (1957). Charles Petzold, Petzold, Charles, The Annotated Turing , John Wiley & Sons, Inc., Arora, Sanjeev; Barak, Boaz, "Complexity Theory A Modern Approach",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9, , section 1.4, "Machines as strings and the universal Turing machine" and 1.7, "Proof of theorem 1.9" *Isaiah Pinchas Kantorovitz, "A note on turing machine computability of rule driven systems", ACM SIGACT News December 2005. Turing Machine on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Detailed info on the Church–Turing Hypothesis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Turing Machine-Like Models in Molecular Biology, to understand life mechanisms with a DNA-tape processor. The Turing machine—Summary about the Turing machine, its functionality and historical facts The Wolfram 2,3 Turing Machine Research Prize—Stephen Wolfram s $25,000 prize for the proof or disproof of the universality of the potentially smallest universal Turing Machine. The contest has ended, with the proof affirming the machine s universality. " Turing Machine Causal Networks" by Enrique Zeleny, Wolfram Demonstrations Project. Purely mechanical Turing Machine 분류:이론 전산학 분류:앨런 튜링 분류:계산 모형 분류:정형 기법 분류:계산 가능성 이론 분류:잉글랜드의 발명품 분류:오토마타 이론 분류:형식 언어
글꼴 은 컴퓨터로 보는 글자들의 모양새 또는 그 전자적 데이터 파일을 뜻한다. 크게 비트맵 방식과 벡터, 그리고 스트로크 방식으로 나눌 수 있다. 비트맵 방식의 글꼴 크기가 고정된 점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처리 속도가 빠르지만, 정해진 크기에서만 제대로 보이며 확대시키면 획의 둥근 부분이 마치 계단처럼 보인다. 외곽선 방식의 글꼴 벡터 방식이라고도 하며 크기를 변화시켜도 깨지지 않지만, 선을 그리는 데에 처리 시간이 조금 더 걸린다. 스트로크 (stroke) 글꼴은 일련의 지정된 선과 부가 정보를 사용하여 특정한 모양의 선의 프로파일, 크기, 모양을 정의한다. 과거 운영 체제에서 사용되는 사용자 인터페이스 글꼴은 벡터 방식에 비트맵 글꼴을 임베딩(추가)하여 넣는 방식을 이용하였다. 이는 비트맵 글꼴만으로는 축소, 확대, 출력에 문제가 있어(일반적으로는 확대축소가 가능한 비트맵 정보를 넣지 않기 때문에 실제 글꼴 규격에는 확대, 축소가 가능한 비트맵 정보를 넣을 수 있다.) 벡터 방식을 같이 이용하는 것이다. 비트맵 방식은 화면에서 해당 비트맵 그대로 보이는 반면, 벡터 방식은 아웃라인이 화면에 표현되면서 왜곡이 발생하게 되고 원치 않는 형태로 깨져보이는 경우가 생기게 되어 있다. 이런 이유로, 특정 크기에 맞추어 비트맵 디자인을 한 후, 벡터 방식에 임베딩하는 방식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 글꼴을 글자들의 너비 변화에 따라 고정폭 글꼴과 가변폭 글꼴로 나눌 수 있다. 고정폭 글꼴 글자에 상관 없이 일정한 너비를 할당한다. * 한글 글꼴의 경우 한글 글자의 폭은 사실 영문 글자의 폭의 두배를 차지한다. 가변폭 글꼴 글자에 따라 변화된 너비를 할당한다. * 넓은 너비 W와 같은 글자에는 넓은 너비를 할당한다. * 좁은 너비 i와 같은 글자에는 좁은 너비를 할당한다. 좀 더 세밀하게 모습을 조정하기 위해서 여러 방법이 도입되었는데, 이를테면 VA 와 같이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커닝(자간 여백)이 많은 경우 폰트 자체에 커닝 문자 쌍의 정보가 있거나 수동으로 커닝을 직접 지정해 주는 방법 등을 사용하기도 한다. 문자들에 따라서 가변폭 글꼴을 많이 쓰지 않거나 아예 쓰기 힘든 경우도 자주 있다. 이를테면, 한자는 가변폭 글꼴을 만들기 힘들며, 그 영향으로 가나나 한글 글꼴도 고정폭인 경우가 많다. 글꼴은 컴퓨터에서 표시될때에 여러가지 속성 설정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타이포그래피 디자인에서는 다음과 같은 요소가 있다. 크기 글꼴의 크기는 포인트(point) 단위를 쓴다 보통 컴퓨터 글꼴에서는 9~12포인트를 많이 쓰며 6포인트 이하의 글꼴은 대단히 알아보기 힘들어 질 수 있다. 정렬 오른쪽 줄맞춤, 왼쪽 줄맞춤, 양쪽 줄맞춤, 가운데 줄맞춤을 주로 사용한다. 과부와 고아 어떤 단어가 문장에서 혼자 따로 떨어져서 표시되면 과부(widow)라고 하고 문단의 시작에 떨어져있으면 고아(orphan)이라고 한다. 줄길이 문단의 줄길이는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은 과유불급의 원칙을 따른다. 레딩(leading) 행간 혹은 줄 사이의 수직적 공간을 말한다. 보통 글꼴 크기의 20% 정도 크게 한다. 너무 붙어 있거나 떨어져 있으면 읽기 힘들어진다. 커닝(kerning) 글자간, 자간은 글자간의 수평적 공간을 말한다. 보통은 글자들을 충분히 나타낼만한 크기여야한다. 타입 1, 타입 3 글꼴은 어도비사가 전문 디지털 타이프세팅을 위하여 개발한 것이다. 포스트스크립트를 사용하면 입방 베지에 곡선의 외곽선 글꼴이 된다. 타입 1 글꼴은 포스트스크립트 언어의 부분집합에 제한을 받으며 어도비의 힌팅 시스템을 사용하여 매우 광범위하게 쓰였다. 타입 3 글꼴은 포스트스크립트 언어의 무제한적 사용을 허용하지만 힌팅 정보가 포함되어 있지 않아 저해상도의 기기 (도트 매트릭스 프린터와 컴퓨터 화면)에서 깨지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오픈타입은 어도비와 마이크로소프트가 설계한 스마트폰트 시스템이다. 오픈타입 글꼴은 넓은 범위의 메타데이터를 곁들여 트루타입이나 타입 1 (실제로 CFF) 포맷의 외곽선을 포함하고 있다. 트루타입은 애플이 개발한 글꼴 체제이다. 타입 1 글꼴을 대체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타입 1 글꼴과 달리 트루타입은 베지에 곡선으로 그려진다. 현재에 이르러 널리 쓰이고 있으며 모든 주요 운영 체제에 적용되고 있다. 메타폰트(METAFONT)는 다른 종류의 글꼴이다. 트루타입과 달리 벡터 글꼴의 체제를 갖추었다. 웹 폰트는 동적 폰트(dynamic font)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동적 폰트는 글꼴이 사용자의 컴퓨터에 설치되어 있지 않아도 볼 수 있거나 사용할 수 있도록 제안된 개념이며, 일반적으로 웹 폰트와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다. 웹 폰트의 포맷은 비트스트림의 .pfr 형식과 마이크로소프트의 .eot 형식, 이렇게 2가지가 있었다. 하지만, .pfr은 넷스케이프와 모질라까지 지원하고 파일 형식을 공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쓰이지 않고 있다. 반면, .eot는 마이크로소프트의 특정 버전 이상의 인터넷 익스플로러에서만 지원되고 파일 형식은 공개되지 않아 다른 웹 브라우저에서는 사용하지 못한다. .eot 형식은 MS의 WEFT 응용 프로그램을 이용해 제작할 수 있으며, 웹폰트가 사용될 사이트의 URL(인터넷 주소)을 넣을 수 있어 해당 URL이 아니면 사용할 수 없어 불법 사용 또한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다. 웹 폰트가 사용된 웹페이지에 접속하면, 웹 브라우저에서 웹폰트를 접속자의 컴퓨터에 자동으로 내려받아 해당 웹페이지를 웹폰트로 보여준다. 따라서 웹폰트의 파일 용량이 크면 클수록 내려 받는 데 시간이 더 걸리게 되고, 실제 웹페이지가 웹 폰트로 대체되어 표시되는 데에 약간의 시간이 걸린다. 웹 폰트를 쓰는 일부 포털에서는 해당 글꼴이 비트맵 방식이면 출력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 eot와 pfr 말고도 GlyphGate에서 개발한 웹 폰트 형태가 있다. 앤티에일리어싱은 높은 해상도의 신호를 낮은 해상도에서 나타낼 때 생기는 에일리어싱(깨진 패턴)을 최소화하는 방법이다. 수많은 운영 체제와 그래픽 소프트웨어에서 이미 이 기술을 기본 지원하고 있다. 클리어타입은 마이크로소프트에서 개발한 기술로, 액정 화면에서 더욱 깨끗하게 글자를 표시할 수 있는 기술이다. 액정 화면의 한 개 픽셀은 RGB(빨간색, 녹색, 파란색)의 3개의 서브픽셀(sub-pixel)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특징을 최대한 활용한 기술이라 할 수 있다. 반면, 클리어타입은 가로방향으로만 RGB의 서브픽셀을 이용한 안티에일리어싱 효과가 나기 때문에, 세로방향에 대해서는 계단 현상의 느낌이 그대로 나올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클리어타입에 세로방향으로 안티알리아싱 효과를 더한 래스터라이징 기술을 개발하여 발표하였고, 그로 인해, 외곽선의 계단현상이 최소화되어 보다 나은 래스터라이징 효과를 가져오고 있다. 다양한 해상도에서도 정확한 래스터라이징을 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힌팅 정보를 필요로 하는데 거의 모든 상용 한글 글꼴에는 제대로 된 힌팅 정보를 지원하지 않기 때문에 클리어타입의 기술을 이용하더라도 선명성에서 큰 향상은 없는 편이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 비스타, 윈도 7에 기본 글꼴로 사용되는 한글 글꼴 ‘맑은 고딕’은 한글 글꼴의 힌팅 정보를 포함하여 클리어타입 기술이 본격적으로 적용되는 최초의 한글 글꼴이다. 글꼴 목록 *오픈 폰트 라이선스 Font Technologies chapter of the LDP s Font-HOWTO History and technology of computer fonts, Annals of the History of Computing, IEEE, Apr-Jun 1998, Vol. 20, Issue 2, pages 30-34, ISSN 1058-6180. 분류:글꼴 분류:디지털 타이포그래피
proclaiming the establishment of the PRC in 1949.jpg|섬네일|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하는 마오쩌둥(1949년 10월 1일) birthday2.jpg|섬네일|이오시프 스탈린의 생일을 축하하는 중국 공산당 당원들(1949년 12월 18일) et Engels à Shanghai.jpg|섬네일|중화인민공화국 상하이에 위치한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동상 중국공산당 ()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집권 정당으로, 일당 독재 체제로 국가를 통치하는 공산당 가운데 하나이다. 약칭은 중공 ()이다. 중국공산당은 1919년 공산주의 조직의 5·4 운동의 결과로 1921년 7월 상하이에서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 인민민주독재 등의 계급 투쟁 강령을 중심으로 창당되었으며 천두슈, 마오쩌둥, 리다자오, 리다, 마오둔, 덩중샤, 장궈타오, 리한쥔, 위슈쑹 등이 초기 멤버였다. 코민테른의 지도를 받아, 1920년 8월, 상하이에서 천두슈 등이 공산주의 소조를 만들었고, 1920년 10월, 베이징에서 리다자오 등이 공산주의 소조를 만들었으며, 베이징 대학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회로부터 당원의 골간을 이뤘다. 그 이후로, 전국 각지에서 시위와 파업을 주도해가면서, 중화소비에트공화국과 대장정을 거쳐 1949년까지 중화민국에 맞서 도시 노동자, 농민, 하급 지식인, 학생 등을 대거 마오쩌둥 진영에 유입시켰고, 스탈린주의와 신민주주의로 소비에트 연방과의 연대를 강화함으로써 인민민주독재를 여러 방면으로 파급해갔으며, 두 번째 국공 내전에서 중화민국 국군과 싸워 승리하였다. 중국 공산당은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주의를 문화 대혁명에까지 충분히 실행한 후, 덩샤오핑 집권 이후로는, 계급 투쟁의 종결을 공식 선포하고, 개혁과 개방 노선을 취해오고 있으며, 덩샤오핑 이론, 장쩌민 《삼개 대표》로부터는 개혁과 개방 공산당 영도와 경제 건설을 중점적으로 추진하는 등의 정강 정책을 확립하면서, 1992년에는 대한민국과도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중국공산당은 2014년 기준으로 86,700,000명의 당원을 거느릴 정도로 세계에서 가장 큰 정당이다. 중국은 대학생이 공산당 당원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 사례로 베이징 대학 대학생들은 1991년에는 5%, 2009년에는 10%가 공산당 당원으로 입당하였다. 대학생이 공산당 당원으로 입당하는 이유는 공산주의자일 뿐 아니라, 공산당 당원이 됨으로써 좋은 일자리를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공이 국가의 정치와 사회를 통제하는 독재적인 구조와 이데올로기를 지닌 이 정당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정권을 계속 잡고 있다. 덩샤오핑 의 개혁개방 정책과 현대화 이후 상대적으로 자본주의화가 진행되고 있는 현재 상황, 특히 경제적인 영역에서 중국공산당 이외의 인물과 조직의 공식적인 영향력이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최근에 급속하게 발전하고 있는 해안 지역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공산당 및 그 산하 위원회가 모든 중요한 정부 기구들을 장악하고 있고 이들에 대해 정치적인 지침을 내리고 있으므로 비당원들이 중국공산당의 규율에 도전하는 자치기구를 만들지는 못한다. 정부 조직은 물론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중국공산당의 통제력은 굉장히 강력하며 노동조합도 중국공산당에 속해 있다. 1920년 8월 중화민국 상하이에서 코민테른 지도로 중국공산당 창당. 1920년 10월 중화민국 베이징에 공산당 조직 설립. 1920년 10-11월 중화민국 후난성에 공산당 조직 설립. 1921년 7월 1일 제1차 공산당 당대회 개최. 1922년 7월 레닌의 코민테른(공산주의 제3인터내셔널) 정식가입. 1924년-1927년 제1차 국공 합작. 1927년 국공 합작 결렬, 국공 내전 . 1931년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설립. 1934년 장정. 1937년-1945년 제2차 국공 합작으로 중일 전쟁에 중화민국 국군과 참전. 1946년 제2차 국공 내전 시작. 1948년 12월 베이핑 함락. 1949년 3월 난징 함락.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1950년 10월 한국 전쟁에 개입하기 위해 중공군을 파견하여 조선인민군 편에 참전. 1950년-1951년 인민민주독재 개시와 반혁명분자 재판. 1951년-1952년 마오이즘 사상개조운동과 삼반오반운동. 1955년-1957년 반우파운동. 1958년 대약진 운동. 1966년-1976년 문화 대혁명. 1976년-1977년 마오쩌둥의 사망과 화궈펑 체제. 1978년 덩샤오핑의 개혁과 개방 노선, 4대 현대화. 1989년 톈안먼 사건 발발. 1992년 남순강화와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1999년 장쩌민이 파룬궁 인권 탄압시작 2004년 중국공산당 탈당시작 2007년 중국공산당 탈당 2000만명 돌파 2009년 중국공산당 탈당 5000만명 돌파 2011년 중국공산당 탈당 1억명 돌파 2014년 시진핑이 반부패 드라이브 시작 장쩌민 반발 2015년 중국공산당 탈당 2억명 돌파 중국공산당의 조직은 문화 대혁명 기간 동안 극좌경 운동으로 인해 파괴되었다가 덩샤오핑 시대 이후 재건되었다. 이론적으로 중공의 최고 기구는 적어도 5년에 한 번 열리는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이다. 5년마다 한 번씩 중공은 전국대표대회를 연다. 공식적으로 이 대회는 두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 첫째는 당 헌장의 변경을 추인하는 것이고, 둘째는 중앙정치국 상임위원을 선출하는 일이다. 그러고 나면 중앙정치국 상임위원회는 이어서 중앙정치국 위원을 선출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상임위원회와 중앙정치국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당의 전국 대표대회 이전에 이미 정해지며, 전국 대회의 주목적은 앞으로의 몇 년간 중화인민공화국의 방향을 결정지을 당의 정책과 비전을 널리 알리는 것이다. 하위의 당 기구들은 아래와 같다.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중앙정치국 중앙서기처 중앙군사위원회 당 권력의 핵심은 중앙정치국 상임위원회이다. 중앙 정치국 위원과 마찬가지로, 상임위원회 위원을 선출하는 과정은 전국대회와 함께 비공개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당의 공식 기관지인 인민일보를 통해 새로운 권력 구조에 대한 내용이 간접적으로 발표된다. 상임위원회원의 수는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예전에 비해 증가되고 있는 추세이다. 2002년 16대 전국 대표대회 때 위원회의 인원은 9명으로 확대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을 이끌어가는 정치 권력 중 지금까지 설명한 것 이외에 두 가지 주요기관이 더 존재한다. 그중 하나는 형식적인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이며, 나머지 하나는 중국 인민해방군이다. 중국공산당은 당원을 받아들일 때 능력이 검증된 사람만 뽑도록 엄격한 절차를 거친다. 중국공산당은 입당을 희망하는 자에 대해 3년 동안의 헌신과 직장에서의 능력, 타인과의 관계 등을 관찰하며 공산당 당원과 비공산당 당원이 참여하는 회의에서 입당 여부를 검토한다. 공산당원이 된 후에도 1년에 한 번씩 지난 1년 동안의 실적을 판단하는 검증을 받아야 한다. 중국공산당의 정책은 2002년 11월에 열린 제16대 중국공산당 전국 대표대회에서 장쩌민 주석 겸 비서장이 대표적인 정책 변화에 관한 내용을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중화인민공화국은 중국공산당의 통제 아래 있는 "인민의 민주 독재" 상태이지만, 기업가와 자유직업에 종사하는 인민들이 당의 의사결정에 어느 정도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으며 고위 공직자의 부정부패를 막기 위해서 공산당 간부가 자본가와 개인적인 관계를 갖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2008년 중국공산당 제17기 중앙위원회 3차 전체회의에서는 농촌경제 성장을 위한 토지 경작권의 매매허용(토지유동화정책), 통화와 재정정책 규제완화, 경기 부양을 위한 거시 경제정책마련 등의 변화가 있었다. 천두슈(陳獨秀, 1921년-1927년) 샹중파(向忠發, 1928년-1931년) 보구(博古, 1931년-1935년) 장원톈(張聞天, 1935년-1943년) 1대 마오쩌둥(毛澤東, 1945년-1976년) 2대 화궈펑(華國鋒, 1976년-1981년) 3대 후야오방(胡耀邦, 1981년-1982년) 5대 덩샤오핑(邓小平) 6대 자오쯔양(赵紫阳) 7대 장쩌민(江澤民, 1989년-2002년) 8대 후진타오(胡錦濤, 2002년-2012년) 9대 시진핑(習近平, 2012년-) 중국의 정치 중국 공산당의 역사 마오쩌둥 중국 공산당 혁명 근거지 중앙인민방송 인민일보 중국 국민당 미국 민주당 공산당 구평공산당 조선 공산당 소련 공산당 미국 공화당 중국 공산당 뉴스--인민넷 중국 공산당 공식 홈페이지 신화통신 중국 공산당 관련 홈페이지 인민일보 (중국 공산당 공식 기관지) 분류:1921년 설립된 정당 분류:공산주의 정당 분류:사회주의 계열 정당 분류:코민테른 지부 분류:마오이스트 조직 분류:중화민국의 역사 분류:중화인민공화국의 정당 분류: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 분류:중국의 역사 분류:중국의 공산주의 정당 분류:중국의 공산주의
워싱턴 (은 다음을 가리킨다.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1732 ~ 1799)은 미국 초대 대통령이다. 부커 T. 워싱턴(Booker T. Washington, 1856 ~ 1915)은 미국의 교육자이다. 해럴드 워싱턴(Harold Washington, 1922 ~ 1987)의 미국의 정치인이다. 덴절 워싱턴 미국의 영화 배우 겸 감독 워싱턴 어빙 미국의 수필가·소설가 조지 워싱턴 카버 미국의 농학자 코너 워싱턴 퀸스 파크 레인저스와 북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하고 있는 북아일랜드의 축구 선수 케리 워싱턴 미국의 배우 메건 워싱턴 오스트레일리아의 싱어송라이터 론 워싱턴 미국의 야구인 아이제이아 워싱턴 미국의 배우 마사 워싱턴 초대 미국의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의 아내 디나 워싱턴 미국의 가수 디절 워싱턴 미국의 게이 포르노 배우 워싱턴 D.C.(Washington D.C.) 미국의 수도. 워싱턴주(State of Washington) 미국의 주. 워싱턴 (노스캐롤라이나주) 미국의 도시. 워싱턴 (타인 위어주) 영국의 도시. 시티오브선덜랜드 관할. 《워싱턴(Washington)》 2007년 영화
문희준 (文熙晙, 1978년 3월 14일 ~ )은 대한민국의 가수이다. 보이 그룹 H.O.T. ( H igh-five O f T eenagers) 의 리더를 맡았으며, 팀이 해체된 후 솔로 가수로 활동하고 있다. 대표곡으로〈Alone〉, 〈Red & White〉, 〈아낌없이 주는 나무〉, 〈G선상의 아리아〉, 〈전설〉, 〈기억이란 작은 마을〉 등이 있다. 2018년 2월 15일 완전체 전원 재결합을 했다. 서울문정초등학교 졸업 문정중학교 졸업 중산고등학교 졸업 서울예술대학 방송연예학과 전문학사 경기대학교 다중매체영상학과 학사 경기대학교 대학원 영상예술학과 예술학 석사 수료 문희준은 서울특별시 강남구 문정동(현재는 송파구 관할)에서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기타리스트였다. 고등학생 시절에 송파구에서 주로 노란바지를 입고 춤을 추다가, 1996년 H.O.T.의 멤버로 데뷔한다. 한편, H.O.T.로 데뷔하기 전 남성 2인조 그룹 녹색지대 멤버가 될 뻔 했지만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 때문에 불발되었다. 2005년 11월 21일에 논산훈련소에 입소하였으며, 운전병으로 복무하다가 2006년에 연예병사에 지원하여 발탁되었으며 2007년 국군방송(KFN) FM 〈문희준의 Music Talk Show〉의 DJ로 진행을 맡은 바가 있다. 그의 입대는 당시 여러 남성 연예인들이 군복무 기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것과는 대조적으로 비쳤다. 2007년 11월 20일에 전역하였다. 그의 여동생은 동년 12월 1일에 결혼하였다. H.O.T.에서 솔로 데뷔때 부터 남성들을 중심으로한 안티 세력이 생겼다. 문희준에 대한 안티 행위에는 문희준의 음악 실력에 대한 비판도 있었지만, 대개 외모나 와전된 발언을 비하하는 인신 공격 수준의 단순한 비난이었다. 그들은 은어로 10대 열성 소녀팬들을 비하하기 위해 속칭 빠순이라 지칭하였으며, 문희준을 무뇌충(無腦蟲)으로 부르기도 했다. 이때 만들어진 빠순이라는 은어는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으며 심지어 연예 뉴스에서도 자주 찾아볼 수 있는 단어가 되었다. 디시인사이드나 웃긴대학과 같은 커뮤니티 웹사이트에서 속칭 필수요소가 된 문희준을 희화화한 합성사진과 유행어들이 끊임없이 폭발적으로 만들어졌다. 그의 노래 가사 중의 일부를 따온, 뷁과 같은 부정적인 속어도 유행하였다. 한 웹사이트에서 주최한 《2003 최악의 딴따라 워스트 어워드》에서 “최악의 가수 부문” 및 무려 네 개 부문에 후보로 오를 정도로 가수 문희준에 대한 안티 행위는 특히 2002년 무렵부터 집요해졌다. 안티들의 기세에 힘입어 김구라는 자신이 진행하는 인터넷 방송에서 문희준에게 인신공격이 포함된 심한 욕설을 퍼붓기도 하였다. 그의 발언들은 이른바 ‘문희준 어록’이라 불리며 인터넷을 통해 급속도로 퍼졌다. 하지만, 그 내용중 대부분은 문희준을 의도적으로 비하하기 위해 만들어낸 허위사실이 대부분이며 안티들이 지적하는 이른바 ‘건방진’ 언행들은 대부분 신문 기사나 네티즌들의 입을 통해 전파되면서 지나치게 과장된 내용이 대부분이며, 일부는 팬들의 웹상에서의 말 실수를 문희준의 말 실수로 오해한 내용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무려 100만 여건의 악플이 달린 네이버 뉴스의 댓글은 국내 뉴스 댓글중 기네스에 오르며 안티계의 최고봉으로 정점에 이른다. 이러한 안티들의 행동은 문희준이 2007년 11월 20일에 현역 만기 제대한 이후 대부분 사그라들었다. 후에, 김구라는 문희준은 보살 이란 말과 함께 문희준에게 과거 인터넷 방송에서 자신이 퍼부었던 인신공격들에 대한 사죄의 뜻을 밝혔다. 제대후 MBC의 토크쇼 《무릎팍 도사》에 출연해 문희준 어록 에 대한 해명을 하였다. 어록 중 대표적인 것으로 “레드 제플린을 모른다”라는 부분은 문희준이 방송 DJ이던 시절, DJ의 입장에서 “레드 제플린에 대해 소개해 달라”라는 취지의 질문을 한 것이 와전된 것이라고 해명했다. 또한 “오이 3개만 먹고 연습했다”라는 발언은 인디 아티스트에게 모욕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며, 한때 몸이 많이 불어나는 바람에 다이어트 차원에서 오이만 먹었던 적이 있는데, 이에 대한 발언이 와전된 것이라고 한다. 또한 오인용 플래시에 나온 내용과 달리 문희준은 군 면제를 받은 적이 없다고 밝혔다. 문희준의 소속사는 한때 안티팬들을 상대로 고소하는 해프닝이 생기기도 했지만, 후에 오히려 본인이 고소를 취하했다. 문희준 소율 결혼식 현재 문희준이 살고 있는 파주 소재의 저택은 문희준이 H.O.T. 활동을 해서 번 돈으로 구매했다. 그러나 2011년 2월 28일 《밤이면 밤마다》 방송에서 한 발언 때문에, 그 집을 1996년 당시 1억 2천만원을 주고 샀으나 10억원으로 인상됐다고 잘못 알려져, 이 점을 근거로 HOT의 1집 정산금액이 1억 2천이라고 잘못 알려졌다. 하지만 해당 방송을 정확히 보면 자막을 잘못 썼음을 알 수 있다. 문희준은 1996년에 샀다고 말한 적이 없는데, 방송 자막이 15년전이라고 잘못 쓰여있었다. 당시 방송 내용을 보면, HOT 시절 15억원짜리 광고를 했는데 지금 시가로 치면 40억 정도 할거라면서, 왜냐하면 그때 내가 1억 2천 짜리 집을 샀는데 그것이 10억이 됐다고 말하고 있다. 즉 그 집은 HOT 시절 15억원짜리 광고를 했을때 산 집이지, 1996년에 산 집이 아니다. 또한 2013년 5월 29일 《라디오스타》에서 해명하길, 그 파주 집이 1억 2천에서 10억 오른 것이 아니라, 다른 집이 그렇게 오른 것이라고 밝혔다. H.O.T.에서 같이 활동한 바 있는 강타와는 데뷔하기 전부터 친하게 지내는 사이이다. 걸그룹 크레용팝의 멤버 소율과 2016년 4월부터 연인으로 교제하였으며, 2017년 2월 12일 신라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공식 발표하였다. H.O.T. 때의 앨범은 해당 페이지 참고. 1st Album《Alone...》(2001년 10월 5일) 2nd Album《Messiah》(2002년 7월 19일) Live Album《LIVE REVOLUTION》(2002년 12월 9일) 3rd Album《LEGEND》(2003년 7월 29일) Best Album《A Soaring For Dream》(2004년 4월 28일) 1st Single Winter Letter (2004년 12월 22일) 4th Album《Triple X》(2005년 9월 12일) Special Album《hj》(2008년 3월 10일) 1st Mini Album《LAST CRY》(2009년 6월 19일) 2nd Mini Album《BEGINS》(2013년 1월 18일) MBC 《해피타임》 Mnet 《와이드 연예뉴스》 MBC 《세바퀴》 MBC 《이경규의 요리원정대》 (2016.02.06 ~ 2016.02.07 종영) JTBC 《수상한 미용실 - 살롱드림》 (2015.10.05 ~ 2015.11.09 종영) E채널 《더 맛있는 원샷》 (2015.07.16 ~ 2015.09.03 종영) KBS2 《대단한 레시피-마트에 가자》 (2015.06.04 ~ 2015.06.18 종영) KBS W 《나르는 쇼퍼맨》 (2014.11.03 ~ 2015.01.19 종영) JTBC 《동갑내기》 (2014.09.07 ~ 2014.09.08 종영) 온스타일 《위시》 (2014.07.19 ~ 2014.08.09 종영) SBS 《매직아이》 (2014.07.08 ~ 2014.11.18 종영) Mnet 《문희준의 순결한 15》 (2013.07.03 ~ 2015. 02. 11 종영) KBS2 《별친구》(2014.01.25~ 2014.02.01 종영) QTV 《미소년 통신》(2013.11.26~2013.12.25 종영) QTV 《20세기 미소년》 (2013.04.16~2013.11.19 종영) KBS2 《불후의 명곡 2》(2011.06.24~ 방송중) SBS 《강심장》(2009.10.06~2011.06.21 하차) SBS 《놀라운 대회 스타킹》(2007.01.13~ 2011.10.08 하차) MBC 《댄싱 위드 더 스타》(2011.6.10~2011.08.26 종영) MBC every1 《식신원정대 시즌 2》(2010.12.06~2011.05.30 종영) MTV 코리아 《아이돌 유나이티드》(2010.05.22~2010.08.07 종영) MBC 에브리원 《스타 포토그래퍼 탄생기 - 열혈포스》(2010.05.10~2010.06.28 종영) KBS Joy 《대격돌! 아이돌리그》(2010.05.04~ 2010.06.22 종영) Y-STAR 《디시인사이드 SHOW》 진행(2010.05.28 하차) MBC ESPN 《F1 스피드 레이서》(2010.03~2010.04 종영) MBC 에브리원 《블링블링 에브리쇼 - 스토커》(2010.01.22~ 2010.03.26 종영) tvN 《tVN ENEWS》월요일 패널 (2009.11.23~ 2010.08.02 하차) MBC every1 《기상천외! 묻지마 선수단》(2008.11.06~2009.01.22 종영) Mnet 《문희준의 음악반란》(2008.04.02~2008.07.09 종영) SBS 《절친노트 시즌 2》(2009.06.19~2009.12.25 종영) SBS 《절친노트 시즌 1》(2008.10.31~2009.06.12 종영) KBS2 《개그콘서트》(게스트 출연, 2009년 07월 12일 방송) KBS2 《불후의 명곡 - 전설을 노래하다》 KBS 쿨FM 《정재형 문희준의 즐거운 생활》 DJ EBS2 《세상의 모든 법칙 Talk》 JTBC 《싱포유》 채널A 《아빠본색》 SBS 《순풍산부인과》 (특별출연) 2009년 MBC 《태희 혜교 지현이》 2012년 tvN 《응답하라 1997》 - 문희준 역 (목소리출연) (특별출연) 2001년 MBC 연기대상 인기상 (라디오 진행자 부문) 2001년 KM가요대전 본상, 인기상 2002년 SBS 가요대전 록부문상 2002년 코리안 뮤직 어워드(KMA) 올해의 가수상, 시청자 인기상 2003년 코리안 뮤직 어워드(KMA) 올해의 가수상, 시청자 인기상 2004년 Mnet Km 뮤직비디오 페스티벌 파란상 2005년 Mnet Km 뮤직비디오 페스티벌 네티즌 인기상 2009년 SBS 연예대상 베스트 엔터테이너상 2011년 제19회 대한민국문화연예대상 예능부문 대상 2013년 KBS 연예대상 최고 엔터테이너상 2018년 KBS 연예대상 토크 쇼 부문 최우수상 연도 수상 내역 (총 1회) 2002년 (총 1회) 아낌없이 주는 나무 (총 1회) * 9월 1일 SBS 《인기가요》 1위 문희준 - 공식 웹사이트 디시인사이드와의 인터뷰 내용 전문 분류:살아있는 사람 분류:1978년 태어남 분류:1996년 데뷔 분류:H.O.T.의 일원 분류:대한민국의 댄스 음악가 분류:대한민국의 남자 가수 분류:비디오 자키 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싱어송라이터 분류:대한민국의 텔레비전 진행자 분류:문정초등학교 동문 분류:문정중학교 (서울) 동문 분류:중산고등학교 (서울) 동문 분류:서울예술대학교 동문 분류:경기대학교 동문 분류:경기대학교 대학원 동문 분류:서울특별시 출신 분류:서울특별시 출신 가수 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음악가
댓글 은 인터넷 게시물 밑에 남길 수 있는 짧은 글이다. 보통 인터넷 게시물 밑에는 댓글란이 있어 그 게시물과 관련하여 독자는 의견을 표할 수 있다. 덧글 , 코멘트 (), 리플 (←reply)이라고도 한다. 댓글을 통해 다양한 대화와 논리적인 토론 및 토의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감정적인 반대 표현이나 지극히 단순한 맞장구와 같은 일도 이루어지기도 한다. 대한민국 인터넷 초창기 시절 유즈넷(USENET)에서는 인터넷 활성화에 대한 활발한 토론이 진행될 때 영문으로 되어 있는 인터넷 용어를 한글화시키자는 과정에서 생긴 신종 단어이다. 유즈넷(USENET) 뉴스그룹 초창기 시절 reply 를 리플라이 , 답장 등으로 주로 사용하였다. 인터넷 용어 한글화를 주제로 토론을 나누는 자리에서 리플라이 , 덧글 , 댓글 등이 거론되었다. 리플라이 는 영어의 한글식 표기인 데다가 내용까지 길어져서 지지도가 약하였다. 덧글 의 경우는 덧붙여 쓰는 글 , 댓글 의 경우는 대롱 대롱 이어지는 덧대어 쓰는 글 로 두 단어가 혼용 사용되었다. 그러던 중 덧글 의 경우 글을 게시한 작성자가 추가로 덧붙여 쓰는 글의 의미가 강하여 사용이 줄어들었고 뉴스그룹 댓글 모양이 대롱 대롱 매달려 있어 댓글 로 통일하여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이후 댓글 은 본문에 대어서 쓰는 글 이라는 뜻으로 정식 백과사전에 등록되어 사용되었다. 댓글이 네티즌들의 토론과 지식 공유 수단으로 자리잡으면서 댓글 저널리즘 이 새로운 문화 트렌드를 형성하였다. 특히 양방향적 속성 을 갖고 있는 댓글은 특정 이슈에 대해 정보를 공유하고 의견을 나누는 방식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뉴스 기사 등 원문을 읽고 나서 독자가 다양한 의견들을 작성하게 되고 그것이 또 다른 독자들에게 원문에서 주는 것 이외의 정보를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댓글 저널리즘 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2012년 12월 20일, 서울대학교는 뉴스 기사에 달리는 댓글이 독자들의 기사 인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내용의 이은주 언론정보학과 교수의 연구가 세계적인 언론학 학술지 에 소개됐다고 밝혔다. 이 학술지는 온라인 뉴스 기사의 댓글이 독자들의 기사 인식에 미치는 영향을 논하면서 이은주의 연구를 주요 논거로 상세히 소개했다. 소개된 연구는 2012년 10월호에 실린 이은주의 단독 논문이었다. 논문 내용은 독자의 뉴스 기사에 대한 인식이 댓글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특히 기사의 이슈에 관심이 많을수록 자신의 의견과 반대되는 댓글을 접했을 경우 미디어가 왜곡돼 있다는 인상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이 논문을 통해 이은주는 온라인 미디어 시대의 뉴스 공정성에 대한 독자의 인식은 기사 자체 뿐 아니라 댓글에도 영향을 받고 댓글이 매체에 대한 평가에 영향을 미침을 보여줬다. 댓글은 기존의 답글과 기술적으로 비슷하지만, 즉각적인 사용자 인터페이스로 인하여 답글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인다. 댓글은 그 웹사이트의 성격이나 유행어 등이 뚜렷하게 나타나며, 논리적인 반박글이나 동의하는 글보다는 짧은 감상평 위주이다. 댓글이 없는 상태를 무플 (無플←無리플)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무플에 댓글을 다는 무플 방지 놀이 를 즐기는 사람들도 있다. 네티즌들은 1빠 , 1등 등과 같이 누가 먼저 댓글을 달았는지 겨루는 등수 놀이 를 하기도 한다. 댓글에 일부 인터넷 사이트나 기업이 광고를 달기도 하고, 고의적으로 유해 웹사이트 링크를 걸기도 한다. 사이버공간을 통해 회원들 또는 불특정 다수의 사용자들 사이에 각종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인터넷 게시판이 활성화되면서 이런 행위에 대해 그 목적이 의심될 경우 상술 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댓글 문화가 점점 발전해 나가면서 댓글이 끼치는 영향을 이익과 연결하려는 현상이 발생하여 댓글 알바라는 신종 직업도 발생하였고 이들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나타나면서 사회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댓글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을 마음껏 펼 수 있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 반면, 인터넷 게시판의 익명성을 악용하여 악의적으로 남을 공격하고 상습적으로 남을 헐뜯거나 허위 사실을 퍼뜨리는 댓글 문화인 악플문화 가 발전하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다. 악플 은 악성 리플 의 줄임말로 악성 댓글이라고도 한다. 악성 댓글은 언어 폭력인데, 그 대상이 여성인 경우 더 악랄한 댓글이 달리는 경향이 있다. 현행법상 인터넷에 비방 목적으로 허위 사실을 게재해 명예훼손을 할 경우 7년 이하의 징역이나 500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물 수 있다. 악플도 형법상 모욕죄·협박죄, 정보통신망법상 사이버 명예 훼손죄 등으로 처벌할 수 있다. 소셜 댓글 라이브리 우마오당 사이버 여론 조작 분류:비언어적 의사소통 분류:인터넷 문화 분류:인터넷 용어
선형대수학에서, 스칼라곱 (scalar곱 또는 점곱 ()은 유클리드 공간의 두 벡터로부터 실수 스칼라를 얻는 연산이다. 스칼라곱이 유클리드 공간의 내적을 이루므로, 이를 단순히 내적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스칼라곱의 개념의 물리학 배경은 주어진 힘이 주어진 변위의 물체에 가한 일을 구하는 문제이다. 차원이 인 유클리드 공간 의 두 벡터 의 스칼라곱 은 두 가지로 정의할 수 있으며, 이 두 정의는 서로 동치이다. 스칼라곱의 기호에는 가운뎃점 ⋅ 을 사용하며, 수의 곱셈 기호와는 달리 생략할 수 없다. 두 벡터의 좌표가 각각 와 라면, 이 둘의 스칼라곱은 같은 위치의 성분을 곱한 뒤 모두 합하여 얻는 값이다. 예를 들어, 두 3차원 벡터 의 스칼라곱은 다음과 같다. 이 경우 스칼라곱의 정의는 벡터의 좌표에 의존하여 정의하지만, 에 기존의 좌표계가 아닌 새로운 좌표계를 주더라도, 이 좌표계가 정규 직교 좌표계라면, 스칼라곱을 나타내는 공식은 바뀌지 않는다. 즉, 임의의 정규 직교 좌표계 아래 스칼라곱은 위치가 같은 두 좌표의 곱을 합한 것과 같다. 유클리드 공간의 벡터는 종종 열벡터로 간주되며, 이 경우 두 벡터 의 스칼라곱은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여기서 우변의 는 의 전치 행렬이며, 곱셈 기호가 생략된 곱셈은 행렬 곱셈이다. 이 경우 앞선 예시에서의 내적은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스칼라곱은 기하학적 성질인 길이 와 각도 를 통해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여기서 는 로 표기하기도 하며, 벡터 의 노름을 뜻한다. 이는 의 길이 또는 크기를 나타낸다. 역시 마찬가지이다. 는 두 벡터 사이의 각도이다. 이는 두 벡터가 모두 0이 아닐 때에만 정의되며, 보통 에서 값을 취한다. 는 코사인이며, 직각 삼각형의 이웃변과 빗변의 길이의 비로 정의하거나, 테일러 급수 전개식을 통해 정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만약 두 벡터의 길이가 모두 2이며, 둘 사이의 각도의 코사인 값이 1/2이라면, 이 두 벡터의 스칼라곱은 2 × 2 × 1/2 = 2이다. 이 정의에서 스칼라곱은 두 벡터의 길이와 위치 관계에만 의존하므로, 스칼라곱이 좌표계와 무관함이 더욱 뚜렷하다. 반대로 두 벡터를 똑같은 등거리 변환에 의하여 변환시켰을 때, 두 벡터의 스칼라곱은 변하지 않는다는 점 역시 정의로부터 자명하다. 몇 가지 특수한 각도의 경우는 다음과 같다. 만약 이라면, (즉, 두 벡터의 방향이 같다면,) 이므로, 내적은 단순히 두 벡터의 길이의 곱이다. * 만약 라면, (즉, 두 벡터가 서로 수직이라면,) 이므로, 내적은 0이다. * 만약 라면, (즉 두 벡터의 방향이 서로 반대라면,) 이므로, 와 의 내적은 다음과 같다. * 또한, 이 정의로부터 두 벡터 사이의 각도를 구하는 다음과 같은 공식을 얻을 수 있다. 임의의 벡터 및 스칼라 에 대하여, 다음 성질들이 성립한다. 교환 법칙 * 왼쪽 분배 법칙 * 오른쪽 분배 법칙 * 스칼라 곱셈의 보존 * 위 네 가지 성질에 따라, 스칼라곱은 대칭 쌍선형 형식이다. 자기 자신과의 스칼라곱은 음이 아닌 실수이다. * 영벡터와의 스칼라곱은 0이다. * 자기 자신과의 스칼라곱이 0인 벡터는 영벡터뿐이다. * 위 세 가지 성질에 따라, 스칼라곱은 양의 정부호 형식이다. 일 필요충분조건은 이다. 일 필요충분조건은 이다. 일 필요충분조건은 이다. 반면 스칼라곱이 만족시키지 않는 성질에는 다음이 있다. 결합 법칙은 (1차원 유클리드 공간 을 제외하면) 성립하지 않는다. 이는 두 벡터의 스칼라곱이 벡터가 아닌 스칼라이므로, 나 가 무의미한 수식이기 때문이다. 소거 법칙은 (1차원 유클리드 공간 을 제외하면) 성립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에서, , , 이라면, , 이지만, 이다. 사실, 일 필요충분조건은 이다. 벡터 의 벡터 위의 스칼라 사영 () 은 를 로 수직 사영하여 얻는 벡터의 길이이다. 스칼라 사영은 다음과 같이 단위 벡터와의 스칼라곱으로 나타낼 수 있다. 반대로, 스칼라곱은 다음과 같이 스칼라 사영과 벡터의 길이의 곱으로 나타낼 수 있다. 삼각형의 세 변에 대응하는 세 벡터 a , b , c 와 이들 가운데 두 벡터의 각도 θ . 삼각형의 세 변 와 가 마주보는 각 에 대한 코사인 법칙은 스칼라곱의 성질을 통해 유도할 수 있다. 벡터 가 그림과 같다고 하면, 코사인 법칙은 다음과 같이 증명된다. 3차원 유클리드 공간 속 벡터에 대한 곱셈은 그 밖에도 여럿 존재한다. 예를 들어, 두 벡터 의 벡터곱 은 스칼라곱과 달리 두 벡터로부터 또 다른 벡터를 얻는다. 그러나 이는 3차원이 아닌 유클리드 공간에서 의미를 잃는다. 스칼라 삼중곱은 에서 스칼라곱과 벡터곱을 사용하여 정의된다. 세 벡터 의 스칼라 삼중곱은 로 정의된다. 벡터 삼중곱은 에서 두 번의 벡터 곱으로 정의된다. 세 벡터 의 벡터 삼중곱은 스칼라곱을 계수로 하는 선형 결합 전개식으로 나타낼 수 있으며, 이는 다음과 같다. 물리학의 여러 가지 개념은 스칼라곱을 통해 정의된다. 예를 들어, 일은 힘과 변위의 스칼라곱이며, 자기 선속은 자기 선속 밀도와 면적 벡터의 스칼라곱이다. 물론 변하는 힘이나 일정하지 않은 자기 선속의 경우 적분을 사용한다. 차원이 인 복소수 곱공간 속의 벡터 에 대하여 스칼라곱과 비슷한 함수를 정의할 수 있으며, 이는 다음과 같다. 여기서 는 의 (열벡터로서의) 켤레 전치이며, 는 의 켤레 복소수이다. 이러한 함수는 양의 정부호성을 만족시킨다. 즉, 영벡터가 아닌 복소수 벡터와 자기 자신의 스칼라곱은 항상 실수이며 0보다 크다. 그러나 실수 벡터의 스칼라곱과 달리 쌍선형성을 만족시키지 않으며, 대신 다음과 같은 반쌍선형성을 만족시킨다. 임의의 및 에 대하여, 또한 대칭성(교환 법칙) 대신 다음과 같은 켤레 대칭성을 만족시킨다. 이 경우, 영벡터가 아닌 두 복소수 벡터의 사잇각을 나타내는 공식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는 복소수 의 실수부이다. 만약 이 함수의 정의에서 켤레 복소수를 생략한다면, 이는 쌍선형성과 대칭성을 유지하지만 양의 정부호성을 잃는다. 이는 대략 이기 때문이다. 사실, 양의 정부호성과 대칭성과 쌍선형성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함수 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이러한 함수의 존재가 다음과 같은 모순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유클리드 공간이나 복소수 곱공간의 스칼라곱을 일반화하여 내적의 개념을 얻을 수 있다. 실수 벡터 공간 에서, 두 벡터 로부터 실수 스칼라 를 얻는 연산이 양의 정부호성과 대칭성과 쌍선형성을 만족시킬 경우, 이를 위의 내적이라고 한다. 복소수 벡터 공간 의 두 벡터 로부터 복소수 스칼라 를 얻는 연산이 양의 정부호성과 켤레 대칭성과 반쌍선형성을 만족시킬 경우, 이를 위의 내적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에 다음과 같은 함수를 정의하면, 이는 내적을 이룬다. 두 실숫값 함수 의 내적 은 급수 대신 적분을 사용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으며, 이 역시 양의 정부호성과 대칭성과 쌍선형성을 만족시킨다. 보다 일반적으로, 두 복소숫값 함수 의 내적 은 다음과 같으며, 이는 양의 정부호성과 켤레 대칭성과 반쌍선형성을 만족시킨다. 사이즈가 같은 두 실수 행렬 의 프로베니우스 내적 () 은 위치가 같은 두 성분의 곱들을 합한 결과이며, 대각합과 행렬 곱셈을 통해 나타낼 수도 있다. 즉, 다음과 같다. 보다 일반적으로, 두 복소수 행렬 의 프로베니우스 내적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는 의 켤레 전치이다. 분류:선형대수학 분류:벡터 분류:해석기하학 분류:텐서
마이애미 말린스 ()는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를 연고지로 하는 프로 야구 팀이다.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동부 지구 소속이다. 콜로라도 로키스와 함께 후발주자로 1993년에 창단하였고, 1997년, 2003년 월드시리즈(World Series) 우승 팀이다. 뉴욕 양키스(New York Yankees)를 제외하고 가장 단시간 안에 2번째로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팀이기도 하다. 또한 이 팀은 메이저 리그 역사상 유일하게 와일드 카드로만 두 번 플레이오프에 진출해서 두 번 다 우승한 팀으로, 지구우승이 없지만 리그 우승이 두 번 있는 건 그 때문이다. 미술수집상인 제프리 로리아가 현재 구단주로 있으며, 감독으로는 프레디 곤잘레스, 단장으로는 마이클 힐이 있으며 야구운영팀장으로는 래리 바인페스트가 있다. (직책상의 단장은 마이클 힐이지만, 실제 단장 역할은 바인페스트가 모두 하고 있다.) 콜로라도가 지난 95년에 포스트 시즌에 진출한 데에 자극을 받아 말린스는 97년에 마이애미 출신의 투수 알렉스 페르난데스, 내야수 보비 보니아, 외야수 모이스 알루 등 내로라 하는 자유계약선수들을 돈으로 끌어 모았다. 흔히 말린스의 기적 이라고 불리는 두 번의 우승은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데, 97년과 2003년 둘다 당시 와일드 카드로 월드 시리즈에 진출하여 우승했고, 베테랑 선수들과 루키계약을 맺고 있던 선수들의 대활약으로 우승했다는 것이다. 97년의 말린스 팀의 주축이 베테랑 위주였다면, 2003년에는 신예들이 위주였으며, 특히 이 차이는 투수력에서 많은 차이가 났다. 또한 특이한 점은 97년의 겨울에 있었던 이른바 대방출 사건으로, 이는 말린스 주력 선수들의 재계약들이 (재계약과 메이저 리그 계약)이 이 겨울에 몰려있었던 것으로, 연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을 두려워한 구단주에 의해 대부분의 주력선수들이 유망주와 맞트레이드되는 조건으로 다른 구단으로 팔려나가게 된다. 이 현상은 2003년에도 어느 정도 지속되었고, 이 대방출 은 2008년 초에 이루어진 돈트렐 윌리스와 미겔 카브레라, 이 두 선수를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 유망주 6명을 받고 트레이드한 것으로 다시금 마무리되었다. 2008년 3월 31일 말린스 팀 연봉은 뉴욕 양키스 선수들인 알렉스 로드리게스나 제이슨 지암비 선수의 개인 연봉보다 적은 것으로 밝혀졌다. 대한민국 야구팬들에게는 한국인 1호 타자 메이저리거 최희섭(전 KIA 타이거즈)과 김병현(전 KIA 타이거즈)가 뛰었던 팀으로 잘 알려져 있다. 2012시즌부터 팀명을 마이애미 말린스로 변경하고 홈구장도 말린스 파크(2011년 11월 11일에 개장한다.)로 옮겼다. 아모리 가르시아 존 갈 김병현 라이언 뎀스터 핸리 라미레스 존 레스터 에드가 렌테리아 이반 로드리게스 비니 로티노 카를로스 리 데릭 리 랜디 메신저 데니 바티스타 릭 반덴허크 마크 벌리 조시 베켓 히스 벨 크리스 볼스테드 두에인 빌로우 케빈 브라운 엔리케 에르난데스 오마 인판테 크리스 세든 게리 셰필드 지안카를로 스탠튼 웨스 오버뮬러 파블로 오즈나 대런 올리버 로스 울프 돈트렐 윌리스 오마 인판테 라이언 잭슨 조시 존슨 최희섭 호르헤 칸투 헤수스 타바레스 맷 트레이너 브래드 페니 호세 페르난데스 데이비드 펠프스 마이크 피아자 후안 피에르 잭 필립스 빌리 홀 #16 호세 페르난데스 #42 재키 로빈슨 (전 구단 공통) (말린스 시절 등번호, 포지션, 말린스 소속이던 시즌) 최희섭 - 25번, 내야수, 2004년 김병현 - 23번/38번/49번, 투수, 2007년 분류:1985년 설립 분류:플로리다주의 야구 분류:1993년 설립된 스포츠 클럽
전자기학 (電磁氣學)은 전기와 자기 현상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전기와 자기는 전자기장을 이룬다. 자기 현상은 이미 기원전 2000년 무렵 중국 문헌에 등장하며, 전기 역시 기원전 700년 무렵 고대 그리스 세계에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전기와 자기가 전자기력이라는 동일한 기본 상호작용에 의한 현상이라는 점은 19세기에 와서야 밝혀졌다. slide.jpg|섬네일|플라스틱 미끄럼틀을 타고 노는 아이가 정전기에 대전되어 머리카락이 곤두서 있다. 양전하와 음전하로 대전된 물체가 만들어 내는 전기장의 모습 양털로 만든 옷감에 플라스틱 빗을 여러 번 문지른 후 머리카락에 갖다 대면 머리카락이 빗에 달라 붙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물체가 전기를 띄게 되는 것을 대전되었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철학자 탈레스는 호박(琥珀)을 마찰하면 호박에 작은 물체가 달라 붙는 것을 관찰하였다. 전기를 뜻하는 는 호박을 뜻하는 에서 온 것으로 추정된다. 위에 든 예와 같이 두 물체를 마찰하여 대전된 전기를 정전기라고 하는데, 정전기가 대전되는 까닭은 물체를 이루는 원자가 지니는 전자 가운데 일부가 적은 에너지로도 쉽게 원자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자로부터 벗어나 움직이는 전자를 자유 전자라고 한다. 금속과 같이 자유 전자를 많이 지닌 물질은 언제나 전자들이 쉽게 이동하기 때문에 대전되었더라도 다른 물체와 닿게 되면 전기가 쉽게 전달되어 버린다. 이런 물체를 도체라고 한다. 반면에 고무나 유리와 같은 물질은 자유전자가 매우 적어서 한 번 대전되면 전하를 비교적 오랫동안 유지하게 된다. 이런 물체를 부도체라고 한다. 물질 가운데에는 상태에 따라 도체와 부도체의 성질을 모두 가질 수 있는 것도 있다. 이런 물질들은 반도체라고 부른다. 반도체는 최근 여러 전자 제품에 널리 사용되고 있다. 전기에는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전하가 있어서 같은 것은 밀쳐내고 다른 것과는 끌어당긴다. 18세기 미국의 과학자이자 정치가였던 벤저민 프랭클린은 두 전하를 한 쪽은 양 전하, 다른 쪽은 음 전하라고 이름 붙였다. 이런 척력과 인력의 크기는 물체가 갖고 있는 전하의 양과 두 물체 사이의 거리에 관계된다. 이렇게 정전기로 대전된 두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힘은 쿨롱의 법칙으로 계산될 수 있다. 어떤 공간에 대전된 한 개의 물체가 있다고 할 때, 이 물체 근처로 지나가는 다른 대전된 물체는 쿨롱의 법칙에 따라 서로의 거리가 가까워 질 수록 더 강한 힘을 받게 된다. 반대로 일정 거리 이상 멀어지면 두 전하 사이의 힘은 무시될 수 있을 정도로 작아질 것이다. 이렇게 하나의 전하에서 만들어지는 전기력이 영향을 미치는 범위를 전기장이라고 한다. 전기장의 세기는 어떤 위치에 있는 물체가 단위 전하당 얼마만큼의 힘을 받는지로 계산한다. 국제단위계로 나타내면 쿨롱당 뉴턴, 즉 로 나타낸다. 물체에 고여있는 정전기와 달리 전류는 양전하에서 음전하로 흐르는 전기의 흐름이다. 1800년 이탈리아의 과학자 알레산드로 볼타는 황산 수용액에 구리막대와 아연막대를 담은 후, 두 막대를 금속선으로 이어 전지를 발명하였다. 볼타 전지는 최초로 전류를 지속적으로 공급하는 장치였다. 18세기에 제작된 항해용 나침반 막대 자석 주위에 자기장을 따라 늘어선 철가루 고대 중국에서는 자석에 철이달라붙는 다는 사실과 자석이 남북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고대 중국인들은 이러한 성질을 이용하여 나침반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나침반은 세계 여러 곳에 전파되어 항해에 필수적인 장비가 되었다. 자석은 전하와 같이 같은 극끼리는 밀치고 다른 극끼리는 잡아당기는 힘이 작용한다. 관례적으로 자석에서 북극을 가리키는 쪽을 N극, 반대편을 S극이라고 한다. 물질이 자기를 띄게 되는 것은 원자가 스스로 전류 고리를 갖기 때문이다. 원자핵의 자전과 원자핵 주변을 돌고 있는 전자의 공전과 자전때문에 원자에 전류 고리가 생기고 이 때문에 원자 자체에 N극과 S극의 성질을 나타내는 자기쌍극자가 형성된다. 전기의 기본 단위인 전하가 음전하 또는 양전하 홀로 존재할 수 있는 것과는 다르게 자기는 자기쌍극자에 의해 발생하는 현상이기때문에, 기초 단위에서부터 N극과 S극이 동시에 존재한다. 자석에 철과 같은 물질이 달라붙는 현상을 자기라고 하고, 자석에 달라붙는 물질을 자성체라고 한다. 널리 알려진 자성체로는 철 이외에 니켈과 같은 것이 있다. 자기에 반응하지 않는 물질은 비자성체라고 하며, 이 외에 자석에 아주 약하게 반응하는 알루미늄, 크롬과 같은 물질은 상자성체, 구리, 금, 은과 같이 자석이 가까이 가면 약하게 반발하는 물질은 반자성체라고 한다. 대부분의 물질은 원자단위의 자기쌍극자가 무질서하게 놓여져 있기때문에 서로간의 자기가 상충되어 자성을 띄지 않지만, 철이나 니켈같은 물질들은 원자의 배열이 자기가 한 쪽 방향으로 정렬되기 쉽도록 되어 있어서 쉽게 자성을 띄게 되고 한 번 자석이 되면 계속하여 자성을 유지하게 된다. 자성을 잃지 않고 계속 지니는 자석을 영구 자석이라고 한다. 철 막대를 자석의 한 극으로 내려 치면 철 원자의 자기쌍극자가 한 쪽으로 정렬되어 영구 자석이 된다. 한편, 영구 자석이 된 철이라고 하더라도 약 770℃ 가 되면 자성을 잃는데, 열에 의해 원자가 무질서하게 운동하기 때문이다. 전기장과 마찬가지로 자기가 미치는 공간을 자기장이라고 한다. 위에 설명한 바와 같이 자기의 단위 자극인 자하는 전하와 달리 홀로 존재하지 않고 언제나 쌍극자로 존재하므로 N극에서 나와 S극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자기 흐름을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하나의 폐곡선으로 연결되는 자기 흐름을 자기력선이라고 하는데, 자기장은 일정 공간에 자기력선이 얼마나 많이 모여있는지와 그렇게 모인 자기력선이 얼마나 센 지를 고려하여야 한다. 자기력선이 일정 공간에 얼마나 많이 모여 있는지는 자기 선속 밀도(磁氣線束密度)라고 하며, 관례적으로 로 나타낸다. 한편, 특정 위치에서 자기장의 세기는 로 나타내는데, 그곳에 놓인 자하가 받는 힘을 뜻한다. 국제단위계에서는 자기장의 단위로 테슬라(T)를 사용하지만 일반적으로는 가우스(G)가 더 많이 쓰인다. 자기장의 경우에 자기 선속 밀도와 자기장의 세기가 다른 까닭은 자기장이 통과하는 매질마다 자기장을 전달하는 비율이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물질이 자화되어 자기장을 전달하는 비율을 투자율(透磁率)이라고 하고 그리스 문자 μ로 나타낸다. 투자율은 물질마다 고유의 값이 있는데 투자율이 수백에 근접하는 강자성 물체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물질은 1에 가까운 투자율을 가지고 있다. 진공 또는 자유공간의 투자율은 특히 μ 0로 나타내며, 그 값은 이다. 자기장의 자기 선속 밀도 는 자기장의 세기에 투자율 μ 를 곱한 것과 같은 값을 갖는다. 즉, 다음과 같은 수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electromagnet.png|섬네일|left|150px|1823년 제작된 스터전의 전자석 전기와 자기는 아주 오래전부터 알려진 현상이었지만, 이 둘이 사실은 같은 상호 작용이란 것은 19세기에 와서야 밝혀졌다. 1820년 덴마크의 과학자 한스 크리스티안 외르스테드는 전류가 흐르는 도선 가까이 나침반을 두면 나침반의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이 변하는 것을 관찰하고 전류와 자기 사이에 연관이 있음을 밝혀냈다. 프랑스의 과학자 앙드레마리 앙페르는 외르스테드의 논문을 읽고 자신도 같은 실험을 하여 전류가 흐르는 도선에 생기는 자기장의 방향을 관찰하였다. 앙페르는 전류가 오른손의 엄지손가락 방향으로 흐를때 자기장은 나머지 네 손가락을 말아쥔 방향으로 형성된다는 것을 밝혔는데, 오른손 엄지를 위로 치켜 든다면 나머지 말아 쥔 네손가락은 반시계방향을 나타내게 된다. 이러한 발견은 앙페르의 오른나사 법칙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훗날 수리 모형이 만들어져 앙페르의 회로 법칙이 수립되었다. 1824년 영국의 과학자 윌리엄 스터전은 전류에서 발생하는 자기장을 이용하여 전자석을 만들었다. 스터전이 처음 만든 전자석은 말굽 모양의 철심을 자기 코어로 이용한 것이었다. 스터전은 자기 코어에 굵은 구리 전선을 18 번 감아 전자석을 만들었다.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절연체가 없었기 때문에 스터전은 구리 도선에 바니시를 발라 절연체로 사용하였다. 패러데이의 전자기 유도 실험. 코일을 감아 만든 전자석을 다른 코일 속에 넣고 움직이면 전류가 발생한다. 전류가 자기장을 만든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자기장에서도 전류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갖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1831년 마이클 패러데이는 자석을 도선 가까이에서 움직이면 전류가 생긴다는 것을 밝혀내었다. 패러데이는 영구 자석이든, 전자석이든 자기장을 형성하는 것이기만 하면 도선가까이에서 움직이면(즉, 자기장의 변화가 일어나면) 전류가 생긴다는 것을 알아내고 이를 정리하여 패러데이 전자기 유도 법칙을 발표하였다. 자기에서 전기가 유도될 수 있다는 것이 알려지자, 이것을 이용한 많은 기술들이 발명되었다. 니콜라 테슬라는 전자기 유도를 이용하여 교류 발전기를 발명하였다.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Marconi 1901 wireless signal.jpg|섬네일|1901년 대서양 너머로 무선 신호를 보내고 있는 굴리엘모 마르코니 1864년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은 기존의 전기와 자기에 대한 이론의 수리 모형들을 약 20개의 방정식으로 정리하였다. 맥스웰은 나중에 의미가 같은 방정식들은 과감히 생략하고 본질적인 네 개의 방정식으로 정리하였다. 이를 맥스웰 방정식이라고 한다. 맥스웰 방정식이 다루는 전자기학의 법칙은 다음과 같다. 가우스 법칙 가우스의 법칙은 전하에 의해 만들어지는 전기장의 에너지를 나타낸다. 이는 본질적으로 쿨롱의 법칙과 같은 결과를 나타내게 된다. 그러나, 가우스의 법칙은 두 개의 전하에 작용하는 힘을 계산하는 쿨롱의 법칙과 달리 하나의 전하만을 고려할 때에도 그에 따른 전하량을 계산할 수 있다. 가우스 자기 법칙 자기는 언제나 N극과 S극이 동시에 존재하므로, 닫힌 곡면을 지나는 자기량은 곡면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통과하여 나오는 것이 언제나 같게 된다. 자기력은 벡터이기 때문에 들어가는 자기량과 나오는 자기력의 합은 언제나 0 이 된다. 패러데이 전자기 유도 법칙 도선 주변에서 자기장이 변화하면 전류가 생기는데, 이렇게 전류가 발생하도록 하는 힘을 기전력이라고 한다.패러데이의 전자기 유도 법칙은 자기 선속 밀도의 변화와 기전력의 관례를 수리적으로 정리한 법칙이다. 앙페르 회로 법칙 앙페르는 전류 주변에 흐르는 자기장의 세기를 예측할 수 있는 수리 모형을 만들었다. 하지만, 앙페르가 만든 방정식은 불완전한 면이 있었기 때문에 맥스웰은 이를 개선하여 새로운 방정식으로 대체하였다. 이 때문에 수정된 앙페르 회로 법칙은 앙페르-맥스웰 회로 법칙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맥스웰은 전자기학에 대한 법칙들의 수리 모형을 정리하면서 로런츠 힘은 다루지 않았다. 로렌츠 힘은 전하를 띈 물체가 전기장 안에서 받는 힘을 뜻한다. 오늘날 전자기학은 맥스웰 방정식과 로런츠 힘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맥스웰은 맥스웰 방정식을 정리한 후, 자계가 사인파와 같은 파동을 보이며 변화한다면 전계 역시 그에 따라 사인파 파동을 만들어 내게될 것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 일 것이므로, 전기와 자기의 성질을 모두 갖는 파동, 즉 전자파가 존재할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맥스웰이 예측한 전자파는 1888년 하인리히 루돌프 헤르츠의 실험을 통해 증명되었다. 이후, 전기 회로에서 생성된 전자파를 안테나를 통해 방출하거나 수신할 수 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고, 이를 이용하여 무선 통신이나 방송과 같은 전자파를 이용한 기술들이 발명되었다. 전기 자기 전자기역학 이중 슬릿 실험 전자석 엑스선 광학 * 원서 분류:물리학
전기의 가장 극적인 효과 중 하나이다. 전기 (電氣란 전하의 존재 및 흐름과 관련된 물리현상들의 총체이다. 전기는 번개, 정전기, 전자기 유도, 전류 등 일상적인 효과들의 원인이다. 또한 전기는 전파 따위의 전자기 복사를 발산하고 또한 수집할 수 있다. 물리학에서 다루는 전기는 다음과 같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전하 일부 아원자 입자가 전자기 상호작용을 결정하는 능력. 전하가 대전된 물질은 전자기장을 만들어내고, 또한 전자기장의 영향을 받는다. 전하는 음전하와 양전하가 있다. 전기장 (정전기학 참조) 전하들은 전기장에 둘러싸여 있다. 전기장은 다른 전하에 가해지는 힘을 생성한다. 전기장의 변화는 광속으로 전달된다. 전위 전기장이 전하에게 일을 하는 능력, 단위는 대개 볼트. 전류 전하가 대전된 입자들의 운동 또는 흐름. 단위는 대개 암페어. 전자석 움직이는 전하는 자기장을 만들어낸다. 전류도 자기장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자기장의 변화는 전류를 만들어낸다. 전기공학에서는 전기를 다음과 같이 사용한다. 전력 전류를 이용해 에너지를 공급한다. 전자공학 진공관, 트랜지스터, 다이오드, 집적회로 등의 능동소자 및 관련된 수동소자 기술로 만든 회로를 다룬다. 전기는 17세기와 18세기까지 비록 과학적인 진보가 오지 않았을지라도, 고대 이래로 연구되어 왔다. 전기가 19세기 후반까지 되지 않았을지라도, 전기 기술자들은 산업적인 사용과 거주에 관한 사용에 전기를 사용할 수 있었다. 이 시기는 전기 기술 발전에 있어 빠른 확장이 목격되었다. 에너지 원천으로서 전기의 비범한 융통성은 운송, 난방, 빛, 통신, 계산을 포함하는 거의 무제한으로 응용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력은 현대 산업 사회의 중추이다. 이름이 알려진 최초의 전기 연구자인 탈레스. 전기에 관한 지식이 존재하기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전기물고기의 전기충격 능력을 인지하고 있었다. 기원전 2750년의 고대 이집트 문헌에는 이 물고기들을 "나일 강의 뇌신"이라 부르며 다른 모든 물고기의 "수호자"라고 했다. 이후 1천년기가 지난 뒤 고대 그리스, 로마, 이슬람 박물학자들과 의사들도 전기물고기의 존재를 기록했다. 대 플리니우스나 스크리보니우스 라르구스 같은 고대 사람들은 전기메기 및 전기가오리의 전기충격 효과 및 그 충격이 충격을 전달(오늘날 용어로 전도)할 수 있는 물체를 따라 이동한다는 것을 알았다. 통풍이나 두통이 있는 환자들에게 정신이 번쩍 들어 치료가 되라고 전기물고기를 만지게 하는 처방도 이루어졌다. 번개와 여타 출처의 전기가 같다는 것을 최초로 발견한 이들은 아랍인들일 것이다. 15세기 이전부터 아랍어에서는 전기가오리를 가리키는 말로 "번개()라는 말을 사용했다. 지중해 주변의 고대 문화에서는 특정한 물체. 예컨대 호박을 고양이 털로 문지르면 깃털 같은 가벼운 물체를 끌어당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밀레투스의 탈레스는 기원전 600년경 정전기에 관한 다양한 관찰을 남겼다. 그는 마찰이 호박을 자성을 띠게 하며, 이는 자철석과 같은 문지르지 않아도 자성을 가지는 광물과 대조되는 성질이라고 생각했다. 탈레스는 마찰된 호박의 인력 작용이 자성의 효과라고 생각한 점에서 틀렸다. 그러나 훗날의 과학자들은 자기와 전기 사이의 관계를 밝혀냈다. 논란이 많은 학설에 따르면 파르티아인들이 전기도금의 원리를 알고 있었지도 모른다. 1936년 발견된 바그다드 전지가 그 증거로 제시되는데, 이 유물은 마치 갈바니 전지와 흡사하다. 그러나 이 유물이 전기적 성질을 정말 가지고 있었는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프랭클린은 18세기에 전기에 관한 광범한 연구를 수행했다. 조지프 프리스틀리는 프랭클린과 서신을 교환하면서 이를 《전기의 역사와 오늘날의 상황》(1767년)에 기록했다. 그러나 17세기 이전까지 전기는 단순히 지식인들의 호기심 대상에 불과했다. 1600년 잉글랜드의 과학자 윌리엄 길버트가 전기와 자기에 대한 세심한 연구를 수행하여 자철석 효과와 정전기 효과는 서로 다른 것임을 구분해냈다. 길버트는 문지른 호박이 작은 물체를 끌어당기는 효과를 가리키기 위해 라틴어로 "엘렉트리쿠스( < )"라는 용어를 고안해냈다. 이것이 영어 낱말 "electric" 과 "electricity"의 어원이 되었으며, 이 두 낱말은 토머스 브라운의 《프세우도독시아 에피데미카》(1646년)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이후 오토 폰 게르니케, 로버트 보일, 스티븐 그레이, 샤를 프랑수아 드 시스테르네 등이 전기에 관한 연구를 계속했다. 18세기 벤저민 프랭클린은 사재를 팔아가면서 전기에 관한 광범위한 연구를 수행했다. 프랭클린은 1752년 6월 물에 적신 연줄 끝에 금속 열쇠를 매달고 천둥치는 날 연을 띄웠다고 흔히 알려져 있다(다만 프랭클린이 이 실험을 정말 했는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열쇠를 통해 그의 손등으로 전달된 스파크는 번개가 전기적 현상임을 확실히 알게 하였다. 또한 프랭클린은 음전하와 양전하라는 개념을 내놓아 전하 저장 장치인 라이덴병의 역설적인 것처럼 보이는 성질이 사실 역설이 아님을 설명해냈다. Faraday Th Phillips oil 1842.jpg|섬네일|upright|마이클 패러데이의 발견은 전동기 기술의 토대를 이루었다. 1791년 루이지 갈바니가 생물전기의 발견을 발표했다. 이는 전기가 뉴런을 통해 근육에 신호를 전달하는 수단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1800년 알레산드로 볼타는 아연판과 구리판을 겹쳐 만든 볼타 전지를 개발하여 과학자들이 그전까지 사용되던 정전기 기계보다 안정적으로 전기를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1819년-1820년에는 한스 크리스티안 외르스테드와 앙드레마리 앙페르가 전기 현상과 자기 현상이 사실 같은 것이라는 전자기 개념의 단초를 발견했다. 1821년 마이클 패러데이는 전동기를 발명했고, 1827년에는 게오르크 옴이 전기회로를 수학적으로 분석해냈다. 그리고 1861년-1862년,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이 유명한 논문 〈물리적 역선에 관하여〉에서 전기와 자기(와 빛)을 하나로 통합하였다. 이렇듯 19세기 초가 전기과학의 급속한 발전 시대였다면, 19세기 말은 전기공학의 엄청난 진보가 이루어진 시기이다.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블라시 오토, 토머스 에디슨, 갈릴레오 페라리스, 올리버 헤비사이드, 예디크 아노이시, 켈빈 남작, 찰스 앨저넌 파슨스, 베르너 폰 지멘스, 조지프 스완, 니콜라 테슬라, 조지 웨스팅하우스가 모두 이 시대 사람들이다. 그들은 전기를 과학적 호기심의 대상으로부터 근대적 생활에 필수불가결한 도구로 전환시켰고, 이는 제2차 산업혁명을 견인하는 동력이 되었다. 1887년, 하인리히 헤르츠가 자외선을 쬔 전극이 전기 스파크를 더 잘 발생시킨다는 것을 발견했다. 1905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이것이 이산적인 양자의 형태로 전달되는 빛의 에너지가 전자에 에너지를 전달하는 광전효과로 인한 것임을 밝혔다. 이는 양자혁명의 단초가 되었다. 아인슈타인은 “광전효과 법칙의 발견”에 대한 공로로 1921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광전효과는 태양광판을 비롯한 광검출기에 이용되는 원리로서 오늘날 상업적 전기 생산에도 많이 쓰이고 있다. 전하(電荷, electric charge)는 전기현상을 일으키는 주체적인 원인으로, 어떤 물질이 갖고 있는 전기의 양이다. 특히 공간에 있는 가상의 점이 갖는 전하를 점전하라고 하고, 전하의 양을 전하량이라고 한다. 전하의 국제 단위는 쿨롱이며, 기호는 C이다. 1 쿨롱은 매우 큰 단위이며, 약 6.25×10의 18제곱 개의 전자나 양성자들의 전하의 양이다. 반대로, 전자 또는 양성자 한 개의 전하량은 1.6021773349 ×10-19 쿨롱이며, 이를 기본 전하라고 부른다. 전하는 음의 전하와 양의 전하가 있다. (이는 질량과 같이 양의 값만 있는 다른 물리량과 다르다.) 통상적으로 양성자나 양전자 따위의 전하를 양으로, 전자 등의 전하를 음으로 놓는다. 전기의 흐름 전류는 물분자가 전하와 함께 이동하는 상태를 뜻한다. 전기는 물분자가 가지는 전하의 상태를 의미하고, 물분자의 수소원자의 전하가 양전하 상태를 갖고 물분자의 산소원자가 음전하의 상태를 가지며 물분자 크기 180pm이내에서 갖는 전하는 한국과학으로 직류전기로 표기되어 있다.그러므로 전류와 전기의 구분은 물분자가 전기도체인 구리선과 함께 움직이느냐와 물분자의 수소원자 전하와 산소원자의 전하가 개별적으로 움직이느냐에 따라 전기와 전류가 한국과학으로 명확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전기를 띤 물체 주위의 전기 작용이 존재하는 공간. 전계(電界). 전장(電場). 전기적인 위치에너지 전압과 비슷한 개념이다. 철심에 코일을 감고 코일에 전류를 흘리게 되면 철심이 자성을 띄게 되는데 이것을 전자석이라고 한다. 전기화학은 물질간의 전자의 이동과 그것들에 의한 여러 현상을 취급하는 화학의 한 분야이다. 물리화학, 분석화학, 화학공학 등과의 연관이 깊다. 전기 회로는 전기가 흐를 수 있도록 전원과 함께 설치된 닫힌 회로다. 회로에는 저항기, 축전기, 코일 등 다양한 전기적 소자가 전기 전도체인 전선에 의해 연결된다. 전기에너지의 힘 직류에서의 전력 공식은 P=VI 교류에선 전력이 세가지로 피상전력,무효전력,유효전력이 있다. 전자공학은 구동력으로서 전력을 이용하는 구성장치, 시스템 또는 여러 장비들을 개발하기 위하여 전자들의 운동에 대한 영향과 행동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연구하는 공학의 한 분야이다. 전자기파는 특정 전자기적인 과정에 의해 복사되는 에너지이다. 가시광선도 전자기파에 속하며 전파, 적외선, 자외선, X선 같은 전자기파들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고전 역학에서 전자기복사는 동시에 진동하는 전기장과 자기장으로 구성된 전자기파로 이루어진다. 또한 이들은 진공에서 빛의 속력으로 전달된다. 두 장의 진동은 서로 수직이며 진행방향에 수직이고 횡파이다. 전자기파는 진동수가 크거나 작은 순서대로 전자기파 스펙트럼을 형성하는데 여기에 라디오파, 마이크로파, 적외선, 가시광선, 자외선, X선, 감마선이 포함된다. / 화력발전-나무나 기름 씀=나무심기와죽는 이가 더 있어야 하거나 나무나 기름을 그만큼 안 쓰야함 수력발전-물길 막아서 씀=물에 사는 사람(물고기!? 물 먹거리?!)들이 살기 힘들어지고 물이 더러워지기도 함 태양력발전-그 땅에 햇빛이 안들어가게 막아서 씀 죽은 땅으로만 남거나 오염된 땅만 될 수도 있음 원자력발전-많은 빼기인 낱개(전하)들을 큰 더하기 낱개(양성자)로부터 많이 더하거나 많이 뺌으로서 씀=힘이 크게 약해지는데 힘을 처음으로 다시 돌릴려고하고(에너지 보존의 법칙) 그 까닭에 가까운 곳에서는 살점들도 너둘너들해질 수 있다고하는데 많은 빼기 낱개(전자)들을 잃을수록 더 나빠져서 물처럼 허물허물해진다고도 함,그런데 전자(빼기같은 낱개)를 많이 잃어면 별로 돌아가도 힘이 적다고 함.즉 별의 힘(중력)이 달라질 수도 있음.별(행성,항성)의 크기에 따라서 크게 다를 수도 있음. ...... 즉, 가까운 곳이나 먼 곳(주변) 또는 사람의 살점들(생명체들의 세포들)또는 별(행성 등)이 나빠질 수 있음*/ 모두를 위하여 (모두주의)에서 ... 앙페르의 회로법칙 전기적 위치 에너지 수류의 유추 발전 "One-Hundred Years of Electricity", May 1931, Popular Mechanics Illustrated view of how an American home s electrical system works Electricity around the world Electricity Misconceptions Electricity and Magnetism Understanding Electricity and Electronics in about 10 Minutes World Bank report on Water, Electricity and Utility subsidies 분류:전자공학 분류:통신공학
섬네일 전하 (電荷, electric charge)는 전기현상을 일으키는 주체적인 원인이다. 특히 공간에 있는 가상의 점이 갖는 전하를 점전하 라고 하고, 전하의 양을 전하량 이라고 한다. 전하의 국제단위는 쿨롱이며, 기호는 C 이다. 1 쿨롱은 매우 큰 단위이며, 약 6.25개의 전자나 양성자들의 전하의 양이다. 반대로, 전자 또는 양성자 한 개의 전하량은 1.6021773349 쿨롱이며, 이를 기본 전하라고 부른다. 또한,전하는 음의 전하와 양의 전하가 있다. (이는 질량과 같이 양의 값만 있는 다른 물리량과 다르다.) 통상적으로 양성자나 양전자 따위의 전하를 양으로, 전자 등의 전하를 음으로 놓는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이미 호박을 문지르면 옷자락이나 먼지 같은 것들이 달라붙는 다는 것이 알려져 있었다. 유럽의 언어들에서 전기를 뜻하는 단어들(, 은 호박을 뜻하는 에서 기원하였다. 18세기 중엽 벤저민 프랭클린은 뇌우 속으로 연을 날리는 매우 위험한 실험을 통해 번개가 호박에 의해 발생되는 것과 동일한 전기임을 입증하였다. 같은 종류의 전하 사이에서는 척력이 작용하고 다른 종류의 전하 사이에서는 인력이 작용한다. 이 두 종류의 전하를 양전하 와 음전하 라고 한다. 물체가 양전하 또는 음전하를 띄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기본 입자의 전하 때문이다. 전자는 음전하를 띄고 두 개의 위 쿼크와 하나의 아래 쿼크로 이루어진 양성자는 양전하를 띈다. 기본 입자를 고려하지 않는 원자 단위 이상에서 전하량은 모두 전자 한 개의 전하량인 1.6021773349 에 대한 정수배로 존재한다. 즉, 일반적인 경우 전자 한 개가 갖는 전하량이 전하량의 최소 기준으로 사용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원자는 양성자와 전자의 수가 균형을 이루어 전기적으로 중성인 상태에 있다. 그러나, 원자의 가장 바깥 껍질에 위치한 전자는 상대적으로 약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마찰과 같은 물리적 힘에 의해 쉽게 원자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렇게 한 물질에서 다른 물질로 전자들이 이동하게 되면 전자를 잃은 쪽 물질은 양전하를 띄게 되고 반대편의 물질은 음전하를 띄게 된다. 마찰과 같은 것에 의해 축적되어 흐르지 않는 전기를 정전기라고 한다. 전기가 잘 흐르지 않는 부도체가 마찰하면 정전기가 발생한다. 예를 들어 건조한 겨울철 고무나 플라스틱으로 된 밑창이 달린 신발을 신고 걷는다면 마찰로 인해 우리 몸에 정전기가 발생할 것이다. 이렇게 발생된 정전기는 자동차 문 손잡이와 같은 금속을 만나면 전기충격을 줄 수도 있다. 샤를 드 쿨롱은 금속공과 비틀림 저울을 이용하여 두 점전하 사이에 작용하는 힘을 측정하고, 두 전하 사이에서 작용하는 힘은 두전하 크기의 곱에 비례하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쿨롱의 법칙을 발견하였다. 쿨롱의 전하 측정 시험 ---- 샤를 드 쿨롱이 고안한 전하 측정 시험장치 시험과정 1. 금박을 입힌 작은 금속공을 여러 개 준비한다. 2. 하나의 금속공을 마찰하여 정전기를 대전시킨다. 3. 대전된 금속공에 다른 금속 공을 접촉시키면 각 금속공의 전하량은 원래 전하량의 ½이 된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마찰로 대전된 전하량에 대해 1/4, 1/8, 1/16의 전하량을 갖는 금속공을 준비한다. 4. 왼쪽 그림과 같은 비틀림 저울을 설치하고 한쪽에는 1/2 전하량을 갖는 금속공을 놓고 다른 쪽에는 서로 다른 전하량을 갖는 금속공을 연결하여 금속공이 이동하는 거리를 측정한다. 시험 결과 두 전하 사이에서 작용하는 힘은 두전하 크기의 곱에 비례하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위 실험 결과를 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F 두 전하 사이의 거리 위 식에서 Ke는 쿨롱 힘 상수로 이 상수의 크기는 다음과 같다. : N m2 C−2 따라서, 각각 1C의 크기를 갖는 두 전하가 1m의 거리에 있을 때 발생하는 힘은 다음과 같이 계산될 수 있다. C−2 : 100만 t중 즉, 각각 1C의 전하량을 갖는 두 점전하가 1m의 거리에 있을 때 발생하는 힘은 10t 트럭 10만 대와 맞먹는다. 이렇게 큰 힘이 기준 단위가 된 것은 전기에 대한 상세한 지식이 없는 시절에 이를 측정 단위로 삼았기 때문이다. 실제 일상 생활에서 발생하는 정전기의 전하량은 대략 에서 쿨롱 정도에 불과하다. 하나의 전자가 갖는 전하량은 너무 작기 때문에 실제 전하량을 측정하는 SI 단위인 쿨롱은 6.24150962915265개의 전자가 한꺼번에 수송하는 전하량을 사용한다. 이 때 전류의 단위 암페어는 1초 동안 1쿨롱의 전하가 흐른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기본 전하 전기장 전기 방전 분류:물리량 분류:화학적 성질 분류:전기 분류:전자공학 분류:통신공학 분류:보존 법칙
쿨롱 법칙 () 또는 쿨롱 힘 법칙 ()은 두 대전된 입자 사이에 작용하는 정전기적 인력이 두 전하의 곱에 비례하고, 두 입자 사이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법칙이다. 역제곱 법칙의 하나다. 샤를 드 쿨롱이 발견했다. 샤를 드 쿨롱은 금속공과 비틀림 저울을 이용하여 두 점전하 사이에 작용하는 힘을 측정하고, 두 전하 사이에서 작용하는 힘은 두전하 크기의 곱에 비례하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쿨롱 법칙을 발견하였다. 쿨롱의 전하 측정 실험 ---- 샤를 드 쿨롱이 고안한 전하 측정 시험장치 실험과정 1. 금박을 입힌 작은 금속공을 여러 개 준비한다. 2. 하나의 금속공을 마찰하여 정전기를 대전시킨다. 3. 대전된 금속공에 다른 금속 공을 접촉시키면 각 금속공의 전하량은 원래 전하량의 ½이 된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마찰로 대전된 전하량에 대해 1/4, 1/8, 1/16의 전하량을 갖는 금속공을 준비한다. 4. 왼쪽 그림과 같은 비틀림 저울을 설치하고 한쪽에는 1/2 전하량을 갖는 금속공을 놓고 다른 쪽에는 서로 다른 전하량을 갖는 금속공을 연결하여 금속공이 이동하는 거리를 측정한다. 실험 결과 두 전하 사이에서 작용하는 힘은 두전하 크기의 곱에 비례하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위 실험 결과를 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 전기력 = 쿨롱 상수 · = (전하의 크기)의 곱 = 두 전하 사이의 거리 두 전하의 부호가 같으면 밀어내고, 다르면 끌어당긴다. 위 식에서 ke는 쿨롱 힘 상수 로 다음과 같다. : (N · m2 · C−2 ) 따라서, 각각 1C의 크기를 갖는 두 전하가 1m의 거리에 있을 때 발생하는 힘은 다음과 같이 계산될 수 있다. : (Kg중) = 100만 t중 즉, 각각 1C의 전하량을 갖는 두 점전하가 1m의 거리에 있을 때 발생하는 힘은 1t 트럭 100만 대와 맞먹는다. 이렇게 큰 힘이 기준 단위가 된 것은 전기에 대한 상세한 지식이 없는 시절에 이를 측정 단위로 삼았기 때문이다. 실제 일상 생활에서 발생하는 정전기의 전하량은 대략 에서 쿨롱 정도에 불과하다. 쿨롱 법칙은 만유인력의 법칙과 같이 역제곱 법칙, 즉 전하를 띤 두 물체 사이에 가해지는 힘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이는 공간이 3차원일 때 일정한 밀도로 퍼져나가는 전기장이 어떤 거리에서 2차원 면을 이루는 것과 관계가 있다. 비오-사바르 법칙 전기장 쿨롱 전자기 상호작용 네이버 캐스트 - 전기력 분류:과학 법칙 분류:물리학의 기본 개념 분류:사람 이름을 딴 낱말 분류:전자기학 분류:정전기학 분류:힘
전기장 (電氣場, electric field)은 관찰 대상인 전하를 띤 물체가 공간 상의 어느 점 P에 있는 시험 전하에 가해주는 단위 전하량 당 전기력을 뜻한다. 즉, 시험 전하가 느끼는 전기력을 시험 전하의 전하량으로 나눈 값이다. 전기장은, 어느 전하가 다른 전하에 전기력을 가할 때, 순간적인 원격 작용이 아니라 이러한 전기력을 매개해줄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만든 개념이다. 즉, 전기력이 갖고 있는 원격력의 성질을 설명하기위해 도입한 개념이다. 전하가 주위에게 전기력을 행사하기위해 주위공간을 적합하게 변형시킨 것이 전기장이다. 또 다르게 말하면, 전기장은 공간상에 전하가 존재할 때, 그 전하에 의해 생기는 공간상 각 지점의 전위의 기울기를 말한다. 전위의 기울기이기 때문에, 단위는 V/m가 된다. 또한 일반적으론, 공간상의 한 점의 전기장의 크기는 그 지점에 단위전하(+1 C)을 놓았을 때 그 전하가 받는 전기력으로 정의한다. 따라서 단위는 N/C 이며, 단위는 위와 동일하게 V/m이다. 전기장 전하량 demonstrating static cling with styrofoam peanuts.jpg|thumb|300px|전기장의 존재 증거. 고양이의 움직임으로 인한 마찰전기가 고양이의 털에 정전하를 발생시킨다. 정전하들의 전기장은 스티로폼의 분자들을 극화시키고(정전유도), 충분히 가벼워서 전기력이 중력보다 큰 스티로폼 조각들이 고양이 털에 들러붙는다. * 전기장의 단위 유도 변위 Displacement 에너지 Energy 단위 전하가 갖는 에너지 = 전위 가 두 전하 사이의 중점으로부터 특정 위치까지의 거리이고, 는 전기 쌍극자모멘트 라고 할 때, 다음 공식이 성립한다. 진공의 유전율 전하 분류:전자기학 분류:전기 분류:힘 분류:물리량
가우스 법칙 ()은 폐곡면을 통과하는 전기 선속이 폐곡면 속의 알짜 전하량과 동일하다는 법칙이다. 맥스웰 방정식 가운데 하나다. 가우스 법칙은 미분 형태와 적분 형태가 있다. 두 형태는 발산정리 에 대등하다. 가우스 법칙의 적분 형태는 다음과 같다. 여기서 는 변위장(전속밀도), 는 표면 A 위의 미소 면적을 나타내는 벡터 (그 지점의 접평면에서 바깥쪽을 향하는 법선 벡터), 는 폐곡면 속의 알짜 자유 전하량이다. 는 표면 A 전체에 대한 면적분이다. 가우스 법칙의 미분 형태는 다음과 같다. 여기서 는 발산 연산자, 는 변위장(전속밀도), 는 자유 전하 밀도다. 위 공식은 자유 전하에 대한 가우스 법칙이다. 즉, 와 는 매질 속의 분극 전하를 포함하지 않는다. 분극 전하를 포함한 모든 전하에 대한 공식은 다음과 같다. :. 여기서 는 알짜 전하 (분극 전하 포함), 는 전하 밀도 (분극 전하 포함)다. 는 전기장이다. 는 진공의 유전율로, 기본 상수다. (전도체 표면, σ는 단위면적당 전하량이다.) (도선, λ은 단위길이당 전하량이고, r은 가우스 표면까지의 거리이다.) (면) (구 껍질 또는 꽉찬 구에서, r≥R인 구의 표면) (구 껍질에서, r<R인 구의 표면) (꽉찬 구에서, r≤R인 구의 단위면적당 전하)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가 1835년에 발견하고, 1867년에 발표하였다. 맥스웰 방정식 발산 정리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분류:전자기학 분류:사람 이름을 딴 낱말 분류: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분류:맥스웰 방정식
전위 ( 또는 전기 퍼텐셜 은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 전기장에서 단위 전하가 가지게 되는 전기적 위치 에너지다. 국제단위계에서 단위는 볼트다. 맥스웰 방정식에 따르면 인데, 정전기학에서는 전하가 움직이지 않으므로, 자기장이 없고, 따라서 이 값이 0이 된다. 즉 의 회전이 0이 되므로 이를 어떤 스칼라함수의 기울기로 표현할 수 있다. 보통 그 스칼라 함수를 라고 쓰고, 를 전위라고 부른다. 즉 가 된다. 위치 에너지가 절대적인 값이 아니라, 두 지점 사이의 위치 에너지 차이만이 절대적인 값인 것처럼, 전위 또한 상대적인 값이다. 즉 특정 지점의 전위는 임의로 정의할 수 있고, 두 지점의 전위차만이 물리적 의미를 갖는다. (전위차는 전압이라고도 불린다.) 수학적인 이유는 에 어떤 상수를 더해준 값인 에 대해서도 가 되어 같은 전기장이 나오기 때문이다. 다만, 이론 물리학에서는 통상적으로 계에서 "무한히 먼 곳"에서의 전위를 0으로 놓는다. 전기 회로에서는 보통 접지(接地의 전위를 0으로 놓거나, 아니면 회로도에 어느 점의 전위를 0으로 정의하는지 표시한다. 전위는 에너지와 전하의 비(단위전하가 가지고 있는 정전기 퍼텐셜 에너지)이다. 즉, 전위의 국제 단위인 볼트는 다음과 같다. 볼트(V) = 줄(J)/쿨롱(C). (전위차의 정의) (전위의 정의) 두 점의 전위차()는 두 점 사이의 전기장을 선적분 한 값이다. 이때, 전기장은 보존장이기 때문에 적분구간의 모양은 상관 없고, 적분구간의 시작점과 끝점만 중요하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존재하는 점전하 q가 있을 때, 이 전하에서 r만큼 떨어진 곳의 전위는 위의 공식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이 공식은 무한히 먼 곳의 전위를 0V라고 놓은 다음에 세운 공식이다. = 진공의 유전율 공간에 점전하 n개가 존재할때, 특정 지점의 전위는 위의 공식과 같이 구할 수 있다. = 각 전하의 전하량 = 전위를 구할 지점에서 각 전하까지의 거리 전기적 위치 에너지 분류:전자기학 분류:퍼텐셜 분류:전압
섬네일 전류 (電流)는 전하의 흐름으로, 단위 시간 동안에 흐른 전하의 양으로 정의된다. 전하의 흐름은 전선과 같은 도체, 전해질의 특성을 갖는 이온, 플라스마 등에서 일어난다. 전류의 SI 단위는 암페어로 1 암페어는 1 초 당 1 쿨롱의 전하가 흐르는 것을 뜻한다. 암페어는 기호 A로 표기한다. 전류는 일정 시간 동안 흐른 전하량의 비율로 정의된다. I-전류, Q-전하, t-시간 전류의 SI 단위는 암페어이고 기호 A로 표기한다. 1 암페어는 1 초에 1 쿨롱의 전하가 흐른 것을 뜻한다. A-암페어, C-쿨롱, s-초 mA-밀리암페어, µA-마이크로암페어, nA-나노암페어 전류의 종류로는 도체에서 일어나는 전하의 흐름인 전도 전류와 진공관과 같은 것에서 일어나는 전하를 갖는 대전 입자의 흐름인 대류 전류가 있다. 전도 전류는 금속과 같은 도체에서 원자는 물체의 결합구조를 유지한채 전자의 이동만으로 이루어지는 전류인 반면, 대류 전류는 대전 입자 자체가 이동하여 일어나는 전류이다. 대류 전류는 전도 전류와 달리 옴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 전류의 방향에 대해 수직인 단면에서 단위면적 당 전류의 양을 전류밀도라고 한다. SI 단위는 제곱미터 당 암페어(A/m²)이다. 정의에 따라서 전류와 전류밀도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관계가 성립한다. I-전류 J-전류밀도, A-전류가 흐르는 단면적 전류밀도는 전류의 종류에 따라 전도전류밀도와 대류전류밀도로 구분된다. 도체에서 일어나는 전류의 흐름인 전도 전류는 한 방향으로 연속하여 전류가 흐르는 직류와 일정한 주기에 따라 전류의 방향이 바뀌는 교류로 구분된다. 직류와 교류의 전류 흐름이 다른 것은 전류를 만드는 방식의 차이 때문이다. 전지와 같이 일정한 전위차가 유지되는 전원에 연결된 전기회로는 양극에서 음극으로 지속적인 전류가 흐르게 된다. 한편, 교류는 발전기와 같은 것을 전원으로 한 전류이다. 현재 대부분의 가정에는 교류전원이 공급되나, 가전제품에는 주로 직류가 사용되기 때문에, 대부분의 전기 제품은 교류를 직류로 바꾸는 정류기를 사용하거나 둘 다 같이 사용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전류와 자기장 전류가 흐르는 도선에는 오른쪽 그림과 같이 자기장이 형성되는데 이를 앙페르의 회로법칙이라고 한다. 앙페르의 회로법칙은 전자기역학의 성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 직류 전기회로에서 전류의 양은 전원의 전압과 회로의 전기저항에 의해 결정되어 전압의 크기에 비례하고 전기저항의 크기에 반비례한다. 이를 옴의 법칙이라 한다. I-전류, E-기전력(전압), R-전기저항 한편 교류에서는 전기저항 대신 다음의 식과 같이 임피던스가 전류의 양에 관계한다. 따라서, 비록 저항이 직접 관여하지는 않지만 교류에서도 여전히 옴의 법칙이 성립한다고 할 수 있다. I-전류, E-기전력(전압), Z-임피던스 전기회로에서 실제 전자의 흐름은 음극(-)에서 양극(+)으로 진행한다. 그러나, 최초 정의한 전류의 흐름은 실제 전자의 운동과 다르게 양극(+)에서 음극(-)인 양전하의 흐름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실제 전류가 흐르는 방향이 정반대로 정의한 까닭은 전류의 흐름을 발견할 당시 과학자들이 전자의 존재를 몰랐기 때문이다. 정공, 양이온처럼 양전하의 이동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전류의 방향은 양전자의 이동 방향과 같은데, 양전하가 이동할 때나 음전하가 이동할 때 만들어진 전류에 현상적인 차이는 없으므로 옛부터 전류의 방향을 양전하의 흐름으로 통일하였다. 1830년대 마이클 패러데이는 아래 그림처럼 전해전도 실험을 하였다. 250px 실험 결과 1. 질산염(AgNO3) 수용액에 은 막대와 강철 스푼을 넣고 전지와 연결한다. 2. 질산염 수용액에 있는 이온들에 의해 전해전도가 일어난다. 3. 전류의 크기와 비례하여 강철 스푼에 은이 축적되어 도금된다. 200px실제 전자의 흐름(녹색)과 반대로 전류의 흐름(적색)은 양극에서 음극으로 흐르는 것으로 정의된다. 패러데이는 이 실험을 통해 전해질의 전도를 통해 축적한 은의 양을 측정하여 전류의 이동을 입증하였으며, 현대 SI 단위를 정의하기 전까지 전류의 단위 1 암페어는 "1초 동안 0.001118 그램의 은을 축적한 전류의 세기"로 정의했었다. 또한, 패러데이는 계속하여 새로운 은 원자를 제공하는 은막대를 양극(anode), 은 원자가 축적되는 강철 쪽을 음극(Cathode)로 정의하고 전류가 양극에서 음극으로 흐른다고 보았다. 이때문에 전류가 실제로는 전자의 흐름이라는 게 밝혀진 오늘날에도 전류의 방향은 실제 전자의 운동과는 반대로 여전히 양극에서 음극으로 흐른다고 정의한다. 전류밀도 교류 직류 전자기 유도 전압 전력 분류:전자기학
전기저항 (電氣抵抗은 도체에서 전류의 흐름을 방해하는 정도를 나타내는 물리량이다. 국제단위계 단위는 옴이고 로 나타낸다. 전기 회로 이론에서는 간단히 줄여 저항 이라고 부른다. 반대로 전기를 얼마나 잘 흐르게 하는 지를 나타내는 물리량은 전기 전도도 (電氣傳導度, Electrical conductance)라고 하고 로 나타낸다. 전기 전도도는 전기저항의 역수이다. film resistor.jpg|섬네일|금속피막 저항기. 사진에 표시된 값은 6.5 이다. 일정한 비저항을 갖는 물체의 저항은 길이에 비례하고 단면적에 반비례한다. 전기저항은 세기 성질과 크기 성질을 모두 보인다. 물질마다 서로 다른 값을 갖는 비저항은 전기저항의 세기 성질이고, 물질의 모양은 크기 성질이다. 전기저항의 비저항(比抵抗, resistivity)은 물질에 따라 서로 다르다. 물체의 저항은 비저항이 클수록, 물체의 길이가 길수록, 단면적이 작을수록 커진다. 어떤 물질의 비저항을 , 길이를 , 단면적을 라고 할 때 저항 의 크기는 다음과 같은 관계를 보인다. 전기 회로에서 저항은 전류의 흐름을 방해하여 전압 강하를 일으킨다. 따라서 회로의 두 지점 사이의 저항 은 전압 와 전류 의 비로 나타낼 수 있다. 한편, 회로의 전기 전도도는 저항의 역수로 나타낼 수 있다. - 전기 전도도, - 비저항 비저항의 크기가 작아 전기를 잘 전달하는 물질을 도체, 비저항의 크기가 커서 전기를 잘 전달하지 못하는 물질을 부도체라고 한다. 반도체는 주어진 조건에 따라 도체와 부도체의 특징을 모두 보일 수 있는 물질이다. 잘 알려진 물질의 상온 비저항은 다음과 같다. + 물질의 상온 비저항 물질 비저항 (단위 은 1.59 구리 1.68 알루미늄 2.65 텅스텐 5.6 철 9.71 백금 10.6 납 22 물질의 비저항은 온도에 따라 달라진다. 온도에 따른 비저항 변화 비율을 저항온도계수라고 하고 일반적으로 로 나타낸다. 온도의 변화를 라고 하면 상온 비저항 에 대한 변화된 비저항 는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전기회로에 사용되는 저항기의 저항온도계수는 1백만분의 1 °C를 기준으로 하는 ppm/°C 로 나타낸다. 금속피막형 저항기의 경우 저항온도계수는 약 ±50 - ± 200 ppm/°C 정도이다. 종류의 전기 회로 소자에서 나타나는 전류-전압 특성. 저항값이 큰 저항기, 저항값이 작은 저항기, 다이오드, 전지 독일의 물리학자 게오르크 옴이 발견한 옴의 법칙은 전류와 전압 사이에 일정한 비례 관계가 성립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법칙이다. : 전류, 전압 옴은 전압과 전류의 이러한 비례 관계를 토대로 전기저항을 정의하고 다음과 같은 관계를 정리하였다. : 전류, 전압, 저항 전기 회로에서 직류와 달리 교류는 일정한 주기를 갖고 전압과 전류가 변화한다. 일반적으로 전압, 전류의 변화는 사인파 형태를 띈다. 따라서 한 주기를 놓고 보았을 때 전체 전압 또는 전류의 총 변화량은 0 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실제 전기 회로가 하는 일의 양은 0 이 아니므로 특정 순간의 전압과 전류의 양인 순시값과 일정 주기에서 실재 투여되는 실효값을 고려하여야 한다. 온저항()은 교류에 옴의 법칙을 적용하여 교류의 전류에 대한 전압의 비를 나타낸 것이다. 약어로는 가 쓰인다. 회로 이론에서는 영어인 임피던스로 표기되는 경우가 더 많다. : 온저항, 전류, 전압 일반적인 공급 전원은 동상(同相, in phase)이므로 전압과 전류의 위상과 순간 변위는 같다고 간주하여 계산할 수 있다. 전기 회로가 저항 성분만을 갖는다면 전압과 전류의 위상변화는 없고 온저항 역시 전원의 실효 전압과 실효 전류로만 계산될 수 있다. 그러나, 유도계수를 갖는 유도자나 전기용량을 갖는 축전기는 전류와 전압의 위상을 변화시킨다. 순수한 유도계수 회로나 전기용량 회로에서 전압과 전류는 90°의 위상차이를 보인다. 실재 모든 전기 회로는 저항 성분이 함께 나타나기 때문에 전압과 전류의 위상차는 0°와 90°사이의 어떠한 값이 된다. phase.png|섬네일|가운데|300px|축전기(위)와 유도자(아래)의 전압 전류 위상 변화 교류 전기 회로에서 온저항은 전압과 전류의 위상차에 따른 변화를 반영하여 계산하게 된다. 위상차에 의해 발생하는 저항 성분의 변위 백터를 반응저항이라고 한다. 반응저항은 빛이나 열을 발생시키는 일을 하지는 않지만 전기 에너지의 일부를 흡수하거나 배출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온저항의 값에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교류 회로의 전기저항은 빛과 열을 발생시키며 전기 부하의 역할을 하는 실효저항과 유도자나 축전기 등의 위상 변화에 따라 발생하는 반응저항으로 구분될 수 있다. 실재 전기 부품은 유도자나 축전기 역시 스스로도 자체 저항값을 갖고 있기 때문에 순수한 유도계수나 전기용량에 부품 자체의 실효저항을 직렬 연결한 것으로 파악하는 등가회로를 이용하여 계산한다. 순수 유도계수에 의한 위상 변화는 전류가 전압보다 90° 앞서고, 전기용량에 의한 위상 변화에서는 전류가 전압보다 90°뒤에 놓인다. 어느 경우든 전기회로에서 이러한 위상 변화는 결국 전류 진행 방향에 반대되는 기전력을 일으켜 전류의 흐름을 방해하게 된다. 이것이 빛과 열을 발생하지 않음에도 이들이 저항으로 분류되는 이유이다. 일반적으로 실효저항은 , 유도반응저항은 , 용량반응저항은 로 표기한다. 유도반응저항 과 용량반응저항 는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 유도반응저항, 주파수 성분에 따른 위상, 유도계수 : 용량반응저항, 주파수 성분에 따른 위상, 전기용량 온저항은 실효저항과 반응저항의 제곱평균제곱근으로 나타낼 수 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계산된다. :(온저항)2 = (실효저항)2 + (반응저항)2 : = (실효저항)2 + (유도반응저항 - 용량반응저항)2 온저항을 라 하면, 온저항은 반응저항의 위상 변화를 복소평면에 두어 계산될 수 있다. 이때 온저항은 다음과 같이 나타낸다. (는 허수 단위) 복소평면에 놓인 온저항. 실효저항이 실수축, 반응저항이 허수축에 놓이고 온저항은 이 둘의 백터로 표시된다. 온저항 백터를 나타내는 복소평면에서 허수축은 반응저항에 따른 위상 변화의 발생을 나타낸다. 반응저항이 0보다 크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회로에서 측정하는 두 지점 사이에 흐르는 전류의 위상이 전압 위상의 변화보다 지연된다는 의미이고 0보다 작다면 그 반대를 뜻한다. 전기 이론 옴의 법칙, 전력, 전압, 전류 전기 회로 저항기, 축전기, 유도자 분류:전자공학 분류:물리량 분류:전기
전력 (電力)은 단위 시간 당 전류가 할 수 있는 일의 양을 말한다. 전기 회로에서 일을 하는 순간의 전기량을 전기 전력량 이라 한다. 전력의 단위로는 와트를 사용하고 W로 표시한다. s Law with Voltage source TeX.svg|섬네일|간단한 전기회로. v 전원, i 전류, R 저항 전기 회로에서 전력은 전류와 전기저항 사이의 관계에 의해 정의된다. 그림과 같은 단순한 전기 회로에서 전기저항 R은 전류를 소비하면서 열을 발생시킨다. 1840년 영국의 물리학자 제임스 프레스콧 줄은 전기 회로에서 저항에 의해 발생하는 열량이 다음과 같은 관계를 이룬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를 줄의 법칙 이라고 한다. :(Q 열량J, I 전류의 세기A, R 도체의 전기저항Ω, t 전류가 흐르는 시간s) 전기 회로의 저항에서 열이 발생하는 까닭은 저항을 통과하는 전자들이 저항 내의 원자들과 충돌하면서 전기적 위치 에너지를 잃기 때문이다. 전자들이 잃은 에너지는 저항 내에 있는 원자들의 진동 에너지로 전환되고, 그 결과 열이 발생한다. 이렇게 발생하는 열을 줄열이라고 하고 그러한 변환을 손실이라고 한다. 전력은 전기 회로 전체가 소비하는 단위 시간당 줄열 발생량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전압은 전류와 저항의 곱으로 나타낼 수 있으므로 위 식은 아래와 같이 간단히 할 수 있다. :P 전력, V 전압, I 전류 따라서 전력은 전압과 전류의 곱으로 나타낼 수 있다. 일정한 방향으로 계속하여 흐르는 전류를 직류라고 하고, 주기적으로 전류의 방향의 바뀌는 전류를 교류라고 한다. 전기 회로에서 저항으로 작용하는 구성 요소인 전기 부하는 직류와 교류에서 서로 다르게 작용하기 때문에 전력 역시 직류 전력과 교류 전력의 계산 방식이 다르다. 한편, 교류 전력의 경우 파동의 성질을 지니기 때문에 위상에 따른 성질을 지닌다. 직류 전력의 계산은 전력의 정의에서와 같이 간단히 기전력을 일으키는 전압과 전류의 양으로 계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전기 회로에 1.5V 의 전압으로 300 mA의 전류가 흐른다면 전력은 0.45 W 가 될 것이다. 전기 회로에 여러 전기 부하가 직렬 또는 병렬로 연결되면 전체 전력은 각 부분 부하가 소비하는 전력의 합과 같다. 일반적인 교류는 사인파의 형태를 띈다. 교류의 경우엔 계산이 몹시 복잡해진다. 교류는 패러데이 전자기 유도 법칙에 따라 생성되어 일정한 주기를 갖고 방향을 바꾸는 파동 에너지이다. 발전원에 따라 다양한 파형이 있을 수 있으나 안정적인 에너지원으로 쓰이기 위해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전원은 사인파의 형태를 띈다. 교류의 주기는 보통 50 Hz 또는 60 Hz가 쓰이며, 대한민국의 경우 60Hz이다. 교류의 전압과 전류는 아래의 식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V(t) 순간 전압, Vm 최대 전압, 위상, Θt 전압의 순간 변위 :i(t) 순간 전류, Im 최대 전류, 위상, Θi 전류의 순간 변위 따라서 특정 순간의 전력은 아래와 같이 나타낼 수 있다. : : 일반적인 공급 전원은 동상(同相, in phase)이므로 전압과 전류의 위상과 순간 변위는 같다고 간주하여 계산할 수 있다. 위의 교류 전력식 P(t)는 일정한 주기를 갖는 주기 함수이다. 교류 전력은 일정한 주기를 갖기 때문에 주기를 단위로 하여 합하면 상쇄되어 0 이 되어 버리고 만다. 그러나 매 시각의 전력은 분명 0 이 아니기 때문에 실제 줄열을 발생시키는 유효 전력을 계산할 필요가 있다. 전기 회로 이론에서는 조화 함수를 사용하여 제곱평균제곱근의 양으로 전압과 전류의 실효값를 계산하고 이를 통해 유효전력을 나타낸다. 교류 전력을 사용하는 전기 회로에서 부하를 통과하는 전류는 부하의 특성에 따라 전압과 전류의 위상에 차이가 생기게 된다. 이 때문에 교류 전기 회로의 전력은 전기저항(Residence), 유도계수(Inductance), 전기용량(Capacitance)에 대하여 따로 계산되기도 한다. 전류가 각각의 부하를 통과할 때 줄열을 발생시키는 유효 전력은 저항 성분에서만 발생하고 유도자나 축전기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 교류 전력 삼각형 P 실효 전력 Q 무효 전력 S 복소 전력 φ 전류에 대한 전압의 위상 교류의 전체 전력은 조화 함수를 이용하여 아래와 같이 나타낸다. S 복소전류, P 유효전력, j 허수 단위, Q 무효전력 저항 성분을 통해 발생하는 유효 전력과 달리 유도계수나 전기용량에 의해 소모되는 전력은 빛이나 열을 발생시키지 않기 때문에 무효 전력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무효전력도 실재 전력 변화에는 관여하기 때문에 유효 전력은 전체 복소전류의 절대값인 피상전류를 포함하여 계산하게 된다. 교류 전력 삼각형은 복소전류와 유효전류, 무효전류 간의 관계를 나타낸다. 교류 전력에서 실제 부하에 사용되는 전력은 유효전력이고 무효전력은 별다른 일을 하지 않는다. 따라서 전력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유효전력을 높이고 무효전력을 낮추어야 한다. 위 식에서 보면 유효전력과 무효전력의 위상이 0 이 될때 가 되어 유효전력은 100% 사용하고 무효전력은 0 %로 낮추는 이상적인 상태가 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전기회로에서는 이와 같은 이상적인 상태는 불가능하므로 최대한 의 값이 1에 가깝게 되도록 노력한다. 이때 를 역률이라고 하고 이 값을 크게 하려는 활동을 역률 개선이라고 한다. 삼상교류의 발생. 자석 안쪽에 세 축으로 나뉜 전선이 회전하여 삼상 유도 전류를 만드는 것을 설명하는 그림 교류는 위상을 가지므로 상의 수에 따라 단상전력과 3상전력으로 나뉜다. 상이 하나인 것은 단상, 셋인 것은 삼상이라고 부른다. 삼상은 단상 교류 셋을 위상을 달리하여 결합한 것이다. 단상전력은 위에서 설명한 일반적인 전력 관계식을 따른다. (에너지 전송의 비율) (저항으로 인한 손실) (저항으로 인한 손실) 삼상전력의 상전압 과 선전압 은 아래의 관계식을 따른다. 삼상전력은 순간 전력 총합이 언제나 일정하기 때문에 전동기를 가동할 때 일정한 전력을 계속하여 공급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그러나 단상에 비해 전기 누설의 위험이 크므로 사용에 주의하여야 한다. 삼상 전력은 전동차나 대형 에어컨과 같이 전동기를 계속하여 사용하는 기계에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전력은 전원을 통해 공급된다. 전원은 크게 보아 직류와 교류로 구분되며 가전제품이나 전자제품은 대부분 직류로 작동된다. 그러나 직류를 발전하여 한 지역에 공급하는 것은 매우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대규모 전력 공급은 교류로 제공되며 각각의 전기 기기는 정류기를 이용하여 교류를 직류로 변환해 사용한다. 교류를 계속하여 공급받을 수 없는 상태에서 사용하는 기기인 휴대전화와 같은 이동용 기기에는 전지가 사용된다. 송전선 발전소에서 공급되는 전류는 송전선을 통해 소비자에게 전달된다. 송전선 역시 일정한 저항을 갖는 도체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전기가 전달되는 동안 열을 발생시켜 전력 손실이 일어난다. 줄의 법칙에 따라 같은 전력을 전달할 때 전류와 저항은 반비례 관계에 놓인다. 따라서 송전선의 전력 손실을 최소화 하기 위해서는 되도록 전선의 저항을 낮추거나 전압을 올려야 한다. 전선의 저항을 낮추는 것은 기술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에 전압을 올리는 쪽이 경제적이다. 발전소에서 고압의 전류를 송전하는 이유다. 어떤 경우에는 765 kV까지 전압을 올린 고압 전류를 송전한다. 이렇게 전송된 전류는 도시나 공장과 같은 소비지 근처의 변전소까지 전달되고, 이 곳의 변압기를 통해 22.9 kV로 낮추어진 다음 다시 곳곳에 설치된 변압기를 거쳐 220 V 또는 380V 와 같은 사용 전압으로 낮춰져 쓰인다. 대한민국의 가정용 단상 교류 전압은 220V 이고, 일본이나 대만과 같은 나라에선 110V 가 가정용 소비 전압으로 제공된다. 전력량 에너지 개발 발전 (전기) 전기 전압 전류 전원 분류:전자기학
벨기에 왕국 (, , , 줄여서 벨기에 (, , 는 서유럽에 있는 입헌 군주국이다. 네덜란드, 프랑스, 룩셈부르크, 독일과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베네룩스 3국 중 하나이다. 공용어는 독일어, 네덜란드어, 프랑스어이다. 벨기에는 본래 네덜란드의 남부 지역이었으나 네덜란드 독립 전쟁(1568~1648년) 이후 북부와 분열되면서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1793년 프랑스는 벨기에를 합병하였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벨기에는 북부의 네덜란드 연합 왕국과 합쳐지게 되었으나 절대주의적 통치와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교회라는 신앙적인 차이로 인해 왈롱인들의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다. 프랑스 국내에서 7월 혁명이 일어난 1830년, 이 혁명에 자극받은 왈롱인들이 8월 5일경 혁명을 일으켰다. 이를 벨기에 사람들은 벨기에 혁명이라고 부르는데, 그들은 이 날을 독립 기념일로 여긴다. 네덜란드가 편성한 진압군은 벨기에군을 간단히 격파하였으나 벨기에를 병합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던 프랑스의 무력 및 외교적 압력으로 인해 네덜란드와 벨기에는 1831년 휴전을 맺고 1839년에는 런던조약에 서명하여 벨기에의 독립을 승인하여야만 했다. 벨기에는 국가로 인정받은 이후 해군(Marine Royale; 1865년에 해체되었다가 1917년에 다시 창설)을 창설하고, 식민지 개척을 장려한다. 레오폴 2세 치하인 1878년에는 콩고 지역을 식민지로 삼아 콩고 자유국(1908년부터 벨기에령 콩고)으로 만들었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르완다와 부룬디를 차지하여 벨기에령 루안다-우룬디를 만들어냈다. 벨기에령 콩고는 1960년 6월 30일에 콩고 민주 공화국으로 독립했고, 벨기에령 루안다-우룬디는 1962년 7월 1일에 르완다 공화국과 부룬디 공화국으로 각각 독립했다. 레오폴 2세 지배 당시 벨기에령 콩고는 수 백만명의 목숨이 희생되는 무력과 착취를 겪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 집단 살해 사건은 고무 테러라고 불린다. 1899년 조지프 콘래드는 자신의 저서 ‘암흑의 핵심’에서 처음으로 레오폴 2세 지배 당시 콩고의 참혹한 역사를 처음으로 고발했다. 이 시기에 관해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충격적인 책은 1999년 아담 호츠쉴드의 ‘레오폴드왕의 유령:식민지 아프리카의 탐욕과 테러, 영웅주의의 이야기’였다. 호츠쉴드는 이 책에서 기근과 질병으로 죽어간 수천명과 함께 수많은 콩고 민중들이 상아와 고무에 대해 레오폴 2세가 정한 생산 할당량을 채우지 못해 학살을 당했다고 서술했다. 상아와 고무는 다이아몬드와 구리, 아연이 발견되기 전까지 콩고의 최대 자원이었다. 호츠쉴드는 이같은 학살로 인한 레오폴드왕 시대의 콩고인 사망자 수를 당시 전체 인구의 절반에 해당되는 1000만명으로 추정했다. 또한 레오폴 2세는 한번도 자신이 사유지화한 콩고를 방문한 적이 없지만 콩고로부터 착취한 자원은 레오폴 2세로 하여금 궁전과 기념비, 박물관을 짓고 어린 딸에게 호화스런 옷과 빌라를 사줄 수 있게 됐다고 지적했다. 1916년 벨기에가 제 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독일을 대신하여 르완다를 지배하게 되었고, 투치족에 대한 차별정책을 쓰면서 종족간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벨기에는 투치족 출신 왕들을 내세워 다스렸으나 벨기에가 물러간 후 후투족과 투치족의 갈등으로 르완다 내전이 시작되었다. 르완다 내전이란 1959년에서 1996년까지 아프리카 르완다와 부룬디에서 벌어진 후투족과 투치족의 종족내전으로 르완다 사태라고도 불린다. 수십 년간의 끔찍한 학살과 질병, 기아 등으로 수백만 명이 사망했다. 벨기에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국토 피해를 가장 많이 본 나라이고, 제2차 세계대전 때도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을 당해 지배를 받은 경험이 있다. 루뱅에서는 독일군이 자행한 학살로 많은 시민들이 무고한 죽임을 당하였다(벨기에 사람들은 이를 루뱅 시 학살 사건이라 하여 추념하며, 루뱅에서는 지금도 독일 국기를 게양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부흥이 가장 먼저 이루어진 나라이며 1920년에는 안트베르펜에서 올림픽이 개최되기도 했다. 벨기에 사람들은 레오폴 3세를 싫어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레오폴 3세와 전왕(前王)인 알베르 1세와는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알베르 1세는 전쟁이 터졌을 때 국민과 군인들을 자주 만나고, 자신도 전쟁에 나섰다고 하여 국민들이 칭송하지만 레오폴트 3세는 나치 독일의 군대가 벨기에를 포위할 때 항복했기 때문이다. 그는 1951년에 퇴위를 선언하고, 보두앵을 국왕으로 임명한다. 벨기에는 1993년에 연방 국가로 탈바꿈했으나, 최근 북부와 남부의 갈등이 심화되기도 하였다. 국왕의 중재아래 2008년 3월에 연립 정부가 구성되었다. 또한 벨기에는 1993년 11월 1일 유럽연합이 탄생되면서 유럽연합의 본부가 설치된 나라이기도 하다. 벨기에는 프랑스, 독일, 룩셈부르크, 네덜란드와 국경을 접한다. 전체 면적은 33,990km2로 저지대를 뺀 온전한 땅만을 취한다면 30,528km2이다. 쾨펜의 기후구분에 따르면 서안해양성 기후인 Cfb이다. 이 나라는 국왕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입헌 군주제이다. 현재 국왕은 필리프 1세다. 정치적으로는 의원내각제를 실행하고있다. 현재 총리는 혁신운동 출신의 샤를 미셸이다. 벨기에는 언어 사용 지역별로 지역주의가 굉장히 강하며, 벨기에 노동당을 제외한 다른 모든 원내 정당은 지역정당이다. 플랑드르 지역은 신플람스 연맹, 열린 플람스 자유민주당, 기독교민주당과 플람스, 다른 사회당, 녹색당, 플람스의 이익이, 왈롱 지역은 사회당, 혁신운동, 생태당, 인문민주중도당, 데피, 인민당이 의석을 확보하고 있다. 전국민의 약 57%를 차지하는 북쪽의 플랑드르 지역에서는 플랑드르인(자신들은 플라밍 라고 부른다. Vlaming)이 네덜란드어를 사용하고, 32%를 차지하는 남쪽의 왈로니 지역에서는 왈로니인(왈롱, wallons)들이 프랑스어를 사용한다.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도 살고있으며, 벨기에 경제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 모로코, 터키와 콩고 (대부분 브뤼셀에 거주) 등지에서 온 이민들이다. 공식 언어 공식 공용어는 네덜란드어, 프랑스어, 독일어이다. 벨기에 왕실은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를 모두 구사해야 하며, 미스 벨기에 역시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10%를 차지하는 수도 브뤼셀 지역은 법적으로는 네덜란드어 및 프랑스어 두 언어를 병용하지만, 브뤼셀의 주민 8할 이상이 사용하는 프랑스어가 우위를 점하고 있다. 이 나라의 언어상황을 살피기 위해서는 1993년에 개정한 헌법과 그에 따른 연방제의 구조를 먼저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나라는 프랑스어사용국기구(프랑코포니)의 정회원국이다. 독일어 사용지역(벨기에 독일어 공동체)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벨기에가 독일로부터 할양받은 지역에 해당한다. 본래 독일의 라인 지방의 일부였던 이 지역을 얻은 1919년에 독일어가 공식 공용어로 지정되었다. 벨기에의 모든 학교에서는 영어가 외국어 필수로 지정되어 있으며 스페인어 등을 제2외국어로 선택한다. 그리고 왈롱에서는 네덜란드어를, 플란데런에서는 프랑스어를 외국어로 배운다. 이 나라의 국민의 대부분은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데, 거의 로마 가톨릭교회 소속이다. 그 밖에도 정교회나 개신교 종파가 존재하며, 이민자들로 인해 이슬람교를 믿는 이들도 존재하고 있다. 벨기에의 국군 통수권자는 국왕이며, 4만 1천명의 정규군이 존재한다. # 육군 (Composante Terre), 1830년 창설 (26,400명) # 해군 (Composante Maritime), 1917년 창설 (2,400명) # 공군 (Composante Air), 1915년 창설 (8,900명) # Medical Component (Composante Médicale), 2002년 창설 (2,000명) 200px 1993년 7월 14일 개정된 헌법은 벨기에를 독특한 연방제 국가로 만들었다. 연방은 세 계층으로 구성된다. # 브뤼설에 자리한 연방 정부 # 세개의 언어 공동체 # 세개의 지역 벨기에는 맥주와 초콜릿으로 유명하다. 또한 스머프와 탱탱의 모험 같은 만화들을 제작해내기도 하였다. 수도 브뤼셀에는 오줌싸개 동상이 있어 세계 각지에서 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인다. 이 나라의 공영방송으로는 네덜란드어권의 VRT, 프랑스어권의 RTBF, 독일어권의 BRF가 있으며, 민영방송으로 네덜란드어권의 VTM, 프랑스어권의 RTL-TVI가 있다. 대한민국 벨기에는 1901년에 대한 제국과 수교하였고, 1905년에 단교하였다. 1949년에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하였다. 벨기에군과 룩셈부르크 군은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대한민국을 지원하였다.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는 한국전쟁에 보병 1개 대대(일명 벨룩스 대대, 벨기에 대대에 룩셈부르크가 소대 병력으로 합류)를 파병했다. 휴전 때까지 연인원 약 3천500명이 참전해 106명이 전사했다. 2016년 현재 생존자는 약 730명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브뤼셀에 대한민국 대사관(주 룩셈부르크 대사관, 주 유럽연합 대표부 겸임)이 개설되어 있다. 서울특별시에 주한 대사관이 개설되어 있다. 대한민국의 대(對)벨기에 수출은 22억5537만USD, 벨기에의 대(對)대한민국 수출은 14억5033만USD(각 2011년)에 달하여, 벨기에는 대한민국에 있어서 제35위의 수출국이자 제38위의 수입국이다. 모두 824 명(재외국민 751명, 시민권자 73명)의 한민족들이 벨기에에 거주(2010년 12월 기준)하고 있다. 2002년 FIFA 월드컵 때는 대표팀이 일본과 같은 조에 편성되어 대한민국으로 가지 않고 일본으로 갔으나, 1988년 하계 올림픽 때는 벨기에가 서울에 선수단을 직접 파견하였다. 2014년에는 송도국제도시에 겐트 대학교 캠퍼스가 들어섰다. 1995년에는 아시아나항공이 벨기에로 가는 항공편을 운영하기도 하였으나 IMF 구제금융사건으로 인해 단항되었다. 한편, 설기현이 벨기에 주필러 리그에 진출한 적이 있었으며 벨기에 선수도 K-리그에 진출한 적이 있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2001년에 공식 수교하였다. 이로써 벨기에는 사실상 한반도의 두 개 정부를 모두 인정하고 있는 상황이다. 파키스탄 벨기에는 이슬라마바드에 대사관, 카라치와 라호르에 각각 영사관을 두고 있다. 파키스탄은 브뤼셀에 대사관, 헨트, 안트베르펜, 그리고 벨기에령 룩셈부르크에 각 영사관을 두고 있다. 벨기에는 유럽에서 6위 규모의 파키스탄으로부터의 수입국이며, 양국의 무역 규모는 6억 USD에 육박하고 있다. 2008년 초, 파키스탄의 전 대통령 페르베즈 무샤라프는 그의 유럽 순방(영국, 프랑스, 스웨덴 포함) 중에 벨기에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의 브뤼셀 방문 중, 당시 벨기에 총리 히 버르호프스타트와 함께 무역 및 상호 방위 협약에 대하여 논의한 바 있다. 터키 벨기에는 앙카라에 대사관, 이스탄불에 총영사관, 안탈리아와 이즈미르에 각 영사관을 두고 있다. 터키는 브뤼셀에 대사관, 안트베르펜에 총영사관을 두고 있다. 벨기에 정부 홈페이지 브뤼셀 시 홈페이지 주한 벨기에 대사관 주벨기에 대한민국 대사관 겸 유럽연합 대표부 분류:독일어권 분류:프랑스어권 분류:네덜란드어권 분류:입헌군주국 분류:유엔 회원국 분류:연방제 국가 분류:유럽 연합 회원국 분류:유럽 평의회 회원국 분류:프랑코포니 회원국 분류:북대서양 조약 기구 회원국 분류:경제 협력 개발 기구 회원국
6월 25일 은 그레고리력으로 176번째(윤년일 경우 177번째) 날에 해당한다. 1862년 - 미국 남북 전쟁 북군3군단(군단장 하인첼만) 소속 후커 사단이 남북군 중간지대의 남군을 공격하여 숲 지역 점령하다. 1876년 - 리틀빅혼 전투, 앉은황소를 중심으로 한 인디언 연합이 미국 7기병연대를 무찌른 전투. 1950년 - 오전 4시, 조선인민군의 기습 남침으로 한국 전쟁(6.25전쟁)이 발발하다. 1963년 - 거제 장승포 압사 사고가 일어났다. 1975년 - 모잠비크가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하다. 1991년 -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가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다. 1993년 - 킴 캠벨이 캐나다 최초의 여성 총리로 뽑히다. 1999년 - 코소보 전쟁의 종전. 2007년 - 캄보디아 전세기가 캄보디아 프놈펜 남쪽 130km 떨어진 산 속에 추락, 13명의 한국인을 포함한 22명이 사망하다. 1971년 - 하나은행의 전신인 한국투자금융이 설립되다. 1978년 - 아르헨티나가 1978년 FIFA 월드컵 결승에서 네덜란드를 상대로 연장접전까지 간 끝에 3:1로 승리, 월드컵에서 우승함. 1982년 - 반포대교가 개통됐다. 1998년 - 윈도 98이 영어판으로 최초로 출시되다. 2002년 - 대한민국이 2002년 FIFA 월드컵 4강전에서 발락의 결승골로 독일에 0:1로 패하며 3-4위전으로 밀려났다. 2012년 -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14대 교구장 염수정 대주교의 착좌 미사가 거행되었다. 1852년 - 스페인의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 1894년 - 독일의 과학자 발터 네른스트. 1903년 -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 1919년 - 대한민국의 대중음악 작곡가, 가수 한복남. 1949년 - 대한민국의 배우 겸 방송인 윤주상 1950년 - 대한민국의 성우 기연호. 1963년 - 영국의 가수 조지 마이클 (Wham!). 1968년 - 대한민국의 배우 채시라. 1973년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정세진. 1981년 - 스위스의 스키점프 선수 지몬 아만. 1982년 - 대한민국의 가수 비. 1986년 * 대한민국의 쇼트트랙 선수 이호석. * 일본의 가수 마쓰우라 아야 1987년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배장호. 1988년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정지성. * 대한민국의 컬링 선수 이슬비. 1993년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한현희. 2001년 - 일본의 가수 히라테 유리나. 635년 - 당나라의 초대 황제 고조. 1822년 - 독일의 소설가이자 작곡가 E. T. A. 호프만. 1861년 - 오스만 제국의 31대 파디샤 압뒬메지트 1세 1876년 - 미국의 군인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1939년 - 한국의 소설가 백신애. 1959년 -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 김대중의 첫 번째 부인 차용애 1989년 - 북한의 음악인 이면상. 1996년 - 대한민국의 승려 서경보. 2007년 - 대한민국의 기자 조종옥. 2009년 - * 대한민국의 탤런트 김태호. * 미국의 영화배우 파라 포셋. * 미국의 팝 가수 마이클 잭슨. 6·25전쟁일 유니세프 선정 마룬 5의 날(Maroon 5 Day) (2016년 ~) 전날 6월 24일 다음날 6월 26일 - 전달 5월 25일 다음달 7월 25일 음력 6월 25일 모두 보기
도쿄도 (는 일본의 47개 도도부현 중 하나로 메이지 시대 이후 사실상 일본의 수도이다. 주 섬 혼슈의 동안에 위치해 있다. 일본 동쪽의 태평양에 펼쳐져 있는 도쿄 만에 접하고 있으며 북부는 비옥한 간토 평야이다. 일본의 수도 기능을 하는 도쿄 23구와 다마 지역, 이즈 제도, 오가사와라 제도로 구성된 지방자치단체이다. 한국어에서는 한국 한자음을 따라 동경도 라고도 부른다. 오키노토리 섬과 미나미토리 섬을 관할하고 있어, 일본의 가장 남쪽이자 동쪽의 행정 구역이다. 도쿄도의 동부 도쿄 23구의 인구는 930만 이 넘으며, 도의 총인구는 인구는 약 1,361만 명이다. 일본 인구의 51% 이상이 도쿄, 오사카 부, 나고야 등 3대 도시와 그 인근 지역에 집중되어 있으며, 그중 도쿄가 가장 많다. ‘東京’이라는 한자는 교토(京都)의 동쪽에 있는 도시라는 뜻이다. 도서부(이즈 제도, 오가사와라 제도)도 포함한다. 글로벌 도시인 도쿄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도시들 중 하나로, 세계의 문화, 예술, 패션, 경제, 금융, 제조업, 게임, 첨단산업, 교통, 엔터테인먼트, 상업 등에 있어서 뉴욕과 함께 세계 최고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으며,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의 본사가 가장 많이 밀집한 도시이다. 또한, 세계 최대규모의 지하철•전철 시스템과 교통망을 가진 도시이다. 그리고 1964년 아시아 최초로 하계 올림픽을 개최한 도시이자, 2020년 도쿄 올림픽까지 아시아 최초 두 번의 하계 올림픽 유치에 성공하였다. 도쿄도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의 수도권인 간토지방은 세계 최대의 경제 도시권을 형성한다. 또한, 도쿄는 뉴욕, 런던과 함께 세계 3대 도시로 불린다. Ieyasu2.JPG|섬네일|right|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쿄는 원래 작은 어촌으로 에도라고 명명되었다. 1457년에 오타 도칸은 에도 성을 세웠다. 1590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를 근거지로 삼아 1603년에 쇼군이 되었으며 도시는 막부의 중심지가 되었다. 에도 시대의 18세기 무렵에 인구는 도시로 성장하였다. 263년 후에 막부는 메이지 유신 하에 전복되었다. 1869년에 17세의 메이지 천황은 에도로 천도하였다. 에도는 이미 일본의 정치 문화의 중심지가 되어있었고 예전의 에도 성은 고쿄가 되었다. 1889년 도쿄 부 동부에 도쿄 시가 설치되었다. 도쿄는 20세기에 두 번의 대재해를 겪었으나 곧 복구되었다. 한번은 1923년의 관동 대지진으로 14만 명이 죽거나 실종되었다. 또 한번은 1945년의 도쿄 대공습으로 7만 5천 명에서 최대 20만 명이 사망하였고 도시의 절반이 파괴되었다. 1943년에는 도쿄 부와 도쿄 시를 도쿄 도로 합쳤고, 이전의 도쿄 시 지역은 도쿄 도 구부(東京都區部)로 불리게 되었다. 전쟁 후에 도쿄는 완전히 재건되었고 1964년 하계 올림픽을 개최하여 세계에 그 모습을 보여주었다. 1970년대에는 선샤인60과 같은 고층 건물이 들어섰고 1978년에는 도쿄 인근 지바현 나리타 시에 나리타 국제공항이 건설되었으며 인구는 증가하여 도쿄 도의 인구는 1,100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도쿄 지하철과 통근 철도망은 세계에서 가장 분주한 곳 중 하나가 되었다. 1980년대에 도쿄의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여 버블을 형성하였다. 1990년대 초에 버블이 터지면서 부동산을 담보로 대출한 많은 회사와 은행, 개인들은 자산의 가치가 하락하게 되었다. 경기의 후퇴가 뒤따르면서 일본은 잃어버린 10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도쿄는 여전히 많은 곳에 새로운 도시 개발 계획을 진행하고 있다. 최근의 계획으로는 에비스 공원과 덴노즈 아일, 시오도메, 롯폰기 힐스, 시나가와, 도쿄 역의 마루노우치 부분이 포함된다. 중요한 건물들이 오모테산도 힐스와 같은 최신식 쇼핑 시설을 위해 헐리고 있다. 도쿄의 토지 매립 계획 또한 몇 세기 동안 계속되고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이 오다이바 지역으로 현재 쇼핑과 오락의 중심지이다. 도쿄 도의 행정구역 도쿄 도의 본토 부분은 도쿄 만의 북서쪽에 놓여있고 대략 동서의 길이는 90 km, 남북의 길이는 25 km 정도이다. 동쪽으로 지바현, 서쪽으로 야마나시현, 남쪽으로 가나가와현, 북쪽으로 사이타마현과 접한다.구와 서부의 다마 지역으로 나뉜다. 또한 도쿄 도의 행정 경계는 정남쪽의 두 개의 태평양의 열도를 포함한다. 하나는 이즈 제도이고 또 하나는 일본 본토에서 1000 km 이상 떨어진 오가사와라 제도이다. 이들 섬들과 서부의 산지 지방 때문에 도쿄 도의 인구 밀도는 도쿄의 도시 및 교외 지역의 실제 인구 밀도보다 훨씬 낮게 나타난다. 도쿄 도의 특별구는 예전에 도쿄 시를 이루었다. 1943년 7월 1일에 도쿄 시는 도쿄 부와 합쳐져 현재에 이른다. 이러한 합병의 결과로서 일본의 다른 구들과 달리 특별구는 어떤 대도시의 일부로 취급되지 않는다. 각각의 구들은 일본의 다른 도시들처럼 각자의 시장과 의회를 선출한다. 이들 구들은 도 정부와 독특한 행정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도시들과 다르다. 수도, 하수, 소방과 같은 일부 지자체의 기능은 도 정부가 다룬다. 이러한 행정 비용을 위해 도 정부는 구들에게 세금을 부과한다. 사실상 일본의 수도·경제·정치·방송을 담당하며 관동지방이나 동경 경제권의 중심지이다. 도쿄 23구(동경 23구)는 다음과 같다. 가쓰시카구() 네리마구() 미나토구() 스미다구() 아다치구() 이타바시구() 고토구() 다이토구() 분쿄구() 시나가와구() 아라카와구() 주오구() 기타구() 도시마구() 세타가야구() 시부야구() 에도가와구() 지요다구() 나카노구() 메구로구() 스기나미구() 신주쿠구() 오타구() 1943년 이전에는 도쿄 부에 속했던 지역이다. 도쿄 23구의 서쪽에 위치하며 시와 정, 촌으로 이루어져있다. 도쿄 중심가의 업무 기능을 위한 침상도시 역할을 하며 일부는 지역의 상업와 공업의 기반이다. 도쿄 23구는 물론 도쿄 도와 붙어있는 가나가와현보다도 집값이 싼데다가 전철노선이 잘 갖추어져있어 이곳에서 도쿄 23구 혹은 요코하마 등의 다른 대도시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많다. 다마 지역에는 26개의 도시가 있다. 고가네이 시() 고다이라 시() 고마에 시() 고쿠분지 시() 구니타치 시() 기요세 시() 니시토쿄 시() 다마 시() 다치카와 시() 마치다 시() 무사시노 시() 무사시무라야마 시() 미타카 시() 아키루노 시() 아키시마 시() 오메 시() 이나기 시() 조후 시() 하무라 시() 하치오지 시() 후추 시() 훗사 시() 히가시무라야마 시() 히가시야마토 시() 히가시쿠루메 시() 히노 시() 도쿄 도 정부는 도쿄 중심의 도시 기능을 분산시키기 위한 계획의 일환으로 하치오지 시(), 다치카와 시, 마치다 시, 오메 시, 다마 신시가지는 다마 지역의 지역 중심지로 지정하였다. 도쿄 도의 극서부에는 니시타마 군이 자리하고 있다. 이 지역의 대부분은 산지로 도시화에 적합하지 않다. 도쿄 도에서 가장 높은 산인 구모토리 산(2017m)를 비롯해 다카수 산(1737m), 오다케 산(1266m), 미타케 산(929m)이 이곳에 있다. 야마나시현 주변의 다마 강에 위치한 도쿄 도에서 가장 큰 호수인 오쿠타마 호가 있다. 니시타마 군() * 오쿠타마 정(), 히노데 정(), 미즈호 정(), 히노하라 촌() 섬 국립공원 도쿄 도에는 특별구의 도심으로부터 1850km까지 뻗어있는 수많은 외곽의 섬들이 있다. 신주쿠의 도청사와 섬들의 거리 때문에 지역 사무소가 행정을 담당한다. 이즈 제도는 화산 열도로 후지 하코네 이즈 국립공원의 일부를 이룬다. 섬들로는 도쿄 본토에서 가까운 순으로 이즈오 섬, 도시마, 니지마, 시키네 섬, 고즈 섬, 미야케 섬, 미쿠라 섬, 하치조 섬, 아오가 섬이 있다. 이즈오 섬과 하치조 섬은 정이다. 섬들에는 6개의 촌이 있으며 니지마와 시키네 섬은 하나의 촌을 이룬다. 도쿄 도에는 오가사와라 제도가 포함되며 섬들로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지치지마 섬, 니시노 섬, 하하지마 섬, 기타이오 섬, 이오 섬, 미나미이오 섬이 있다. 오가사와라 지청은 또한 두 개의 조그마한 섬을 관할한다. 하나는 미나미토리 섬으로 일본의 최동단에 있고 도쿄 중심부에서 1850 km 떨어진 가장 먼 섬이다. 또 하나는 오키노토리 섬으로 일본의 최남단에 있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은 사람이 살지 않는 암초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가잔 열도와 외곽의 섬들은 영구적인 정착민은 없지만 자위대가 상주하고 있다. 지역 주민들은 오직 지치지마 섬과 하하지마 섬에만 살며 이 섬들은 오가사와라 촌을 이루고 있다. 오시마 지청() * 오시마 정(), 도시마 촌(), 니지마 촌(), 고즈시마 촌() 미야케 지청() * 미야케 촌(), 미쿠라지마 촌() 하치조 지청() * 하치조 정(), 아오가시마 촌() 오가사와라 지청() * 오가사와라 촌() 도쿄 도에는 다음과 같은 국립공원들이 있다. 메이지의 모리다카오 국정공원이 하치오지 남쪽 다카오 산 주변에 있다. 오가사와라 국립공원 2006년에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우에노 공원 박물관으로 유명한 공원이다. 도쿄 국립박물관, 국립과학박물관, 시타마치 박물관, 국립서양미술관이 이곳에 있다. 또한 공원 도처에 예술 작품과 조각상들이 있다. 도쿄 도는 공식적으로 2개의 상징물이 있다. 하나는 문장(紋章)이고 나머지는 심벌이라고 부른다. 각각의 상징물이 들어간 깃발도 공식적으로 쓰인다. 도쿄도문장 도쿄도문장 (東京都紋章)은 1943년 11월 2일부터 쓰이고 있으며 제 9대 도쿄도지사와 귀족원의원(현재의 참의원)을 지낸 와타나베 히로모토가 디자인하여 1889년 12월부터 쓰인 도쿄 시의 문장과 같다. 고시 제 464호로 인하여 쓰이기 시작했다. 이 문장은 6개의 햇살이 뻗어가는 태양을 나타내며 도쿄가 일본의 중심임을 나타낸다. 다른 형들과 마찬가지로 색이 채택되지 않았다. 이 문장은 간지인 東京(도쿄)의 京(쿄)를 닮았지만 고시에서는 설명이 나타나지 않는다. 도쿄도기 도쿄도기 (東京都旗)는 1964년 10월 1일부터 쓰이고 있으며(고시 제 1042호) 진보라(江戸紫, 에도의 전통색)색 바탕의 중심에 하얀색의 도쿄도문장이 가운데에 들어가 있다. 비율은 2:3이다. 도쿄도심벌기 도쿄도의 심벌마크 (東京都のシンボルマーク)는 1989년 6월 1일 고시 제577호로 채택되었다. 디자인은 도쿄도심벌마크전형위원회의 20명의 지원자가 선택한 것으로 전문 그래픽 디자이너인 레이 요시무라(レイ吉村)가 만든 것이다. 선명한 초록색 심벌을 3개의 호가 있는 은행나무(도쿄도의 나무)의 잎이며 Tokyo의 T를 나타낸다. 도쿄도심벌기 (東京都シンボル旗)는 1989년 9월 30일 고시 제 978호로 채택되었다. 도쿄도의 심벌마크가 흰색 바탕의 기 중앙에 있다. 비율은 2:3이다. 도쿄는 온난 습윤 기후(쾨펜의 기후 구분 Cfa )로 여름은 덥고 습하며 겨울은 온화하다.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하며, 연평균 기온은 15.9℃이다. 눈보라가 이따금씩 발생하며 거의 매년 태풍이 찾아온다. 장마가 6월 중순경부터 시작되므로 봄·가을에 여행하는 것이 좋다. 2016년 6월 기준으로 도쿄 도의 인구는 13,613,660명 도쿄 23구의 인구는 896만 7천 명으로 추정되었다. 주간에는 인접한 지역으로부터 통근하는 250만 명의 노동자와 학생들이 유입된다. 이 결과 도심인 지요다 구, 주오 구, 미나토 구의 2005년 인구는 야간에는 32만 6천 명이지만 주간에는 240만 명에 달했다. 도의 인구는 주간에는 300만 명 이상 증가한다. 도쿄의 인구가 절정에 달했던 1965년에 23구의 인구는 889만 3094명에 달했고 1995년에 800만 명 이하로 떨어졌다. 2005년에 도쿄 도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중국인 (123,661), 한국인 (106,697), 필리핀인 (31,077), 미국인 (18,848), 영국인 (7,696), 브라질인 (5,300) 프랑스인 (3,000) 순이었다. 1920년 이후 도쿄 도의 인구 그래프 Metropolitan Government Building Oka1.JPG|섬네일|right|도쿄 도청사 대학, 야스다 강당 university.jpg|섬네일|upright|게이오기주쿠 대학 일본 지방자치법 하에서 도쿄는 도(都)로 지정되어있다. 행정 구조는 일본의 다른 도도부현과 유사하다. 도쿄 도는 1943년까지 도쿄 시를 이루었던 23개의 특별구를 포함하며 이들은 자치권을 가지고 각자의 구장과 의회를 가지고 있어 사실상 도시의 지위를 가진다. 도쿄 도는 또한 각자의 지역 정부를 가진 26개의 시와 5개의 정, 8개의 촌을 포함한다. 도쿄 도 정부는 공개적으로 선출된 도지사와 도 의회에 의해 운영된다. 도쿄 도청은 신주쿠 구에 있다. 도 정부는 호수, 강, 댐, 농장, 먼곳의 섬, 국립 공원과 번화가, 마천루, 지하철 등을 포함한 도쿄의 모든 것을 관할한다. 도쿄에는 많은 대학, 전문 대학, 직업 학교가 존재 하고 있다. 많은 일본의 권위있는 대학들이 도쿄에 있다. 도쿄 대학 도쿄 공업대학 도쿄 외국어대학 도쿄 해양대학 도쿄 예술대학 도쿄 농공대학 도쿄 가쿠게이 대학 히토쓰바시 대학 정책연구대학원대학 수도 대학 도쿄 게이오기주쿠 대학 와세다 대학 조치 대학 메이지 대학 릿쿄 대학 아오야마 가쿠인 대학 호세이 대학 주오 대학 가쿠슈인 대학 국제 기독교 대학 니혼 대학 센슈 대학 구와 지자체에 의해 운영되는 공립 유치원, 소학교(1학년~6학년), 중학교(7학년~9학년)이 있다. 도쿄의 공립 고등학교는 도쿄 도 교육위원에 의해 운영되고 "도 고등학교"로 불린다. 그밖에 도쿄에는 유치원에서 고등학교까지 많은 사립 학교가 있다. stock exchange.jpg|섬네일|right|도쿄 증권거래소 도쿄는 뉴욕, 런던과 더불어 세계 3대 금융 중심지 중 하나이다. 또한 도쿄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권 경제이다.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가 수행한 조사에 따르면 도쿄 대도시권의 2008년 총 GDP는 구매력 평가 기준으로 1조 4790억 달러로 세계의 도시들 중 1위를 차지했다. 포춘 글로벌 500대 기업 목록에서 도쿄에 기반을 둔 기업은 51개로 2위 파리의 거의 두 배에 달했다. 도쿄는 주요 국제 금융 중심지이고 몇몇 세계에서 가장 큰 투자은행과 보험 회사들의 본사가 입지해있으며 일본의 교통, 출판, 방송 산업의 중심 역할을 한다. 2차 대전 이후 일본 경제의 중앙집권화된 성장에 따라 많은 대기업들이 정부와의 더 좋은 접근성을 얻기 위해서 역사적인 상업 수도인 오사카 같은 도시에서 도쿄로 본사를 이전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도쿄의 지속적인 인구 성장과 높은 생계 비용 때문에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 도쿄는 이코노미스트에 의해 2006년까지 14년 동안 생계 비용이 가장 비싼 도시로 선정되었다. 일본은행 본점, 도쿄 증권거래소 등 일본 경제의 중추는 도쿄에 있다. 도쿄 증권거래소는 일본에서 가장 큰 증권 거래소이자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의 증권 거래소이다. 1990년의 일본 자산 가격 버블 때 도쿄는 세계 주식 시장 가치의 60% 이상을 차지했다. 일본 농림수산성에 따르면 2003년에 도쿄 도의 경작지는 8460헥타르였다. 농지는 주로 도쿄 도의 서부에 집중되어있다. 상하기 쉬운 야채, 과일, 꽃을 편리하게 도의 동부로 선적할 수 있다. 고마츠나와 시금치는 가장 중요한 야채로써 2000년에 도쿄 도는 중앙 생산 시장에서 판매되는 고마츠나의 32.5%를 공급하였다. 전체 면적의 36%가 숲으로 덮여있고 도쿄 도의 서부 산지에서는 삼나무와 편백이 광범위하게 자란다. 목재 가격의 하락, 생산 비용의 증가, 임업 인구의 노령화로 도쿄 도의 생산량은 감소하고 있다. 도쿄 만은 한때 주요 어장이었으며 현재 도쿄 도의 어업 생산량 대부분은 이즈오 섬, 하치조 섬과 같은 바깥의 섬들로부터 온다. 가다랑어, 노리(김), 전갱이과가 대양에서 생산된다. 관광업 또한 도쿄의 경제에 상당 부분 기여를 한다. kokusaisen entrance.png|섬네일|도쿄 국제공항(하네다 공항) 도쿄도에는 도쿄 국제공항(하네다 공항), 조후 비행장, 오시마 공항, 미야케지마 공항, 하치조지마 공항, 니지마 공항, 고즈시마 공항이 있다. 도쿄 국제공항(東京国際空港)은 하네다 공항(羽田空港)이라고도 불리며, 오타 구 남부에 위치하여 있다. 1978년 5월, 나리타 국제공항이 개항한 이후로는 국내선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2010년 10월에 신 국제선 터미널이 완공되었다. 도심과의 거리가 가까워서 일본 정부의 전용기, 국빈급 승객이 이용하는 일본 이외 국가의 특별기도 도쿄 국제공항을 많이 사용한다. 도심과의 교통수단으로는 터미널 바로 아래에서 탈 수 있는 도쿄 모노레일과 게이큐 선이 있으며, 이외에도 리무진 버스가 공항과 도쿄도 내 또는 인근 도도부현의 주요 역, 주요 호텔 등을 잇는다. 이외에 노선 버스나 택시 등도 이용할 수 있다. 도쿄 국제공항에서 발착하지 않는 국제선은 주로 지바현 나리타 시에 있는 나리타 국제공항(成田国際空港)에서 발착한다. 개항 당시에는 도심에서 공항으로의 교통수단이 히가시칸토 자동차도를 경유하는 리무진 버스와 터미널에서 가까웠던 당시의 나리타 공항역(현 히가시나리타 역)까지 운행하였던 게이세이 전철의 스카이라이너 뿐이었지만, 1991년 3월부터 공항 터미널 바로 아래에 역이 신설되어(제3터미널 제외) 동일본여객철도와 게이세이 전철이 사용하게 되었다. 도쿄도 도심부에서 공항까지 약 1시간이 소요되며, 2010년 7월에는 나리타 고속철도 액세스가 개통하였다. 다마 지역에는 조후 비행장(調布飛行場)이 있으며, 신추오항공이 이즈 제도로의 정기편을 운항하고 있다. 다른 공항들은 도서 지역의 공항이다. 이즈오 섬에 있는 오시마 공항(大島空港)에는 조후 비행장, 하치조지마 공항으로의 정기편이 운항되고 있다. 미야케지마 공항(三宅島空港)에는 조후 비행장으로의 정기편이 운항되고 있다. 하치조지마 공항(八丈島空港)에는 하네다 공항으로의 정기편이 운항되고 있다. 니지마 공항, 고즈시마 공항에는 조후 비행장으로의 정기편이 운항되고 있다. 오가사와라 제도에는 공항이 없으며, 교통 상황의 개선을 위해 공항을 건설해야 하는가, 자연 보호를 위해 건설하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해 논쟁이 있다. 도쿄 지하철 노선도 :도쿄 역, 우에노 역, 시나가와 역, 시부야 역, 신주쿠 역, 이케부쿠로 역, 아키하바라 역, 아사쿠사 역, 긴자 역 등 초광역 노선 * 도카이도 신칸센, 도호쿠 신칸센, 조에쓰 신칸센, 호쿠리쿠 신칸센, 도카이도 본선, 주오 본선, 도호쿠 본선, 조반 선 광역노선 * 동일본 여객철도 야마노테 선, 소부 본선, 게이힌토호쿠 선, 난부 선, 요코하마 선, 무사시노 선, 게이요 선, 하치코 선, 오메 선, 이쓰카이치 선, 사이쿄 선 * 도쿄 지하철 도자이 선, 후쿠토신 선, 신주쿠 선, 유라쿠초 선 * 도쿄 급행 전철 도요코 선, 메구로 선, 덴엔토시 선 * 게이힌 급행 전철 게이큐 본선 * 오다큐 전철 오다와라 선, 다마 선 * 세이부 철도 이케부쿠로 선, 신주쿠 선, 다마코 선, 야마구치 선, 하이지마 선, 고쿠분지 선, 세이부엔 선, 다마가와 선 * 도부 철도 이세사키 선, 도조 본선 * 게이세이 전철 게이세이 본선 * 사이타마 고속철도 사이타마 고속철도선 * 호쿠소 철도 호쿠소 선 * 수도권 신도시 철도 쓰쿠바 익스프레스 * 게이오 전철 게이오 선, 이노카시라 선 * 다마 도시 모노레일 다마 도시 모노레일 선 도쿄23구내 * 도쿄 메트로 긴자 선, 마루노우치 선, 히비야 선, 지요다 선, 한조몬 선, 난보쿠 선 * 도쿄 도 교통국(도에이 지하철) 아사쿠사 선, 미타 선, 오에도 선, 신주쿠 선, 노면전차 아라카와 선, 우에노 현수선, 닛포리·도네리 라이너 * 도쿄 급행 전철(도큐 전철) 오이마치 선, 다마가와 선, 이케가미 선, 세타가야 선 * 게이힌 급행 전철(게이큐 전철) 게이큐 본선, 공항선 * 세이부 철도 유라쿠초 선, 도시마 선 * 도부 철도 이세사키 선, 가메이도 선, 다이시 선 * 게이세이 전철 오시아게 선, 가나마치 선 * 도쿄 모노레일 하네다 선 * 유리카모메 도쿄 임해 신교통 임해선 * 도쿄 임해 고속 철도 린카이 선 다마 지역 * 게이오 전철 경마장선, 동물원선, 다카오 선 고속도로 * 도메이 고속도로 * 주오 자동차도 * 간에쓰 자동차도 * * 게이요 도로 * 도시권 자동차 전용도로 * 슈토 고속도로 * 국도 * 국도1호선 * 국도4호선 * 국도6호선 * 국도14호선 * 국도15호선 * 국도16호선 * 국도17호선 * 국도20호선 * * * * * * * * * * 도쿄 항 National Museum, Honkan 2010.jpg|섬네일|right|도쿄 국립박물관 도쿄에는 많은 박물관들이 있다. 우에노 공원 안에는 네 개의 박물관이 있다. 그중 하나인 도쿄 국립박물관은 일본에서 가장 큰 박물관으로 전통 일본 예술을 전문으로 하고 있다. 국립서양미술관과 4만 개가 넘는 일본과 외국 영화를 비롯해 많은 일본 현대 예술품들을 소장한 도쿄 국립근대미술관이 있다. 또한 우에노 공원에는 국립과학박물관과 우에노 동물원이 있다. 다른 박물관으로 아오야마의 네주 미술관과 도쿄 도심에서 스미다 강 너머 스미다 구의 에도-도쿄 박물관과 일본 국립국회도서관과 고쿄 주변에 위치한 도쿄 국립근대미술관이 있다. 도쿄에는 공연을 하는 많은 극장들이 있다. 이들은 노와 가부키와 같은 일본 전통극을 공연하는 많은 국영 및 민영 극장들을 포함한다.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다른 음악 협회들이 서양과 일본 전통 음악을 연주한다. 도쿄에서는 또한 친숙한 클럽에서부터 국제적으로 알려진 일본 무도관까지의 다양한 곳에서 일본 현대음악과 서양의 팝과 락 음악을 들을 수 있다. 도쿄에서는 많은 축제들이 열린다. 주요 행사로 히에 신사의 산노, 아사쿠사 신사의 산자와 2년에 한 번씩 열리는 신전제가 있다. 해마다 7월의 마지막 토요일에는 스미다 강에서 성대한 불꽃 축제가 열리고 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찾아온다. 봄에 벚꽃이 만개할 때 많은 도쿄의 시민들이 우에노 공원, 이노카시라 공원, 신주쿠 교엔으로 소풍을 나온다. 시부야와 이웃한 하라주쿠는 젊은이들의 스타일과 패션의 중심지로 알려져있다. 도쿄의 주요 지하철역들에는 대규모 쇼핑센터들이 들어서 있다. 쇼핑 지구로 가장 인기 있는 곳은 백화점과 고급 상점들, 극장, 레스토랑 들이 모여 있는 긴자이다. 간다 지역에는 백여 개의 고서점들이 모여 있다. 그리고 아키하바라에는 전자제품과 컴퓨터 및 부속 기기 등을 취급하는 대규모 쇼핑센터들과 작은 상점들이 모여 있다. 도쿄 도청(東京都庁) 시부야(渋谷) 아메야요코초(アメヤ横丁) 아사쿠사(浅草)와 센소지(浅草寺) 아키하바라(秋葉原) 에도-도쿄 박물관(江戸東京博物館) 우에노 공원(上野公園) 오다이바(お台場) 하라주쿠(原宿) government building of Tokyo.jpg|도쿄 도청 intersection at night.jpg|시부야 횡단보도 Entrance Sign.JPG|아메야요코초 Sensoji Kaminarimon 2012.JPG|아사쿠사 센소지의 카미라미몬 s shop AOKI, Akihabara.jpg|아키하바라 거리 Museum - Lifesize diorama of kabuki play Sukeroki 04 (15769459291).jpg|에도-도쿄 박물관에 전시된 가부키 공연 전시물 공원의 벚꽃 night.jpg|오다이바의 야경 at Harajuku - panoramio.jpg|하라주쿠의 코스프레 매니아들 Dome 2007-2.jpg|섬네일|right|도쿄 돔 도쿄는 일본 스포츠의 중심이다. 야구, 축구, 스모 프로 팀들이 경쟁하고 있으며 1964년 하계 올림픽이 이곳에서 개최되었다. 2020년 하계 올림픽 또한 이곳에서 열릴 예정이다. 2개의 프로 야구팀이 도쿄에 연고지를 두고 있는데, 일본 프로 야구 센트럴 리그 팀인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메이지 진구 구장)과 요미우리 자이언츠(도쿄 돔)이 그것이다. 일본 스모 협회의 본부 또한 도쿄의 료고쿠 국기관 스모 경기장에 있고 이 곳에서 매년 3회(1월, 5월, 9월)에 스모 대회가 열린다. J리그에는 도쿄 베르디, FC 도쿄, FC 마치다 젤비아 3개 구단이 도쿄 도에 연고지를 두고 있다. 그러나 아직 도쿄 23구를 직접 연고지로 하는 J리그 소속 구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도쿄는 1964년 하계 올림픽의 개최지이다. 도쿄 국립경기장에서 수많은 국제 스포츠 이벤트가 열렸다. 세계적인 수준의 개최지로서 도쿄에서는 종종 테니스, 수영, 마라톤, 미식축구, 유도, 가라테 대회와 같은 국내외의 스포츠 이벤트가 열린다. 시부야 구 센다가야에 있는 도쿄 체육관은 수영장, 훈련실, 커다란 실내 경기장을 포함한 대형 스포츠 복합단지이다. 2020년 하계 올림픽이 도쿄에서 개최됨에 따라 새로운 도쿄 신국립경기장이 건립되고 있는 것을 비롯하여 많은 스포츠 시설들이 개보수중이다. 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준 본거지) 축구 도쿄 베르디, FC 도쿄, FC 마치다 젤비아(마치다 시), 도쿄 무사시노 시티 FC(무사시노 시) 농구 도쿄 아파치(후추 시) 배구 NEC 블루 로켓츠 단, #표시는 우호도시이다. 서울() 베이징() 자카르타() 뉴욕() 워싱턴 D.C.() 상파울루() 파리() 런던() # 로마() 베를린() 카이로() 이슬라마바드() 모스크바() 시드니() 비엔티안() 타이베이() 도쿄도지사 재일중국인 도쿄 도 공식 웹사이트 도쿄 관광 안내 론리플래닛의 정보(도쿄편) 분류:아시아에 위치한 수도 분류:하계 올림픽 개최 도시 분류:하계 패럴림픽 개최 도시 분류:아시안 게임 개최 도시 분류:일본의 항구 도시
고려대학교 (高麗大學校는 대한민국의 사립 종합대학이다. 2018년 중앙일보 대학평가에서 서울대, 성균관대, 한양대에 이어 4위를 차지했다. 대한제국 광무 9년인 1905년 이용익이 설립한 한국 최초의 근대 고등교육기관 보성전문학교 (普成專門學校)로 출발하였다. 을사조약이 학교 설립 이후 체결되자 이용익이 망명하여 천도교 지도자 손병희가 경영권을 이어받았고 김성수가 1932년 경영난에 허덕이던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였다. 1946년 4년제 대학으로 승격돼 고려대학교 로 개칭하고 종합대학교로 개교하였다. 1952년 12월에는 문과대학을 문리과대학으로 개편하고 1971년에는 우석대학교 의과대학을 흡수 합병해 이공·인문·의예·예체능 관련 학과를 고루 갖추게 됐다. 고려대학교는 독재 정권에 항거하여 1960년 4·19 혁명의 촉매제가 된 4·18 의거를 비롯한 각종 시위의 중심에 서기도 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5년 4월에 공포한 긴급조치 제7호는 고려대학교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상징 동물은 호랑이, 교색(校色)은 크림슨, 교목(校木)은 잣나무, 교화(校花)는 철쭉이며, 교훈(校訓)은 ‘자유·정의·진리’()이다. 약칭으로 고려대 또는 고대 라고 부르거나, 영문 약칭으론 KU 로 부르기도 한다. 고려대학교의 모태는 대한제국 내장원경 이용익이 1905년에 설립한 보성전문학교 다. 1932년 동아일보 창업자 김성수가 학교를 인수했고 1934년에는 안암동에 현재의 자리로 학교를 옮겼다. 1944년 학교 이름을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 로 변경했다. 종합대학으로의 승격과 우석대학교 의과대학의 흡수·합병 1946년에는 보성전문학교가 고려대학교로 개칭됐으며, 이와 동시에 종합대학으로의 설립이 인가됐다. 대학으로의 공식적인 승격은 9월에 이루어졌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 본교는 애기능 인근 부지를 매입하였으며 이는 후일 이곳에 이공계캠퍼스가 자리 잡는 기반이 된다. 1971년 12월에는 1970년에 시작된 장기발전계획에 따라 우석대학교 의과대학을 흡수 및 합병하였다. 4·18 피습사건은 4·19 혁명 발발의 도화선이 됐다. 1960년 4월 11일 3·15 부정선거와 관련된 마산 시위에서 실종된 김주열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된 것과 관련하여 5개 단과대학 운영위원장들의 주도로 수많은 학생들이 ‘마산사건의 책임자를 즉시 처단’할 것을 요구하면서 장외시위를 벌였으나, 돌아오는 길에 신도환의 대한반공청년단 소속 폭력배들에게 피습을 당하여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매년 4월 18일에 4·18 의거 로 기록되는 독재정권에 맞선 선배들의 정의로운 행동을 계승하기 위해 ‘4·18 구국대장정’ 행사가 열린다. 구국대장정 행사에 관한 자세한 설명을 보려면 연례 행사 단락을 참조하도록 한다. 1960년대와 1970년대는 휴교 사태가 빈발한 시기이기도 하다. 1965년 9월 4일에는 한일협정 반대시위 사태로 무기한 휴업 명령을 받았으며, 1971년 10월 15일에는 27일 간의 강제 휴교 조치를 동반한 교내 군 투입 및 위수령 조치가 단행되기도 하였다. 1975년 4월에는 유신헌법 철폐를 주장하는 시위와 관련하여 고려대학교만을 대상으로 한 긴급조치 제7호가 발동되기도 하였다. 제5공화국이 들어선 이후에도 독재정권을 향한 학생들의 시위는 계속됐다. 창립 30주년 기념사업으로 중앙도서관 구관이 1935년에 착공하여 1937년에 개관한 데 이어 1975년에는 창립 7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중앙도서관 신관을 신축하여 1978년 3월에 개관하였다. 1973년 10월 서독 정부의 무상원조에 의해 농과대학 캠퍼스가 준공돼 1977년부터 활용되기 시작되는 한편 1978년 5월 착공한 기숙사가 1979년 11월에 준공돼 이듬해인 1980년 3월에 개관하였다. 한편 당국의 수도권 인구분산 정책에 따라 1980년 1월에 8개 학과, 초기 정원 400명 규모의 조치원분교 설립이 인가됐는데 이것이 현재의 세종캠퍼스가 탄생하는 밑거름이 됐다. 2000년대에 들어서자 세계화 되는 추세에서 고려대학교 졸업자의 실력은 세계적인 수준에 맞추어야 한다는 ‘Global KU 프로젝트’ 등의 영향으로 졸업요건이 대폭 강화되는 등의 변화가 있었다. 2000년 3월 신입생부터는 졸업 인증제도로 인해서 TOEIC 및 TOEFL 등 일정 수준 이상의 공인영어 성적을 획득하여야 졸업이 가능해지게 됐으며, 2004년 3월 신입생부터는 한자 2급 수준의 졸업요건이 신설됐으나 2011년 들어 일부 학과들이 이 요건을 폐지하였다. 또한 2004년 3월 신입생부터는 심화전공이나 이중전공, 연계전공, 이렇게 세 가지 항목 가운데 한 가지를 의무적으로 선택하여 학생설계전공으로 세분화할 수 있는 제2 전공을 의무적 으로 이수해야 졸업할 수 있게 됐다. 2005년에는 고려대학교가 개교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였으며 같은 해 5월 5일에는 개교 100주년 기념식이 거행됐다. 개교 100주년 기념사업과 관련하여 2003년에 ‘개교 100주년 기념사업회’가 출범 및 지층에 7천평 규모의 1백주년 기념관에는 박물관과 디지털 도서관을 건립 하는등 교내에서 다양한 기념사업들이 추진됐다. 한편 고려중앙학원에서는 개교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3대 마스터플랜을 기획, 중앙광장과 백주년기념관, 화정체육관을 건립할 계획을 세웠으며 이 가운데 중앙광장이 2002년 3월에 가장 먼저 만들어졌다. 이후 백주년기념 삼성관과 화정체육관이 각각 2005년, 2006년에 건립됐다. 고려대학교 서울캠퍼스 중앙도서관의 야경 어윤대 총장의 재임기간 동안 고려대학교는 2006년 영국 《타임즈》지가 발표한 세계대학순위에서 종합 150위에 오르는 등 많은 성과를 기록하였다. 사회과학·경영, 인문·예술, 자연과학, 생명과학·의학, 공학·기술 분야에서 조사를 시행한 ‘2012 조선일보·QS 아시아대학평가’에서 고려대학교는 경영학, 법학, 행정학, 교육학 등이 포함되는 사회과학 분야에서 아시아 12위를 차지한 바 있다. 한편,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은 2009년 경영대학 평가 전문기관인 에듀니버설이 전 세계 경영대 학장 1000명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 ‘추천하고 싶은 대학’ 국내 1위에 올랐으며, 2010년 대한민국 경영대 평가 설문 조사에서 1위를 차지한 데 이어 2012년 UTD 랭킹에서는 86위에 올라 대한민국 대학 중에서 1위를 차지하였다. MBA는 교육과학기술부의 BK21 평가에서 2007년부터 2011년까지 5년 연속으로 1위를 차지하였다. BK21의 후속 사업인 BK21 플러스의 2013년 초기 선정 결과도 사업단 수와 지원 금액에서 서울대학교에 이어 2위를 차지하였으며, 특히 공과대학의 모든 분야가 Bk21 플러스에 선정됐다. 대한민국 경영대학 가운데 AACSB와 EQUIS 두 곳의 인증을 최초로 받은 곳 역시 고려대학교다. 2011년에 신규 임용된 42기 사법연수생 가운데 고려대학교 출신자는 189명으로 서울대학교 다음으로 많았다. 2009년에 치러진 51회 사법시험에서는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에서 155명의 합격자를 내 가장 많은 합격자를 내기도 하였다. 고려대학교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영향력 있는 3대 세계 대학 평가 기관(중화인민공화국 세계 대학 학술 순위, 영국 QS 세계 대학 순위, 영국 타임스 고등교육 세계 대학 평가를 뜻한다)이 2015년 발표한 세계 대학 순위에서도 우수한 성과를 나타냈다. 중화인민공화국 세계 대학 학술 순위에서 연세대학교, 한국과학기술원, 포항공과대학교, 성균관대학교와 함께 공동 201~300위를 기록했다. 영국 QS 세계 대학 순위에서는 104위로 연세대학교를 제치며 역대 최고 순위를 기록했고, 영국 타임스 고등교육 세계 대학 평가에서는 연세대학교와 공동 200~225위를 기록했다(아시아 대학 순위에서는 26위로, 28위를 차지한 연세대학교를 제쳤다). 그리고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대학 평가 기관인 US 뉴스&월드 리포트에서는 157위로 대한민국 대학들 중에서는 서울대학교의 뒤를 이어서 2위를 차지했다. 거기다가 상하이 자오퉁 대학이 가장 최근에 발표한 세계 대학 순위에서는 224위로 대한민국 사립대들 중에서는 최고 순위를 기록했다. 2015년 세계대학평가 기관인 QS가 발표한 세계대학평가 학과별 평가에서 고려대학교는 전체 평가 항목 36개 분야 중 20개 학과에서 세계 100위권 이내에 들어 대한민국 사립대 가운데 가장 우수한 성과를 보였다. 2016년 9월 발표한 QS 세계대학평가에서는 전년 대비 6순위 상승한 98위를 기록하며 대한민국 종합사립대학으로서는 가장 먼저 세계 100위 안에 진입한 대학이 됐다. 대한민국의 세계 대학순위 100위권에는 고려대학교 외에도 세 곳이 포함되었으며 국립 대학인 서울대학교, 한국과학기술원, 포항공과대학교 등이다. 2017년 전년 대비 8순위 상승한 90위에 등극하였다. 2018년에는 전년 대비 4순위 향상한 86위에 등극하였다. 2018년 QS 세계대학평가 기준으로 100위 안에 진입한 대한민국 대학은 고려대학교(86위)를 포함해 서울대학교(36위), 한국과학기술원(40위), 포항공과대학교(83위), 성균관대학교(100위) 등 총 다섯 곳이다. 학부와 대학원 과정이 모두 개설되어 있으며, 2017년 기준으로 개설돼 있는 과정은 현재 다음과 같다. 개설 학과·전공 구분 캠퍼스 설치학과 또는 유형 참조 페이지 학부 서울 자유전공학부, 경영대학, 문과대학, 정경대학, 이과대학, 공과대학, 의과대학, 사범대학, 간호대학, 디자인조형학부, 국제학부, 정보대학, 미디어학부, 보건과학대학, 생명과학대학, 정보대학 대학안내 세종 과학기술대학, 공공정책대학, 글로벌비즈니스대학, 문화스포츠대학, 약학대학 구분 유형 설치과정 참조 페이지 대학원 일반대학원 고려대학교 대학원 전문대학원 국제대학원, 경영전문대학원, 법학전문대학원, 의학전문대학원, 정보보호대학원, 그린스쿨(에너지환경정책기술대학원), 기술경영전문대학원, KU-KIST 융합대학원, 행정전문대학원 대학원 소개 특수대학원 교육대학원, 생명환경과학대학원, 정책대학원, 공학대학원 언론대학원, 노동대학원, 법무대학원, 보건대학원, 컴퓨터정보통신대학원, 임상치의학대학원, 경영정보대학원, 문화스포츠대학원, 의용과학대학원 개설 과정에 관한 자세한 정보는 참조 페이지의 내용을 참조한다. 2017년 기준으로 서울캠퍼스에는 17개 단과대학이, 세종캠퍼스에는 5개 단과대학이 설치돼 있다. 2009학년도부터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이 개원함에 따라 법과대학에서는 신입생을 받지 않고 있으며, 대신 자유전공학부를 신설하여 기존의 법학과 신입생 정원을 대체하고 있다. 사이버국방학과는 정보대학 소속의 학과로 국방부와의 협약을 통해 2012년에 처음 개설된 학과이다. 컴퓨터교육과의 경우 2014학년도를 시작으로 컴퓨터학과로 개편되면서 더이상 사범대학이 아닌 정보통신대학의 소속으로 변경됐다. 일부 학과에서는 학부제로 모집을 하며 학부제로 입학한 학생의 경우 2학년 진급시 자신의 전공을 배정받는데, 전공을 배정하는 기준은 단과대학 사정에 따라 다르게 설정돼 있다. 학부과정에서는 2004년 입학생부터 심화전공, 이중전공, 융합전공, 학생설계전공으로 세분화할 수 있는 제2전공의 이수가 의무화 돼있다. *융합전공 복수의 학과·학부가 협력하여 개설한 융합전공은 2004년에 처음 도입됐다. 2004학번부터 이수가 의무화 된 제2전공의 하나로 선택할 수 있다. 고려대학교 학부 융합전공 학과 목록 문과대학 과학기술학, 인문학과정의, EML, LB&C(Language, Brain & Computer), 인문학과 문화사업, GLEAC(Global Leader for East Asin Century) 생명과학대학 생태조경, 기후변화, 의과학 정경대학 금융공학, 법과행정, PEL 이과대학 암호학 사범대학 패션디자인및머천다이징, 다문화한국어교육 정보통신대학 뇌인지과학 보건과학대학 식품산업관리 정보대학 소프트웨어벤처, 정보보호 정보보호대학원 융합보안 자유전공학부 공공거버넌스와리더십 KU-KIST융합대학원 메디컬융합공학 공공정책대학 사회복지학 문화스포츠대학 디지털매체문화 과학기술대학 파생금융공학 국제교육원 GKS(Global Korean Studies Interdisciplinary Major) 좌측에 기재된 단과대학은 해당 융합전공을 직접 주관하는 대학이다. 금융공학 융합전공은 서울캠퍼스 학생만 신청할 수 있다. GKS는 외국인 학생만 신청할 수 있다. 자유전공학부 학생은 공공거버넌스와리더십 전공을 의무적으로 이수해야 한다. 일반대학원과 전문대학원, 특수대학원으로 구분돼 있다. 의학전문대학원의 경우 전문대학원 53명을 의학과 53명과 병행하여 임시로 운영하였으나 2015년에 폐지됐다. 2009년에 개원한 법학전문대학원은 120명을 배정받았다. 국제처에서는 국제 교류의 갈래로 SEP(Student Exchange Program)와 VSP(Visiting Student Program)의 두 종류를 운영하고 있다. SEP는 본교와 학술 교류 협정이 체결된 외국 대학과 학부 또는 대학원생을 교환하는 프로그램이다. 본교는 해당 학교가 요구하는 자격을 갖춘 자를 교환학생으로 추천하며, 추천된 교환학생에 대한 입학 허가 여부는 해당 학교에서 결정한다. 자비유학과 방문학생과 달리 본교에만 등록금을 납부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SEP와는 별도로 VSP 또한 국제 교류의 한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소수의 학교와 별도의 협정을 체결하여 본교의 학생들을 대규모로 파견하는 것이 VSP 프로그램의 요지이다. 캐나다의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교, 영국의 로얄할러웨이 대학교, 호주의 그리피스 대학교, 미국의 캘리포니아 대학교 데이비스캠퍼스와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등이 그 대상이다. 등록금은 파견교와 본교에 모두 납부하는 것이 원칙이나, 이 가운데 본교에 납부한 등록금의 대부분은 장학금의 형태로 반환된다. 한편, 일부 단과대학은 본교와는 별도의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Global KU 프로젝트 2010년까지 세계 100대 대학에 진입하는 것을 우선의 목표로 한 것으로, 제15대 어윤대 총장의 주도하에 2003년부터 본격 실시됐다. 장기적으로 영어강의 확충, 해외 대학과의 교류 증진, 외국인 교수 채용 확대 등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졸업요건으로 요구하는 토익 점수를 대폭 상승시키고, 2005년 5월에는 개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세계대학총장포럼을 개최 하는 등 단기적인 계획도 함께 진행하고 있다. 현재 일정 수준 이상의 공인영어 성적을 취득해야 졸업이 가능한 상태다. 한편, Global KU 프로젝트와 관련하여 교내에 도입된 영어강의와 관련해서 학교 측에서는 각 단과대의 특성을 고려해 앞으로 영어로 전공 수업등이 진행되는 영어강의와 관련된 졸업 요건을 단과대별로 완화하거나 강화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2년 기준으로 대체로 5개 이상의 영어강의를 수강하면 졸업이 가능하지만, 단과대학에 따라 더 많은 수의 영어강의를 수강하여야 졸업이 가능한 경우 또한 있다. 한자졸업요건 학부과정에서는 국가 공인 혹은 고려대학교 한자한문연구소 인증 한자 2급 획득 또한 의무화돼 있었으나 법과대학을 시작으로 한자졸업요건은 단과대 자율에 맡기는 것으로 방침이 변경됐다. 한자인증을 가장 먼저 폐지한 법과대학과 정보통신대학은 ‘한자인증의 사회적 필요성이 높지 않으며, 이에 학생들이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는 설명과 ‘학생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라는 설명을 한자인증의 폐지 이유로 각각 제시하였다. 그러나 문과대, 공과대, 사범대 등에서는 한자는 꼭 필요한 소양이고, 학과 특성상 이런 기회에 한자인증졸업요건 유지한다는 원칙을 밝혔다. 제1전공의 심화전공 또는 제2전공의 의무화 2004학년도 학부 입학생부터 적용된 졸업요구조건의 하나이다. 2004학번 이후의 학부생들은 제1전공과 함께 심화전공이나 이중전공, 융합전공, 학생설계전공으로 분류되는 제2전공 중 하나를 선택해서 이수해야만 졸업할 수 있다. 일부 학과에서는 학부제로 모집을 하며 학부제로 입학한 학생의 경우 2학년 진급시 자신의 전공을 배정받는다. 졸업학점을 모두 이수함과 동시에 영어강의, 졸업논문이나 공인영어성적, 한자인증과 같이 자신이 이수하고 있는 전공에서 부가적으로 요구하는 졸업요구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학생에 한하여 졸업이 가능하다. 영어강의의 경우 대개 5과목 이상 수강이 졸업요건으로 지정되어 있지만 경영대학과 같이 이와 상이하게 요건을 정하고 있는 학과 또한 존재하므로 자신의 학과가 지정한 요건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또한 학번별로 졸업요건이 상이할 수가 있으므로 자신에게 해당되는 졸업요건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졸업요구학점을 모두 이수하였으나 기타 졸업요구조건을 충족하지 못한 경우 수료상태로 남게 된다. 비록 학칙에서는 전과 제도가 있지만, 현재 전과제도는 시행되지 않고 있다. 이유는 제1전공 이수학점이 상대적으로 연세대학교보다 10 학점이상 낮기 때문에 연세대학교에서 시행되는 전과 제도를 이용하지 않고도, 복수로 전공이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학교 관계자학적·수업지원팀 유신열 과장이 밝혔다. 제1전공의 심화전공, 이중전공, 융합전공 및 학생설계전공 심화전공 (Advanced major) 제1전공 학과에서 의무적으로 이수해야 하는 전공 과목 학점 이외에 각 학과에서 정한 심화전공 학점만큼을 더 이수하는 것을 의미한다. 심화전공을 이수하고 있는 학생이 졸업요구조건을 충족하기 위해 이수해야 하는 학점은 각 학과의 내규에 의한다. 대개 기본전공 42학점과 심화전공 30학점으로 구성돼 있지만 이보다 더 낮게 설정되어 있는 학과도 존재하며, 그 반대의 경우 또한 존재한다. 현재 자신이 속해 있는 제1전공 학과에서 기본전공 42학점과 심화전공 30학점을 심화전공 이수요건으로 지정하고 있다면 그에 해당하는 학점을 이수해야 졸업이 가능하다. 심화전공으로 졸업하면 졸업장에 심화전공 사실이 기재된다. 이중전공 (Double major) 제2전공의 하나로 1997년에 처음 도입됐다. 제1전공을 이수하면서 타 학과의 전공을 동시에 이수하여 졸업시 2개의 학사(學士) 학위를 취득할 수 있는 제도이다. 제1전공과 동일하거나 유사한 학부, 그리고 법과대학, 의과대학, 간호대학의 학과로는 이중전공을 신청할 수 없으며, 사범대학의 경우 사범대학 입학자에 한하여 지원할 수 있다. 사범대학을 제외한 각 학과의 경우 기준 정원의 130%에서 심화전공 이수자를 뺀 인원만큼이 모집 정원이며 이 중의 80%를 1학기 때 선발한다. 불합격시 합격할 때까지 지원할 수 있지만 이미 합격한 이중전공을 포기할 경우 재지원 기회는 1번으로 제한된다. 이중전공 신청 이전에 이수한 이중전공 해당 과목은 이중전공의 이수학점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졸업요건은 제2전공을 이수하는 학과의 내규에 의하는데 이중전공으로 졸업할 경우 동일한 졸업장에 제1전공과 이중전공이 함께 표기되며 이때 학위번호는 1개이다. 증명발급은 제1전공과 이중전공에 관한 내용이 한 장에 이루어진다. 융합전공 (Relation major) 2개 이상의 학부·학과를 연계하여 별도의 교육과정을 편성, 설치하는 전공이다. 제2전공의 하나로 2개 이상의 학문분야를 융합해 학생들에게 보다 폭넓은 학문경험의 기회를 제공하자는 취지로 2004년에 처음 도입됐다. 융합전공으로 졸업하면 제1전공과 동일한 졸업장에 융합전공 사실이 기재된다. 학생설계전공(Self designed major) 재학기간중 제1전공을 이수하면서 학생들의 관점에서 3개 이상 학과의 전공과목을 포함해서 설계하여 최소 요구학점 이상을 이수한 자에게 제2전공을 인정하여 졸업시에 2개 학위를 수여하는 제도이다. 학생설계전공으로 졸업하면 제1전공과 동일한 졸업장에 학생설계전공 사실이 기재된다. 부전공과 복수전공 2004학번부터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제2전공 정책과는 다른 방식으로, 다른 학교에서 흔히 말하는 ‘복수전공’ 또는 이 학교에서 시행하고 있는 제2전공 과는 다른 제도이다. 부전공 제1전공을 이수하는 동시에 다른 학과의 전체 전공 이수학점의 일부를 이수, 동일한 졸업장에 부전공(minor) 사실을 기재하는 것이다. 제1전공과 유사한 학과 및 법학과로는 신청할 수 없으며, 사범대학 입학자에 한하여 사범대학의 학과를 부전공으로 이수할 수 있다. 2004학번을 기준으로 이수요건에 다소간에 차이가 있다. 복수전공 복수전공은 기본전공 이수 후 졸업을 유보하고, 또 하나의 전공을 연속해서 이수하여 2개의 학위를 받을 수 있는 제도로, 제2전공의 일부가 아니다. 제1전공의 이수가 끝난 후 2학기 또는 3학기를 추가로 이수해야 복수전공 학위 취득이 가능하며, 이 점에서 제1전공과 동시에 이수하여 학위를 받을 수 있는 이중전공과 차이를 보인다. 이중전공과 마찬가지로 졸업증서에 제1전공과 복수전공이 1개의 학위로 표기되어서 나오지만, 증명발급은 제1전공과 별도로 이루어진다. 제1전공을 이수하면서 복수전공에 해당하는 과목을 부전공의 형태로 이수하였을 경우, 복수전공 진입 후 21학점까지 인정받을 수 있다. 이 때 부전공의 효력은 상실된다. 서관 시계탑 서울캠퍼스 (구 안암캠퍼스)는 인문·사회계 캠퍼스, 자연계지역, 녹지 캠퍼스, 정릉캠퍼스를 포함한다. 전체적으로 건물 양식이 일관된 형태를 보이고 있으며 어윤대 총장이 재임하던 시기에 3,500억 원의 발전 기금을 유치하고 기업체의 후원을 받아내 교내 전체 건물의 40% 정도를 신축 및 리모델링함에 따라 전체적으로 건물 양식이 일관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중앙광장과 하나스퀘어가 각각 인문사회계지역과 자연계지역에 위치하여 각 지역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세종특별자치시에 위치한 세종캠퍼스의 건물들 또한 웅장한 분위기의 건물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 두 캠퍼스 외에 ‘창조캠퍼스’라는 이름으로 제3캠퍼스 설립을 세종캠퍼스에 추가로 추진하고 있다. 제3캠퍼스는 약 52만m2 규모로 한국토지주택공사와 부지매입 협상중이다. 본교 홈페이지에서는 서울캠퍼스와 세종캠퍼스의 캠퍼스 지도를 모두 확인할 수 있다. 중앙광장과 본관이 위치한 지역으로, 본관 ~ 중앙광장 ~ 정문을 중심으로 좌우가 대칭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본관과 대학원이 현재 사용하고 있는 구 중앙도서관 건물은 각각 사적 제285호와 제286호로 지정돼 있다. 구역별로 본관과 중앙광장 주변, 중앙도서관 주변, 민주광장 주변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볼 수 있으나, 여기서는 인문사회계지역의 중심축을 이루는 본관과 그 주변 건물들에 대해서만 살펴보도록 한다. 중심축 정문 최초의 교문은 교우들의 성금으로 건립되었으며, 교우회측에서는 1965년 10월 11일 정문 앞에서 교문 헌정식을 열었다. 1995년에는 현재와 같은 보다 더 큰 교문이 세워졌으며, 기존의 교문은 세종캠퍼스로 이전됐다. 본관 인문사회계 캠퍼스의 중심에는 6층 높이의 본관이 자리하고 있다. 중앙광장과 더불어 캠퍼스의 중앙에 위치한 본관은 김성수가 1932년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했을 때 지어진 건물로 1933년 9월에 착공하여 이듬해 1934년 9월에 완공됐다. 다른 대학 캠퍼스의 근대 건축물은 대부분 외국인에 의해 설계된 데 반해, 이 건물의 설계는 한국인 건축가 박동진이 맡았다. 그는 본관 이외에도 도서관과 서관, 강당, 제2공학관 등 교내의 여러 건물을 설계하였다. 본관 건물은 ‘배울 학’(學) 자를, 건물 앞에 위치한 정원은 ‘큰 대(大)’ 자를 형상화하고 있다. 고딕 양식의 이 건물은 1981년 9월 25일 사적 제285호로 지정됐다. 본관 양옆으로 오른편에는 고대의 기개를 표현한 호상(虎像)이, 왼편에는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4·18을 기념하는 4·18 기념비가 자리하고 있다. 4·18 기념비의 비문은 조지훈이 지은 것이다. 호상의 바닥에는 조지훈의 ‘호상비문’(虎像碑文)이 새겨져 있다. 중앙광장 본관과 더불어 인문사회계지역의 중앙에 자리한 중앙광장은 고려대학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2000년 6월에 착공하여 2002년 3월에 완공됐다. 지상에는 5780평의 녹지공간과 잔디광장이 조성되어 있으며, 지하 1층에는 행정부서와 열람실 및 편의시설이, 지하 2층과 3층에는 1000대를 수용할 수 있는 주차공간이 조성돼 있다. 중앙광장이 건설되기 이전에는 대운동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중앙도서관과 서관(西館) 중앙도서관 구관과 신관 중앙도서관 구관은 본관을 중심으로 중앙광장 오른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보성전문학교 창립 3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1935년에 착공하여 1937년에 개관하였다. 김성수는 도서관 건물의 건립을 포함한 기념사업의 자금 조달을 위해 전국을 다니며 직접 모금 운동을 전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건물은 사적 제286호로 지정돼 있다. 1975년에는 개교 7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중앙도서관 신관을 신축하여 1978년 3월에 개관하였다. 2005년에 리모델링을 실시한 데 이어 2010년에도 열람공간의 위치를 변경하는 등의 리모델링을 단행하였다. 중앙도서관 구관과 사범대학본관 사이에 위치한 중앙도서관 신관이 현재 흔히 일컬어지는 중앙도서관이다. 교내 분관 중앙도서관은 단행본만 160만권 이상 소장하고 있는 도서관이다. 교내 도서관은 중앙도서관, 과학도서관, 학술정보관, 법학도서관, 의학도서관, 세종학술정보원 등 5개 분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앙도서관은 현재 위치한 중앙도서관 신관과 특수서적이 주로 위치한 중앙도서관 구관, 과학도서관, 해송법학도서관, 학술정보관(CDL)을 총괄하고 있으며, 이 중 학술정보관(CDL)은 백주년기념관 내에, 과학도서관은 자연계지역에, 해송법학도서관은 법학관 신관 앞에 위치하고 있다. 과학도서관의 단행본실은 1층에 위치해 있으며, 인문사회계지역에 위치한 중앙도서관과 마찬가지로 동양서 단행본과 서양서 단행본 모두를 취급한다. 의학도서관은 의과대학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의과대학 교우회와 재단의 지원으로 개관하였다. 모든 분관들을 통틀어 2018년 현재 모두 3,587,338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다. 학습 시설 교내 곳곳에 열람실과 스터디룸, 라운지와 같은 학습 시설이 분포하고 있으며, 관련 홈페이지에서 열람실 좌석 현황을 확인할 수 있다. 교내 분관 및 학습 시설 분관 비고 중앙도서관 중앙도서관 신관, 중앙도서관 구관, 과학도서관, 해송법학도서관, 학술정보관(CDL) 과학도서관 자연계 캠퍼스 내에 위치 의학도서관 의료원 내에 위치 세종학술정보원 세종캠퍼스 내에 위치 열람실 좌석 현황 도서관 홈페이지 서관(西館) 문과대학은 1946년 9월에 설립된 이래 현재까지 모두 2만 5천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문과대학이 사용하고 있는 서관은 1961년 6월에 준공됐으며 중앙광장의 서편에 위치하고 있다. 건물 앞에 ‘서관’이라는 명칭이 적혀 있지는 않지만 ‘西館’과 동음어이면서 문과대학의 특성과 맞기 때문에 ‘서관’(書館, 책을 보관하는 건물을 의미)이라는 별칭이 널리 쓰이고 있다. 이 건물의 꼭대기에는 4면으로 되어 있는 시계탑이 위치하고 있는데, 1968년 당시 쌍용그룹 회장이었던 김성곤이 희사한 것이다. 시계탑의 규모가 크다 보니 아르바이트생이 페달을 밟아 이 곳의 시계탑을 작동시킨다는 등의 소문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데, 실제로는 이 건물의 3층에 위치한 기계실에 설치된 모터에 의해 가동되는 것이라고 한다. 매일 정오에 이 곳의 시계탑에서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노래가 나오는데, 녹두문대라는 별칭의 유래가 된 이 노래의 선곡에 관해서 학교측의 공식적인 기록이 남아있는 것은 아니지만 녹두장군의 정신을 이어받자는 의미로부터 선곡됐다는 의견을 비롯하여 아리랑보다 더 낫기 때문에 선곡됐다는 의견 등이 존재한다. 자연계 캠퍼스에는 2006년 9월 완공된 하나스퀘어를 중심으로 공과대학, 이과대학, 정보통신대학, 생명과학대학, 보건과학대학, 정보대학의 교수 연구실 및 강의실이 위치하고 있다. 과학도서관과 하나스퀘어 1983년 9월에 개관한 과학도서관은 자연계지역의 한가운데에 위치하며, 이공계 관련 서적은 대부분 이 곳에서 보유하고 있다. 하나스퀘어는 하나은행에서 130억 원을 기부하여 건립된 지하 건축물로서, 2006년 8월에 완공됐다. 과학도서관과 하나스퀘어는 서로 연결돼 있어 지상을 통하지 않고 이동 가능하다. 프런티어관 뒷쪽 모습 의과대학과 간호대학의 교수연구실이 위치하고 있고 기숙사와 체육 시설 등이 들어서 있다. 모든 부지는 안암동에 속해 있다. 녹지운동장이 있어 ‘녹지 캠퍼스’로 불린다. 의료원 1971년 12월에 고려대학교는 1970년에 시작된 장기발전계획에 따라 우석대학교 의과대학을 흡수 및 합병하였다. 전라북도 완주군에 위치해 있는 현재의 우석대학교는 1979년에 설립된 학교로 1971년 당시에 합병한 우석대학교 의과대학과는 관련이 없다. CJ식품안전관 맞은편에 위치한 안암병원은 고려대학교 의료원 산하에 있는 병원 세 곳 중 하나이며, 1971년 12월 고려중앙학원이 우석학원을 합병한 이후 과거 혜화병원을 1991년 7월 22일에 현재 위치에 신축 이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혜화병원의 역사는 1938년 5월에 설립된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의 부속 병원으로 1941년 9월에 문을 연 경성의전부속병원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1948년 5월 서울여자의과대학부속병원, 1957년 1월 수도의과대학부속병원, 1967년 3년 우석대학교의과대 부속병원, 1971년 12월 고려대의대부속 우석병원을 거쳐 1976년 3월 고려대의대 부속병원으로 개칭돼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의료원 오른편에 위치한 건물은 의과대학과 간호대학이 사용하고 있으며 이들 건물 사이에는 의학도서관이 위치하고 있다. 현재 의과대학 건물 뒷편에는 의학관 건물 신축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자연계와 녹지를 잇는 길은 의료원의 오른편을 에둘러 지나가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의과대학에서는 시신을 기증한 고인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매해 4월 말에 의과대학 뒷편의 감은탑 앞에서 ‘감은제’를 거행하는데, 감은탑 앞이 협소한 관계로 이 행사가 진행될 때는 부득이하게 녹지지역으로 향하는 길을 일시적으로 차단한다. KU R&D센터 1997년 8월 착공하여 2000년 5월에 준공된 건물로 생명공학원 이라고 부르다가 생명과학관(녹지) 로 명칭이 변경된 채 생명과학대학 생명과학부 및 생명공학부 교수 연구실 및 강의실이 위치하고 있었다. 생명과학부의 학사지원부 또한 이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2015년 1월에 생명과학대학이 하나과학관 A동으로 이전하면서 이곳은 KU R&D센터로 명칭이 변경됐다. 녹지운동장과 화정체육관 녹지운동장은 잔디가 깔려있는 운동장으로, 예약을 하고 이용할 수 있다. 매해 5월 응원단에서 주최하는 ‘입실렌티 지·야의 함성’이 이 곳에서 진행된다. 이 행사는 화정체육관 공사가 진행되기 이전에는 노천극장에서 진행됐으나 공사로 인해 노천극장이 폐쇄되면서 녹지운동장으로 옮겨가게 됐다. 화정체육관은 중앙광장, 백주년기념관과 더불어 고려대학교 100주년 기념 사업의 일환 으로 2006년 7월 25일 건립됐으며, 고려중앙학원에서 공사비 262억원 전액을 출연하였다. 현승종 당시 고려중앙학원 이사장은 화정체육관의 완공으로 “김병관 전 고려중앙학원 이사장이 약속한 고려대 캠퍼스 종합개발 3대 마스터플랜이 마무리됐다”고 밝혔다. 화정체육관 건립 이전에 이 곳에는 노천극장이 있었다. 정릉캠퍼스는 원래 우석대학교의 의과대학/의과기술초급대학을 제외한 나머지 학과가 있던 캠퍼스였다. 1971년 고려대학교의 우석대학교 인수 이후 2004년까지 고려대학교 병설 보건대학이 이곳에 위치했으나, 2005년 10월 25일 교육인적자원부가 고려대학교와 고려대학교 병설 보건대학의 통합을 승인하면서 고려대학교에 신규 단과대학인 보건과학대학이 이 곳에 신설됐다. 정릉캠퍼스는 정의관, 진리관, 호림관, 학생회관, KU-MAGIC 연구원 등 5개의 건물로 구성된다.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학교 및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또한 정릉캠퍼스에 위치하고 있다. 2015년에 보건과학대학은 안암동 자연계 캠퍼스에 신축한 하나과학관으로 모두 이전하였으며, 이에 따라 2016년부터 정릉캠퍼스는 KU-MAGIC(Medical Applied R&D Global Initiative Center) Project One 의 연구시설로 사용되고 있다. KU-MAGIC 연구원 KU-MAGIC의 MAGIC(매직)은 ‘Medical Applied R&D Global Initiative Center’의 약자로 의료, 연구, 개발, 글로벌 네트워킹, 국책과제 수행, 사업화 등 다양한 분야에 걸친 거대한 프로젝트를 의미한다. 정릉캠퍼스는 KU-MAGIC Project One을 통해 첨단의료과학센터로 거듭날 예정이다. 세종캠퍼스 농심국제관 세종특별자치시에 위치한 캠퍼스이다. 1980년에 개교하였으며 2010년에는 개교 30주년을 맞았다. 기존의 명칭은 ‘서창캠퍼스’였으나, 2008년 3월에 현재의 이름으로 변경됐다. 2011년에 문을 연 약학대학은 이 곳에 위치해 있다. 학술정보원 세종캠퍼스의 도서관으로서 정식명칭은 학술정보원이다. 건물 옥탑에 4면 시계탑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분관대출을 통해 안암에 위치한 자료를 상호 대차 이용할 수 있으며 관련 홈페이지에서 열람실 좌석 현황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대학교 의료원 산하에 안암병원과 구로병원, 안산병원 등 세 곳의 병원이 운영되고 있다.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에 위치한 안암병원은 1051병상을 가동하고 있으며, 서울특별시 구로구 구로동에 위치한 구로병원 또한 1057병상을,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에 위치한 안산병원은 710병상을 가동하고 있다. 구로병원은 1983년에 개원하였으며, 2008년에 증축이 완료됐다. 안산병원은 1985년에 개원했으며, 1998년 증축하면서 시설을 확대 및 개선하였다. 또한, 2013년 3월 26일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10개의 연구중심병원에 고려대학교 안암병원과 구로병원이 포함돼 유일하게 1개 대학에서 2곳의 병원이 선정됐다. 고려대학교 대천수련원 그 밖에 본교 소유의 시설 중 수련원 시설로는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에 위치한 낙산수련원, 충청남도 보령시 신흑동에 위치한 대천수련원, 전라남도 완도군 신지면에 위치한 완도수련원이 있으며 이 중 완도수련원은 2010년 8월 10일에 완공됐다. 이 밖에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에 위치한 송추운동장, 경기도 남양주시 덕소읍에 위치한 덕소농장이 있다. 덕소농장에서는 참기름을 생산하고 있지만 상용화된 제품으로는 판매하지 않으며, 교내에서만 선물용으로 판매하고 있다. 이전 초기에는 정문 앞과 제기동 주변이 학교 주변의 가장 주요한 상권이었으나 안암병원의 개원과 더불어 개운사길의 복개가 이루어져 그 중심이 유흥 상권이 형성돼 있는 안암로터리 부근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지하철 6호선 안암역 개통을 계기로 안암로터리 부근의 상권이 안암역 사거리까지 확장되어 현재의 참살이길을 형성하였다. 정경대학 후문의 24시간 개방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근래에 들어서 단순히 상권의 위치만 옮겨간 것은 아니다. 과거에는 식사시간만 되면 밥집 앞에 길게 줄을 서는 것이 일반적인 풍경이었지만 학생들의 식생활 변화와 연이은 물가 상승 등의 이유로 학교 주변에 위치한 밥집들이 상당한 위기를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문 앞 캠퍼스타운 개발 문제로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맞서 있는 상태다. 총학생회는 학교 당국과 독립적인 학생들의 요구를 대외적으로 관철시키기 위한 학생자치기구이다. 총학생회의 기원은 이승만 정권 당시 존재한 중앙학도호국단의 해체와 관련이 깊다. 1960년 4·19 혁명 후 학생들은 1949년 9월 이승만 정권 당시 대통령령 86호로 결성된 학도호국단과 관련하여 ‘어용기구인 중앙학도호국단에서 탈퇴하여 이의 해산을 강력히 주장한다’고 선언하였으며, 이와 같은 주장이 5월 4일 국무회의를 통해 실현된 것이 현재 총학생회의 기원이다. 1965년 교칙위반을 이유로 활동정지 처분되는 사건이 있었으며 1975년 6월에는 군사정권에 의해 강제로 학도호국단으로 재편되는 수모를 겪는 등 탄압으로 인해 그 명맥이 끊어질 뻔한 적도 있었으나 1984년 학도호국단을 폐지한 이래 매년 선거로 총학생회가 선출되고 있으며 2015년에는 47대 총학생회 ‘지음’이 활동하였고, 2016년 기준으로 48대 총학생회 ‘별:자리’가 활동하고 있다. 학생처가 총학생회 활동의 지원을 담당하고 있으며 학생 복지를 관장하는 기구로 학생복지위원회( 공식 페이스북)라는 별도의 기구가 존재한다. 안암캠퍼스 풍경 고대신문 (주간신문) 1947년 창간돼 학생 주도로 발행하는 고려대학교의 주간 교내신문으로, 발행비용은 학교 당국이 보조한다. 1960년 4월 2일 ‘우리는 행동성이 결여된 기형적 지식인을 배격한다’며 학생들이 독재정권에 저항할 것을 호소한 날카로운 사설은 4·18 고대생 의거의 촉매제가 된 명문으로 유명하며, 1975년 긴급조치 제7호 당시 학교 앞에 진주한 군대를 상대로 학생들이 교문을 막고 서 있는 사진과 함께 실린 ‘고대의 문은 누구도 닫을 수 없습니다’라는 광고는 수많은 교우들의 심금을 울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최근 들어 특정 주제에 대한 깊이 있는 기사보다는 학내 뉴스 위주로 1면을 내보내고 있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서울대학교에서 발생한 대학신문 학생기자단의 편집권 투쟁 과 관련해 학생기자들의 투쟁을 촉구하는 의견이 게재되기도 하였다. 한편 편집권 관련 분쟁으로 인해 서울대학교 대학신문의 2004년 11월 15일자 신문은 정상적으로 발행되지 않았다. 1998년부터 인터넷 고대신문이 발행됨에 따라 인터넷으로도, 고대신문의 기사 내용을 확인할 수 있게 됐다. 2006 년부터는 인터넷 고대 신문 쿠키라는 이름으로 미디어 포탈로 영역을 확장 하였다. 신문사는 홍보관 건물 2층에 위치하고 있다. 고대문화 (계간지) 1945년에 창간된 고려대학교의 교지이다. 본래 학기마다 1회 발행하였으나, 2003년부터 월간으로 전환하였다가 2010년부터는 계간으로 전환돼 발행 중이다. 고대신문과 달리 학생들이 납부하는 교지대에 의존해 발행한다. ‘세계를 변혁하는 대항언론’을 표어로 하고 있으며, 학내외 여러 사안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를 많이 낸다. 또한 총학생회 계열의 학생운동 세력과 다른 대안적인 주장을 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학생회비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교지대는 등록금과 함께 학교당국이 수납을 대행하는 일괄납부 방식이었으나, 일부 학생들의 반발로 2005년 2학기부터 분리납부로 전환됐다. The Granite Tower 학내 영자신문사인 《 The Granite Tower 》는 YBM 창립자 민영빈에 의해서 1954년에 창간하였으며 고려대학교 유일의 영자 매체이다. 1997년에 온라인 서비스를 시작하였다. 신문사의 위치는 홍보관 2층이다. KUBS· KTN· KUTV· KDBS 교내종합방송국인 KUBS는 학교 기관인 교육매체실 소속의 방송국으로 정식 명칭은 고려대학교 교육방송국이다. 아침, 점심, 저녁으로 라디오 방송을 내보내고 정기적인 영상프로그램 제작을 한다. 고연전, 석탑대동제와 같은 기간에도 활동하며, 학내 특별 사안이 있을 때에는 특별방송을 한다. KUBS의 방송은 인터넷으로도 보고들을 수 있다.. 방송국은 홍보관 건물 2층에 위치하고 있다. 교내 TV 방송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KTN은 학교 기관인 교육매체실 소속의 방송국으로 정식 명칭은 고려대학교 TV 방송국이다. 교내 행사의 영상 기록을 하고, 정규 프로그램을 만들어 송출하며, 교내 케이블TV 채널 4번을 통해 24시간 방송을 한다. 방송국은 홍보관 건물 4층에 위치하고 있다. TV 방송만을 다루는 KUTV는 자치언론협의회 소속의 학생 자치방송국이다. 학내 곳곳에 설치된 TV를 통해 아침, 점심으로 방송을 하며, 정규 방송은 1주일 단위로 편집된다. 방송국은 홍보관 건물 3층에 위치하고 있다. 이와 별도로 세종캠퍼스내 학교 부속 언론기관인 KDBS도 운영되고 있다. 석순 (여성주의 교지) 1983년부터 시작된 여성주의 교지로, 《고대문화》와 더불어 학생회비의 일부를 구성하는 교지대에 의해 운영된다. 《고대문화》와 마찬가지로 교지대 강제 징수를 둘러싸고 진통을 겪었다. 학기당 1회 발행하며, 학내외 여성주의 문제 전반을 다룬다. 고려대학교의 동아리는 인문계 캠퍼스 학생회관에 동아리방이 있는 고려대학교 동아리연합회 소속의 중앙동아리와 자연계 캠퍼스 애기능학생회관에 동아리방이 있는 고려대학교 애기능동아리연합회 소속의 애기능중앙동아리로 나뉘며, 두 동아리연합은 동격이다. 이 외에도 단과대, 학과별 동아리도 존재한다. 고려대학교 교환학생 교류회(KUBA) 고려대학교 교환학생 교류회 KUBA는 ‘Korea University Buddy Assistants’의 약자로 외국인 교환학생/방문학생들의 학사와 생활전반에 걸친 정착을 돕는 고려대학교 국제처 산하 자원봉사 단체다. 고려대학교를 전 세계에 알림과 동시에 외국인 학생들이 대한민국과 고려대학교 생활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이를 통해 국경을 초월한 우정과 문화 교류를 쌓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주요 활동으로는 버디매칭과 조별활동, Language exchange, 매달 다양한 주제의 미션 수행, 축제 및 각종 문화행사(웰커밍 파티, 필드데이, 입실렌티/고연전, International Students Festival, 페어웰 파티) 등이 있다. 이상의 내용들은 공식 홈페이지의 내용들을 토대로 하며, 자세한 활동 내용은 교류회 공식 카페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고려대학교 응원단 고려대학교 응원단은 1927년 11월 처음 치러진 보연전 시절부터 비공식적인 단체로 시작하여, 1968년부터 교내의 공식적인 단체로 인정받기 시작하였다. 정기 및 비정기 고연전 을 이끌며, 고려대학교가 참여하는 스포츠 행사, ‘입실렌티 지·야의 함성’ 등에서 응원을 담당한다. 입실렌티 등 응원단이 주관하는 행사의 일정은 고려대학교 응원단 공식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고려대학교(서울) 학생홍보대사 여울 고려대학교 대외협력처 홍보팀에 소속되어 재학생들로 이루어진 교내의 공식 홍보단체이다. 1998년 9월 1기가 선발된 이래 2012년 기준으로 14기가 선발돼 여러가지 활동을 하고 있다. 고려대학교를 방문하는 일반인들에게 캠퍼스 견학을 제공하고, 입학식과 졸업식, 비전 선포식 등 교내외 다양한 행사에 참여하여 고려대학교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정기견학 일정 등은 여울 공식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고려대학교(세종) 학생홍보대사 홍랑 세종캠퍼스는 ‘홍랑’이라는 별도의 학생홍보대사를 운영하고 있다. 생활도서관 타 대학 학생 또는 일반 시민에게도 개방하며 운영 전반에 걸친 부분을 학교의 간섭을 받지 않고 학생들 스스로 해결한다는 점이 특징인 생활도서관은 1990년 5월 전국 대학 최초로 설립됐다. 2003년에는 장애인권위원회, 언론자치활동모임 불한당과 함께 ‘올리브’(OLIB) 운동이라 불리는 대학도서관 개방운동에 참가하였다. 이화여자대학교의 ‘올리버’(OLIBER) 운동과 맥락을 같이한 이 운동을 통해 생활도서관은 대학 도서관의 완고한 장벽을 철폐할 것을 주장하였다. 한편 이와 같은 움직임에 대해 열람실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이유를 근거로 하는 학생들의 반발 또한 존재하였다. 고전음악감상실 1978년 처음 만들어진 이후 학생들의 휴식공간 등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해 왔다. 다양한 장르의 고전음악과 이에 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으며 신청곡을 받아 멘트와 함께 틀어주기도 한다. 홍보관 1층에 위치해 있다가 중앙광장 120호로 자리를 옮겼는데, 이로 인해 평일 오전 10시 30분부터 오후 6시까지 이루어지던 감상실 운영이 정오부터 오후 2시까지로 줄어들게 되었다. 이처럼 이용 가능 시간이 줄어들게 된 것은 새로 옮겨간 공간이 수업 용도로도 사용되기 때문이다. 문제점에 직면하게 되자 감상실 측에서는 2011년 2월부터 재학생 커뮤니티인 고파스를 통한 ‘24시간 클래식 음악방송’을 진행하기도 하였으나 현재는 제공되고 있지 않다. 재학생 커뮤니티 세종캠퍼스 재학생들을 대상으로 쿠플존이 운영되고 있으며, 서울캠퍼스 재학생들을 대상으로 고파스가 운영되고 있다. 사발식 (沙鉢式)은 커다란 사발에 부어진 막걸리를 선배들이 불러주는 ‘막걸리찬가’에 맞추어 신입생들이 마시는 행사를 말하며, 고려대학교의 교우로 남기 위해서는 원칙적으로 거쳐야 하는 관문이다. 이처럼 오랜 역사를 지닌 사발식의 기원이 언제부터였는지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지만 이와 같은 문화가 1970년대 즈음에 생겨났다는 증언이 존재한다. 신입생환영회에서 많은 양의 막걸리를 마시도록 하는 것에는 “그간의 획일화된 교육과 얽매인 생활의 묵은 때를 모두 토해 비워버리고 학문의 진리와 민족의 정의를 위해 나아가는 고대인이 되라”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한다. 동아리 박람회 (-博覽會; 약칭 동박 )는 고려대학교에 소속된 각 동아리들이 학부 신입생들에게 홍보를 하는 행사이다. 매년 3월 중에, 고려대학교 중앙동아리연합회 주최의 동아리 박람회와 애기능동아리연합회 주최의 동아리 박람회가 각각 이틀 간 민주광장과 애기능학생회관 앞에서 열린다. 2010년 3월 기준으로 모두 185개의 동아리가 교내에 등록돼 있다. 동아리 구성원들은 박람회 외에도 포스터나 공연, 콘서트, 지인을 통한 여러 홍보활동을 통해 그들이 속한 동아리를 알린다. 일정한 자격 요건을 갖추고, 전체동아리대표자회의를 거쳐 가등록과 정식 등록 절차를 거친 동아리는 중앙동아리로 활동할 수 있으며, 이미 등록된 동아리들도 매년 재등록신청서를 작성하여야 한다. 애기능동아리연합회 소속의 동아리로 활동하고자 할 때도 비슷한 절차를 거치게 된다. 중앙동아리로 인가를 받으면 동아리방을 배정받고 학교의 지원금을 받게 되는데, 교비를 지원받으려면 정해진 기간 내에 교비 지원 신청을 해야 한다. 매년 4월 18일에는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됐던 4·18 의거를 기념하기 위해 4·18 기념 마라톤과 구국대장정을 진행한다. 헌화 행사에 이어 오전에는 기념 마라톤이, 오후에는 구국대장정이 진행된다. 기념 마라톤은 1969년 당시 총학생회에서 처음으로 만든 이래 현재까지 꾸준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학교를 출발하여 국립 4·19 묘지를 거쳐 다시 학교로 돌아오는 총 16.2km의 코스로 구성돼 있다. 최종 목적지가 국립 4·19 묘지로 설정되어 있는 것에는 4·18이 4·19 정신으로 이어진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와 같은 행사는 1980년대 군사정권 시절에도 이어져 마라톤이라는 형식을 빌려 불의에 맞서 싸우는 기능 또한 담당하였다. 구국대장정은 각 단과대별로 모여 교내 중앙광장을 출발하여 수유동 국립 4·19 묘지까지 행진한 다음, 4·19 기념탑에서 참배한 후 학교로 다시 돌아오는 형식을 띄는 행사로, 이 행사 또한 1969년에 처음으로 개최됐다. 행사 초기에는 시민들의 불편을 우려하여 참가자 수에 제한을 두었으나 1984년부터 이 제한이 폐지됐다. 이 행사에서의 구호는 해당연도의 이슈 또는 시대적인 변화가 반영된 것으로, 이를 구호뿐만 아니라 팜플렛을 통해서도 시민들과 공유하고 있다. 선배들의 정신을 계승한다기보다는 고대생이 되기 위한 하나의 절차 정도로 인식되는 것과 관련하여 알맹이가 빠져 있다는 의견들이 존재하는 반면, 꾸준히 행사를 이어나가고 있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 또한 존재한다. 매년 5월 중에는 석탑대동제 (石塔大同祭)라는 이름의 학생 축제가 열린다. 1962년 5월 4일부터 3일간 개최된 ‘석탑축전’이 이 행사의 연원으로 알려져 있는데, 여기서 ‘석탑’이라는 이름은 당시 본교 교수로 재직 중이던 조지훈이 지었다고 한다. 석탑축전이 ‘대동제’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1984년의 일이다. 대동제(帶同祭)라는 의미는 직역을 하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함께 데리고 가는 것 + 추모하는 제(祭)를 지내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한 대학생들이 독재정권 항쟁 과정에서 죽임을 당한 학생들을 추모하면서 살아있는 학샐들의 참여 의식을 고취하기 위한것이었다. 당시 독재 정권에 의해 의문의 죽음을 당한 학생들을 추모하는 합동위령굿 등을 지내면서 3년 후인 1987년에는 전국 대부분의 대학에서 대동제라는 이름으로 축제를 열 정도로 ‘대동제’라는 이름은 대학가 전역에 널리 퍼져나갔다. 인문대학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정태환은 ‘교내 구성원 간에 소속감과 일체감을 느낀다는 면에서 스트레스 해방구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면서 교내 축제에 그 의미를 부여하였다. 1956년 개교기념일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민주화 투쟁이 발생하는등 개교 기념일에 여러가지 이벤트가 발생하였다. 석탑대동제는 개교기념일의 대표 행사였으나 2000년대 들어 개최기간이 길게는 3주까지 미뤄지며 개교기념일과의 거리가 멀어졌다. 대동제 기간에는 여러 학과/반 학생회와 동아리에서 주점을 비롯한 각종 이벤트들이 교내 곳곳에서 개최되며, 주요 행사 일정은 교내에 비치된 고대신문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대동제 기간에 애기능 지역에서는 애기능동아리연합회의 주도로 별도의 행사가 열리며 2011년의 경우 공과대, 생명대, 이과대, 보과대, 정통대의 5개 단과대학이 참여하여 노벨광장을 주 무대로 ‘Sound Festival’(사운드 페스티벌)과 ‘애기능 실루엣 가요제’, ‘애기능 요리 경연대회’ 등과 더불어 각종 가수들의 축하공연이 펼쳐졌다. 2011년 입실렌티 무대의 모습 입실렌티 지·야의 함성 (Ipselenti 知野의 喊聲)은 주로 석탑대동제 마지막 날 저녁을 기해 고려대학교 응원단이 주최하는 응원제로 2011년에 34회째를 맞았다. ‘입실렌티’(Ipselenti)란 보성전문학교 시절부터 사용된 고려대학교의 교호(校號)의 일부이며, ‘지·야’란 지성(知性)과 야성(野性)을 가리킨다. 학우들의 참여 프로그램, 초청 연예인들의 공연과 응원제 프로그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교가와 교호로 행사를 마무리한다. 교가와 교호로 행사를 마무리하는 방식은 입실렌티 이외의 공식적인 행사에서도 일반적이다. 응원곡 고려대학교 응원단에서는 매년 고연전 오티를 기해 응원곡 신곡을 발표하고 있다. 응원 문화가 현재와 같은 형태를 띄게 된 것은 1968년 응원단이 조직된 이후의 일이다. ‘ 뱃노래’가 체계를 갖춘 최초의 응원곡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이 곡은 1974년에 발표됐다. 1981년에 발표된 ‘엘리제’에는 당시의 디스코 문화가 반영돼 있으며, 이듬해인 1982년에 발표된 ‘석탑’에는 반정부 정서가 가미돼 있다. 2003년에 발표된 ‘ 민족의 아리아’와 2007년에 발표된 ‘ 들어라 보아라 그리고 기억하라’와 ‘ Forever’, ‘ 캉캉’ 또한 많은 인기를 얻었다. 최근에는 밝고 경쾌한 분위기의 동작들이 가미된 응원곡들 또한 등장하고 있다. 응원단 측에서는 응원곡을 제작 및 발표할 때 얼마나 많이 불릴지를 예측해서 이들을 3개의 등급으로 분류한다고 한다. 교가와 교호 현재 사용되고 있는 교가는 1955년에 개교 50주년을 맞아 제정된 것이다. 작사는 조지훈, 작곡은 윤이상이 맡았다. 교호는 1922년 구 교가(이광수 작사, 김영환 작곡)와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다. 즉, 보성전문학교 시절에 제정된 것이다. 그래서 후렴구가 고려대학이 아닌 보전(Pojun, 보성전문)으로 표기돼 있다. 교명이 고려대학교로 개명된 뒤, 교호는 아래와 같이 수정됐다. 이처럼 고려대학교 교호에는 입실렌티, 체이홉, 카시코시 코시코, 카를 마르크스까지 모두 네 사람의 이름이 등장한다. 이들은 출생 연대는 서로 다르지만 사회 저항비판 의식이 강했던 인물들이다. 따라서 교호를 만든 사람은 입실렌티, 체이홉, 카시케시 코시코에게 순서에 관계없이 ‘자유’, ‘정의’, ‘진리’라는 교훈(校訓)을 부여해 고대생에게 사회 저항의식을 가져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입실렌티’는 19세기 오스만 투르크에 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던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의 이름에서 나왔고, ‘체이홉’은 러시아의 작가 안톤 체호프라는 설과 동명의 러시아 혁명가라는 설이 있으며, ‘카시코시 코시코’는 폴란드의 혁명가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로부터 유래한 것이라는 설과 카시코시우스라는 그리스인으로부터 유래하였다는 설이 존재한다. ‘칼마시’는 카를 마르크스다. 다시 말해 고려대학교 교호는 ‘입실렌티, 체이홉, 카시코시 코시코, 칼 마르크스’가 계시는(케시케시) 고려대학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044.jpg|섬네일|250px|2006년 정기 고연전의 모습(잠실야구장) 고연전 은 애교심을 고양하고 고려대학교와 연세대학교 양교의 친선을 도모하기 위한 목적으로 스포츠 경기를 비롯한 강연, 온라인 게임, 사회공헌활동과 같은 다양한 분야에서 연세대학교와 승부를 겨루는 행사 일체를 의미한다. 영국의 옥스포드 대학교와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옥스브릿지(Ox-Bridge)전(戰)’과 일본의 와세다 대학과 게이오기주쿠 대학의 ‘소케이센’() 등과 유사한 형태이다. 고연전은 매년 9월에 연세대학교 5개 종목의 운동부 선수들과 맞붙는 ‘정기 고연전’ 과 정기 고연전 이외의 기간에 열리는 ‘비정기 고연전’ 으로 크게 나누어볼 수 있으며, 이와 관련하여 교내에 축구부, 럭비부, 야구부, 농구부, 아이스하키부 등 5개 종목의 스포츠단체가 활동하고 있다. 흔히 일컬어지는 ‘고연전’이라는 명칭은 ‘정기 고연전’을 의미하며, 아래에 이어지는 설명도 ‘정기 고연전’에 관한 것이다. 고연전의 역사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와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는 1925년 5월 30일에 열린 조선체육회 주최 ‘제5회 전조선(全朝鮮) 정구대회’에서 처음으로 맞붙었다. 양교의 실질적인 첫 전면시합이 열린 것은 1927년 경성운동장에서 거행된 제8회 전조선 축구대회 준결승에서의 보성전문학교 축구부와 연희전문학교 축구부의 대결이었다. 1943년에 징병제가 실시돼 시합이 중지되기 전까지 보성전문학교는 연희전문학교를 상대로 축구대회에서 31전 17승 14패를, 농구대회에서 62전 30승 32패를 기록하였다. 정기전은 광복 이후 1945년 12월 21일부터 이틀간 열린 ‘제1회 보연 OB 축구대회’를 통해 부활하였다. 이듬해인 1946년에는 양교의 교명이 바뀌었으며 이에 따라 ‘보연전’이라는 명칭 또한 ‘고연전’으로 바뀌었다. 1946년부터는 축구와 농구의 재학생 간 정기전이 매년 열리게 됐고, 1956년에는 야구, 럭비, 빙구의 세 종목이 추가됐다. 오늘날과 같은 규모의 고연전 기틀이 마련된 것은 1959년의 일이다. 1961년부터 1964년까지는 5·16 군사 정변 등의 이유로 정기전이 열리지 않았다. 1965년부터는 이틀 동안 다섯 경기가 일제히 치러지는 지금과 같은 경기방식이 완전히 자리를 잡았으며, 1970년대 중반부터 점차 고연전 때 붉은색 티셔츠를 입기 시작하였다. 한동안 ‘민족해방제’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 역대 정기 고연전 전적은 다음과 같다. 정기전의 명칭과 일정 매년 9월에 열리는 정기전(정기친선경기대회)은 고연 양교가 매년 번갈아 주관한다. 정기전의 공식적인 명칭은 정기전을 주최하는 학교의 이름을 뒤에 붙이는 방식으로 정해지는데, 연세대학교가 주최하는 정기전 행사인 경우 ‘고연전’이 정식 명칭이 되는 식이다. 그러나 정식 명칭은 실질적으로 방송 중계나 신문 보도 등의 공식 석상에만 사용될 뿐이며, 고려대학교에서는 고연전 , 연세대학교에서는 연고전 이라는 명칭으로 통용된다. 고연전을 며칠 앞두고 세종 오리엔테이션과 서울 오리엔테이션, 합동 오리엔테이션이 각각 진행되며, 정기 고연전이 끝난 후에는 교우회 주최로 선후배 간의 화합의 장인 ‘1905 페스티벌’이 열린다. 이 행사는 동기회, 학과 교우회, 졸업생 개인이 학교 인근 주점을 예약해 후배들과 대화의 장을 마련하는 행사로, 68학번 동기회가 참살이길의 삼성통닭을 통째로 빌린 것이 그 시초이다. 축구, 야구, 농구, 아이스하키,럭비 등 여러 종목의 운동부를 운영하고 있다. 고려대학교 교우회 고려대학교 출신 교우들의 모임인 고려대학교 교우회는 1907년 1월 대한민국 최초의 대학 동문회인 ‘보전 친목회’로 창립됐다. 초대회장은 조성구(趙聲九)가 맡았으며 현재 교우회장은 이학수(상학과, 65학번)가 맡고 있다. 호남향우회, 해병전우회와 더불어 특별한 유대와 결속을 자랑하는 3대 모임의 하나로 일컬어질 정도로 대한민국 사회에서 상당히 강한 결속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러한 결속력은 이명박 대통령의 출마와 당선 과정에서도 확인됐지만, 1990년대 후반 들어 입학생들의 구성이 변화함에 따라 현재의 결속력이 향후 약화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2010년 6월에는 교우회장 자리를 맡고 있던 천신일 세중나모여행 회장이 구속되는 사건이 발생하였으며, 이는 2011년 4월 28일에 개최된 대의원 정기총회 자리에서 구천서 차기 교우회장 후보의 인준 안건을 부결시키는 데 영향을 미쳤다. 교우회관 건물은 1994년 9월 29일에 착공하여 1996년 5월 30일에 문을 연 것으로 사범대학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고려대학교 동문중엔 기업인이 많은데 2014년엔 대한민국 재벌기업 경영자의 상당수가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출신이란 언론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4·18 고려대학생 피습 사건 고려대학교 세종캠퍼스 고파스 동아일보 스카이 (대학) 연세대학교 서울대학교 고려대학교 서울캠퍼스 홈페이지 고려대학교 세종캠퍼스 홈페이지 고려대학교 일반대학원 홈페이지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홈페이지 고려대학교 도서관 홈페이지 고려대학교 의료원 홈페이지 고려대학교 교우회 홈페이지 고대신문 홈페이지 고려대학교 세종캠퍼스 재학생 커뮤니티 쿠플존 고려대학교 안암캠퍼스 재학생 커뮤니티 고파스 분류:1905년 설립 분류:대한민국의 대학교 야구부 분류:서울특별시의 대학교 분류:서울 성북구의 학교 분류:세종특별자치시의 대학교 분류:우니베르시타스 21 분류:국제경영대학발전협의회 분류:대한민국의 대학교 축구부 분류:소프트웨어 중심대학
안중근 (安重根, 1879년 9월 2일 ~ 1910년 3월 26일)은 대한제국의 항일 의병장 겸 정치 사상가이다. 세례명은 토마스(Thomas, 도마, 다묵(多默))이다. 본관은 순흥(順興), 고려 시대 후기의 유학자 안향의 26대손이다. 동학 농민 운동에서 아버지 안태훈이 동학군을 정벌하는 데 함께 참여하였고, 대한제국 말기에는 학교 설립과 교육운동과 국채보상운동을 하였으며 한때 복권 사업과 비슷한 채표회사(彩票會社)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09년 우덕순과 소수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만주의 하얼빈 역, 지야이지스고 역 근처에서 초대 한국통감 이토 히로부미 등의 하차 시 암살을 준비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 잠입하여 역전에서 러시아군의 군례를 받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다이지로(森泰二郞), 남만주 철도 이사 다나카 세이지로(田中淸次郞) 등에게 중상을 입히고 현장에서 러시아 경찰에게 붙잡혔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에 살인의 죄형으로 관동주 뤼순 감옥(뤼순형무소)에서 사형(교수형) 집행되었다. 안중근은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에서 진해현감 안인수의 손자이자 진사 안태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안중근의 할아버지 안인수는 해주 일대에서 미곡상을 경영하여 상당한 재산을 축적했다. 1911년 한국을 방문하여 안태훈 일가의 활동지를 답사한 베네딕토 수도원의 노베르트 베버 신부가 작성한 여행기에 따르면 안인수와 그의 아들 6형제와 가족 36인이 해주에서 일가를 이루고 살았을 당시에 안인수는 4백석의 토지를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대지주에 미곡상으로 재산을 많이 축적하여 그는 어렵지 않은 유년기를 보냈다. 뒤에 일본은 안인수가 "항상 미곡 매입 대금을 지불하지 않는 등 각종 간악한 수단을 부려 재물을 모아 거부를 이루었다"거나, 안인수는 "성품이 탐욕하고 배부름을 모르고 일상 간계를 써서 타인의 재산을 수중에 넣으려고 하였으므로 당시인들이 안응칠安億乏)이라고 다르게 불렀다"고 말한 반면, 안중근은 "조부가 자산가로서 도내에 이름이 높았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안중근의 가계는 그의 5대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다소 불확실하다. 순흥 안씨 족보에 의하면 17대조 안려(安廬)는 사마시에 합격한 생원으로서 건원릉 참봉을 지냈다. 14대조 안효신은 어린 나이에 문단에서 명성을 날릴 정도로 문장에 능했으나 벼슬을 구하지 않고 황해남도 해주로 내려가 은거 생활을 했다. 이로써 안효신은 순흥 안씨 참판공파의 해주 입향시조가 되었다. 이후 안중근의 선조들은 안중근의 14대조 안숙관과 13대조 안류가 통정대부(정3품)의 품계를 받았을 뿐이며, 안중근의 안기옥(安起玉)에 이르기까지 벼슬에 나가지 못했다. 그런데 불확실한 내용이 여기에서 나타난다. 1845년에 순흥안씨 족보소가 간행한 순흥안씨 족보에는 안중근의 17대조 안려에게 진사, 후사없음(進士無后)이라고 되어 있으나, 1864년 안최량(安最良)이 편찬한 순흥안씨 족보에는 안려에 대해 후사가 나와 있지 않고, 진사라고만 되어 있다. 이에 반해 1910년대 이후에 간행된 족보에는 안려의 장조카로 강진현령을 지낸 안효충(安孝忠)의 둘째 동생인 안순복(安順福)이 안려의 양자로 들어가서 안효신을 낳았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안중근의 15대조이자 해주입향시조인 안효신의 존재는 1918년에 신문관에서 간행된 순흥안씨족보와 1936년 간행된 순흥안씨 족보 이후부터 나타나고 있다. 또한 1800년대 의(安毅)의 후손으로 안효충만 나와 있다. 그런데 1910년대에 간행된 족보에는 안의의 후손으로 안효충 외에도 안현복, 안순복, 안경복, 안창복, 안성복, 안준복 등이 새로이 나오고 있다. 이로 미루어 해주에 정착한 순흥안씨 참판공파 인사들의 낙향 직전의 세계와 해주 입향 이후부터 한말까지의 신분 문제는 불명확한 사실이 많음을 알 수 있다. 해방 전후에 안중근의 전기와 비문을 집필한 이들은 안중근 가문의 신분을 한결같이 향리로 보고 있다. 김택영과 이건승은 안중근 의거 이후 에 지은 간략한 전기에서 각각 "그 선조는 본래 순흥 사람으로 해주에 살면서 대대로 주리를 지냈다. 안태훈 대에 이르러 글을 읽어 진사가 되었다"거나 "그의 선조는 순흥인데 중도에 해주로 이사하여 주리를 지냈다"고 하였다. 또한 심산 김창숙은 1961년에 지은 안중근의사 숭모비문 에서 "그 선조의 세가는 서한의 해주에서 주리가 되었는데, 부친 안태훈의 대에 이르러 독서하여 국자생이 되었다."고 하였다. 안중근의 5대조 안기옥의 대에 이르러 무과에 급제, 관직 진출을 꾀하였다. 이는 향리직을 장기간 세습하면서 사회경제적 능력을 갖추어 나간 이서층이 과거를 통해 양반층으로 편입되려는 신분상승운동을 벌였음을 의미한다. 안기옥은 안영풍(安永豊), 안지풍(安知豊, 안중근의 고조부), 안유풍(安有豊), 안순풍(安順豊) 등 네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도 모두 무과에 급제하였다. 이처럼 향리 가문의 4형제가 모두 무과에 급제한 것은 가문의 위상을 높인 쾌거였다. 또한 안지풍의 장남 안정록(安定錄, 안중근의 증조부), 안유풍의 아들 안두형(安斗亨), 안유풍의 손자 안인환(安仁煥), 안순풍의 아들 안신형(安信亨) 등이 모두 무과에 급제하였고 안유풍의 손자 안인권(安仁權)이 절충장군의 품계를 받았다. 안인필(安仁弼)은 중앙 군사 조직인 오위의 정6품 군직인 사과가 되었고, 안정록의 아들이자 안중근의 할아버지인 안인수는 통훈대부와 진해현감을 지냈다. 기록에는 안인수의 아들 안태건(安泰健)은 고종(高宗) 28년(1891) 신묘(辛卯)년에 24세의 나이로 증광시(增廣試) 진사 3등(三等)으로 등과됨을 알리고 있다. 태어날 때 등에 검은 점이 7개가 있어서 북두칠성의 기운으로 태어났다는 뜻으로 어릴 때에는 응칠(應七)이라 불렀는데, 이 이름을 해외에 있을 때 많이 사용했다. 1884년 갑신정변 이후 개화당 정객의 식객으로 있었던 아버지 안태훈이 척신 정권에 의해 죽임을 당할 위기에 놓이자 할아버지 안인수는 영특한 셋째 아들을 살리기 위해 일가를 이끌고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피신했다. 안중근도 가솔을 따라 신천 청계동으로 이주했고, 이곳에서 아버지가 세운 서당에서 훈장을 초빙하여 공부를 했으나 사서오경에는 이르지 못하고 통감 9권까지만 배웠다고 한다. 안중근 자신은 《안응칠역사》에서 "내 나이 예닐곱 때 조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서당에 들어가 8~9년 동안 한문을 익혔으며, 조부께서 돌아가신 뒤에는 사냥으로 학문에 힘쓰지 않았다"고 술회하였다.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겼고, 집 안에 자주 드나드는 포수꾼들의 영향으로 사냥하기를 즐겨 명사수로 정평이 났다. 아버지 안태훈은 산채에 개인적으로 사병들을 양성하고 있었는데,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 각지에서 동학도들과 농민들이 봉기를 하자 안태훈은 자발적으로 창의를 하고 동학 농민군을 토벌하여 승리를 거뒀다. 그 뒤 황해도관찰사의 요청으로 아버지가 산포군(山砲軍)을 조직해 농민군 진압작전을 펼치자 소년 안중근 역시 동학군 토벌에 참가하여, 박석골전투 등에서 기습전을 감행하는 데 참여했다. 김구가 동학군으로 활동하고 있을 때 안태훈이 김구를 보호한 적이 있으며 그 시기에 안중근도 그와 안면이 있었으나 그리 친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안중근의 집안은 천주교 성당 건축에 참여할 정도로 신앙심이 독실하였고, 안중근 자신도 1895년 천주교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배웠다. 1897년 아버지를 따라 천주교에 입교하여 프랑스 출신의 천주교 신부였던 조제프 빌렐렘(Joseph Wilhelem, 한국명 홍석구(洪錫九))으로부터 토마스(도마, 다묵(多默))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안중근이 홍석구 신부에게 프랑스어를 배우기도 했다는 설명도 있지만, 안중근은 홍석구 신부와 함께 뮈텔주교와 만나 이야기를 한 후에 프랑스어 배우기를 그만두었다. 《안중근》(조정래 지음, 문학동네)에 의하면, 뮈텔 주교(한국이름 민주교)가 조선사람들이 학문을 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학문을 하면 머리가 깨일 것이고, 머리가 깨이면 천주교 교리와 신앙에 대해 나름대로의 논리와 비판으로써 의문을 가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를 보면서 실망한 안중근은 프랑스어 배우기를 그만두었다. 그 뒤 잠시 교회의 총대(總代)를 맡았고 뒤에 만인계(萬人契:1,000명 이상의 계원을 모아 돈을 출자한 뒤 추첨이나 입찰로 돈을 융통해 주는 모임)의 채표회사(彩票會社:만인계의 돈을 관리하고 추첨을 하는 회사)를 설립하고 사장이 되었다. 1904년 아버지 안태훈과 청나라 의사 사이에 벌어진 싸움에 휘말렸다가 외교 문제로 비화되기도 했다. 아버지 안태훈은 1904년 4월 20일 안악읍에 사는 청나라 의사 서원훈(舒元勛)과 시비가 있었다. 아버지 안태훈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 친우 이용일(李龍一)을 데리고 서원훈을 찾아갔다. 양측이 필담을 나누는 사이에 안태훈측이 어떤 실수를 했는지 서원훈이 갑자기 일어나 안태훈의 가슴을 발로 걷어찼다. 이에 안태훈은 서원훈에게 화해를 청하고 물러나왔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안중근이 4월 29일 이용등 10여 명과 함께 무기를 들고 야밤에 서원훈을 잡아다가 길가에서 무수히 난타하여 거동이 어렵게 만들었고, 이에 대한 반발로 1904년 5월 2일 청국인 7~8명이 이용일의 집에 난입하여 그를 마구 구타하고 잡아가려고 했다. 한중 양국민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자 삼화항의 청나라 영사가 한국 정부에 공식 문제제기를 했다. 이에 따라 삼화항 재판소 감리가 순검을 보내 안중근과 이용일을 체포하여 압송토록 했다. 그런데 중도에 나타난 괴한들이 순검들을 난타하고 안중근과 이용일을 구하여 사라졌다. 이때 순검 한 명은 안면에 총을 맞아 중태에 빠졌다. 체포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7월 10일 전후에 안중근과 이창순은 각기 외부에 청원서를 올려 자신들의 부친이 억울하게 청국인에게 당했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대한제국 외무부는 다시 자체 조사를 거친 끝에 안중근과 이용일의 죄상이 중하다는 점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지방 정부는 안중근 등의 체포를 명하였고, 7월 22일 황해도관찰사 이용필(李容弼)은 안중근과 이용일이 기미를 알고 미리 도주하여 체포하지 못했다는 보고서를 외무부대신에게 올렸다. 한편 안중근 자서전 안응칠 역사에는 조금 다르게 사건이 소개되어 있다. 안중근이 경성에 가서 외무부에 청원서를 올렸고, 재판이 진남포 재판소에 회부되어서 서씨와 같이 재판을 받게 됐다고 나와있다. 그리고 이 재판에서는 서씨의 만행이 드러나고 안중근이 옳다는 판결이 났다. 이후 안중근은 어떤 청나라 사람의 소개로 서씨와 만나 서로 사과하고 평화를 유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안중근, 만주에서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외교권을 일본에게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국권 회복 운동을 하기 위해 여비를 마련하고 상하이(上海)로 갔으나 기대를 걸었던 상하이의 유력자들과 천주교 신부들로부터 협조를 거절당하여 실망하고 되돌아왔다. 이 무렵 부친상을 당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3년상을 마치기도 전에 1906년 3월에 평안남도 진남포로 이사했다. 이사한 곳에서 생계를 위해 한때 석탄상회를 경영하였으나 사업이 되지 않았으며, 교육을 통한 깨달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석탄회사를 정리하고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설립하여 교육운동을 시작했다. 그 뒤 황해남도의 천주교 계열의 학교인 남포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하였으며 안중근 자신도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1907년에는 대구의 유생 서상일 등의 주도로 전국적으로 전개되던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호응하여 국채보상기성회에 가입하여 회원이 됐고, 열심히 활동하여 인정을 받으면서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국채보상운동 역시 일본의 방해로 실패로 돌아갔다. 1904년 평양에서 석탄 장사를 하다가, 1905년 조선을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만든 을사늑약이 체결되는 것을 보고 이를 저항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어 삼흥학교를 세우고 돈의학교를 인수해 교육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건너가 의병에 가담했다. 안중근 1907년(융희 1년) 황제 고종이 헤이그 특사 사건의 책임을 지고 강제 퇴위를 당한 뒤 한일신협약의 체결, 군대해산에 따라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그는 노선을 바꾸어 독립 전쟁 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키는 데 가담하였다. 매국노 척결을 주장하던 그는 의병대를 찾아다녔다. 그 뒤 황해도 의병대의 한사람으로 일본군과 싸우다가 자신이 직접 국외에서 의병부대를 창설하기 위해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서 계동청년회(啓東靑年會)에 가입하고, 곧 계동청년회의 임시사찰(臨時査察)에 선출되었다. 1907년 연해주(沿海州)로 가서 의병운동에 참가하였다. 이듬해 1908년 7월 전제덕(全齊德)의 휘하에서 대한의군참모중장(大韓義軍參謀中將) 겸 특파독립대장(特派獨立大將) 및 아령지구(俄領地區) 사령관의 자격으로 엄인섭(嚴仁燮)과 함께 1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경흥군 노면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공격하여 전멸시켰다. 그 뒤 본격적인 국내 진공작전을 계획, 감행하여 함경북도 경흥군과 신아산 부근의 야산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전과를 올렸으나, 얼마 후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처참하게 패배했다. 이때 기습공격을 받은 이유는 다른 의병대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안중근 혼자의 뜻으로 전투에서 사로잡은 일본군 포로를 국제공법에 의거해서 석방해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일로 의병의 신임을 잃은 그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새로이 의병을 다시 일으키려고 했으나 많은 사람들의 비판을 받고 부대는 곧 해체되었다. 1909년(융희 3) 초, 안중근은 뜻이 같은 동지 11인과 함께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하고 의병으로 재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안중근은 이때 왼쪽 손의 약손가락(넷째 손가락) 한 마디를 끊어 결의를 다졌다. 안중근의 수인(手印)은 이때부터 찍기 시작한 것이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제국의 재무장관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오게 되었다. 이 소식을 대동공보사에서 전해들은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자원했다. 10월 21일에 대동공보사 기자 이강(李剛)의 지원을 받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안중근은 우덕순과 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哈尔滨, 哈爾濱(하얼빈), Harbin)에 도착했다. 당초 계획은 동청철도(東淸鐵道)의 출발지인 장춘의 남장춘(南長春), 관성자(寬城子)역과 도착지인 하얼빈, 채가구(蔡家溝)역의 4개 지점에서 암살을 시도하려 하였으나 자금과 인력이 부족하여 도착지인 하얼빈과 채가구에서 저격하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이에 따라 우덕순과 조도선은 채가구역으로 이동하였으며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공격하기로 했다. 그러나 채가구역에서의 계획은 이를 수상하게 여긴 러시아 경비병에 의해 실패했다. 10월 26일 오전 9시, 이토 히로부미가 탄 기차가 하얼빈에 도착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재무대신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열차 안에서 회담을 가진 후 9시 30분경 러시아 군대의 사열을 받기 위해 하차하였다. 안중근은 사열을 마치고 열차로 돌아가던 이토 히로부미를 브라우닝제 반자동권총 M1900으로 저격하였다. 이외에도, 일곱 발의 저격 총알 중, 나머지 네 발 중 세 발은 각각 옆에 있던 수행비서관 모리 타이지로우(森泰二郞), 하얼빈 주재 일본 제국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 남만주 철도의 이사 다나카 세이지로우(田中淸次郞)한테서 총격하였다. 저격 후, 안중근은 러시아어로 라고 크게 외쳤다. 이 외침은 대한 만세 라는 뜻이었다. 저격 30분만인 오전 10시경, 이토 히로부미는 피격당한 직후 열차로 옮겨졌다. 죽기 직전에 브랜디(옛날에는 각성제로 종종 사용)를 한 모금 마시고 "범인은 조선인인가?"하고 물었으며, 주변에서 그렇다고 대답하자 "바보 같은..."이라고 뇌까리며 죽었다고 한다. 이는 당시 사건 현장에 있던 주변인물들의 증언에 의한 것이지만 조작이라는 주장이 있다. 총을 세 발이나 맞고 그런 말을 남길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동행한 의사의 증언으로는 분명히 열차 내로 옮길 때까지 살아있었다고 한다. 다만, 다른 책에서는 죽을 당시에 "난 틀렸다... 다른 부상자는?"이란 말을 남기고 죽었다고도 기록되어 있어 전반적으로 정확하지 않은 감이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안중근은 곧바로 러시아 제국 공안들에게 피체되었고 최재형은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장소를 하얼빈으로 정해, 일본이 아닌 러시아 법정에서 재판을 받도록 조치하고, 변호사인 미하일로프 주필을 안중근의 변호인으로 준비했다. 하지만 안중근이 일본 제국 정부에 넘겨져 관동주 뤼순 감옥에 갇혀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고, 같은해 3월 26일 처형되었으며, 유해는 오늘날 현재까지도 찾지 못했다. 같이 거사한 우덕순은 징역 3년, 조도선과 유동하는 각각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한편 법관양성소 출신 변호사 안병찬(安秉瓚)이 안중근을 위해 무료 변론을 했다. 안중근은 체포되어 처형되기까지 재판과정에서 재판소내의 어떤 기세에도 굴하지 않고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를 당당히 밝혔다. 안중근의 체포와 수감 소식이 접해지자 당시 국내외에서는 변호모금운동이 일어났고 안병찬과 러시아인 콘스탄틴 미하일로프, 영국인 더글러스 등이 무료변호를 자원했으나 일제는 일본인 미즈노 기타로(水野吉太郞)와 가마타 세이지(鎌田政治)를 관선 변호사로 선임했다. 수감 중에도 그는 동양 평화론의 저술을 하였으나 끝내 완성시키지 못했다. 2008년 3월 25일 국제한국연구원은 안중근이 사형선고를 받은 2월 14일부터 순국한 3월 26일까지의 행적에 대한 새로운 자료를 공개하였다. 1910년 2월 14일 오전 10시 30분 관동주 뤼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음. 안중근은 당시 천주교 조선대목구(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뮈텔 주교에게 전보를 보내 사제를 보내줄 것을 요청함. 자신의 사형 집행일로 성금요일을 희망한다는 뜻을 전함. 1910년 2월 17일 안중근은 고등법원장을 면담하여 한 국가의 독립을 위한 의병장으로서의 행동을 살인범으로 심리한 것에 이의를 제기함. 1910년 3월 9일 고해성사를 조제프 빌렘 당시 황해도 천주교 신천본당 주임신부에게서 받음. 1910년 3월 10일 빌렘 신부의 집전으로 마지막 미사를 봉헌. 1910년 3월 25일 사형 집행 연기. 세계적으로 성탄절, 정월 초하루, 황제의 탄신일에는 사형이 없다는 관례와 대한제국내의 의병활동이 강하게 전개되고 있어 통감부에서 이를 고려, 사형을 연기 요청. 이날은 대한제국 황제 순종이 태어난 건원절이었음. * 이에 안중근은 면회를 온 두 동생에게 당부를 남김. 당부 내용은 노모의 안부를 묻고, 불효의 죄를 용서를 청하였고, 장남을 천주교 사제로 길러 달라고 부탁. 동생 안정근에게는 한국의 발전을 위해 공업 또는 식림 같은 한국을 위한 일에 종사토록 부탁.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사형 집행. 향년 30세. 참석자 미조부치 검찰관, 구리하라 감옥장. 당시 안중근을 지원한 사람은 거부 최재형이었는데, 최재형은 안중근의 체포에 대비, 변호사와 상의할 정도로 안중근을 현실적으로 도왔다. 한편 안중근은 글씨가 뛰어나, 뤼순 감옥 수감 때 많은 유묵을 남겼고 보물 569호로 지정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옥중에서 미완으로 끝난 저서《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남겼다. 2008년 3월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 성 다롄(大連)시 뤼순(旅順) 감옥 뒤편 야산 일대 등지에서 유해 발굴작업을 벌였지만 실패하였다. 안중근의 마지막 유언은 자신의 시신을 고국에 묻어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형된 그날 밤 한 일본 간수가 그의 시신을 뤼순 감옥 터 뒤에 황급히 매장했다고 한다. 이후 1945년 11월 중화민국에서 돌아온 백범 김구는 순국한 독립운동가의 유골을 찾아 국내에 봉환하기로 한다. 이듬해 6월,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독립운동가 세 명의 유골을 일본에서 찾아온 후 효창공원에 안장하지만 안중근을 위해서는 네 번째 허묘 를 만든다. 이것은 안중근의 시신을 꼭 찾겠다는 김구의 결심을 보여준다. 하지만 김구 역시 1949년 안두희의 암살로 사망하고 2008년 남북 정부는 광복 이후 처음으로 안중근 유해 공동 발굴에 나섰지만 유해는 찾지 못하고 위치 또한 찾지 못했다.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 풍찬노숙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 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여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여한이 없겠노라." 안중근은 자신이 사형 당하면 조국에 운구하여 매장해줄 것을 최후로 당부했다. 그러나 사형당한 그의 시신은 뤼순 감옥의 죄수 묘역에 묻혔다. 일제는 뒤에 안중근의 정확한 매장지를 알려주지 않아 그의 매장지를 찾을 수 없었고, 현재까지도 공식적으로는 유해가 묻힌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2011년 출범한 안중근 유해 발굴 및 국내 봉환을 추진하는 비정부 민간단체 안중근뼈대찾기사업회는 안중근이 순국한 뤼순 감옥에서 동쪽으로 500m 정도 떨어진 뤼순감옥구지묘지를 안중근의 유해 매장지로 추정하며 해당 지역에 대한 발굴을 정부에 의뢰하고 있는 상황이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뒤에 대한민국장으로 개정)이 추서되었다. 한국 한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들에게 사상적으로 영향을 주었고, 이승만과 김구는 광복 이후로 매년 그를 기리고 그의 동상을 찾아가 헌화, 참배하였다. 윤치호를 포함하여 일부는 역시 그의 사상에 대체적으로 공감하기는 하나, 하얼빈에서의 일은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로 한일병합조약을 촉진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회의적인 생각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중국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은 당시 동아시아의 지성인, 정치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량치차오, 장타이옌, 쑨원, 위안스카이 등이 추모와 애도의 글을 발표하였고, 1927년부터 중화민국에서는 장쉐량의 지시로 동북 각지의 36개 모범소학교에서 수업 전에 안중근을 기리는 노래를 합창하게 하였다. 중일 전쟁 발발 이후에는 저우언라이 등 공산당 측 정치인도 무한, 창사 등지에서 화극 《안중근》의 공연에 참여해서 반일 투쟁을 고무 격려하기도 했다. 일본 일본에서는 이토를 사살한 조선인을 적대하는 감정이 가속되었으며, 조선의 강점을 주장하는 논리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이토를 사살한 것이 한일병합조약을 가속화했다는 견해가 있으나, 1909년 4월 이토와 고무라 외무대신은 이미 한일병합조약에 대한 의견의 일치를 보았고, 이토는 도쿄에서 한일병합조약에 대한 의도를 드러낸 연설을 한 바 있어, 일본 정부 내에서 한일병합조약을 반대하는 세력은 없었다. 혁명가 김산은 “춥고 긴긴 겨울밤에 학교 기숙사에서 우리는 수많은 수행원들을 데리고 기차에서 내려온 이토히로부미를 안중근이 하얼빈 역에서 어떤 식으로 저격했는가 하는 이야기와 한국독립을 위해 대담무쌍한 행동을 했던 사람들에 대한 많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라고 님 웨일즈의 《아리랑》은 수록하고 있다. 한국의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안중근을 한국의 모세, 한국의 사도 바오로라고 부른다. 즉, 안중근을 한국 교회에서는 모세의 애국심과 바오로의 신앙심을 가진 기독교인으로 평가한 것이다. 안중근의 일본인 교도관 다카오 미조부치는 그를 동아시아의 의인이라고 평하였다. 고려대학교 사회학과 노길명 교수는 안중근을 독실한 천주교 신앙과 애국심을 조화시킨 인물로 평하였다. 미래사목연구소 황종률 박사는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을 “정의의 하느님”의 뜻에 협력하는 것으로 하느님이 던진 물음에 대한 답이라고 평가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20세기 초 우리나라 반일애국운동가”, “일제의 조선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애국열사”로 평가하며 북조선의 역사서인 “조선전사”에 저격장면, 계기 등을 자세히 소개하였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제15차 남북 장관급 회담(2005년 6월 21~24일, 서울)에서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사업 공동 추진’에 합의했다. 안중근 의사 기념 사업회에서 안중근 의사 국제평화상을 제정하였다. 김삼웅은 안중근의 동양평화 제안을 유럽공동체(EU)와 같은 것으로 평가한다. 당시 안중근의 제안 내용은 한국, 중국, 일본이 동양평화회의를 결성하며, 여순을 중립화하고, 관련 3국으로 운영되는 동양평화회의본부를 여순에 설치한다. 또한 평화지역 창설, 공동개발은행과 공동화폐 발행 등이 포함되어 있다. 안중근은 또한 문명개화를 통해 실력을 닦는 것이 한국 독립의 전제조건이라고 생각한 문명개화론자이면서, 일본의 보호정치가 한국의 문명개화가 아닌 국권침탈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바로 무장투쟁의 선두에 나선 행동가라고 서영희 한국산업기술대 교수는 평했다. 안중근이 자신을 존경했던 일본인 간수 지바에게 남긴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침은 군인이 해야 할 일입니다)이라는 글귀는 현재 대한민국 국군의 표어 중 하나가 되었다. 청산리 전투주역 김좌진은 안중근의 의거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김경천은 자신의 일기인 경천아일록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한 이는 안응칠씨라 한다 아 위대하다. 우리에게도 사람이 있구나!"라고 평가했다. 국제태권도연맹에서는 중근 이라는 틀을 정하여 태권도의 기본 품세를 연습하도록 하고 있다. 《동양 평화론》의 서문에서 안중근은 “만약 정략을 고치지 않고 핍박이 날로 심해지면, 차라리 다른 인종에게 망할지언정 차마 같은 인종 황인종에게 욕을 당할 수는 없다는 의론이 한국·청국 두 나라 사람의 마음속에 용솟음쳐 위ㆍ아래가 한 몸이 되어 스스로 여러 사람 앞에 나설 수밖에 없음이 불을 보듯 뻔한 형세이다. 그렇게 되면...(若政略不改 逼迫日甚則 不得已寧亡於異族 不忍受辱於同種 議論湧出於韓淸兩國人之肺腑 上下一體 自爲白人之前驅 明若觀火之勢矣. 然則...)”라고 서술하였다. 서문의 설명처럼 안중근은 옥중에서 집필한 《동양 평화론》에서 하얼빈 의거를 동양 평화를 위한 전쟁이라고 말하고 동양평화론이란 한·중·일 3국이 각각 독립을 유지하면서 서로 상호 부조하여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서구 열강의 식민주의에 대응하는 체계를 만들 수 있다는 방법론까지 제시하고 있었다. 내용을 보면 이토 히로부미가 바라는‘동양평화(東洋平和)’는 이웃나라를 침략해 일본에 종속시키는 것이었고 반대로 ‘일본식 동양평화’를 주창하는 이토에게는 안중근은 ‘동양평화의 교란자’였다. 이러한 이토를 제거하기 위하여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을 일으켰고 이후 5개월간의 수감생활과 공판과정에서 안중근은 이토의 사살이 동양평화를 지키려는 정의의 응징이었음을 줄기차게 강조했다. 미완성의 옥중 저서가 된 《동양 평화론》은 ‘하얼빈 의거’를 ‘동양평화의전(東洋平和義戰)’으로 기술하고 있다. 사형장에서의 최후 발언도 “나의 이 거사는 동양평화를 위하여 결행한 것이므로 임석 제원들도 앞으로 한·일 화합에 힘써 동양평화에 이바지하기 바란다”였다. 안중근이 지향하는 평화는 한·중·일 3국이 각각 독립을 유지하면서 서로 상부상조하는 길을 찾았고, 이를 통해 서양세력이 동양을 점령하고자 하는 서구 제국주의를 막을 때 동양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고 더 나아가 일본이 침략적 속성을 합리화하기 위해 만든 대동아공영권 논리의 함정과 모순을 이미 꿰뚫어보았기에 이에 대한 대안을 구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중근이 혈서로 대한독립(大韓獨立)이라고 쓴 태극기 "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 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속에 가시가 돋는다. 안중근은 옥중에서 《동양 평화론(東洋平和論)》을 집필하였다. 이 책에는 일본이 3국 간섭으로 인해 뤼순을 청나라에 돌려준 뒤 한·중·일 3국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군항으로 만들어 세 나라에서 대표를 파견하고 평화회의를 조직하고 3국 청년으로 구성된 군단을 편성하고, 이들에게 2개국 이상의 언어를 배우게 하며, 은행을 설립하고 공용 화폐를 만들자는 주장이 들어 있다. 또한 《안응칠 역사(安應七歷史)》라는 제목으로 자서전을 집필하였다. 이 자서전의 원본은 현재 전하지 않으며 일본어 번역본과 한문 등사본이 전해진다. 이 자서전을 저본으로 하여 1970년에 출판된 《안중근 자서전》이 있다. 안중근은 의거를 거행하기 전 〈장부가(丈夫歌)〉를 지어 우덕순에게 주었으며, 우덕순도 〈거의가(擧義歌)〉로 답하였다. 〈장부가〉는 안중근의 친필로 된 한시와 한글시가 함께 전해진다. 안중근은 〈장부가(丈夫歌)〉에서 대한제국을 침탈하고 국가를 멸망에 이르게 한 일본인 출신 이등박문을 쥐새끼 라고 지칭하며 강력한 적대감을 드러내었다 :丈夫處世兮,其志大矣。 장부가 세상에 쳐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 :時造英雄兮,英雄造時。 때가 영웅을 지음이여 영웅이 때를 지으리로 :雄視天下兮,何日成業。 천하를 웅시함이여 어니 날에 업을 일울고 :東風漸寒兮,壯士義烈。 동풍이 졈드 차미여 쟝사에 의긔가 뜨겁도다 :憤慨一去兮,必成目的。 분개히 한 번 가미여 반다시 목젹을 이루리로다 :鼠竊伊藤兮,豈肯比命。 쥐도젹 이등이여 엇지 즐겨 목숨을 비길고 :豈度至此兮,事勢固然。 엇지 이에 이랄 쥴을 시아려스리요 사셰가 고여하도다 :同胞同胞兮,速成大業。 동포 동포여 속히 대업을 이룰지어다 :萬歲萬歲兮,大韓獨立。 만셰 만셰여 대한 독립이로다 :萬歲萬歲兮,大韓同胞。 만셰 만셰여 대한 동포로다 안중근은 옥중에서 많은 글씨를 남겼다. 이것들 중 몇몇이 보물 제569호 안중근의사유묵(安重根義士遺墨)으로 지정됐다. 이 가운데 유명한 것으로는 보물 제569-2호인 "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 (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속에 가시가 돋는다) 등이 있다.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부 광석동에서 부 안태훈 모 조마리아 사이에서 출생. 1894년 16세에 김아려와 혼인. 김구와의 첫 만남. 1896년 부친 안태훈이 천주교에 입교. 1897년 19세에 천주교에 입교. 1898년~ 1904년 천주교 전교 사업. 천주교대학 설립을 추진하였으나 불발. 1905년 부친 안태훈 사망 1906년 삼흥학교, 돈의학교 를 운영하였으며 서북학회에 가입. 1907년 석탄회사 삼합을 설립하였으나, 같은해 8월 1일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자 만주로 망명했다. 1908년 1908년 7월 전제덕(全齊德)의 휘하에서 대한의군참모중장(大韓義軍參謀中將) 겸 특파독립대장(特派獨立大將) 및 아령지구(俄領地區) 사령관의 자격으로 엄인섭(嚴仁燮)과 함께 1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침투 1909년 10월 26일 거사 1910년 2월 14일 일본제국 재판부는 안중근에게 사형을 선고. (당시 재판관할권은 일본에 없었음.)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15분 순국. Ahn Chun-saeng.jpg|섬네일|150px|오른쪽|조카 안춘생 할아버지 안인수(安仁壽), 진해 현감 역임 * 아버지 안태훈(安泰勳), 성균진사 * 어머니 조마리아(趙性女 마리아) (1862~1927) 독립운동가, 2008년 8월 조마리아 여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 ** 여동생 안성녀 누시아(1881~1954), 독립운동가, 부산 천주교 묘지에 안장. ** 남동생 안정근(安定根), 독립운동가, 1949년 상하이에서 사망. *** 조카 안진생, 미얀마 대사 역임 ** 남동생 안공근(安恭根), 독립운동가, 1939년 사망 추정. *** 조카 안우생(安偶生), 묘는 북조선의 애국열사릉에 있다. ** 부인 김아려(金亞麗) *** 장남 안문생(安文生, 일명 안분도), 연해주로 피신하였다가 7살 때 누군가가 준 과자를 먹고 독살당함. *** 차남 안준생(安俊生, 1907년 ~ 1951년 11월), 폐결핵으로 사망. 혜화동 천주교 공원묘지에 안장. *** 자부 정옥녀 **** 손자 안웅호(雄浩), 의학박사, 안중근의 유일한 손자다. ***** 증손자 토니안(안도영) **** 손녀 안연호(1938년 ~ 2011년 2월6일) **** 손녀 안선호( ~ 2003년) *** 장녀 안현생(1902 - 1959), 1953년 4월 ~ 1956년 3월 효성여자대학교 (현 대구가톨릭대학교) 불문학 교수로 재직함. 그녀의 남편은 한교민단(韓僑民團) 단장으로서 활동했었다고 한다. 안중근 순국 100주기가 되는 2010년 3월 26일, 그녀가 쓴 수기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 사위 황일청 **** 외손녀 황은주, 황은실 ** 4촌 안명근(安明根1879년 ~ 1927년) 독립운동가 ** 4촌 안홍근,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 ** 4촌 안봉근(安奉根) *** 종질 안춘생(安椿生, 1912년 8월 12일 ~ 2011년 1월 26일), 독립운동가, 한국 광복군, 대한민국 육군 중장, 초대 육사 교장, 국회의원 역임 백범 김구가 동학 농민 운동에 참여했다가 실패한 후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이 청학동으로 이사하여 살게 되었을 때 처음 대면하였으며, 김구는 그가 총으로 사냥을 잘하며 남자다웠다고 평하였다. 또한 이토 히로부미 암살 이후 그의 부인 등의 유족을 우덕순, 김구 등이 돌보았으며 안중근의 동생인 안공근은 상하이에서 김구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안정근은 김구와 직접 연결되지 않고 안창호를 따랐지만, 안공근은 김구의 부하가 되어 한인애국단과 한국독립당특무대를 조직하는데 동참한다. 1958년 -“애국열사 안중근”은 북한에서 창작, 공연되었다. 1963년 - 안중근의사숭모회가 설립되어 초대 이사장으로 윤치영이 취임하였다. 1974년 - 안중근 기념 동상이 작가 김경승에 의해 제작되어 남산 구 조선신궁 자리에 설치되었다. 1979년 -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가 북조선에서 개봉되었다. 감독은 엄길선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총장이다. 1979년 - 명동성당에서 안중근 의사 탄신 100주년기념 대미사가 집전되었다. 1986년 - 김일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은 중화인민공화국 뤼순 감옥을 방문하여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을 요청하였다. 1987년 - 소설가 복거일이 하얼빈 의거의 실패와 그로 인한 일제 강점기의 연장을 가정한 대체역사소설 《비명을 찾아서》를 출간했다. 1990년 -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안중근 (도마) 의사 추모 자료집-서거 80주년을 맞이하여》를 발간하였다. 1999년 - 서울시 도시공원위원회에서 안중근 의사 기념공원 조성 제안을 부결하였다. 2000년 - 안중근 의사 유골 발굴위원회가 발족되었다. 2000년 - 하얼빈 역에서 남한과 북조선의 공동 기념식이 열렸다. 2001년 - 오페라 “아시아의 횃불 안중근”이 독일에서 초연되었다. 2002년 - 오페라 “안중근 손가락”이 한국에서 공연되었다. * 2월 1일 - 영화 “2009 로스트 메모리즈”가 개봉하였다. 2002년 - 안중근 의사 국제 평화상이 제정되었다. 2003년 - 안중근 의사 숭모회 이사진의 퇴진과 개혁을 촉구하는 100인 선언이 발표되었다. 2004년 - 안중근의 삶을 그린 《도마 안중근》이 한국에서 개봉되었다. 연출가는 서세원이다. 2006년 - 가짜 안중근 휘호가 8천만 원에 낙찰되기도 했다. * 독립운동가로서는 최초로 2008년 건조된 한국 해군의 1800톤급인 손원일급 잠수함 대형 3번함의 이름이 안중근함으로 명명되었다. 안중근 잠수함은 2008년 6월 울산 현대중공업에서 진수되었다. 안중근함 진수식에는 김태영 대한민국 합참의장과 정옥근 해군참모총장 등 군관계자와 현대중공업 임직원, 안중근 의사 숭모회 관계자 등 관계자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 2009년 -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을 기념하여 6월부터 국내 공연을 시작으로 11월까지 하얼빈, 일본 등지에서 최수종이 안중근 역을 맡은 연극 대한국인 안중근 의 막이 올랐다. * 9월 4일 중화인민공화국 하얼빈 시에 세워졌다가 대한민국에 반입된 안중근 의사의 동상이 대한민국 국회에 임시 전시됐다. * 10월 9일~10월 10일 중화인민공화국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의 1909년 10월의 의거 100주년을 기념하여 최초로 국제 장기 기전인 제1회 세계인 장기 대회가 개최 되었다. * 10월 26일 - 안중근의 이야기를 담은 창작 뮤지컬 영웅 이 초연되었다. (제작사 에이콤 / 연출 윤호진 / 공연장 LG아트센터) 2010년 -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안중근 의사 추모행사를 공식적으로 승인하였다. * 3월 26일 - 이명박 대통령은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모셔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발표했다. * 3월 26일 - 서울 서울광장에서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 추념식이 정부 주관으로 열렸다. * 7월 27일 배우 송일국이 1인 2역을 맡은 안중근의 삶과 처음으로 그의 아들 안준생에 대한 이야기를 그린 나는 너다 (2010년 7월 27일 ~ 2010년 8월 22일)가 국립극장에서 초연되었다. * 9월 30일 - 국방부와 조선일보가 안 의사 순국 100주년과 조선일보 창간 90주년을 맞아 공동으로 제정한 위국헌신상이 11명에게 처음 수여되었다. * 9월 30일 - 러시아 정부가 안중근과 관련된 외교 문서를 대한민국 정부에 처음 전달하였다. * 11월 19일 - 안중근의사 순국 100주년기념, 대한독립 운동가 42인 초상화 특별전 《대한독립전》이 남산의 안중근의사 기념관에서 개최되었다. (서양화가 조영규) * 12월 1일 - 안중근의사 순국 100주년기념, 대한독립 운동가 42인 초상화 특별전 《대한독립전》이 안양시 소재의 평촌아트홀에서 개최되었다. (서양화가 조영규) * 12월 4일 안중근의 이야기를 담은 창작 뮤지컬 영웅 이 1년 만에 다시 막이 오를 예정이다. (제작사 에이콤 / 연출 윤호진 / 공연장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 안중근 사형 이후의 축하연 기록을 찾아냈다. 2011년 -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 및 국내 봉환을 추진하는 비정부 민간단체 안중근뼈대찾기사업회가 공식 출범하였다. * 천주교 서울대교구 시복시성준비위원회(위원장 염수정 주교)가 안중근을 ‘근현대 신앙의 증인에 대한 시복조사’ 대상으로 거론하면서 안중근에 대한 시복 조사를 실시하였다. 단지동맹 동의회 최재형 독립유공자로 대한민국장을 수여받은 사람 윤봉길 이토 히로부미 저격 안중근, 《안중근 의사 자서전》, 범우사, 2000 박환, 《만주 지역 한인 유적 답사기》, 국학자료원, 2009 박환, 《러시아 한인 유적 답사기》, 국학자료원, 2008 윤명숙, 《대한영웅전 1》 (국가보훈처, 1995) 장석흥, 《안중근의 생애와 구국운동》,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 1992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한국민족운동사학회, 《안중근과 한인민족운동》 (국학자료원, 2002) 안중근뼈대찾기사업회 안중근의사 기념관 홈페이지 안중근의사 숭모회 홈페이지 안중근의사 기념사업회 홈페이지 안중근평화재단 청년아카데미 대한국인 안중근 시사IN 안중근 이용하려는 자 있다 김삼웅의 안중근 평전 네이버 캐스트 오늘의 인물 - 안중근 안중근 - 가톨릭대사전 안중근 - 네이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안중근 거짓 동양평화론을 심판하다 - 역덕이슈 오늘 분류:1879년 태어남 분류:1910년 죽음 분류:한국의 교수형된 사람 분류:국민주의 암살자 분류:범아시아주의자 분류:한국의 사상가 분류:한국의 암살자 분류:조선의 서예가 분류:대한제국의 저술가 분류: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자 분류:대한제국의 시인 분류:대한제국의 작가 분류:동학농민운동 관련자 분류:일본-한국 관계 분류:반일 감정 분류:대한제국의 장군 분류:육군 장군 분류:한국의 로마 가톨릭교도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 분류:한말 의병장 분류:대한민국의 민족주의 분류:순흥 안씨 분류:황해도 출신 분류:이토 히로부미
유덕화 (, , , , 1961년 9월 27일 ~ )는 홍콩의 영화배우, 영화제작자, 영화연출가, 가수이다. 별명은 유복영(劉福榮,)이며 , 필명은 자혜(紫慧), 불교식 법명은 혜과(慧果)이다. 애칭은 華仔, 華哥, 劉天王, 華Dee, 劉華, 華神, 民間特首이 있다. 그의 조상이 거주했던 원적지는 중화인민공화국 광둥 성 장먼 시 신후이 구이다. 그의 신장은 174cm이고, 혈액형은 AB형이다. 중국어 제목 한국 개봉 제목 개봉년도 最佳損友闖情關 최가손우틈정관 1989 飇城 혈전영웅(표성) 1989 精裝追女仔之3 狼之一族 정장추녀자 3 - 낭지일족 1989 最佳男朋友 가인유약 1989 省港旗兵第三集 홍콩탈출 1989 同根生 영웅대가 1989 小警察 소경찰 1989 人海孤鴻 도시의 아이들 1989 神行太保 도시의 심판관 1989 法內情 2 지존애림 2 1989 富貴兵團 부귀병단 1989 第一葡 복수의 만가 1989 轟天龍虎鬪 굉천용호투 1989 賭博 도신 - 정전자 1989 至尊無上 지존무상 1989 傲氣雄鷹 영웅출격 1989 最佳損友2 최가손우 2 1988 法內情 법중정 1988 精裝追女仔續集 정장추녀자 2 - 폭소 구애작전 1988 中國最後一個太監 최후태감 1988 最佳損友 최가손우 1988 君龍奪寶 군용탈보 1988 刀.劍.笑 도검소 1988 獵鷹計劃 엽응계획 1988 龍之家族 용의 가족 1988 旺角卡門 열혈남아 1988 神探夫子精 부자탐정 1987 魔翡翠 마비취 1987 龍虎相助 용호상조 1987 英雄好漢 강호정 2 - 영웅호한 1987 江湖精 강호정 1987 最佳福星 최가복성 1986 夏日福星 칠복성 1986 法外精 법외정(지존애림) 1985 上海灘十三太保 상해탄십삼태보 1984 家在香港 가재홍콩 1983 毁滅號地車 훼멸호지차 1983 彩雲曲 채운곡 1982 投奔怒海 망향 1982 연도 작품명 역할 비고 1990년 재전강호(再戰江湖) 1990년 의혈쌍웅 (專釣大鰐) 1990년 무림지존 (摩登如來神掌) 무덕휘(武德輝) 1990년 천장지구 (天若有情) 와디(華Dee) 광동어 녹음 판본에서는 와디로 발음되며, 자막에 따라 아화로 나오는 곳도 있다.) 1990년 아비정전(阿飛正傳) 초자(超仔) 극중 직업은 경관. 1990년 경천 12시 (驚天12小時) 大B 1990년 지존본색 (義胆雄心) 1990년 옥중룡 (獄中龍) 1990년 애인동지 (愛人同志) 1990년 천도방자 (川島芳子) 1990년 이역 (異域) 1990년 화소도 (火燒島) 1990년 도협 (睹俠) 진도자(陳刀仔) 1991년 정고전가 (整蠱專家) 차문걸(車文傑) 1991년 중환영웅 (中環英雄) 화영웅(華英雄) 1991년 오호장 (五虎裝之決裂) 유지명(劉志明) 1980년대 무선오호장 유덕화, 양조위, 황일화, 모교위, 탕진업 출연 1991년 여락 (五億探長 雷洛傳) 뇌락(雷洛) 1991년 여락 2 - 뇌락정구 (五億探長雷洛傳 II 雷老虎) 뇌락(雷洛) 1991년 신조협려 (九一神雕俠侶) 1991년 여룡공무 (與龍共舞) 1991년 지존무상 2 - 영패천하 (至尊無上II之永覇天下) 계익(雞翼) 1991년 화룡만가 (極道追踪) 1991년 호문야연 (毫門夜宴) 유덕화 카메오 출연, 유덕화 본인으로 출연하였다. 1991년 사해교룡 (衝擊天子門生) 1992년 용등사해 (龍騰四海) 1992년 신조협려 2 (九二神雕俠侶) 1992년 도성대형 - 신가전기 (睹城大亨 之 新哥傳奇) 1992년 절대쌍교 (絶代雙驕) 1992년 묘가십이소 (廟街十二少) 1992년 도성대형 2 - 지존무적 (睹城大亨II 之 至尊無敵) 1992년 협성 (俠聖) 1992년 화영웅 (嬅!英雄) 1992년 군성회 (君星會) 1992년 여락 3 - 완결편 (Lee Rock III, 五億探長雷洛傳之 III 大結局) 1992년 진가성룡 (机Boy小子之 眞暇成龍) 1992년 쌍웅출사표 (反斗马骝) 1993년 전신 (戰神) 1993년 천장지구 2 - 속 천장지구 (天長地久) 1993년 협성 2 (至尊三十六計之偷天換日) 1993년 스트리트 파이터 (초급학교패왕, 初級學校覇王) 철면(a.k.a 발로그) 1994년 취권 2 (醉拳 II) 1994년 천여지 (天與地) 1994년 취권 3 (醉拳 III) 1994년 흑야법관 (殺手的童話) 1995년 유덕화의 도망자 (大冒險家) 1995년 열화전차 (烈火戰車) 1996년 신 상해탄 (新上海灘) 1996년 천장지구 3 - 천장지구 완결 (1/2次同床) 1996년 특종 25시 (奇異旅程之?心愛生命) 1996년 천장지구 3 - 풍화가인 (天若有情III 烽火佳人) 영화 홍보차 대한민국을 방문해 슈퍼 선데이에 출연하였다. 1997년 아마게돈(천지웅심) (天地雄心) 1997년 흑금 (黑金) 1998년 99 도협 (賭俠 1999) 1998년 테러리스트(용재강호) (龍在江湖) 1999년 암전 (暗戰) 화(華) 1999년 용재변연 (龍在邊緣) 1999년 사랑의 유람선 (愛情夢幻號) 1999년 도협 대전 (賭俠大戰 拉斯維加斯) 1999년 흑마 왕자 (黑馬王子) 1999년 흑금 제국 (黑金帝國) 연도 작품명 역할 비고 2000년 결전 (決戰紫禁之巔) 2000년 니딩유 (孤男寡女) 2000년 파이터 블루 (阿虎) 2001년 풀 타임 킬러 (全職殺手) 2001년 러브 온 다이어트 (瘦身男女) 2001년 댄스 오브 드림 (愛君如夢) 2002년 역고력고 신년재 (嚦咕嚦咕新年財) 2002년 남혈인 (衛斯理之藍血人) 2002년 금계 (金雞) 2002년 무간도 (無間道) 유건명(劉健明) 2003년 천방지축 (老鼠愛上貓) 2003년 금계 2 (金雞2) 2003년 무간도 III 종극무간 (無間道Ⅲ:終極無間) 유건명(劉健明) 2003년 절대초인(무적의 소림쿵푸 마스터) (大隻佬) 2003년 1:99 전영행동 (1:99 電影行動) 2004년 연인 (十面埋伏) 2004년 강호 (江湖) 2004년 천하무적 (天下無賊) 2004년 마환주방 (魔幻廚房) 2004년 용봉투 (龍鳳鬥) 2005년 동몽기연 (童夢奇緣) 2005년 다시 한번 사랑한다 말해줘 (再說一次我愛你) 2006년 묵공 (墨攻) 2007년 무간도 IV 문도(門徒) 2007년 형제 (兄弟) 양조위를 제외한 무선 오호장 4명이 출연한 영화 2007년 명장 (投名狀) 조이호 2008년 삼국지 용의 부활 (三國.見龍卸甲) 조운 2009년 라스트 프로포즈br (游龍戲鳳) 2009년 건국대업 (建國大業) 연도 작품명 역할 비고 2010년 미래경찰X (未來警察) 주지호(周志豪) 2010년 적인걸 측천무후의 비밀 (狄仁杰之通天帝國) 적인걸 2011년 샤오린 최후의 결전 (新少林寺) 후걸(侯傑;호우지에) 2011년 아지여인심 (我知女人心) 손자강(孫子剛) 2011년 건당위업 (建黨偉業) 차이어(蔡锷) 2012년 심플 라이프 (桃姐) 로저(Roger, 본명 梁羅傑) 2011년 9월 5일에 베니스 영화제에서 상영, 국가별 정식 상영은 2012년 시작. 2012년 제13회 전주국제영화제의 폐막작이며, 한국 개봉은 2012년 2012년 콜드 워 (寒戰) 육명화(陸明華) 카메오 출연 2013년 스위치 부춘산거도 (天机·富春山居图) 초금한(肖錦漢) 2013년 블라인드 디텍티브 (盲探) 존스턴(莊士敦) 2013년 파이어 스톰 (風暴) 여명철(呂明哲) 2014년 금계SSS (金鷄SSS) 유덕화 우정출연 2015년 도성풍운 2 (賭城風雲II) 진도자(陳刀仔) 도신, 도협에서의 배역과 이름이 같다. 우정 출연 2015년 실고 (失孤) 뇌택관(雷澤寬)) 2015년 나의 소녀시대 (我的少女时代) 유덕화 본인 역으로 카메오 출연. 한국에서는 2016년에 개봉하였다. 2015년 세이빙 미스터 우 (解救吾先生) 오선생(吾先生) 2016년 홍금보의 보디가드 (我的特工爷爷) 이민구(李政久) 특별출연, 이춘화(李春花, 극의 여주인공)의 아버지 역 2016년 도성풍운 3 (賭城風雲Ⅲ) 진도자(陳刀仔) 2016년 왕패두왕패 (王牌逗王牌) 보야(寶爺) 홍콩 개봉명 偷天特务 2016년 그레이트 월 (長城) 왕군사(王軍師) 한국 개봉은 2017년 2017년 쇼크웨이브(拆彈專家) 장재산(章在山) 제작, 투자에도 참여 2017년 추룡 (追龍) 뢰락 특별 출연, 영화 파호(跛豪, 1991)의 리메이크 작 2017년 협도연맹 도둑들의 전쟁 (侠盗联盟) 장단(張丹) 2017년 열혈합창단 (热血合唱团) 광동어 只知道此刻愛你 (1985) 情感的禁區 (1987) 回到你身邊 (1988) 劉德華 、共你傷心過(1989) 可不可以、再會了(1990) 愛不完、一起走過的日子、不可不信缘(1991) 愛的空間 、真我的風采 (1992) 答案就是你、爱意 (1993) 五時三十分 (1994) 情未鸟 (1995) 在乎您 (1996) 真生命 (1997) 你是我的女人 (1998) 愛無知 (1999) 心藍 (2000) 如果有一天 (2003) Coffee or Tea (2004) 聲音 (2006) 希望·愛 (2009) 보통화 回到你身邊&法內情、愛的連線(1989) 如果妳是我的傳說 (1990) 我和我追逐的夢、來生緣(1991) 謝謝你的愛(1992) 真情難收、一生一次(1993)真情難收앨범 홍보차 대한민국을 방문해 방송에 출연하기도 하였다 忘情水 、 天意 (1994) 真永遠 (1995) 因為愛 、 相思成灾 (1996) 愛如此神奇 、 愛在刻骨銘心時 (1997) 人間愛 (1999) 男人的愛(2000) 天開了 (2001) 美麗的一天 (2002) 再說一次我愛你(2005) 一隻牛的異想世界 (2007) 보통화+광동어 Memories (1995) 笨小孩精选 (1998) 回家真好 新曲 + 精选(1999) Just For You(2000) 夏日Fiesta (2001) 繼續談情 (2005) Everyone is No. 1 (專輯)|Everyone is No. 1 (2007) 長途伴侶 (2009) 忘不了的(2010) 연도 시상식명 수상부문 작품명 비고 1998년 제17회 홍콩 영화 금상장 올해의 영화상 메이드 인 홍콩 (香港製造) 제작자, 프로듀서로서 참여 2000년 연예동력대상(홍콩) 올해의 남자 영화배우 니딩 유 (孤男寡女) 2000년 제19회 홍콩 영화 금상장 남우주연상 암전 (暗戰) 2001년 연예동력대상(홍콩) 올해의 남자 영화배우 러브 온 다이어트 (瘦身男女) 2001년 제6회 홍콩영화금자형장 남우주연상 파이터 블루 (阿虎) 2003년 연예동력대상(홍콩) 올해의 남자 영화배우 절대초인 (大隻佬) 2004년 제23회 홍콩 영화 금상장 남우주연상 절대초인 (大隻佬) 2004년 홍콩영화평론학회대상 남우주연상 절대초인 (大隻佬) 2004년 중국 영화 미디어 시상식 (华语电影传媒大奖) 남우주연상 절대초인 (大隻佬) 2004년 제41회 금마장 남우주연상 무간도 III 종극무간 2006년 제11회 부산국제영화제 올해의 아시아 영화인상 2006년 제11회 홍콩영화금자형장 가장 인기있는 남우주연상 (最受歡迎男主角獎) 동몽기연 (童夢奇緣) 남우주연상으로 번역되는 最佳男主角과는 다른 상이며, 2006년과 2007년에만 존재했던 상이다. 2007년 제1회 아시안필름어워즈 아시아흥행스타상 2007년 제12회 홍콩영화금자형장 가장 인기있는 남우주연상 묵공 (墨攻) 2008년 제27회 홍콩 영화 금상장 남우조연상 무간도 IV 문도 2011년 제30회 홍콩 영화 금상장 올해의 영화상 권법 쿵푸의 신(打擂台) 프로듀서 참여 2011년 제48회 금마장 남우주연상 심플 라이프 2012년 제31회 홍콩 영화 금상장 남우주연상 심플 라이프 2012년 제31회 홍콩 영화 금상장 올해의 영화 심플 라이프 제작 참여 2013년 제46회 시체스국제영화제 오피셜 판타스틱 남우주연상 블라인드 디텍티브 2015년 제2회 실크로드 국제영화제 올해의 남배우상 세이빙 미스터 우 (解救吾先生) 2016년 중국영화화표장(中国电影华表奖) 우수 남배우상(优秀男演员) 실고 (失孤) 주윤발 양조위 장학우 리밍 곽부성 유덕화 공식 사이트 유덕화 한국 팬 카페 Andy음악사랑 분류:1961년 태어남 분류:살아있는 사람 분류:홍콩의 남자 영화 배우 분류:홍콩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 분류:홍콩의 남자 가수 분류:1981년 데뷔 분류:중국의 반공주의자 분류:홍콩 출신 분류:홍콩의 불교 신자 분류:홍콩의 작사가 분류:홍콩의 기업인 분류:홍콩의 억만장자
물리학자 (物理學者)는 물리학을 연구하는 과학자이다. 직업으로서는 연구소의 연구원, 대학의 교수 등이 전형적이며, 분야에 따라 응용분과의 경우 다양한 기업체와 개발직등의 직종에 포진되어 있다. 특이한 경우로, 금융권을 비록한 증권 분석가, 컨설턴트 등의 분야에 진출하는 경우도 있다. 물리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보통 대학교에서 물리학을 전공하여야 하나, 현대 물리학의 전문성 때문에 대개는 대학원 이상의 공부가 필요하다. 분야에 따라 수학에 관해서도 전문성이 어느정도 있어야 한다. 연구소의 연구원은 크게 분야가 실험물리학과 이론물리학으로 나뉘게 되며 대학 산하 연구소, 기업체 연구소 등 다양한 연구직종에서 일하게 된다. 대표적인 물리학자는 영국의 아이작 뉴턴,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이탈리아의 갈릴레오 갈릴레이, 독일의 가우스, 아인슈타인, 스티븐 호킹, 에드워드 위튼 등이있다. 전자총 브라운관 TV의 기본 장치 핵자기 공명장치(MRI) 트랜지스터, 반도체 레이저 - 찌어르 메이맨 월드 와이드 웹 - 팀 버너스 리 입자가속기(LHC 등) *물리학과-입자물리학, 원자물리학, 천체물리학, 광물리학, 고체물리학, 생체물리학, 핵물리학 물리학 노벨 물리학상 물리 연구소 분류:과학 관련 직업
오에 겐자부로 (, 1935년 1월 31일 ~ )는 일본의 작가로,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의 일본 전후세대를 대표한다. 시코쿠 에히메현의 한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18세의 나이 때에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도쿄로 갔다. 학생 시절이었던 1957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으며, 동시대 프랑스와 미국 문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도쿄 대학 불문과 재학 당시 사르트르 소설에 심취했으며 이란 작품으로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했다. 초기에는 전후파 작가답게 전쟁 체험과 그 후유증을 소재로 인간의 내면세계를 응시하는 사회비판적인 작품을 많이 썼다. 그러나 결혼 후 장애가 있는 아들이 태어나,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인 편견 속에서 어렵게 키운 경험을 소재로 개인적인 체험을 써서 전후세대의 인권 문제를 파헤쳤다는 찬사를 들었다. 이 외에도 핵 시대의 지구와 우주와의 관계를 그린 미래소설도 썼다. 그는 1994년 12월 8일 가와바타 야스나리(1968년 수상) 이후 26년 만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수상기념 연설문, 《애매한 일본의 나》를 통해 그는 스웨덴의 아동문학작품 《닐스의 모험》을 읽으며 꿈꿨던 어린 시절 1968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일본적인 신비주의에 대한 회의, 전자공학이나 자동차 생산 기술로 유명한 조국 일본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 한국의 김지하나 중국 작가들에 대한 정치적 탄압, 와타나베 가즈오에게서 배운 휴머니즘 정신을 말하였다. 이 연설문은 노벨상 위원회가 책으로 출판하였다. 가족으로는 아들이자 장애인 음악가인 오에 히카리와 부인이 있다. 오에 겐자부로가 아들 히카리를 작곡가로 키운 이야기는 문화방송의 예능 프로그램인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재연극으로 소개된 바 있다. 그는 에히메현 우치코의 오세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7형제의 3남으로 태어났으며 할머니에게 예술을 배웠다. 그의 할머니는 1944년에 사망하였고, 그의 아버지도 그 다음해 태평양 전쟁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 대신 오에를 가르치면서 허클베리 핀의 모험, 닐스의 모험 같은 책을 사주었는데, 그는 그 책들을 무덤까지 가져가겠다고 말하였다. 고향에 있는 학교를 다니다가, 그는 마츠야마에 있는 고등학교로 전학을 하였다. 18세가 되는 해에 처음 동경에 다녀와서 그 이듬해 동경대학교에서 불문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의 스승은 가주오 와타나베로 프랑수아 라블레에 대한 전문가였다. 그는 1957년 학생의 신분으로 있을때부터 글쓰기를 시작하였는데, 그의 글은 프랑스와 미국의 현대작품에 영향을 많이 받은 작품이었다. 데뷔한 다음 해인 1958년, 자신의 첫 장편소설 를 발표했다. 같은 해에 으로 제 39회 아쿠타가와상을 23세의 나이에 수상하였다. 1956년에 수상한 이시하라 신타로에 이어 당시 최연소 타이 수상자가 되었다. 전형 위원이었던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와 오에 겐자부로는 시대도, 재능도, 작풍도 다르지만, 스물 서 너 살짜리 학생이 기묘한 소재를 가지고 소설을 썼다는 점이 아쿠타가와와 닮은 꼴로 보여 그에게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이름이 걸린 상을 주고 싶었다”라고 했다. 한편, 후나하시 세이치는 이전 회 아쿠타가와상 전형에 이의를 제기하였는데, 보다는 야말로 상을 받았어야 했다며 비판한 바 있다. 또한, 같은 해인 1958년에 이시하라 신타로, 에토 준, 다니카와 슌타로, 데라야마 슈지, 아사리 게이타, 에이 로쿠스케, 마유즈미 도시로, 후쿠다 요시유키 등 젊은 문화인들과 ‘젊은 일본 모임(若い日本の会)’을 결성하여 60년 안보(안보투쟁)에 반대하였다. 1959년에는 도쿄대를 졸업하였다. 졸업논문의 제목은 . 같은 해에 새로운 장편 《우리들의 시대(われらの時代)》를 발표하였다. 이 작품에서는 청년으로서 느끼는 우울함과 허무감, 괴상하고 폐쇄적인 섹슈얼리티를 주제로 전면에 내세워 통렬한 비난을 받았으나, 이 작품으로 인해 처음으로 작품 분위기가 전환되었다. 그리고 그 해 작곡가인 다케미쓰 토오루를 알게 되었다. 그 다음 해인 1960년, 이타미 유카리(이타미 주죠의 누이동생)와 결혼했다. 1961년, 의 주제를 집대성한 작품인 을 《문학계(文學界)》 1월호에, 를 익월호에 발표하였다. 아사누마 이네지로 암살 사건에서 촉발되어 범인인 야마구치 오토야를 모델로 ‘성을 탐닉하고, 정치에 도취한 우익소년’ (문고본 뒷면 소개글에서)을 그렸으나, 풍류몽담 사건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을 둘러싸고 문예춘추 등이 우익단체로부터 협박을 받았다. 이 때문에 는 그 이후 어떠한 단행본으로도 구할 수가 없게 되었다. 단, 《오에 겐자부로 전작품 1》에 수록된 자필연보에 따르면, 본 작품이 “현재까지 단편집에 실리지 않은 것은 작가 스스로의 의지 때문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1963년, 두개골에 이상이 있어 지적장애를 안은 장남 오에 히카리가 태어났다. 무거운 장애를 안은 아이의 탄생은 전후사회에서 희망이 없는 청년과 그 사회에 맞선 절망적 반항과 저주를 독자적으로 그려 온 작가에게 정신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1964년, 히카리의 탄생을 기점으로 쓴 자전적 소설 《개인적 체험(個人的な体験)》으로 제 11회 신초샤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지적장애를 안고 태어난 자식의 죽음을 바라는 아버지 버드(Bird) 가 온갖 정신편력을 겪은 끝에 상상력에 의해 현실로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작품으로, 원래 사르트르의 영향으로 그 의식이 깊어진 상상력 이라는 개념은 이후 오에 겐자부로에게 상당히 큰 주제/수법 중 하나가 되었다. 같은 해에 히로시마를 수차례 방문했던 경험과 세계원수폭금지대회에 참가한 경험을 토대로 한 르포르타주 《히로시마 노트》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 오에 겐자부로는 장애를 안은 아이를 중심으로 한 개인적 체험 과 히로시마·나가사키 피폭, 그리고 전쟁이라는 인류 고유의 비극 을 대응시켜 자신의 주제로써 심화시켜나가고 있다. 1967년, 30대 초반에 장편소설 《만연원년의 풋볼》을 발표하고, 최연소(2010년 현재까지도 기록으로 남아있음)로 제3회 다니자키 준이치로 상을 수상했다. 만연원년(1860년)에서는 시코쿠의 마을에서 일어난 폭동과 100년후의 안보투쟁을 결합시켜 폐쇄적 정황에 대한 혁신적인 반항을 그려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 당시 현저했던 오에 특유의 문체는 틀이나 주석,수식,피수식의 관계가 혼탁했기 때문에 여러차례 난해한 문장이라고 지적을 받았지만, 노벨문학상에 선출되었을 당시의 수상이유로 현재의 표준어인 도쿄방언에 대항하는(산문) 시적인 문체를 들었다(단지, 그 후부터는 작품에 어울리는 문체를 적절히 조절하여 쓰는 방법으로도 사용하고 있다).현재는 오에의 대표작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이전에 오에를 평가 한 에토 준은 그를 강하게 비판하고 오랜 기간동안 대립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일본사회와 공존하는 비정상적이고 작은 세상들을 그려낸 단편집《우리들의 광기를 참고 견딜 길을 가르쳐 달라》(1969년)를 출판하고, 1971년에 발표된 중편,에서는 그 전년도의 이쓰시마 사건을 토대로 천황관을 개혁할 것을 주제로 삼았다. 그 후에 《내 영혼에 이르러》(1973년, 노마문예상수상),《핀치러너 조서》(1976년)에서는 천황제나 핵문제 대해 고민하고, 리얼리즘을 초월한 세계관을 그리기 시작했다. 오에의 후기작에서는 ,《기도,허락》같은 종교적인 사상에 깊이있게 접근하고 전환의 계기로 삼았다. 40대부터는 야마구치 마사오의 문화인 수학에 영향을 받아, 1979년에 발표된 《동시대 게임》에서 의 역사를 쓰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썼지만, 문화평론가로부터 명성을 얻은 후의 사치스런 것이라고 비판 받았다. 다만, 오에 자신은 우주의 창조자인 나 영혼의 문제를 작품속에서 중요하게 자리매김 하고 있다. 1982년, 연작집 《레인트리(Rain Tree)를 듣는 여자들》을 발표하고 다음해에 제34회 요미우리 문학상을 수상했다. 또한 다케미쓰 토오루는 연작집의 첫 번째 이야기인 >에 영감을 얻어 (Rain Tree)를 작곡했다. 연작집의 두 번째 이야기 《레인트리를 듣는 여자들》은 이 곡의 연주를 처음 들으며 집필했으며 소설속에 콘서트의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1983년 《새로운 사람이여 눈을 떠라》에서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를 인용하여 그의 문헌이나 관련 연구를 반복해서 읽는 것으로 깨달은 사상을 오에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며, 세심한 필체로 자서체 소설로 사생활을 그려내어 제10회 오사라기 지로 상을 수상했다. 1985년에는 연합적군 사건을 사상적으로 총괄해 낸 《하마에게 물리다》,1986년에는 《동시대 게임》의 세계관을 현실세계로 비추어 낸 《M/T와 숲의 이상한 이야기》,1987년에는 단테의 《신곡》을 바탕으로 자신의 반생,사상의 편력, 주역의 변천등을 서사적으로 그려낸 《그리운 날들로의 편지》를 발표 했다. 1989년에 《인생의 친척》에서는 장편에서 처음으로 여자를 주인공으로 하고, 아이를 잃은 여자의 비극과 재기하기까지를 그려 내 제1회 이토세이 문학상을 수상했다.1989-1990년에 발표 된 연작 《치료탑》 과 그 연속편인 《치료탑혹성》에서는 넓은 의미로의 SF형식을 사용하고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시를 빌려 핵과 인류구제의 주제를 그리고 있다. 1993년 9월부터 《신조》에 있어서 가장 긴 장편소설 3부작 《타오르는 푸른 나무》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연재중이었던 1994년 10월 13일에 가와바타 야스나리 이후 26년만에 일본인으로써는 두 번째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기념 강연으로 가와바타의 를 풍자한 를 주제로 삼았다. 11월부터 《타오르는 푸른 나무》간행을 시작했다. 시코쿠의 마을을 무대로 한 에 의한 전통 계승과 부활, 교회의 일파로의 공격, 시민과 교회의 격한 대립을 줄거리로 하여 아우구스티누스나 예이츠를 인용 를 주제로 집필하여 지금까지 작품 중 가장 큰 성공을 거뒀다. 1995년 1월, 1994년도에 조일상을 수상하였다. 오에는 1995년 자신의 인 《타오르는 푸른 나무》를 완성했지만, 1996년 다케미쯔 토오루의 영결식에서 그를 위해 신작을 바치겠다고 약속하고 1999년 《공중회전》에서 집필을 다시 시작했다.테러를 막기 위해 한 교주 의 파란과 살인속에서 교단의 재건을 삼인칭 시점으로 그려낸 전환작이 되었다. 이후의 창작활동은 오에 자신의 말을 빌려 이라고 불린다. 이타미 쥬죠의 죽음을 위해 쓴 작품 《뒤바뀐 아이(체인지링)》(2000년), 《우울한 얼굴의 아이》(2002년), 《안녕,나의 책이여!》(2005년)은 전부 가 등장한 3부작이다.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안녕,나의 책이여!》에서는 미시마 유키오와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문제를 자신의 인생에 투영시켜 데뷔작 《기묘한 일들》로 회귀하는 듯한 복잡한 구성을 택했다.3부작을 집필하고 있던 2002년에는 아이들을 위한 판타지 동화 《200년의 아이들》을 발표했다. 그 후 2007년에는 수장되었던 영화를 재구성하여 들의 늘그막의 모험담 《아름다운 애너벨리 싸늘하게 죽다》 가 신조사, 2009년에는 익사한 아버지의 죽음을 그려내려고 한 작가의 행동을 다양하게 표현해 낸 《익사》가 강담사에 각각 실렸다. 《타오르는 푸른 나무》의 총괄편이라고도 불리는 《공중제비》이외의 들 모두가 자신을 투영시킨 소설가나 옛의인을 둘러싼 거짓과 진실의 이야기였다. 그의 이야기에서 허구를 섞어 자신의 생각을 고쳐 말하는 것 같은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이러한 형식에서는 오에 자신도 자각적으로 《익사》속에서 라는 등의 도회하는 듯한 표현을 썼다).또한, 모든 작품에 있어서 선행되었던 문학,예술 등에 자유로운 인용을 덧붙여 과거 자신의 인용이나 옛 이야기를 현대의 언어로 해석, 환골탈태, 재구성을 하였다. 창작활동 이외에는 2006년에 오에 겐자부로상이 설립되어 다음세대의 젊은 작가들을 응원하는 움직임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전후 민주주의자임을 자인하며 국가주의, 특히 일본의 천황제에 대해서는 일관적으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또한 평화헌법을 수호하는 입장으로 핵무기나 헌법 제 9조(일본 헌법 삼대원칙 중 하나인 평화주의를 규정하고 있음)에 대해 에세이나 강연에서 적극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자위대의 존재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1994년 노벨상 기념 강연회를 가졌을 때에는 덴마크 문법학자 크리스토프 니로프의 ‘(전쟁에) 항의하지 않는 인간은 공모자나 다름없다’라는 발언을 빌려 ‘항의하는 것’이라는 개념에 대해 언급하였다. 또한 예술원 회원으로 활동하거나 문화훈장을 받는 문학가의 자세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노벨문학상은 “스웨덴 국민이 주는 상으로 여기겠다”라고 하며 상을 받았으나, 그 직후에 천황이 손수 문화훈장과 문화공로상을 함께 수여하려 하자, “나는 전후 민주주의자이므로 민주주의 위에 군림하는 권위와 가치관을 인정할 수 없다”라고 하여 수상을 거부했다. 한편, 2002년에는 공화국인 프랑스의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2003년에 자위대를 이라크에 파병했을 때에는 “이라크에는 순수하게 인도적 차원의 원조를 제공하는 데서 그쳐야 한다”, “전쟁 후 반세기 남짓한 가운데서도 일본이 이 정도로 미국을 추종하는 모습을 보였던 적은 없다”라고 하며 분노를 표명했다. 2004년에는 헌법 9조 ‘전쟁 포기’의 이념 수호를 목적으로 가토 슈이치, 쓰루미 슌스케 등과 함께 9조회를 결성하여 전국 각지에서 강연회를 열고 있다. 2006년에는 중국사회과학원 외국문학연구소의 초청을 받아 중국으로 가서 난징대학살기념관 등을 방문하였다. 베이징대 부속중학교에서 열린 강연에서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언급하며 “일본과 일본 젊은 세대의 장래를 철저히 망가뜨리는 짓이다”라고 하였다. 2009년 6월 2일, 강연에서 "핵보유국과 비핵보유국 사이의 신뢰관계가 없으면 핵무기 폐기가 시작될 수 없다.우리들이 싸우지 않는 태도를 일관한다면, 북한과의 관계에서 신뢰를 만들어내는 커다란 조건이 되지 않을까" 라는 뜻의 발언을 했다. 때마침 이 발언은 5월 25일 북한이 핵실험을 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에 나온 발언이여서 많은 물의를 빚었다. Nip the Buds, Shoot the Kids (1958) A Personal Matter (1968) The Silent Cry (1974) Teach Us to Outgrow Our Madness (1977) Hiroshima Notes (1982) Japan s Dual Identity A Writer s Dilemma (1988) A Healing Family (1996) # 중-단편집/죽은자의 사치 # 아이 싹 훑기/우리들의 시대 # 늦게 온 청년 # 성적 인간 # 일상생활의 모험 # 개인적 체험 # 만연원년의 풋볼 # 우리들의 광기를 참고 견딜 길을 가르쳐 달라. # 홍수는 나의 영혼에 넘쳐 흘러 # 핀치러너 조서 # 동시대 게임 # 를 듣는 여인들 # 새로운 인간이여, 눈을 떠라 # 하마에게 물리다 # M/T와 이상한 숲의 이야기 # 그리운 해에게로 띄우는 편지 # 길프 군단 # 인생의 친척 # 조용한 생활 # 치료탑/치료탑 혹성 # 타오르는 푸른나무/1부 구세주의 수난 # 타오르는 푸른나무/2부 흔들림 # 타오르는 푸른나무/3부 위대한 세월 # 오에 겐자부로론 # 2백년의 아이들 우리들의 시대 (1959년) 감독 쿠라하라 고레요시 가짜 대학생 (1960년) 감독 마스무라 야스조 사육 (1961년) 감독 오시마 나기사 조용한 생활 (1995년) 감독 이타미 주조, 음악 오에 히카리 1990년 8월 5일 - NHK 스페셜「세계는 히로시마를 기억하고 있는가~오에 겐자부로·대화와 사색의 여행~(世界はヒロシマを覚えているか~大江健三郎・対話と思索の旅~)」칼 세이건, 프리먼 다이슨, 안드레이 사하로프, 김지하 등과 대화. 1992년 10월 ~ 12월 - NHK 인간대학「문학재입문」1992年10月~12月(후에 비디오 카세트로 발매) 1994년 9월 18일 - NHK 스페셜「울려퍼지는 부자~오에 겐자부로와 아들 빛의 30년~(響きあう父と子 ~大江健三郎と息子 光の30年~)」 1999년 -「뉴스23」「하나마루 마켓」등에 출연 2003년 12월 20일 - NHK 스페셜「시리즈 안전보장」에서 이라크 자위대 파견, 개헌 문제 등에 대해 코토다 마사하루(後藤田正晴),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曽根康弘), 쿠리야마 쇼이치(栗山尚一)와 토론 2003년 11월 - 「뉴스 스테이션」 2002년 8월, 2004년 1월 - 「테츠코의 방」에 출연 2006년 1월 - 「타케시의 누구라도 피카소」에 출연 2010년 1월 5일 - NHK「스튜디오 파크에서 안녕」에 출연 야마자키 츠토무 - 「조용한 생활(静かな生活)」(케이 역) 오에 겐자부로(노벨 위원회 홈페이지) Kenzaburo Oe 분류:1935년 태어남 분류:살아있는 사람 분류:일본의 작가 분류:일본의 소설가 분류:일본의 반전 운동가 분류:일본의 공화주의자 분류:노벨 문학상 수상자 분류:일본의 노벨상 수상자 분류:아쿠타가와상 수상자 분류:한국어 전집이 출간된 저자 분류:오키나와 전투 분류:에히메현 출신 분류:도쿄 대학 동문 분류:프린스턴 대학교 교수 분류:일본의 SF 작가
요제프 안톤 브루크너 (, 1824년 9월 4일 ~ 1896년 10월 11일)는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이자 오르가니스트이다. 교향곡과, 종교음악, 모테트로 유명하다. 그의 작품은 풍부한 화성, 복잡한 폴리포니, 유도동기, 긴 연주시간으로 유명하여 독일-오스트리아의 낭만파의 최후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브루크너는 교사이자 오르가니스트인 아버지에게 음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교사 보조로서도 일했고 마을 악단에서 바이올린을 켜기도 했고, 결국 성 플로리안 성당의 오르가니스트가 되었다. 생전에 그는 오르가니스트로서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특히 즉흥 연주에 능했다고 한다. 그는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 여러 스승에게 작곡이나 대위법 등을 배워나갔으며, 빈 음악원과 빈 대학 등에서도 교직을 맡기도 했다. 그러면서 11개의 교향곡과 3개의 미사, 테 데움 등의 종교 음악을 작곡했다. 그러나 생전의 그의 음악은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많은 비난을 받았다. 이는 그가 바그너의 추종자로 알려져 브람스를 신봉하는 많은 비평가의 무조건적인 공격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며, 그의 음악을 있는 그대로 이해해주는 사람이 주변에조차도 드물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제자인 페르디난트 뢰베, 프란츠와 요제프 샬크 형제 등은 항상 그의 곡을 청중들이 더 이해하기 쉽게 한다는 명분으로 브루크너의 곡을 개작하도록 압박했고, 이런 압박이 브루크너 자신의 유약함 내지 꼼꼼함이 덧붙여져서 지금까지도 문제가 되는 수많은 개정 원고가 존재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브루크너는 생애의 거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그의 7번 교향곡, 8번 교향곡, 테 데움의 공연에서 성공을 맛볼 수 있었으나 너무나 늦은 성공이었다고 하겠다. 그는 빈에서 사망했고, 그의 유해는 지금도 성 플로리안 성당의 오르간 밑에 안장되어 있다. 브루크너의 중요한 작품으로는 교향곡과 종교음악을 꼽을 수 있다. 이외에도 실내악 작품이나 피아노 독주곡 등을 음반으로 찾아볼 수 있다. 19세기 서양고전음악에서 브루크너 작품들의 위치는 슈만, 브람스가 계승한 신고전주의적인 구조와 슈베르트가 보여준 개성화된 내용의 결합이며 이러한 경향은 구스타프 말러로 계승된다. 한편, 가톨릭 신자이기도 했고 교회 오르가니스트였기에 브루크너의 종교음악은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이후 낭만주의 종교음악의 맥을 잇는 역할을 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그의 종교음악은 대규모 합창과 교향악의 결합으로 대변될 수 있으며 이러한 경향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장엄미사의 맥을 잇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브루크너의 작품목록 작품 번호"WAB"는 음악 학자 레나토 글라스베르거(Renate Grasberger)가 편찬한 "브루크너 작품 목록"(Werkverzeichnis Anton Bruckner)의 번호이다. 번호는 149번까지 한다. 교향곡 00번 바단조 WAB.99 ‘습작’ 교향곡 0번 라단조 WAB.100 교향곡 1번 다단조 WAB.101 교향곡 2번 다단조 WAB.102 교향곡 3번 라단조 WAB.103 ‘바그너’ 교향곡 4번 내림마장조 WAB.104 ‘로멘틱’ 교향곡 5번 내림나장조 WAB.105 교향곡 6번 가장조 WAB.106 교향곡 7번 마장조 WAB.107 ‘서정적’ 교향곡 8번 다단조 WAB.108 ‘묵시적’ 교향곡 9번 라단조 WAB.109 바단조 교향곡(00번)은 브루크너가 습작용으로 작곡해 첫번째로 시작되는 일련 번호를 붙이지 않은 곡이다. 교향곡 0번은 후년에 애정을 느껴 파기할 수 없다고 느낀 작곡자가 고의로 제0번으로 한 것이지 실제로는 첫 작곡 후에 다룰 수 있는 작품이다. 또한 마지막 교향곡 제9번은 미완성 작품이다. (실질적은 반쪽 완성) 자세한 내용은 각 교향곡의 문서로 다룬다. 이상 외에 1869년에 착수했지만 완성을 보지 못한 교향곡 내림나장조의 존재가 확인되고 있다. 스케치의 단편만 남아 있다. 브루크너가 바그너 음악을 접하게 된 것은 그가 31세 때인 린츠에 옮겨서부터이다. 그 무렵 그는 지몰 제히터에게 대위법을 배우기 위해 때때로 빈으로 갔었는데, 그 때에 바그너가 지휘하는 연주회에 갔던 일이 있었다. 그것이 언제부터였고 그가 어떤 인상을 받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로부터 8년 후인 1863년에는 당시 작곡 스승이었던 오토 키츨러의 권유로 탄호이저의 스코어를 연구하여 매우 흥미를 갖게 되었고, 게다가 그 해 안에 린츠에서 탄호이저의 실제 상연을 접하여 전격적인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얼마 후에 키츨러 자신이 지휘하는 로엔그린과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을 보고 브루크너는 여태까지 그가 접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음악에 강한 감명을 받았다. 2년 후인 1865년에는 뮌헨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초연이 열리게 되었는데, 브루크너는 이 악극을 보기 위해 뮌헨으로 갔다. 그곳의 호텔 피아 야레스차이덴(4계 호텔)에는 유명한 음악가들이 숙박하고 있었는데 브루크너는 거기에 가서 안톤 루빈스타인과 한스 폰 뷜로에게 자신이 만든 교향곡 1번의 악보를 보이기도 했다. 뷜로가 바그너에게 이 젊은 작곡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기 때문에 바그너도 흥미를 갖게 되어 두 사람의 첫 회견이 실현되었다. 브루크너는 처음에는 대선생님을 만날 용기가 없었으나 권유를 받아 바그너를 찾아갔다. 그 때 어떠한 화제가 있었는지는 전해지지 않았으나, 브루크너에 의하면 바그너는 매우 친절했었다고 한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초연이 연기되었기 때문에 브루크너는 일단 린츠로 돌아왔으나 6월 19일에는 다시 뮌헨으로 나가서 트리스탄과 이졸데 제3회 공연을 보고 감격 때문에 자기를 잊어버릴 정도 였다고 한다. 린츠에서 브루크너는 대성당 오르가니스트 외에도 프로진이라는 남성 합창단 지휘자를 맡고 있었는데, 1868년 이 합창단의 기념 축하공연에 노래하는 합창단을 위하여 바그너에게, 이전에 작곡한 것이라도 좋으니 무엇이든지 한 곡 빌려줄 수 없는가 하고 부탁했다. 바그너는 기쁜 마음으로 최근 작곡된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5막의 일부를 건네주었다. 한스 작스의 연설에서 이어서 나오는 환희의 합창 이었다. 4월 4일에 이것을 지휘한 브루크너의 감격은 매우 컸었다. 1872년 5월, 그 무렵 빈에 살았던 브루크너는 바그너가 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역으로 마중하러 나갔다. 거기에는 빈 음악계의 면면들이 즐비하였는데 열차에서 내린 바그너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브루크너 쪽으로 달려와서 "오, 오! 브루크너 이리 와요. 자네는 내 동료이다."고 말했다. 이미 그 무렵에 브루크너는 빈 음악원과 대학에서 음악 이론을 가르치고 있는 명강사, 교수였다. 그 이듬해 브루크너는 바이로이트에 가서 바그너를 방문하고 자작인 2번과 3번을 보여준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하여 여기서 되풀이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브루크너 자신이, 보르초겐에게 보낸 편지로 이 회견에 대해 상세히 말했는데, 그 가운데에서 그는 바그너가 교향곡 3번의 제1부를 다 훑어보았다고 썼다. 이 때 제4악장은 아직 스케치뿐이었기 때문에 바그너에게는 그것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어쨋든 브루크너는 이 교향곡 3번을 바그너에게 헌정하였는데 그 때문에 뒤에 이 곡은 바그너 교향곡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 다음에 두 사람이 만난 것은 1875년 바그너가 또 다시 빈에 나타났을 때이며 브루크너가 그를 찾아갔을 때, "자네 교향곡을 연주해야 한다!"고 외쳤다. 바그너는 브루크너를 만날 때마다 "자네 교향곡을 연주해주겠다"고 말했지만 결국 한번도 실현되지 않았다. 이것은 헛소리로 말했던 것은 아니다. 몇 번이나 빈 필하모닉에게 연주해 주도록 권했었지만 악단 쪽에서는 비평가 한슬리크의 불만을 사게 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채택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이 만난 것은 1882년 7월 파르지팔 초연 직전에 바이로이트에서였다. 브루크너는 검은 예복을 입고 바그너 집 앞에서 그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바그너는 브루크너를 보자마자 손을 내밀며 또 "내가 자네 교향곡과 모든 작품을 상연하겠다."고 말했다. 브루크너는 "오, 오! 선생님, 저는 선생님을 숭배합니다."라고 감격에 차서 말할 뿐이었다. 서로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그런데 정말 바그너는 브루크너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브루크너는 바그너를 얼마만큼이나 숭배하고 있었을까? 프리드리히 브루메는 바그너가 브루크너의 숭배를 정당하게 평가하고, 순수하게 존중하기에는 너무나도 자기 중심적이었다고 말했다. 바그너는 분명히 브루크너를 종종 칭찬했지만, 바그너 쪽에서 접근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는 브루크너의 모든 작품을 상연하겠다고 말해 놓고는 교향곡 3번 바그너 이외의 작품을 알려고 하는 관심조차도 없었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지휘자 한스 리히터는 바그너가 종종 교향곡 3번을 진심으로 칭찬하는 말을 들었다고 했고, 브루크너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고 말했다. 베르너 볼프에 따르면, 바그너의 아들 지크프리트는 그 뒤에 말하기를 "아버지가 브루크너의 모든 교향곡을 자신이 연주하겠다고 말한 것은 본심에서 우러나온 말은 아닐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상으로 보아서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것이 진상에 가까울 것이다. 바그너는 브루크너의 교향곡 3번 바그너 를 높이 평가하여, 실제로 상연될 수 있도록 노력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자신이 지휘하여 상연한다는 것이나 상연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힘을 쓴다는 의지는 없었던 것이다. 바그너는 브루크너뿐만 아니라 다른 예술가들을 세상에 인정시키기 위한 노력은 (그것이 특별히 자기에게 이익을 주지 않는 이상) 하지 않았었고, 게다가 자기 작품의 창작과 자작의 상연을 위한 일 때문에 시간을 뺐겨서 그럴 틈 조차 없었던 것이다.브루크너 자신도 바그너에 의해 자작이 상연될 것이라고는 거의 기대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또한 그 자신이 너무나도 강하게 바그너 당에 끌어들여지는 것을 회피하였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브루크너 자신은 순박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말 뿐인 약속만 하는 바그너에 대해서는 약간 좋지 않은 기분을 가졌을 것이다. 뒤에 친구에게 "바그너는 주의하는 것이 좋겠다. 자기 이익이 될 때에는 친절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전혀 무관심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니벨룽의 반지도 파르지팔도 바이로이트 음악축제에서 보았고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이후의 바그너 오페라를 모두 알고 있었으므로 작곡가 바그너에 바친 커다란 숭배의 마음은 끝내 바꾸지 않았던 것이다. 브루크너의 바그너 악극에 대한 감탄의 마음은 전적으로 음악에만 한정되었었다. 이 선배의 악극 사상이나 그 활동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브루메에 따르면, 브루크너는 트리스탄의 피아노 스코어를 열심히 사보하였으나 거기에 붙여진 텍스트를 베끼기는 커녕 읽지도 않았다고 하며 발퀴레를 보았을 때 그 끝막에서 브륀힐데는 왜 화형에 처해지는가 하면서 옆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물었다고 한다. 브루크너가 최초의 교향곡을 쓰기 시작하기 전부터 그는 바그너 음악을 접했었고 또한 키츨러로부터 바그너 작품을 연구하도록 권유를 받기도 했었다. 브루크너보다 10살 아래인 이 린츠의 악장은 제히터처럼 대위법 이론에만 집중하지 않고 베토벤에서 바그너에 이르는 작품, 분석을 브루크너에게 하도록 시켰다. 브루크너가 바그너에게서 배운 것 중의 하나는 크로마틱(반음계)와 엔하모닉(딴 이름 한 소리)의 넓은 이용법이었다. 키츨러 지도 아래 작곡된 교향곡 0번과 그 뒤의 1번에는 이와 같은 바그너의 새로운 수법이 발견된다. 악기 사용법에 있어서도 1번 1악장의 트롬본은 브루크너가 처음으로 접한 바그너 작품인 탄호이저를 생각나게 한다. 교향곡 2번에서는 1악장에 바그너의 리엔치 중의 리엔치의 기도 에 나오는 동기가 거의 그대로 오보에에 나타난다. 그러나 브루크너가 의식적으로 바그너에게 기울어짐을 나타낸 것은 교향곡 3번 바그너 인데, 거장에게 헌정된 곡인 만큼 화성이나 악기법에 바그너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와 발퀴레에서 인용한 것도 몇 몇 보이지만, 이러한 인용은 나중에 작곡가 자신이 제거하였다. 그러나 이것으로 바그너적 색채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고, 특히 제2악장 전체에는 발퀴레의 안정된 낭만적 분위기가 짙게 나타난다. 주부인 제2주제인 졸림의 동기 에 흡사하다. 제4악장 조차도 반음계적 화성의 활용이나 현의 세밀한 음형, 그리고 끝맺음에 이르는 장대한 금관악기의 부르짖음등 탄호이저 이후의 바그너 세계를 방불케 한다. 1878년 작곡된 현악5중주 F장조에 관하여, 가이링거는 "그 화성이나 조바꿈에 있어서 지크프리트 의 방랑자 장면에서 영향을 받은 것 같이 생각된다."고 말했다. 또한 이 곡의 끝악장에는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의 베크메이서의 동기와 흡사한 선율도 나타난다. 브루크너는 마지막 세 개의 교향곡에 있어서 바그너 튜바를 사용함으로써 바그너에게 대한 숭배의 마음을 표시하였다. 제7교향곡 제2악장의 스케치가 1883년 1월 22일에 완성되었는데 그 무렵부터 브루크너는 바그너의 죽음을 예감하게 되었다고 한다. 같은 해 3월 13일 바그너는 베네치아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다음날 14일 브루크너는 그 통보를 받았다. 이 때 브루크너는 음악원에서 이 제2악장 아다지오의 마지막 부분을 작곡 중이었는데 장송의 뜻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아다지오의 코다로 35마디를 덧붙여 썼다고 한다. 이 부분의 처음과 끝에 오는 무거운 금관 합주에서는 바그너 튜바의 울림은 물론이고 전체가 반지와 파르지팔을 방불케 한다. 그로부터 2년 후 브루크너는 성플로리안에서 이 코다의 음악과 신들의 황혼의 지크프리트 장송 음악을 결부시켜서 즉흥연주를 했다고 한다. 그 이전에도 그는 간혹 바그너의 선율을 주제로 한 오르간의 즉흥연주를 하였다. 7번, 8번, 9번이라고 하는 3곡의 교향곡에서는 모두 느린 악장이 특히 바그너 수법에 대한 접근을 보여준다. 8번의 제3악장 아다지오는 터치가 부드럽고 깊숙한 음향에 있어서 트리스탄과 공통된다. 기분을 풀 길이 없는 불안한 주제의 반음계적인 움직임, 특히 그 반주의 당김음에 의한 셋잇단음표의 흔들림, 무한선율, 그리고 반음계 화음의 상승 등은 트리스탄과 이졸데 2막의 세계이다. 초기의 브루크너에 관해서는 상상도 못할 정도인 섬세한 미가 바그너를 통해서 꽃피었다. 한슬리크가 말했듯이 여기서 하프를 사용한 것도 바그너에 대한 접근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에 비해 교향곡 9번의 첫머리는 파르지팔을 상기시킨다. 제1주제는 바그너의 파르지팔 제3막의 전주곡, 성 금요일의 음악을 상기시킨다. 그것은 위로 받지 못하는 기분 속에서 개시되지만, 곧 창의 동기 의 연상을 거치면서 그랄(성배) 적인 상승을 이룬다. 다만 이 브루크너의 백조의 노래 가 바그너의 백조의 노래 와 다른 점은 후자가 드라마의 객관성이 갖는 기분을 전하려고 하는데 비해 전자는 절대음악이며 그 배후에 아무 것도 없는 청결함을 가졌다는 점이다. 그러기 때문에 거기에는 아주 기분 나쁠 정도의 장엄함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바그너가 브루크너의 후기 교향곡을 듣지 못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는 틀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감격했을텐데 말이다. 브루크너는 바그너와 함께 전용(專用)되었으며 그의 교향곡은 나치 독일 시절 철처하게 나치의 선전용으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바그너와 달리 브루크너는 일반적으로 직접적인 나치와의 과거 문제에 때문에 큰 오명을 얻지는 않았다. 또한 그가 게르만 민족주의, 반유대주의자가 아닌게 밝혀졌고 유대인 음악가 구스타프 말러와 친한 사제관계였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의 작품은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 별다른 외부 저항없이 레퍼토리로 이용되었고, 이스라엘에서도 그의 음악은 연주금지가 되지 않았고 자주 연주된다. === 브루크너와 오스트리아의 합병, 나치 수정주의와 전유의 정치학 === 1937년, 레겐스부르크의 잊을 수 없는 악명높은 사진에서 나치의 군복을 차려 입은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작곡가인 브루크너의 대리석 흉상을 존경스러운듯이 바라보며 서 있다. 국가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입각해서, 아돌프 로덴베르거가 만들어낸 이 흉상은 철십자를 잡아채고 있는 독수리가 새겨져 있는 나치 문양과 그 곁에는 금으로 둘러싸인 제단 위에 올려져 있다. 브루크너는, 1841년에 바이에른의 루드비히 1세의 지시 아래, 파르테논 신전을 본 따 만들어진 레겐스부르크의 신전, 즉 과거 독일의 문화적 영웅들로 가득찬 이 신전에 독일 문화의 또다른 선각자로서 합류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브루크너의 경우는 제3제국 속으로 충분히 들어올 자격이 있는 독일 작곡가들 속으로 브루크너를 충분히 우상화시켜 합류시키는 것이 그 목적이었으나, 실제로 이것은 8개월 후의 독일의 오스트리아에 대한 합병의 징조였다. 피터 가블, 막스 아우어(국제 브루크너 협회 회장), 괴벨스, 그리고 또다른 사람들에 의한 연설 등을 포괄하는 이러한 레겐스부르크의 행사는 일련의 음악회, 국제 브루크너 협회의 행사, 그리고 독일 나치 당의 모임 등을 포함하는 다양한 음악 정치적 행사의 가장 핵심적인 것이었다. 브루크네리안의 편협한 시각으로 이 행사를 살펴본다면 그것은 단지 지난해의 브루크너 사망 40주년 기념 행사를 마무리하는 행사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1930년 후반의 나치의 정치적 전략의 더욱 넓은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의 합병을 위한 하나의 출발점에 불과한 것이었다. 1936년은 이러한 브루크너 사망 40주기를 포함하여, 괴벨스에 의하면, 모든 베르사유의 속박 에서 해방되는 해였다. 독일은 다시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었으며, 1936년이야말로 오스트리아, 체코, 그리고 폴란드로 영토를 넓혀가기 위해 전진하는 해였다. 이제 괴벨스가 스스로 위험 지대 라고 명명했던 동원의 시기인 1936년 시기에 동시에 이루어졌던 복잡한 국내 선전 캠페인 속에 이 작곡가의 이미지가 어떻게 조작되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국가 사회주의의 문화적 우상으로서의 브루크너의 중요성은 단순히 대리석 흉상부터 출발하여, 깃발, 철십자에 이르기까지 부각되었으며, 심지어는 게르만의 문화적 애국주의로까지 확대되었다. 브루크너를 제3제국의 문화적, 정치적 목적에 연결시려는 행사들은 시시한 것에서 예술적으로 매우 모호한 것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했고, 지금 현대 사람들의 귀에는 매우 순수하게 들리는 그의 음악도 1930년대와 1940년대의 대중들의 귀에는 매우 다른 의미로 각인되었다. 만약 히틀러가 개인적으로 브루크너를 한 인간으로서, 작곡가로서, 그리고 북 오스트리아의 같은 형제로서 브루크너를 생각하고, 관심갖지 않았다면 브루크너를 미화하는 나치의 선전 캠페인은 전혀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히틀러는 유년 시절, 브루크너의 교향곡에 매우 감동되었다. 히틀러의 예술가로서의 젊은 시절의 투쟁은 매우 잘 알려져 있다. 브라나우에서 온 이 평범하고 젊은 예술가는 빈의 미술계에 들어가려고 하나 결국 실패하게 된다.그리고 그는 분명히 이러한 그의 신세를 초기에 빈의 예술계로부터 촌사람으로서 아웃사이더나 다름없었던 브루크너와 동일시하게 된다. 괴벨스의 1941년 3월 13일의 일기를 보면, 또한 히틀러가 빈과 관련해서 크게 상처받았고, 이는 결국 직접적으로 브루크너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 플로리안으로 가라! 브루크너가 작곡하던 수도원으로! 얼마나 아름다운 바로크 건물인가! 우리는 이곳으로부터 나온 성직자에게 관심을 돌려 그 음악동료와 브루크너 협회를 위한 보금자리를 찾아내었다. 얼마나 장대한 계획인가! 그의 음악으로 세계를 정복한 시골 청년! 오늘날 이 구역이 얼마나 문화, 역사, 심지어 예술적 힘에 있어서 풍요로운가! 위대한 총통 아돌프 히틀러는 여기에 문화의 중심지를 세우려고 한다. 빈과 평형을 이루는 평형추로서, 그리고 빈은 서서히 철수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는 빈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린츠를 더욱 좋아한다. 그는 순전히 그의 비용으로 성 플로리안에 그 대안을 만들려고 한다." 한스 크레크치의 탁월한 논문은 종전까지의 히틀러의 브루크너에 대한 집착, 특히 그의 개인적 보호 아래 성 플로리안을 바이로이트처럼 만들려는 계획을 비롯하여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소위 브루크네리안 바이로이트 는 세가지의 목적을 갖고 있었다. 첫째, 성 플로리안은 브루크너의 불멸의 작품을 위한 성스러운 전당 (브루크너의 전통을 유지하고 촉진하기 위해)이 되어야한다. 둘째, 바이로이트와 같이 브루크너 페스티발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성 플로리안은 음악 협회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프로젝트와 별도로, 브루크너의 음악(교향곡)은 라이브 음악회와 라디오 방송에서 공식적인 의전을 위해 사용되었다. 알버트 스피어는 뉘른베르크에서의 대규모 당 행사에서의 그의 문화에 대한 연설에 앞서 매번 브루크너 교향곡의 한 악장이 연주되는 광경을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1937년 6월 30일의 악명높은 건강한 독일 예술을 찬양하는 나치 주최의 퍼레이드는 브루크너 3번 교향곡의 팡파레로 시작되었다. 지타가 공인하듯, 브루크너의 멜로디는 어떠한 장엄하고, 의례적인(ceremonial) 면이 있고,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은 바로 바이로이트의 대 작곡가에게 헌정된 3번 교향곡과 관련하여 바그너 자신이 언급한 바로 그 주제였다는 점이다. 바그너와 바이로이트는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지 첫 해에 이미 새로운 체제에 의해 정치화되었다. 그리고 나치는 이제 브루크너의 상투성을 바그너-심포니스트 로서 강조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더욱 많은 것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그러한 관점은 1934년에 있었던 Die Musik 에 드러난 나치의 친위대 음악회 비판에 의해 더욱 확장된다, 그 논평자는 베토벤을 제3제국의 선구자로서 포함시킨다. "바이로이트의 거장, 즉 독일 변혁의 가장 중요한 개척자 중의 한 사람이며, 제3제국의 가장 대담한 제사장인 바그너는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의 서곡에 의해 묘사되었다. 그리고 브루크너의 기념비적인, 에로이카(영웅) 로 불릴 수 있는 7번 교향곡은 영웅적으로 전체 작품의 음조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느린 악장의 장송행진곡에 있어서도 베토벤의 영웅교향곡과 연결되어 있다. 브루크너의 그 느린 악장은 또한 어떤 영웅의 죽음을 슬퍼하는 비가와도 같은데, 그 영웅은 바로 바그너와 관련이 있다." 1945년 4월, 7번 교향곡의 아다지오가 독일 라디오의 히틀러의 죽음 소식에 이어 흘러나올 때, 그 브루크너의 음악은 또다른 영웅 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해 종종 사용되었을 것이다. 초기, 나치와 바이로이트와의 긴밀한 관계는, 그들의 우호적인 관계에도 불구하고 국가사회주의자들과 국제 브루크너 협회 간의 사소한 마찰을 유발한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기 전에, 이 협회의 목적은 매우 단순했다. 즉 그들의 목적은 안톤 브루크너의 작품을 널리 퍼뜨리고, 작품들의 진정한 에디션을 위한 작업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비공식적인 두개의 목적이 또한 있었다. 브루크너를 널리 유포되어 있는 브람스 파의 패러다임과 어울리게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작곡가로서 소개하는 것이었고, 바그너-심포니스트 로서의 브루크너의 판에 박힌 이미지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국제 브루크너 협회는 나치의 재정적 지원에는 매우 기뻐했으나(괴벨스는 그의 레겐스부르크 연설에서 진정한 브루크너 에디션을 위한 자금의 지원을 공개적으로 약속했다), 이러한 상호 만족 뒤에는 브루크너와 바그너에 관계된 풀 수 없는 긴장의 요소가 잠재되어 있었다. 이러한 긴장은 1937년 5월, 레겐스부르크 연설이 있기 한 달전에 아우어가 두 작곡가 사이의 확연한 스타일에 있어서의 차이점을 이끌어내는 논문을 발표하게 되자, 표면화되었다. 아우어의 목적은 극음악의 세계에 있어서의 바그너의 뿌리를 브루크너의 교회 오르가니스트로서의 그것과 대비시키는 것이었다. 중요한 차이점은 오케스트레이션과 관계되었다. 브루크너의 언어는 오르간주자로서의 그의 경험으로부터 나오며, 그 사운드는 바그너의 영향을 제거하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후기 교향곡에서는 바그너 튜바가 사용되기도 한다. 그런데 아우어의 논문에서 이상한 점은 자신과 협회는 반 바그너주의를 주장하거나 주장했던 것은 아니라는 주석을 있다는 점이다. 그것도 더블 스페이스로 매우 강조한 상태로 말이다. 이러한 거부의 정치적 함축의 의미는, 특히 체제 그 자체와의 충돌을 무릅썼던, 제3제국 시대의 바그너를 비판하는 음악 해설자에게는 그 의미가 확실한 것이다. 아우어 자신은 명백히 브루크너와 바그너를 분리시키기 위한 그의 노력에서 주요 흐름을 거스르기는 했지만, 그의 노력은 그가 바이로이트 음악축제가, 오페라가 연주되지 않는 날, 브루크너의 교향곡을 연주함으로써 브루크너 음악축제과 잘 통합될 것이라고 말한 바로 그 보고서에 의해 똑같은 이유로 평가절하되었다. 괴벨스는 레겐스부르크 연설에서 기회를 보고 있었다. 즉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행사의 공동 스폰서인 협회를 모욕하고 싶지도, 두 작곡가를 연결시키려는 널리 보급된 국가 사회주의 문화 관점을 훼손시키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두번 그의 연설에서 바그너를 암시하였다. 초기에 그의 연설에서 그는 브루크너의 음악을 바그너 예술의 교향악적 왜곡 이라고 본 사람들을 비판하였다. 이러한 관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지만 말이다. 그러나, 브루크너의 오르가니스트-교향곡 작곡가 패러다임 의 지지자인 아우어는 괴벨스가 다음과 같이 언급했을 때, 그것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을것이다. "브루크너의 바그너에 대한 경험은 그의 음악적 언어의 공명에 있어서 거의 혁명에 가까운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만이 그것을 우리가 진정한 브루크너의 스타일로서 인식할 수 있다. 바로 그 순간부터 앞으로, 그 교회 음악가는 동시에 거의 완전하게 후퇴하여, 그로부터 나와 특유한 교향곡 작곡가가 된다." 괴벨스가 언급한 것은, 바그너에 의해 자극된 변형(metamorphosis)이다, 즉 교회음악가로부터 교향곡 작곡가로의. 더욱 고고한 세속적 영역에로의 브루크너 격상의 이미지는 괴벨스의 1936년 이후의 국내 선전 캠페인의 필수적인 것이었다. 히틀러의 개인적 관심과 바그너와의 관련성 외에, 나치에게 있어서 브루크너 음악의 매력은 무엇이었을까? 음악에 있어서의 독일적인 것 에 대한 탐구는 제3제국 동안 음악 비평가의 마음을 사로 잡았던 문제였다. 그것은 독일 문화에서 중요한 역사와 관련된, 인종적인 숨겨진 맥락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그리고 19세기 중반에 있었던 반 멘델스존 캠페인과 그 세기 후반에 있었던 브람스-브루크너 논쟁 등에 대한 탐구였다. 그러한 이슈는 제1차대전이 끝난 후에 조금은 다른 형태로 다시 표면화되기 시작했는데, 그 당시는 국가의 상처받은 자존심이 학자들과 언론가들 사이에서 문화적 동질성을 위한 탐구를 촉진하던 때였다. 이러한 탐구들 중 초기 1차 대전 후의 내셔널리즘의 몇가지 예는 가볍고, 별로 심사숙고한 듯한 느낌이 들지는 않았지만, 그것의 대부분은 1930년에 이르러서는 매우 강력하게 이데올로기화되고, 공개적으로 인종차별적으로 되었다. 그때까지 얻은 결론은 매우 간단했다. 즉 아리안의 음악은 영웅적이고, 고상하고, 체계적이고, 숭고하며, 철학적이고, 그리고 영적이다. 반면, 비아리안의 음악은 매우 시시하고, 피상적이고, 열등하고(특히 유태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고 여겨짐), 내용없이 장식적이며, 절충주의적이고, 그리고 뿌리없는 것이었다. 프리드리히 W. 헤르조그 는 게르만 패러다임에 적합한 특별한 예를 제시하였다. 바흐의 평균율, 푸가의 기법, 베토벤의 합창교향곡과 레오노레 서곡 3번,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그리고 브루크너의 5번과 9번 교향곡 등이 그것이다. 그는 특별히 브루크너 교향곡 중에서 5번의 푸가적인 피날레와 9번 교향곡의 아다지오 악장을 예로 들었다. 헤르조그의 글은 특히 푸가를 강조하였는데, 그것은 귀족적인 독일의 역사를 갖고 있었으나, 1차 대전 후, 그것의 영웅적인 성격 을 상실하게 되었다. 푸가와 코랄, 즉 성스러운 독일 예술의 두개의 축은 황금의 20세기 동안 타락되어 왔던 것이다. 그것들은 예를 들어 쿠르크 바일의 작품, Die Dreigroschenoper 등에서 심지어 희화화되어 왔다. 바이마르 시대의 비관주의, 냉소주의 등의 인지된 배경에 반대하여, 즉 도시의 문화적 가치가 시골의 그것에 비해 널리 유포되고, 그리고 실내 교향곡이 새로운 교향악적 패러다임으로 된 그곳에서 브루크너의 음악은 분명히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나타났음에 틀림이 없다. 북 오스트리아의 교사였던 브루크너는 질풍노도의 이상적인 상징으로서 대접받았고, 푸가와 코랄은 그의 음악적 표현에 있어서 핵심이었으며, 그의 서사적인 교향악적 설계는 그 스케일에 있어서 심지어 그 당대에도 전무후무한 것으로 여겨졌다. 국가 사회주의자들에게 어필하였던 것은 바로 장엄함과 화려함, 그리고 영적인 면을 지닌 바로 이러한 그의 음악이 지닌 기념비적인 스케일이었다. 히틀러 자신은 브루크너 교향곡의 피날레를 감상하였고, 특별히 그는 1937년 뉘른베르크에서의 당 행사에 이 음악을 엔딩 음악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브루크너만이 19세기에 깊고, 중후한, 그리고 대규모 관현악단을 위한 음악을 작곡하고, 푸가를 작곡했었는가? 브람스도 역시 그의 4번 교향곡의 피날레에서 장엄하고, 중후한 푸가를 사용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브람스는 나치의 모델에 어울리기에는 너무나 연관이 없는 부르주아 빈 음악계의 주류에 속해 있었다. 그는 질풍노도의 이미지에 맞기에는 너무나도 인텔리적이었고, 도시적이었다. 그럼 대규모 관현악곡을 즐겨하던 그 당시 생존했던 위대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같은 작곡가는 나치의 선전에 어울렸을까? 잘 알려진, 불편했던 1930년대 중반의 슈트라우스와 나치의 관계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살아 있는 작곡가들을 다루는데 있어서의 어려움을 예증시켜주었다. 그들은 너무도 독립적이었고, 이기주의적이었고, 너무도 믿을 수 없었다. 심지어 내셔널리스트였던 한스 피프츠너 역시 신뢰할 수 없는, 궁극적으로는 제3제국의 정치적 목적에 비우호적이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그렇다! 오직 죽은 작곡가만이 나치의 문화부 선전 목적에 효과적으로 이용될 수 있었으며, 바로 브루크너가 이상적이었다. 그에 관한 많은 일화, 편지, 그리고 출판된 많은 인쇄물에도 불구하고, 브루크너는 항상 음악 뒤의 인간에 대해서는 그의 일대기를 숨길 수 있었기 때문에 이상적이었다. 리하르트 타루스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역사는 아마도 공허함을 싫어하며, 역사적 대중작가에게 가장 잘 어울린다." 브루크너의 대중작가는 아마도 괴벨스였고, 그의 레겐스부르크에서의 17분간의 연설은 이 오스트리아의 작곡가를 재창조하는 캠페인에 있어서의 정초를 제공하였다. 히틀러 자신은 이 날 아침, 의식에서 연설을 하지 않기로 했다. 브루크너를 재창조하는 임무는 선전 담당 장관인, 괴벨스에게 맡겨졌는데, 그는 매우 탁월하게 간결하고, 효율적인 연설로 그 임무를 훌륭히 완수하였다. 연설은 3개 부분으로 되어 있었는데, 첫번째 부분은 브루크너의 시골 출신으로서의 뿌리를 낭만적으로 언급하였고, 두번째는 그에 대한 음악 비평가들의 비난에 있어서는 그가 희생양이었음을 강조하였으며, 마지막으로는 브루크너를 그의 천재성과 영적인 면이 교회의 모든 속박으로부터 그 자신을 자유롭게 한 작곡가로서 규정하였다. 이 마지막 부분은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서, 1936년의 나치와 바티칸간의 관계의 붕괴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괴벨스는 그가 언급하는 이 작곡가의 감상적인 초상화 속에서 다양한 상투 어구를 나열한다. 그는 그의 지적인 호기심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어린아이 같음이 여전히 남아 있던 겸손한 사람이었으며, 그는 작곡가로서, 그의 초라한 사무실 에도 불구하고, 그의 독일 음악의 창조성 의 위력을 통해 성공하고, 유명하게 된 사람이었다. 괴벨스는 또한 브루크너의 촌부로서의 일대기를 강조하고, 그의 대지와의 연관성, 그의 자연과의 신비로운 친화성 , 그리고 그의 손상되지 않은 촌부로서의, 즉 히틀러와 나누어 갖고 있는 그러한 뿌리를 강조하였다. 따라서 이 시골 천재의 역설은 오직 혈통과 인종의 요소적인 힘을 이해함으로써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그가 시골 출신이라는 것 외에도, 브루크너의 검소한 사무실 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괴벨스에 의해 강조된 부분인 그의 교사로서의 그의 작품이었다. 히틀러는 그것을 인지하였고, 제3제국의 천년왕국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나치의 교화 정책의 선봉은 교육이 되어야만 생각했던 것이다. 나치 주의에 동조하는 교사들은 그들이 상승된 책임의 위치에 있음을 발견하였으나, 그들의 임무는 바이마르 시대 동안 지속되어오던 그것과는 너무도 관련이 없었다. 지적인 발달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나치의 교육자들은 아리안의 인종적 교화를 포함하는 개인의 인격을 형성해야만 했다. 교육 잡지들은 인종적·정치적 도그마를 강화하는데 봉사하였다. 실제로, Der Deutsche Erzieher (독일 교육가)의 전체적인 이슈는 브루크너에게 바쳐졌다. 그 속에는 레겐스부르크에서의 브루크너 축제 후에 얼마 되지 않아 출판된 논문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에세이의 대부분은 똑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즉 그것은 브루크너를 슈베르트와 막스 레거의 좋은 동료로 인식되게 하는 직업인 그 자신의 교사와 교사의 아들로서의 브루크너를 강조하였던 것이다. 교육가로서, 브루크너는 인종적으로 순수하였고, 북 오스트리아 토양과 그의 관계는 세대에까지 미쳤다. 사악한 빈 비평의 희생양으로서의 브루크너를 강조한 괴벨스의 연설의 두번째 부분은, 더욱 광범위한 문화적 목적을 충족하였다. 한슬리크과 그 일파들에 대한 맹렬한 비난은 괴벨스로 하여금 최근에 형성된 이데올로기적인 교의, 즉 음악 비평의 견딜 수 없음(또는 더욱 일반적으로는 예술비평)에 대해 선언하도록 하였다. 1936년의 가을에, 괴벨스는 음악, 예술, 그리고 영화 등의 저널에 널리 유포된 신조인 예술 비평(Kunstkritik) 에 반대하는 공적인 선언을 하게 이른다. 예술 비평은 이데올로기적인 배경을 따를 때에만 적절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예술에 대한 주석과 설명 만이 저널리즘에서 허용될 수 있는 형태라는 것이었다. 괴벨스는 브루크너를 이러한 새로운 신조의 형성과 관련하여 인정한다. "만약 예술에 대한 주석과 설명의 공개적인 실천이 새로운 독일 안에서의 공식적인 채널에만 의해서만 가능하도록 법에 의해 제한되어 왔다면, 우리는 또한 그를 괴롭히는 비평가들에 의해 죽을 때까지 고통받았던, 고독 속에서 투쟁했던 브루크너의 은혜를 갚았다고 믿는다." 이러한 반유대주의적인 언급은, 그것이 오늘날에는 거의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의 청중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그러한 언급은 유대인을 비생산적이고, 심지어는 기생한다고 비난하는 나치 이데올로기와 완전히 그 맥락을 같이 하고 있었다. 에두아르트 한슬리크과 막스 칼벡은 작곡할 수 없었고, 그들은 작곡을 했던 창조적이고, 정직한 예술가들에 대해서 쓰거나 어쩌면 파괴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만약 괴벨스의 연설이 브루크너, 비평과 국제적인 반유대주의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충분히 모호하다고 할지라도 프리츠 스코르체니 의 아래와 같은 언급은 그러한 모호성을 완전히 제거시키고 있다. "브루크너가 그의 예술가로서의 생활을 시작했을 때, 국제적인 반유대주의 유럽 자유주의란 탈을 쓴, 이미 독일의 정신적인 것에 대해서 투쟁을 착수하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특히 예술에 있어서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왜곡된 유대인에 대한 인식, 즉 한몫 보려 돌아다니는 떠돌이로서의 유대인의 전형적인 모습은 괴벨스에 의해 개인적으로 만들어진 프로젝트인 Der ewige Jude 라는 선전용 영화 속에서 그 후 가장 첨예하게 나타났다. 이 영화는 공장 속에서 분투하는 건강한 아리안의 노동자의 솜씨있는 장면을 조심스럽게 의심할 것도 없이 열심히 일하는 아리안에 의해 만들어진 상품을 놓고 승강이를 벌이는 게토의 천박하고 수염을 기른 유대인과 나란히 비교하고 있었다 그러나 괴벨스는 브루크너 수정주의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마지막 연설을 위해 남겨 두었다. 그것은 브루크너가 바그너와 알게 된 후, 교회 음악가로서의 역할으로부터 후퇴하고, 바그너의 영향으로부터 빠져나온 후에 어떻게 독보적인 교향곡 작곡가가 되었는지에 대한 교묘한 전기 서술이었다. 바그너의 세계와 관련을 맺은 후에 브루크너는, 예배식에 대한 의무적인 위치를 넘어서, 교향악에서의 절대적인 지위로 상승하였다. "여기서 그의 천재성은 교회에 속박된 모든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는 형식을 만든다는 의기양양한 도취감으로 가득차 있었으며 자유에 대한 한없는 열망이 그의 영혼 내부에서 울부짖었다." 물론 테데움과 시편 150편과 같은 후반부의 성스런 작품들은 무시되었는데, 이는 게르만 음악 학자들과 비평가들 모두가 결코 시도한 적이 없는 실수였다. 브루크너가 로마 가톨릭에 헌신했다는 사실이나 심지어는 그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었다는 사실조차 레겐스부르크의 연설에서는 완전히 생략되었다. 그의 종교적 신념은 간단히 "신에 대한 믿음"(Gottglaubig)이라고 묘사되었는데, 이는 나치의 빈틈없는 비기독교적 사상을 담은 정치적인 작품이나 다름없었다. 신앙심(Gottglaubigkeit)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1933년부터 36년까지 교회와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에 간략하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36년에는 단지 브루크너의 기념일을 정하고 예술 비평 금지령을 내렸을 뿐 아니라, 한편으로는 중대한 사안을 담고 있었던 1936년 7월의 회칙과, 그로부터 겨우 4개월 후에 공식적이면서 대안적인 종교 고백으로서의 Gottglaubig 의 성립에 의해 더욱 증폭된 국가 사회주의자들과 로마 가톨릭 간의 관계가 심각하게 냉각될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치와 교회의 관계는 히틀러의 공적으로 문제를 피하려고 한 히틀러 개인의 욕망에 의해 더욱 복잡하고 거대한 주제가 되었다. 심지어는 나의 투쟁 (Mein Kampf)은 이 이슈를 더욱 피해갔다. 그러나 히틀러의 반 교권적인 신념은 내부에서는 전혀 비밀스러운 것이 아니었고, 종교의 문제는 총통과의 협상 과정에서 다시금 문제화된 것이었다. 헤르만 라우스칭(Hermann Rausching) 은 히틀러가 "게르만의 기독교는 하나의 왜곡이며, 게르만인이 되거나 아니면 기독교인이어야 한다. 둘 다 될 수는 없다. 우리는 그저 마음 속에서 신을 믿고 느끼는 자유로운 인간들을 필요로 한다" 고 개인적으로 언급했다고 밝혔다. 이러한 언급이 내포하고 있는 것은, 불확실한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은 무익할 뿐 아니라, 나약함의 표시라는 점이라는것이었다. 조직화된 종교, 특히 기독교에 대한 이러한 적개심은 고대 그리스가 현대 독일의 중요한 모델이라는 관점과 19세기 중반부터 후반에 이르기까지 나타난, 특히 니체와 바그너를 포함하는 독일 예술가와 지식인들에 의해 지지된 확신이었다. 히틀러는 조직화된 종교에 대해 초기에는 유화정책을 사용하였고, 그는 황제의 퇴위 직후에, 정치적 방향이 없었던 개신교도들에 관해서는 일찍이 성공적이었다. 이 독일 개신교도들에게 있어 반유대주의는 그다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반유대주의는 그다지 크게 가톨릭 교회를 방해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공식적인 관계에 심각한 방해물은 나치의 소문에 들리는 공산주의적 성격이었다. 게다가 바티칸은 볼셰비즘을 히틀러의 1933년 전체주의의 원형이 되었던 그들의 무솔리니와의 1929년의 라테란 협정에 의해 예시된 것과 같은 전체주의보다 더욱 중대한 국제적 위협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독일의 11월 혁명 이후에 교황청은 바이마르 공화국과의 공식적인 협정 조인을 막으려고 노력했으나, 그들은 히틀러를 이길 수 없었다. 1933년의 이 국가적 협정은 로마에 대한 많은 문제들을 다음과 같이 명확히 하였다. 교회에 대한 재정적 지원, 성직자의 법적 지위 보장, 그리고 가톨릭교회의 일이나 바티칸에 대한 직접 연관 등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나치의 서약, 그러나 높은 세금이 부과될 예정이었다. 왜냐하면 교회는 모든 수준에서 국가 정치의 하나로서 남아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곧 나치가 가톨릭의 일에 대해 방관하지 않을 것임이 명백해졌다. 그들은 비공식적인 협박을 위한 능숙한 전략을 세웠고 그것에 의해 설교는 감시받고, 신부들은 괴롭힘을 당했으며, 물론 가톨릭교회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선전활동도 나치의 청소년 조직을 통해 이루어졌다. 1936년까지 독일과 바티칸 사이의 관계는 점차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 정점은, 젊은이들에게 반유대주의와 반기독교주의를 정치적으로 주입하고 시민의 자유를 침범했을 뿐 아니라 총통(Fuehrer)을 신격화한 나치를 비난하는 교황의 회칙(Mit brenner Sorge)이었다. 국가 사회주의자들은 즉각적으로 교회에 대한 정책, 특별히 바티칸에 대한 정책이 실패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치즘을 하나의 종교 그 자체로 인식하고, Gottglaubig를 공식적인 용어로 만들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 용어는 "게르만의 본성에 맞는 종족적이고 적절한 신앙" 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이교도적인 것도 아닌 이러한 비 기독교적인 지향은 교회를 떠난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이 여전히 종교적이라고 믿게끔 만들었으나, 그것은 또한 그들의 신앙을 버린 유대인들이 독일인에게 포함될 수는 없다는 것을 보증해 주는 것이었다. 한 개인의 교회 밖에서의 영적인 본성을 유지하는 것의 중요성은 물질적이고 무신론적인 볼셰비즘에 대한 반대가 나치 교의의 불변적인 요소라는 점에서 필수적인 것이었다. 요컨대 제3제국은 그들이 믿는 모든 것, 즉 국가 사회주의자들의 혁명 은 정치적이라기 보다는 훨씬 더 정신적인 것이라는 그 무언가를 공식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독일 예술은 점차 성스런 예술이 되어 갔으며, 음악은 나치의 가장 성스런 현시였다. 성스런 예술로서의 음악에 대한 관점이 나치가 만들어낸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19세기 후반 독일 전반에 퍼져 있었던 의식이었고, 작곡가들과 철학가들에 의해서 동시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바이마르 시대의 일각에서는 이러한 철학에 의문을 제기했지만, 성스런 예술로서의 음악은 1903년대에 불안한 정치적 소용돌이와 함께 곧 소생되었다. 1937년 레겐스부르크 기념식은 브루크너를 성 발할라(Valhalla) 사원의 하나의 신으로 지정했다. 그의 음악은 성스런 언어와 나치즘의 신화적 종교가 될 것이었다. 일요일 아침의 브루크너 기념식과 3제국의 새로운 종교 전략간의 연결은 바로 그날 오후 군중의 대 집회를 통해 더욱 공고해졌다. 레겐스부르크에 모인 약 200,000명의 사람들에게 하는 연설을 통해서 히틀러는 처음으로 깊은 믿음(Gottglaubigkeit)이라는 용어를 공식 사용했다. "나는 결코 그 누구도 이 민족을 다시 흩어지게 만들거나 종교적 입장 차이로 인한 싸움으로 우리를 어렵게 만들도록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앞으로 대대로 우리 역사 속에서 나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치는 늘 우리 마음속에 각인되어, 우리로 하여금 우리 민족과 영광, 자유, 우리의 공동체를 위한 의무를 실천하도록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에 대한 깊은 믿음(Gottglaubigkeit)을 가지고 미래로 정진해 갈 것입니다. 신이 우리를 돕지 않았다면, 우리가 지금껏 이룬 모든 것들이 어떻게 가능했겠습니까?" 독실한 브루크너는 그 신성한 신 의 메신저가 될 것이었다. 그의 교향곡, 특히 슈베르트의 "천상의 범위(Heavenly Length)"를 능가하는 영혼적인 느릿한 진행은 하나의 종교적인 체험으로 간주될 만했고, 혈연과 지연을 나눈 이들만이 완전히 그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1940년대 초반, 빈의 음악축제(Dunkelkonzerte)에서 가장 잘 나타났다. 그리고 그것은 어두운 빈의 콘서트하우스가 교회에 참석하는 것과 같은 효력을 지닌, 브루크너의 음악을 듣는 성스런 곳으로 바뀌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다른 작곡가들도 그런 프로그램에 참가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이라이트는 언제나 브루크너의 교향곡이었다. 그러한 한 프로그램 안내서의 사본은 이러한 강력한 종교적인 의미를 잘 보여준다. 중간휴식 전에는 모짜르트의 레지나 챌리가, 직후에는 브루크너가 유일하게 신 자체에게 헌정했던 제9번 교향곡이 울려 퍼졌다. 그러나 작곡가는 국가 사회주의자들이 그를 신의 메신저 로 만들기 위해서는 기독교로부터 분리되어야만 했었을 것이다. 교회 음악가로서의 브루크너는 완전히 무시되었던 것이다. 의심할 바 없이 레겐스부르크에서의 기념식과 동시에, 1937년의 한 기사의 작성자는 브루크너의 가톨릭주의에 대해 비난을 하려는 시도를 했다. 피터 라베(Peter Raabe)는 물질 세계에 대한 브루크너의 "초연함(deafness)"을 강조했다. "신성함은 마음의 순수함으로부터 나온다." 라고 선언하면서 그는 "왜냐하면 그들은 신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덧붙였다. 라베는 "신과 대화하는" 교향곡 작곡자를 묘사하면서, 그러나 그가 중요하지도 않은 교회 음악을 쓰고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모순은 신앙심(Gottglaubigkeit)의 맥락 이외에서 인식되지 않을 수 없다. 베르너 코르테(Werner Korte)는 한슬르크(Hanslick)의 맹렬한 비난에 대한 근거로 브루크너의 가톨릭적인 뿌리를 인용했으나, 브루크너를 "가톨릭 정신의 순교자" 로 보거나 그의 음악을 "기독교를 위한 사죄 행위"로서 인식하는데에는 반대를 했다. 라인홀드 짐머만(Reinhold Zimmermann) 은 실질적인 문제에 접근했는데, 즉 "가톨릭적인 것"과 "아리안"적인 것은 모순된 개념이라는 것이었다. "브루크너를 완전히, 심지어는 원천적으로 가톨릭적이라고 보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그의 인성과 업적을 평가하는데 있어 의심할 바 없이 지배적인 위치에 있어야 하는 것은 바로 그의 작품이나 인생의 인종 지향적인 인식이다." 짐머만의 생각은 모든 사람은 게르만인이던가, 아니면 기독교인이라는, 히틀러가 헤르만 라우스칭(Hermann Rausching)에게 보내는 지극히 개인적인 논평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다. 겉으로는 괴벨스의 레겐스부르크 연설은 장엄하고 의식적인 그 순간을 오스트리아 합병의 필연성과 연관시키면서 축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보아온 대로, 그의 전략은 이를 하나의 교조적인 선전 도구로 이용하려는 보다 광범위한 목표를 달성하는데 있었다. 1940년대의 성 플로리안에 대한 잘 짜여진 히틀러의 계획은 좀더 나아가 전쟁을 통해 어떻게 브루크너를 나치의 문화적 우상으로 남길 것인지를 묘사하고 있다. 비록 브루크너의 그러한 상승이 결코 완전히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린츠 제국 브루크너 오케스트라 (Linzer Reichs Bruckner Orchestra)와 브루크너 합창단은 1942년 독일 라디오와 인연을 맺었고 일반 공연과 방송을 통해 1945년 봄까지 공연을 계속했다. 브루크너 교향곡(음악)에 대한 나치의 전용은 전후에 어떤 결과를 가져 왔을까? 아니면 이것은 어떻게 남용된 것일까? 혹자는 아마도 특히 원작이 없거나 덜 실용적인 음악이 시대를 불문하고 그러한 남용에 저항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음악은 그저 자전적인 수정주의의 복잡한 그물 속의 한 가닥 줄이었고, 그 안에서 브루크너의 인생은 급진적인 정책들을 지지하고, Kunskritik에 대한 공격을 유효하게 만들었으며, 또한 정치적 신화를 위해 종교적 우상을 만드는데 다시 쓰였다. 동시대의 독일 관객들이 나치의 선전을 믿었든 안 믿었든 간에, 또 그들이 아다지오에선 신과 소통하고 푸가의 피날레에서는 튜턴족(게르만)의 영웅주의를 느끼게 하는 전원적인 스케르초에서 그들 공동의 나라(영토)를 느꼈던 안 느꼈는지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또 다른 중요하고 복잡한 문제이다. 경우가 어떠하든 간에 나치의 브루크너 캠페인에 대한 전후의 즉각적인 국내의 영향은 오래 가지 않은 것 같았다. 린츠 브루크너 오케스트라는 연합국 지배하에 있던 1945년 5월에 필하모닉 브로드캐스팅 오케스트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나 그것의 브루크너에 대한 지향은 겨우 한달 후 눈깜짝할 새에 그 이름을 브루크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로 바꾸게 했다. 틀림없이 이 작고 단독적인 사건은 전후 브루크너의 평판에 좋은 영향을 주었다. 바그너와 달리 브루크너는 일반적으로 직접적인 나치와의 과거 문제 때문에 큰 오명을 얻지는 않았다. 그의 작품은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 별다른 외부 저항없이 레퍼토리로 이용되었고, 이스라엘에서도 그의 음악은 보이콧되지 않았다. 그러나 추축국 외에서의 브루크너에 대한 대접은 그다지 단순하지 않았다. 유럽의 많은 나라에서, 특히 독일에 점령당했던 유럽지역에서 특히 1940년에서 50년대에는 브루크너의 음악이 필연적으로 독일 점령을 상기시킬 만하였다. 전후 미국에서는 브루크너의 음악이 울려 퍼질 수 없었다. 그의 음악은 나치의 문화적 캠페인에 대해서도 역시 모르고 있던 대부분의 콘서트 관객들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았었다. 사실 40년대 후반에는 미국에서 브루크너 르네상스의 일말의 징조가 보이는 듯도 하였다. 그것은 1948년에 미국 브루크너 협회가 협회지 코드 앤 디스타드(Chord and Dischord)를 재발간했을 때를 전후해서였다. 그 회지는 발간 공백에도 불구하고 1969년까지 잘 운영되었으며, 그 때에는 더는 브루크너의 공연이 신기한 것이 아니었다. 오이겐 요훔(Eugen Jochum)과 후에는 베르나르트 하이팅크(Bernard Haitink),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 클라우스 텐슈테트(Klaus Tennstedt), 그리고 기타 여러 음악가가 브루크너 교향곡을 음반화하는데 열정을 보였다. 좀 더 최근에는 CD의 발달과 함께, 그런 작업은 그의 제2번, 제3번, 제4번, 제8번 교향곡의 오리지날 버전과 같은 진품들도 만들어 냈다. 브루크너에 관한 기사들은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된 시기에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잡지에서도 계속 나타났다. 물론 나치의 캠페인이 벌어지던 시기의 규모와는 비교가 안되었다. 전후의 학문은 보다 실증적인 논조를 띠었다. 인종과 민족에 대한 연구는 사설이나 분석적인 문제들에서나 볼 수 있었다. 독일 학자들은 열렬한 게르만 민족주의자도, 반유대주의자도 아니었다고 판명된 브루크너에 대해 사과를 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또한 그 잡지들과 편집장들은 나치 지배 기간 동안 바로 그들 잡지에 게재된, 인종과 종교와 브루크너에 관련된 왜곡들에 대해서 억지로 부인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도 않았다. 국가 사회주의자들의 문제는 대부분 언급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그것은 과거의 회상보다는 재건이 중요하다는 노판트(Nullpunkt) 정책의 영향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침묵은 전후를 넘는 기간까지 확장되었는데, 레오폴트 노바크(Leopold Nowak)의 브루크너 전기인 뉴 그로브(New Grove)는 그 좋은 예가 된다. 나치의 그 엄청난 이데올로기적이고 선동적인 기사들은 노바크의 참고 자료에서 제외되었다. 그러한 그가 이용한 얼마 되지 않는 나치의 케케묵은 저작들은 대부분 그 어떤 정치적인 내용도 담고 있지 않은 것이었다. 2차대전 종전 이듬해는 브루크너 사망 50주기가 되는 해였고, 린츠에서는 국제 브루크너 협회의 기념 행사가 있었다. 1946년 7월 27일에는 명망 있는 협회의 의장이었던 막스 아우어(Max Auer)가 지난 12년간의 침묵에 대해서 주목할 만한 연설을 했다. 그의 연설은 다음과 같은 문구로 시작했다. "우리는 안톤 브루크너 사망 50주기에 그를 기리기 위해 이곳에 모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 보다는 그의 삶과 새로운 부활을 축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다음과 같은 선언 아래에서 뭉칠 것입니다. 왕은 죽었지만, 그 왕은 우리 곁에서 영원히 살 것입니다(The king is dead, long live the king). 브루크너는 왕입니다. 절대 음악의 왕입니다." 비록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히틀러와 바그너의 환영(幻影)은 아우어의 말들에 나타났다. 표면적으로 아우어는 브루크너의 죽음을 기리고 있었으며, 다시 브루크너를 연구하고 대접하는 새로운 시대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또 다른 유령들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의 왕이 죽고, 즉 총통의 죽음에 잇따라서,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브루크너는 나치 선동의 잿더미로부터 부활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절대음악의 왕"은 리하르트 바그너와의 음악적, 정치적 연관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이었다. 아우어의 숨겨진 또 다른 언급은 1937년, 그가 총통에게 브루크너 메달을 수여했던 그 해에 있었다. 그 언급은 겨우 1년 전에 그가 발표한 내용을 다시 되풀이했던 것일까? 그 때 괼러리히-아우어(Gollerich-Auer) 자서전의 최종판의 서문에서 그는 바이마르 시대의 물질주의(즉물주의)에 대한 공격을 서서히 감행하기 시작했다. 그 때는 바로 "예술적인 볼셰비즘이 극단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던" 때였고, 브루크너의 "신을 신성시하는 예술"은 (총통을) 보다 나은 세상 1936년의 세계로 이끄는데 기여했다. 10년 뒤에 아우어의 린츠 연설은 브루크너의 오스트리아 혈통과, 그의 국제적인 영향력과 나치 교리를 분명히 부인하는 그의 주장 모두를 강조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연설이 성공적으로 아우어 자신의 이전 발언들을 상쇄시켰던 것일까? 그가 과거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이도 모호하게 새로운 시대를 선언하기에 충분했던 것일까? 분명히 그것은 아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브루크너 협회를 재건하려고 애쓰고 있을 때 더 많은 공연을 위해 또 더 많은 관객 층의 확보를 위해서 누가 과거의 상처들을 다시 꺼내고 싶어했겠는가? 브루크너와 독일의 정치적 상황은 결코 전쟁 이전이나 전쟁 중이나, 혹은 전후에도 코드 앤 디스타드지에 언급된 적이 없다는 데에는 의견이 분분하다. 물론 미국에서 브루크너는 미국내의 정치적 쟁점이 되지 않았다. 그는 국가 사회주의자로서의 활동 때문이 아니라 그의 작곡 스타일이 그 당시 미국 학계에 만연되어 있던 논리나 균형, 규모를 중시하는 브람스적인 패러다임에서는 낯선 것이었기 때문에 주류에서 벗어났다. 그의 음악은 오히려 최근에 콘서트의 레퍼토리나 음반 목록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브루크너라는 사람과 그의 작품들은 여전히 미국의 음악적 담론의 바깥에 자리하고 있다. 사실 현재의 브루크너 작품집은 그저 그러한 경향에 약간의 동요를 불러 일으킬 뿐이다. 그리고 비록 사설적, 역사적, 문화적, 그리고 분석적 문제와 같은 중요한 이슈들이 여기서 처음으로 혹은 새로운 관점으로 논의되었다 할지라도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브루크너에 대한 이미지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얼마나 나치의 선전에 영향을 많이 받았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연구해야 할 많은 것들이 남아 있다. 예를 들어 전후 브루크너에 대한 중요한 해석(느린 템포들이나 풍부한 하모니를 그 예로 들 수 있다)이 나치의 종교적 우상으로서의 브루크너의 성향을 무의식적으로 현대의 교향곡 무대나 녹음 스튜디오에 옮겨다 놓을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가 오늘날 "솔직함", "순수성", "유기체" 등과 같은 말들이 나치 시대의 브루크너에 대한 담론들과 함께 명백하게 정치적으로 기호화되었다는 사실을 무시한 채 브루크너를 분석하고 수정할 수 있을까? 분명히 그러한 질문들은 이 에세이가 다룬 영역 외에서도 광범위하게 논의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질문들은 궁극적으로는 해명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브루크너 연구는 과거사실에 대한, 특히 제3제국 시대 동안의 브루크너에 대한 어두운 평가를 외면한 채로는 절대 앞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아주 자세한 브루크너 교향곡 녹음 목록 분류:1824년 태어남 분류:1896년 죽음 분류:오스트리아의 작곡가 분류:오스트리아의 음악 이론가 분류:오스트리아의 로마 가톨릭교도 분류:낭만주의 작곡가
프리드리히 니체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 1844년 10월 15일 ~ 1900년 8월 25일)는 독일의 문헌학자이자 철학자이다. 서구의 오랜 전통을 깨고 새로운 가치를 세우고자 했기 때문에 망치를 든 철학자 라는 별명이 있다. 그는 그리스도교 도덕과 합리주의의 기원을 밝히는 작업에 깊이 매진하였고, 이성적인 것들은 실제로는 비이성과 광기로부터 기원했다고 주장했다. 관념론과 기독교는, 세계를 두 개로 구분짓는다. 이를테면 기독교는 이승 이외에도 하늘나라가 있다고 가르친다. 또한 플라톤은 세계를 현상계와 이데아계로 이분한다. 니체는 이러한 구분에 반대하며 대지에서의 삶을 사랑할 것 을 주창하였다. 또한 현실에서의 삶을 비방하는 자들을 가리켜 퇴락한 인간이라 부르며 비판하였다. 이렇듯, 영원한 세계 나 절대적 가치 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니체는 관념론적 형이상학에 반대한다. 즉,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왕국 혹은 칸트가 말하는 목적의 왕국 등에 반대하는 것인데, 특이하게도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기독교의 아류로 보고 비판하기도 했다. 니체는 전체주의, 민족주의, 국가주의, 반유대주의 등을 비판했다. 그러나 인종주의자였던 동생이 니체의 책을 조작하여, 그의 사상이 파시스트들에게 왜곡되기도 했다. 진리의 가치를 묻는 그의 질문은 해석상의 문제를 제기했다. 오른쪽 니체는 1844년 10월 15일 예전의 프로이센 (독일)의 작센 지방의 작은 마을인 뢰켄(Röcken)에서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프러시아의 왕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에게서 빌려온 것으로, 빌헬름 4세는 니체가 태어나던 날에 나이가 49세를 넘어있었다(니체는 훗날 그의 이름에서 가운데에 있던 "빌헬름"을 빼 버렸다.) 니체의 아버지인 카를 빌헬름 루트비히 니체(1813-1849)는 루터교회 목사이자 전직 교사이었고, 프란치스카 욀러(1826~1897)와 1843년에 결혼하였다. 그의 여동생인 엘리자베스 니체는 1846년에 태어났고, 뒤를 이어 남동생인 루드비히 요셉이 1848년에 태어났다. 니체의 아버지는 뇌 질환으로 1849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어린 남동생은 1850년에 죽었다. 그 후 가족은 나움부르크로 이사를 갔고, 그곳에서 니체의 할머니와 어머니 프란치스카, 아버지의 결혼하지 않은 두 자매, 두 하녀들과 함께 살며 어린시절을 보냈다. 니체의 할머니가 1856년에 세상을 하직하자, 가족은 그들의 집으로 이사했다. 1851년 니체는 소년학교에 출석했고 그 다음에는 그가 구스타브 크루크와 빌헬름 핀터와 친구가 되었던 곳인 사립학교에 다녔다. 두 친구는 모두 명망있는 가문 출신이었다. 1854년 그는 나움부르크에 있는 돔 김나지움에 다니기 시작했으나, 그의 특출한 재능은 음악과 언어에서 발휘되기 시작했다. 그 후 국제적으로 유명한 슐포르타에 동료들처럼 입학했으며, 그곳에서 그는 그의 학업을 1858년부터 1864년까지 계속했다. 그는 파울 도이쎈, 칼 폰 게르도르프와 친구가 되었다. 또한 그는 시를 짓고 음악을 작곡하는 데 시간을 들였다. 슐포르타에서 니체는 특히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 대해 배웠다. 그 동안에 그는 살면서 처음으로, 조그만 시골 마을의 기독교적인 환경에서 이루어지는 가족의 삶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었다. 1864년 졸업을 한 후에 니체는 신학과 고대 철학을 본 대학에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짧은 기간 동안, 그는 도이쎈과 함께 대학생 학우회(Burschenschaft Frankonia)의 구성원이 되었다. 한 학기 후에 어머니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학 공부를 중단했고, 자신의 신앙도 상실하였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1835~1836년에 다비드 슈트라우스가 쓴 《예수의 생애》( Das Leben Jesus )란 책에서 그가 담당한 부분을 읽어나가던 중에, 그 책의 내용이 젊은 니체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을 것이다. 그 후 니체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리츨 교수 밑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데 집중하였고, 이듬해에 그는 리츨을 따라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옮겼다. 거기서 그는 에르빈 로데와 친구가 되었다. 이 무렵 니체의 첫 철학 저서의 출판이 곧 이루어지게 된다. 1865년에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글들을 알게 되었고, 그는 1866년 프리드리히 알베르트 랑게의 책, 《유물론의 역사와 그 현재적 의미에 대한 비판》( Geschichte des Materialismus und Kritik seiner Bedeutung in der Gegenwart )을 읽었다. 그는 두 사람의 저서 모두와 자극적인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그들의 저서는 니체가 그의 지평을, 철학을 넘어서는 영역까지 확장하도록 격려했으며, 그의 학업을 지속하게 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1867년 니체는 군에 자원하여 1867년 10월 군에 입대하였다. 그는 나움부르크에서 프로이센 포병으로 한 해 동안 복무하였다. 그러나 1868년 3월에 그는 말을 타다가 사고를 당해서, 가슴을 심하게 다쳤고 후송되었으나 군복무를 지속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니체는 장기간의 병가를 받고 그의 관심을 다시 그의 학업에 둘 수 있었고, 1868년 10월 라이프치히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라이프치히 대학 시절에 우연히 책방에서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접하였고 이에 깊이 감동하였다. 고전문학자 에르빈 로데를 만나 친구가 되었다. 학업을 끝낸 후 그 다음 해에 바그너와 처음으로 만났다. 1869년 모습 24살에 리츨의 도움으로, 스위스 바젤 대학교의 고전문헌학 교수에 취임하였다. 바젤 대학교에 들어선 이후, 그는 프로이센의 국적을 포기했으며, 죽는 순간까지도 공식적인 시민권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1870년에서 1871년까지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군의관으로 활동했는데, 카우프만은 그가 군의관 활동 당시 매독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어떤 이들은 니체가 미친 까닭이 매독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바젤 대학교로 돌아오면서 그는 독일제국의 성립과 비스마르크의 등장을 보았다. 1871년 니체와 친구들-에르빈 로데, 칼 폰 게르도르프, 니체 그는 대학교에서 취임 강의로 “호메로스와 고전문헌학”(Homer und die klassische Philologie) 을 연설했다. 그는 신학과 교수인 프란츠 오버베크와 어울렸으며, 그와 평생동안 친구로 지냈다. 당시 러시아 철학자였던 아프리칸 스피르, 니체가 자주 강의를 들었던 동료 역사학자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등도 니체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 그는 여러 강연회에 연사로 다니며 강연활동을 하기도 했다. 니체는 이미 1868년부터 음악가 리하르트 바그너와 만나기 시작했었는데, 그의 부인과 그에게 매우 감탄하곤 했다. 또한 바젤에 있을 당시 바그너는 니체와 매우 긴밀한 관계에 있었으며, 바이로이트 축제 극장에 초대하기도 했다. 이후 바그너의 뛰어난 제자의 한사람으로도 인정받았지만, 바그너가 점차 기독교화되고 〈파르지팔 Parsifal〉에서처럼 기독교적인 도덕주의 모티브를 많이 이용하고, 국수주의와 반유대주의에 빠지자 그와 결별했다. 1869년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시험과 논문없이 출판된 저술들만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니체는 1872년에 《비극의 탄생》을 썼다. 하지만 리츨과 같은 니체의 동료들은 이 책에 대해 별로 열정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873년과 1876년 사이에는 《반시대적 고찰》을 썼는데, 총 4편으로 《다비드 슈트라우스, 고백자와 저술가》, 《삶에 대한 역사의 공과》,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바이로이트의 리하르트 바그너》로 나뉜다. 네 편의 에세이는 쇼펜하우어와 바그너가 주장하는 대로, 독일 문화의 발전 노선에 도전하는 문화 비평의 방향을 공유하고 있다. 1873년이 시작할 무렵, 니체는 또한 고대 그리스 비극에 나타난 철학 같이 사후에 출간된 기록을 점차로 모으고 있었다. 이 시기 동안 바그너와 그의 동료들 사이에서, 니체는 말비다 폰 메이센부르크와 한스 폰 뷔로우를 만났고, 1876년에 그에게 영향을 주어 그의 초기 저작에 나타난 비관주의를 해소시킨, 파울 리와 우정을 나누었다. 그러나 그는 1876년에 바이로이트 축제에서 진부한 공연과 대중의 천박함에 혐오감을 느끼고 실망했기 때문에, 결국에는 바그너와 거리를 두게 되었다. 1878년 니체는 그 특유의 경구가 가득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출판하였다. 또한 니체는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의 철학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즈음에 혼인을 하려 애쓰기도 했다. 1879년, 건강이 더욱 악화되면서 니체는 바젤 대학교의 교수직을 사임했다. 사실 그는 어릴 적부터 병치레가 잦았는데, 가끔 두통이나 복통을 겪기도 했다. 1868년에 낙마사고와, 1870년에 걸린 병 때문에 니체의 건강이 더욱 악화된 것으로 보이며, 실제 바젤 대학교에서 휴가를 많이 갖기도 했다. 1879년 이후 건강상의 악화와 자유로운 철학의 정립을 위해 35세에 바젤대학교를 퇴직하고,조용히 산 속으로 들어가 요양과 집필에 전념했다. 35세에 바젤 대학교에서 퇴직한 이후 그는 강연도 그만두고, 병든 몸이 적응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유럽 각지 를 돌아다니면서 집필생활에 몰두하였다. 1881년, 프랑스가 튀니지를 점령했을 때, 튀니지로 여행하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이내 그 계획을 접고 만다.(건강에 대한 문제로 여행을 취소한 것으로 보인다.) 1889년 1월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졸도한 후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생애의 마지막 10년을 보냈다. 니체는 정신병 발작을 일으킨 후 완전히 정신 상실자가 되었고, 이때부터 어머니와 함께 예나에서 거주했다. 어머니가 죽자 누이동생 엘리자베트가 니체를 바이마르로 옮겼고, 니체는 1900년 8월 25일 바이마르에서 죽었다. 니체가 죽자 엘리자베트는 고향 뢰켄의 아버지 묘 옆에 니체를 안장했다. 니체는 말년에 정신적인 붕괴를 겪고 10년 동안 제정신을 회복하지 못한 채 살다가 죽었다. 그의 정신 착란이 매독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는 뜬소문에 불과하다. 니체가 매독에 걸렸다는 설을 반박하는 문서들은 다음과 같다. 《니체의 정신병 세기의 오진인가?》 - 저자; 정신 분석학자 Eva Cybulska 《니체가 매독에 걸렸다는 도시전설》- 저자; 신경과학자 Richard SchainGreenwood , Greenwood Press 2001 (Contributions in Medical Studies, vol. 46) 《니체가 치매에 걸린 원인은 무엇인가?》 - 저자; 임상 심리학자 Leonard Sax 텔레그래프지의 2003년 기사에 따르면 니체 정신착란의 원인은 악성 뇌종양 때문이다. paul-ree lou-von-salome188.jpg|200px|섬네일|오른쪽|프리드리히 니체 (맨 오른쪽) 맨 왼쪽의 여자는 살로메 그는 기존의 도덕적 세계관이 삶을 옥죄고 있다고 인식했다. 그에 기독교와 불교를 포함한 종래의 도덕적 사상들을 데카당(퇴폐적인 것)이라 칭하며 비판한다. 플라톤 연구자이기도 한 니체는, 기독교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린다. 신의 죽음이란, 인간이 만들어낸 최고가치의 상실을 의미한다. 신의 죽음 이란, 종교 혹은 이상주의 등의 신앙이 상실된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달리말해, "신의 죽음이란 허무주의(니힐리즘)의 도래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최고가치의 상실과 허무주의의 출현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낳는다. "삶의 최고가치가 상실된 상태에서 개인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안티크리스트》에서, 니체는 기독교와 불교를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그 책에서 니체는 일견 불교에 대해 호평을 내리지만 이내 기독교와 불교 양자를 퇴폐적인(데카당트) 종교로 규정짓는다. 그에 따르면 기독교는 도덕에서의 노예반란이며, 불교는 삶에 지친 노인들을 위한 종교이다. 《선악의 저편》에서, 니체는 자신을 철학자 디오니소스의 제자 로 소개한다. 여기서 니체는 디오니소스 를 그리스 비극 에 대한 상징으로 활용하고 있다. 진화론에 대한 자신의 해석 탓인지, 니체는 성장 이라는 개념을 좋아했는데, 이는 그리스 비극 정신에 대한 그의 이해에서도 드러난다. 니체에게서 그리스 비극 정신이란, 니힐리즘을 근본으로 하는 고통을 힘의지로 승화시키는 태도이다. 니체는 탈아의 도덕을 뛰어넘는 인간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를 위버멘쉬라 부를 수 있다. 위버멘쉬는 또한 종래의 안일한 인간을 뛰어넘은 인간유형이다. 이렇게 보면 위버멘쉬는 종래의 성(聖)과 속(俗)을 뛰어넘는 인간이다. 니체는 《유고》에서 허무주의(Nihilismus)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니체가 말하는 허무주의는 두 가지 뜻이 있다. 능동적 허무주의 (Der aktive Nihilismus) 수동적 허무주의 (Der passive Nihilismus) 수동적 허무주의 은 약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서 쇠퇴한 니힐의 현실을 직시할 것을 회피하고 찰나적인 향락주의나 무관심한 이기주의 등 퇴폐적 삶에 의해 공허감을 채워보려는 것이다. 여기서 허무주의는 잠재적인 형태로 예감될 뿐이며 그 참된 극복은 무한히 연기된다. 이에 대해 소모적인 현실 도피의 삶을 거부하고 니힐의 병근(病根) 한가운데로 적극 개입함으로써 허무의 현실을 초극하려는 것이 능동적 허무주의 이다. 이러한 능동적 허무주의의 입장에서 모든 현존하는 가치나 질서가 뽐내는 절대적 권위를 파괴해 갈 때, 거기에 새로운 가치를 자유로이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싹튼다. 우상(偶像)의 가면을 벗기는 이기(利器)로서 무(無)를 내세움으로써 무를 단순한 생의 소모 원리(消耗原理)로부터 생의 적극적인 창조 원리로 전환시켜 나가는 능동적 허무주의 야말로 허무주의의 지배 밑에 있는 현대를 살아가는 당연한 생활 방식이라고 니체는 말한다. 위버멘쉬는 어원적으로 뛰어넘는(Über) 인간(mensch) 을 뜻한다. 다시 말해 극복하는 인간이며, 극복함으로써 창조하는 인간이다. 위버멘쉬는 근대적 가치와 도덕 및 신앙을 뛰어넘는 인간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종래의 규범들은 인간에게 해로운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도덕적인 측면에서, 위버멘쉬는 탈아의 도덕을 극복해내는 인간이다. 이를테면 극기복례 혹은 순교자 개념을 극복해내는 인간이며, 그럼으로서 창조해내는 인간이다. 위버멘쉬 개념은 풍습의 도덕 과 대립될 뿐 아니라, 인간말종(Der letzte Mensch) 과도 대립되는 개념이다. 인간말종(Der letzte Mensch) 란 현실에 안주하는 인간형 혹은 권력욕에 물든 인간을 가리킨다. 위버멘쉬는 초월적,신적인 힘을 갖춘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종래의 탈아적 가치를 극복하고 새 것을 생성시키는 인간을 의미한다. 니체 철학에서 힘에의 의지란 자기 보존 본능과 대립되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 쇼펜하우어가 주창한 생에의 의지라는 개념과 대립되는 개념. 찰스 다윈이 주장한 생존 경쟁이라는 개념과도 대립된다. 니체는 생존하는 것 이 삶의 목적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니체 철학에서 도덕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잘 알려진 것은 노예도덕 과 주인도덕 의 분류이다. 비교적 덜 알려진 명명법들 풍습의 도덕, 탈아의 도덕, 자기희생의 도덕, 연민의 도덕 니체의 도덕비평은 사회학적/정치학적 측면보다는 주로 심리학적/가치론적 측면에서 진행된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도덕적 개념의 족보를 다루며, 도덕과 그 부대개념들이 역사 안에서 어떻게 형성되어 온 것인지를 기술한다. 주인도덕은 자기긍정에서 비롯된 가치평가를 반영한다. 노예도덕은 억압받는 인간의 원념(怨念)에서 발원한다. 즉 노예도덕은 원한도덕이다. 주인도덕은 좋음과 나쁨을 가려 물으며 이를 가치평가의 잣대로 삼는다. 노예도덕은 형이상학적 의미의 선과 악을 가치평가의 기준으로 상정한다. 다시 말해, 주인도덕은 개인의 호오(好惡)를 기준으로 하고, 노예도덕은 사회적 선악(善惡)을 기준으로 한다. 주인에게 좋음 이란, 자신과 타자를 고양시키는 것이다. 주인에게 나쁨 이란, 나약하게 만드는 것이다. 노예도덕은 주인도덕과 대립된다. 주인은 자신을 기준으로 선 을 상정하지만, 노예는 먼저 악 을 떠올린다. 노예도덕에서는 주인에게 복수하지 못하는 무력감 이, 자발적 용서 로 둔갑한다. 노예도덕에서는 노예가 느끼는 무력감이 미덕으로 위장한다. 주인의 미덕이 약자의 눈에는 악덕으로 비쳐진다. 도덕에 대한 니체의 입장을 알기 위해서는, 《도덕의 계보》 이외에도 니체가 쓴 《아침놀》이나 플라톤이 쓴 《고르기아스》를 읽어보면 도움이 된다. 《아침놀》에서 니체는 관습의 도덕 이라는 개념을 거론하며 이를 비판한다. 《고르기아스》를 읽다보면 중간 즈음부터 칼리클레스가 등장하여 자연과 규범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책에서 칼리클레스는 규범 이 약자 패거리의 발명품이라고 주장하며, 규범이란 소수에 불과한 강자를 억압하는 도구로 작용한다고 말한다. 니체의 입장은 칼리클레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보인다. 니체 윤리학에서 지칭하는 주인 혹은 강자 라는 개념은 자본을 기반으로 하는 계급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오히려 그는 상인계급을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니체 미학의 고대적 발판. 음악 정신에서 태어난 비극의 탄생의 결정적 새로움은 한 편으로는 그리스 인들에게서 발견되는 "디오니소스적 현상"에 대한 이해이고, 다른 한 편으로는 "소크라테스주의"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었다. 이 책에서 무엇보다도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통한 "비극의 탄생"과 "소크라테스적인 것"을 통한 "비극의 죽음"에 니체의 마음이 쏠렸다. 니체에게 소크라테스는 기독교 종교의 예비자를 구현하고 있었으며, 그에 반해서 디오니소스는 "반(反)그리스도"이고 "예술가 신"이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선악을 넘어선" 염세주의와 비도덕적인 디오니소스 신의 "예술-종교"를 통해서, 간단하게 말해서 현존재가 예술적 현상으로서만 정당화되어서 나타나는 "예술가-형이상학"을 통해서 소크라테스에 의해서 구현된 현존재에 대한 도덕적 해석에 반대했다. 소크라테스는 아폴로적 명징성과 유쾌함, "지식의 빛"과 자아 인식의 인간적 구현이다. 그에 반해서 디오니소스는 "바쿠스적 소동과 춤"의 "어두운 심연", "사랑의 도취에서 생긴 자아망각"을 대표한다. 아폴로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니체 미학의 두 가지 근본적 범주이다. 헤라클레이토스적 의미에서 조화롭게 대립된 두 예술 충동의 "접합"의 결과물이 니체에게는 단지 아테네 비극의 탄생만이 아니라, 예술 전체의 탄생이다. 첫 작품에서도 비극적-디오니소스적 상태인 "미학적 상태"의 특징과 아폴로적인 것이 지닌 소크라테스주의와의 친근성은 이미 후기 니체의 저서에서 점점 강하게 드러나는 아폴로적인 것에 대한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우세를 인식하도록 만든다. 그 점과 연관된 디오니소스적 특성이 니체 미학이 지닌 독특한 새로움이다. 그것은 대립된 개념이고, 그것을 통해서 초기 니체는 반 고전주의적 미학의 전령이 되고 후기 니체는 영원 회귀의 반(反)기독교적 예술-종교의 선생님이 된다. 니체에게는 예술 신의 전형이 된 "아폴로적 디오니소스"는 디오니소스 자그레우스이다. 그의 정신으로부터 비극이 탄생했다. 그는 비극의 탄생 속에서만이 아니라 비극적 후기 철학의 핵심 인물이다. 거인족에 의해서 갈가리 찢긴 디오니소스가 아폴로에 의해서 다시 맞추어지는 이야기가 들어있는 오르페우스교의 자그레우스 신화는 니체에게는 비극의 신비적 가르침이다. 그는 비극적 신화 그 자체이다. 이런 토양 속에서만 니체의 미래 미학이 성장하고, 젊은 니체의 예술가-형이상학이 자라난 것은 아니다. 신들의 황혼을 쓰는 후기 니체, 디오니소스의 최후의 제자도 결국 이 토대 위에 다시 서게 된다. 니체는 클레멘스 알렉산드리아누스, 크로이처와 라살을 통해서 오르페우스교 자그레우스 신화를 알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아폴로적-디오니소스적"이라는 유명한 대립 쌍이 결코 니체가 만들어낸 말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한다. 니체는 크로이처, 라살, 미슐레 그리고 포이어바흐 등등의 생각을 자기 것으로 소화하고 발전시킴으로써 자신의 독자적 미학 이론을 만들어냈다. 음악의 디오니소스적 정신에서 태어난 "비극의 탄생"이라는 환영 속에서 결정적인 것은 예술가, 예술 수용자 그리고 예술 작품의 분리를 해체하는 것이다. 자연과 "인간이 화해한 축제를 기리는" 그리스 디오니소스 축제의 모습 속에는 생산자와 소비자 혹은 생산자와 생산품의 분리가 들어설 자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 음악극의 탄생 시기에 대한 중요한 근본 경험으로부터 예술의 현재와 미래를 바라보면서 니체는 하나의 발전을 미리 보게 된다. 그러한 발전은 전래의 "예술 작품의 예술", 즉 개인적 예술가들의 예술 작품으로부터 바그너가 생각한 의미에서의 "종합예술"인 "축제극"으로 사람들을 이끌고, 바그너에 대해서 점점 거리감을 갖게 되는 것과 동시에 최종적 단계에서 세상을 보편적 예술 작품으로 보는 미학적 관찰로 이끈다. 바이로이트의 "축제극"에서 진정한 종합 예술작품인 "세계극"이 생겨난다. 더 이상 예술 작품은 하나의 세계가 아니다, 오히려 세계가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관찰된다. "모든 것이 유희다", "모든 것이 예술이다". "정오", 아폴로적 디오니소스가 현현하는 순간에는 모든 것이 아름답고 선한 것으로 드러난다. 완벽하게 되고 미학적으로 정당화된 세계는 스스로를 잉태하는 예술작품으로 나타난다. 미학적 현현으로서의 영원 회귀. "영원 회귀"라는 생각은 차라투스트라의 기본 생각이고 니체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생각"이다. 영원한 회귀는 오직 순간으로부터만 이해될 수 있다. "목표 없는 시간"이라는 무시무시한 순간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삶의 본래의 임무를 경험한다. 영원한 회귀의 신적인 순간은 미학적, 즉 비극적-디오니소스적 상태의 순간이다. 이 상태는 현존재에 대한 긍정(아모르 파티)이 이루어지는 최상의 상태이고, 그 상태 속에서 허무주의, 인간과 모든 현존재의 과잉이 극복된다. 비극적-디오니소스적 상태는 가장 작고 보잘것없는 것의 회귀일지라도 영원 회귀에 대한 생각이 받아들여지는 상태이다. 최상의 세계 완성의 순간, 니체가 에머슨의 말을 빌어서 말하는 것처럼, 세상이 완벽하게 되는 "갑작스런 영원"의 신적 순간, 웃는 신 디오니소스가 춤을 추면서 우리 몸을 관통해 지나가는 디오니소스적 순간은 세상을 미학적 현상으로 영원히 정당화하는 순간이다. 이런 경험, "완벽한 정오"의 가장 고요한 시간에 일어나는 밝은 대낮의 "신비스러운 직관"으로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기본 생각이기도 한 자신의 철학하기의 원래 목적과 기본 경험을 분명하게 말한다. 미(美) 속에서 모순들은 억제된다. 그것은 서로 모순 되는 것을 지배하는 힘의 최고 표식이다. 갑작스런 영원 회귀의 순간인 미의 디오니소스적 순간 속에서 지나간 것과 미래의 것의 충동과 공존의 경험이 현재의 순간에서 이루어진다. 영원이 시간이 되고, 시간이 영원이 된다. 이 순간에 시간은 갑작스런 영원의 정오-순간으로 지양된다. 차라투스트라는 위버멘쉬의 지위에서부터 회귀를 가르친다. 위버멘쉬는 "위대한 회귀의 년도"에 세상의 심연을 보고 견디어 낸 순간에 자신을 넘어서고, 비극적-디오니소스적 상태에서 자아를 잊어버리는 초개인적이고 창조적인 인간이다. 위버멘쉬는 "영원의 샘물" 속으로 순간의 번갯불을 던지는 사람이다. 위버멘쉬는 그림자가 가장 짧아지는 순간에 영원 회귀의 "정오의 심연" 속으로 떨어지는 번갯불이다. 영원 회귀의 순간은 아폴로적 디오니소스, 즉 비도덕적인 예술가 신 디오니소스 자그레우스가 미학적으로 현현하는 순간이다. 니체의 예술가 복음을 따르자면 종교가 아니라, 예술이 삶의 "형이상학적 활동"이다. 예술, 가장 "커다란 삶의 자극"이 영원 회귀 철학의 기관이다. 니체의 영원 회귀의 기본 이론은 예술의 형이상학이고, 반(反)그리스도적 예술-종교이고, "예술가-형이상학"이다. 사람들이 "힘의지"라는 마술적 공식을 해석하고 평가하기 위해서 애를 쓴지도 이미 100년이 훨씬 더 지났다. 1901년 부분적으로는 오늘날에도 규범적인, 세기적인 니체 유고의 편집 본이 권력 의지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사람들은 이 책을 오랫동안 니체의 주요 저작으로 잘못 간주했다. 오래전에 표어가 되어버린 그리고 정치적으로 잘못 해석된 권력(쟁취) 의지 이론은 실제로는 결코 실행되지 못했던 니체의 계획을 표시한다. 그 계획은 니체의 미학 이론에도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쇼펜하우어와는 대조적으로 니체는 자유 의지를 "파국적인 철학자들의 고안물"로 비판하고 여러 번 "어떤 의지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되풀이해서 말한다. 다른 한 편으로 그는 권력 의지를 "세상의 정수", "존재의 가장 내밀한 본질"로 고찰한다. 그것은 권력 의지가 욕구가 없는 의지, 즉 원하는 자아가 없는 의지일 경우에만 서로 일치한다. 니체는 권력 의지라는 생각으로 분명 "나는 원한다."라는 문장에서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처럼 (힘이 넘치는 위버멘쉬)의 개인적 의지라는 생각을 뛰어넘는다. 이것은 특별히 차라투스트라의 첫 연설("세 가지 변신에 대해서")에서 분명해진다.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난 다음에, "너는 해야만 한다."는 명령이 낙타에게 내려진다. 정신이 사자가 되었을 때, 사자의 정신은 말한다. "나는 원한다."고. 하지만 궁극적으로 정신은 아이가 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정신의 세 번째이고 가장 심오한 변화이다, 그 변화 속에서 기독교적 도덕 "너는 해야만 한다."는 말 뿐만 아니라, 영웅적인 "나는 원한다."는 말도 아이의 순진함, 창조의 유희 속에서 "자기긍정"을 얻기 위해서 극복되어야만 한다. 위버멘쉬는 "금발의 야수"가 아니라, 사자의 정신과 "나는 원한다."는 것을 극복하는 인간이다, 그의 정신은 아이가 된다. 3번째 정신의 변화 후에 생기는 욕구 없는 의지를 지니고, 자아를 잊어버린 주체의 고대적 모범은 헤라클레이토스 단편 B52에 나오는 유희하는 아이다. 이 단편에서 삶의 유희 혹은 세계-시간, 즉 아이온Aion은 유희하는 아이로 묘사된다. 그리고 헤라클레이토스의 유희하는 아이는 정신의 세 번째 변화 후에 생기는 니체의 유희하는 아이의 선행 인물이다. 즉 그 아이는 위버멘쉬의 선행 인물인 것이다. 이 단편과 니체가 자신의 생각 속에 재해석한 것은 접합점으로 드러나고, 그 속에서 비극의 탄생을 쓴 초기 니체로부터 차라투스트라를 쓴 후기 니체로 이끌고 영원 회귀와 권력 의지라는 두 개의 어려운 생각을 결합시키는 것을 허용하는 여러 개의 결합선이 모여 있다. 니체가 헤라클레이토스를 해석한 것 속에 나타나는 세계-시간의 “위대한 년도”인 아이온은 영원 회귀가 신적 형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세계-아이인 아이온이 벌이는 세계-놀이가 지닌 이름이 권력 의지이다. 아이온의 목적 없는 유희 속에서는 욕구 없는 의지가 지배하며, 아이온은 권력 의지의 신적 의인화이다. 권력 의지와 영원 회귀는 동일한 아이온의 서로 다른 두 얼굴이다. 한 편으로는 아폴로적 디오니소스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는 제우스의 특징들을 지니고 있는 아이온이 니체의 비극적 후기 철학에서 예술로서의 영원 회귀와 권력 의지의 예술가-형이상학을 주관하는 신으로 합쳐진다. 미학 이론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사실, 니체가 고전 문헌 학자였다는 사실은 고대의 밑바닥에서부터 그가 신랄하게 비판한 현대의 꼭대기로 곧장 도약을 하게 된 한 가지 원인일 수도 있다. 이 같은 도약은 특히 니체의 미학적 성찰을 두드러지게 만들었다. 니체의 말을 따르면 우리는 그리스인들로부터 먼저 우리가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다. 비극의 탄생에서 그는 모든 예술이 내적으로 그리스인들에게 의존되어 있는 상태를 강조한다. 그는 예술과 관련된 분야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리스인들을 "우리 문하의 최고의 스승"으로 칭찬한다. 기독교 신은 죽었고 그와 함께 형이상학도 죽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형이상학 이전의 시대에서, 즉 비극적 그리스인들의 시대에 있던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으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니체의 철학적 고생물학은 고대 토양의 점진적 재획득, 무엇보다도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산재된 사유들을 발굴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니체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에서 그보다 앞서 살았던 헤겔처럼 단순하게 임시적인 것을 본 것이 아니라, 니체보다 나중에 살았던 하이데거처럼 모범적인 것을 보았다. 니체의 퇴행은 다름아니라 진보이다. 니체는 플라톤 이전-형이상학 이전의 철학으로 자신이 되돌아간 것을 미래 미학으로 도약을 하기 위한 도움닫기로 이해를 한다("미래의 시간은 나의 것이 될 것이다"). 그는 비극 책이 쓰이던 시기에 미래의 미학이 바그너의 작품 속에서 미리 구현된 것으로 보았다. 그와 반대로 그는 나중에 자신이 꿈꾸었던 비극의 탄생을 바그너 음악 정신에서 태어난 사산(死産)으로 인식을 해야만 했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신전을 발굴한 것과 헤라클레이토스의 비극적 철학의 재생을 위한 니체의 의지는 포스트모더니즘 미학 이론의 서곡으로 간주될 수 있다. 특별히 초기 형이상학 시기의 헤라클레이토스의 통찰력에 기반을 두고 있는 미학적 "세계-유희"로서의 "삶의 유희", 대립되는 것의 조화와 추한 것 속에도 존재하는 미의 편재성에 대해서 느낀 경험을 통해서 니체는 후기형이상학적 포스트모더니즘의 위대한 선조가 되었다. 그것으로써 니체가 동시적으로 보여주는 소크라테스 이전과 이후의 특징Nachvorsokratismus은 동시에 존재하는 모더니즘 이전과 이후의 특징Vorpostmodernismus이기도 하다. 생전에는 학계로부터 철저히 무시당했다. 종교계와 도덕주의자들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았으며 사회를 타락시킨다는 악의성 비방과 음해에 시달렸으나, 사후 유럽의 철학과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현재에는 19세기 최고의 철학자 가운데 한 명으로 간주된다. 니체의 사상은 그 전복적 성향으로 인해 자주 오해되고 비판받았다. 이런 니체의 성향은 온갖 권위에 불복했던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아서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니체에 대한 평은 극으로 갈릴 때가 많다. 그에 대한 평가는 종교인들에게서는 혹평으로, 포스트 모던 철학자들에게서는 호평으로 나타나는 편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가 현대 철학사(특히 포스트모더니즘)에 끼친 영향이 절대적이었다는 것이다. 니체는 프로이트나 마르크스 등과 함께 근대철학을 전복시킨 사상가 가운데 한 명이다. 니체는 가끔 나치즘과 반유대주의, 인종주의의 시초라고 불린다. 그러나 이는 나치정권과 니체의 여동생이 공동으로 니체의 사상을 왜곡한 결과 확산된 인식에 불과하다. 니체의 여동생 엘리자베스가 니체의 저서를 짜집기해서 나치정권에 유리하게 아부한 것이다. 이 때문에 후일 연구자들의 노고로 비평판 니체 전집 이 출간되었다. 엘리자베스는 흩어졌던 그의 저서들을 모아 일종의 보관소까지 열었으며, 미쳐 있던 니체에게 흰 사제복을 입혀 전시하기도 했다. 게다가 엘리자베스는 히틀러에게 니체의 위버멘쉬란 당신을 염두에 둔 것 이라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니체에게 붙어다니는 해괴한 이미지와는 별개로 실제 니체는 개인주의자였으며 반(反)국가주의자였다. 그러나,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가 1961년 《니체》를 출간한 이후 달리 평가되어 오늘날 니체에 대한 이상한 오해는 거의 해결되었다. 실제 니체는 자국인 독일을 매우 싫어했고 민족주의 또한 매우 혐오했다. 니체 본인은 자신의 저서에 대한 반응을 갈망했지만 허사였다. 그가 정신을 잃기 몇 년 전에서야 그의 사상이 수용되기 시작했다. 시인이자 철학자 인 니체는 철학이 이론에 그치지 않고 삶에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철학과 문체 그리고 삶의 양식을 통해서, 니체는 하이데거와 야스퍼스, 샤르트르 그리고 카뮈 같은 작가들, 프로이트와 융과 같은 심리학자, 슈펭글러와 슈타이너와 같은 비밀스런 종교의 스승, 벤, 게오르게, 지드, 헤세, 호프만슈탈, 말로, 하인리히 만과 토마스 만, 모르겐슈타인, 무질, 오닐, 릴케, 쇼, 예이츠 등등의 시인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20세기-예를 들면 조형 예술에서 "발견한 대상"(뒤샹)의 경우에 드러나는 "작품의 부재"와 같은 현상으로 특징지어지는-가 시작되기 직전에 니체는 현재의 대부분의 미학 이론보다 20세기 예술 정신을 생각으로 포착하고 드러내는 것에 더 많은 기여를 했다. 쉽게 오해할 수 있는 “위버멘쉬”와 “힘에의 의지”라는 핵심 개념과 도발적인 문장 때문에 보이믈러의 해석에 나타나는 것처럼 최초의 나치로 쉽게 오해받았던 니체가 특별히 동구권에서는 오랫동안 파시즘의 예비자와 "파시즘 미학의 선구자"로 오해되고 왜곡되고 모함을 당한 이후에, 그는 현재 그 곳에서, 특히 구동독 지역에서 점점 인기를 얻고 있다. 니체의 전 저작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편집한 콜리와 몬티나리의 대단한 작업은 오래전부터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현 시대에도 지속되는 지적 반향의 표시이다. "세계의 유희에 대한 미학적 기본 지각"을 지닌 니체의 포스트모더니즘 이전의 "예술가-형이상학"의 수용은 프랑스에서는 오늘날까지 중단되지 않은 채 유지되고 있다. 카우프만의 니체 연구 이후로 미국에서도 니체에 대한 연구는 강화되었다. 니체와 하이데거는 더불어 동아시아에 많이 알려졌다 《테오그니스 선집의 역사》, 1867.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원본에 대하여》, 1868~1869. 《호메로스와 고전 문헌학》, 1869. 《Analecta Laertiana》, 1870. 《Der florentinische Tractat über Homer und Hesiod》, 1870. 《그리스 음악극》, 1870. 《플라톤의 대화 연구 입문》 《그리스 비극 시대의 철학》1870 《비도덕적 의미의 진리와 거짓》 《소크라테스와 비극》, 1870 《비극의 탄생》, 1872. 《반시대적 고찰》, 1873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878 《아침놀》, 1881 《즐거운 지식》, 1882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883~1885 《선악의 저편》, 1886 《도덕의 계보학》, 1887 《바그너의 경우》, 《우상의 황혼》, 《안티크리스트》, 《이 사람을 보라》, 《디오니소스 송가》, 《니체 대 바그너》 1889년 1월 이탈리아 토리노의 길거리를 산책하던 중 갑작스럽게 쓰러졌다. 이후 간헐적으로 제정신을 회복했다는 말이 있지만, 사실상 죽기 전까지 정신적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니체()는 1888 ~ 89년 해가 바뀔 무렵 정신적 암흑에 빠졌다. 그의 저작들은 정본이라 할 만한 형식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부분적으로 예전 저작들은 여러 출판사에서 여러 판본으로 나와 있었으나, 두 저작은 — 니체가 잘못된 곳들을 지적한 가운데 — 인쇄작업이 진행 중이었고, 아울러 인쇄되지 않은 자료들이 다양한 마무리 수준 상태로 존재했다. 이 인쇄되지 않은 자료는 프란츠 오버베크()가 하인리히 쾨젤리츠()(페터 가스트())와 협의하여 처음으로 수집했다. 이들은 또한 니체의 최종 출판업자인 콘스탄틴 게오르크 나우만()과 함께 계속적인 출판작업을 두고 논의했다. 그리고 1890년 말에 처음으로 파라과이에서 귀향한 니체의 누이 엘리자베트 푀르스터-니체()가 가족을 대표하여 논의에 참견했다. 그간에 니체 저술의 판매고가 올랐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되겠다. 1892년 초에 처음으로 전집판에 대한 합의에 도달했다. 이 전집판은 나우만 출판사에서 간행되었으며, 쾨젤리츠가 이를 담당했다. 니체는 전체주의, 도덕주의, 국가주의, 종교, 실체론, 자본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등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니체는 사후 게오르크 헤겔과 함께 파시즘의 상징적 존재로 왜곡되고 악용되었다. 니체의 이름이 아돌프 히틀러 및 파시즘과 연결된 것은 그의 사후 그의 누이 엘리자베드 때문이었다. 엘리자베드는 광적인 국가주의자이며 반유대주의자였던 베른하르트 푀르스터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1889년 푀르스터가 자살한 뒤 엘리자베드는 니체를 푀르스터의 이미지로 개조하려 했다. 이무렵의 니체는 정신이 붕괴된 상태였기에 여동생의 멍청한 짓거리에 대처할 수 없었다. 엘리자베드는 니체의 작품들을 무자비하게 통제하고 파괴하려 하였다. 그러다가 히틀러가 니체의 저작에 관심을 보이고, 시중에서 니체의 사상이 유행하게 되자 탐욕에 사로잡혔던 그의 누이는 니체의 버려진 글들을 짜집기해서 〈힘에의 의지 Der Wille zur Macht〉(1901) 등을 출간했다. 엘리자베드는 히틀러의 열렬한 지지자이기도 했는데, 히틀러의 니체 추종 보다는 히틀러에 대한 그녀의 열렬한 지지 때문에 대중은 니체를 히틀러와 연결짓게 되었다. 1930년, 니체의 저작권 보호기간이 만료되었다. 니체는 전문적인 음악 교육을 받았다고 생각되지 않지만, 13세 무렵부터 20세 무렵에 걸쳐 가곡과 피아노곡을 작곡했다. 그 후 작곡하는 일은 없게 되었지만, 바그너와의 만남을 통해 자극을 받고, 바젤 시절에 몇 개의 곡을 남겼다. 작풍은 전기 낭만파적으로, 슈베르트나 슈만을 연상케 한다. 그가 후에 전혀 작곡을 하지 않게 된 것은 본업으로 바쁘게 보냈다고 하는 이유 외에, 자신의 작품인 《만프레드 명상곡》을 한스 폰 뷜로에게 혹평 받은 것이 이유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현재에 이르기까지 니체가 작곡가로서 인식되는 일은 전무하지만, 저명한 철학자가 작곡한 작품이라는 이유로 일부 연주가가 녹음하게 되었고, 서서히 그의 작곡도 하는 철학자 로서의 측면이 밝혀지고 있다. 그의 작품은 모두 가곡이나 피아노곡이지만, 2인 연탄곡 작품 중에는 《맨프레드 명상곡(Manfred-Meditation)》 교향시 《에르마나리히(Ermanarich)》 등, 오케스트라를 염두에 두고 쓰여졌을 것이라 여겨지는 작품도 있다. 또, 오페라의 스케치를 남기고 있는데, 2007년에 지크프리트 마트스가 그의 스케치를 골자로 한 오페라 《코지마(Cosima)》를 작곡했다. 자라투스트라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무신론 파시즘 나치 게오르크 헤겔 지그문트 프로이트 칼 융 반기독교주의 쇠렌 키르케고르 쇠렌 키르케고르와 프리드리히 니체 생태주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허무주의 냉소주의 무신론 실존 철학 쇼펜하우어 귀스타브 르 봉 신은 죽었다 들어라 위대한 인간의 조용한 외침을 (청하, 1982) 안티 크리스트 (이너북, 2005) 어떻게 살 것인가 (해누리기획, 2005) Friedrich Nietzsche - Selected Writings (Essential Thinkers) (Collector s Library, 2005) 니체의 숲으로 가다:니체의 사랑과 고뇌, 그리고 인간과 삶에 대한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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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 니체 문헌 보관소 니체 하우스 분류:1844년 태어남 분류:1900년 죽음 분류:독일의 철학자 분류:독일의 문헌학자 분류:독일의 소설가 분류:독일의 시인 분류:독일의 서양 고전 작곡가 분류:독일의 음악 평론가 분류:독일의 언론인 분류:독일의 대학 교수 분류:독일의 무신론자 분류:프로이센 육군 군인 분류:비판이론가 분류:문화 평론가 분류:종교 비평가 분류:낭만주의 작곡가 분류:형이상학자 분류:역사철학자 분류:종교철학자 분류:예술철학자 분류:심리철학자 분류:무신론 철학자 분류:실존주의자 분류:허무주의자 분류:반출생주의자 분류:인식론 학자 분류:결정론자 분류:무국적자 분류:작센안할트주 출신 분류:라이프치히 대학교 동문 분류:본 대학교 동문 분류:프로이센-프랑스 전쟁 관련자 분류:폐렴으로 죽은 사람 분류:한국어 전집이 출간된 저자 분류:19세기 독일 사람 분류:19세기 철학자 분류:19세기 시인
투아타라 (tuatara)는 옛도마뱀목에 속하는 파충류로 뉴질랜드에 2종이 분포한다. ‘투아타라’라는 이름은 마오리어로 ‘가시돋힌 등’이라는 뜻을 가졌다. 2종으로 이루어져 있다. 성체는 길이 24cm, 몸무게 500g정도까지 자란다. 다른 파충류들과 구분되는 특징으로는 치아가 턱뼈에 유착되어 있으며, 낮은 온도(16-21℃)에서 잘 견디고, 오히려 27℃이상의 온도에서는 살 수가 없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번식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기까지 적어도 10년 이상 걸리며, 4년에 한번씩 알을 낳기 때문에 번식이 더디다. 이들의 수명은 매우 길어서 보통 60년정도이고, 심지어 100년을 넘게 살기도 하는데, 뉴질랜드 자연박물관의 투아타라가 111살의 나이로 새끼를 낳은 일도 있다. 개체수가 적고, 서식지가 제한되어 있어 1895년부터 국제적으로 멸종위기종(endangered species)으로 지정되어 보호하고 있다. Sphenodon punctatus (Gray, 1842) (보유명) Sphenodon guntheri Buller, 1877 † Sphenodon diversum Colenso, 1885 투아타라 - Mount Bruce 국제 야생동물 센터 분류:훼두목 분류:살아있는 화석 분류:뉴질랜드의 고유종 동물 분류:뉴질랜드의 파충류 분류:1842년 기재된 동물